악의 교전 1
기시 유스케 지음, 한성례 옮김 / 현대문학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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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에서 제공받은 도서입니다.

 

검은 집과 함께 기시 유스케의 대표작으로 알려진 악의 교전14년 만에 개정판으로 다시 출간됐습니다. 서평을 쓰지 않던 시절에 읽어서 자세한 줄거리는 생각나지 않았지만, 기시 유스케 특유의 공포 코드가 학교라는 무대에서 제대로 폭발했다는 인상만큼은 확실히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 제목 속 교전이 전쟁을 뜻하는 交戰이라고 여겼다가 다 읽은 뒤에야 법칙, 경전, 규범을 뜻하는 敎典이란 걸 알곤 새삼 서늘함을 느꼈던 일도 생각납니다.

 

봉쇄된 학교 안에서 한 사이코패스 교사에 의해 일어난 무차별 살인이란 카피처럼 악의 교전은 절대 악()이자 최악의 사이코패스인 영어교사 하스미 세이지가 어떻게 학교를 지배하고 조종하다가 대량 살인이라는 극단적인 사태를 벌이게 됐는지를 1,000페이지에 가까운 방대한 분량을 통해 그려낸 작품입니다. 외형상으론 대량 살인극을 그린 범죄 스릴러지만, ‘일본 모던 호러의 대표 작가로 불리는 기시 유스케만의 독특한 코드들이 작품 전반에 진하게 녹아있어서 호러물의 면모도 함께 지니고 있습니다.

 


선한 웃음, 재미있는 수업, 강한 책임감, 솔선수범하는 자세 등 하스미는 학교 운영진과 동료 교사는 물론 학생들에게도 인기 최고인 영어교사입니다. 하지만 그는 타고난 사이코패스로 인간적인 감정이 결여돼있으며 공감 능력이라곤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인물입니다. 어려서부터 태연히 살상을 저질러왔지만 그는 가짜 감정가짜 공감력을 무기삼아 모두에게 호감 받는 인물로 위장할 수 있었고, 누구에게도 의심받지 않고 현재에 이를 수 있었습니다. 방해가 되는 인물은 가차 없이 제거하고 탐이 나는 인물은 어떻게든 정복하고 소유하지만, 필요한 경우엔 하찮은 자에게라도 한없는 굴종과 양보를 드러내며 자신의 입지를 다집니다. 그리고 학교는 그런 하스미의 본색을 드러내기에 더없이 좋은 무대입니다.

 

어제보다 오늘, 오늘보다 내일, 이 아이는 조금씩 나의 창조물에 가까워진다. 어쩌면 이런 감각이야말로 교사의 보람일지도 모른다. 그래, 교육이란 결국 세뇌의 일종에 지나지 않는다.” (2, p24)

 

흔히 학교를 안전한 곳이라고 여기지만 실은 그 안에선 교사와 학생을 불문하고 집단 따돌림, 폭력, 절도, 성추행 등 갖가지 범죄가 만연하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그리고 지극히 폐쇄적인데다 교사와 학생이라는 두 계층만으로 이뤄진 권력 구도 역시 언제라도 폭발할 수 있는 시한폭탄 같은 위험요소이기도 합니다. 아이러니 한 일이지만, 이런 불안정함 때문에 학교라는 공간은 지배와 조종에서 쾌감을 느끼는 사이코패스에겐 최적의 무대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애초 교직과는 거리가 먼 금융 엘리트였던 하스미가 우연히 학교의 맛을 알고 그곳에 몸담게 된 건 그에게 희생당한 자들에게는 엄청난 불운이었던 것입니다. 책의 첫머리에 학교라는 고인 늪에 흘러든 상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라고 밝힌 기시 유스케의 소개글이 다 읽은 뒤에도 기억에 남은 건 사이코패스의 대량 살인극의 무대로서 학교 이상의 공간이 없겠다는, 씁쓸하면서도 현실적인 깨달음 때문이었습니다.

