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나무의 여신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소미미디어 / 2024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월향신사에는 거대하고 장엄한 녹나무 한 그루가 있다. 초하룻날과 보름날 밤마다 나무 동굴 속으로 들어가 밀초에 불을 켜면 혈연으로 이어진 사람끼리 염원을 주고받을 수 있다. 녹나무에 염원을 새기면 예념이고, 그것을 받으면 수념이라고 하는데, 예념자와 수념자를 이어 주는 사람이 바로 파수꾼이다. 나오이 레이토는 이모 치후네의 뒤를 이어 새로운 파수꾼이 돼 매일같이 신사 경내를 청소하고 예념자와 수념자를 안내한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집에 절도범과 강도가 연달아 침입한 기이한 사건 때문에 레이토는 경찰의 주목을 받게 된다. 더구나 시집(詩集)을 대신 팔아 달라는 여고생과 잠들면 기억을 잃는 소년까지 나타나며 이야기는 걷잡을 수 없이 흘러간다. (출판사 소개글을 일부 수정 후 인용했습니다.)

 

녹나무의 여신2020년 출간된 녹나무의 파수꾼의 후속작으로, 혈연으로 이어진 사람들 사이에 염원을 주고받게 해주는 신비하고 영험한 녹나무와 신사 관리인이자 녹나무 파수꾼인 나오이 레이토가 펼쳐 보이는 기적에 관한 이야기이자 힐링 판타지 미스터리입니다. 불우한 성장과정을 겪다가 전과자가 될 뻔했던 레이토가 이모 치후네에게 구원받은 뒤 신사 관리인이자 녹나무 파수꾼이 되어 새로운 삶을 살게 된 이야기가 전작의 주요 내용이라면, ‘녹나무의 여신은 아직 어설프긴 해도 어엿하게 성장한 레이토가 갖가지 사건에 휘말리는 가운데 여러 사람들의 운명에 따뜻하고 훈훈한 영향을 미치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습니다.

 

여러 갈래의 이야기가 전개되지만 그것들은 클라이맥스에 이르러 한줄기로 합쳐지면서 거대한 녹나무가 발산하는 긍정과 선의의 에너지에 맞먹는 애틋한 감동과 여운을 선사합니다. 신사 인근의 한 주택에 절도범과 강도가 연이어 든 사건 때문에 경찰의 의심을 받게 되는 레이토의 이야기가 밑바탕에 깔려 있고, 자신이 직접 쓰고 제본한 시집을 신사에서 판매하게 해달라며 레이토를 찾아온 여고생 유키나의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뇌종양 수술 이후 심각한 기억장애 - 잠이 들면 전날의 기억이 모두 사라져버리는 장애 - 를 겪고 있는 중학생 소년 모토야는 누구에게나 철벽을 친 채 살아가지만 우연한 기회에 레이토와 마음을 터놓는 사이가 되는 것은 물론 특별한 그림 재능 덕분에 시를 쓰는 유키나와 함께 그림동화를 만들기로 하는 등 큰 변화를 겪게 됩니다. 레이토를 수렁에서 구원해준 이모 치후네의 인지장애 증세가 점차 심각해지면서 벌어지는 가슴 아픈 이야기 역시 나머지 이야기들과 절묘하게 연결되면서 독자의 눈가와 코끝을 수시로 찡하게 만들곤 합니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 중 원 픽을 꼽으라면 전 주저하지 않고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을 추천합니다. 결은 전혀 다르지만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비밀’. 그리고 녹나무 시리즈는 기적에 관한 판타지이자 선의를 전염시키는 힐링 소설이며 하나같이 수시로 눈물을 뽑아내고 가슴을 뭉클하게 만든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사실 전편인 녹나무의 파수꾼은 그런 기대감이 너무 강했던 탓에 제대로 눈물을 뽑아내지 못했는데, ‘녹나무의 여신은 그때와는 반대로 일부러 기대감을 낮춘 덕분인지 예상 밖으로 여러 대목에서 목구멍과 눈시울이 뜨끈해지는 행복한 경험을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 그 행복한 경험에 가장 큰 역할을 한 건 물론 주인공 레이토지만, 이 작품은 주요 등장인물 모두가 주인공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여러 갈래의 이야기들이 서로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전개돼서 더 애틋하고 특별하게 읽혔습니다. 대부분 불행하거나 불우하거나 불안감에 사로잡힌 인물들이지만 그들은 녹나무 파수꾼 레이토를 통해 삶과 운명, 현재와 미래, 희망과 도전에 대해 조금은 낙관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얻게 됩니다. 물론 그 여유는 거꾸로 레이토에게 선한 전염력을 발휘하여 그의 성장에 의미 있는 자양분이 돼주기도 합니다.

