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 황홀한 순간
강지영 지음 / 나무옆의자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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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에서 제공받은 도서입니다.

 

사랑에 실패하고 고향 연향으로 돌아와 역 앞 매점을 떠맡게 된 24살의 김하임은 자신의 보잘 것 없는 운명과 사랑 때문에 마음이 늘 신산합니다. 그러던 중 우유식빵 같은 역무원 윤지완에게 반하게 됐고 조금씩 그와의 거리를 좁혀갑니다. 하지만 어느 날 윤지완이 역 앞에서 피부가 가무잡잡한 한 여자와 수상쩍은 모습을 보이자 불안감에 사로잡힙니다.

10대 때 염희태에게 겁탈을 당한 뒤 임신까지 하자 집을 나왔던 이무영은 10년 만에 그와 우연히 만나 살림을 합칩니다. 하지만 염희태의 악마성은 여전했고 이무영과 딸 민아는 가혹한 폭력에 시달리며 고통스런 나날들을 보냅니다. 그러던 어느 날 끔찍한 사건이 벌어졌고, 이무영의 가족은 어쩔 수 없이 서울을 떠나 연고도 없는 연향으로 거처를 옮깁니다.

 


거의 황홀한 순간사랑이 태어나서 죽는 자리라는 사연 많은 지명을 가진 서울 근교의 소도시 연향을 무대로 김하임과 이무영, 두 여자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입니다. ‘1월 김하임’, ‘1월 이무영으로 이어지다 마지막 챕터 ‘12월 김하임에 이르는 독특한 구성도 눈길을 끌었지만, 전혀 다른 결을 지닌 두 여자의 삶을 전혀 다른 장르를 통해 풀어내다가 서술트릭의 반전과 함께 극적인 엔딩에 이르게 만드는 신선한 서사가 가장 기억에 남았습니다.

 

김하임의 챕터가 운명과 사랑 때문에 고민하는 20대의 달달한 로맨스이자 통일호와 홍익매점이 남아있던 2000년대 초반의 어느 중소도시에서 아직 사랑을 믿는 사람들의 이야기라면, 이무영의 챕터는 10대 시절부터 폭력과 강간에 시달린 한 여성의 비극이자 딸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목숨까지 내걸 수 있는 한 엄마의 투쟁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김하임의 챕터가 오쿠다 히데오의 남쪽으로 튀어!’를 떠올리게 했다면, 이무영의 챕터는 덴도 아라타의 젠더 크라임을 연상시켰다고 할까요?

 

전혀 만날 일이 없을 것 같던 두 여자의 삶은 이무영이 가족과 함께 연향에 머물게 되면서, 그리고 우유식빵 같은 매력적인 역무원 윤지완으로 인해 미묘한 접점을 갖게 됩니다. 곁을 주는 듯 하면서도 더 이상 다가오지 않는 윤지완에게 서운해 하던 김하임은 어느 날 갑자기 그의 옆에 나타난 피부가 가무잡잡한 여자 때문에 또다시 사랑에 실패하는 건 아닌가, 불안해집니다. 한편 윤지완의 어머니가 운영하는 감자탕 집에 몸을 의탁한 이무영은 한편으론 염희태의 폭력 속에 딸 민아를 지켜내기 위해 분투하면서도 또 한편으론 자신에게 호의를 베푸는 윤지완에게 특별한 감정을 품기도 합니다.

로맨스와 스릴러가 묘하게 뒤섞인 가운데 정체불명의 불안감을 뿜어내던 이야기는 마지막에 이르러 뜻밖의 진실을 폭로하면서 독자에게 여러 감정이 혼재된 짙은 여운을 전달합니다.