 

1권에선 학교를 지배하고 조종하는 하스미의 이중적인 모습과 무자비한 살인을 저질러온 그의 과거, 그리고 그를 의심하는 일부 학생들의 동요가 그려지고, 2권에선 위기를 감지한 하스미가 자신의 실체를 눈치 챈 일부 학생들을 제거하다가 결국 한밤중에 완벽하게 외부와 통제된 학교에서 대량 살인을 저지르는 참극을 그립니다. 영화 배틀 로열을 연상시키는 참혹한 살인 장면은 때론 거북함과 구토감을 유발하기도 하지만, 독자는 극도로 담담하고 차가운 문장들을 통해 악의 실체를 그려내려는 기시 유스케의 의도에 말려들어 그 장면들에 빠져들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과연 이 참극이 어떻게 막을 내릴지, 살아남는 자가 있긴 있을지, 하스미는 제대로 단죄 받을지 궁금증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절대 악의 이야기를 읽는 건 무척 불편하면서도 호기심 혹은 관음증에 가까운 흥미로운 일이기도 합니다. 특히 제정신이 아닌 엉망진창 사이코패스가 아니라 정확히 자신의 목적을 향해 폭주하는 진정한 사이코패스는 독자의 이중적인 감정을 더더욱 자극하는 설정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극단적인 평가가 나올 수도 있는 작품이지만 기시 유스케가 그린 절대 악의 이야기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꼭 한 번 도전해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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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아래
야쿠마루 가쿠 지음, 양수현 옮김 / 북홀릭(bookholic)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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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행 후 살해당한 7세 여아의 사체가 발견되자 히다카 경찰서 소속 나가세 카즈키는 24년 전 똑같은 방식으로 살해당한 여동생 에미를 떠올리며 분노에 사로잡힙니다. 한편 사카도 지역의 공원에서 키무라라는 남자의 잘린 목이 발견되고, 이내 그가 과거 어린 소녀를 성폭행하고 살해했던 전과자임이 밝혀집니다. 그런데 얼마 후 자신을 상송(프랑스에서 6대에 걸쳐 사형집행인을 맡았던 가문)이라 자칭하는 인물이 범행성명을 통해 키무라를 죽인 건 자신이며, “앞으로 아이들이 살해당하는 범죄가 일어나면 예전에 아이를 죽이고 상해를 입힌 인간을 산 제물로 삼겠다.”라는 살인예고장을 발표합니다. 상송을 지지하는 여론이 급등하는 가운데, 여아 살인사건을 수사하던 나가세는 갑자기 상송을 수사하는 사카도 수사본부로 전출됩니다.

 


어둠 아래는 일본에서 2006년에 발표된 작품으로, 소년범죄를 다룬 천사의 나이프로 데뷔한 야쿠마루 가쿠가 두 번째로 내놓은 극장형 범죄미스터리이자 사적 제재 혹은 사형(私刑)을 소재로 한 사회파 미스터리입니다. 개인적으로 야쿠마루 가쿠의 사회파 미스터리를 무척 좋아해서 한국에 출간된 그의 작품은 거의 다 읽었는데, 아껴 읽는다고 미루다가 거의 방치 수준에 이르고 만 어둠 아래는 초기작임에도 불구하고 최근작들보다 훨씬 더 날것 같은 생생함이 배어있어서 천사의 나이프못잖은 충격과 여운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여동생을 참혹하게 잃은 뒤 경찰이 됐지만 여전히 분노와 증오심에 사로잡혀있는 30대 형사 나가세, 너무 오랫동안 잔혹한 범죄를 수사해온 나머지 심신이 피폐해진 베테랑 형사 무라카미, 그리고 자신을 사형집행인이라 자처하며 소녀살해범들을 응징하겠다고 발표한 남자등 세 인물이 번갈아 화자로 등장합니다.

 

그중에서도 범죄 피해자의 유족이자 지금은 경찰이 된 나가세는 독자에게 동정과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물론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 같은 불안감을 내뿜습니다. 범인이나 전과자를 대할 때면 자기도 모르게 분노의 게이지가 극에 달하는가 하면, 권총을 손에 쥘 때면 지금껏 쌓여온 증오가 해방되는 쾌감과, 인간을 죽이는 것을 상상하며 방아쇠를 당기는 자신에 대한 공포를 동시에 느끼는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가 애초 몸담고 있던 소녀살해범 수사본부에서 소녀살해범을 살해하는 상송 수사본부로 자리를 옮기게 되면서 이야기의 긴장감은 배가됩니다. 만일 여동생을 살해한 자를 상송이 죽여준다면 오빠로서 기뻐해야 할지, 경찰로서 자책감을 느껴야 될지 혼란에 빠진 나가세를 지켜보는 건 아무리 소설이라 해도 독자에겐 가혹한 일일 수밖에 없습니다.

