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바나의 우리 사람
그레이엄 그린 지음, 최용준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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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 직전의 혼란에 빠진 1958년 쿠바의 수도 아바나. 진공청소기 판매상인 영국인 제임스 워몰드는 팔리지 않는 신제품과 제멋대로인 17살 딸 밀리 때문에 하루하루가 버거울 뿐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영국인으로부터 비밀정보부의 우리 사람’(Our Man), 즉 요원으로 일 해달라는 요청을 받은 워몰드는 처음엔 정색하며 거절했지만, 적잖은 활동비에 혹한 나머지 대승적인(?) 결정을 내립니다. 문제는 아무런 자질도 없는 그가 전문가 요원들을 섭외하는 것은 물론 수시로 비밀정보부에 보고서를 내야 한다는 점. 결국 그는 가짜 요원들을 만들고 신문기사로 짜깁기 한 그럴듯한 보고서로 비밀정보부를 속이기로 작심합니다.

 


1958년에 출간된 아바나의 우리 사람은 혁명 전야의 쿠바를 배경으로 영국 비밀정보부의 첩보활동을 그린 스파이물이지만 비밀정보부를 놀리려는 목적으로 쓴 겁니다.”라는 작가의 말대로 처음부터 끝까지 신랄한 풍자와 비아냥으로 채워진 이색적인 스파이물입니다. 작가 자신이 비밀정보부에서 활동할 당시 겪은 충격적인 경험, 즉 해외 요원들이 보너스를 더 받기 위해 유령 요원을 만들어내고 가짜 보고서를 제출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 이 작품을 구상하게 된 계기였다고 하는데, 작가는 거기에 덧붙여 자기 망상과 무능함에 사로잡힌 영국 비밀정보부에 대한 조롱까지 담아냄으로써 웃지 못할 코미디를 창조한 것입니다.

 

영국 비밀정보부는 애국심 충만한 영국인이니까.”라는, 일반인도 이해하기 힘든 난센스 같은 이유로 워몰드를 우리 사람으로 발탁합니다. 이어 그가 컨트리클럽 명부에서 골라낸 그럴싸한 이름의 가짜 전문가들에 대해선 표면적인 확인 절차만 진행했고, 그가 제출한 각종 보고서는 아무런 의심이나 제대로 된 분석도 없이 기정사실로 받아들입니다.

궁핍한 생활에서 벗어나고 딸의 풍족한 미래를 위해 우리 사람을 수락한 워몰드는 결코 야비하거나 사악한 인물이 아닙니다. 결과적으론 국가에 대한 배신이고 배임과 횡령을 일삼는 범죄행위이긴 하지만 그는 언제라도 처벌받을 각오를 하고 있습니다. 다만 도덕적으로 모호한 캐릭터 때문에 독자는 그를 응원해도 되는 건지 잠시 고민에 빠지게 됩니다. 동시에 영국 비밀정보부를 조롱하기 위해 작가가 주인공을 도구적으로 사용했다는 느낌도 피할 수 없었는데, 그래선지 개인적으론 이 작품에서 가장 아쉬웠던 게 워몰드의 애매모호한 캐릭터였습니다.

 

워몰드의 가짜 스파이 행각은 비밀정보부에서 비서를 파견하면서 위기에 봉착합니다. 더구나 절반쯤 장난삼아 그린 스케치 한 장과 거짓 보고서 한 부를 비밀정보부가 엄청난 뭔가로 평가하고 진실로 받아들인 탓에 워몰드의 상황은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릅니다.

이야기 속 당사자들은 심각한 패닉 상태에 빠지지만 그 광경을 지켜보는 독자들은 실소와 한숨을 금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 황당한 코미디가 어떤 파국을 맞이하게 될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워몰드의 가짜 스파이 행각이 발각되긴 할지, 발각된다면 비밀정보부는 어떤 대응을 할지, 만약 발각되지 않는다고 해도 워몰드에게 해피엔딩이 찾아오게 될지 등 독자의 궁금증을 자극하는 요소들이 마지막까지 완만하면서도 긴장감 넘치게 전개됩니다.

