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윌 파인드 유
할런 코벤 지음, 노진선 옮김 / 문학수첩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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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살 아들 매슈를 살해한 혐의로 종신형을 복역 중인 데이비드 버로스는 지난 5년 간 모든 면회를 거절해왔지만 뜻밖의 상황으로 인해 처제인 레이철과 마주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녀가 보여준 사진 한 장 때문에 대혼란에 빠집니다. 놀이공원에서 찍은 한 가족사진의 귀퉁이에 8살이 된 매슈의 모습이 찍혀있었기 때문입니다. 데이비드는 자신이 누명을 쓴 것이라 확신하면서도 어쩌면 야경증과 몽유병을 앓던 자신이 술에 만취한 채 매슈를 죽였을 수도 있다는 의심을 떨치지 못했고, 그게 아니라도 매슈를 지키지 못한 자책감에 사로잡혀 법정에서도 적극적인 방어를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매슈가 살아있다는 걸 확인한 이상 데이비드는 매슈를 찾아내고 사건의 진상을 밝히기로 결심합니다. 그리고 그를 위한 첫 관문은 바로 탈옥입니다.


 

가족, 실종, 액션, 반전 등 할런 코벤 특유의 코드들이 잘 버무려진 작품입니다. 특히 아이 윌 파인드 유라는 제목만 봐도 할런 코벤의 트레이드마크인 실종이란 소재가 다시 한 번 사용됐음을 알 수 있는데, ‘자신이 죽인 줄 알았던 아들이 실은 이 세상 어딘가에 살아있다라는 설정은 실종의 의미를 좀더 넓고 극적으로 확대시킨 것은 물론 원죄(冤罪)의 서사까지 품고 있어서 초반부터 긴장감과 몰입감을 극대화시켰습니다.

 

매슈를 찾기 위한 첫 관문인 탈옥 과정이 초반을 장식합니다. 뜻밖의 도움 덕분에 수월할 것만 같던 탈옥은 예상대로돌발 변수를 만나면서 위기를 맞이하고, FBI의 유능한 요원들까지 가세하여 추격전에 나선 탓에 데이비드는 갖은 고생을 겪게 됩니다. 손에 쥔 단서라곤 사진 한 장이 전부인 데이비드는 이후 처제 레이철의 도움을 받아 막막하기만 한 진실 찾기에 나서는데, 법정에서 결정적인 증언으로 자신의 유죄를 확정시킨 한 증인을 만나는 것을 시작으로 언제 끝날지 모르는 아득한 여정의 첫 발을 뗍니다.

 

매슈가 진짜 살아있다면 그날 밤 피범벅이 된 채 매슈의 방에서 발견된 시신은 누구인지, 자신에게 아들 살해범이란 누명을 씌워가며 매슈를 데려간 건 누구인지, 이웃의 평범한 노인이 거짓 증언으로 자신을 함정에 빠뜨린 이유는 무엇인지, 과연 사진 속 소년이 진짜 매슈가 맞긴 맞는 건지 등 크고 작은 미스터리가 동시에 진행되는 가운데 전처인 셰릴과 처제 레이철마저 매슈와 관련하여 뭔가를 감추고 있는 듯 보여서 독자는 여러 방향으로 촉각을 곤두세우며 페이지를 넘기게 됩니다.

 

할런 코벤의 실종 스릴러는 대부분 가족을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다만 행복하고 단란했던 가족에게 닥친 가슴 아픈 비극이 아니라 이미 해체됐거나 심각한 위기에 처했거나 사악하고 일그러진 가족들이 등장하는 이야기라서 초반부터 불온한 분위기를 내뿜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거기다가 출생의 비밀, 유전자 분석, 배신과 거짓말 등 한국의 막장극에 버금가는 장치들이 자주 활용되곤 해서 의외의 재미(?)를 선사하기도 합니다.

