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번째 거짓말이 중요하다
애슐리 엘스턴 지음, 엄일녀 옮김 / 문학동네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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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년 전, 절도 현장에서 체포될 뻔했던 루카 마리노는 스미스라는 정체불명의 남자 덕분에 위기를 벗어났지만, 그 대가로 그의 지시를 받아 위험천만한 미션을 수행하는 스파이가 됐습니다. 매번 다른 이름과 신분을 제공받은 루카는 절도, 사기, 몰카 등 온갖 불법적인 미션에 투입돼왔고, 현재는 루이지애나의 사업가 라이언을 표적 삼아 활동하며 에비 포터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순조롭게 라이언의 연인이 되어 스미스가 원하는 정보를 캐던 루카는 어느 날 큰 충격에 빠집니다. 자신과 비슷한 외모의 여자가 나타나선 스스로를 루카 마리노라고 소개한 것은 물론 진짜 루카 마리노의 과거까지 완벽하게 숙지한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혼란에 빠졌던 루카는 이내 스미스가 어떤 목적을 갖고 그녀를 자신에게 보냈음을 깨닫습니다.

 


애슐리 엘스턴은 한국에 처음 소개되는 작가지만 첫 작품부터 후속작을 기대하게 만들 정도로 강렬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첫 번째 거짓말이 중요하다는 도메스틱, 서스펜스, 스파이 등 다채로운 스릴러 서사가 혼재된 작품으로, 오랫동안 유능한 스파이로 암약해온 루카 마리노가 오직 사서함을 이용한 우편물과 기계음으로 변조된 통화만으로 지시를 내리는 미스터리한 보스 스미스와 정면 대결하는 이야기를 그립니다.

 

유능함을 인정받긴 했지만 루카는 스미스가 결코 자신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절감하곤 했습니다. 특히 훈남 사업가 라이언을 상대로 한 미션을 수행하면서 루카는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됨에도 불구하고 수시로 위화감에 사로잡힙니다. 스미스의 지시 내용이나 미션 진행 속도가 평소와는 너무나도 달랐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중 외모는 물론 자신의 과거까지 복제한 여자가 나타나고 뜻밖의 사건까지 벌어지자 루카는 이번 미션에 다른 의도가 깔려 있음을 확신합니다.

 

루카가 갖은 위기를 겪으며 스미스와의 대결을 도모하는 현재 시점의 이야기와, 과거 루카가 수행했던 몇몇 미션의 전모를 그린 이야기가 병행됩니다. 자의반 타의반으로 스미스의 스파이가 되어 8년 동안 완벽한 거짓말과 가짜 신분으로 불법적인 삶을 살아왔지만 루카는 매번 자신의 표적에게 동정심을 품거나 감정을 이입하는 등 뼛속까지 사악한 스파이가 되진 못했습니다. 스미스의 넘버원 스파이로 인정받기 위해 분투한 적도 있지만 어느 샌가 스미스로부터 도망치고 싶어 하는 자신을 발견한 루카는 미션을 수행할 때마다 조금씩 반격을 위한 무기들을 준비해오곤 했습니다. 그리고 스미스의 진짜 의도를 파악한 직후부터 교묘하고 은밀하게 그를 무너뜨릴 계획을 진행시킵니다.

 

뛰어난 스파이이자 거짓말쟁이로서의 루카의 카리스마와 매력도 대단하지만, 엄청난 정보력과 네트워크를 지닌 정체불명의 보스 스미스 역시 독자의 눈길을 사로잡는 캐릭터입니다. 수하의 유능한 스파이들을 이용하여 이익을 추구할 뿐인 단순한 악당 보스가 아니라 오락과 쾌감을 위해 수하들을 상대로 야비하고 잔혹한 계략을 일삼는 그의 행태는 그 어떤 악당 캐릭터와도 비교할 수 없는 서늘한 냉기를 내뿜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루카가 뛰어난 스파이라 해도 언제 어디서든 상대방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희롱하다가 죽일 수 있는 스미스는 난공불락처럼 보이는데, 이런 긴장감 덕분에 마지막 장까지 조금도 안심할 수 없는 짜릿함을 만끽할 수 있습니다.