 

이무영의 챕터가 긴장감과 속도감을 갖춘 몰입도 높은 스릴러인 반면, 김하임의 챕터는 다소 가벼운 20대의 로맨스에다 엉뚱한 가족 이야기(번개를 맞고 우주신이 된 할아버지, 단역에서 출발하여 유명 스타가 된 엄마, 그런 엄마의 로드매니저를 자청하는 아빠)가 곁들여져 있어서 마치 두 발을 냉탕과 온탕에 하나씩 담근 듯한 묘한 느낌을 선사합니다. 무엇보다 두 여자의 본격적인 접점이 언제쯤, 어떻게 이뤄질까 궁금하면서도 거의 종반부까지 눈에 띄지 않아서 살짝 지루함을 느낄 수도 있는데, 그래선지 2/3쯤까지만 해도 별 4개 정도의 무난한 작품이려니, 생각했던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막판에 단 한두 줄에 의해 트릭이 밝혀지는 순간 잠시 멍해지며 앞서 전개된 이야기들을 찬찬히 되새기게 되는데, 그 트릭을 제대로 이해하자마자 반전의 짜릿함과 함께 이 작품의 진가를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 실은 작가는 군데군데 눈에 보일 듯 말 듯 단서와 복선을 숨겨놓았습니다. 조금이라도 위화감이 느껴지는 대목을 기억해두며 페이지를 넘긴다면 막판 반전과 트릭의 쾌감을 좀더 진하게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다양한 장르와 서사를 통해 늘 새로운 이야기를 풀어내는 강지영의 매력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어서 좋았고, 특히 서술트릭이라는 의외의 방식으로 전혀 결이 다른 두 이야기를 한데 묶어낸 필력이 매력적이었습니다. 300페이지가 채 안 되는 짧은 분량이지만 그 이상의 탄탄하고 농도 짙은 이야기가 실려 있으니 구미가 당기는 독자라면 관심을 가져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사족으로... 인터넷서점의 출판사 소개글은 이 작품의 줄거리를 너무 상세하게 공개해놓았습니다. 가급적이면 표지 앞뒷면의 카피 정도만 훑어본 뒤 본편을 읽기를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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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주장법
허진희 지음 / 자이언트북스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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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천재 시인 백오교와 경성 제일 미남 미카엘이 잇달아 자살로 보이는 죽음을 맞이하자 각 신문이 1면에 대서특필로 보도하는 등 경성 전체가 들썩입니다. 그런 와중에 백오교의 탐미적이고도 염세적인 시에 몰입했던 청춘들이 연이어 자살하자 사태는 점차 심각한 지경에 이릅니다. 한편 미카엘의 죽음에 희귀 독초가 이용된 사실이 알려진 직후 독초 박사 구희비는 한 일본 유력 가문의 의뢰를 받고 미카엘의 죽음이 자살인지 타살인지 조사하기 시작합니다. 빈민촌에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구희비의 비서로 채용된 17세 소녀 차돌은 그녀를 보좌하면서 나름 사건의 진상을 추리하지만 연이어 사건 관련자들이 살해되자 큰 충격에 빠집니다.

 


문학동네 청소년문학상 수상 작가이자 출간한 작품 대부분이 청소년물인 허진희의 작품을 읽어보기로 한 건 악의 주장법에 제가 좋아하는 코드들이 한데 버무려져있었기 때문입니다.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적 배경, 국권이 피탈된 후 한반도 곳곳에 피어나기 시작한 이름 모를 독초들과 그것을 이용한 살인, 그리고 미스터리 해결사를 맡은 29세의 독초 박사와 17세의 팔척장신소녀 콤비 등 매력적인 설정들이 단번에 눈길을 끌었던 것입니다.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미스터리는 사건 이면에 자리 한 시대적 비극성 때문에 서사의 두께가 자연스레 두터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다만 사건과 시대적 비극성이 매끄럽게 배합되지 않으면 자칫 겉멋을 위한 설정으로 전락할 수도 있는 양날의 검이기도 한데, 그런 면에서 악의 주장법은 시대적 비극성을 억지로 강요하지 않으면서도 그 위에 미스터리 서사를 차곡차곡 잘 쌓아올린 이야기라 마지막까지 조금의 거부감이나 위화감 없이 읽어낼 수 있었습니다.