아이 윌 파인드 유역시 비슷한 모양새를 지닌 작품인데,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서 자세히 언급할 수는 없지만 매슈를 둘러싼 갖가지 비밀이 데이비드의 진실 찾기와 함께 이야기의 중요한 축을 이루고 있어서 할런 코벤의 전작들에서 만끽할 수 있었던 의외의 재미를 다시 한 번 맛볼 수 있다는 점만큼은 확실히 보증할 수 있습니다.

 

아이 윌 파인드 유에서 주인공 데이비드와 레이철 만큼이나 눈길을 끈 건 FBI ‘만담콤비인 맥스 번스타인과 세라 자블론스키입니다. 속사포 같은 만담으로 상대의 혼을 쏙 빼놓다가 결정타 한 방으로 넉 다운시키는 두 사람의 심문 방식은 지금껏 보지 못한 특별한 재미를 주는데, 그래선지 할런 코벤의 이후 작품에서도 종종 만나볼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습니다. 할런 코벤의 여러 작품에 등장했던 피도 눈물도 없는 변호사 헤스터 크림스틴이 이번 작품에서 카메오로 특별출연한 것처럼 말입니다.

 

초반부터 범인의 정체가 공개돼서 반전의 맛은 살짝 덜했지만 할런 코벤의 장기를 마음껏 즐길 수 있는 작품이라 그의 팬이라면 마지막 장까지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작품으로 할런 코벤과 처음 만난 독자라면 그의 다른 작품들에 대해 궁금증을 품게 될 텐데, ‘실종이라는 소재에 관심이 있다면 네가 사라진 날이나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를 추천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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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정 없는 검사의 사투 표정 없는 검사 시리즈
나카야마 시치리 지음, 문지원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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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선 두 작품 모두 재미있게 읽었는데, 이번에 후와 슌타로가 맞닥뜨린 사건은 스케일 자체가 다르네요. 폭탄 테러에 대처하는 사법기계 후와 슌타로의 활약이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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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의 피
나연만 지음 / 북다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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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를 살해한 안치호가 12년 만에 출소하자 준우는 그를 죽이기 위해 습격하지만 오히려 반격을 받고 정신을 잃습니다. 그런데 깨어나 보니 안치호는 발목이 잘린 채 죽어 있고, 자신의 폰엔 잡혀 들어가기 싫으면 시체 치우기라는 알람 메시지가 떠있자 준우는 큰 충격에 빠집니다. 그 지시대로 안치호의 시신을 자신이 운영하는 반려동물 화장장에서 소각하긴 했지만, 준우는 누가 안치호를 죽인 건지, 자신은 왜 살려놓은 건지 알아내기 위해 잘린 발목을 이용하기로 합니다. 그리고 현재 경찰이 수사 중인 아라뱃길 연쇄살인사건의 새로운 희생자로 보이게끔 아라뱃길에 유기합니다. 얼마 후 북인천경찰서 강력팀장 박한서가 준우를 찾아옵니다. 안치호에게 엄마를 잃은 준우는 누가 봐도 유력한 용의자 중 한 명이기 때문입니다.


 

돼지의 피에 관심을 갖게 된 건 작가 프로필 가운데 여섯 번째 229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생일이 229일인 두 남녀가 도박 사이트에서 만난 뒤 은행을 털다가 살인을 저지르면서 시작되는 이야기는 이른바 한국형 정통 하드보일드라는 호평을 받을 만큼 매력적이었고, 덕분에 작품명과 작가의 이름이 기억에 강하게 남았던 것입니다. 다만 여섯 번째 229의 저자가 송경혁이라서 어리둥절했는데, 인터넷서점을 검색해보니 나연만송경혁은 이명동인(異名同人)이 확실한 것 같아서 나름 기대를 갖고 돼지의 피를 읽어보기로 했습니다.

 

돼지의 피의 서사와 특징을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건 두 개의 홍보카피입니다. 하나는 “‘살인자의 기질은 무엇인가라는 의문을 전면에 내세운 서스펜스 스릴러이고, 또 하나는 핏줄을 타고 이어지는 업의 멍에. 죽이고, 없애는 이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입니다. ‘돼지의 피에는 잔인무도한 쾌락살인마, 기질적으로 살인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인물, 평생 동물의 죽음과 사체에 둘러싸인 채 살아가야 하는 인물 등 다양한 종류의 살인자가 등장합니다. 말하자면 주요인물 대부분이 살인자의 기질을 타고났거나 물려받은 자들이란 뜻입니다.

