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스트라토 : 거세당한 자
표창원 지음 / &(앤드)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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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금요일 밤마다 도심 한복판 곳곳에서 절단된 남성 신체의 일부가 발견됩니다. 자극적인 언론에 의해 카스트라토 사건이란 이름까지 붙은 가운데 피해자들이 성범죄자였다는 사실까지 밝혀지면서 여론은 들끓기 시작합니다. 단서 하나 못 잡아 궁지에 몰린 경찰은 결국 강력사건 수사역량 강화를 위해 특별히 설치된 ACAT까지 동원하며 각 분야의 전문가와 베테랑을 투입합니다. 하지만 밝혀진 거라곤 범인이 여러 명이라는 점, 성범죄자를 노린 주도면밀한 사적 복수라는 점, 피해자들의 생사가 불확실하다는 점뿐입니다. 첫 사건을 맡았던 인왕경찰서 강력5팀장이자 프로파일러 이맥은 ACAT와의 협업을 통해 조금씩 사건의 진상을 파악해내는데, 문제는 그 과정에서 자신의 과거 속 불편한 사실들과 자꾸만 마주치게 된다는 점입니다.


 

카스트라토(변성기 이전에 거세되어 고음역대를 소화할 수 있게 된 남성 가수)라는 소재 자체도 눈길을 끌었지만,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프로파일러 표창원의 첫 소설이라 관심을 갖게 된 작품입니다. 의사가 쓴 메디컬 소설이나 변호사가 쓴 법정물처럼 좀더 전문적인 묘사와 꼼꼼한 디테일을 접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프로파일러의 활약이나 사적 복수 모두 좋아하는 소재들이라 주인공 이맥의 행보도, 범인들의 정체와 범행 전반에 관한 묘사도 무척 기대가 됐습니다. 특히 거세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통해 성범죄자를 사적으로 응징하는 범인들에게 곧바로 이입이 되어 응원하는(?) 마음까지 들면서 과연 이 이야기가 어떻게 마무리될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더불어 적잖은 분량을 통해 소개되는 이맥의 불행했던 과거들이 카스트라토 사건과 어떤 식으로 접점을 갖게 될지도 호기심을 자극한 요인 중 하나입니다.

 

나름 여러 면에서 기대를 가진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꽤 야박한 평점을 주고 말았는데, 첫 번째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이 작품의 가장 큰 미덕인 프로파일러 표창원의 전문적인 묘사와 꼼꼼한 디테일입니다. 단적으로 말하면 소설이 아니라 프로파일러 개론을 강의하는 교수의 강의노트를 읽는 듯한 느낌을 여러 곳에서 받았다는 뜻입니다. 전문성도 디테일도 좋지만 이야기의 흐름을 방해할 정도로 과도했던 탓에 스킵하듯 건너 뛴 페이지가 적지 않았습니다.

두 번째는 이맥의 과거와 현재의 사건 사이의 접점이 다소 억지스러울 정도의 우연들로 채워진 점입니다. 좀 심하게 말하면 사건에 연루된 적잖은 인물들이 이맥의 과거에 한번쯤은 등장했던 자들이며, 그야말로 오랜만에 그것도 난데없이 이맥 앞에 나타나곤 합니다. 클라이맥스와 엔딩에 이르면 이 억지스러운 우연들이 반드시 필요했던 설정이란 걸 알게 되긴 하지만, 독자조차 매번 ?”라며 의아하게 여길 그 우연들을 정작 당사자인 이맥이 눈치 채지 못한 점은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세 번째는 이맥과 ACAT가 용의자를 선정하는 과정이 어이없을 정도로 쉽고 단순하다는 점입니다. 드넓은 모래사장에서 별 어려움 없이 작은 바늘 하나를 찾아낸 느낌이랄까요? 심지어 사건 자체와 아무 연관 없는 특정인물을 오로지 감 때문에용의선상에 올리는 대목에선 웃음이 날 정도였습니다. 이어지는 수사 과정 역시 곳곳에서 허술하거나 이해할 수 없는 비약으로 채워져 있어서 긴장감을 오히려 떨어뜨리곤 했습니다.