 

남자혹은 상송으로 불리는 범인의 동기와 살해규칙은 무척 독특합니다. 5살 딸 사야에게 안전한 세상을 만들어주고 싶은 그는 범죄를 없애기 위해서는 공포밖에 없다. 범죄를 저지를지도 모르는 사람들의 마음에 바닥 모를 공포를 심어 주는 것이다.”라며, 어린 소녀가 성범죄로 희생될 때마다 자신의 살인리스트에 올라있는 자들을 죽일 계획을 세웁니다. 그리고 그 계획을 언론과 경찰에 알림으로써 큰 충격을 몰고 옵니다. 문제는 경찰의 수사가 지지부진한 가운데 여론이 상송을 지지하는 쪽으로 급격히 기운 점, 심지어 피해자가 어린 소녀들이다 보니 상송의 살인은 범행이 아니라 정당한 응징으로 평가받기 시작한 점입니다.

 

사적 제재 혹은 사형(私刑)을 소재로 한 사회파 미스터리는 차고 넘칠 만큼 다양하지만, 야쿠마루 가쿠의 작품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진정성과 공감력, 그리고 생생한 캐릭터와 예측하기 힘든 반전을 통해 매번 강한 여운과 깊은 인상을 남겨서 여느 사회파 미스터리와도 차별되는 매력을 발산합니다. ‘어둠 아래는 야쿠마루 가쿠의 초기작이지만 그의 매력을 십분 만끽할 수 있는 작품으로, 그의 팬이든 아니든 사적 제재 혹은 사형(私刑)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꼭 읽어볼 만한 명품이란 생각입니다.

이제 야쿠마루 가쿠의 작품 가운데 못 읽은 건 허몽’(일본 2008) 한 편뿐인데, ‘어둠 아래를 읽고 나니 좀더 아껴둬야 할지 당장이라도 꺼내 읽어야 할지 헷갈릴 따름입니다. 그 전에 그의 신간 소식이 들려온다면 더없이 반가운 일이겠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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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백의 길
메도루마 슌 지음, 조정민 옮김 / 모요사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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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 출신의 '행동하는 작가' 메도루마 슌의 소설집 혼백의 길은 태평양전쟁 막바지인 19454월에 벌어진 오키나와 전투가 80년이 흐른 현재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뇌리에 남긴 비극과 트라우마를 그린 작품입니다. 나라와 시대를 불문하고 전쟁의 참상과 비극을 그린 문학작품에 관심이 있다 보니 오키나와 전쟁을 둘러싼 다섯 가지 이야기라는 띠지 카피에 저절로 눈길이 끌렸고, 그동안 어설프게만 알고 있던 그 전투의 이면을 들여다보고 싶어졌습니다.

 

지금은 유명 여행지로만 알려져 있지만 오키나와의 역사는 눈대중으로만 훑어봐도 안타까운 마음이 들 정도로 참혹합니다. 류큐국이란 이름으로 존재하다가 일본 영토에 강제로 병합됐지만 본토 사람들에게 멸시와 냉대를 받았고, 이 작품의 한국어판 서문대로라면 “1920~30년대 일본 본토에서는 식당 앞에 '조선인, 류큐인 사절'이라는 벽보가 붙기 일쑤였습니다. 패전의 기운이 명확해진 1945년에 벌어진 오키나와 전투는 연합군과 일본군의 희생도 컸지만 오키나와 주민 네 명 중 한 명의 목숨을 앗아간 엄청난 참극으로 기록됐습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현재의 오키나와는 본섬의 20%를 주일미군의 기지에 점령당한 채 과거의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수록된 다섯 편 가운데 대부분은 이제 80~90대에 이른, 즉 당시 10대 소년소녀였던 인물들이 주인공입니다. 80년이 흐른 뒤에도 전쟁이 남긴 악몽과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한 노년의 주인공들이 우연 또는 필연처럼 과거와 조우하곤 잊고 싶지만 결코 잊히지 않을 기억을 떠올리는 이야기들이 전개됩니다.

