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트] 긴나미 상점가의 사건 노트 : 형제 편 + 자매 편 - 전2권 긴나미 상점가의 사건 노트
이노우에 마기 지음, 김은모 옮김 / 알라딘 이벤트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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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에서 제공받은 도서입니다.

 

한때 사찰 마을로 번성했지만, 지금은 쇠락 중인 소도시 긴나미. 그곳엔 오래된 철골 아케이드 아래로 양념과 닭꼬치구이의 구수한 냄새가 풍기는 상점가가 있습니다. ‘긴나미 상점가의 사건 노트는 이 상점가를 무대로 벌어진 세 개의 사건을 다룬 작품인데, 특이하게도 같은 사건, 두 미스터리 해결사, 두 개의 추리, 두 개의 진실을 표방하며 형제편’(은행나무)자매편’(북스피어)으로 나뉘어 출간됐습니다.

 


똑같은 사건을 서로 다른 관점에서 파헤치는 주인공은 고구레 가의 4형제와 우치야마 가의 3자매입니다. 20대인 맏이들보다는 중고생인 동생들이 탐정 역할을 맡고 있어서 좌충우돌 소년소녀 탐정단같은 인상을 풍기는데, 이들은 갖가지 이유 - 사건을 목격한 탓에, 범인으로 의심받은 탓에, 가족이 사건에 휘말린 탓에 본의 아니게 진실 찾기에 나서게 됩니다. 그리고 4형제와 3자매는 전혀 다른 경로로 조사를 벌인 끝에 하나의 사건 안에 숨은 두 개의 진실을 찾아냅니다.

 

닭꼬치구이를 먹으며 운전하다가 꼬치가 목에 꽂혀 죽은 남자, 학생이 만든 악기가 미술준비실에서 무참하게 파손된 가운데 누군가 꼬치를 이용하여 현장에 남긴 우물 정()의 비밀, 불황에 빠진 상점가를 무대로 수상한 외지인이 벌인 미스터리 미식 투어의 실체 등 4형제와 3자매가 마주한 사건은 언뜻 평범한 일상 미스터리의 소재로 보이지만, 추리 과정이나 막판에 드러난 진상은 결코 가볍지도, 단순하지도 않아서 소년소녀가 주인공인 안락한 코지 미스터리?”라는 선입견은 금세 무색해지고 맙니다.

 

이제부터 당신이 읽을 이야기는 어떤 사건의 한 측면에 지나지 않습니다.”

 

4형제와 3자매가 같은 사건에서 완전히 다른 진상을 파악한다고 해서 어느 한쪽이 잘못된 결론에 이른다는 뜻은 아닙니다. 말하자면 세 개의 사건은 ‘2단 엔딩을 품고 있어서, 어느 한쪽이 첫 번째 엔딩을 이끌어낸다면, 나머지 한쪽은 그 뒤에 숨은 두 번째 엔딩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이 작품을 가장 재미있게 읽는 방법은 두 권을 번갈아 읽는 것인데, 가령 형제편의 첫 사건을 읽은 뒤 같은 사건을 다룬 자매편의 챕터를 읽고, 이어서 두 번째 사건도 같은 방법으로 읽는 것입니다.

추리의 경로와 방법이 다르다고 해도 결국 같은 사건이니만큼 비슷한 이야기가 전개되지 않을까, 우려될 수도 있지만, 실제로는 완전히 새로운 읽기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4형제와 3자매의 추리를 모두 읽어야 사건 전체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형제편자매편가운데 어느 쪽을 먼저 읽어도 상관없지만, 개인적으론 형제편을 먼저 읽을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사건과 추리, 4형제와 3자매의 캐릭터, 막판에 밝혀지는 뜻밖의 진상 등 흥미로운 요소들로 가득해서 마지막까지 특별한 재미를 만끽할 수 있는 작품인데, 평점에서 별 1개를 뺀 이유는 미스터리 구도 및 인물들의 관계를 다소 과하게 꼬아놓았다는 인상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두세 번만 꼬았어도 충분한 상황을 거듭 복잡하게 설정한 탓에 정작 몰입이 필요한 지점에서 방해받는 느낌을 받았다고 할까요? 이노우에 마기의 작품 가운데 유일하게 읽은 그 가능성은 이미 떠올렸다에서도 비슷한 인상을 받은 걸 보면 아마 작가의 고유한 개성이 아닐까, 싶습니다.