 

여러 이유를 대긴 했지만 야박한 평점의 변()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소설로서의 재미와 완성도가 떨어진다.”입니다. 확실하게 기억에 남은 건 프로파일러 개론뿐이고, 주인공 이맥의 캐릭터나 사적 복수극의 긴장감이나 범죄스릴러 서사의 매력은 그다지 와 닿지 않았습니다. 특히 이맥의 경우 불행했던 과거사 외에는 단편적인 정보들만 산발적으로 소개돼서(가령 이맥의 지독한 우울증은 초반에 딱 한 줄만 언급된 뒤론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생생한 인물상을 느끼기 어려웠습니다.

 

작가의 말을 보면 이맥을 주인공으로 한 시리즈를 구상 중인 것 같은데, 다음 작품에선 프로파일러 표창원의 전문적인 묘사와 꼼꼼한 디테일보다는 이야기 자체에 좀더 공을 들였으면 좋겠습니다. 겉모습과 스펙은 완벽하지만 인간미보다는 인공미가 더 강해 보였던 이맥에 대해서도 좀더 많은 고민이 필요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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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바닥
조 R. 랜스데일 지음, 박미영 옮김 / 황금가지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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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933, 미국 텍사스 동부의 작은 마을 마블 크리크에 사는 12살 소년 해리는 참혹하게 살해당한 뒤 강가에 유기된 흑인여성의 시신을 발견합니다. 지역경관인 아버지 제이컵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수사과정에 어떻게든 따라다니던 해리는 이후 유사한 사건들이 연이어 벌어지자 마블 크리크에 전설처럼 내려오는 염소인간의 소행이 아닐까 의심하기도 합니다. 그런 가운데 제이컵의 수사를 방해하려는 백인들의 움직임이 감지되고, 덩달아 그동안 흑인들과 우호적으로 지내온 제이컵 가족에 대한 비난과 압박도 거세지기 시작합니다. 그러던 중 백인여성의 시신이 발견되자 마을은 광기에 사로잡히고, 얼마 후 한 흑인이 범인으로 매도당한 뒤 백인들에게 참살당하는 사태가 벌어집니다.


 

링컨이 흑인들을 해방시킨 지 한참 되었지만 당시 흑인들의 삶은 남북전쟁 이전과 별다르지 않았다.” (p79)

 

미국 남북전쟁이 1865년에 끝났으니 밑바닥의 시간적 배경은 그로부터 7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난 뒤입니다. 뿌리 깊은 노예제가 완전히 청산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만한 시간이 흐른 뒤에도 남북전쟁 이전과 별다르지 않은 무자비한 인종차별이 버젓이 자행됐다는 사실은 그 시대가 얼마나 참혹하고 폭력적이었는지, 또 그런 야만적인 세상에서 양심과 선량함이 얼마나 지독한 시련을 겪어야만 했는지 새삼 피부에 와 닿도록 실감하게 만듭니다.

 

밑바닥은 연쇄살인마의 실체를 밝혀내는 미스터리 스릴러이자 인종차별에 관한 생생한 고발소설이기도 합니다. 이 무거운 서사의 주인공이 12살 백인 소년이란 점은 안쓰러움과 비극성을 더욱 고조시키는데, 작가는 인종차별 이야기의 주인공은 으레 선한 백인이라는 도식적인 설정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껍데기뿐인 정의감보다는 의무감과 호기심에 사로잡힌 12살 소년 해리를 앞세움으로써 자칫 뻔하게 흘러갈 수 있는 이야기를 새로운 방식으로 전개시킵니다.

