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로츠와프의 쥐들 - 카오스
로베르트 J. 슈미트 지음, 정보라 옮김 / 다산책방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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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여름, 대규모 천연두 감염 사태로 곳곳에 격리병동이 설치된 상황에서 변질자 혹은 죽지 않는 시체라 불리는 괴물이 출현하자 폴란드 서부 대도시 브로츠와프는 패닉 상태에 빠집니다. 무차별로 산 사람을 잡아먹는 그 괴물은 곧 좀비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고, 경미한 접촉 혹은 체액을 묻히는 것만으로도 멀쩡한 사람을 좀비로 변질시킨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됩니다. 유력한 정치인들이 모조리 도망친 가운데 군부와 경찰이 수습에 나서지만 백약이 무효한 상태에서 브로츠와프의 좀비는 시시각각 늘어갈 뿐입니다.

 


좀비 이야기에 딱히 취향이 있는 건 아니지만, 그 배경이 1960년대 폴란드라는 이유만으로 관심을 갖게 된 작품입니다. 2차 대전 이후 소련의 위성국가로 전락했고 독재와 권위와 통제가 만연한 공산국가가 된 폴란드의 시대적, 역사적 상황이 좀비 서사와 어떻게 결합됐을지 무척 궁금했기 때문입니다. 슈퍼 히어로가 등장할 리도 없고, 인민에게 강압적인 군대와 경찰이 정의의 사도처럼 좀비를 퇴치할 리도 만무한 상황에서 안 그래도 암울하고 폐쇄적인 1960년대의 폴란드를 덮친 세기말적 비극은 지금껏 읽은 좀비 이야기와는 사뭇 다르게 전개될 것으로 보였습니다.

 

동료와 부하들을 잃어가면서 분투하는 군인과 경찰, 좀비 사태를 자신들의 정치적 발판으로 이용하려는 젊은 야심가들, 감염자를 분류하는 과정에서 잔혹한 선택을 강요받는 의사, 그리고 좀비의 공격에서 천신만고의 탈주극을 벌이는 간호학교 교장, 술집 주인, 일가족의 가장 등 수많은 인물들이 등장하여 좀비의 공격이 시작된 직후 첫 12시간동안 브로츠와프가 어떻게 지옥으로 변해가는 지를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이들 가운데 마지막 페이지까지 목숨을 보존하는 자는 극히 일부뿐입니다. 또한 주인공이라 할 만한 인물도 없습니다. 말하자면 좀비의 공격 속에 생사의 갈림길을 걷게 된 수많은 인물들이 직조해낸 거대한 군상극이란 뜻입니다. 작가는 분() 단위로 쪼개진 짧은 챕터들을 속도감 있게 전개시키면서도, 독자들이 일말의 희망이나 기대를 품지 못하도록 군상극 속 인물들을 가차 없이 좀비의 희생양으로 전락시킵니다. 페이지를 넘길수록 비극의 무게는 한없이 무거워지기만 할뿐 어디에서도 잠깐의 안식이나 안도감을 느낄 수 없습니다.

 

그런 와중에 ‘1960년대의 공산주의 체제 폴란드라는 시대적 상황은 좀비에게 점령당한 브로츠와프의 비극을 더욱 참혹하게 만듭니다. 사태를 은폐하고 저 혼자 살겠다고 도망친 권력자들, 그들의 빈자리를 차지한 채 좀비 사태를 승진의 기회로 이용하려는 예비 권력자들, 상식과 소통을 거부한 채 무모하고 강압적인 작전만 거듭하는 군인과 경찰은 거리 곳곳에 피와 살과 내장을 흩뿌리며 무차별 살상을 자행하는 좀비 못잖게 위기감과 불안감만 부추기기 때문입니다. 물론 생존을 위해 용감하게 좀비에 맞서 싸우는 자들이 등장하긴 하지만 독재와 권위와 통제를 당연시 여기는 공권력의 무기력하고 비합리적인 태도는 브로츠와프의 운명을 더욱 암울하게 만들 뿐입니다.