 

긴나미 상점가의 사건 노트는 그 형식미만으로도 충분히 매력적인 작품입니다. 두 권의 책을 나란히 놓고 한 챕터씩 번갈아 읽는 신기한 경험은 물론이거니와 같은 사건을 조사하는 4형제와 3자매가 어느 장면에서 서로 마주칠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던 추리가 어떤 계기로 접점을 가질지, 두 개의 진상은 어떻게 연결될지 등 마지막 장까지 독자의 눈길을 사로잡기 때문입니다. 긴나미 상점가를 무대로 한 4형제와 3자매의 활약을 다시 한 번 맛볼 수 있을지 알 순 없지만, 만약 후속편이 나온다면 꼭 찾아 읽을 생각입니다. 왠지 작가가 더 할 이야기가 있는 듯한 묘한 뉘앙스를 여기저기 남겨놓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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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의 흔들림 - 영혼을 담은 붓글씨로 마음을 전달하는 필경사
미우라 시온 지음, 임희선 옮김 / 하빌리스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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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즈키 지카라는 오랜 역사와 진심 어린 서비스로 사랑받는 미카즈키 호텔에 근무하는 호텔리어입니다. 단골 고객의 연회를 준비하던 쓰즈키는 초대장 봉투에 붓글씨로 주소를 적어주는 서예가 도다를 찾아갔다가 경박하고 괴짜 같은 그의 언행에 깜짝 놀랍니다. 서예가라기보다는 꽃미남 바람둥이 혹은 거리낌 없이 막말을 내뱉는 무례한 사람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우발적으로 맡게 된 편지 대필 작업 덕분에 조금씩 서로를 알아가기 시작합니다. 쓰즈키는 도다의 수려한 붓놀림과 생생한 감정이 느껴지는 글씨에 반하고, 도다는 모두에게 호감을 사는 쓰즈키의 타고난 공감력과 이해심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우정은 도다의 갑작스럽고도 일방적인 통보 때문에 파열될 위기에 처합니다.

 


먹의 흔들림에 관심을 가진 이유는 두 가지인데, 하나는 배를 엮다의 작가 미우라 시온의 작품이란 점, 또 하나는 소재가 고풍스럽고 예스러운 정서가 깃든 서예라는 점 때문입니다. ‘배를 엮다는 이제 더는 사람들이 잘 찾지 않는 사전을 제작하는 편집부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 인상적인 작품인데, 연필과 볼펜조차 구시대의 유물처럼 여겨지는 요즘 서예 역시 사전과 마찬가지로 아날로그 향기가 진하게 풍기는 소재라서, 또 서예가이자 필경사(손글씨로 글을 적는 것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가 주인공으로 등장해서 남다른 기대감을 품었습니다.

 

간략하게 요약하면, 살아온 이력이나 직업, 성격, 타인과의 소통방식까지 정반대인 두 남자 쓰즈키와 도다가 서예를 통해 소중한 인연을 맺는 이야기입니다. 쓰즈키가 반듯한 모범생 같은 남자라면, 도다는 어딘가 삐딱한데다 서예가와는 거리가 먼 괴짜 같은 남자입니다. 당연히 첫 만남부터 충돌과 몰이해가 거듭되고 마치 만담 커플이 서로 딴 소리만 주고받는 듯한 웃지 못 할 장면들이 이어집니다. 그러던 두 사람은 우연히 맡게 된 편지 대필 때문에 뜻밖의 협력을 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자신과는 다른 상대방의 진면목을 발견합니다.

 

제가 알기로 필경사는 한국에선 거의 찾아보기 힘든 직업입니다. 연회 초대장의 주소를 붓글씨로 대필하는 일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더구나 (요즘도 서예학원이 존재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서예 자체가 무척 희귀하거나 사치스러운 취미로 여겨진 지 오래된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미우라 시온은 먹과 벼루가 발산하는 은은한 향기라든가 화선지 위를 힘차게 또는 부드럽게 오르내리는 붓의 움직임, 그리고 그 움직임이 자아낸 갖가지 형태의 글씨의 향연 등 서예의 고풍스러운 매력을 필경사 도다를 통해 생생하게 그려냄으로써 거의 문외한이나 다름없는 독자마저 그 아름다운 세계에 푹 빠지게 만듭니다.