 

과학수사는 아직도 먼 미래의 일이고, 목격자나 단서 하나 없는 상황에서 이뤄지는 제이컵의 수사는 범인이 자수하지 않는 한 100% 실패가 확실해 보입니다. 12살 소년 해리가 나름대로 벌이는 조사 역시 판타지가 아닌 다음에야 결실을 이룰 리 없어 보입니다. 중간에 투입되는 해리의 외할머니가 잠시 명탐정 흉내를 내긴 하지만 흔적도 남기지 않은 잔혹한 연쇄살인마의 꼬리가 쉽게 잡힐 리는 없습니다. 무엇보다 살인사건 피해자가 흑인일 경우 아무 것도 안 하고 그냥 놔두는것이 당연한 관행인 현실 때문에 제이컵과 해리의 조사는 넘어설 수 없는 장벽 앞에 내동댕이쳐진 거나 다름없습니다. 독자 입장에선 과연 연쇄살인마가 잡히긴 잡힐까, 라는 우려 속에 페이지를 넘길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원조 프로파일러라 불릴 만한 인물이 등장하여 연쇄살인마의 특징과 그가 남긴 서명을 분석하는 장면은 무척 흥미로웠고, 범인이 아닐까 의심되는 여러 인물들을 놓고 해리가 나름 추리를 이어가는 장면도 기특함(?) 이상의 기대를 갖게 만들었습니다. 무엇보다 백인여성의 시신이 발견되고 무고한 흑인이 참살당하는 사건이 벌어지면서 잠시 주춤했던 이야기가 긴장감과 속도감을 되찾는 대목부터는 다시금 미스터리 스릴러 본연의 서사가 매력적으로 전개돼서 마지막에 어떤 엔딩이 기다리고 있을지 궁금하게 만들어줍니다.

 

R. 랜스데일은 2022년에 읽은 빅 티켓으로 처음 만난 작가입니다. 19세기 말 텍사스를 배경으로 강도들에게 납치당한 여동생을 구하려는 16세 소년과 추적자 집단의 이야기가 너무 매력적이어서 읽자마자 팬이 됐지만, 앤솔로지 외에 한국에 출간된 건 (2024년 현재) ‘밑바닥이 유일한 작품이라 너무 아쉬울 뿐입니다. ‘빅 티켓밑바닥모두 시대적 상황과 스릴러 서사를 절묘하게 조합한 작품들이라 재미 이상의 여운을 느낄 수 있는 작품들이니 관심 있는 독자라면 한번쯤 검색해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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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버 1
오쿠다 히데오 지음, 송태욱 옮김 / 은행나무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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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마현과 도치기현을 흐르는 와타라세강에서 두 구의 젊은 여성 시신이 발견됩니다. 문제는 시신의 상태와 시신을 유기한 장소가 10년 전 벌어진 미제 연쇄살인사건과 판박이처럼 동일하다는 점입니다. 당시 체포된 유력한 용의자 이케다는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났고, 이후 10년 동안 그 사건은 군마현경과 도치키현경의 수치이자 숙제로 남아있습니다. 그런데 동일범인지 모방범인지 가늠할 수 없는 사건이 재발하자 두 현경은 남다른 각오로 수사에 임합니다. 그리고 집요한 탐문과 제보 덕분에 세 명의 남자를 용의선상에 올립니다. 하지만 모두 심증만 있을 뿐 확실한 물증이 없다 보니 수사는 좀처럼 앞으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양들의 테러리스트’(구판 제목 올림픽의 몸값’)죄의 궤적에 이어 쏘아 올린 홈런이라는 출판사 소개글 때문에 혹시 두 작품의 주인공인 경시청 수사15계의 오치아이 마사오가 등장하는 1960년대 배경의 미스터리가 아닐까, 기대했는데 리버는 경찰소설+범죄미스터리+군상극이라는 큰 틀은 앞선 두 작품과 비슷하지만 주인공도 시대적 배경도 전혀 다른 스탠드얼론입니다.

 

10년 전, 두 시신 모두 동일범의 소행이라 확신한 두 현경은 합동수사본부를 설치했지만, 경쟁심과 경계심이 지나쳤던 탓에 오히려 부작용만 일으켰습니다. 그 와중에 도치기현경이 무리한 수사를 진행하다가 모든 걸 망쳐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런 전력 때문에 10년 만에 재발한 사건을 대하는 두 현경의 태도는 말 그대로 죽을 각오그 자체입니다. 무엇보다 동일범의 소행이라면 왜 10년의 공백이 있었으며 굳이 같은 장소에 같은 모양새로 시신을 유기한 이유는 무엇인지, 혹시 모방범의 소행이라면 어떻게 자세한 범행 정황을 알아낼 수 있었는지 등 모든 것이 모호함 투성이라 두 현경의 수사는 각오와 달리 초반부터 지지부진할 따름입니다.