 

어디에서도 희망과 기대를 찾아볼 수 없고 좀비의 공격은 날로 확산되는 가운데 브로츠와프를 덮친 첫 12시간의 비극이 마무리됩니다. ‘카오스라는 부제가 달린 이 작품은 760여 페이지의 엄청난 분량에도 불구하고 브로츠와프 3부작가운데 첫 편이라고 합니다. 아마 나머지 두 편 역시 이만한 분량의 이야기를 담고 있을 것으로 보이는데, 이 작품에서 살아남은 자들이 극히 일부인 걸 보면 2편과 3편도 거의 새 인물들이 이끌어갈 군상극이 아닐까 예상됩니다.

전혀 새로운 좀비 이야기라고 할 순 없지만 ‘1960년대의 공산주의 체제 폴란드라는 특수한 배경 덕분에 나름 색다른 서사를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 살짝 부담되는 분량이긴 하지만 워낙 긴장감과 속도감이 충만해서 주말 하루를 꼬박 투자한다면 금세 마지막 페이지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저처럼 좀비 마니아가 아닌 어중간한 스탠스의 독자라도 공포와 연민과 분노를 동시에 맛볼 수 있는 작품이니 기회가 된다면 도전해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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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작은 무법자
크리스 휘타커 지음, 김해온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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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에서 제공받은 도서입니다.

 

7살 소녀 시시 래들리를 죽이고 살인죄로 수감됐던 빈센트 킹이 30년 만에 출소한다는 소식에 해안도시 케이프 헤이븐의 분위기는 뒤숭숭해집니다. 하지만 당시 15살 동갑으로 빈센트와 단짝이었던 경찰서장 워크는 그의 출소와 귀향을 누구보다 반기고 기뻐합니다. 다만 죽은 시시의 언니이자 자신과 빈센트의 소꿉친구이기도 했던 스타 래들리를 생각하면 마음이 착잡해집니다. 스타는 어린 남매 더치스와 로빈을 두고도 술과 약에 중독돼 툭하면 응급실에 실려 가곤 했고, 워크는 그런 스타 가족을 각별하게 지켜보며 도움을 줘왔기 때문입니다. 빈센트의 귀향이 스타 가족에게 미칠 영향 때문에 고심하던 워크는 별 풍파 없이 시간이 흐르자 안심하지만 어느 날 빈센트로부터 충격적인 전화를 받습니다. 자신이 스타를 죽였다는 것입니다.

 


나의 작은 무법자는 작은 해안도시에서 벌어진 끔찍한 사건이 30년에 걸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망가뜨리고 피폐하게 만들었는지를 보여주는 비극적인 서사이자, 30년 만에 다시 벌어진 살인사건의 진상을 조사하는 범죄소설이며,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에 시작되어 아직도 진행 중인 비극에 휘말린 13살 소녀 더치스의 복수극과 성장기를 그린 작품입니다.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건 과거에 매달린 채 고통스런 30년을 살아온 경찰서장 워크와 스스로 무법자임을 자처하며 자신 앞에 놓인 지독한 현실에 저항하는 13살 소녀 더치스입니다.

30년 전의 사건은 워크에게 가혹한 운명을 강요했습니다. 단짝 빈센트는 살인죄로 성인 교도소에 수감됐고, 소꿉친구였던 스타는 동생을 잃은 뒤 엄마마저 자살한 여파로 삶이 망가져버렸습니다. 자신의 잘못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죄책감에 사로잡혔던 워크는 오랜 시간 동안 가해자인 빈센트와 피해자인 스타 모두에게 진심을 다해왔지만, 30년 만에 출소한 빈센트가 스타를 살해하고 자수하자 말할 수 없는 충격에 빠집니다.