이야기 역시 두 축으로 진행되는데 하나는 아라뱃길 연쇄살인사건이고, 또 하나는 안치호를 죽인 건 누구인가?’라는 미스터리입니다. 원래 두 사건은 전혀 연관성이 없었지만 준우가 안치호의 잘린 발목을 아라뱃길에 유기하면서 절묘하게 엮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살인자의 기질을 타고났거나 물려받은 자들이 벌이는 서스펜스 스릴러가 팽팽한 긴장감을 내뿜으며 전개됩니다.

 

아버지가 경영하던 돼지농장에서 숱한 죽음과 매장을 지켜보며 성장한 준우, 엄마가 살해당한 뒤 경찰이 되기로 결심했고 지금은 동수원경찰서 강력팀에 근무하는 준서(준우의 이부누나), 누구보다 뛰어난 감을 지녔지만 사회성이 부족한 베테랑 형사 박한서 등 이야기를 끌고 가는 세 인물은 일반적인 장르물의 주인공과 달리 정의나 사명감과는 거리가 먼 캐릭터입니다. 살인자를 쫓는 미션에 충실하긴 하지만 그들의 태도와 목적은 다분히 불온하고 음습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업의 멍에라든가 운명같은 것에 휘둘리는 듯 보이지만 그게 전부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오랫동안 마음속에 층층이 퇴적된, 그래서 달콤한 향기와 지독한 악취가 혼재하는 복잡하고 일그러진 그 뭔가에 지배당한 인물들이라고 할까요? 다소 애매한 표현이긴 하지만 이들이 발산하는 어두운 기운은 돼지의 피라는 제목과 함께 초반부터 독자를 바짝 긴장시키는 요소입니다.

 

전개도 빠르고, 인물들도 매력적이며, 두 갈래로 갈라진 이야기가 하나로 합쳐지는 구성도 촘촘해서 금세 마지막 장에 다다를 수 있지만, 사실 다 읽은 뒤에 받은 첫 느낌은 찜찜함이었습니다. 좋게 얘기하면 여백과 생략을 통해 독자에게 상상할 여지를 남겨놓은 구성의 결과이고, 반대로 얘기하면 애매모호하고 불친절한 설명의 결과입니다. 사건은 단순명쾌하게 해결됐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이면의 이야기들(특히 준우 가족의 과거와 현재)이 안개 속 풍경처럼 뇌리에 남은 탓에 서평을 쓰는 지금까지도 머릿속엔 물음표가 잔뜩 날아다니는 중입니다. 화자 역할을 맡은 준우는 제외하더라도 준서는 왜? 남매의 부모는 왜? 그리고 박한서는 왜?” 등 독자의 상상만으로는 유추하기 어려운 의문들이 미제 상태로 남았다는 뜻입니다.

개인적으로 장르물은 사건이든 인물이든 마무리 지점에서만큼은 깔끔하고 선명해야 한다는 생각인데, ‘돼지의 피는 적어도 인물들에 관한 한 아쉬움이 많이 남은 작품입니다. 물론 저의 오독의 결과일 수도 있으니 다른 독자들의 서평도 찾아 읽을 생각이지만, 확실한 건 그 아쉬움 때문에 두 개의 홍보카피가 심어놓은 기대감이 온전히 충족되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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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과 저녁의 범죄 가노 라이타 시리즈 2
후루타 덴 지음, 문지원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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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살 소년 아사히는 피가 섞이지 않은 동생 유히와 함께 아버지의 낡은 차를 타고 전국을 떠돌며 좀도둑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던 중 아버지의 죽음으로 아동보호소에 들어간 두 사람은 다른 집에 입양되며 헤어집니다. 이후 10년 만에 유히와 재회한 아사히는 유히가 꾸민 납치 자작극에 가담하게 되는데, 범행은 계획대로 진행됐지만 뜻밖의 사태에 직면하고 맙니다. 그로부터 8년 후, 가미쿠라에서 엄마가 방치한 어린 남매 중 여동생이 아사하고 오빠가 탈진 상태로 발견되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가나가와 현경의 가라스마는 체포된 엄마를 취조하지만 그녀의 본명조차 알아내지 못한 채 고전합니다. 남매를 발견했던 파출소 순경 가노 라이타는 수사에 개입할 순 없었지만 관련자들의 언행을 통해 사건의 진상과 이면을 조금씩 눈치 챕니다.