 

스파이물에 녹아든 영국식 블랙코미디와 풍자는 수시로 웃음을 자아낼 만큼 흥미로웠지만 쉽게 적응하기 힘들었던 뻣뻣하거나 다소 불친절한 영국식 문장때문에 완전히 몰입해서 읽어내진 못한 게 사실입니다. 다소 어렵게 읽었던 존 르 카레의 스파이물 몇 편과 비슷한 인상이었다고 할까요? 그래선지 작가가 직접 각본가로 참여했다는 동명의 영화로 이 작품의 묘미를 제대로 맛보고 싶은 욕심이 들기도 했는데, 워낙 오래 전에 제작된 영화라 OTT든 다른 경로에서든 찾아낼 수 있을지 잘 모르겠습니다.

 

쉽고 빠르게 페이지가 넘어가는 작품은 아니지만 설정이나 인물 모두 독특해서 스파이물 취향이 아닌 독자라도 비밀정보부를 놀리려는 목적으로 쓴이 이색적인 스파이물에 관심을 가져봐도 괜찮다는 생각입니다. 호기심이 동한 독자라면 다른 분들의 서평도 참고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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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라이트 마일 밀리언셀러 클럽 85
데니스 루헤인 지음, 조영학 옮김 / 황금가지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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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시리즈 4가라, 아이야 가라12년 후 이야기를 다룹니다. 내용 소개 중에 가라, 아이야 가라의 스포일러가 포함돼있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12년 전, 켄지와 제나로는 납치된 4살 소녀 아만다를 찾아내 세간의 주목을 끈 바 있습니다. 하지만 사건의 최종 해결책(아만다를 좋은 양부모나쁜 친모중 누구에게 보낼 것인가?)을 놓고 큰 갈등을 벌인 탓에 두 사람은 1년 가까이 결별하기도 했습니다. 현재 두 사람은 4살 딸 개비와 함께 소박한 행복을 누리고 있지만, 지독한 생활고에 빠져있습니다. 그러던 중 아만다의 숙모 베아트리체가 나타나 16살이 된 아만다가 또다시 사라졌다며 도움을 청합니다. 여전히 개망나니인 친모 헬렌은 경찰에게 거짓말까지 해가며 사라진 아만다에 대해 아무 조치도 안 취한다는 사실까지 폭로합니다. 그동안 아만다 사건을 금기시하며 살아온 켄지와 제나로는 격론 끝에 일단 아만다 찾기에 나서기로 합니다.

 


켄지&제나로 시리즈의 여섯 번째 작품이자 최종편인 문라이트 마일이 출간된 건 (미국 기준으로) 전작인 비를 바라는 기도이후 11년만이었습니다. 전 세계의 팬들이 후속작에 대한 미련을 접은 지 한참이 지난 뒤에야 뜻밖의 선물처럼 출간된 셈인데, 그래선지 새로운 이야기 대신 12년 전 사건, 즉 시리즈 4편인 가라, 아이야 가라에서 다뤘던 아만다 납치사건을 모티브로 삼은 것으로 보입니다.

 

아만다 사건은 예나 지금이나 켄지와 제나로에게 각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당시 제나로는 아기를 갖고 싶다는 뜻을 켄지에게 밝혔지만 우회적으로 거부당했는데, 하필 그 시점에 아만다 사건을 맡게 됐고, 아만다를 찾은 뒤엔 개차반인 친모 헬렌에게 보낼 건지, 아만다를 행복하게 만들어줬던 좋은 양부모에게 맡길 것인지를 놓고 격렬한 갈등을 벌인 바 있습니다. 결국 켄지의 뜻대로 친모 헬렌에게 보내진 아만다는 또다시 불행의 늪에 빠져들었고, 그로 인해 제나로는 켄지에게 결별을 선언했습니다. 그런데 12년이 지나 또다시 아만다가 사라지자 켄지와 제나로는 갈등에 휩싸입니다. 켄지가 아만다 찾기를 주저하는 반면, 제나로는 속죄의 기회라며 의뢰를 받아들일 것을 원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당시 아만다와 같은 나이인 4살 딸 개비를 키우는 입장이다 보니 두 사람의 심정은 좀더 각별할 수밖에 없습니다.

 

더불어 시작과 동시에 독자를 서글프게 만드는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지독한 생활고에 시달리며 어린 개비를 키우는 부부의 곤란한 상황과, 40대라는 신체 나이에 굴복한 채 근근이 일감을 따내는 프리랜서 탐정 켄지의 안쓰러운 처지가 그것입니다. 아무래도 11년 만에 출간되는 시리즈 최종편을 위한 극적인 설정으로 보였는데, 그래선지 전작들을 읽을 때와는 사뭇 다른 감정을 품은 채 페이지를 넘겨야만 했습니다.