더치스는 불과 13살이란 나이에 세상의 막장과 마주한 소녀입니다. 술과 약에 찌든 엄마 대신 5살 동생 로빈을 지켜야 하는데다, 비열한 방식으로 자신과 동생을 공격하는 자들에게 맞서는 게 일상이다 보니 결코 평범한 13살이 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더치스는 스스로를 무법자라 자칭하며 거친 욕설과 폭력으로 무장한 채 힘든 나날들을 견뎌내지만 엄마 스타가 무참하게 살해당한 뒤엔 속절없이 무너지고 맙니다. 이후 외할아버지 핼의 농장에 머무는 동안 더치스는 세상 어디에도 없는 진정한 무법자로 성장합니다.

 

이 작품의 원제는 본문에 종종 등장하는 끝은 또 다른 시작이다.”라는 대사를 의미하는 ‘We Begin at the End’지만, 개인적으론 13살 소녀 더치스를 강조한 나의 작은 무법자라는 번역 제목이 훨씬 더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30년의 망령에 집착한 채 살인사건 미스터리를 담당한 워크의 이야기보다 스스로 무법자가 되기 위해 분투하는 더치스의 복수극과 성장기가 더 강렬하고 매력적으로 읽혔기 때문입니다. “난 무법자 더치스 데이 래들리다. 네놈은 겁쟁이 놈팡이고, 내가 네놈 목을 깔끔하게 날려주마.”라는 무자비한 대사와 함께 자신을 공격하는 자라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덤벼드는 더치스는 말 그대로 야생마 같은 날것의 힘을 폭발시키곤 합니다. 또한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에 벌어진 비극의 무게에 짓눌려 평범한 13살로 살아갈 길을 빼앗긴 더치스가 세상과 맞서 싸우는 대목에선 동정이나 연민 이상의 애틋함마저 느낄 수 있는데, 그래선지 마지막 반전과 함께 더치스에게 찾아온 가혹한 운명을 읽을 땐 가슴 한쪽이 시려올 정도였습니다.

 

등장인물도 많고 그 관계도 복잡하고 운명적으로 설정된 데다 사건의 비극성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참담하고, 각 인물들이 속에 품은 감정들 역시 하나같이 지독하거나 극단적이어서 결코 쉽고 편하게 책장을 넘길 수 있는 작품이 아닙니다. 이야기의 흐름 역시 완만하고 묵직한 편인데, 속독에 익숙하거나 성격 급한 독자라면 단선적인 구도에도 불구하고 느리게 진행되는 미스터리와 집요하고도 때론 넘쳐 보이는 풍경 및 심리 묘사 때문에 중반부쯤 살짝 느슨함과 지루함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어려움들은 진실이 밝혀지는 막판에 이르러 수십 배는 거뜬히 넘을 만큼 충분히 보상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작가가 왜 그토록 복잡하고 느리고 완만한 서사를 쌓아왔는지를 제대로 이해하게 됩니다.

 

단순한 범죄스릴러나 미스터리 이상의 문학성 짙은 장르물을 찾는 독자라면 한국에 처음 소개된 크리스 휘타커의 나의 작은 무법자를 꼭 읽어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무엇보다 13살 소녀 더치스가 진정한 무법자로 성장하는 지난하고 고통스런 과정을 다른 독자들도 공유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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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의 집 헬렌 그레이스 시리즈
M. J. 알리지 지음, 김효정 옮김 / 북플라자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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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진 해변에서 최소 3~4년 전에 살해당한 것으로 보이는 젊은 여성의 사체가 발견됩니다. 현장을 살피던 사우샘프턴 중앙경찰서 강력범죄수사팀의 헬렌 그레이스는 즉각 연쇄살인의 가능성을 떠올립니다. 한편 실종된 루비라는 여성에 대해 조사하던 중 동일범에게 납치된 것이 분명한 정황을 발견합니다. 헬렌은 두 여성 외에도 더 많은 피해자가 있을 것으로 보고 수사를 확대합니다. 하지만 사사건건 자신에게 반기를 드는 헬렌을 눈엣가시처럼 여기는 상관 세리 하우드는 어떻게든 그녀를 내쫓거나 몰락시키기 위해 악랄한 수법을 고안하기에 이르고, 헬렌은 최대의 위기에 빠지고 맙니다. 한편 정체불명의 남자에게 납치돼 지하실에 감금된 루비는 자기보다 먼저 납치됐던 여자들의 흔적을 발견하곤 말할 수 없는 공포에 휩싸입니다.