 

단편집 거짓의 봄에 이은 가노 라이타 시리즈두 번째 작품입니다. 가노는 미스터리 주인공치곤 독특한 캐릭터를 지녔는데, 그는 가나가와 현경 수사1과에서 자백 전문 가노라는 별명을 얻을 만큼 탁월한 능력자였지만 불의의 사건으로 인해 지금은 가미쿠라 역전 파출소에서 근무하는 46살의 순경입니다. 그는 단서나 증거보다 면대면 대화를 통해 용의자 스스로 무너지게 하거나 자백하게 만드는 특별한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거짓의 봄서평에 쓴 내용을 인용하면) 용의자들은 가노의 허허실실 작전에 휘말려 자기도 모르게 진실과 거짓을 반복하다가 어느새 깊은 함정에 빠졌음을 깨닫게 됩니다. 가노는 표정 하나, 땀방울 하나를 통해 진술의 허점을 파악하면서 코너로 몰아가다가 결정적인 한 방으로 용의자를 무너뜨립니다.

 

가노 라이타 시리즈의 또 다른 특징은 도서(倒敍)추리’, 즉 처음부터 범인이 공개되는 것은 물론 시점 자체도 범인 입장에서 전개된다는 점입니다. ‘아침과 저녁의 범죄의 경우 전체가 3인칭 시점이긴 하지만, 1부에서 납치 자작극을 벌인 아사히와 유히의 죄가 2부에서 주인공 가노에 의해 밝혀지는 구조라서 넓은 의미의 도서추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독자로선 주인공이 어떻게 범인의 정체와 사건의 진상을 알아내는가?’에 집중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누가 범인?’이 초점인 일반 미스터리보다 훨씬 더 정교하고 빈틈없는 설계가 필요한 장르입니다.

 

아침과 저녁의 범죄에는 18년에 걸쳐 세 개의 사건이 등장합니다. 간단하게 요약하면,

2001. 아버지의 죽음으로 아사히와 유히는 서로 다른 인생을 살게 된다. , 아버지의 죽음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2011. 우연히 재회한 아사히와 유히는 명문가의 딸인 고1 마쓰마 미오리와 함께 납치 자작극을 실행한다. 자작극은 예상치 못한 재앙에 가까운 사태를 초래한다.

2019. 남매 사건을 담당한 현경 수사1과 가라스마가 막다른 골목에 부딪힌 사이, 파출소 순경인 가노가 남매 사건의 진상은 물론 과거 사건들과의 접점을 포착한다.

 

등장인물도 많고, 이야기도 워낙 복잡한데다 도서추리라는 난이도 높은 형식까지 가미돼있어서 읽는 내내 작가의 필력에 여러 번 감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모든 사건들이 하나의 지점으로 수렴되는 클라이맥스와 엔딩에선 많은 복선들이 빠짐없이 회수되는 짜릿함을 맛볼 수 있었고, 등장인물들의 복잡하고 불행했던 과거사들과 현재 사건의 연결점 역시 설득력 있게 그려져서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지곤 했습니다. 그 덕분에 이 작품의 중요한 소재인 아동학대와 가정폭력의 무게감이나 비극성이 더욱 도드라져 보이기도 했습니다.

