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작은 무법자
크리스 휘타커 지음, 김해온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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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에서 제공받은 도서입니다.

 

7살 소녀 시시 래들리를 죽이고 살인죄로 수감됐던 빈센트 킹이 30년 만에 출소한다는 소식에 해안도시 케이프 헤이븐의 분위기는 뒤숭숭해집니다. 하지만 당시 15살 동갑으로 빈센트와 단짝이었던 경찰서장 워크는 그의 출소와 귀향을 누구보다 반기고 기뻐합니다. 다만 죽은 시시의 언니이자 자신과 빈센트의 소꿉친구이기도 했던 스타 래들리를 생각하면 마음이 착잡해집니다. 스타는 어린 남매 더치스와 로빈을 두고도 술과 약에 중독돼 툭하면 응급실에 실려 가곤 했고, 워크는 그런 스타 가족을 각별하게 지켜보며 도움을 줘왔기 때문입니다. 빈센트의 귀향이 스타 가족에게 미칠 영향 때문에 고심하던 워크는 별 풍파 없이 시간이 흐르자 안심하지만 어느 날 빈센트로부터 충격적인 전화를 받습니다. 자신이 스타를 죽였다는 것입니다.

 


나의 작은 무법자는 작은 해안도시에서 벌어진 끔찍한 사건이 30년에 걸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망가뜨리고 피폐하게 만들었는지를 보여주는 비극적인 서사이자, 30년 만에 다시 벌어진 살인사건의 진상을 조사하는 범죄소설이며,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에 시작되어 아직도 진행 중인 비극에 휘말린 13살 소녀 더치스의 복수극과 성장기를 그린 작품입니다.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건 과거에 매달린 채 고통스런 30년을 살아온 경찰서장 워크와 스스로 무법자임을 자처하며 자신 앞에 놓인 지독한 현실에 저항하는 13살 소녀 더치스입니다.

30년 전의 사건은 워크에게 가혹한 운명을 강요했습니다. 단짝 빈센트는 살인죄로 성인 교도소에 수감됐고, 소꿉친구였던 스타는 동생을 잃은 뒤 엄마마저 자살한 여파로 삶이 망가져버렸습니다. 자신의 잘못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죄책감에 사로잡혔던 워크는 오랜 시간 동안 가해자인 빈센트와 피해자인 스타 모두에게 진심을 다해왔지만, 30년 만에 출소한 빈센트가 스타를 살해하고 자수하자 말할 수 없는 충격에 빠집니다.

더치스는 불과 13살이란 나이에 세상의 막장과 마주한 소녀입니다. 술과 약에 찌든 엄마 대신 5살 동생 로빈을 지켜야 하는데다, 비열한 방식으로 자신과 동생을 공격하는 자들에게 맞서는 게 일상이다 보니 결코 평범한 13살이 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더치스는 스스로를 무법자라 자칭하며 거친 욕설과 폭력으로 무장한 채 힘든 나날들을 견뎌내지만 엄마 스타가 무참하게 살해당한 뒤엔 속절없이 무너지고 맙니다. 이후 외할아버지 핼의 농장에 머무는 동안 더치스는 세상 어디에도 없는 진정한 무법자로 성장합니다.

 

이 작품의 원제는 본문에 종종 등장하는 끝은 또 다른 시작이다.”라는 대사를 의미하는 ‘We Begin at the End’지만, 개인적으론 13살 소녀 더치스를 강조한 나의 작은 무법자라는 번역 제목이 훨씬 더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30년의 망령에 집착한 채 살인사건 미스터리를 담당한 워크의 이야기보다 스스로 무법자가 되기 위해 분투하는 더치스의 복수극과 성장기가 더 강렬하고 매력적으로 읽혔기 때문입니다. “난 무법자 더치스 데이 래들리다. 네놈은 겁쟁이 놈팡이고, 내가 네놈 목을 깔끔하게 날려주마.”라는 무자비한 대사와 함께 자신을 공격하는 자라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덤벼드는 더치스는 말 그대로 야생마 같은 날것의 힘을 폭발시키곤 합니다. 또한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에 벌어진 비극의 무게에 짓눌려 평범한 13살로 살아갈 길을 빼앗긴 더치스가 세상과 맞서 싸우는 대목에선 동정이나 연민 이상의 애틋함마저 느낄 수 있는데, 그래선지 마지막 반전과 함께 더치스에게 찾아온 가혹한 운명을 읽을 땐 가슴 한쪽이 시려올 정도였습니다.