망국의 한을 뿜어내듯 이름 모를 독초들이 곳곳에서 피어났다는 설정, 또 그 독초가 살인에 이용된 점, 그리고 세상을 뜬 부모의 뒤를 이어 독초 박사가 된 29세의 구비희가 진실 찾기의 주인공으로 등장한 점도 흥미로운데, 미스터리 자체는 그리 복잡하지도 않고 엄청난 반전을 품고 있지도 않지만 독초라는 소재의 매력을 다양한 레시피를 통해 잘 활용한 작가의 필력은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독초를 연구하던 부모는 정체불명의 독초에 중독돼 사망했고 자신은 태아 시절 어머니가 연구를 위해 섭취한 독초로 인해 평생 이름 모를 통증에 시달려왔으면서도 결국 독초 박사로 이름을 얻게 된 것은 물론 독초를 이용한 살인사건 조사까지 맡게 된 구희비의 캐릭터는 그야말로 아이러니 그 자체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녀의 연인과 친척들이 일제의 폭압과 만행으로 인해 지독한 불행 혹은 큰 위기에 빠진 것으로 설정돼있기도 해서, 개인의 비극과 시대의 비극이 안긴 고통을 온몸으로 견뎌내며 살아가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구희비의 비극성을 다소 순화시켜주는 건 팔척장신소녀 차돌입니다. 웬만한 사내 두세 명에 견줄만한 완력에다 때 묻지 않은 순수함과 성실함을 지닌 차돌이 구희비와의 만남을 통해 새로운 세상을 접하며 성장하는 과정은 무겁고 비극적인 이야기 속에서 유일하게 숨 쉴 틈을 내주는 장면들입니다. 구희비가 빈민촌의 소녀 차돌을 비서로 들인 사연은 후반부에야 공개되는데, 아마 앞부분에서 설명됐더라면 별 감흥을 느끼지 못했을 그 사연이 마지막에 공개되는 순간 독자는 소소한 감동과 함께 울컥함을 맛보게 됩니다. 동시에 언젠가 차돌에게 해사한 시대가 찾아오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도 품게 됩니다.

 

출판사 소개글 가운데 식민지 시대의 억압과 탄압으로 잉태된 악의 연쇄를 파헤치는...”, “악의 본질을 추격해가는...”이라는 대목이 있지만, 사실 개인적으론 그 정도까지의 서사를 담은 작품은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시대적 비극성이 살인사건 미스터리에 잘 녹아든 건 사실이지만 작가가 그만큼 거창하고 심오한 주제를 목표로 삼았다고 보이진 않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제목이 악의 주장법이고, 이 작품 속의 은 그 본질을 탐구해볼 만한 지독한 사이코패스이긴 하지만, 이야기의 중심은 자체보다는 인물과 시대에 방점이 찍혀 있기 때문입니다.

 

간토대지진 조선인 희생자 추모비를 일부러 찾아갔다는 작가가 “(그들의) 넋에 가닿는 울림 있는 소설을 쓰고 싶다라고 밝힌 걸 보곤, 언젠가는 악의 주장법보다 좀더 묵직하고 진하면서도 시대를 정면으로 돌파하는 이야기를 읽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게 됐습니다. 관심목록에 올려놓은 또 한 명의 한국 장르물 작가를 만나게 돼서 정말 반가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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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분: 죽음의 시간
최들판 지음 / 엘릭시르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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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에서 차로 40분 거리인 쇠락한 항구도시 녹둥시에서 전문 시비꾼으로 많은 사람들의 골치를 아프게 했던 41똥미친개한칠규가 변사체로 발견됩니다. 성해명 계장을 비롯한 녹둥시 동부경찰서가 타살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수사에 나선 가운데, 한칠규 주변 인물들의 불온한 동태가 곳곳에서 감지됩니다. 한칠규의 자식이자 공인된 문제아인 혜성-혜리 남매, 은밀하게 지하사업을 벌이는 노회한 전직 조폭 윤중정, 한칠규에게 거듭 폭행을 당한 학교 교사들, 그리고 그 외에도 한칠규를 죽이고 싶어 한 사람들은 녹둥시에 지천으로 널려있었습니다.