공습을 당해 후퇴하던 도중 중상을 입은 채 죽여 줘라며 매달리는 한 여성의 간청을 외면하지 못해 칼을 빼들었던 남자(‘혼백의 길’), 전쟁터에서 살아남기 위해 끔찍한 짓을 저질렀던 일들을 회상하는 남자들(‘이슬’), 연합군과 일본군 사이에서 스파이로 오인당해 살해된 아버지를 둔 남자가 40년 만에 아버지 살해범과 마주친 이야기(‘() 뱀장어’), 미군기지 건설현장을 착잡하게 바라보던 80대 여성이 전쟁의 와중에 남동생을 잃었던 그날을 떠올리는 이야기(‘버들붕어’), 15살에 전쟁에 동원됐다가 이웃남자를 스파이로 고발한 일 때문에 평생을 죄책감에 사로잡혀 살아온 90살 남자(‘척후’) 등 애초 전쟁 따위에 휘말릴 이유가 없었던 평범한 사람들의 잔혹한 운명을 그린 이야기들이 실려 있습니다.

 

전쟁이 남긴 상흔은 예외 없이 비슷한 형태를 지니고 있습니다. 읽는 내내 한국전쟁과 제주 4.3항쟁을 다룬 우리 소설과 2차 대전을 다룬 외국소설이 자연스레 생각이 났는데, 그 작품들의 공통점이라면 전쟁의 비극은 실제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터보다 겁에 질려 숨거나 도망쳐야만 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터전에서 더 잔인하게 벌어진다는 사실입니다. ‘혼백의 길역시 같은 궤도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데, “오키나와 전쟁을 둘러싼 다섯 가지 이야기가 조금 더 특별하게 읽힌 건 80년이 지난 지금도 미군 기지에게 점령당한 채 과거의 상흔을 반강제로 되새김질해야만 하는 오키나와 사람들의 역설적인 처지 때문입니다. 작가 메도루마 슌은 미군기지 건설현장에서 해상 시위를 벌일 정도로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작가입니다. 그런 그가 자신이 나고 자란 오키나와의 비극을 정면으로 그려낸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며 출판사 소개글대로 오키나와 안팎의 폭력을 겨냥한 결연한 문학적 응전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딱히 오키나와의 역사에 관심이 없더라도 전쟁의 참상과 비극을 진지하게 마주하고 싶은 독자라면 메도루마 슌의 혼백의 길을 읽어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더불어 한국전쟁을 무대로 한 비슷한 서사를 맛보고 싶다면 (이제는 고전이라고 해도 괜찮을) 임철우의 아버지의 땅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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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 나라
오카자키 다쿠마 지음, 구수영 옮김 / 내친구의서재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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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에서 제공받은 도서입니다.

 

2063, ‘일본의 애거서 크리스티로 불리던 미스터리의 여왕 무로미 교코가 사망한 후 조카인 는 저작권을 물려받아 그녀의 유고인 거울 나라의 출간을 준비합니다. 그런데 교코를 오랫동안 담당했던 편집자가 뜻밖의 의문을 제기하면서 는 혼란에 빠집니다. 그에 따르면 거울 나라원고에 삭제된 부분이 있는 것 같다는 것입니다.

거울 나라40년 전인 2020년대를 배경으로 한 교코의 자전적 소설로 일러두기에 따르면 논픽션에 가까운, 그러니까 실존인물들이 등장한 소설입니다. 외모 때문에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던 세 사람을 비롯하여 모두 네 명의 인물이 등장하는 가운데, 자신들의 삶을 일그러뜨린 과거사를 추적하는 미스터리가 펼쳐집니다.

 


형식, 소재, 캐릭터 등 여러 면에서 독특함을 풍기는 미스터리입니다. 또한 애증, 죄책감, 자기혐오, 이기심 등 사람과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갖가지 어둡고 불온한 감정들을 집요하게 그려낸 안타까운 비극 서사이기도 합니다. 흥미로운 건 미스터리와 비극의 중심에 루키즘(외모지상주의) 또는 외모와 관련된 질병이 자리 잡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야기의 본체라 할 수 있는 액자소설 거울 나라를 이끌어가는 건 네 명의 남녀입니다. 아이돌로 데뷔할 정도로 외모가 빼어나지만 신체이형장애(평균보다 외모가 뛰어난데도 불구하고 특정 부위에 대한 불만족 또는 혐오감이 지나친 나머지 자신을 추하거나 못났다고 여기며 극심한 콤플렉스에 빠지는 정신적 질병)에 시달리는 웹 미디어 편집자 히비키, 어린 시절 화재로 얼굴에 화상을 입었지만 지금은 카메라 필터로 상처를 가린 채 라이브 스트리머로 활동하고 있는 사토네, 안면인식장애 때문에 연인과 직장을 잃은 적 있는 셰프 이오리, 그리고 히비키의 직장선배이자 그녀에게 특별한 관심을 품고 있는 다쿠미가 그들입니다.