 

탐정이자 부모의 심정으로 아만다를 찾는 켄지와 제나로의 여정은 그리 복잡하지 않습니다. 물론 아만다의 실종 배후에 여러 사건이 복잡하게 얽혀 있고, 극악스러운 악당들이 패륜에 가까운 범죄를 저지르는가 하면, 이 시리즈의 시그니처인 피와 살이 난무하는 잔혹한 액션도 목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데니스 루헤인은 틈만 나면 사건과 사건 사이마다 탐정이자 부모인 켄지와 제나로의 복잡한 심경을 그려 넣었고, 그래서 독자는 사건 자체보다 두 사람의 절박함과 두려움에 더 눈길이 끌리게 됩니다. 특히 12년 전 아만다를 개차반인 친모에게 돌려보낸 일에 대해 말할 수 없는 자책을 품어온 켄지가 위험하다 싶을 정도로 폭주하는 모습은 안타까움 이상의 감정을 불러일으킵니다.

 

아만다를 찾는 일 자체가 엄청난 액션과 위기일발의 상황을 필요로 하지 않다 보니 켄지와 제나로의 주된 일은 지루한 탐문 위주로 전개됩니다. 탐문의 대상이나 내용 역시 다분히 의도적으로 가족혹은 부모와 자식에 초점이 맞춰져서 살짝 작위적으로 느껴졌습니다. 아만다를 찾아내고 배후의 악당을 제거하는 과정은 좀 맥이 빠진다 싶을 정도로 단순했고, 켄지와 제나로의 노력과 분투 덕분이라기보다는 뜻밖의 행운과 우군에 의지한 느낌이 강해서 아쉽기도 했습니다.

물론 이 아쉬움은 전적으로 데니스 루헤인의 계산된 노림수라는 생각입니다. 켄지와 제나로는 더는 과격하고 폭력적인 탐정이 아니라 중년에 접어든 채 어린 딸을 키우는 연약한 부모가 되어 그동안 자신들이 활약해온 무대를 떠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덕분에 읽는 동안 느꼈던 이런저런 아쉬움이 마지막 페이지에 가서 느닷없는 울컥함으로 돌변했는데, 이 시리즈의 팬이라면 아마 비슷한 경험을 겪었을 거란 생각입니다.

 

문라이트 마일2010년에 출간됐으니 이제 켄지와 제나로는 50대 후반에 이르렀을 나이입니다. 어쩌면 부모를 능가하는 탐정이 된 딸 개비를 앞세운 스핀오프가 출간될지도 모를 일이지만, 그런 막연한 기대보다는 단 여섯 편의 작품으로 깊은 인상을 남긴 켄지와 제나로를 회상하며 롤러코스터보다 더 아슬아슬했던 그들의 전성기를 곱씹어보는 게 팬으로서 더 흐뭇하고 보람된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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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충 소년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2-3 링컨 라임 시리즈 3
제프리 디버 지음, 유소영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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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신마비 범죄학자인 링컨 라임은 채 1%도 안 되는 가능성에 기댄 채 노스캐롤라이나 메디컬 센터에서의 신경세포 수술을 결심합니다. 하지만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인근 파케노크 카운티의 보안관인 짐 벨로부터 강력사건 수사를 도와달라는 부탁을 받습니다. 곤충 소년이란 별명을 지닌 16살 개릿 핸런이 살인을 저지른 뒤 두 여성을 납치했는데 그 행적이 묘연한 상태에서 마침 라임의 소식을 들은 짐 벨은 그의 능력을 빌리기로 한 것입니다. 라임은 거절하려 했지만 색스의 주장에 밀려 사건을 맡게 됩니다. 하지만 소도시 보안관국의 초기 현장조사는 너무나 허술했고, 결국 라임과 색스는 거의 재조사에 가까운 수고를 들여 개릿의 행방을 찾아냅니다. 하지만 생각지 못한 색스의 폭주 때문에 라임은 엄청난 충격에 빠지고 맙니다.

 


물고기가 물을 벗어나면 어떻게 되지? 혼란스러운 게 아니야. 죽는다고. 수사관에게 있어 가장 큰 위협은 주변 환경에 대한 무지야.” (p47)

 

링컨 라임 시리즈의 세 번째 작품인 곤충 소년의 주 무대는 라임과 색스의 홈그라운드인 뉴욕이 아닌, 강과 늪지대로 둘러싸인 불온한 분위기의 남부 소도시 파케노크 카운티입니다. 범인을 추적하는 유일한 방법은 현장에서 발견한 미량 증거물뿐이지만 토양과 식물 등 모든 것이 낯설기만 한 탓에 라임과 색스는 수사 초반부터 난항을 거듭합니다. 뉴욕이라면 손바닥 들여다보듯 훤하던 두 사람이 물을 벗어난 물고기신세가 된 채 고전하는 초반부는 전작들과는 전혀 다른 긴장감을 발산합니다.