 

하필 이 작품을 읽는 동안 여러 가지 일이 생기는 바람에 한 번에 완주하지 못하고 서너 차례에 걸쳐 나눠 읽었는데, 그래선지 재미있게 읽고도 이 작품의 진가를 제대로 맛보지 못했다는 생각입니다. ‘첫 번째 거짓말이 중요하다는 결과를 다 알고 읽어도 재미가 반감되지 않을 작품이라 바쁜 일이 마무리되는대로 꼭 한 번 찬찬히 재독할 계획인데, 어쩌면 띄엄띄엄 읽은 첫 번보다 더 강렬한 인상을 받을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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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정 레이디 조지애나 레이디 조지애나 시리즈 1
라이스 보엔 지음, 김명신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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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932, 스코틀랜드 래녹 성에 사는 21살의 조지애나(이하 조지’)는 세계의 절반을 호령한 빅토리아 여왕의 증손녀인 왕족이지만 남은 일생 동안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른 채답답한 날들을 보내는 중입니다. 그러던 중 래녹 성의 공작인 이복오빠 빙키가 메리 왕비와 짜고 자신을 몰락한 동유럽 왕조로 시집보내려 하자 조지는 특단의 결정을 내리곤 런던으로 가출합니다. 하녀 한 명 없이 평생 해본 적 없는 일을 겪으며 고난의 홀로서기에 나서지만 조지는 채 자리를 잡기도 전에 끔찍한 사건에 휘말립니다. 집안 욕실에서 한 남자가 익사한 채 발견된 것입니다. 경찰은 그 남자와 만나기로 돼있던 이복오빠 빙키는 물론 조지에게도 의심의 눈길을 보냅니다. 결국 조지는 스스로 탐정이 되어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기로 결심합니다.

 


한국에 소개된 Rhys Bowen의 작품은 두 편인데, ‘탐정 레이디 조지애나는 라이스 보엔으로, ‘팔리 들판에서는 리스 보엔으로 작가명을 표기했습니다. 아무래도 후자가 맞는 것 같은데, 아무튼 그녀의 레이디 조지애나 시리즈2007‘Her Royal Spyness’(본 작품의 원작)를 시작으로 2023‘The Proof of The Pudding’까지 17편이나 출간된 베스트셀러 시리즈입니다. 다만 한국에는 이 작품 단 한 편만 소개된 뒤 더는 후속작이 나오지 않았는데, 당시 독자들에게 호응을 얻지 못한 탓으로 보입니다.

 

일단 설정 자체가 무척 흥미롭습니다. 1932년의 영국이 배경인 점도, 유령이 나올 것만 같은 음울한 분위기에 거의 파산 일보 직전인 래녹 성에 갇힌 채 청춘을 갉아먹고 있던 무늬만 왕족21살의 조지가 살인사건 해결사로 활약한다는 설정도 눈길을 끕니다. 또 조지가 런던에서 만난 다양한 조연들도 그 면면이 독특합니다. 왕족이지만 살인사건 용의자로 지목된 이복오빠 빙키를 비롯하여 우연히 재회한 스위스 귀족학교 동창생들, 2년 전 사교무대에서 만났던 아일랜드 귀족 가문의 자제, 어머니의 복잡한 남성편력 때문에 유년기에 잠시 가족이 됐던 남자 등이 그들인데, 문제는 적잖은 인물들이 살인사건 조사에 나선 조지를 꽤나 혼란스럽게 만든다는 점입니다. 런던에서의 홀로서기를 도와주던 절친은 물론이거니와 노골적으로 대시하며 조지의 마음을 설레게 했던 남자들마저 시간이 흐를수록 의심스러운 구석들이 엿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들 가운데 범인이 있다고 확신한 조지는 경찰의 의심을 뒤집기 위해 왕족으로선 상상도 할 수 없는 변신을 거듭하며 분투합니다.

 

이야기의 거의 절반쯤은 골 때리는 왕족조지의 런던 정착기에 할애됩니다. 다소 지나칠 정도의 우연들을 통해 런던에서 여러 남자와 재회한 조지는 사건이 터지기 전까지만 해도 1932년을 배경으로 한 영국식 로맨틱 코미디의 주인공처럼 흥분과 경계와 두근거림을 번갈아 경험합니다. 왕족으로 살아온 탓에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집안일에 당황하는 장면들도 유쾌한 웃음을 자아냅니다.

