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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한 용의자
찬호께이 지음, 허유영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5년 4월
평점 :
홍콩의 한 오래된 맨션에서 40대 남성 셰바이천이 자살합니다. 단순 사건으로 마무리될 뻔했지만 그의 옷장에서 25개의 유리병에 나눠 담긴 두 남녀의 토막 시신이 발견되자 쉬유이가 이끄는 강력팀이 투입됩니다. 문제는 죽은 셰바이천이 지난 20년 동안 자신의 방에서 나온 적 없는 은둔형 외톨이라는 점. 그게 사실이라면 범행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이라 쉬유이는 혼란에 빠집니다. 더구나 셰바이천의 이웃이자 어려서부터 절친이며 유명 추리소설가인 칸즈위안은 범인이 따로 있으며 그가 토막살인을 저지른 뒤 셰바이천에게 뒤집어씌우기 위해 자살로 이끌었다고 주장하여 쉬유이를 더욱 당혹스럽게 만듭니다.

‘고독한 용의자’는 홍콩 경찰 쉬유이가 주인공을 맡았던 ‘기억나지 않음, 형사’의 후속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쉬유이를 비롯하여 강력팀 형사 일부가 그대로 등장하고, 카메오 수준의 분량이긴 하지만 여기자 루친이도 잠시 모습을 보입니다. 말하자면 ‘쉬유이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인 셈인데, ‘기억나지 않음, 형사’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와 기억이라는 미묘한 정신의 영역을 소재로 삼았다면, ‘고독한 용의자’는 의문의 토막 시신과 한 남자의 자살 이면에 숨어있는 “인간 심연의 고독감”을 그린 작품입니다. (홍콩 기준으로 두 작품은 각각 2011년과 2024년에 출간됐습니다. 꽤 긴 공백 때문에 ‘시리즈’로 명명하지 않은 듯합니다.)
이야기는 크게 세 갈래로 전개됩니다. 쉬유이와 홍콩 경찰이 토막살인범을 추적하는 ‘메인 스토리’ 사이사이에 셰바이천이 남긴 장문의 ‘유서’와 추리소설가인 칸즈위안이 집필 중인 ‘소설’의 일부가 배치돼있습니다. 셰바이천의 유서와 칸즈위안의 소설은 토막살인 미스터리의 단서를 제공하는 듯 보이지만 때론 너무 쉬운 힌트 같아서 혹시 막판 반전을 위한 작가의 ‘덫’이 아닐까, 의심이 들기도 합니다.
‘고독한 용의자’의 핵심은 ‘진범 찾기’ 자체보다 셰바이천을 범인으로 여기며 수사를 펼치는 쉬유이와 “범인은 따로 있으며, 셰바이천은 그에게 조종당했다.”라고 주장하는 칸즈위안의 추리 대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은 끊임없이 가설을 주고받으며 논쟁을 벌이곤 하는데, 문제는 경찰인 쉬유이가 번번이 민간인인 칸즈위안의 추리와 가설에 굴복한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칸즈위안의 추리와 가설 역시 억지스러운 면이 많아서 쉬유이는 실은 칸즈위안이 진범이며 수사를 오도하기 위해 궤변을 늘어놓는 게 아닐까 의심하기도 합니다.
그런 와중에 토막 시신의 신원이 밝혀지면서 이야기는 새로운 국면으로 돌입합니다. 그리고 마구 흐트러진 퍼즐 조각 같았던 셰바이천의 유서와 칸즈위안의 소설 속 내용들이 토막살인 미스터리라는 큰 틀 속에서 하나둘씩 제자리를 찾아가기 시작합니다.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 ‘고독한 용의자’는 사건 못잖게 여러 인물들의 극단적인 상황과 감정에 방점을 찍은 작품입니다. 연이은 불행 탓에 바깥세상이 자신을 싫어한다고 여기며 은둔형 외톨이가 된 남자, 가족에게 받은 큰 상처로 인해 성인이 되기도 전에 ‘렌탈 애인’이란 막장을 택한 여자, 오로지 온라인 세계에서만 평온을 찾을 수 있었던 남자 등 개인의 문제이자 코로나 이후 만연한 사회적 문제를 반영한 인물들이 다수 등장합니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 이리저리 얽힌 악연이 어떻게 토막살인과 자살이라는 비극으로 귀결됐는지를 디테일하게 그립니다.
고백하자면 528페이지의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다 읽는 데 꽤 긴 시간이 걸렸습니다. 한번에 150페이지 이상 읽기가 힘들었는데, 가장 큰 이유는 지나치게 긴 ‘서론’ 탓입니다. 순전히 주관적인 느낌으론 거의 절반까지를 ‘서론’으로 봐도 무방한데, 그만큼 이야기 전개가 느리고 좀처럼 앞으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어차피 틀린 걸로 밝혀질 게 뻔해 보이는 쉬유이와 칸즈위안 사이의 가설 대결이 수차례 반복된 점도, 인물과 상황에 대한 묘사가 과도할 정도로 상세했던 점도 초반부의 지루함과 느슨함의 원인입니다. 토막살인과 자살의 진실이 드러나는 막판 반전이 꽤 충격적이긴 하지만, ‘지나치게 긴 서론’의 아쉬움을 상쇄하진 못했습니다.
앤솔로지와 공동집필을 제외하고 ‘고독한 용의자’까지 한국에 소개된 찬호께이의 8편의 작품 중 7편을 읽었는데, 별 3.5개라는 야박한 평점을 준 건 처음입니다. 아마도 오랜만에 나온 그의 범죄추리소설에 대한 기대가 남달랐던 터라 실망감도 그만큼 더 컸던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