 

다 읽은 뒤 아쉽게 느껴진 점들이 대부분 주인공 가노와 관련됐다는 건 무척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우선 도서추리의 특성 상 가노의 역할이 선발투수보다는 마무리투수에 가까운 건 당연한 일이지만, 분량과 비중 모두 기대에 못 미친 게 사실입니다. 또한 거짓의 봄에선 용의자를 스스로 무너지게 하거나 자백하게 만드는 가노의 특별한 능력이 일목요연하고 리얼하게 그려졌지만, 이번에는 다소 작위적이거나 비약적으로 느껴지곤 했습니다. “저걸 한눈에 알아봤다고?”라는 의아함과 함께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천재적인 명탐정으로 갑자기 업그레이드 된 듯한 위화감은 이 작품에서 가장 아쉬운 점이었습니다.

 

아침과 저녁의 범죄’(2021) 이후 아직까진 일본에서도 시리즈 신작 소식이 없습니다. 가노에 관한 아쉬움이 진하게 남긴 했지만 아침과 저녁의 범죄는 미스터리 자체로는 무척 재미있고 완성도 높은 작품이란 생각입니다. 신작 소식이 들리면 주저하지 않고 찾아 읽을 예정인데, 신작에선 가노의 분량과 비중도 좀 높아지고, 그의 특별한 능력도 의아함이나 위화감 없이 그려지기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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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이노키 마음 클리닉
구보 미스미 지음, 이소담 옮김 / 은행나무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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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일본소설 가운데 문구점, 도서관, 서점, 카페 등을 무대로 한 힐링 소설이 쏟아지고 있는데, 개인적으론 그다지 좋아하는 장르가 아니라서 기피해온 게 사실입니다. ‘시이노키 마음 클리닉역시 비슷한 경향의 작품이 분명해 보였지만, 지금껏 한 편도 빼놓지 않고 읽어온 구보 미스미라면 조금은 다른 느낌을 전해주지 않을까, 라는 기대감을 가져보기로 했습니다.

 

시이노키 마음 클리닉이라는 간판이 없다면 누구도 병원으로 여기지 않을 작은 마당이 있는 2층짜리 단독주택. 이곳을 운영하는 건 시이노키 준과 사오리 부부입니다. 준은 진찰을 담당하는 의사이고, 사오리는 문진과 상담을 맡은 상담사입니다. 부부는 마음의 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을 진심으로 대하며 그들의 새로운 시작을 위한 치료에 전력을 다합니다. 한편 인근의 찻집 준은 이혼 후 아버지의 찻집을 물려받은 미조구치 준이 운영하는 노포로, 시이노키 부부는 물론 클리닉을 다녀가는 사람들이 즐겨 찾는 편안하고 아늑한 공간입니다. 마음의 병 때문에 힘들어하던 사람들은 시이노키 마음 클리닉과 찻집 준덕분에 치유 이상의 위로와 안식을 얻습니다.

 

우울증, ADHD, 공황장애, 산후우울증, 육아 노이로제 등 갖가지 마음의 병을 앓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성별이나 나이에 관계없이 누구라도 언제든지 걸릴 수 있는 것이 마음의 병이지만 요즘 세상에도 그 병에 대해 거리낌 없이 털어놓는 건 쉽지 않은 일입니다. 여섯 편의 수록작에 등장하는 인물들 역시 자신의 병을 인정하는 데에도, 시이노키 마음 클리닉의 문을 여는 데에도 꽤 큰 각오와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클리닉을 운영하는 시이노키 부부는 결코 신비한 명의가 아닙니다. 필요한 약물을 처방하고 적절한 타이밍에 상담을 해주는 게 전부입니다. 하지만 클리닉을 찾은 사람들은 부부에게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따뜻함과 진정성을 느낍니다. 실은 부부 역시 큰 비극이 남긴 마음의 병으로 오랜 시간 고통스러워했던 이력이 있는데, 바로 그런 이력이 환자들에게 선하고 긍정적인 에너지로 작용하는 것입니다. ‘찻집 준의 주인 준도 심각한 공황장애와 노이로제를 겪은 바 있어서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에게 크고 작은 도움을 주곤 합니다.