15년 전, 히비키가 선물한 향초가 일으킨 화재 때문에 사토네는 얼굴에 화상을 입었고, 그로 인해 히비키는 오랜 시간 죄책감에 사로잡힌 채 살아왔습니다. 극적으로 재회한 두 사람은 그 당시 잠시 이웃에 머물렀던 동갑내기 소년 이오리와도 우연히 만나는데, 이들은 15년 전의 화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던 중 그것이 히비키가 선물한 향초 탓이 아닐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떠올리게 됩니다. 히비키의 직장선배 다쿠미까지 가세하여 조사에 나선 가운데 네 사람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15년 전의 진실과 마주칩니다.

 

이야기의 중심축은 네 사람에 의한 진상 추적 미스터리입니다. 하지만 미스터리 못잖게 눈길을 끄는 건 신체이형장애, 얼굴에 입은 화상, 안면인식장애 등 형태는 달라도 하나같이 외모와 관련하여 고통스러운 삶을 살고 있는 세 인물 사이의 미묘한 관계와 감정들입니다. 15년 전부터 서로를 알아온 히비키와 사토네와 이오리는 죄책감, 애증, 의심, 고마움 등 엇갈린 감정을 품으면서도 동시에 아슬아슬한 삼각관계를 이루기도 합니다. 거기에 히비키에게 특별한 관심을 품은 다쿠미까지 끼어들면서 이야기는 미스터리와 비극 외에 치정의 분위기까지 풍깁니다. 그리고 이리저리 뒤섞였던 서사들은 미스터리의 진실이 밝혀지는 순간 일제히 한 방향으로 치달으며 독자의 뒤통수를 강하게 내리칩니다.

 

현재의 는 교정지를 거듭 읽으면서도 편집자가 주장한 삭제된 내용을 좀처럼 찾아내지 못하는데, 독자 역시 삭제된 내용이 과연 있긴 있는 건지, 만약 있다면 미스터리를 뒤집는 반전일지 혹은 네 사람의 운명에 관한 내용일지 궁금증을 품을 수밖에 없습니다. 막판에 뜻밖의 방식으로 공개된 삭제된 내용은 미스터리의 여왕 무로미 교코가 유고 거울 나라를 통해 감추려고 했던 또는 드러내려고 했던 진실을 찬찬히 설명하는데, 이 대목에 이르러서야 독자는 교코와 소설 속 인물들과 현재의 가 품고 있는 복잡미묘한 감정들을 제대로 들여다볼 수 있게 됩니다.

 

거울 나라는 치밀하고 정교한 미스터리라기보다는 외모로 인해 고통스러운 삶을 살던 인물들이 어떻게든 각자의 상처에서 벗어나려 발버둥치는 안타까운 비극의 기운이 더 강한 작품입니다. 정통 미스터리를 기대한 독자에겐 다소 느슨하게 읽힐 수도 있지만, 워낙 감정선들이 세고 독한데다 외모지상주의에 관한 사회파 미스터리의 분위기도 만끽할 수 있어서 신선한 책읽기가 될 수 있을 거란 생각입니다.

오카자키 다쿠마의 대표작인 커피점 탈레랑의 사건 수첩시리즈는 라이트한 일상 미스터리 같아서 읽을 생각을 안 했는데, ‘거울 나라를 읽고 나니 기회가 되면 한 편쯤은 찾아보고 싶다는 욕심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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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더 크라임 이판사판
덴도 아라타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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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중년남성이 알몸의 사체로 발견됩니다. 그의 몸에선 눈에는 눈이라는 범인의 메시지가 발견되고, 이내 그가 3년 전 집단 성폭행 사건의 범인 중 한 명의 아버지로 밝혀지면서 경찰은 피해 여대생과 그녀의 가족을 주시합니다. 당시 경찰 고위직과 정치권 인사가 압력을 행사한 끝에 검찰은 기소를 포기했고 범인들은 유유히 법망을 벗어났지만 피해자와 그 가족은 사죄 한 번 받지 못한 채 지옥과도 같은 삶을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관할서 베테랑 형사 구라오카는 본청 수사1과의 루키 시바 린리와 파트너가 되어 수사에 나서지만, 3년이나 지나 복수에 나선 건지, 또 성폭행범이 아니라 그의 아버지를 살해한 이유는 무엇인지 알 수 없어 답답할 따름입니다.