 

이미 상업성을 잃은 지 오래인 고기잡이 항구 하나를 낀 시골다운 느긋함과 퇴락의 흔적이 물씬한 가운데 때로는 막장까지 치닫는 난폭성이 공존하는 곳.” (p63)

 

이 작품의 무대인 녹둥의 분위기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문장입니다. 성수기엔 외지인들이 즐겨 찾는 곳이기도 하지만 녹둥의 기본 정서는 비린내와 천박함과 난폭성입니다. 그리고 그런 녹둥에서 단순 폭행치사인지, 지병의 악화로 인한 비명횡사인지, 불법사업에 얽힌 계획된 살인인지 알 수 없는 한 남자의 변사가 발생합니다. ‘모두가 죽이고 싶었던 남자였던 한칠규의 죽음은 말 그대로 변사로 묻힐 수도 있었지만 사망 직전 그가 걸었던 마지막 전화 한 통 때문에 경찰의 수사대상으로 전환됩니다. 변사에 얽힌 사람들의 과거와 현재를 설명하는 1사건의 배경에 이어 2범죄수사에선 성해명 경감을 위시한 녹둥시 동부경찰서 형사1계의 수사 과정이 그려집니다.

 

미스터리 느와르 군상극이라는 출판사의 소개대로 ‘7: 죽음의 시간은 다채로운 장르가 믹스된 작품입니다. 한칠규의 죽음의 진상을 밝히는 미스터리가 기본 뼈대지만, 부산 구암 바닷가를 무대로 건달들의 치열한 전쟁을 그린 뜨거운 피’(김언수)를 연상시키는 느와르의 미덕도 한껏 만끽할 수 있습니다. 대부분 안 좋은 쪽으로 한칠규와 엮였던 수많은 인물들이 털어놓는 기구한 사연들을 읽다 보면 오쿠다 히데오의 군상극에서 맛볼 수 있는 씁쓸한 아이러니 혹은 웃지 못 할 희비극의 향기도 즐길 수 있습니다. 물론 2부부터는 수사의 주체인 성해명 경감과 녹둥시 동부경찰서 형사1계가 이야기를 이끌어가지만, 개인적으론 이 작품의 진짜 미덕은 미스터리 자체보다는 느와르 군상극에 있다는 생각입니다. “그냥 동네 치기배 사망 사건인데 캐릭터들이 하나같이 만만치가 않네.”라는 한 경찰의 푸념에 100% 공감할 수 있었던 건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재미있게 읽고도 별 0.5개를 뺀 건 미스터리의 아쉬움 때문입니다. 사건 자체가 소소한 건 이 작품의 서사에 걸맞은 설정이라 시비 걸 일이 없지만, 막판에 밝혀진 진범의 정체라든가 그 진범을 특정하는 과정이 지나친 비약 또는 불친절한 생략으로 이뤄져있어서 다 읽고도 찜찜함이 남고 말았습니다. 사실 누가 범인인지는 그리 중요한 관심사가 아니었지만 그래도 다소 허술하고 급한 마무리였다고 할까요? 꼰대 같기도 하고 진짜 재능을 숨긴 노회한 명탐정 같기도 한 성해명 경감이라든가 숨은 주인공처럼 강렬한 인상을 남긴 반영아 팀장 등 동부경찰서 경찰 캐릭터는 너무나도 매력적이었지만, 마지막 장을 덮을 때까지 미스터리의 아쉬움이 계속 머릿속에 남았던 게 사실입니다.