 

다만 꽤 야박한 평점을 준 이유는 쓰즈키와 도다가 소중한 인연을 맺어가는 스토리 자체가 너무 밋밋하고 감흥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두 사람에게 접점을 만들어준 편지 대필은 다소 뜬금없는 설정 같았고, 그 대필 편지의 내용도 그다지 흥미롭지 않았습니다. 또한 쓰즈키가 괴짜에 가까운 필경사 도다의 페이스에 말려들며 호감을 갖게 되는 에피소드들 역시 자연스럽지 못했는데, 그러다 보니 쓰즈키의 말과 행동이 매번 ?”라는 의문을 자아내곤 했습니다. 다 읽고도 기승전결을 갖춘 이야기라기보다는 도다와의 만남을 기록한 쓰즈키의 일기장처럼 느껴진 건 이런 이유들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서예의 매력과 품격을 그린 장면들은 정말 아름답고 황홀했지만, 정작 두 주인공의 이야기는 그다지 눈길을 끌지도 못했고 음미할 만한 여운도 남기지 못했습니다.

 

찾는 사람도 별로 없는 사전을 제작하는 편집부의 감동적인 이야기를 그린 배를 엮다처럼 먹의 흔들림에서도 등장인물들이 품는 뭉클함과 뿌듯함, 그리고 충만한 아날로그 감성을 만끽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던 터라 아쉬움이 더 크게 느껴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미우라 시온이 그린 서예를 통한 치유의 서사에 만족한 독자가 훨씬 더 많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이 작품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다른 분들의 서평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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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주로
요코미조 세이시 지음, 정명원 옮김 / 시공사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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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에서 제공받은 도서입니다.

 

영문학 강사 시나 고스케는 동료 오쓰코쓰와 함께 신슈의 N호수에서 여름휴가를 보내기로 하고, 조카딸 유미와 단둘이 사는 전직 의사 우도의 저택에 방을 빌린다. 그런데 N호수로 향하는 버스에서 한 노파가 그곳에 가면 피의 비가 내리고 N호수가 새빨갛게 물들 것이라는 예언을 남긴 채 사라진다. 저택에 도착한 두 사람은 우도와 유미 외에 다른 이의 기척을 느끼고, 얼마 후 호숫가에서 신비로운 미소년을 발견한다. 한데 미소년 목격담을 들은 우도는 왠지 심하게 동요한다. 그리고 인근의 화산이 폭발한 날, 시나와 오쓰코쓰는 신주로라는 이름의 그 미소년이 우도의 목을 베는 광경을 목격한다. (출판사 소개글을 일부 수정 후 인용했습니다)

 


유리 린타로는 요코미조 세이시가 창조한 더벅머리 탐정 긴다이치 고스케보다 꼭 10년 앞선 1936신주로로 데뷔한 경시청 수사과장 출신의 명탐정입니다. “백발 머리를 보면 일흔 살 노인 같지만 건장한 몸이나 까무잡잡한 얼굴은 그가 아직 40대의 장정이란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라는 묘사대로 일단 외모부터 긴다이치 못잖게 독특한데, 애초 요코미조 세이시가 시리즈까지 염두에 두고 쓴 작품은 아닌 듯 신주로에서 유리 린타로의 활약은 분량이나 역할 면에서 조연 정도에 그칩니다. 또 소개글에 따르면 신문기자 미쓰기 슌스케와 함께 사건을 해결해 유리·미쓰기시리즈로 불리기도한다는데, ‘신주로에 미쓰기가 등장하지 않은 걸 보면 유리 린타로가 주인공으로서 본격적으로 활약하는 건 후속작부터가 아닐까, 추정됩니다.

 

유리 린타로가 중반부쯤 등장해서 미스터리 해결사를 맡긴 하지만, ‘신주로의 메인 주인공은 화자이자 연쇄살인사건의 목격자인 시나 고스케입니다. 오쓰코쓰에게 이끌려 신슈의 N호수를 찾았다가 비현실적인 외모를 지닌 미소년 신주로의 연쇄살인을 목격한 시나는 경찰의 수사가 미궁에 빠진 가운데 도쿄로 돌아와서도 좀처럼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데, 한동안 행방이 묘연하던 신주로가 도쿄에 출몰하여 또다시 살인을 저지르자 다음 희생자는 자신이 아닐까 공포에 사로잡힙니다.