 


인형의 집이니미니’, ‘위선자들에 이은 헬렌 그레이스 시리즈세 번째 작품입니다. 헬렌은 잇따라 연쇄살인사건을 해결해 국민적 관심과 명예를 얻은 뛰어난 형사지만, 개인적으론 몸과 마음이 불행과 상처로 뒤덮인 인물이기도 합니다. 가족으로 인한 심각한 트라우마를 지니고 있고, 공식적인 관계 외엔 누구에게도 곁을 내주지 않으며, 견딜 수 없는 죄책감에 사로잡힐 때면 SM클럽에 가서 채찍질로 스스로에게 벌을 주곤 합니다. ‘뛰어나지만 상처투성이인 스릴러 주인공중에서도 꽤 도드라지는 캐릭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번에 헬렌이 쫓는 연쇄살인범은 특정한 외모의 젊은 여성만 골라 납치 살해하는 사이코패스입니다. 하지만 외모 상 공통점 외엔 피해자들의 처지가 모두 제각각이라 헬렌과 강력팀의 수사는 제자리를 맴돌거나 엉뚱한 헛발질만 반복합니다. 그런 와중에 헬렌은 자신을 증오하는 상관 세리 하우드가 파놓은 함정에 빠져 경찰이 된 뒤 가장 큰 위기에 봉착합니다. 전출 정도로 끝나지 않고 자칫 파면 혹은 체포될 상황까지 이르자 헬렌은 모든 것을 건 위험천만한 반격을 시도합니다.

헬렌의 수사과정과 나란히 병행되는 건 어딘지 알 수 없는 지하실에 감금된 채 납치범의 기이한 행각에 시달리며 고통스런 시간을 견디는 루비의 이야기입니다. 저항과 체념을 반복하는 가운데 루비의 생명은 하루하루 꺼져갈 뿐입니다.

 

사건 못잖게 눈길을 끈 대목이 두 군데 있는데, 하나는 경찰 내부의 알력과 갈등이 흥미진진하고 긴박하게 그려진 점이고, 또 하나는 선악을 불문하고 거의 모든 인물에게 가족의 비극이란 서사를 부여한 점입니다. 헬렌과 세리 하우드의 충돌뿐 아니라 강력팀 형사들 간에 승진과 실적을 놓고 벌이는 경쟁도 치열하게 벌어지는데. 때론 선의를 넘어 악의와 탐욕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가족의 비극은 실은 헬렌 그레이스 시리즈의 숙명과도 같은 소재입니다. 주인공 헬렌의 캐릭터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이 괴물이나 다름없던 부모와, 지독한 애증을 주고받은 끝에 파멸에 이른 언니로 인한 트라우마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번엔 헬렌 못잖게 다양한 인물들 - 경찰, 피해자, 유족, 범인 - 에게도 엇비슷한 무게의 가족의 트라우마가 부여됐고, 그래선지 캐릭터는 전작들에 비해 더욱 생생해졌고, 이야기 전체의 볼륨감 역시 두터워진 느낌이었습니다. 사이코패스, 불륜, 마약 등 끔찍한 이유로 가족을 잃은 경우도 있고, 애증이 뒤섞인 가운데 남보다도 못한 관계를 이어가며 점차 서로를 잃어가는 가족도 있습니다. 누구보다 가족이란 말에 예민한 헬렌은 수사 과정 내내 타인의 가족들이 겪는 비극을 지켜보며 복잡한 감정에 빠져들곤 합니다.