 


그것은 여자라는 성을 무의식중에 낮춰보기 때문이겠죠. 성범죄라고 해도, 겨우 그것쯤이야, 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죠.” (p283)

 

젠더 크라임이라는 제목과 표지 속 ‘Stop killing women’이라는 메시지에서 짐작할 수 있듯 이 작품은 갖가지 여성 대상 범죄의 실상을 폭로하고 그런 범죄를 양산하고 비호하는 사회적 토양을 정면으로 비판합니다. 3년 전 성범죄에 대한 복수로 보이는 살인사건을 추적하는 미스터리로 출발하지만 딥 페이크, 아동 포르노, 가정폭력, 데이트폭력, 성희롱, 강간 등 여성을 먹잇감이나 장난감으로 여기는 추악한 범죄들이 메인 사건 못잖은 비중으로 다뤄지고, “성에 관한 편향된 생각이나 무자각적인 차별의식, 예로부터 내려온 왜곡된 성문화가 모든 여성 상대 범죄의 근원이라는 점을 돌직구처럼 강조하고 있어서 단순한 사회파 미스터리 이상의 울림을 품고 있습니다.

 

경찰은 성범죄를 수사하는 주체이기도 하지만, 남성 중심으로 돌아가는 조직이다 보니 의도적이든 아니든 성차별이 만연한 곳이기도 합니다. 주인공인 베테랑 형사 구라오카는 그런 이율배반적인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인데, 성범죄에 관한 한 누구보다 단호한 입장을 취하면서도 정작 그 자신이 무의식적으로 가부장적이고 성차별적 언행을 저지른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합니다. 그런 그가 요즘 젊은이같으면서도 바른생활 남자처럼 올바른 말만 하는 파트너 시바와 함께 수사를 진행하면서 젠더와 차별의 문제에 관해 크고 작은 깨달음을 얻는 모습은 단순히 교과서적인 계몽과는 차원이 다른, 의미 있는 경종으로 읽힙니다.

 

이 작품에서 또 한 가지 중요한 주제로 다뤄지는 건 속죄입니다. 애당초 죄를 짓는 것 자체가 잘못이지만 어떤 이유로든 죄를 지었다면 벌을 받고 속죄하는 것이 피해자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임을 덴도 아라타는 거듭 강조합니다. “한 사람의 인생을 망치고 영혼을 죽이는 것이나 다름없는 잔인한 범죄를 저지르고도 속죄를 거부했던 가해자들과 그 가족은 중년남성이 살해된 직후 뒤늦게 공포에 사로잡히면서 속죄에 관해 서로 다른 입장을 보이기 시작하고, 그렇게 촉발된 가해자들 간의 갈등은 또 다른 살인사건의 단초가 됩니다. 그 대목부터 덴도 아라타는 다소 노골적으로 주제의식을 드러내는데, 살짝 작위적인 느낌이 들긴 해도 거부감이 들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젠더 크라임이라는 제목은 한편으론 호기심을 자아내면서도, 또 한편으론 혹시나 이 작품이 젠더 문제에 관한 계몽 소설이 아닐까, 라는 의구심을 품게 만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덴도 아라타의 작품을 읽어본 독자라면 그가 결코 둘 중 어느 쪽으로도 치우지지 않을 거란 걸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젠더 크라임은 미스터리에도 충실했고, 젠더와 차별의 문제에도 진심으로 접근한 작품입니다. 그래선지 젠더의 문제에 관한 한 옛날보다 퇴보한 듯한 이즈음의 한국에서 이 작품이 널리 읽히면 좋겠다는 생각을 여러 번 해봤습니다. 북스피어 삼송 김사장님의 편집후기의 마지막 문장을 인용하며 서평을 마치겠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동의 없이 타인의 몸을 만지지 말고, 성적인 말로 상대를 불편하게 하지 말자. 그리고, 죽이지 말자.”

 

사족으로...

원래는 이 작품과 맥이 닿아있는 영원의 아이’(1999)를 먼저 읽으려 했는데, 삼송 김사장님께서는 젠더 크라임과 자신의 편집후기를 먼저 읽은 뒤 영원의 아이를 읽어보기를 권하셨습니다. 무거운 마음으로 읽어야 하는 작품이라 연이어 읽긴 부담스럽지만, 조만간 일본 문단 최대의 사건이라고까지 불렸던 영원의 아이를 꼭 읽어볼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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