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시이노키 마음 클리닉
구보 미스미 지음, 이소담 옮김 / 은행나무 / 2024년 7월
평점 :
최근 일본소설 가운데 문구점, 도서관, 서점, 카페 등을 무대로 한 힐링 소설이 쏟아지고 있는데, 개인적으론 그다지 좋아하는 장르가 아니라서 기피해온 게 사실입니다. ‘시이노키 마음 클리닉’ 역시 비슷한 경향의 작품이 분명해 보였지만, 지금껏 한 편도 빼놓지 않고 읽어온 구보 미스미라면 조금은 다른 느낌을 전해주지 않을까, 라는 기대감을 가져보기로 했습니다.
‘시이노키 마음 클리닉’이라는 간판이 없다면 누구도 병원으로 여기지 않을 작은 마당이 있는 2층짜리 단독주택. 이곳을 운영하는 건 시이노키 준과 사오리 부부입니다. 준은 진찰을 담당하는 의사이고, 사오리는 문진과 상담을 맡은 상담사입니다. 부부는 마음의 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을 진심으로 대하며 그들의 새로운 시작을 위한 치료에 전력을 다합니다. 한편 인근의 ‘찻집 준’은 이혼 후 아버지의 찻집을 물려받은 미조구치 준이 운영하는 노포로, 시이노키 부부는 물론 클리닉을 다녀가는 사람들이 즐겨 찾는 편안하고 아늑한 공간입니다. 마음의 병 때문에 힘들어하던 사람들은 시이노키 마음 클리닉과 ‘찻집 준’ 덕분에 치유 이상의 위로와 안식을 얻습니다.
우울증, ADHD, 공황장애, 산후우울증, 육아 노이로제 등 갖가지 마음의 병을 앓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성별이나 나이에 관계없이 누구라도 언제든지 걸릴 수 있는 것이 마음의 병이지만 요즘 세상에도 그 병에 대해 거리낌 없이 털어놓는 건 쉽지 않은 일입니다. 여섯 편의 수록작에 등장하는 인물들 역시 자신의 병을 인정하는 데에도, 시이노키 마음 클리닉의 문을 여는 데에도 꽤 큰 각오와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클리닉을 운영하는 시이노키 부부는 결코 ‘신비한 명의’가 아닙니다. 필요한 약물을 처방하고 적절한 타이밍에 상담을 해주는 게 전부입니다. 하지만 클리닉을 찾은 사람들은 부부에게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따뜻함과 진정성을 느낍니다. 실은 부부 역시 큰 비극이 남긴 마음의 병으로 오랜 시간 고통스러워했던 이력이 있는데, 바로 그런 이력이 환자들에게 선하고 긍정적인 에너지로 작용하는 것입니다. ‘찻집 준’의 주인 준도 심각한 공황장애와 노이로제를 겪은 바 있어서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에게 크고 작은 도움을 주곤 합니다.
시이노키 부부가 환자들에게 들려준 이야기 가운데 가장 공감이 된 건 “피난처로 삼을 사람이나 장소를 찾아둘 것”입니다. 각 수록작의 주인공들은 부부의 처방과 상담 덕분에 병세가 완화되지만, 그에 못잖게 친구, 가족, 동료의 응원과 도움을 통해 큰 힘을 얻기도 합니다. 또 찻집, 공원, 거리 등 좋아하는 장소에서 좋은 기운을 얻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내 상태를 솔직히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 그리고 그곳에 가면 조금이라도 편하게 숨을 쉴 수 있는 장소는 마음의 병에 대처하는 가장 현명하고 확실한 피난처라는 뜻입니다.
“마음이 지쳤을 때, 도저히 견디지 못할 때, 그때 이 책이 여러분에게 힘이 될지도 몰라요.”라는 작가의 말처럼 ‘시이노키 마음 클리닉’은 ‘소설로 쓰인 마음의 병 처방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마음의 병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도, 또 그 병으로 힘들어하는 사람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적 없는 사람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라 힐링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기도 합니다. 덧붙여, 등장인물들의 마음의 병이 치유되는 과정을 지켜보며 “아, 다행이다.”라는 안도감과 함께 눈가가 뜨끈해지는 경험을 여러 차례 겪게 되는데, 덤처럼 따라온 이 감동은 꽤 깊고 오랜 여운을 남겨줍니다.
사실 마음의 병은 소설 속 인물들처럼 쉽고 무난하게 완화되거나 치유되지 않습니다. 어쩌면 마음의 병을 지독하게 앓아본 사람이라면 ‘시이노키 마음 클리닉’을 두고 거짓말 혹은 터무니없는 판타지라고 비난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저 역시 비슷한 이유로 힐링 소설에 거리를 둬온 게 사실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에 병이 생겨 작은 돌파구라도 간절하게 찾는 사람에겐 ‘시이노키 마음 클리닉’ 같은 소설이 (약효가 얼마 안 가는 거짓 판타지라 해도) 안정과 위안을 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여기저기에서 기억해두고 싶은 문장들을 찾아냈는데, 딱 하나만 인용하며 서평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말하자면 제가 시이노키 부부에게 받은 ‘예방을 위한 처방전’이라고 할까요?
“인생은 안 되는 일이 더 많은데 다들 그걸 잘 감추고 있죠. 저는요, 인생은 되는 일이 없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기로 했어요. 그렇게 생각했더니 조금 좋은 일이 생기면 아주 기뻐요.” (p224)
- 좀 긴 사족으로, 구보 미스미의 작품들에 대해 정리해보면...
일본에선 2023년까지 스물네 편의 작품이 출간됐지만 한국에 소개된 구보 미스미의 작품은 ‘시이노키 마음 클리닉’까지 여섯 편뿐입니다. 파격적인 성애묘사 때문에 19금 판정을 받은 ‘한심한 나는 하늘을 보았다’부터 ‘길 잃은 고래가 있는 저녁’, ‘밤의 팽창’, ‘가만히 손을 보다’까지 네 편이 (수위의 차이는 있지만) 성(性)을 코드 삼아 상처투성이 인물들의 이야기를 그렸다면, 최근작인 ‘밤하늘에 별을 뿌리다’와 ‘시이노키 마음 클리닉’은 희망과 힐링이라는 (그녀의 초기작들을 좋아했던 저로서는 다소 아쉬울 수밖에 없는)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물론 두 작품 속 인물들은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상처와 상실에 잠식되거나 마음의 병을 앓고 있는 상태로 등장합니다. 다만 전작들이 상처와 상실과 마음의 병을 구보 미스미 특유의 ‘지독한 후벼 파기’를 통해 밑바닥까지 절절하게 그려낸 뒤 아주 작은 희망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방식이었다면, 최근 두 작품은 상대적으로 나이브한 전개를 보이다가 마치 판타지와도 같은 긍정과 낙관의 메시지를 남기는 방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한국 출간작밖에 읽지 못했으니 이런 변화가 추세적인 건지 일시적인 건지 알 수 없지만, 개인적으론 초기 구보 미스미의 ‘지독한 후벼 파기’를 다시 한 번 맛볼 수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