 

장르를 불문하고 기적, 힐링, 판타지 같은 단어가 소개글에 들어있으면 막연한 거부감부터 발동하는 게 사실인데, ‘녹나무 시리즈를 소개할 때 이 단어들을 쓰지 않을 수 없어서 좀 답답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히가시노 게이고가 그동안 선보인 기적과 힐링과 판타지를 한 번이라도 맛본 적 있는 독자라면 녹나무의 여신이 어떤 매력을 품고 있을지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극히 주관적인 평가지만 혹시 녹나무의 파수꾼에서 밋밋함 이상의 감흥을 느끼지 못한 독자라도 녹나무의 여신만큼은 충분히 만족할 수 있을 거란 생각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도쿄 사기꾼들 이판사판
신조 고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24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불의의 사고를 당해 가족을 잃고 되는 대로 살아가던 다쿠미 앞에 거물급 지면사(地面師, 타인의 부동산을 이용하여 돈을 가로채는 사기꾼) 해리슨 야마나카가 나타난다. 각종 부동산 거래 법령은 물론 자치체 조례에도 정통하고 형사소송법 조문과 판례를 술술 암송할 정도로 박식한 해리슨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줄 아는 다쿠미의 재능을 알아보고 지면사에게 필요한 기술을 가르쳐주며 자신의 조직에 합류시킨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지난 15년간 북스피어가 의뢰한 작품 중 가장 재미있었다.”는 번역가 이규원의 호평 때문에 혹시 영화 오션스 일레븐처럼 악당들이 주인공인 유쾌한 스릴러가 아닐까 생각하다가도 남의 부동산을 이용하여 돈을 가로채는 지면사가 주인공이라는 점 때문에 100% 유쾌할 수만은 없겠다는 묘한 기대감을 갖고 읽게 됐습니다.

처음 그 이름을 들어본 작가라 이력을 찾아보니 사회초년생을 착취하는 부동산 블랙기업, 다단계 판매에 빠져드는 젊은이들, 사회에서 이탈하고 마약을 팔아 연명하는 청년 등 주로 어둡고 무거운 사회파 미스터리를 써온 걸 알 수 있었는데, ‘도쿄 사기꾼들은 그중에서도 영상으로 제작될 만큼 리얼리티와 서스펜스가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받았습니다.

 

지면사의 사기극은 여러 전문가들의 협업으로 이뤄집니다. 사기 계획을 총지휘하는 지면사, 정보를 수집하고 타깃을 물색하는 도면사, 원 소유주를 사칭할 배우를 고르고 교육시키는 수배사, 서류와 인감을 만드는 위조범과 돈을 세탁하는 전문가가 그들입니다. 목표물을 정하고 각종 서류를 위조한 뒤 가짜 소유주를 내세워 부동산을 팔아치우고 나면 각자 흩어져 공백기를 가지다가 다시금 모여 새로운 목표물을 물색하곤 합니다. 피해자 입장에선 가짜 소유주에게 거액을 뜯긴 치명적인 사건이지만 경찰로선 단서도 없고 용의자를 특정하기도 어렵다 보니 비슷한 사건이 반복되는데도 수사력을 대거 투입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거물급 지면사인 해리슨의 휘하에서 중요한 임무를 맡은 다쿠미는 주인공이긴 해도 좀 독특한 이력을 지닌 사기꾼입니다. 안정적이던 가업이 한 사기꾼에 의해 처참하게 무너진 뒤 가족들은 끔찍한 최후를 맞이했고, 홀로 남은 다쿠미는 말 그대로 죽지 못해 억지로 살아가는 고난에 빠져있었습니다. 가업을 망친 사기극이 자신에게서 비롯됐다는 죄책감이 그를 짓눌렀지만 그렇다고 죽어야겠다는 의지가 강렬한 것도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밑바닥을 전전하던 중 우연히 만난 해리슨을 통해 지면사로 살아가게 됐지만, 그는 딱히 돈에 대한 욕심은 없습니다. 단지 지면사 외에는 달리 할 수 있는 일도, 하고 싶은 일도 없기 때문에 해리슨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다만 그의 마음속엔 일부러 죄를 거듭함으로써 과거의 비극을 잊어버리고 싶다는 묘한 위악감이 자리하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모든 게 디지털화된 세상에서 과연 가짜 소유주와 가짜 서류를 내세워 타인의 부동산을 갈취하는 게 가능할까 싶지만 작가는 엄청난 취재와 자료조사를 통해 지면사의 사기극을 생생하게 그려냅니다. 그래선지 지면사의 철두철미한 사기 행각을 읽다 보면 보이스피싱이나 스미싱 같은 건 애교처럼 보일 정도라서 언제든 나도 피해자가 될 수 있다라는 두려움과 함께 여러 차례 섬뜩한 느낌을 받게 됩니다. 비슷한 수법의 사기극이 한국에서도 횡행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머잖아 지면사라는 명칭이 뉴스에 등장할지도 모를 일입니다.