 

팔묘촌을 비롯하여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의 여러 작품을 떠올리게 만들기도 하지만, ‘신주로는 좀더 고풍스러운 문체, 집요함마저 느껴지는 탐미적인 분위기, 그리고 그로테스크한 설정이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아름답기 그지없지만 화산 분화와 함께 지옥으로 변한 N호수, 호숫가 풍경과 어울리지 않는 기괴한 저택, 괴팍한 백부와 함께 사는 아름다운 외모의 유미, 그리고 그 일대에 출몰하여 피해자의 목을 잘라 사라지는 미소년 살인귀 신주로 등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보다 좀더 날것 같은 분위기와 음울하면서도 관능적인 기운을 발산하는 인물들이 독자의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또한 진주라는 이름(真珠郎)에 걸맞게 비현실적인 외모를 지닌 신주로가 어떻게 살인귀가 된 건지, 살인의 동기와 목적은 무엇이며 왜 잘린 목을 들고 사라지는 건지, 목표물만 살해할 뿐 현장의 목격자들을 방치하거나 부상만 입히는 이유는 무엇인지 등 여러 가지 미스터리가 호기심과 궁금증을 자극합니다.

 


본격 추리소설로의 노선 전환이 이루어지기 전 과도기적 작품이므로 트릭과 동기의 치밀성은 다소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라는 작품해설속 설명대로 마지막에 진실이 밝혀지는 대목에서 고개를 갸웃거리거나 살짝 아쉬움을 느낀 독자도 있겠지만, 개인적으론 요코미조 세이시 특유의 거칠고 잔인하면서도 애잔함을 놓치지 않는 고전미를 한껏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 트릭 역시 찬찬히 복기하다 보면 결코 부족하지도, 허술하지도 않다는 걸 실감할 수 있습니다. 또한 고색창연한 시대적 배경, 노골적이고 직설적인 아날로그풍의 감정들, 그리고 탐욕과 복수와 배신의 조합이 낳은 참혹한 연쇄살인은 시대물 미스터리를 좋아하는 제 취향에 너무나도 잘 맞아떨어지기도 했습니다.

 

하반기엔 유리 린타로 시리즈의 마지막 작품이자 또 하나의 명품인 나비부인 살인사건이 출간된다고 합니다. ‘신주로에서는 딱 필요한 만큼의 활약만 펼치고 퇴장해서 무척 아쉬웠지만, 시리즈 마지막 작품에선 명탐정 유리 린타로의 매력을 제대로 맛볼 수 있기를 기대해봅니다.

 

(‘신주로와 함께 수록된 단편 공작 병풍’(1940)은 유리 린타로가 등장하는 작품은 아니지만, 로맨스와 판타지와 미스터리가 절묘하게 결합된 단편이라 무척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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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틀 아일랜드
아키요시 리카코 지음, 임희선 옮김 / 하빌리스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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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집 아일랜드에서 무인도에 딱 세 가지만 가져갈 수 있다면?”이란 주제로 흥미로운 대화를 나누던 단골손님 여덟 명이 실제로 무인도 여행을 떠나게 됩니다. 낚싯대, 에어매트리스, 공기총, 술 등 제각각 세 가지 물건만 지닌 채 무인도에 도착한 일행은 낭만적인 첫날을 보내지만, 다음날 아침 그들 앞엔 지옥도가 펼쳐집니다. 타고 온 배가 사라진 가운데 단 한 명만이 섬을 빠져나갈 수 있으며 유일한 생존자는 10억엔의 상금을 받게 된다는 충격적인 메시지를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든 다 함께 섬을 빠져나가기 위해 역할을 분담하며 협력하지만 얼마 안 가 첫 희생자가 나타나자 상황은 급변합니다. 그 누구도 믿을 수 없게 된 공포와 두려움 속에 섬은 이내 피비린내로 뒤덮이기 시작합니다.