 

라임과 색스를 더욱 곤란하게 만든 건 카운티 보안관국의 노골적인 반발과 법과학에 대한 무지입니다. 자기 영역을 침입한, 그것도 전신마비의 범죄학자와 빨간 머리의 뉴욕경찰로 이뤄진 북부 양키 콤비가 남부 보안관들에게 냉대를 받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그보다 심각한 건 너무나 허술하게 이뤄진 초기 현장조사입니다. 법과학에 대한 무지 탓에 현장은 심하게 훼손됐고 미량 증거물 수집은 거의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늪지대의 지형지물은 물론 곤충의 생태지식에도 해박한 16살 소년 개릿을 추적하는 일은 그야말로 난감함 그 자체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건 못잖게 관심을 끄는 대목 중 하나는 부작용과 역효과의 가능성이 훨씬 높은데도 불구하고 전신마비 상태를 조금이라도 호전시키기 위해 라임이 선택한 신경세포 수술입니다. 라임과 색스는 이 수술에 대해 서로 다른 속내를 품고 있으면서도 결코 상대에게 진심을 털어놓지 않습니다. 라임은 어떻게든 수술을 강행할 생각이고, 색스는 어떻게든 이 수술을 말리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알고 보면 두 사람의 속내는 실은 상대방을 향한 진심 어린 사랑에서 비롯된 똑같은 모양새라 독자로 하여금 여러 번 안쓰러움을 맛보게 만듭니다. 그런 와중에 자신들을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뜨릴 사건에 가담하고 만 두 사람은 어떤 엔딩을 맞이하게 될까요? 과연 라임의 수술은 예정대로 진행될까요?

 

또 하나 흥미로운 대목은 법과학에서 가장 중요한 증거물에 대한 두 사람의 의견 충돌이 극명하게 벌어진 점입니다. 라임은 결코 증인과 증언을 믿지 않습니다. 오직 물리적인 미량 증거물만이 그의 유일무이한 잣대입니다. 반면 색스는 사람을 다루는 경찰입니다. 모두가 잔혹한 살인마로 지목한 16살 소년 개릿의 말과 행동에서 뭔가를 감지한 색스는 라임의 절대원칙을 어기면서까지 인간의 가슴 속에서 발견한 증거물이야말로 최고의 증거라고 확신하곤 누구도 예상 못한 충격적인 행동을 감행합니다. 그리고 그 행동으로 인해 사건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급선회합니다. (이 급선회 지점은 중반부쯤 전개되는데, 인터넷서점의 소개글엔 그 내용이 공개돼있지만 제가 볼 땐 꽤 큰 스포일러라서 이 서평에선 생략했습니다)

 

사건의 규모와 잔혹성, 스릴러 서사의 긴장감과 속도감 등 여러 면에서 전작인 코핀 댄서에 비해 다소 느슨하고 지루한 면이 없지 않았지만, 제프리 디버 특유의 막판 반전이 폭죽처럼 터져준 덕분에 중반부까지의 아쉬움을 단번에 잊을 수 있었습니다. 색스가 벌인 대형사고와 그 후폭풍을 언급하지 못해서 반쪽짜리 서평이 되고 말았는데, 아직 이 작품을 읽지 않은 독자라면 아무리 궁금하더라도 모르는 상태에서 본편을 읽을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그래야 막판 반전 쇼의 쾌감을 제대로 맛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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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로 데이즈
루스 웨어 지음, 서나연 옮김 / 하빌리스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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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타 크로스(이하 잭)와 남편 게이브는 기업의 의뢰를 받아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모의 공격을 실행함으로써 보안 취약점을 찾아내는 펜 테스터(Penetration-tester)입니다. 잭의 완벽한 현장침투 능력과 게이브의 고도의 사이버공격 능력 덕분에 두 사람이 이끄는 보안회사는 순항 중입니다. 그런데 한 기업의 테스트를 마친 어느 날, 게이브가 목이 잘린 채 살해되고 현장침투를 마치고 돌아온 잭이 그 참상을 목격합니다. 패닉 상태에 빠졌던 잭을 더욱 놀라게 한 건 경찰이 자신을 용의자로 여긴다는 점. 더구나 자신도 모르는 거액의 생명보험 계약이 체결됐다는 메일이 때마침 도착하자 잭은 스스로 진실을 찾아내기 위해 경찰서를 빠져나갑니다. 런던경찰청의 지명수배가 떨어진 가운데 잭은 목숨을 건 필사의 여정을 시작합니다.