 

도쿄 사기꾼들은 단순히 사기 행각을 상세하게 그린 사회파 미스터리는 아닙니다. 돈 자체보다 사기의 쾌락과 희열을 추구하는 사이코패스부터 돈을 위해서라면 언제든 동료들을 배신할 준비가 돼있는 야비한 인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캐릭터들로 구성된 조직의 행태도 흥미롭고, 과거 자신이 놓쳤던 거물 지면사를 잡기 위해 분투하는 말년 형사의 추적극도 눈길을 끕니다. 거듭 죄를 지음으로써 과거의 비극을 회피하려는 주인공 다쿠미는 독자로 하여금 미워할 수도, 동정할 수도 없게 만드는 캐릭터라서 그가 어떤 엔딩을 맞이하게 될지 무척 궁금하게 만듭니다. 말하자면 도쿄 사기꾼들은 리얼리티 충만한 범죄 서스펜스이자 사기극의 가해자와 피해자들의 갖가지 심리까지 맛볼 수 있는 다양한 서사가 담긴 작품이란 뜻입니다.

 

신조 고의 사회파 미스터리가 한국에 더 소개될지는 알 수 없지만, 기회가 된다면 한두 작품쯤은 더 읽어보고 싶어졌습니다. 그가 다룬 소재 자체도 흥미롭지만 리얼리티가 잘 살아있는 생생한 묘사가 무엇보다 마음에 들었기 때문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녀와의 7일 라플라스 시리즈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24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지금은 민간 보안업체에서 일하지만 한때 경시청의 지명수배자 전담 형사였던 쓰키자와 가쓰시가 익사체로 발견됩니다. 경찰은 목격자와 단서를 찾기 위해 동분서주하지만 좀처럼 실마리를 잡지 못합니다. 정의감 넘치는 젊은 형사 와키사카는 쓰키자와의 죽음이 17년 전 벌어진 일가족 살해사건과 연관 있음을 감지하지만 상부의 함구령 때문에 단독 수사에 나서기로 결심합니다. 그러던 중 쓰키자와의 아들인 중학교 3년생 리쿠마와 가이메이 대학 수리학 연구소 직원 우하라 마도카가 범행 장소를 특정해내자 와키사카와 경찰은 놀람과 함께 곤혹스런 처지가 됩니다. 와키사카는 민간인인 마도카와 리쿠마의 위험한 조사에 반대하지만 이내 마도카의 특별한 능력을 직접 목격하곤 큰 충격에 빠집니다.

 

라플라스 시리즈의 세 번째 작품인 마녀와의 7은 제목에서 눈치 챌 수 있듯 라플라스의 마녀마도카가 주인공이 아니라 피해자의 아들이자 아버지의 죽음의 진상을 밝혀내려는 중학교 3년생 리쿠마와, 전직 형사의 죽음을 조사하면서 17년 전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려는 젊은 형사 와키사카가 주인공인 작품입니다. 물론 세상의 모든 물리적 현상을 예측해내는 신비로운 소녀우하라 마도카가 살인사건의 진상을 밝혀내고 은폐됐던 진실을 폭로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긴 하지만 이 작품에서만큼은 타이틀 롤을 리쿠마와 와키사카에게 양보한 것입니다. 말하자면 히가시노 게이고 특유의 범죄 미스터리가 주된 서사이고 마도카의 특별한 능력이 필수적인 양념으로 곁들여졌다는 뜻입니다.