 

등장인물도 많고 그 관계도 복잡하고 운명적으로 설정된 데다 사건의 비극성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참담하고, 각 인물들이 속에 품은 감정들 역시 하나같이 지독하거나 극단적이어서 결코 쉽고 편하게 책장을 넘길 수 있는 작품이 아닙니다. 이야기의 흐름 역시 완만하고 묵직한 편인데, 속독에 익숙하거나 성격 급한 독자라면 단선적인 구도에도 불구하고 느리게 진행되는 미스터리와 집요하고도 때론 넘쳐 보이는 풍경 및 심리 묘사 때문에 중반부쯤 살짝 느슨함과 지루함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어려움들은 진실이 밝혀지는 막판에 이르러 수십 배는 거뜬히 넘을 만큼 충분히 보상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작가가 왜 그토록 복잡하고 느리고 완만한 서사를 쌓아왔는지를 제대로 이해하게 됩니다.

 

단순한 범죄스릴러나 미스터리 이상의 문학성 짙은 장르물을 찾는 독자라면 한국에 처음 소개된 크리스 휘타커의 나의 작은 무법자를 꼭 읽어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무엇보다 13살 소녀 더치스가 진정한 무법자로 성장하는 지난하고 고통스런 과정을 다른 독자들도 공유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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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황홀한 순간
강지영 지음 / 나무옆의자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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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에서 제공받은 도서입니다.

 

사랑에 실패하고 고향 연향으로 돌아와 역 앞 매점을 떠맡게 된 24살의 김하임은 자신의 보잘 것 없는 운명과 사랑 때문에 마음이 늘 신산합니다. 그러던 중 우유식빵 같은 역무원 윤지완에게 반하게 됐고 조금씩 그와의 거리를 좁혀갑니다. 하지만 어느 날 윤지완이 역 앞에서 피부가 가무잡잡한 한 여자와 수상쩍은 모습을 보이자 불안감에 사로잡힙니다.

10대 때 염희태에게 겁탈을 당한 뒤 임신까지 하자 집을 나왔던 이무영은 10년 만에 그와 우연히 만나 살림을 합칩니다. 하지만 염희태의 악마성은 여전했고 이무영과 딸 민아는 가혹한 폭력에 시달리며 고통스런 나날들을 보냅니다. 그러던 어느 날 끔찍한 사건이 벌어졌고, 이무영의 가족은 어쩔 수 없이 서울을 떠나 연고도 없는 연향으로 거처를 옮깁니다.

 


거의 황홀한 순간사랑이 태어나서 죽는 자리라는 사연 많은 지명을 가진 서울 근교의 소도시 연향을 무대로 김하임과 이무영, 두 여자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입니다. ‘1월 김하임’, ‘1월 이무영으로 이어지다 마지막 챕터 ‘12월 김하임에 이르는 독특한 구성도 눈길을 끌었지만, 전혀 다른 결을 지닌 두 여자의 삶을 전혀 다른 장르를 통해 풀어내다가 서술트릭의 반전과 함께 극적인 엔딩에 이르게 만드는 신선한 서사가 가장 기억에 남았습니다.

 

김하임의 챕터가 운명과 사랑 때문에 고민하는 20대의 달달한 로맨스이자 통일호와 홍익매점이 남아있던 2000년대 초반의 어느 중소도시에서 아직 사랑을 믿는 사람들의 이야기라면, 이무영의 챕터는 10대 시절부터 폭력과 강간에 시달린 한 여성의 비극이자 딸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목숨까지 내걸 수 있는 한 엄마의 투쟁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김하임의 챕터가 오쿠다 히데오의 남쪽으로 튀어!’를 떠올리게 했다면, 이무영의 챕터는 덴도 아라타의 젠더 크라임을 연상시켰다고 할까요?

 

전혀 만날 일이 없을 것 같던 두 여자의 삶은 이무영이 가족과 함께 연향에 머물게 되면서, 그리고 우유식빵 같은 매력적인 역무원 윤지완으로 인해 미묘한 접점을 갖게 됩니다. 곁을 주는 듯 하면서도 더 이상 다가오지 않는 윤지완에게 서운해 하던 김하임은 어느 날 갑자기 그의 옆에 나타난 피부가 가무잡잡한 여자 때문에 또다시 사랑에 실패하는 건 아닌가, 불안해집니다. 한편 윤지완의 어머니가 운영하는 감자탕 집에 몸을 의탁한 이무영은 한편으론 염희태의 폭력 속에 딸 민아를 지켜내기 위해 분투하면서도 또 한편으론 자신에게 호의를 베푸는 윤지완에게 특별한 감정을 품기도 합니다.

