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해실의 악마
최필원 지음 / 북오션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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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중석 스릴러클럽버티고 시리즈등을 기획했으며 네이버 카페 러니의 스릴러 월드운영자이자 영미권 스릴러 번역가로 활동 중인 최필원의 소설집입니다. 실은 고해실의 악마가 최필원의 첫 소설집이라고 짐작했는데, 책날개의 소개글을 보니 2000년대 초반에 이미 여러 편의 소설을 발표한 적 있으며, ‘고해실의 악마에 수록된 단편들 가운데 일부는 계간 미스터리를 비롯한 다양한 공모에 당선된 작품들이었습니다.

모두 15편이 수록돼있는데 그중 4편은 한 작품(표제작인 고해실의 악마’)이나 마찬가지여서 실제 수록작은 12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표제작을 제외하곤 한 작품 당 평균 20~30페이지 분량이지만 제일 짧은 건 4페이지에 불과한 경우도 있고, 소재도 살인, 이라크전쟁, 복수, 사이코패스, 스너프필름, 가정폭력 등 무척 다채로워서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작품입니다.


 

고해실의 악마를 표제작으로 선정한 이유는 아마도 다른 수록작들에 비해 압도적인 서사와 분량 때문으로 보이는데, 개인적으론 (모든 수록작을 아우르는) 이 소설집에 가장 잘 어울리는 제목 역시 악마가 아닐까 싶습니다. 복수에 눈이 멀어 스스로 악마의 길을 자처한 인물도 있고, 악마의 피가 온몸에 흐르는 타고난 사이코패스도 있는 반면, 사소한 다툼을 벌이다가 순간적으로 악마의 기질이 폭발하는 인물도 등장합니다. 말하자면 다양한 스펙트럼의 악마가 이끄는 이야기라고 할까요?

 

표제작인 고해실의 악마10년 전 끔찍한 사고 이후 신부의 길을 걷게 된 한 남자가 우연히 고해성사를 통해 10년 전 사고의 진실을 알게 된 뒤 벌어지는 참극을 다루고 있어서 비극적인 미스터리와 오컬트 호러의 냄새를 진하게 맛볼 수 있는 작품입니다. 아무런 공통점도 없지만 최필원 본인이 번역했던 폴링 엔젤이 문득 떠오르기도 했는데, 단편영화로 만든다면 괜찮은 호러영화가 나오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외에 초단편이지만 반전의 맛이 짜릿했던 시스터즈’, 뜻밖의 사이코패스 캐릭터가 흥미진진했던 작가의 여자비명’, 잔인한 블랙코미디 풍의 아들의 취미’, 악마라는 테마와는 무관했지만 불쑥 소름이 돋았던 태동등이 눈길을 끈 작품들입니다.

 

거의 대부분의 수록작에 살인과 폭력이 등장하고 그 수위 역시 만만치 않음에도 불구하고 담담하고 간결한 문장들 때문에 읽는 동안엔 머릿속에 잔혹한 이야기로 입력되지 않았는데, 다 읽은 뒤 각 수록작의 줄거리를 요약하면서 이거, 진짜 센 이야기였네.”라고 뒤늦게 놀란 경우가 꽤 많았습니다. 그래선지 개인적으론 담담하고 간결한 문장들 대신 작가 자신이 번역했던 독한 영미권 스릴러 스타일로 쓰였다면 좀더 독자들에게 강하게 어필할 수 있었을 거란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일부 작품에서 반전이 쉽게 예상된 점이나 너무 정직한 구성 때문에 재미가 반감된 점도 아쉬움으로 남았는데, 이는 어쩌면 취향의 차이 탓일 수도 있어서 나중에 다른 독자들의 서평도 찾아보려고 합니다.

 

인터넷서점의 작가 소개글에 따르면 틈틈이 신작 소설 재스퍼마계촌을 집필 중이라고 하는데, 제목만 봐선 전혀 다른 장르(스릴러 vs SF호러?)의 작품일 것 같아서 궁금증이 일기도 합니다. ‘고해실의 악마가 좋은 반응을 얻어서 집필 중인 신작 소설들도 머잖아 독자들과 만나게 되기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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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은 왜 살해되는가 다카기 아키미쓰 걸작선 1
다카기 아키미쓰 지음, 김선영 옮김 / 검은숲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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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단두대로 머리를 자르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처형이라는 마술쇼가 벌어지기 직전 마술에 사용될 예정이던 인형의 머리가 사라집니다. 단순한 해프닝으로 여겨졌지만 이 마술쇼에서 머리 잘리는 앙투아네트 역할을 맡았던 유리코가 얼마 후 머리 없는 시신으로 발견되자 큰 소동이 벌어집니다. 쇼에 참가했던 아마추어 마술협회 회원들이 용의선상에 올랐지만 모두 알리바이가 입증된 상황에서, 명탐정으로 이름 높은 가미즈 교스케가 사건에 합류합니다. 하지만 가미즈가 신중에 신중을 거듭하는 사이 두 번째 희생자가 발생하는데, 이번에도 인형이 먼저 살해당한뒤 살인사건이 벌어진 탓에 언론은 인형 살인사건이라는 별명을 붙입니다.