하지만 집안 욕실에서 익사체가 발견되면서 조지의 상황은 180도 급변합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조지의 타고난 성정들이 위력을 발휘합니다. 가문의 품격과 역사를 소중히 여기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미래까지 함부로 결정당하는 건 절대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주적이고 독립적인 반골 스타일은 물론 어떤 위험도 개의치 않고 진실을 향해 폭주하는 대단한 카리스마까지 겸비한 조지는 그 어떤 장르물의 여주인공보다 매력적이고 흡인력이 강합니다. 이 시리즈가 17편까지 이어진 건 거의 전적으로 조지의 캐릭터 덕분이란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하지만 미스터리 자체만 놓고 보면 아쉬움이 많이 남은 작품입니다. 무엇보다 거듭된 우연과 작위적인 상황들 때문에 조지의 추리와 조사는 현실감이 떨어지곤 합니다. 막판에 밝혀진 범인의 정체와 범행 동기는 그다지 놀랍지도 않고 다소 뜬금없어 보이기도 합니다. 물론 왕족 출신의 초짜 탐정인 조지가 베테랑 명탐정들처럼 뛰어난 추리와 충격적인 반전을 통해 기막힌 미스터리 해결사로 활약하는 것 자체가 더 억지스러울 수도 있겠지만, 결국 기대했던 것만큼의 만족감을 느낄 순 없었습니다. 하지만 출판사 소개글대로 유머러스하게 그린 코지 미스터리”, “어디로 튈지 모르는 좌충우돌 탐정 입문기정도의 기대감만 갖고 읽는다면 나름 재미있는 책읽기를 경험할 순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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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우스메이드 2 - 하우스메이드의 비밀
프리다 맥파든 지음, 황성연 옮김 / 북플라자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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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살의 나이에 대학에 다니며 사회복지사가 될 계획을 갖고 있는 밀리 캘러웨이는 살인 전과 때문에 비공식적인 경로를 통한 하우스메이드 외에는 일자리를 찾기 힘든 형편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IT 재벌인 더글러스 개릭의 연락을 받고 맨해튼 펜트하우스의 하우스메이드가 된 밀리는 자신의 천운에 감격하지만, 이내 평범하지 않은 개릭 부부의 상황을 감지하곤 불안감에 휩싸입니다. 손님방에서 나오지 않는 아내 웬디, 처음엔 친절했지만 밀리가 웬디에게 관심을 갖자 싸늘한 태도를 보이는 남편 더글러스, 살짝 열린 문틈으로 보인 웬디의 멍투성이 얼굴, 그리고 빨래와 세면대에서 발견되는 핏자국 등 밀리를 긴장하게 만드는 일이 연이어 벌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얼마 안 가 밀리는 웬디가 처한 끔직한 상황을 직접 목격합니다.

 


서평에 앞서 편집에 관해 한마디 하겠습니다. 빠른 속도로 책을 읽는 편인데도 12개나 되는 오타를 발견했는데, 모든 독자가 다 그렇진 않겠지만 제 경우엔 책읽기를 방해하는 오타를 견디지 못합니다. 또 그런 상태로 책을 판매한 출판사의 태도도, 일반독자조차 쉽게 찾아내는 12개의 오타를 방치한 편집자와 번역가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우스메이드 2’는 내용만으론 별 5개도 충분하지만, 편집에 관한 한 별 1개도 주고 싶지 않습니다.

 

과거 강간당할 위기에 처한 친구를 구하기 위해 살인을 저지르고 10년을 복역한 밀리는 출소 후 하우스메이드로 일하며 남편의 폭력에 시달리는 여자들을 여러 번 구해낸 적 있습니다. 때론 불법적이고 극단적인 방법을 통해 남자들을 응징한 적도 있습니다. 그런 상황을 보면 결코 외면하지 못하는 모태 오지라퍼이기 때문입니다. 그랬던 밀리가 사회복지사가 되기로 결심한 건 그것이 법을 어기지 않고도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밀리는 맨해튼의 펜트하우스에서 또다시 가혹한 상황에 처합니다. 전형적인 가정폭력의 피해자인 웬디를 모르는 척할 수 없었던 밀리는 그녀를 돕기 위해 위험을 무릅씁니다.

 

밀리를 더욱 힘들게 하는 건 6개월 된 연인 브록의 존재입니다. 은수저 출신의 변호사인 그는 밀리를 진심으로 사랑하며 결혼까지 꿈꿉니다. 하지만 밀리는 자신의 살인 전과를 언제까지고 숨길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기에 그와의 사랑이 고통스럽기만 합니다. 그런 와중에 펜트하우스의 일이 터지자 밀리는 자신에겐 사랑과 결혼이란 게 결코 손에 넣을 수 없는 허상임을 뼈저리게 깨닫습니다.