로맨스와 스릴러가 묘하게 뒤섞인 가운데 정체불명의 불안감을 뿜어내던 이야기는 마지막에 이르러 뜻밖의 진실을 폭로하면서 독자에게 여러 감정이 혼재된 짙은 여운을 전달합니다.

 

이무영의 챕터가 긴장감과 속도감을 갖춘 몰입도 높은 스릴러인 반면, 김하임의 챕터는 다소 가벼운 20대의 로맨스에다 엉뚱한 가족 이야기(번개를 맞고 우주신이 된 할아버지, 단역에서 출발하여 유명 스타가 된 엄마, 그런 엄마의 로드매니저를 자청하는 아빠)가 곁들여져 있어서 마치 두 발을 냉탕과 온탕에 하나씩 담근 듯한 묘한 느낌을 선사합니다. 무엇보다 두 여자의 본격적인 접점이 언제쯤, 어떻게 이뤄질까 궁금하면서도 거의 종반부까지 눈에 띄지 않아서 살짝 지루함을 느낄 수도 있는데, 그래선지 2/3쯤까지만 해도 별 4개 정도의 무난한 작품이려니, 생각했던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막판에 단 한두 줄에 의해 트릭이 밝혀지는 순간 잠시 멍해지며 앞서 전개된 이야기들을 찬찬히 되새기게 되는데, 그 트릭을 제대로 이해하자마자 반전의 짜릿함과 함께 이 작품의 진가를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 실은 작가는 군데군데 눈에 보일 듯 말 듯 단서와 복선을 숨겨놓았습니다. 조금이라도 위화감이 느껴지는 대목을 기억해두며 페이지를 넘긴다면 막판 반전과 트릭의 쾌감을 좀더 진하게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다양한 장르와 서사를 통해 늘 새로운 이야기를 풀어내는 강지영의 매력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어서 좋았고, 특히 서술트릭이라는 의외의 방식으로 전혀 결이 다른 두 이야기를 한데 묶어낸 필력이 매력적이었습니다. 300페이지가 채 안 되는 짧은 분량이지만 그 이상의 탄탄하고 농도 짙은 이야기가 실려 있으니 구미가 당기는 독자라면 관심을 가져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사족으로... 인터넷서점의 출판사 소개글은 이 작품의 줄거리를 너무 상세하게 공개해놓았습니다. 가급적이면 표지 앞뒷면의 카피 정도만 훑어본 뒤 본편을 읽기를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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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의 집 헬렌 그레이스 시리즈
M. J. 알리지 지음, 김효정 옮김 / 북플라자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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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진 해변에서 최소 3~4년 전에 살해당한 것으로 보이는 젊은 여성의 사체가 발견됩니다. 현장을 살피던 사우샘프턴 중앙경찰서 강력범죄수사팀의 헬렌 그레이스는 즉각 연쇄살인의 가능성을 떠올립니다. 한편 실종된 루비라는 여성에 대해 조사하던 중 동일범에게 납치된 것이 분명한 정황을 발견합니다. 헬렌은 두 여성 외에도 더 많은 피해자가 있을 것으로 보고 수사를 확대합니다. 하지만 사사건건 자신에게 반기를 드는 헬렌을 눈엣가시처럼 여기는 상관 세리 하우드는 어떻게든 그녀를 내쫓거나 몰락시키기 위해 악랄한 수법을 고안하기에 이르고, 헬렌은 최대의 위기에 빠지고 맙니다. 한편 정체불명의 남자에게 납치돼 지하실에 감금된 루비는 자기보다 먼저 납치됐던 여자들의 흔적을 발견하곤 말할 수 없는 공포에 휩싸입니다.