 

(줄거리 요약 가운데 일행이 섬에 들어가게 된 경위와 생존경쟁에 내몰리게 된 과정을 생략했는데, 나름 이 작품의 첫 반전이기 때문입니다. 출판사 소개글과 뒤표지 카피에는 그 경위과정이 모두 공개되어 있는데, 가급적이면 아무 정보 없이 본편을 읽으시기 바랍니다)

 


한국에 소개된 아키요시 리카코의 작품을 모두 읽었는데, 한 번도 이런 장르를 다룬 적이 없는 작가라 반가움에 앞서 뜻밖이란 생각이 먼저 들었습니다. 5개를 준 성모암흑소녀처럼 서스펜스와 미스터리가 결합된 서사가 그녀의 전공이라고 단정해왔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로 기타노 타케시가 주연을 맡은 영화 배틀 로얄’(2002)을 너무 좋아해서 아키요시 리카코가 그린 서바이벌 스릴러가 어떤 이야기를 품고 있을지 무척 궁금해졌습니다.

 

전체적인 구조는 영화 배틀 로얄이나 수잔 콜린스의 헝거 게임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의심하는 가운데 필요에 따라 이합집산이 이뤄지고 험난한 지형의 무인도를 배경으로 피비린내 나는 살육극이 연이어 벌어집니다. 같은 술집의 단골들로 늘 웃음과 농담을 주고받던 인물들은 지금껏 한 번도 본 적 없는 타인들의 진면목에 놀라기도 하고, 스스로도 서바이벌 스릴러의 인물답게 극적인 변화를 겪습니다. 인상 좋은 아저씨 같던 인물은 실은 칼로 사람을 베는 손맛을 갈망하던 사이코패스였고, 유튜버로 성공하기를 꿈꾸는 청년은 살인이 난무하는 가운데에도 카메라를 놓지 않으며 오히려 위기를 기회로 삼습니다. 모두에게 민폐 캐릭터로 낙인찍힌 인물과 모두에게 호감과 안도감을 주던 인물 등 갖가지 군상들이 살아남기 위해 변신하는 모습도 흥미롭습니다.

 

매 챕터마다 화자가 바뀌는 가운데 희생자가 발생하는데, 작가는 매번 독자의 예상을 뒤집어가며 전략적 이합집산을 꾸미고 다음 희생자를 선정하곤 합니다. 마지막 생존자는 그리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지만 클라이맥스와 엔딩에 이르는 과정에 연이어 반전이 벌어지곤 해서 끝까지 긴장감을 만끽할 수 있습니다.

 

서바이벌 스릴러라는 장르의 특성상 속도감도 무척 빠르고 등장인물이 느끼는 공포와 두려움도 고스란히 독자에게 전달됩니다. 다만 사건 위주로 급하게 전개되다 보니 전체적으로 가볍다는 인상을 피할 수 없었던 점(특히 생존을 건 마지막 대결은 현실감이 떨어질 정도로 너무 가볍고 만화스러웠습니다), 다소 피상적으로만 그려진 등장인물들의 심리묘사가 좀더 깊고 디테일했더라면 좋았을 거란 점이 아쉬움으로 남았습니다. 300페이지가 살짝 넘는 짧은 분량인데 제가 아쉽게 느낀 부분들을 꾹꾹 눌러 담아 한 100페이지 정도 늘렸더라면 훨씬 더 인상적인 작품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이 작품으로 아키요시 리카코를 처음 만난 독자라면 살짝 고개를 갸웃할지도 모르는데, ‘성모암흑동화는 그녀의 진가를 제대로 맛볼 수 있는 작품이니 꼭 읽어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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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착의 귀결 오리하라 이치 도착 시리즈 3
오리하라 이치 지음, 권일영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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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하라 이치의 서술트릭 도착 3부작의 마지막 편인 도착의 귀결은 구성과 편집 모두 특이한 작품입니다. 요코미조 세이시의 옥문도를 연상시키는 절해고도에서의 밀실살인사건을 그린 목매다는 섬, 스티븐 킹의 미저리처럼 한 작가가 열혈팬에게 감금된 채 강제로 밀실미스터리를 집필하는 이야기를 다룬 감금자등 두 편의 소설이 실려 있고, 서술트릭의 실체를 설명하는 해결편 챕터 도착의 귀결이 마지막을 장식합니다.