 

리버1~2권 합쳐 800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분량의 작품인데, 사건의 규모에 비해 다소 과한 분량이 필요했던 건 누가 범인?’보다도 사건에 연루된 여러 인물들의 복잡다단한 감정과 태도에 더 주력한 군상극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비슷한 스케일을 지닌 미야베 미유키의 모방범이 원톱 주인공을 내세워 극적이고 감정적인 스토리를 자아냈다면, ‘리버는 서로 다른 생각과 집념에 사로잡힌 여러 주인공이 이끄는 냉정한 하드보일드 스타일의 군상극이라 할 수 있습니다. 10년 전 사건을 맡았던 전직 형사, 10년 전 사건 피해자의 아버지, 첫 살인사건 취재에 바짝 긴장한 신참 기자, 범죄심리학에 능통한 대학 조교수, 그리고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된 세 명의 남자 등 다양한 인물들의 일거수일투족이 두 현경의 수사과정 못잖게 큰 비중을 차지합니다.


 

몰입하며 따라갈 원톱 주인공도 없고, 일찌감치 세 명의 용의자가 대두돼서 누가 범인?’이라는 흥미가 반감된 듯 보이지만, 오쿠다 히데오 범죄미스터리 특유의 집요한 디테일 속에 흐르는 불온한 긴장감은 훨씬 더 강렬한 흡인력을 지니고 있어서 미야베 미유키의 모방범과는 전혀 다른 스타일의 매력을 발산합니다.

집요한 디테일10년 전의 실패를 만회하려는 두 현경의 절박한 수사 과정을 꼼꼼하게 그린 대목뿐 아니라 각기 다른 이유로, 또 각기 다른 용의자에 주목하며 진범 찾기에 집착하는 여러 주인공들의 행적에서도 목격됩니다. 다소 느슨하게 읽힐 여지도 있지만 독자는 페이지를 넘길수록 디테일의 힘에 빠져들게 되고, 그 안에 흐르는 불온한 긴장감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 긴장감의 이유 중 하나는 세 명의 용의자 중 누가 범인이냐에 따라 여러 주인공들이 맞이하게 될 엔딩이 제각각이란 점, 즉 자신이 주목한 용의자가 범인이 아니라면 설령 사건이 해결된다 해도 조금도 만족스럽거나 행복한 엔딩을 맞이하지 못할 인물도 있다는 점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진실보다도 자신의 집착에 더 몰두하는 인물들이 펼치는 군상극이야말로 리버의 가장 큰 미덕이라는 생각입니다.

 

말초적인 재미나 감정에 호소하는 짜릿함을 찾아볼 순 없지만 건조하고 냉정하면서도 묵직하게 밀어붙이는 범죄미스터리의 기본을 맛보고 싶은 독자라면 리버를 비롯한 오쿠다 히데오의 작품들을 꼭 읽어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1960년대 경시청 수사1과 오치아이 마사오의 세 번째 이야기도 좋고, ‘리버에 등장한 군마현경과 도치기현경의 인물들의 두 번째 활약도 좋으니 머잖아 오쿠다 히데오의 새 범죄 미스터리와 다시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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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 명의 목숨
피터 스완슨 지음, 노진선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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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런 접점도 없는 전국 각지의 아홉 명의 남녀가 자신들의 이름 아홉 개만 적혀있는 의문의 편지를 받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그중 한 명이 바닷가에서 익사체로 발견되고, 다음날엔 또 한 명이 총에 맞아 사망합니다. 편지를 확보한 FBI는 남은 일곱 명을 수소문하는 것과 함께 수사의 실마리를 찾으려 하지만 명단 속 인물들 간에 아무런 공통점도 없어서 곤혹스러운 상황에 빠집니다. 명단에 자신의 이름이 있는 탓에 수사에서 배제된 FBI요원 제시카는 아홉 명 사이의 연결고리를 찾던 중 의심스러운 정황을 발견하지만 좀더 확실하게 확인할 방법이 없어 답답할 뿐입니다. 그 와중에 명단 속 인물들은 하나둘씩 전혀 다른 방법으로 살해당합니다.