 

다카기 아키미쓰가 창조한 명탐정 가미즈 교스케는 에도가와 란포의 아케치 고고로, 요코미조 세이시의 긴다이치 코스케와 함께 일본 본격 미스터리를 대표하는 3대 명탐정으로 불립니다. 주로 1950~60년대에 출간된 가미즈 교스케 시리즈가운데 한국에 소개된 건 다카기 아키미쓰의 데뷔작인 문신살인사건’(1948)인형은 왜 살해되는가’(1955) 등 두 편뿐입니다. (그 외에 천재적인 경제 사기범을 다룬 대낮의 사각변호사 햐쿠타니 센이치로 시리즈파계재판’, ‘유괴’, ‘법정의 마녀등이 출간됐습니다.)

 

인형은 왜 살해되는가(출판사 소개글대로) “마술을 매개로 한 불가능한 범죄와 인형을 이용한 예고살인이라는 괴이한 설정의 작품입니다. 범인은 살인을 저지르기 전에 동일한 수법으로 인형을 먼저 살해하는기이한 행각을 벌이는데, 그 행각 자체가 고도의 마술과도 같아서 경찰은 물론 명탐정 가미즈의 혼까지 쏙 빼놓습니다.

두 번째 사건 직후 용의자는 10여 명의 아마추어 마술협회 회원들로 압축되지만, 알리바이 문제라든가 불분명한 동기 때문에 좀처럼 수사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그런 와중에 전혀 다른 스타일의 사건이 발생하자 가미즈는 그의 명성에 어울리지 않게 수사에서 철수하기로 결정합니다.

 

광기에 사로잡힌 사이코패스의 쾌락살인인지, 막대한 재산을 노린 계획살인인지조차 확실치 않은 상황에서 가미즈를 혼란에 빠뜨리는 요소는 인형마술입니다. 왜 인형을 먼저 살해해야 했는지, 왜 범인이 굳이 마술과도 같은 어려운 방법을 써서 살해할 인형을 구하는 것인지를 알아내지 못하면 진상에 다가가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명탐정으로서의 첫 등장을 알린 문신살인사건에서 주술문신으로 인해 큰 혼란을 겪었던 가미즈가 또 한 번 비슷한 경험을 하게 된 셈인데, 1950년대라는 시대상까지 가미된 덕분에 인형마술은 기괴함과 고전미를 훨씬 더 강렬하게 발산합니다.

 

다만 다소 야박한 평점을 준 이유는 빠르고 긴박했던 문신살인사건과 달리 템포도 처지고 사족 같은 설명도 너무 많아서 중반 이후로 이야기가 정체됐기 때문입니다. 출판사 소개글 가운데 “(가미즈는) 매사를 지나치게 숙고하는 성격 탓에 단순한 메시지를 복잡하게 생각하다가 용의자를 잃거나 부주의한 행동으로 또 다른 살인사건을 놓치기도 한다.”라는 대목이 있는데, 바로 이 지나친 숙고가 이야기를 정체시킨 주범입니다. 물론 다 읽고 복기해보면 막판의 비약과도 같은 추리와 반전을 위해 지나친 숙고가 꼭 필요하긴 했지만, 이 세상사람 같지 않은 천재적인 명탐정 가미즈의 신비한 능력을 지나치게 강조하려다가 역효과가 더 크게 난 느낌이었습니다.

또한 마지막에 밝혀진 범인의 정체가 뜻밖의 충격을 주긴 했지만, 돌이켜보면 그가 왜 이토록 복잡하고 난이도 높은 연쇄살인을 저질렀는지 쉽게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물론 그럴 수밖에 없었던 사연들이 설명되긴 하지만 결과를 위한 다소 억지스러운 변명처럼 읽혔다고 할까요?