 


인형의 집이니미니’, ‘위선자들에 이은 헬렌 그레이스 시리즈세 번째 작품입니다. 헬렌은 잇따라 연쇄살인사건을 해결해 국민적 관심과 명예를 얻은 뛰어난 형사지만, 개인적으론 몸과 마음이 불행과 상처로 뒤덮인 인물이기도 합니다. 가족으로 인한 심각한 트라우마를 지니고 있고, 공식적인 관계 외엔 누구에게도 곁을 내주지 않으며, 견딜 수 없는 죄책감에 사로잡힐 때면 SM클럽에 가서 채찍질로 스스로에게 벌을 주곤 합니다. ‘뛰어나지만 상처투성이인 스릴러 주인공중에서도 꽤 도드라지는 캐릭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번에 헬렌이 쫓는 연쇄살인범은 특정한 외모의 젊은 여성만 골라 납치 살해하는 사이코패스입니다. 하지만 외모 상 공통점 외엔 피해자들의 처지가 모두 제각각이라 헬렌과 강력팀의 수사는 제자리를 맴돌거나 엉뚱한 헛발질만 반복합니다. 그런 와중에 헬렌은 자신을 증오하는 상관 세리 하우드가 파놓은 함정에 빠져 경찰이 된 뒤 가장 큰 위기에 봉착합니다. 전출 정도로 끝나지 않고 자칫 파면 혹은 체포될 상황까지 이르자 헬렌은 모든 것을 건 위험천만한 반격을 시도합니다.

헬렌의 수사과정과 나란히 병행되는 건 어딘지 알 수 없는 지하실에 감금된 채 납치범의 기이한 행각에 시달리며 고통스런 시간을 견디는 루비의 이야기입니다. 저항과 체념을 반복하는 가운데 루비의 생명은 하루하루 꺼져갈 뿐입니다.

 

사건 못잖게 눈길을 끈 대목이 두 군데 있는데, 하나는 경찰 내부의 알력과 갈등이 흥미진진하고 긴박하게 그려진 점이고, 또 하나는 선악을 불문하고 거의 모든 인물에게 가족의 비극이란 서사를 부여한 점입니다. 헬렌과 세리 하우드의 충돌뿐 아니라 강력팀 형사들 간에 승진과 실적을 놓고 벌이는 경쟁도 치열하게 벌어지는데. 때론 선의를 넘어 악의와 탐욕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가족의 비극은 실은 헬렌 그레이스 시리즈의 숙명과도 같은 소재입니다. 주인공 헬렌의 캐릭터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이 괴물이나 다름없던 부모와, 지독한 애증을 주고받은 끝에 파멸에 이른 언니로 인한 트라우마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번엔 헬렌 못잖게 다양한 인물들 - 경찰, 피해자, 유족, 범인 - 에게도 엇비슷한 무게의 가족의 트라우마가 부여됐고, 그래선지 캐릭터는 전작들에 비해 더욱 생생해졌고, 이야기 전체의 볼륨감 역시 두터워진 느낌이었습니다. 사이코패스, 불륜, 마약 등 끔찍한 이유로 가족을 잃은 경우도 있고, 애증이 뒤섞인 가운데 남보다도 못한 관계를 이어가며 점차 서로를 잃어가는 가족도 있습니다. 누구보다 가족이란 말에 예민한 헬렌은 수사 과정 내내 타인의 가족들이 겪는 비극을 지켜보며 복잡한 감정에 빠져들곤 합니다.

 

여러 이야기 가운데 재미와 관심을 끈 순서대로 나열하면 헬렌과 세리 하우드의 충돌 경찰 내부의 알력과 갈등 가족의 비극 연쇄 납치살인사건입니다. 말하자면 가장 재미있었어야 할 미스터리 스릴러 서사가 기대에 비해 아쉬웠다는 뜻입니다. 수사 과정도, 범인의 정체와 동기도, 막판 반전도 대체로 단선적이고 덜 매력적이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페이지는 전작들처럼 엄청 잘 넘어가고, 빠른 템포와 속도감 역시 여전했으며, 개성 강하고 사연 많은 인물들에 대한 몰입도도 대단했지만 사건 자체의 힘이 다소 부족했다는 게 저의 총평입니다.