 


헤더브레 저택의 유령을 비롯하여 여러 작품이 한국에 출간된 루스 웨어지만 설정이나 분위기가 제 취향이 아닌 것 같아 한 편도 읽지 않았는데, “남편을 죽인 진범을 찾기 위해 도망자가 된 아내의 8이라는 홍보 카피에 눈길이 끌려 제로 데이즈를 통해 처음 만나게 됐습니다.

 

잭과 게이브에게 부여된 펜 테스터라는 독특한 직업 덕분에 독자는 두 가지 중요한 서사를 예측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디지털, 컴퓨터, 스마트폰, 보안, 해킹 등 이른바 테크노 스릴러가 펼쳐질 거라는 점이고, 또 하나는 뛰어난 현장침투 능력을 가진 잭이 결정적인 순간 액션 스릴러의 진수를 보여줄 거라는 점입니다.

안 그래도 이야기가 시작되자마자 게이브가 살해당하고 잭이 도망자라는 위험천만한 여정을 선택한 덕분에 독자는 초반부터 빠르고 긴박한 흐름을 만끽할 수 있는데, 거기에다 흥미진진한 테크노 액션 스릴러까지 예감이 되니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못잖은 이야기를 기대하게 되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도망자 스릴러의 고전인 해리슨 포드 주연의 영화 도망자와 마찬가지로 8일에 걸친 잭의 도망자 여정은 몸과 마음이 피폐해질 정도로 고난의 연속입니다. 경찰에게 쫓기다가 입은 상처는 날이 갈수록 악화되고, 진범 찾기는 그야말로 눈 감고 코끼리 다리를 더듬는 식의 막연함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런 잭에게 정보와 피난처를 제공하는 건 게이브의 평생 절친인 콜과 언니 헬레나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도움 속에 잭은 자신의 현장침투 능력을 발휘하여 조금씩 진상에 다가갑니다.

 

마지막 장까지 한 호흡에 읽어낼 수 있을 정도로 엔터테인먼트 스릴러의 미덕을 갖추긴 했지만 개인적으론 아쉬움이 좀더 남은 작품입니다. 우선 큰 틀 자체가 너무 익숙하게 설정돼있습니다. 도망자+테크노+액션 스릴러의 조합은 거의 예상한대로 전개됐고, 반전과 진범의 정체 역시 그다지 놀랍지 않습니다. 테크노 스릴러의 소재도 요즘 독자에겐 다소 식상하게 느껴질 정도로 평범했고, 그것이 게이브의 죽음을 초래하는 과정은 거의 공식에 가깝게 설정돼있습니다.

루스 웨어가 제 취향과는 거리가 먼 작가라고 여긴 더 큰 이유는 잭의 심리묘사에 할애된 지나친 분량 때문입니다. 특히 게이브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과 사랑을 여러 차례 반복적으로, 그것도 지나치게 길게 묘사하다 보니 중반쯤부턴 그런 대목이 나오면 눈대중으로 페이지를 넘기곤 했는데, 물론 그 애정이 위험천만한 도망자 신세를 선택한 잭의 가장 큰 동력이긴 하지만 개인적으론 과도한 강조가 오히려 역효과를 냈다는 생각입니다.

 

요약하면... 새로움과 신선함이 부족하긴 하지만 도망자 스릴러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작품입니다. 읽다가 잭의 심리묘사 대목에서 느슨함이나 지루함이 느껴지면 과감하게 건너뛰어도 무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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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메이슨 코일 지음, 신선해 옮김 / 문학수첩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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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로봇 윌리엄을 만드는데 모든 것을 쏟아 부은 로봇공학자 헨리는 아내 릴리와의 관계가 파국에 이르렀음을 감지합니다. 스스로가 지능은 뛰어나지만 사회성이 떨어지는 너드(nerd)이자 신경증과 광장공포증을 앓는 환자라는 걸 잘 아는 헨리는 릴리와의 관계 회복을 위해 애쓰면서도 완벽한 AI 로봇 윌리엄을 완성하는 일에 골몰합니다. 그러던 중 릴리의 옛 직장동료인 데이비스와 페이지가 식사 초대를 받아 찾아오고, 헨리는 아내와 데이비스에게서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낍니다. 질투와 불안을 느낀 헨리는 갑자기 그들에게 윌리엄을 보여주기로 결심합니다. 하지만 윌리엄은 헨리의 기대와 달리 명백한 적의와 폭력을 휘두르며 완벽한 스마트 홈인 헨리의 집을 일순간에 지옥으로 만들어버립니다.