 

여러 이야기 가운데 재미와 관심을 끈 순서대로 나열하면 헬렌과 세리 하우드의 충돌 경찰 내부의 알력과 갈등 가족의 비극 연쇄 납치살인사건입니다. 말하자면 가장 재미있었어야 할 미스터리 스릴러 서사가 기대에 비해 아쉬웠다는 뜻입니다. 수사 과정도, 범인의 정체와 동기도, 막판 반전도 대체로 단선적이고 덜 매력적이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페이지는 전작들처럼 엄청 잘 넘어가고, 빠른 템포와 속도감 역시 여전했으며, 개성 강하고 사연 많은 인물들에 대한 몰입도도 대단했지만 사건 자체의 힘이 다소 부족했다는 게 저의 총평입니다.

 

영국에선 헬렌 그레이스 시리즈12(2024‘Forget Me Not’)까지 출간됐지만, 한국엔 3인형의 집’(영국 2015, 한국 2016)을 끝으로 더는 소식이 없습니다. 성적 부진이 원인인지, 다른 이유가 있는지 알 순 없지만, 매력 만점의 주인공 헬렌의 이야기를 세 편밖에 읽지 못하게 된 건 그저 아쉽고 또 아쉬운 일입니다. 9년의 공백을 깨고 신작 소식이 들려올 가능성은 별로 없지만, 그래도 언젠가 헬렌의 활약을 다시 한 번 맛볼 수 있기를 고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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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에 귀 기울일 것
에이미 틴터라 지음, 이유림 옮김 / 북플라자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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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시 체이스가 머리에 큰 상처를 입고 피를 뒤집어쓴 채 발견되고, 인근에서 절친인 새비의 시신까지 발견되자 경찰은 누군가 두 사람을 공격한 것으로 추정합니다. 하지만 살해된 새비의 손톱에서 루시의 피부조각이 발견되고, 루시 옷에 묻은 피가 새비의 것으로 밝혀지면서 루시는 살인용의자로 몰립니다. 그러나 증거도, 목격자도, 흉기도 발견되지 않자 수사는 미궁에 빠졌고 루시는 무혐의 처분을 받은 뒤 집을 떠납니다. 5년 뒤, 미제 사건을 해결해 유명해진 한 팟캐스트가 새비 사건을 다루면서 자신을 여전히 유력한 용의자로 언급하자 루시는 큰 충격에 빠집니다. 할머니 생신을 맞아 고향을 찾은 루시는 5년 전 새비의 죽음의 진상과 정면으로 마주하기로 결심합니다.

 


초반 설정이 무척 흥미로운 작품입니다. 5년 전 살인사건에서 무혐의로 풀려난 루시 체이스가 한 팟캐스트 때문에 다시금 유력 용의자로 대두되고 인터넷은 물론 지인들에게마저 마녀사냥의 대상으로 전락하는데, 공교롭게도 그 팟캐스트를 운영하는 벤 오웬스와 함께 사건의 진상을 찾아 나선다는 이야기입니다.

 

5년 전 살인용의자로 몰렸지만 무혐의로 풀려난 루시가 지금까지 범인으로 의심받는 가장 큰 이유는 사건 당일의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루시 역시 머리에 큰 상처를 입었고 그로 인해 단기 기억상실증에 걸린 건데, 경찰은 물론 가족들조차 그 사실을 의심합니다. 문제는 루시 본인도 혹시 자신이 새비를 죽인 게 아닐까, 스스로 의심한다는 점입니다. 또한 희미하게 떠오르는 기억들 가운데 어떤 게 진짜인지 구별할 수 없었던 탓에 5년 동안 그날의 일들을 떠올리는 것을 포기해왔는데, 그런 그녀가 할머니의 생신을 계기로 5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오면서 이야기는 본론으로 진입합니다. 아직도 자신을 운 좋게 붙잡히지 않은 살인자로 여기는 인구 15,000명의 소도시 플럼튼의 불온한 공기도 불편했지만, 루시를 가장 놀라게 한 건 갑자기 자신 앞에 모습을 드러낸 팟캐스트 운영자 벤이었습니다.