 

영국에선 헬렌 그레이스 시리즈12(2024‘Forget Me Not’)까지 출간됐지만, 한국엔 3인형의 집’(영국 2015, 한국 2016)을 끝으로 더는 소식이 없습니다. 성적 부진이 원인인지, 다른 이유가 있는지 알 순 없지만, 매력 만점의 주인공 헬렌의 이야기를 세 편밖에 읽지 못하게 된 건 그저 아쉽고 또 아쉬운 일입니다. 9년의 공백을 깨고 신작 소식이 들려올 가능성은 별로 없지만, 그래도 언젠가 헬렌의 활약을 다시 한 번 맛볼 수 있기를 고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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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더 크라임 이판사판
덴도 아라타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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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중년남성이 알몸의 사체로 발견됩니다. 그의 몸에선 눈에는 눈이라는 범인의 메시지가 발견되고, 이내 그가 3년 전 집단 성폭행 사건의 범인 중 한 명의 아버지로 밝혀지면서 경찰은 피해 여대생과 그녀의 가족을 주시합니다. 당시 경찰 고위직과 정치권 인사가 압력을 행사한 끝에 검찰은 기소를 포기했고 범인들은 유유히 법망을 벗어났지만 피해자와 그 가족은 사죄 한 번 받지 못한 채 지옥과도 같은 삶을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관할서 베테랑 형사 구라오카는 본청 수사1과의 루키 시바 린리와 파트너가 되어 수사에 나서지만, 3년이나 지나 복수에 나선 건지, 또 성폭행범이 아니라 그의 아버지를 살해한 이유는 무엇인지 알 수 없어 답답할 따름입니다.

 


그것은 여자라는 성을 무의식중에 낮춰보기 때문이겠죠. 성범죄라고 해도, 겨우 그것쯤이야, 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죠.” (p283)

 

젠더 크라임이라는 제목과 표지 속 ‘Stop killing women’이라는 메시지에서 짐작할 수 있듯 이 작품은 갖가지 여성 대상 범죄의 실상을 폭로하고 그런 범죄를 양산하고 비호하는 사회적 토양을 정면으로 비판합니다. 3년 전 성범죄에 대한 복수로 보이는 살인사건을 추적하는 미스터리로 출발하지만 딥 페이크, 아동 포르노, 가정폭력, 데이트폭력, 성희롱, 강간 등 여성을 먹잇감이나 장난감으로 여기는 추악한 범죄들이 메인 사건 못잖은 비중으로 다뤄지고, “성에 관한 편향된 생각이나 무자각적인 차별의식, 예로부터 내려온 왜곡된 성문화가 모든 여성 상대 범죄의 근원이라는 점을 돌직구처럼 강조하고 있어서 단순한 사회파 미스터리 이상의 울림을 품고 있습니다.

 

경찰은 성범죄를 수사하는 주체이기도 하지만, 남성 중심으로 돌아가는 조직이다 보니 의도적이든 아니든 성차별이 만연한 곳이기도 합니다. 주인공인 베테랑 형사 구라오카는 그런 이율배반적인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인데, 성범죄에 관한 한 누구보다 단호한 입장을 취하면서도 정작 그 자신이 무의식적으로 가부장적이고 성차별적 언행을 저지른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합니다. 그런 그가 요즘 젊은이같으면서도 바른생활 남자처럼 올바른 말만 하는 파트너 시바와 함께 수사를 진행하면서 젠더와 차별의 문제에 관해 크고 작은 깨달음을 얻는 모습은 단순히 교과서적인 계몽과는 차원이 다른, 의미 있는 경종으로 읽힙니다.

 

이 작품에서 또 한 가지 중요한 주제로 다뤄지는 건 속죄입니다. 애당초 죄를 짓는 것 자체가 잘못이지만 어떤 이유로든 죄를 지었다면 벌을 받고 속죄하는 것이 피해자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임을 덴도 아라타는 거듭 강조합니다. “한 사람의 인생을 망치고 영혼을 죽이는 것이나 다름없는 잔인한 범죄를 저지르고도 속죄를 거부했던 가해자들과 그 가족은 중년남성이 살해된 직후 뒤늦게 공포에 사로잡히면서 속죄에 관해 서로 다른 입장을 보이기 시작하고, 그렇게 촉발된 가해자들 간의 갈등은 또 다른 살인사건의 단초가 됩니다. 그 대목부터 덴도 아라타는 다소 노골적으로 주제의식을 드러내는데, 살짝 작위적인 느낌이 들긴 해도 거부감이 들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젠더 크라임이라는 제목은 한편으론 호기심을 자아내면서도, 또 한편으론 혹시나 이 작품이 젠더 문제에 관한 계몽 소설이 아닐까, 라는 의구심을 품게 만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덴도 아라타의 작품을 읽어본 독자라면 그가 결코 둘 중 어느 쪽으로도 치우지지 않을 거란 걸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젠더 크라임은 미스터리에도 충실했고, 젠더와 차별의 문제에도 진심으로 접근한 작품입니다. 그래선지 젠더의 문제에 관한 한 옛날보다 퇴보한 듯한 이즈음의 한국에서 이 작품이 널리 읽히면 좋겠다는 생각을 여러 번 해봤습니다. 북스피어 삼송 김사장님의 편집후기의 마지막 문장을 인용하며 서평을 마치겠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동의 없이 타인의 몸을 만지지 말고, 성적인 말로 상대를 불편하게 하지 말자. 그리고, 죽이지 말자.”