한편 위기에 처한 여자들을 구할 때마다 자신과 함께 행동했던 전 연인의 존재가 늘 밀리의 마음 한 편에 남아있습니다. 그가 곁에 있다면 웬디를 구해내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을 거란 생각에 2년 전 일방적으로 소식을 끊고 이별을 초래한 그가 원망스러울 따름입니다. (이 연인의 이름이나 캐릭터를 밝히지 않은 건 전작인 하우스메이드에 대한 대형 스포일러이기 때문입니다. 아마 많은 서평에서 이 연인의 이름을 공개할 텐데, ‘하우스메이드를 읽지 않은 채 그 서평들을 접한 독자라면 아쉽지만 그 스포일러를 감수해야 할 것 같습니다)

 

1개를 뺄 정도로 아쉬웠던 건 서론이 너무나도 길고 장황했던 점입니다. 본격적인 사건은 중반부쯤에 터지는데, 그 전까지는 전작과 거의 비슷한 흐름으로 전개되는데다 유사한 상황들이 반복될 뿐이고, 현재 연인인 브록과의 갈등 역시 밀리를 민폐캐릭터로 보이게 할 정도로 지루하게 되풀이됩니다.

물론 본격적인 사건이 터진 뒤부터 마지막 장까지는 프리다 맥파든 특유의 몰아치는 반전과 짜릿한 스릴러 서사의 쾌감이 연이어 폭죽처럼 터집니다. 펜트하우스에서 벌어진 폭력과 학대의 진상이 드러나는가 하면, 빠져나오기 힘든 함정 속에서 허우적대던 밀리는 천운 같은 반전 덕분에 큰 위기에서 벗어납니다. 그리고 모태 오지라퍼 하우스메이드로서의 타고난 능력을 다시 한 번 발휘하는 데 성공합니다.

 

하우스메이드 시리즈는 모두 세 편이 출간됐습니다. ‘The Housemaid's Wedding’이라는 단편이 있긴 하지만, 장편으론 2024년에 출간된 ‘The Housemaid Is Watching’이 시리즈 세 번째 작품입니다. 치명적인 하우스메이드 밀리 캘러웨이의 세 번째 활약도 조만간 맛볼 수 있기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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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되살리는 남자 스토리콜렉터 120
데이비드 발다치 지음, 김지선 옮김 / 북로드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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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로리다주 연방법원 판사 줄리아 커먼스와 그녀의 경호원 앨런 드레이먼트가 판사의 자택에서 살해된 채 발견됩니다. 새 파트너 프레더리카 화이트와 함께 플로리다로 날아간 에이머스 데커는 사건 현장을 보자마자 위화감에 사로잡힙니다. 현지 요원은 판사의 판결에 불만을 품은 자의 보복살인으로 추정했지만, 한 사람은 총으로 깔끔하게, 한 사람은 칼로 무참하게 살해된 현장을 본 데커는 별개의 살인사건일 가능성을 떠올렸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경찰 시절 첫 파트너였던 메리의 자살, 데커의 뇌에 이상 변화가 감지됐다는 연구소의 통보문, 느닷없이 배정된 새 파트너, 그리고 최근 들어 자꾸 떠오르는 죽은 아내와 딸의 추억 등 데커는 극도로 불안하고 심란한 상태에서 좀처럼 사건의 실마리를 찾아내지 못해 곤경에 빠집니다.

 


모든 것을 기억하는 남자에이머스 데커의 일곱 번째 이야기인 기억을 되살리는 남자는 여느 전작들보다 이 시리즈의 팬들에게 호기심과 기대감, 안타까움과 연민을 동시에 선사합니다. 오랜 파트너 알렉스 재미슨이 뉴욕으로 떠난 뒤 데커에게 반강제로 배정된 새 파트너 화이트는 첫 등장부터 강렬한 인상을 풍기는 것은 물론 데커와 비슷한 가슴 아픈 상처를 지닌데다 수차례 충돌과 화해를 거듭하며 데커의 진지한 파트너로 발전하는 모습을 보여줘서 단숨에 시리즈 팬들의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한편 매 작품마다 아내 캐시와 딸 몰리에 대한 그리움을 드러냈던 데커가 메리의 자살로 인해 더더욱 깊은 심연으로 빠져들며 우울증 이상의 위태로운 모습을 보이는 장면이라든가 뇌에 이상 변화가 감지됐다는 통보 때문에 미래에 대한 두려움에 휩싸이는 장면은 그에게 주어진 잔혹한 운명을 다시 한 번 절절히 느끼게 만들어서 독자의 마음을 안타깝고 스산하게 만듭니다.

