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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누군가를 죽였다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최고은 옮김 / 북다 / 2024년 7월
평점 :
호화 별장지의 바베큐 파티가 끝난 직후 끔찍한 연쇄살인 사건이 일어난다. 인근 호텔에서 최고급 만찬을 즐긴 뒤 자수한 범인은 사형을 당하고 싶어서, 또 가족에게 복수하고 싶어서 무차별 살상을 저질렀다는 불가해한 동기를 밝힌다. 하지만 범행 과정에 대한 진술은 일절 거부한다. 유족들은 사건의 진상을 밝히고자 ‘검증회’를 열고, 그 자리에 경시청 수사1과 가가 교이치로 형사가 참석한다. 유족들의 기억을 통해 재구성되는 비극 속에서 가가 형사는 사람들이 저마다 감추고 있던 비밀을 파헤치기 시작하고, 결국 예상 밖의 진실이 그 정체를 드러낸다. (출판사 소개글을 일부 수정 후 인용했습니다.)
‘가가 형사 시리즈’는 열 번째 작품 ‘기도의 막이 내릴 때’(일본 2013년, 한국 2019년 출간)로 공식 종료됐습니다. 워낙 좋아하는 시리즈라 언젠가 다시 이어지기를 간절히 바라왔는데, 가가 형사가 조연으로 등장한 ‘희망의 끈’(일본 2019년, 한국 2022년)이 출간되면서 어쩌면 그 바람이 이뤄질 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기도의 막이 내릴 때’ 이후 꼭 10년 만에 ‘가가 형사 시리즈’는 ‘당신이 누군가를 죽였다’를 통해 부활했습니다.
‘희망의 끈’을 시리즈에 포함시키느냐 여부에 따라 이 작품을 시리즈 11편 혹은 12편으로 부를 수 있는데, 개인적으론 11편으로 보는 것이 맞다는 생각입니다.(‘희망의 끈’은 스핀오프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 부분은 향후 ‘가가 형사 시리즈’가 계속 이어질지 지켜봐야 확실해질 것 같습니다.
호화 별장지에서 하룻밤 사이에 여섯 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엽기적인 사건이 벌어집니다. 즉시 범인이 자수했지만 유족들은 범인이 누구인지보다는 피해자들이 왜, 어떻게 죽음을 맞이했는지 알 수 없어 분노 이상의 답답함에 치를 떱니다. 만일 범인이 끝까지 범행 과정에 대한 진술을 거부한 채 사형을 당한다면 가족의 죽음은 영원히 미스터리로 남게 되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날의 상황을 재구성하기 위해 ‘검증회’라는 자리를 만들기로 했고, 유족 중 한 사람인 와시오 하루나는 선배 간호사 가나모리 도키코의 소개로 가가 형사를 만나 ‘검증회’에 참석해줄 것을 요청합니다. 장기 휴가 중이던 가가는 말하자면 옵서버(observer) 자격으로 ‘검증회’에 참석하여 유족들의 진술을 통해 그날의 진상을 파악해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이란 어차피 이런 생물이다. 겉으로 하는 행동과 속으로 생각하는 건 전혀 다르다. 겉과 속이 다른 게 보통이다.” (p39)
호화 별장지라는 설정에 걸맞게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호사스러운 생활을 즐길 만큼 넉넉한 부와 지위를 축적했고 그에 어울리는 점잖고 교양 있는 교류를 나눠왔지만, 실은 그들 사이의 관계는 이기심과 허영과 위선으로 이뤄진 것뿐입니다. 그 때문에 범행과정을 밝히기 위한 ‘검증회’는 시간이 갈수록 별장지 사람들의 추악한 관계를 폭로하는 자리로 변질되는데, 거기에 기름을 부은 건 누군가가 유족들 모두에게 보낸 의문의 한 줄 편지 - “당신이 누군가를 죽였다” - 입니다. 이 편지로 인해 유족들은 자신들 가운데 누군가가 범인과 공모했다는 의심을 품게 되고, 결국 자신과 오래전부터 악연을 이어온 누군가를 범인으로 몰아세우는 이전투구가 벌어집니다. 누구나 겉과 속이 다른 일면을 갖고 있긴 하지만, 더 많은 부와 더 높은 지위를 갈망하는 호화 별장지 사람들의 허영과 위선은 살의 이상의 위험한 욕망으로 들끓고 있던 것입니다. 가가는 이들의 추악한 관계에 촉각을 곤두세우면서 동시에 사소한 단서와 진술을 통해 그날 밤 벌어진 참극의 진상을 조금씩 파헤쳐나갑니다.
범행 과정을 밝히는 본격 미스터리의 매력도 눈길을 끌지만, 그동안 ‘가가 형사 시리즈’가 추구했던 휴먼 미스터리의 미덕도 잘 살아있는 작품입니다. 일그러진 가족 관계, 만족을 모르는 탐욕, 위선으로 가득 찬 거짓 선의, 말초적인 욕망에의 탐닉 등 ‘어차피 겉과 속이 다른 생물인 인간들’의 추악함을 고발하며 그를 통해 미스터리를 풀어가는 구도가 안정적이고 탄탄하게 그려졌다는 뜻입니다.
‘검증회’라는 설정 때문에 가가의 행동반경이 한정돼있으며, 실제 수사보다는 토론과 추측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이 아쉽긴 했지만(별 0.5개를 뺀 유일한 이유입니다), 마지막까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며 놀라운 진상을 드러내는 가가의 매력은 그동안 시리즈의 부활을 고대했던 제겐 충분히 만족스럽게 읽혔습니다.
‘당신이 누군가를 죽였다’가 팬 서비스 차원에서 나온 1회성 작품인지, 시리즈의 부활을 알리는, 말하자면 ‘가가 형사 시즌 2’의 첫 작품인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그저 바람이라면 다만 몇 편이라도 가가 형사의 활약을 더 지켜보고 싶다는 것입니다. 만일 후속작이 출간된다면 내년쯤이 아닐까 싶은데, 희소식이 들려오기를 간절히 기다려보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