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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 나라
오카자키 다쿠마 지음, 구수영 옮김 / 내친구의서재 / 2025년 2월
평점 :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도서입니다.
2063년, ‘일본의 애거서 크리스티’로 불리던 미스터리의 여왕 무로미 교코가 사망한 후 조카인 ‘나’는 저작권을 물려받아 그녀의 유고인 ‘거울 나라’의 출간을 준비합니다. 그런데 교코를 오랫동안 담당했던 편집자가 뜻밖의 의문을 제기하면서 ‘나’는 혼란에 빠집니다. 그에 따르면 ‘거울 나라’ 원고에 삭제된 부분이 있는 것 같다는 것입니다.
‘거울 나라’는 40년 전인 2020년대를 배경으로 한 교코의 자전적 소설로 일러두기에 따르면 논픽션에 가까운, 그러니까 실존인물들이 등장한 소설입니다. 외모 때문에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던 세 사람을 비롯하여 모두 네 명의 인물이 등장하는 가운데, 자신들의 삶을 일그러뜨린 과거사를 추적하는 미스터리가 펼쳐집니다.

형식, 소재, 캐릭터 등 여러 면에서 독특함을 풍기는 미스터리입니다. 또한 애증, 죄책감, 자기혐오, 이기심 등 사람과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갖가지 어둡고 불온한 감정들을 집요하게 그려낸 안타까운 비극 서사이기도 합니다. 흥미로운 건 미스터리와 비극의 중심에 루키즘(외모지상주의) 또는 외모와 관련된 질병이 자리 잡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야기의 본체라 할 수 있는 액자소설 ‘거울 나라’를 이끌어가는 건 네 명의 남녀입니다. 아이돌로 데뷔할 정도로 외모가 빼어나지만 신체이형장애(평균보다 외모가 뛰어난데도 불구하고 특정 부위에 대한 불만족 또는 혐오감이 지나친 나머지 자신을 추하거나 못났다고 여기며 극심한 콤플렉스에 빠지는 정신적 질병)에 시달리는 웹 미디어 편집자 히비키, 어린 시절 화재로 얼굴에 화상을 입었지만 지금은 카메라 필터로 상처를 가린 채 라이브 스트리머로 활동하고 있는 사토네, 안면인식장애 때문에 연인과 직장을 잃은 적 있는 셰프 이오리, 그리고 히비키의 직장선배이자 그녀에게 특별한 관심을 품고 있는 다쿠미가 그들입니다.
15년 전, 히비키가 선물한 향초가 일으킨 화재 때문에 사토네는 얼굴에 화상을 입었고, 그로 인해 히비키는 오랜 시간 죄책감에 사로잡힌 채 살아왔습니다. 극적으로 재회한 두 사람은 그 당시 잠시 이웃에 머물렀던 동갑내기 소년 이오리와도 우연히 만나는데, 이들은 15년 전의 화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던 중 그것이 히비키가 선물한 향초 탓이 아닐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떠올리게 됩니다. 히비키의 직장선배 다쿠미까지 가세하여 조사에 나선 가운데 네 사람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15년 전의 진실과 마주칩니다.
이야기의 중심축은 네 사람에 의한 진상 추적 미스터리입니다. 하지만 미스터리 못잖게 눈길을 끄는 건 신체이형장애, 얼굴에 입은 화상, 안면인식장애 등 형태는 달라도 하나같이 외모와 관련하여 고통스러운 삶을 살고 있는 세 인물 사이의 미묘한 관계와 감정들입니다. 15년 전부터 서로를 알아온 히비키와 사토네와 이오리는 죄책감, 애증, 의심, 고마움 등 엇갈린 감정을 품으면서도 동시에 아슬아슬한 삼각관계를 이루기도 합니다. 거기에 히비키에게 특별한 관심을 품은 다쿠미까지 끼어들면서 이야기는 미스터리와 비극 외에 치정의 분위기까지 풍깁니다. 그리고 이리저리 뒤섞였던 서사들은 미스터리의 진실이 밝혀지는 순간 일제히 한 방향으로 치달으며 독자의 뒤통수를 강하게 내리칩니다.
현재의 ‘나’는 교정지를 거듭 읽으면서도 편집자가 주장한 ‘삭제된 내용’을 좀처럼 찾아내지 못하는데, 독자 역시 ‘삭제된 내용’이 과연 있긴 있는 건지, 만약 있다면 미스터리를 뒤집는 반전일지 혹은 네 사람의 운명에 관한 내용일지 궁금증을 품을 수밖에 없습니다. 막판에 뜻밖의 방식으로 공개된 ‘삭제된 내용’은 미스터리의 여왕 무로미 교코가 유고 ‘거울 나라’를 통해 감추려고 했던 또는 드러내려고 했던 진실을 찬찬히 설명하는데, 이 대목에 이르러서야 독자는 교코와 소설 속 인물들과 현재의 ‘나’가 품고 있는 복잡미묘한 감정들을 제대로 들여다볼 수 있게 됩니다.
‘거울 나라’는 치밀하고 정교한 미스터리라기보다는 외모로 인해 고통스러운 삶을 살던 인물들이 어떻게든 각자의 상처에서 벗어나려 발버둥치는 안타까운 비극의 기운이 더 강한 작품입니다. 정통 미스터리를 기대한 독자에겐 다소 느슨하게 읽힐 수도 있지만, 워낙 감정선들이 세고 독한데다 외모지상주의에 관한 사회파 미스터리의 분위기도 만끽할 수 있어서 신선한 책읽기가 될 수 있을 거란 생각입니다.
오카자키 다쿠마의 대표작인 ‘커피점 탈레랑의 사건 수첩’ 시리즈는 라이트한 일상 미스터리 같아서 읽을 생각을 안 했는데, ‘거울 나라’를 읽고 나니 기회가 되면 한 편쯤은 찾아보고 싶다는 욕심이 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