 

거짓말에 귀 기울일 것은 기본적으론 살인사건 미스터리로 분류되지만, 좀더 세밀하게 분류하면 심리 스릴러, 도메스틱 스릴러, 커뮤니티 스릴러의 서사를 골고루 갖춘 작품입니다. 살해당한 새비의 환청과 환영에 시달리는데다 자신이 범인일지도 모른다는 압박감 속에 진실 찾기에 나선 루시의 복잡한 심리묘사가 중요한 축을 차지하고 있고, 루시와 가족, 루시와 남편 사이에 상존하는 갈등과 의심과 불륜과 폭력의 문제가 이야기 저변에 깔려있는가 하면, 벤의 팟캐스트에 출연하여 5년 전 사건에 대해 언급하는 플럼튼 사람들의 악의 또는 호의는 한 다리만 건너면 모르는 사람이 없는 소도시를 배경으로 한 스릴러 특유의 불안정한 분위기를 내뿜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유력한 용의자로 여기는 걸 인정하면서도 중립적인 조사를 약속한 팟캐스터 벤과의 협업은 루시에겐 일종의 도박이나 다름없는 선택인데, 그래선지 독자 입장에선 두 사람의 심리전과 케미가 사건 못잖게 흥미진진하게 읽힙니다. 벤을 믿어도 될까? 루시는 정말 아무것도 기억 못하는 걸까? 두 사람의 협력 관계는 언젠가 깨지지 않을까? 호기심과 궁금증을 자아내는 두 사람의 관계는 뜻밖의 행보를 보여서 마지막까지 독자의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사실 루시의 기억만 돌아오면 미스터리가 종결되는 구도라서 초반 설정에 비해 긴장감은 그리 팽팽하지 않습니다. 루시와 벤이 탐정 역할을 맡았지만 소극적인 탐문 외에는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서 중반부쯤엔 살짝 지루함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5년 전의 진실이 드러나는 클라이맥스는 어김없이 반전을 품고 있긴 하지만 충격과 파괴력에 있어선 살짝 기대에 못 미친 게 사실입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별 1개를 빼긴 했지만 그래도 거짓말에 귀 기울일 것은 독특한 소재와 맛깔나는 문장이 매력적인 미스터리 스릴러입니다. 관심 있는 독자라면 다른 서평들도 참고한 뒤에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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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천대루
천쉐 지음, 허유영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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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 45층의 고층 아파트 마천대루에서 한 여자가 숨진 채 발견된다. 아름다운 용모와 상냥한 성격으로 주민들 사이에서 유명 인사였던 29세의 카페 매니저 메이바오의 죽음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그녀를 둘러싼 복잡한 인간관계와 비밀스러운 사연이 차츰 수면 위로 떠오르지만, 그럴수록 사건은 미궁에 빠져든다. 잔인한 운명의 손아귀에서 도망치려 발버둥치던 그녀를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은 누구인가? (출판사 소개글을 일부 수정 후 인용했습니다.)

 


이야기의 중심에 살인사건이 놓여있고, 수많은 사람들의 진술을 토대로 진범을 찾아가는 미스터리 형식을 띄고 있지만 마천대루는 누가 메이바오를 죽였는가, 보다는 군상극에 가까운 서사를 통해 그녀의 과거와 현재, 그녀와 인연을 맺었던 사람들의 기구한 사연, 그리고 그녀의 죽음이 주변사람들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를 묵직하면서도 집요한 스타일로 그려낸 작품입니다.

