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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황홀한 순간
강지영 지음 / 나무옆의자 / 2025년 2월
평점 :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도서입니다.
사랑에 실패하고 고향 연향으로 돌아와 역 앞 매점을 떠맡게 된 24살의 김하임은 자신의 보잘 것 없는 운명과 사랑 때문에 마음이 늘 신산합니다. 그러던 중 우유식빵 같은 역무원 윤지완에게 반하게 됐고 조금씩 그와의 거리를 좁혀갑니다. 하지만 어느 날 윤지완이 역 앞에서 피부가 가무잡잡한 한 여자와 수상쩍은 모습을 보이자 불안감에 사로잡힙니다.
10대 때 염희태에게 겁탈을 당한 뒤 임신까지 하자 집을 나왔던 이무영은 10년 만에 그와 우연히 만나 살림을 합칩니다. 하지만 염희태의 악마성은 여전했고 이무영과 딸 민아는 가혹한 폭력에 시달리며 고통스런 나날들을 보냅니다. 그러던 어느 날 끔찍한 사건이 벌어졌고, 이무영의 가족은 어쩔 수 없이 서울을 떠나 연고도 없는 연향으로 거처를 옮깁니다.

‘거의 황홀한 순간’은 ‘사랑이 태어나서 죽는 자리’라는 사연 많은 지명을 가진 서울 근교의 소도시 연향을 무대로 김하임과 이무영, 두 여자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입니다. ‘1월 김하임’, ‘1월 이무영’으로 이어지다 마지막 챕터 ‘12월 김하임’에 이르는 독특한 구성도 눈길을 끌었지만, 전혀 다른 결을 지닌 두 여자의 삶을 전혀 다른 장르를 통해 풀어내다가 서술트릭의 반전과 함께 극적인 엔딩에 이르게 만드는 신선한 서사가 가장 기억에 남았습니다.
김하임의 챕터가 운명과 사랑 때문에 고민하는 20대의 달달한 로맨스이자 “통일호와 홍익매점이 남아있던 2000년대 초반의 어느 중소도시에서 아직 사랑을 믿는 사람들의 이야기”라면, 이무영의 챕터는 10대 시절부터 폭력과 강간에 시달린 한 여성의 비극이자 딸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목숨까지 내걸 수 있는 한 엄마의 투쟁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김하임의 챕터가 오쿠다 히데오의 ‘남쪽으로 튀어!’를 떠올리게 했다면, 이무영의 챕터는 덴도 아라타의 ‘젠더 크라임’을 연상시켰다고 할까요?
전혀 만날 일이 없을 것 같던 두 여자의 삶은 이무영이 가족과 함께 연향에 머물게 되면서, 그리고 우유식빵 같은 매력적인 역무원 윤지완으로 인해 미묘한 접점을 갖게 됩니다. 곁을 주는 듯 하면서도 더 이상 다가오지 않는 윤지완에게 서운해 하던 김하임은 어느 날 갑자기 그의 옆에 나타난 피부가 가무잡잡한 여자 때문에 또다시 사랑에 실패하는 건 아닌가, 불안해집니다. 한편 윤지완의 어머니가 운영하는 감자탕 집에 몸을 의탁한 이무영은 한편으론 염희태의 폭력 속에 딸 민아를 지켜내기 위해 분투하면서도 또 한편으론 자신에게 호의를 베푸는 윤지완에게 특별한 감정을 품기도 합니다.
로맨스와 스릴러가 묘하게 뒤섞인 가운데 정체불명의 불안감을 뿜어내던 이야기는 마지막에 이르러 뜻밖의 진실을 폭로하면서 독자에게 여러 감정이 혼재된 짙은 여운을 전달합니다.
이무영의 챕터가 긴장감과 속도감을 갖춘 몰입도 높은 스릴러인 반면, 김하임의 챕터는 다소 가벼운 20대의 로맨스에다 엉뚱한 가족 이야기(번개를 맞고 우주신이 된 할아버지, 단역에서 출발하여 유명 스타가 된 엄마, 그런 엄마의 로드매니저를 자청하는 아빠)가 곁들여져 있어서 마치 두 발을 냉탕과 온탕에 하나씩 담근 듯한 묘한 느낌을 선사합니다. 무엇보다 두 여자의 본격적인 접점이 언제쯤, 어떻게 이뤄질까 궁금하면서도 거의 종반부까지 눈에 띄지 않아서 살짝 지루함을 느낄 수도 있는데, 그래선지 2/3쯤까지만 해도 별 4개 정도의 무난한 작품이려니, 생각했던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막판에 단 한두 줄에 의해 트릭이 밝혀지는 순간 잠시 멍해지며 앞서 전개된 이야기들을 찬찬히 되새기게 되는데, 그 트릭을 제대로 이해하자마자 반전의 짜릿함과 함께 이 작품의 진가를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 실은 작가는 군데군데 눈에 보일 듯 말 듯 단서와 복선을 숨겨놓았습니다. 조금이라도 위화감이 느껴지는 대목을 기억해두며 페이지를 넘긴다면 막판 반전과 트릭의 쾌감을 좀더 진하게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다양한 장르와 서사를 통해 늘 새로운 이야기를 풀어내는 강지영의 매력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어서 좋았고, 특히 서술트릭이라는 의외의 방식으로 전혀 결이 다른 두 이야기를 한데 묶어낸 필력이 매력적이었습니다. 300페이지가 채 안 되는 짧은 분량이지만 그 이상의 탄탄하고 농도 짙은 이야기가 실려 있으니 구미가 당기는 독자라면 관심을 가져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사족으로... 인터넷서점의 출판사 소개글은 이 작품의 줄거리를 너무 상세하게 공개해놓았습니다. 가급적이면 표지 앞뒷면의 카피 정도만 훑어본 뒤 본편을 읽기를 추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