 

사족으로...

원래는 이 작품과 맥이 닿아있는 영원의 아이’(1999)를 먼저 읽으려 했는데, 삼송 김사장님께서는 젠더 크라임과 자신의 편집후기를 먼저 읽은 뒤 영원의 아이를 읽어보기를 권하셨습니다. 무거운 마음으로 읽어야 하는 작품이라 연이어 읽긴 부담스럽지만, 조만간 일본 문단 최대의 사건이라고까지 불렸던 영원의 아이를 꼭 읽어볼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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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지몽 탐정 갈릴레오 시리즈 2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억관 옮김 / 재인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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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레오 시리즈의 첫 편인 탐정 갈릴레오가 과학적인 기현상에 바탕을 둔 사건들을 다뤘다면, 두 번째 작품인 예지몽꿈에서 본 소녀’, ‘영을 보다’, ‘떠드는 영혼등 수록작의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 주로 비과학적인 심령 현상과 관련된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오컬트와 미스터리의 절묘한 크로스오버!”라는 띠지 카피 역시 예지몽이 어떤 작품인지 노골적으로 암시하는데, 그래선지 경시청 수사1과 구사나기 슌페이는 동료와 상관으로부터 신비주의 사건 전문 형사라는, 놀림 아닌 놀림을 받는 처지가 되고 맙니다.

 


탐정 갈릴레오라는 별명을 가진 천재 물리학자 유가와 마나부가 시리즈 주인공답게 맹활약을 펼치는 가운데 예지몽을 꾸는 소년과 소녀, 살해당한 바로 그 시간에 다른 곳에서 살아있는 모습이 목격된 여자, ‘시끄러운 영들이 피우는 소란 탓에 건물이 뒤흔들린다는 이른바 폴터가이스트 현상 등 그야말로 순도 100%의 오컬트 소재와 미스터리 서사가 잘 배합된 이야기들이 펼쳐집니다. 물론 사건의 진상은 오컬트와는 무관한, 그야말로 과학적인 설명과 논리적인 추리로 완벽하게 입증되지만, 독자는 에피소드 초반부에 으스스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비과학적인 심령 현상에 눈길을 빼앗길 수밖에 없습니다. 도대체 이 말도 안 되는 현상을 어떻게 과학과 논리의 힘으로 파헤칠 수 있는 걸까, 라는 의문과 함께 말입니다.

 

연이어 신비주의 사건을 맡은 것도 억울하지만 도무지 해법을 찾아내지 못해 전전긍긍하는 구사나기와 시니컬하면서도 예리한 시각으로 진상을 파헤치는 유가와의 콤비 플레이는 탐정 갈릴레오에 이어 이번에도 소소한 재미와 웃음을 선사하는데, 한번쯤은 구사나기가 유가와에게 멋진 한 방을 날리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역시나 거의 전편에서 KO패를 당하고 있어서 살짝 실망스럽기도 했습니다.

 

오컬트와 미스터리의 크로스오버도 매력적이고, 미스터리 자체의 촘촘함이나 반전의 맛도 훌륭한 작품이지만, 아무래도 깊고 묵직한 서사를 구사하기 힘든 단편의 한계 때문에 이야기의 무게와 사이즈가 더 이상 확장되지 못한 점은 탐정 갈릴레오때와 마찬가지로 가장 큰 아쉬움으로 남았습니다.

다행히도 갈릴레오 다시 읽기의 다음 작품은 장편입니다. 그것도 무려 이 시리즈의 대표작이자 히가시노 게이고의 최고 명품으로 꼽히는 용의자 X의 헌신입니다. 일본 미스터리에 입문하고 얼마 안 돼 읽은 작품으로 그 진한 감흥을 깨고 싶지 않아서 일부러 한국과 일본에서 제작된 영화도 보지 않았는데, 대략 17~18년 만에 다시 읽었을 때 어떤 느낌을 받게 될지 사뭇 궁금할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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