 

재미있는 건 두 편의 소설 가운데 어느 쪽을 먼저 읽어도 무방하다는 점인데, ‘일러두기에 따르면 이 작품을 처음 읽을 때는 목매다는 섬을 먼저, 다시 읽을 때는 감금자를 먼저 읽어볼 것을 권유합니다. 편집 역시 독특해서 해결편 챕터 도착의 귀결이 봉인된 채 책 한가운데에 들어있고 그 앞뒤로 목매다는 섬감금자가 붙어있는데, ‘감금자를 읽으려면 책을 180도 뒤집어 거꾸로 읽어야 합니다. 구성과 편집마저 트릭의 일환으로 삼은 느낌이랄까요?

 


시리즈 마지막 편답게 앞선 두 작품(‘도착의 론도’, ‘도착의 사각’)에 등장했던 인물과 공간이 총출연합니다. ‘도착의 론도에서 신인상 응모작을 도둑맞은 뒤 복수에 나섰던 작가 야마모토 야스오가 두 소설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도착의 사각의 주 무대인 연립주택 메종 선라이즈와 201호의 여자 시미즈 마유미는 감금자의 주요 배경이자 조연으로 등장합니다.

 

목매다는 섬은 니가타 현의 절해고도에서 벌어진 의문의 연쇄 밀실살인사건을 다루는데,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시미즈 마유미라는 여자에게 이끌려 섬에 도착한 미스터리 작가 야마모토 야스오가 탐정 재능을 발휘하여 진상을 밝히려 하지만 예기치 못한 상황에 직면하는 이야기를 그립니다.

감금자는 넘버원 팬을 자처하는 여자에게 감금당한 야마모토 야스오가 밀실미스터리를 집필할 것을 강요당하면서 겪는 무자비한 폭력과 공포를 그립니다. 그런데 고심 끝에 그가 집필을 시작한 미스터리의 제목은 바로 목매다는 섬입니다.

 

시리즈 1~2편인 도착의 론도도착의 사각이 서술트릭 초심자에게도 쉽게 이해된 작품들이었다면, ‘도착의 귀결은 미스터리 마니아들조차 어렵다”,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는 반응을 보일 정도로 다소 난해한 작품입니다. 전작들에 비해 좀더 심오하고 고급스런 서술트릭이 구사된 건 분명하지만 몇몇 무리한 설정 때문에 작가의 의도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는 느낌입니다.

독자마다 조금씩 생각이 다를 수 있지만 제가 난해하게 느낀 이유를 요약해보면, 두 편의 소설 모두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가 모호한 대목들이 적잖이 등장한다는 점, (꿈속에서 꿈을 꾸는) 이중악몽에 시달리는 주인공 야마모토 야스오의 심리가 워낙 불안정하게 그려져서 어디까지가 꿈이고 어디부터가 현실인지 종종 애매해진 점, 그리고 해결편 챕터를 읽고도 서술트릭의 쾌감이 느껴지기보다는 개운치 않은 찜찜함이 더 진하게 남은 점 등입니다.

 

저의 오독 또는 이해력 부족 때문일 수도 있지만, 솔직히 다시 한 번 읽을 자신은 없습니다. 간혹 재독의 욕구를 자극하는 작품들이 있긴 하지만 도착의 귀결은 에너지 소모가 적잖은데다 난해하게 느낀 대목들을 다시 파헤쳐보고 싶은 생각이 딱히 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 탓에 순전히 심술 가득한 주관적인 이유로 별 3개라는 야박한 평점을 주고 말았는데, 그래도 이 작품의 진가를 알아본 독자가 있을지도 모르기에 여기저기서 서평을 찾아볼 생각입니다. 그리고 만에 하나 제 마음을 움직일 만한 서평을 발견한다면 그땐 주저 없이 다시 읽기에 도전해보려고 합니다.

 

사족으로... 작가는 전작들을 안 읽어도 괜찮다고 밝혔지만, ‘도착의 사각을 읽지 않은 독자는 감금자의 상당 부분을 이해하기 어려울 거란 생각입니다. 아직 이 작품을 안 읽었다면 시리즈 순서대로 읽을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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