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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의 집 ㅣ 헬렌 그레이스 시리즈
M. J. 알리지 지음, 김효정 옮김 / 북플라자 / 2016년 8월
평점 :
품절
외진 해변에서 최소 3~4년 전에 살해당한 것으로 보이는 젊은 여성의 사체가 발견됩니다. 현장을 살피던 사우샘프턴 중앙경찰서 강력범죄수사팀의 헬렌 그레이스는 즉각 연쇄살인의 가능성을 떠올립니다. 한편 실종된 루비라는 여성에 대해 조사하던 중 동일범에게 납치된 것이 분명한 정황을 발견합니다. 헬렌은 두 여성 외에도 더 많은 피해자가 있을 것으로 보고 수사를 확대합니다. 하지만 사사건건 자신에게 반기를 드는 헬렌을 눈엣가시처럼 여기는 상관 세리 하우드는 어떻게든 그녀를 내쫓거나 몰락시키기 위해 악랄한 수법을 고안하기에 이르고, 헬렌은 최대의 위기에 빠지고 맙니다. 한편 정체불명의 남자에게 납치돼 지하실에 감금된 루비는 자기보다 먼저 납치됐던 여자들의 흔적을 발견하곤 말할 수 없는 공포에 휩싸입니다.

‘인형의 집’은 ‘이니미니’, ‘위선자들’에 이은 ‘헬렌 그레이스 시리즈’ 세 번째 작품입니다. 헬렌은 잇따라 연쇄살인사건을 해결해 국민적 관심과 명예를 얻은 뛰어난 형사지만, 개인적으론 몸과 마음이 불행과 상처로 뒤덮인 인물이기도 합니다. 가족으로 인한 심각한 트라우마를 지니고 있고, 공식적인 관계 외엔 누구에게도 곁을 내주지 않으며, 견딜 수 없는 죄책감에 사로잡힐 때면 SM클럽에 가서 채찍질로 스스로에게 벌을 주곤 합니다. ‘뛰어나지만 상처투성이인 스릴러 주인공’ 중에서도 꽤 도드라지는 캐릭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번에 헬렌이 쫓는 연쇄살인범은 특정한 외모의 젊은 여성만 골라 납치 살해하는 사이코패스입니다. 하지만 외모 상 공통점 외엔 피해자들의 처지가 모두 제각각이라 헬렌과 강력팀의 수사는 제자리를 맴돌거나 엉뚱한 헛발질만 반복합니다. 그런 와중에 헬렌은 자신을 증오하는 상관 세리 하우드가 파놓은 함정에 빠져 경찰이 된 뒤 가장 큰 위기에 봉착합니다. 전출 정도로 끝나지 않고 자칫 파면 혹은 체포될 상황까지 이르자 헬렌은 모든 것을 건 위험천만한 반격을 시도합니다.
헬렌의 수사과정과 나란히 병행되는 건 어딘지 알 수 없는 지하실에 감금된 채 납치범의 기이한 행각에 시달리며 고통스런 시간을 견디는 루비의 이야기입니다. 저항과 체념을 반복하는 가운데 루비의 생명은 하루하루 꺼져갈 뿐입니다.
사건 못잖게 눈길을 끈 대목이 두 군데 있는데, 하나는 경찰 내부의 알력과 갈등이 흥미진진하고 긴박하게 그려진 점이고, 또 하나는 선악을 불문하고 거의 모든 인물에게 ‘가족의 비극’이란 서사를 부여한 점입니다. 헬렌과 세리 하우드의 충돌뿐 아니라 강력팀 형사들 간에 승진과 실적을 놓고 벌이는 경쟁도 치열하게 벌어지는데. 때론 선의를 넘어 악의와 탐욕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가족의 비극’은 실은 ‘헬렌 그레이스 시리즈’의 숙명과도 같은 소재입니다. 주인공 헬렌의 캐릭터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이 ‘괴물이나 다름없던 부모와, 지독한 애증을 주고받은 끝에 파멸에 이른 언니로 인한 트라우마’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번엔 헬렌 못잖게 다양한 인물들 - 경찰, 피해자, 유족, 범인 - 에게도 엇비슷한 무게의 가족의 트라우마가 부여됐고, 그래선지 캐릭터는 전작들에 비해 더욱 생생해졌고, 이야기 전체의 볼륨감 역시 두터워진 느낌이었습니다. 사이코패스, 불륜, 마약 등 끔찍한 이유로 가족을 잃은 경우도 있고, 애증이 뒤섞인 가운데 남보다도 못한 관계를 이어가며 점차 서로를 잃어가는 가족도 있습니다. 누구보다 ‘가족’이란 말에 예민한 헬렌은 수사 과정 내내 타인의 가족들이 겪는 비극을 지켜보며 복잡한 감정에 빠져들곤 합니다.
여러 이야기 가운데 재미와 관심을 끈 순서대로 나열하면 ①헬렌과 세리 하우드의 충돌 ②경찰 내부의 알력과 갈등 ③가족의 비극 ④연쇄 납치살인사건입니다. 말하자면 가장 재미있었어야 할 미스터리 스릴러 서사가 기대에 비해 아쉬웠다는 뜻입니다. 수사 과정도, 범인의 정체와 동기도, 막판 반전도 대체로 단선적이고 덜 매력적이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페이지는 전작들처럼 엄청 잘 넘어가고, 빠른 템포와 속도감 역시 여전했으며, 개성 강하고 사연 많은 인물들에 대한 몰입도도 대단했지만 사건 자체의 힘이 다소 부족했다는 게 저의 총평입니다.
영국에선 ‘헬렌 그레이스 시리즈’가 12편(2024년 ‘Forget Me Not’)까지 출간됐지만, 한국엔 3편 ‘인형의 집’(영국 2015년, 한국 2016년)을 끝으로 더는 소식이 없습니다. 성적 부진이 원인인지, 다른 이유가 있는지 알 순 없지만, 매력 만점의 주인공 헬렌의 이야기를 세 편밖에 읽지 못하게 된 건 그저 아쉽고 또 아쉬운 일입니다. 9년의 공백을 깨고 신작 소식이 들려올 가능성은 별로 없지만, 그래도 언젠가 헬렌의 활약을 다시 한 번 맛볼 수 있기를 고대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