 


1980~90년대 SF 영상물의 고전인 터미네이터블레이드 러너는 볼거리 가득한 화려한 액션물이면서도 동시에 재앙과 공포로 뒤덮일지 모르는 머나먼 미래에 대한 막연한 경고를 담은 작품들입니다. 반면 윌리엄2025년을 살아가는 독자에게 곧 도래할 AI 시대의 암울하고도 끔찍한 가능성 한 조각을 너무나도 생생하게 보여주는, 그래서 100% SF라고 할 수 없는 현실적인 공포소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AI 로봇에 대해 공포를 느끼는 이유는 최악의 경우 통제 불가능한 악당이 될 수 있으며 종국에는 인간의 모든 것을 대체하는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점 때문입니다. 그런데 헨리가 자신의 집 다락방 연구실에서 재활용 부품들로 만들어낸 윌리엄은 이 두 가지 위험 요소를 모두 안고 있습니다. 아무리 과학이 발전하더라도 결코 등장해선 안 될, 실로 인류의 생존을 위협할 만한 AI 로봇입니다.

자신의 통제력을 과신한 한 야심가가 악마와의 계약에 응한 이야기를 그린 괴테의 파우스트를 가장 재미있게 읽었으며, 의식과 발상과 욕망까지 보유한 윌리엄은 말 그대로 인간이 창조한, 인간이 아닌 생명입니다. 탄생 이후 스스로 지적 성능을 개발한 윌리엄은 기계적 오류나 프로그래밍의 실수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자신의 의지로 파괴와 살인과 통제를 즐깁니다. ‘윌리엄이 단순히 AI를 소재로 한 SF소설을 넘어 지독하게 현실적인 공포소설로 분류되는 건 바로 이런 이유들 때문입니다.

 

헨리는 창조자인 자신을 대체하려는 AI 로봇 윌리엄뿐 아니라 아내 릴리를 빼앗아가려는 데이비스의 공격에도 대처해야 하는 이중고에 시달립니다. 동시에 집밖으로 한 발짝도 내딛지 못할 정도의 광장공포증과 신경증 역시 헨리의 이성과 감성을 갉아먹으며 사태를 더욱 최악으로 몰아갑니다. 그리고 그런 분위기가 최고조에 이른 막판에 이르러 작가는 단 한 줄의 엄청난 반전으로 애초 자신이 이 작품을 통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건지를 명료하게 밝힙니다. 단순히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넘어 “AI가 안길 수 있는 최대한의 공포와 딜레마를 실감하게 만드는 이 반전과 엔딩이야말로 윌리엄의 가장 큰 미덕이라는 생각입니다.

 

칼 군무를 추는 로봇과 전쟁에 투입되는 로봇개는 더는 흥미로운 구경거리가 아닙니다. 영원히 SF의 허구 속에 머무를 것 같던 터미네이터블레이드 러너의 공포 역시 더는 남의 얘기도, 먼 얘기도 아닙니다. 하루가 다르게 진화하는 이 세상이라면 누구라도 헨리가 될 수 있고, 언제라도 윌리엄이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그런 비극을 막아낼 수 없다는 것, 또 헛된 희망이나 낙관론 따위는 아무 쓸모도 없다는 것을 윌리엄은 단 270여 페이지의 이야기를 통해 너무나도 확실하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사족으로... AI 로봇에 관한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이야기지만, 간혹 진짜 판타지처럼 읽히는 대목들이 있습니다.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헨리의 캐릭터가 반영된 경우도 있지만, “윌리엄이 아무리 고성능 AI 로봇이라 해도 어떻게 이런 상황까지 만들어낼 수 있지?”라는 의문이 든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이런 모호함마저도 윌리엄의 독특한 매력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다 읽은 뒤에 다소 찜찜함이 남은 것도 사실입니다. 이 찜찜함 때문에라도 다른 독자들의 서평을 찾아볼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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