 

이야기의 주 무대인 마천대루는 지은 지 20년 가까이 돼서 조금씩 쇠락의 기운을 보이고 있긴 해도 여전히 대만에서 세 번째로 높은 빌딩이자 하늘을 찌를 듯 우뚝 서서 난공불락인 듯하지만 또 모래성처럼 아스라한 자태를 지니고 있습니다. 값비싸고 평수도 넓은 앞쪽 동과 원룸 위주의 저렴한 뒤쪽 동이 혼재된 마천대루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격차가 고스란히 반영된 현대사회의 축소판입니다. 빈부, 성별, 세대 같은 현실적인 격차 외에도 욕망, 이기심, 시기와 질투, 병증, 광기 등 사람들이 모인 곳이라면 어디서든 목격되는 갖가지 감정적인 격차가 요동치는 곳이기도 합니다.

 

입주민, 경비원, 부동산중개인, 가사도우미, 카페 아르바이트생 등 마천대루에 살거나 그곳을 근거지 삼아 살아가는 수많은 인물들이 등장하고 그들은 살해당한 메이바오와 어떤 식으로든 인연을 맺은 탓에 그녀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습니다. 동시에 그들 중엔 메이바오를 살해할 만한 동기를 가진 자도 적지 않아서 용의자로 지목되기도 하는데, 독자는 경찰 심문에 응한 그들의 답변을 통해 메이바오의 기구하다고 밖에 할 수 없는 끔찍한 과거와 현재를 목도하게 됩니다. 그리고 용의선상에 오른 인물들이 하나같이 자신이 죽였다고, 자신 때문에 그녀가 죽었다고 자책하며 괴로워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모두가 범인인 동시에 누구도 범인이 아니다.”라는 출판사 소개글의 의미가 무엇인지 무거운 마음으로 깨닫게 됩니다.

 

한 사람이 죽었다. 우리가 모두 좋아했던 사람이고, 결코 그런 방식으로 죽어서는 안 되는 여자였다. 하지만 난 알고 있다. 누가 죽였든, 그녀의 죽음이 우리와 관련이 있다는 것을. 누구도 무관할 수 없다는 것을.” (p202)

 

메이바오와 주요 인물들의 과거와 현재를 소개한 1부에 이어 2~3부에서는 용의선상에 오른 인물들이 경찰 조사에 답변하는 내용이 그려지고, 마지막 4부에서는 사건 이후 1년이 지나는 동안 마천대루와 그곳 주민들이 겪은 변화와 함께 사건의 진상이라 할 수 있는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다소 파격적인 형식에다 살인사건을 수사하는 장면은 거의 없다고 할 수 있고, 오히려 메이바오의 죽음과는 무관한 조연이나 단역들의 개인사가 적잖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어서 미스터리를 기대한 독자라면 조금은 어리둥절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출구 없는 지옥을 살아온 메이바오의 삶과 죽음, 그리고 그녀를 향해 지독한 애증을 품었던 주변사람들의 심정을 생생하게 전달하기 위해선 정통 미스터리보다는 이런 군상극 스타일의 서사가 더 잘 어울린다는 생각입니다. 메이바오의 죽음과 무관한, 몰라도 될 것 같은, 그래서 눈대중으로 넘기고 싶은 대목이 나오더라도 찬찬히 읽다 보면 막판에 이르러 응축된 감정의 농도와 두께를 제대로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비록 제 취향과는 조금 거리가 있는 이야기였지만, 읽는 내내 가슴속에 누름돌이 얹힌 것처럼 무겁고 묵직한 감정에 취해있었고, 다 읽은 뒤엔 꽤 오래 갈 여운에 잠기기도 했습니다. 온통 비극으로 점철된 가운데 아주 잠깐씩 찾아든 희망에 모든 것을 걸었던 메이바오의 삶이 온갖 격차와 감정이 들끓는 마천대루라는 공간에서 마감되는 과정을 지켜보는 건 심적으로 꽤 힘들긴 해도 동시에 많은 생각을 품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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