 

다카기 아키미쓰의 작품들에 만점을 준 적은 없어도 고풍스런 아날로그의 향기가 너무 좋아서 한국에 출간된 작품들은 모두 찾아 읽었습니다. ‘인형은 왜 살해되는가역시 고전미에 관한 한 무척 매력적이지만, 우선 미스터리 외적인 곁가지들이 이야기를 정체시키면서 지루하게 만든 점, 그리고 개인적으로 별로 좋아하지 않는 비약을 일삼는 천재 명탐정의 활약이 지나치게 부각된 점 때문에 아쉬움이 많이 남았습니다.

 

사족으로, 후반부에 두 편의 단편 미스터리(‘무고한 죄인’, ‘뱀의 원’)가 수록돼있는데, 짧지만 임팩트도 강하고 다카기 아키미쓰의 매력을 훨씬 더 강렬하게 맛볼 수 있었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그의 미스터리 단편집을 꼭 읽어보고 싶은데, 2017법정의 마녀이후 7년 넘게 소식이 끊기긴 했지만 언젠가는 그의 작품이 한국에 또다시 소개되기를 기대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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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는 무서운 꿈을 꾼다
우사미 마코토 지음, 이연승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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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책임한 엄마 때문에 사이비 종교시설에 얹혀살며 학교에서도 극심한 괴롭힘에 시달리던 8살 소년 와타루에겐 곧 태어날 엄마 뱃속의 동생과 학교에서 유일한 친구라 할 수 있는 아오토만이 희망이었습니다. 하지만 동생 마리나가 태어나고 얼마 후 끔찍한 비극이 벌어졌고 와타루는 모두와 헤어진 채 보육시설에서 홀로 자라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22년이 흐른 현재, 반찬가게 직원으로 외롭게 살아가던 와타루에게 뜻하지 않은 일이 벌어집니다. 엄청난 자산을 가진 제이슨 가오라는 투자자로부터 함께 일하자는 터무니없는 제안을 받은 것도 놀라웠지만 그의 사무실에서 어릴 적 헤어진 동생 마리나를 발견하자 와타루는 그대로 얼어붙고 맙니다.


 

소녀들은 밤을 걷는다’, ‘어리석은 자의 독’, ‘전망탑의 라푼젤’, ‘밤의 소리를 듣다에 이어 다섯 번째로 만난 우사미 마코토의 작품입니다. 다섯 편 모두 미스터리로 분류되긴 하지만 (‘밤의 소리를 듣다서평에 썼던 것처럼) 우사미 마코토의 작품은 정통 미스터리는 아니지만 어둡고 불길하면서도 애틋함이 녹아있는 독특한 분위기를 지니고 있어서 매번 새로운 장르를 접하는 듯한 특별한 경험을 만끽하게 됩니다.

 

아이는 무서운 꿈을 꾼다는 소재나 서사 면에서 지금껏 읽은 우사미 마코토의 그 어떤 작품과도 유사점이 없는 특이한 이야기를 다룹니다. 신비로운 능력을 지닌 마족(魔族)이 등장하고 코로나19를 연상시키는 치명적인 바이러스로 인해 전 인류가 위기에 빠지는 상황이 전개됩니다. 하지만 이야기의 핵심은 가족에 관한 것입니다. 가족 중 누군가는 무한한 그리움과 애정의 대상이지만, 또 다른 누군가는 증오와 살의의 대상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오랜 시간에 걸쳐 쉽사리 잊을 수도 또는 용서할 수도 없는 애증을 품어왔는데, 우연과 필연이 뒤섞인 가운데 한 자리에 모이게 되면서 더는 미룰 수 없는 가혹한 상황에 처하고 맙니다.

어떻게 궁리해 봐도 도저히 하나의 이야기로 엮기 어려워 보이는 소재들이지만, 우사미 마코토는 특유의 어둡고 불길하면서도 애틋함이 녹아있는서사를 통해 한 편의 독특한 판타지 미스터리를 창조해냈습니다.

 

사이비 종교시설과 학교에서 끔찍한 악몽에 시달리던 8살 소년 와타루에게 유일하게 손을 내민 건 파란 눈의 전학생 아오토였습니다. 그리고 와타루는 뜻밖의 사건들을 통해 아오토와 그의 가족이 이능력을 가진 기이한 종족임을 알아챕니다. 아오토 덕분에 난생 처음 가족의 온기와 훈훈함을 맛보기도 했지만, 와타루는 얼마 후 닥친 엄청난 비극 탓에 가족은 물론 아오토 일족과도 헤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22년이 지난 어느 날, 와타루는 증오의 대상이던 어머니, 그리움의 대상이던 여동생 마리나는 물론 아오토 일족과도 재회합니다. 하지만 와타루는 얼마 안 가 이 재회가 결코 우연이 아니었음을 깨닫곤 큰 충격에 빠집니다. 또한 아오토 일족의 오랜 비극과 비밀을 알게 되면서 말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에 휩싸입니다.