 

5회 엘릭시르 미스터리 대상 수상작이란 타이틀이 붙었지만 최들판은 이 작품으로 데뷔한 신인작가입니다. 하지만 페이지를 넘길수록 어떻게 이만한 내공을 지닌 작가가 이제야 데뷔를 한 건지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경찰 조직뿐 아니라 쇠락한 항구도시의 범죄 생태계에 대한 깊은 이해와 생생한 묘사에 감탄했다.”는 장강명의 추천사처럼 대단한 정보력과 자료조사도 놀라웠지만 단어와 문장을 자유자재로 갖고 노는 듯한 필력에 여러 번 눈길이 끌리곤 했습니다.

개인적으론 앞으로 녹둥시 동부경찰서 시리즈가 이어지지 않을까 기대하게 됐는데, 이야기 곳곳에 흥미로운 떡밥이 깔려있기도 하고 나름 산고를 겪으며 태어난(‘작가후기참고) 매력적인 캐릭터들을 작가가 이 한 작품만으로 은퇴시킬 것 같진 않다는 막연한 추측이 들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머잖아 녹둥시의 두 번째 이야기를 꼭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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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팅 데이
이현진 지음 / 아프로스미디어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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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아버지의 죽음을 목격한 트라우마 때문에 지금도 상담과 함께 수면제 처방을 받는가 하면 재직 중인 초등학교에선 고참 교사들의 갑질에 순응하는 등 정희태는 외양만 놓고 보면 매가리 하나 없는 유약한 청년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실은 그는 13살 때 첫 살인을 저지른 것을 시작으로 한 달에 한 번씩 죽여 마땅한 사람들을 거리낌 없이 제거하는 사이코패스입니다. 어느 날, 살인을 목전에 둔 정희태는 뜻밖의 방해꾼 때문에 모든 일을 망치고 맙니다. 얼마 후 방해꾼의 정체를 알아낸 정희태는 그를 처리할 좋은 아이디어를 떠올리지만 예기치 못한 사태가 벌어지면서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지고 맙니다.


 

세상에 숨어 사는 괴물들을 제물로 바침으로써 나는 내가 세상에 이로운 존재라는 사실을 입증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모를 것이다. 내가 세상을 매일매일 조금씩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p82~83)

 

미드 덱스터가 사적 제재와 사적 복수 서사의 원형까지는 아니지만 매체를 불문하고 수많은 후예들을 양산한 건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법망을 빠져나간 범죄자들이나 죄를 짓고도 벌을 받지 않은 자들에 대한 주인공의 무자비한 제재와 복수는 언제나 관객과 독자의 환영을 받았고, 이루 말할 수 없는 쾌감까지 선사했기 때문입니다. 유사한 스토리가 반복적으로 재생산되면서 더는 예전과 같은 신선함이나 짜릿함을 만끽하기 어려워졌지만, 여전히 사적 제재와 사적 복수는 스릴러의 매력적인 소재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치팅 데이역시 덱스터의 후예들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는 한국형 사적 제재 스릴러입니다. 주인공 정희태는 반쯤은 타고 났고 반쯤은 후천적으로 숙성된 사이코패스입니다. 그는 자신과 세상을 속여도 되는 날’, 즉 치팅 데이라는 규칙을 세워놓곤 한 달에 한 번씩 박멸되어야 하는 벌레 같은 존재들을 눈앞에서 치워 버리곤 합니다. 굳이 치팅 데이라는 규칙을 정한 건 살인에 탐닉하는 괴물이 되지 않도록 스스로를 억제하기 위함입니다. 그런 정희태 앞에 어느 날 갑자기 방해꾼이 나타나면서 이야기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합니다. 둘 중 하나가 죽어야만 끝나는 게임이 시작되고, 그 게임의 와중에 적잖은 사람들이 끔찍한 비극을 맞이합니다.

 

한국판 덱스터의 탄생이라는 노골적인 띠지를 두르긴 했지만 치팅 데이는 결론부터 말하면 개성과 특징이 희미한 덱스터의 모방작에 가까운 작품입니다. 읽기 전부터 염두에 둔 건 기존의 유사한 작품들과 차별되는 지점은 어디인가?”였는데, 거의 유일하다고 할 수 있는 건 목적도 동기도 다른 라이벌 살인마가 등장한다는 점입니다. 정희태와 라이벌의 대결이 치팅 데이의 중심 이야기이긴 하지만 그 외엔 덱스터의 후예정희태를 기억하게 할 만한 특별한 개성이 없었다는 게 솔직한 제 생각입니다.