 

아울러 마녀와의 7은 경찰의 수사 영역에까지 깊이 파고든 AI의 양면성, 개인의 DNA 정보까지 확보하려는 극단적 감시 시스템에 대한 논쟁,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도 인간의 뇌와 정신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반론 등 근미래에 닥칠 것이 분명한 현실적인 주제를 그리기도 합니다. 살해당한 전직 형사 쓰키자와 가쓰시는 이 주제들의 심각성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인물인데, 그는 일명 미아타리 수사원’, 즉 전국의 지명수배자의 얼굴을 기억한 뒤 길거리에서 무작정 사람들을 지켜보다가 기억 속 지명수배자가 눈에 띄면 그 자리에서 체포하는 특이한 형사였습니다. 인간의 뇌와 기억과 감각을 최대치로 연마한 인물이라 할 수 있는데, 문제는 AI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그 능력들은 더는 필요가 없어졌다는 점입니다. 촘촘하게 설치된 CCTV가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을 찍어서 전송하면 AI는 사전에 입력된 지명수배자 사진과 대조하여 즉시 체포 명령을 내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쓰키자와 가쓰시를 비롯하여 여러 인물을 통해 이 민감하고도 양면적인 주제들을 심도 있게 그려냅니다.

 

라플라스의 마녀마도카의 맹활약을 기대했던 터라 그녀의 비중이 조연으로 축소된 건 무척 아쉬웠지만, 대신 오랜만에 히가시노 게이고의 제대로 된 범죄 미스터리를 만끽할 수 있어서 대만족이었습니다. 아버지를 죽인 범인을 쫓으며 미처 몰랐던 아버지의 삶을 들여다보게 된 리쿠마의 사연은 긴장감 속에서도 애틋함을 느끼게 했고, 모두가 판도라의 상자라고 여기는 위험천만한 비밀을 오로지 정의감 하나로 과감하게 뒤쫓는 와키사카의 행동력도 흥미진진했습니다.(어쩌면 이 작품을 계기로 와키사카 시리즈가 탄생할지도 모를 일입니다.) AI의 양면성과 극단적 감시 시스템의 폐해는 묵직하면서도 생생한 묘사 덕분에 피부에 와 닿을 정도로 강렬한 두려움을 느끼게 만들었지만, 우하라 마도카와 쓰키자와 가쓰시가 입증한 인간의 뇌와 정신의 위대함은 그에 못잖은 안도감을 전해주면서 나름 단단한 격려의 메시지로 읽히기도 했습니다.

 

순전히 개인적인 느낌이지만 라플라스 시리즈는 당분간 후속작이 나오기 어려워 보입니다. 마도카의 특별한 능력만으로 이야기를 끌고 가는 건 더는 식상한 시도일 테고, 조연으로서 맹활약하는 것도 마녀와의 7의 동어반복이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물론 후속작이 나온다면 더없이 반가울 것이고, 히가시노 게이고라면 저의 근거 없는 우려 따위는 아주 쉽게 털어내며 더 멋진 이야기를 자아낼 게 분명합니다. 아주 긴 시리즈까진 바라지 않지만, 마도카가 새로운 레벨에서 새로운 테마로 맹활약하는 걸 적어도 두세 편 정도는 더 지켜볼 수 있기를 바라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력의 태동 라플라스 시리즈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9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마력의 태동은 시리즈 첫 편인 라플라스의 마녀의 후속작이자 프리퀄로 모두 다섯 편의 단편이 수록돼있습니다. 앞의 네 편이 주인공 우하라 마도카의 프리퀄이고 마지막 한 편은 전작에서 마도카와 함께 맹활약을 펼쳤던 지구화학 전문가 아오에 교수의 프리퀄입니다. 전작이 온천지대에서 벌어진 기이한 황화수소 중독사를 소재삼아 SF, 메디컬, 가족의 비극, 복수, 미스터리 등 여러 장르를 혼합시킨 대작이었다면, ‘마력의 태동은 주인공 마도카가 어떻게 성장해왔는지와 함께 치유와 구원을 중점적으로 그린 휴먼 드라마에 가까운 작품입니다.