 

사실 등장인물들의 사연 많은 관계, 마족의 정체와 비밀, 치명적인 바이러스 창궐의 이유 등이 미스터리 서사의 핵심이긴 하지만 동시에 초대형 스포일러이기도 해서 이 작품을 읽지 않은 독자에겐 저의 서평이 뜬구름 잡는 이야기처럼 읽힐 수도 있습니다. 다만 우사미 마코토의 전작들을 통해 그녀의 팬이 된 독자라면 일단 믿고읽을 것을 추천하고 싶고, 혹시 이 작품으로 우사미 마코토를 처음 만난 뒤 다소 당황한 독자라면 그녀의 전작 가운데 어리석은 자의 독을 꼭 읽어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다소 취향을 탈 수 있긴 하지만 소녀들은 밤을 걷는다도 추천하고 싶습니다) 그 어느 미스터리 작가보다 개성 강한 세계관을 지니고 있어서 모든 작품이 특별하긴 하지만 일단 그녀의 필력을 제대로 맛보려면 어리석은 자의 독이 적절한 텍스트라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인 바람이라면 매번 새로운 장르와 독특한 이야기를 접하는 것도 괜찮은 일이지만, 가능하다면 미스터리 색채가 진한 우사미 마코토의 작품을 읽어보고 싶다는 점입니다. 일본 출간작 가운데 그런 작품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혹시 없다면 어리석은 자의 독과 비슷한 톤의 작품이라도 두 손 들고 환영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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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스터 1 스토리콜렉터 114
넬레 노이하우스 지음, 전은경 옮김 / 북로드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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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 소녀 리시가 교살당한 시신으로 발견되고, 유전자 감식 결과 아프가니스탄 난민 파바드 마흐무디가 수사선상에 오릅니다. 하지만 파바드는 거주지에서 종적을 감췄고 독일 전역에서 난민 정책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고조됩니다. 피아 산더와 올리버 폰 보덴슈타인이 이끄는 호프하임 경찰서 강력11반은 리시 사건의 작은 단서 하나 찾지 못한 상태에서 용의자도 아닌 파바드가 비난의 대상이 되자 당황합니다. 한편 한 남자가 숲에서 달려 나오다가 차에 치여 죽은 사건까지 맡게 된 피아와 보덴슈타인은 피해자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의문을 품게 됩니다. 복역을 마친 범죄자들이 갑자기 실종되거나 살해당한 사건들이 미제로 남은 경우가 많았는데, 차에 치여 죽은 남자 역시 최근 출소한 범죄자였기 때문입니다.


 

몬스터는 호프하임 경찰서 강력11반의 피아 산더와 올리버 폰 보덴슈타인의 활약을 그린 타우누스 시리즈의 열한 번째 작품입니다. 강력11반은 16세 소녀가 교살당한 사건과 정체불명의 집단에 의해 자행되는 사적 제재 사건을 동시에 맡습니다. 두 사건 모두 좀처럼 실마리를 드러내지 않은 탓도 있지만, 주인공인 피아와 보덴슈타인이 개인적인 이유들 때문에 사건에 집중하지 못하다 보니 강력11반은 그 어느 때보다도 어수선한 분위기와 엄청난 스트레스 속에 수사를 진행합니다.

 

전혀 무관해 보이던 두 사건이 뜻밖의 접점을 통해 연관을 갖게 되긴 하지만, 이야기는 사적 제재 사건에 좀더 큰 비중을 두고 전개됩니다. 범행을 저지른 인물 또는 복역을 마친 범죄자를 대상으로 한 사적 제재는 오래전부터 은밀하게 자행돼왔지만 범행방식도 제각각인데다 단순 실종으로 처리된 적이 많아서 동일범에 의한 소행으로 여겨지지 않았고, 그런 탓에 한 남자가 기이한 모습으로 차에 치여 죽은 사건이 벌어질 때까지 단 한 번도 수사선상에 오른 적이 없습니다. 피아와 보덴슈타인을 비롯한 강력11반도 처음엔 자신들이 발견한 패턴을 의심했지만, 동료의 죽음을 초래한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지면서 사적 제재의 전모가 드러나자 말 그대로 경악을 금치 못합니다. 결국 외부에서 투입된 인물이 특별수사팀장을 맡는 전대미문의 사태에 직면한 강력11반은 혼란과 내분 속에 두 사건의 진실을 밝혀내는데 전력을 다합니다.