치팅 데이라는 독특한 괴물 방지 장치가 설정되긴 했지만 실은 그건 방법론의 차이일 뿐 근본적인 차별점은 아닙니다. 또한 정희태는 자신만의 도덕 기준’, 즉 죽여 마땅한 자들을 선정하는 기준을 여러 번 강조하는데, 그 기준이란 지금까지 보고 읽은 것들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정희태는 엔딩과 에필로그에서 스스로에게 도덕적 질문 - 자신의 행동이 과연 정당화될 수 있는지, 자신의 방식이 진정한 정의를 실현하는 것인지 - 을 던지는데, 이는 캐릭터를 차별화시킨다기보다는 오히려 무색무취하고 평범하게 만든 어설픈 질문이란 생각입니다(이 장면에선 개인적으로 덱스터의 후예들가운데 가장 좋아하는 피터 스완슨의 죽여 마땅한 사람들의 주인공 릴리 킨트너가 많이 생각났습니다)

 

유사 작품들과의 차별성만큼 아쉬웠던 건 스릴러 서사를 떠받치는 디테일한 장치들이 너무 쉽고 안이하게 설정됐다는 점입니다. 사이코패스의 연원을 불행한 가족사라는 편리한 장치에만 의존합니다. 두 사람이 서로의 정체를 파악하는 과정은 웃음이 나올 정도로 쉽습니다. 두 사람의 살인 행각은 CCTV와 블랙박스를 잘도 피해 다닙니다. 위기일발의 순간마다 끼어드는 제3자의 반격은 거의 닌자 혹은 투명인간 수준입니다. 사소하다면 사소한 문제일 수도 있지만 개인적으론 이런 디테일이야말로 스릴러 서사 자체를 강력하게도, 허약하게도 만들 수 있는 중요한 토대라는 생각입니다.

 

덱스터의 후예들을 자처하는 작품이라면 오히려 덱스터와 차별되는 지점을 내세울 수 있어야 합니다. 권총 한 번 쏘기도 쉽지 않은 한국 스릴러의 현실을 감안하면 디테일은 몇 번을 강조하고 신경 써도 지나치지 않다는 생각입니다. 다른 건 몰라도 두 가지 미덕에 관한 한 치팅 데이는 아쉬움이 크게 남을 수밖에 없는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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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오 나비클럽 소설선
김세화 지음 / 나비클럽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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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우가 내리는 가운데 K대 교수가 피습당하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단순 퍽치기로 여겨졌지만 한 달 후 K대 운동장에서 한 변호사가 살해당하면서 상황은 급변합니다. 두 사람 모두 다문화교류연구원과 관련 있으며 인근의 이슬람사원 건립 당시 반대여론에 맞섰다는 공통점이 발견됐기 때문입니다. 언론이 종교 갈등에 초점을 맞춰 사태를 악화시키는 가운데 형사과장 오지영은 두 피해자 사이의 연관성을 찾기 위해 분투합니다. 하지만 수사는 답보 상태에 빠지고 비가 오는 날마다 동일범의 소행으로 보이는 살인사건이 벌어집니다. 언론과 여론의 비난이 폭주하고 경찰 내부의 압력까지 거세지지만 오지영은 자신이 믿는 방향으로 수사를 이어갑니다. 그리고 아주 작은 단서를 통해 일련의 사건의 중심에 있는 인물을 찾아냅니다.