 

시리즈 첫 편의 제목이자 마도카를 가리키는 별명이기도 한 라플라스의 마녀는 프랑스의 수학자이자 물리학자인 라플라스가 창조한 초월적 존재 라플라스의 악마에서 비롯된 말입니다. 그 초월적 존재는 모든 원자의 현재 위치와 운동량을 파악해낸 뒤 물리학을 통해 과거와 현재의 모든 현상을 설명하고 미래까지 완전하게 예지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말 그대로 세상에 존재할 리 없는 초월적 존재지만 히가시노 게이고는 미지의 영역인 뇌의 세계와 물리학의 난제들을 지렛대 삼아 세상의 모든 물리적 현상을 예측해내는 신비로운 소녀우하라 마도카를 만들어냈습니다.

 

마도카의 프리퀄을 그린 네 편의 단편은 30대의 침구사(鍼灸士) 구도 나유타가 이야기를 끌고 갑니다. 스키점프 선수 치료 차 출장을 떠났던 나유타는 우연한 기회에 유체역학 교수의 소개로 마도카와 인연을 맺습니다. 이후 두 사람은 우연인 듯 운명인 듯 여러 차례 접점을 가지면서 주위 사람들에게 치유와 구원의 손길을 내밉니다. 성적을 내지 못해 은퇴를 고민하는 노장 스키점프 선수, 베테랑 투수의 마구를 받아내지 못해 좌절한 젊은 포수, 아들의 죽음에 책임감을 느낀 나머지 절망의 날들을 보내는 노교사, 그리고 동성 연인의 죽음을 자기 탓으로 돌리며 괴로워하는 유명 작곡가 등이 마도카와 나유타 덕분에 다시 한 번 열심히 살아갈 희망을 품게 됩니다.

 

재미있는 건 마도카가 라플라스의 마녀로서의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건 맞지만 치유와 구원의 마지막 단계는 좌절과 절망에 빠져있던 본인들의 의지와 노력에게 맡긴다는 점입니다. 말하자면 제 자리로 돌아올 수 있게 도와만줄 뿐, 모든 걸 해결해주진 않는다는 뜻입니다. 마도카의 특별한 능력을 거듭 목격하며 놀라움-믿을 수 없음-믿을 수밖에 없음의 단계를 거쳐 끝내 그녀를 신뢰하게 된 침구사 나유타의 진심 어린 응원 역시 치유와 구원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는데, 그는 마도카와의 인연 덕분에 오랫동안 끌어안고 있던 자신의 트라우마와 정면으로 마주할 용기를 얻기도 합니다. 물론 그렇게 되기까지 마도카와 나유타는 띠동갑 이상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유치한 다툼에서부터 진지한 갈등에 이르기까지 흥미진진한 우여곡절을 겪게 됩니다.

 

지구화학 전문가 아오에 교수의 프리퀄은 라플라스의 마녀에서 벌어진 첫 번째 사건과 함께 그가 그로부터 3년 전에 겪은 또 다른 온천지대에서의 황화수소 중독사를 다룹니다. 마도카와 나유타가 등장하진 않지만 후속작을 위한 흥미로운 떡밥을 남겨놓기도 해서 곧이어 읽을 시리즈 3마녀와의 7에 대한 기대감을 높여줬습니다.

 

패러독스 13’ 이후 히가시노 게이고의 이과 미스터리를 외면해왔지만, ‘라플라스 시리즈덕분에 오랜 편견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물론 과도한 이과 미스터리는 여전히 기피 대상이지만 그래도 그동안 읽을 생각도 안 했던 작품들을 다른 독자들의 서평을 통해서라도 한두 편씩 알아볼까 고민 중입니다. 혹시라도 저처럼 히가시노 게이고의 이과 미스터리에 거부감이 있던 독자라면 라플라스 시리즈를 읽어볼 것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라플라스의 마녀 라플라스 시리즈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6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두 곳의 온천지대에서 황화수소 중독으로 인한 사망자가 발생합니다. 좀처럼 발생하기 어려운 불행한 우연이자 자연재해로 여겨졌지만, 몇몇 사람들은 이 두 사고에 대해 의문을 품기 시작합니다. 애초 사건성이 없는 자연재해라고 단정했지만 의심스런 정황들을 연이어 발견하면서 사건에 휘말리는 지구화학 전문가 아오에 교수, 두 사고 중 하나는 사망자의 아내가 재산을 노리고 벌인 살인사건이라고 확신하는 관할서 형사 나카오카, 그리고 두 사고현장에 나타나 한 젊은 남자의 행적을 조사하는 18살 소녀 우하라 마도카가 그들입니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을 꽤 읽은 편이지만 라플라스 시리즈는 그동안 관심목록에 올린 적조차 없었는데, 그건 히가시노의 이과 미스터리는 싫다!”라는, 아주 단순하고 유치한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갈릴레오 시리즈가 나름 소화 가능한 재미있는 이과 미스터리였던 반면, ‘패러독스 13’히가시노의 이과 미스터리에 대한 트라우마를 안겨준 작품입니다.