 

사실 사적 제재라는 소재 자체도 그렇고, ‘범죄피해자 유족에게 접근하여 복수를 도와주겠다는 정체불명의 집단이라는 설정 역시 다소 진부하고 상투적이어서 과연 넬레 노이하우스가 어떻게 자신만의 스타일로 요리할지 무척 궁금했습니다. 그녀만의 특별한 돌파구가 없다면 진부함과 상투성에서 벗어나기 어려워 보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런 우려를 무색하게 만드는 진짜 특별한 돌파구1권 후반쯤 등장했고, 그때부터 이야기의 긴장감과 속도감은 엄청나게 고조됩니다. 모르긴 해도 타우누스 시리즈를 계속 지켜봐온 독자라면 그 돌파구의 장면에서 한동안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을 게 분명합니다. 저 역시 혹시 잘못 읽은 게 아닐까?”라는 생각에 두세 번 되읽었는데, 어쨌든 (진부함과 상투성을 모조리 불식시킨 건 아니지만) 그 돌파구 덕분에 몇 배는 더 이야기에 몰입할 수 있었습니다.

 

한편 타우누스 시리즈의 공식처럼 이번에도 두 주인공 피아와 보덴슈타인은 개인적인 문제로 큰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피아는 남편과의 미묘한 갈등에다 치매 증세를 보이는 어머니 때문에 일에 집중하지 못했고, 퇴직이 얼마 안 남은 보덴슈타인은 자신의 자리를 노리는 외부인사가 있다는 소문에 부담감을 느끼는 와중에 오랫동안 함께 일해 온 동료의 충격적인 비밀을 알게 되면서 회복 불가능한 수준의 트라우마를 안게 됩니다. 언제나처럼 피아와 보덴슈타인은 수사에 몰입하는 것으로 자신들의 스트레스와 트라우마를 견뎌내지만 그 과정은 (역시 언제나처럼) 고통스럽고 안쓰러울 뿐입니다.

 

타우누스 시리즈가운데 평점 별 4개를 준 건 시리즈 1편과 2편인 사랑받지 못한 여자너무 친한 친구들이후 처음입니다. 보통 서평 첫머리에 줄거리를 쓰면서 곤란한 적이 거의 없었는데, ‘몬스터는 줄거리 구상에 꽤 애를 먹기도 했고, 기껏 정리한 줄거리도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말하자면 두 사건 모두 무척 산만하고, 사족도 많고, 방향성 없이 빙빙 돌다가 갑자기 엔딩에 도달한 느낌이 강했는데, 그런 탓에 읽는 동안 집중이 잘 안 됐고, 일목요연한 줄거리 정리 역시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타우누스 시리즈는 두툼한 분량에 걸맞게 등장인물도 많고 사건도 복잡하게 설정돼서 머릿속을 어질어질하게 만들긴 하지만 그래도 독자를 헤매게 한 적은 거의 없습니다. 수십 명의 인물, 최소 2개 이상의 사건, 묵직한 주제 등 적잖은 요소들이 선명한 구도 속에 적절하게 배치돼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몬스터에서는 그런 요소들이 마구 어질러져 있거나 아니면 따로 노는 듯한 인상을 자주 받았습니다. “과연 누가 괴물인가?”라는 이 작품의 진정한 화두보다 수사 도중 벌어진 충격적인 사건 탓에 혼란, 의문, 배신감 등 복잡한 심경에 사로잡힌 강력11반 멤버들의 위기가 더 기억에 남은 건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사족으로... 전작인 영원한 우정으로에서 보덴슈타인이 58세로 소개됐는데, 내용 상 1년 후인 2019년 배경의 몬스터에서 57세로 나옵니다. 그는 1961년생이니 두 작품에서의 나이가 뒤바뀐 것 아닐까요? 정확히 어떤 작품부터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주조연을 막론하고 꽤 많은 인물이 아이고라는 말을 자주 쓰기 시작했습니다. 원작이 어떤지는 잘 모르겠지만 갑작스레 인물의 격과 분위기를 떨어뜨리는 느낌이라 매번 눈에 거슬렸습니다. 다른 적당한 표현이 없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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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카르테 0 - 새로운 시작 아르테 오리지널 10
나쓰카와 소스케 지음, 백지은 옮김 / arte(아르테)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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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카르테 1~3’은 나가노 현의 소도시 마쓰모토에 위치한 혼조병원의 소화기내과 의사 구리하라 이치토가 주인공인 따뜻하고 감동적인 메디컬 소설입니다. 구리하라는 어딘가 4차원 같은 인상이 짙은 인물입니다. 근대 소설가 나쓰메 소세키의 광팬으로 그의 소설을 줄줄 외우고 다니는 것은 물론 말투까지 고풍스럽기 그지없고, 뛰어난 의술과 함께 오직 환자의 미소만 생각하는 선한 능력자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입이 험하고 차림새도 영 허술한데다 자신을 근면성실의 전형이라 자화자찬하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환자를 끌어들이는 구리하라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외래든 응급실이든 그가 나타나는 곳엔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환자가 몰려들어서 동료의사와 간호사들로부터 장난기 섞인 조롱을 받기도 합니다.