 

김세화의 첫 장편 기억의 저편은 기대에 비해 아쉬움이 컸던 작품이라 이후 관심작가 목록에서 그의 이름을 지웠던 게 사실입니다. ‘타오를 읽기로 한 건 ‘2024 한국추리문학상 대상이라는 수상 이력과 독자들의 호평 때문이기도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제가 좋아하는 사회파 미스터리였기 때문입니다. 최근 한국 미스터리가 급격한 성장을 이뤄내고 있지만 사회파 미스터리에 관한 한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아직은 청소년기정도에 그치고 있어서 타오처럼 한국형 사회파 미스터리의 새로운 작법을 제시했다.”라는 띠지를 두른 작품이라면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는 뜻입니다.

 

주인공인 형사과장 오지영은 계간 미스터리 2021 겨울호에 수록된 단편 두껍아 두껍아 헌 집 줄게 새 집 다오를 통해 만난 적 있습니다. 여전히 남성중심사회인 경찰 조직에서 뛰어난 수사 능력을 인정받아 형사과장에 오른 40대 여성으로 막내형사보다 더 열심히 현장을 누비고 다니는가 하면 경찰서장에게도 당당히 맞서는 매력적인 인물입니다. ‘타오에선 언론과 여론에게 무능한 경찰로 낙인찍혀 십자포화를 맞기도 하고 보신과 회피에 급급한 상부에 의해 문책 위기에 빠지기도 하지만 오지영은 그 모든 난관을 홀로 견뎌내며 사건의 진상을 파악해냅니다.

 

비이성적인 혐오 프레임과 저열한 선동에 휘둘리며 문제의 본질을 진지하게 성찰하지 않는 사회에서 사회적 약자들은 어떤 폭력에 노출되는가?” (출판사 소개글 )

 

종교 갈등 또는 다문화 혐오로 몰아가는 언론과 달리 오지영은 범인의 행태에 주목하며 숨겨진 범행동기를 찾는 데 주력합니다. 그리고 연이은 피해자가 발생하는 가운데 집요한 단서 추적을 통해 모든 사건에 연관돼있는 한 인물을 찾아냄으로써 자신의 추리가 옳았음을 입증합니다. 하지만 진상을 파악하면 할수록 오지영의 마음은 참담해집니다. 사회적 약자라 할 수 있는 그 인물에게 가해진 온갖 유무형의 폭력들이 낱낱이 밝혀지기 때문입니다. 부와 명예와 권력을 가진 자들의 폭력은 때론 노골적으로 때론 은근한 방법으로 자행됐고 결국 어디에도 기댈 곳 없던 약자는 참혹한 비극을 맞이한 것입니다. 사회파 미스터리에서 경찰 혹은 탐정 역할을 맡은 주인공들이 늘 그렇듯 오지영 역시 범인을 밝혀내기 위해 분투하면서도 씁쓸함과 안타까움이란 마음속 누름돌에 고통스러워합니다.

 

주제와 서사 모두 사회파 미스터리에 잘 어울리게 구축됐고, 한국의 사회적 문제들을 연쇄살인 미스터리 속에 잘 녹여내서 마지막 장까지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다만 이야기의 전개 방식이 너무 정직해서 긴장감이 떨어진 점, 몇몇 대목(초반부 오지영이 사방에서 십자포화를 맞는 장면들, 심각한 왜곡까지 저질러가며 선정적인 뉴스를 양산하는 언론의 폐해, 이미 알고 있는 내용들이 반복될 뿐인 관련자 탐문 등)에 필요 이상의 분량을 할애해서 중반부쯤 지루함을 느끼게 한 점, 그리고 경찰 쪽 인물이 너무 많다 보니 주인공 오지영의 캐릭터가 역할에 비해 덜 빛났던 점 등은 무척 아쉬웠습니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앞으로 오지영 시리즈가 계속 이어질 것 같은데, ‘경찰‘40대 여성이란 두 캐릭터 모두 매력이 충분해서 미스터리 서사가 잘 받쳐준다면 앞으로 기대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아직 김세화를 관심작가 목록에 넣을지 여부는 결정하지 못했지만 적어도 오지영 시리즈를 한두 편 정도는 더 지켜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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