 

미스터리 마니아라면 줄거리만 보고도 이 작품이 애거사 크리스티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와 깊은 연관이 있음을 눈치 챌 것입니다. 실제로 본문 속에서 몇몇 인물들은 어릴 적 인상 깊게 읽은 작품이라며 그 내용 일부를 언급하기도 하고, 또 어떤 인물은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를 연이어 탐독하며 사건의 실마리를 찾으려 애쓰기도 합니다. 그래선지 아홉 명의 목숨은 국내외에서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에서 영감을 받았다든지, 과감하게 재해석한 작품이라는 평을 받기도 했습니다. 말하자면 아홉 명의 목숨은 고전미가 물씬 풍기는 피터 스완슨 스타일의 범죄 미스터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체불명의 범인에 의한 연쇄살인사건을 다루지만 이야기는 꽤 완만하고 차분하게 시작됩니다. 기이한 편지를 받은 피해자들의 제각각의 반응(두려움, 무시, 은닉 등)과 함께 그들의 평범한 일상이 마치 폭풍 전의 고요처럼 잔잔하게 그려지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그 일상들은 연쇄살인사건과는 전혀 연관 없어 보여서, “피터 스완슨이 이렇게 느슨하게 시작하는 스타일이 아닌데...”라고 의아해 할 때쯤 첫 희생자가 발생하고 이야기는 서서히 발동을 걸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내 한 챕터마다 한 명씩, 그것도 매번 다른 방식에 의해 살해되면서 긴장감과 속도감이 급속히 고조됩니다.

 

사실 큰 그림은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의 틀을 벗어나지 못할 거란 예단 때문에, 또 명단 속 아홉 명은 과거의 특정한 비극에 가담한 죄로 범인의 살해 목록에 오른 게 확실하다는 점 때문에 초반부터 궁금증 자체가 크게 들진 않았습니다. 하지만 매번 살인이 벌어질 때마다 예상치 못한 상황들이 전개되고, 사건과는 무관해 보이지만 묘하게 불안감을 자극하는 장치들도 곳곳에 배치되어 있으며, 살해위협에 대처하는 각 인물들의 태도 역시 뜻밖인 경우가 많아서 과연 이들 중 누가 실제로 살해될 것인지, 누군가 살아남을 것 같긴 한데 과연 누구일지 등 독자의 눈길을 끄는 대목들이 수두룩한 것 역시 분명한 사실입니다.

 