 

신의 카르테 0’는 구리하라가 아직 의사가 되기 전, 그러니까 시나노 의대 졸업반 시절부터 혼조병원에 레지던트로 들어와 첫 환자를 담당하게 된 무렵까지의 이야기를 담은 프리퀄입니다. 모두 네 편의 단편이 실려 있는데, 비단 구리하라와 그의 절친 동기생들의 과거뿐 아니라 그가 몸담고 있는 혼조병원이 급변하는 의료 환경을 헤쳐 온 이야기, 산악 사진가이자 훗날 구리하라와 결혼하는 하루나의 사연도 함께 실려 있어서 단순한 프리퀄 이상의 재미와 감동을 만끽할 수 있습니다.

 

동틀 무렵

구리하라가 절친인 신도 다쓰야, 스나야마 지로 등과 함께 시나노 의대 기숙사 아리아케에서 보낸 날들을 그린 이야기로, 예비의사로서의 고민과 청춘물의 재미를 함께 맛볼 수 있습니다.

 

약속이 지켜질 때

혼조병원이 ‘24시간 365일 진료간판을 처음 달았던 무렵의 이야기로, 이타가키(왕너구리), 나이토(늙은여우), 이누이 등의 의료진과 수익만 앞세우는 사무장 가나야마가 사사건건 충돌하는 에피소드와 함께 구리하라가 면접을 통해 혼조병원의 일원이 되는 과정이 그려집니다.

 

신의 카르테

레지던트 4개월차를 맞이한 구리하라가 드디어 첫 내시경 진찰과 첫 담당환자를 경험하는 이야기로, 이타가키(왕너구리)의 지도 아래 조금씩 성장해나가는 구리하라를 지켜볼 수 있습니다.

 

겨울 산의 기록

하루나가 겨울 산에서 조난당한 남자를 구한 뒤 오두막에서 만난 부부와 대화를 나누며 자신의 과거를 조금씩 들려줍니다. 구리하라와 사귄 지 1년쯤 된 시절의 하루나의 이야기입니다.

 

전작들을 읽어 온 독자에겐 무척 각별하게 읽힐 만한 이야기들이지만, 프리퀄이란 특성 상 전작들을 안 읽은 경우 이해하기도, 공감하기도 어려운 내용들인 게 사실입니다. 물론 시리즈에 따라 프리퀄을 먼저 읽고 본편을 읽는 것도 괜찮은 경우가 있긴 하지만, ‘신의 카르테 0’는 여러 인물들의 이야기를 단편 형식으로 꾸민 작품이라 아무래도 전작들이 선행필수라는 생각입니다.

 

이 작품 뒤에 이어지는 시리즈 마지막 작품 신의 카르테 4’(일본에서 2019년에 출간됐는데 지금까지 새 작품 소식이 없어서 마지막이라는 표현을 썼습니다)는 혼조병원을 떠나 시나노 대학 의학부에 들어간 구리하라의 이야기를 그립니다. 3년 전쯤 이미 읽은 작품이긴 한데, 1편부터 순서대로 정주행하다 보니 다시 한 번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구리하라가 어떤 인물인지도 제대로 모른 채 읽었을 때와는 달리 새롭고 특별한 감흥을 느낄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신의 카르테는 비록 현실에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의사 구리하라가 등장하는 판타지에 가깝지만 재미와 감동을 동시에 맛볼 수 있는 보기 드문 메디컬 소설입니다. 혹시 이 서평을 보고 궁금증을 느낀 독자라면 시리즈 첫 편부터 찬찬히 그 재미와 감동을 느껴볼 것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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