 

시이노키 부부가 환자들에게 들려준 이야기 가운데 가장 공감이 된 건 피난처로 삼을 사람이나 장소를 찾아둘 것입니다. 각 수록작의 주인공들은 부부의 처방과 상담 덕분에 병세가 완화되지만, 그에 못잖게 친구, 가족, 동료의 응원과 도움을 통해 큰 힘을 얻기도 합니다. 또 찻집, 공원, 거리 등 좋아하는 장소에서 좋은 기운을 얻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내 상태를 솔직히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 그리고 그곳에 가면 조금이라도 편하게 숨을 쉴 수 있는 장소는 마음의 병에 대처하는 가장 현명하고 확실한 피난처라는 뜻입니다.

 

마음이 지쳤을 때, 도저히 견디지 못할 때, 그때 이 책이 여러분에게 힘이 될지도 몰라요.”라는 작가의 말처럼 시이노키 마음 클리닉소설로 쓰인 마음의 병 처방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마음의 병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도, 또 그 병으로 힘들어하는 사람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적 없는 사람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라 힐링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기도 합니다. 덧붙여, 등장인물들의 마음의 병이 치유되는 과정을 지켜보며 , 다행이다.”라는 안도감과 함께 눈가가 뜨끈해지는 경험을 여러 차례 겪게 되는데, 덤처럼 따라온 이 감동은 꽤 깊고 오랜 여운을 남겨줍니다.

 

사실 마음의 병은 소설 속 인물들처럼 쉽고 무난하게 완화되거나 치유되지 않습니다. 어쩌면 마음의 병을 지독하게 앓아본 사람이라면 시이노키 마음 클리닉을 두고 거짓말 혹은 터무니없는 판타지라고 비난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저 역시 비슷한 이유로 힐링 소설에 거리를 둬온 게 사실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에 병이 생겨 작은 돌파구라도 간절하게 찾는 사람에겐 시이노키 마음 클리닉같은 소설이 (약효가 얼마 안 가는 거짓 판타지라 해도) 안정과 위안을 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여기저기에서 기억해두고 싶은 문장들을 찾아냈는데, 딱 하나만 인용하며 서평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말하자면 제가 시이노키 부부에게 받은 예방을 위한 처방전이라고 할까요?

 

인생은 안 되는 일이 더 많은데 다들 그걸 잘 감추고 있죠. 저는요, 인생은 되는 일이 없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기로 했어요. 그렇게 생각했더니 조금 좋은 일이 생기면 아주 기뻐요.” (p224)

 

 

- 좀 긴 사족으로, 구보 미스미의 작품들에 대해 정리해보면...

일본에선 2023년까지 스물네 편의 작품이 출간됐지만 한국에 소개된 구보 미스미의 작품은 시이노키 마음 클리닉까지 여섯 편뿐입니다. 파격적인 성애묘사 때문에 19금 판정을 받은 한심한 나는 하늘을 보았다부터 길 잃은 고래가 있는 저녁’, ‘밤의 팽창’, ‘가만히 손을 보다까지 네 편이 (수위의 차이는 있지만) ()을 코드 삼아 상처투성이 인물들의 이야기를 그렸다면, 최근작인 밤하늘에 별을 뿌리다시이노키 마음 클리닉은 희망과 힐링이라는 (그녀의 초기작들을 좋아했던 저로서는 다소 아쉬울 수밖에 없는)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물론 두 작품 속 인물들은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상처와 상실에 잠식되거나 마음의 병을 앓고 있는 상태로 등장합니다. 다만 전작들이 상처와 상실과 마음의 병을 구보 미스미 특유의 지독한 후벼 파기를 통해 밑바닥까지 절절하게 그려낸 뒤 아주 작은 희망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방식이었다면, 최근 두 작품은 상대적으로 나이브한 전개를 보이다가 마치 판타지와도 같은 긍정과 낙관의 메시지를 남기는 방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한국 출간작밖에 읽지 못했으니 이런 변화가 추세적인 건지 일시적인 건지 알 수 없지만, 개인적으론 초기 구보 미스미의 지독한 후벼 파기를 다시 한 번 맛볼 수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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