라플라스 시리즈를 읽기로 결심한 계기는 이번에 새로 출간된 시리즈 세 번째 작품 마녀와의 7서평단에 뽑혔기 때문인데, 새로 접한 시리즈는 무조건 첫 작품부터 읽어야 한다는 강박 아닌 강박 때문에 이과 미스터리에 대한 두려움(?)을 접고 라플라스의 마녀부터 찾아 읽기로 했습니다.

 

프랑스의 수학자이자 물리학자인 라플라스는 모든 원자의 현재 위치와 운동량을 파악해내는 지성이 존재한다면 그 존재는 물리학을 활용해 과거와 현재의 모든 현상을 설명하고 미래까지 완전하게 예지가 가능하다.”라는 가설을 세웠고, 존재는 후일 라플라스의 악마라는 별명으로 불리게 됩니다. 근대 물리학에서 가상한 일종의 초월적 존재라고 할 수 있는데, 히가시노 게이고가 창조한 18살 소녀 우하라 마도카는 바로 이 초월적 존재의 능력을 갖춘 라플라스의 마녀인 것입니다. 쉽게 얘기하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물리적 현상을 예측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철저한 보호대상이자 연구대상인 마도카는 아버지가 뇌신경외과 박사로 재직 중인 가이메이 대학 수리학 연구소에 머물던 중 한 온천지대에서 벌어진 황화수소 중독사고를 알게 된 뒤 그곳을 탈출하여 한 젊은 남자의 행적을 조사하기 시작합니다. 지구화학 전문가인 아오에 교수는 첫 사고현장에서 우연히 마주쳤던 소녀 마도카를 두 번째 사고현장에서도 목격하자 그녀는 물론 그녀가 찾는 젊은 남자가 두 건의 사고에 연루돼있음을 확신합니다. 아오에 교수는 두 사고 모두 자연재해가 분명하다며 전문가로서 의견을 피력했지만, 사건성을 의심하는 관할서 형사 나카오카가 찾아오고 마도카의 보호자를 자처하는 대학 관계자와 경호원까지 등장하자 자신의 판단이 잘못됐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조심스레 사건의 한복판으로 다가가기 시작합니다.

 

라플라스의 마녀는 물리학을 통해 모든 것을 예측할 수 있는 주인공이 등장하는 SF 미스터리지만, 그 외에도 다채로운 서사들이 한데 녹아든 종합선물세트 같은 작품입니다. 뇌 의학을 다룬 메디컬 스릴러, 한 가족이 몰살된 비극적인 사건,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집요한 복수극, 진범의 정체를 추적하는 미스터리 등 히가시노 게이고가 즐겨 구사했던 장르들이 먹음직스런 비빔밥처럼 잘 섞여있다는 뜻입니다.

등장인물도 많고 스포일러가 될 부분들이 워낙 많아서 자세한 줄거리를 언급할 수는 없지만, SF 중심의 이과 미스터리임에도 불구하고 저 같은 타고난 문과생조차 조금의 거부감도 없이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이란 것만은 확실히 보증할 수 있습니다. 주인공 마도카를 비롯하여 주요 조연들과 단역들에 이르기까지 매력적인 캐릭터를 지니고 있고, 사건 역시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긴장감과 속도감을 잃지 않아 단번에 마지막 장까지 달릴 수 있게 만듭니다.

 

모든 것을 예측할 수 있는 마도카의 특별한 능력에 대해 고개를 갸웃거릴 독자도 있겠지만, 나름 친절하고 생생한 히가시노 게이고의 설명 덕분에 별 위화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오히려 이 작품의 프리퀄이자 시리즈 두 번째 작품인 마력의 태동에 대한 궁금증에 빠져들었는데, ‘마녀와의 7서평 마감일에 맞추기 위해서라도 곧이어 두 편을 연달아 읽을 생각입니다. 더불어 그동안 외면했던 히가시노의 이과 미스터리에도 조금은 관심을 가져보려고 합니다. 물론 소재만 보고 겁부터 먹게 될 작품도 분명 있겠지만 말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