 

데커는 화이트의 반론에도 불구하고 다른 범인에 의해 벌어진 별개의 살인사건으로 여기고 수사를 진행합니다. 탐문을 거듭할수록 판사와 경호원의 숨겨진 사연들이 밝혀지고 두 사람의 살해 동기가 전혀 다르다는 점이 드러나면서 데커의 추론은 힘을 얻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초능력에 가까운 데커의 과잉기억증후군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점. 불안하고 심란한 상태에서 좀처럼 수사에 집중하지 못하기 때문인데, 바로 이 지점에서 새 파트너 화이트가 큰 힘을 발휘합니다. 자신을 믿지 못하는 듯한 데커에게 정면으로 대들기도 하고, 언성을 높여가며 의견을 개진하기도 하던 화이트지만 그의 과거 속 비극과 현재의 고통을 알게 된 뒤로는 자신의 가족사와 속내까지 터놓으며 치유와 위로의 역할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미스터리의 구도만 보면 592페이지라는 분량은 다소 과해 보이는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기억을 되살리는 남자는 데커의 무간지옥 같은 고뇌, 화이트의 현실적인 고민, 그리고 두 사람 사이의 롤러코스터 같은 교감이 미스터리 못잖게 중요한 서사라서 그 부분에 꽤 많은 페이지가 할애된 작품입니다. 다른 작품 같으면 과도한 분량에 다소 불만을 품었겠지만, ‘기억을 되살리는 남자는 사건보다 두 사람의 개인사가 더 강렬한 인상을 풍겨서 조금도 길거나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사실 데커와 화이트의 수사는 판사와 경호원 주변 인물들을 거듭 탐문하는 게 전부입니다. 물론 탐문 중에 얻어낸 정보를 통해 새 인물들이 조사 대상으로 떠오르기도 하고, 오랜 과거 속 사건과 인물까지 소환되면서 사건의 외연은 초반보다 엄청나게 확장됩니다. 막판까지 반전이 거듭되는 가운데 화이트의 도움으로 초능력을 제대로 발휘하게 된 데커는 판사와 경호원의 죽음의 진상을 극적으로 밝히는 데 성공합니다. 그리고 독자의 궁금증을 자극했던 몇 가지 의문 - 왜 데커에게 새 파트너가 갑자기 배정됐나? 왜 플로리다에서 벌어진 사건에서 현지 요원들이 아닌 데커와 화이트가 수사의 주체가 됐나? - 이 마지막 장에서 풀리면서 짜릿한 쾌감과 함께 앞으로 이어질 후속작에서의 두 사람의 활약에 큰 기대감을 갖게 만듭니다.

 

검색해보니 기억을 되살리는 남자’(2022) 이후 에이머스 데커의 여덟 번째 이야기는 출간되지 않았습니다. 그 사이 ‘620분의 남자 시리즈3편까지 나왔던데, 데이비드 발다치가 언제쯤 데커-화이트 콤비의 두 번째 이야기를 선사할지 그저 궁금하고 기다려질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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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한 용의자
찬호께이 지음, 허유영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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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의 한 오래된 맨션에서 40대 남성 셰바이천이 자살합니다. 단순 사건으로 마무리될 뻔했지만 그의 옷장에서 25개의 유리병에 나눠 담긴 두 남녀의 토막 시신이 발견되자 쉬유이가 이끄는 강력팀이 투입됩니다. 문제는 죽은 셰바이천이 지난 20년 동안 자신의 방에서 나온 적 없는 은둔형 외톨이라는 점. 그게 사실이라면 범행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이라 쉬유이는 혼란에 빠집니다. 더구나 셰바이천의 이웃이자 어려서부터 절친이며 유명 추리소설가인 칸즈위안은 범인이 따로 있으며 그가 토막살인을 저지른 뒤 셰바이천에게 뒤집어씌우기 위해 자살로 이끌었다고 주장하여 쉬유이를 더욱 당혹스럽게 만듭니다.