제 경우엔 범인의 정체라든가 과거의 특정한 비극에 대한 궁금증보다는 피터 스완슨이 쓴 고전 미스터리는 어떤 맛일까?’라는, 마치 아이돌 가수가 자신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유행했던 옛날 노래를 어떻게 소화해낼까, 와 비슷한 기대감이 더 컸는데, 결과만 말하자면 그 기대감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만족스럽게 채워졌습니다. 즉 그의 전작들에 비해 다소 밋밋한 구성과 전개에도 불구하고 미스터리의 농밀함이 더 진하게 느껴진 것도, (의외의 반전이 기다리고 있긴 하지만) 어느 정도 예측 가능했던 엔딩이 나름 깊은 여운을 남겨준 것도 모두 피터 스완슨에게 있어 가장 큰 무기였던 고전의 힘덕분이라는 생각입니다. 물론 영감과 재해석의 원천인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와는 전혀 다른 매력을 만끽할 수 있었던 건 당연히 피터 스완슨만의 필력 덕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피터 스완슨의 빠르고 세련된 서사에 익숙한 독자라면 이 작품의 호흡이 다소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오랜만에 세련된고전의 풍미를 맛보고 싶은 독자에겐 아홉 명의 목숨이 분명 좋은 선물이 돼줄 것입니다. 제 경우엔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 벌써 몇 번이나 읽었던 애거사 크리스티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를 다시 한 번 읽고 싶어졌는데, 모르긴 해도 저와 비슷한 경험을 하는 독자도 적잖을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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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시체를 부탁해
한새마 지음 / 바른북스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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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 미스터리 잔혹범죄전담팀 라플레시아걸로 처음 만났던 한새마의 미스터리 단편집입니다. 여러 편의 앤솔로지나 수상작품집에서 자주 이름을 목격했던 터라 큰 기대를 갖고 읽었던 잔혹범죄전담팀 라플레시아걸은 여러 면에서 다소 아쉬움이 남았었는데, 그에 반해 엄마, 시체를 부탁해는 단편 미스터리의 미덕을 만끽할 수 있는 작품이어서 자칫 모르고 지나칠 뻔했던 한새마의 내공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모두 일곱 편의 작품이 수록돼있는데, 여러 장르의 미스터리와 스릴러(도메스틱, SF, 호러, 본격+사회파 등)를 맛볼 수 있습니다. 여성노숙자, 10대의 집단 괴롭힘과 성매매, 이식용 장기 배양, 산후우울증, 간병살인, 소시오패스에 가까운 관종 등 다양한 소재도 눈길을 끌지만 서사와 주제도 묵직하고 문장의 깊이와 찰진 맛도 매력적이어서 잔혹범죄전담팀 라플레시아걸의 서평 때 묘사가 가볍거나 수박 겉핥기식으로 듬성듬성 이뤄지는 미스터리라고 지적했던 일이 무색하게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또 한 가지 흥미로웠던 건 표제작인 엄마, 시체를 부탁해를 비롯하여 거의 모든 작품에 극과 극에 달할 정도로 캐릭터가 상반된 엄마들이 등장한다는 점입니다. 폭력과 불행에 굴복한 채 어린 딸에게 환상을 강요한 엄마, 명탐정 못잖은 추리력과 대범함을 지닌 엄마, 모성이 파괴된 상태에서도 끝까지 싸움을 포기하지 않는 엄마, 욕망과 탐욕에 찌들어 무슨 짓이든 서슴지 않는 엄마 등 다소 파격적인 인물들이 이야기를 이끌어갑니다. (일부 작품에서 엄마의 영향을 받은 이 태연한 얼굴로 누군가의 목숨을 가볍게 훔치는 소시오패스로 그려진 점도 눈길을 끌었습니다.)

 

인상 깊게 읽은 작품들을 간단하게 요약해보면...

낮달은 정유정의 ‘28’을 연상시키는 디스토피아로 막을 연 뒤 참혹한 현실 이야기로 마무리되면서 깊은 여운을 남겼고, ‘마더 머더 쇼크는 반전을 품은 도메스틱 스릴러의 찐맛을 느낄 수 있는 작품으로, 시점을 바꿔가며 전개되는 엄마이자 살인자의 이야기입니다.(수록작 가운데 저의 원픽입니다) 자살로 종결된 사건이 한 기자의 집요한 탐문을 통해 뜻밖의 진상을 드러내며 타살로 입증되는 과정을 그린 어떤 자살은 형식과 내용 모두 독특해서 좋았고, 사고 후 기억을 잃은 여자가 조금씩 진실을 눈치 채가는 이야기를 다룬 잠든 사이에 누군가는 단편만의 매력과 짜릿한 반전이 일품인 스릴러입니다.

 

잔혹범죄전담팀 라플레시아걸의 아쉬움 때문에 읽을까 말까 주저했던 게 사실인데, ‘엄마, 시체를 부탁해는 기대 이상의 만족감과 함께 단편에서만이 가능한 작지만 알찬 미스터리의 힘과 미덕을 맛볼 수 있게 해줬습니다. 아직 한새마와 만난 적 없는 독자라면, 또 탄탄한 한국 단편 미스터리를 찾는 독자라면 엄마, 시체를 부탁해를 읽어볼 것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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