 


고독한 용의자는 홍콩 경찰 쉬유이가 주인공을 맡았던 기억나지 않음, 형사의 후속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쉬유이를 비롯하여 강력팀 형사 일부가 그대로 등장하고, 카메오 수준의 분량이긴 하지만 여기자 루친이도 잠시 모습을 보입니다. 말하자면 쉬유이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인 셈인데, ‘기억나지 않음, 형사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와 기억이라는 미묘한 정신의 영역을 소재로 삼았다면, ‘고독한 용의자는 의문의 토막 시신과 한 남자의 자살 이면에 숨어있는 인간 심연의 고독감을 그린 작품입니다. (홍콩 기준으로 두 작품은 각각 2011년과 2024년에 출간됐습니다. 꽤 긴 공백 때문에 시리즈로 명명하지 않은 듯합니다.)

 

이야기는 크게 세 갈래로 전개됩니다. 쉬유이와 홍콩 경찰이 토막살인범을 추적하는 메인 스토리사이사이에 셰바이천이 남긴 장문의 유서와 추리소설가인 칸즈위안이 집필 중인 소설의 일부가 배치돼있습니다. 셰바이천의 유서와 칸즈위안의 소설은 토막살인 미스터리의 단서를 제공하는 듯 보이지만 때론 너무 쉬운 힌트 같아서 혹시 막판 반전을 위한 작가의 이 아닐까, 의심이 들기도 합니다.

 

고독한 용의자의 핵심은 진범 찾기자체보다 셰바이천을 범인으로 여기며 수사를 펼치는 쉬유이와 범인은 따로 있으며, 셰바이천은 그에게 조종당했다.”라고 주장하는 칸즈위안의 추리 대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은 끊임없이 가설을 주고받으며 논쟁을 벌이곤 하는데, 문제는 경찰인 쉬유이가 번번이 민간인인 칸즈위안의 추리와 가설에 굴복한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칸즈위안의 추리와 가설 역시 억지스러운 면이 많아서 쉬유이는 실은 칸즈위안이 진범이며 수사를 오도하기 위해 궤변을 늘어놓는 게 아닐까 의심하기도 합니다.

그런 와중에 토막 시신의 신원이 밝혀지면서 이야기는 새로운 국면으로 돌입합니다. 그리고 마구 흐트러진 퍼즐 조각 같았던 셰바이천의 유서와 칸즈위안의 소설 속 내용들이 토막살인 미스터리라는 큰 틀 속에서 하나둘씩 제자리를 찾아가기 시작합니다.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 고독한 용의자는 사건 못잖게 여러 인물들의 극단적인 상황과 감정에 방점을 찍은 작품입니다. 연이은 불행 탓에 바깥세상이 자신을 싫어한다고 여기며 은둔형 외톨이가 된 남자, 가족에게 받은 큰 상처로 인해 성인이 되기도 전에 렌탈 애인이란 막장을 택한 여자, 오로지 온라인 세계에서만 평온을 찾을 수 있었던 남자 등 개인의 문제이자 코로나 이후 만연한 사회적 문제를 반영한 인물들이 다수 등장합니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 이리저리 얽힌 악연이 어떻게 토막살인과 자살이라는 비극으로 귀결됐는지를 디테일하게 그립니다.

 

고백하자면 528페이지의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다 읽는 데 꽤 긴 시간이 걸렸습니다. 한번에 150페이지 이상 읽기가 힘들었는데, 가장 큰 이유는 지나치게 긴 서론탓입니다. 순전히 주관적인 느낌으론 거의 절반까지를 서론으로 봐도 무방한데, 그만큼 이야기 전개가 느리고 좀처럼 앞으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어차피 틀린 걸로 밝혀질 게 뻔해 보이는 쉬유이와 칸즈위안 사이의 가설 대결이 수차례 반복된 점도, 인물과 상황에 대한 묘사가 과도할 정도로 상세했던 점도 초반부의 지루함과 느슨함의 원인입니다. 토막살인과 자살의 진실이 드러나는 막판 반전이 꽤 충격적이긴 하지만, ‘지나치게 긴 서론의 아쉬움을 상쇄하진 못했습니다.

 

앤솔로지와 공동집필을 제외하고 고독한 용의자까지 한국에 소개된 찬호께이의 8편의 작품 중 7편을 읽었는데, 3.5개라는 야박한 평점을 준 건 처음입니다. 아마도 오랜만에 나온 그의 범죄추리소설에 대한 기대가 남달랐던 터라 실망감도 그만큼 더 컸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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