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계 미친 반전
유키 하루오 지음, 김은모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4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9살 리에는 아빠 오무로와 함께 생전의 큰아빠가 소유했던 에다우치지마섬을 방문합니다. 관광회사, 부동산회사, 건축사무소 등 섬에 리조트 시설을 건설하려는 시찰단에 소유주 가족 자격으로 동행한 것입니다. 하지만 도착과 함께 일행은 큰 충격에 빠집니다. 5년 넘게 방치됐던 섬 곳곳에 사람의 흔적이 남아있는 것은 물론 엄청난 양의 폭탄이 적재돼있었기 때문입니다. 다들 패닉에 빠진 탓에 경찰 신고마저 다음날로 미뤘지만, 일행 중 한 명이 다음날 아침 참혹한 사체로 발견되면서 섬의 상황은 돌변합니다. 범인은 일행들이 지켜야 할 열 개의 계율을 종이에 적어 남겼는데, 그걸 어겼을 때 당하게 될 보복은 그야말로 공포 그 자체였습니다.

 

2023년 한국 독자들의 관심을 사로잡았던 클로즈드 서클물 방주에 이은 유키 하루오의 일명 성서 3부작중 두 번째 작품입니다. 제목만 보면 종교적 색채가 깃든 작품이 아닐까 오해하기 쉽지만 실은 십계, 즉 열 가지 계율은 연쇄살인범이 일행들에게 내린 기이하면서도 엄격한 지시사항을 뜻합니다.

 

그런데 이 지시사항들 때문에 십계는 클로즈드 서클물과는 정반대의 규칙을 품게 됩니다. 즉 외부와 단절된 밀실에서 살인이 벌어지면 서로를 의심하며 누가 범인인지 알아내려는 팽팽한 미스터리와 서스펜스가 전개되는 것이 클로즈드 서클물의 규칙이지만, ‘십계는 배경 자체가 전화와 인터넷이 잘 터지는 섬이란 점부터 전혀 다른 양상을 보입니다. 밀실이면서 동시에 밀실이 아닌 느낌이랄까요? 또한 범인이 내건 계율에 따르면 일행들이 살아남으려면 경찰 신고는 물론 사건에 대해 의견을 교환하는 것도, 범인을 추리하는 것도 포기해야만 합니다. 계율을 어긴 대가는 섬에 설치된 대량의 폭탄에 의한 떼죽음이기 때문에, 일행들은 “3일 후엔 섬을 떠나게 해주겠다.”라는 믿기 어려운 범인의 메시지에만 의지한 채 지옥과도 같은 시간들을 보낼 수밖에 없습니다.

 

아이러니한 건 범인이 실수로 자신의 정체를 노출하거나 단서를 남겨서 일행들이 진상을 알게 되는 경우에도 폭탄에 의한 떼죽음이라는 대가는 똑같다는 점입니다. 결국 일행들은 부디 범인이 성공적으로 범행을 저지른 뒤 자신들을 섬 밖으로 내보내주길 바라게 됩니다. 말하자면 폭탄에 통제당한 상황에서 범인의 지시를 따르는 것은 물론 필요한 경우 그의 범행에 협력까지 해야 하는 딜레마에 빠진 셈입니다. ‘방주가 밀실에서 살아남기 위해 한시라도 빨리 범인을 찾아내야 하는 미스터리였다면, ‘십계는 살아남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 하는, 심지어 범인을 도와야 하고, 범인이 실수하지 않기를 기원해야만 하는 특이한 미스터리입니다.

 

하지만 정말 등장인물 전원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그건 이야기 자체로 실격인 셈이고, 당연히 십계에는 범인의 정체를 추적하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다만 계율에 의한 제약이 너무 심한데다 일행 중 그 누구도 탐정의 등장을 바라지 않기 때문에 탐정 역할을 맡은 인물의 동선은 극히 한정적일 수밖에 없는데, 바로 그 대목에서 지금껏 맛보지 못한 독특한 긴장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서로를 의심하며 범인을 찾아내려 분투하는 클로즈드 서클물에 비하면 독자를 끌어들이는 힘이 살짝 떨어지는 건 사실입니다. ‘방주가 시종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페이지를 넘기게 만들었다면 십계는 탐정 역의 인물이 진상을 폭로하는 장면에서도 흥분과 열감이 기대치만큼 높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유키 하루오의 진가는 바로 그 대목부터 발휘되기 시작합니다. 끝났나, 싶으면 반전이 뒤통수를 치고, 이번엔 진짜 끝났나, 싶으면 ? 이거 뭐지?”라는 엄청난 위화감을 선사합니다. 특히 마지막 페이지의 반전은 쉽사리 눈치 채지 못할 독자들이 꽤 있을 텐데, 그걸 제대로 이해하려면 반드시 옮긴이의 말까지 읽어야만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처럼 100% 이해가 안 돼서 결국 다른 텍스트까지 뒤적이는 수고를 감당한 독자도 분명 있을 것입니다.)

 

방주때문에 한없이 기대치가 높아졌던 탓에 살짝 아쉬움이 남은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십계는 유키 하루오의 정교한 미스터리와 반전의 맛을 즐길 수 있는 수작이라는 생각입니다. ‘옮긴이의 말에 따르면 유키 하루오는 방주십계에 이어 낙원이라는 작품을 준비 중이랍니다. ‘성서 3부작이란 명칭에 어울리는 라인업인데, 문득 낙원의 탈을 쓴 밀실 지옥에서 벌어지는 화려한 반전 파티라는 카피가 떠오를 정도로 전작들을 능가하는 작품이 아닐까, 기대하게 됩니다. 머잖아 유키 하루오의 신작 소식을 들을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라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이팅게일의 침묵 가이도 다케루의 메디컬 엔터테인먼트 2
가이도 다케루 지음, 권일영 옮김 / 예담 / 2008년 1월
평점 :
절판


(’名品再讀은 오래 전에 읽었지만 서평을 남기지 않았던 작품들을 다시 읽으면서 제가 갖다 붙인 조잡한 타이틀입니다. 대부분 명작으로 기억하던 작품들이지만 다시 읽었을 때의 감흥은 조금씩 달랐습니다.)


망막아종(어린이의 안구에 발생하는 암)으로 도조대학 부속병원에 입원한 14세 소년 미즈토는 안구 적출수술을 거부하여 의료진을 곤혹스럽게 만듭니다. 개망나니인 아버지는 미즈토를 내팽개친 채 연락도 안 되는 상태였고, 결국 간호사 사요가 수술승낙서를 받기 위해 그를 만나러 나섭니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 미즈토의 아버지가 토막 시체로 발견됩니다. 수사에 나선 경찰은 미즈토를 유력한 용의자로 단정하면서 동시에 알리바이가 모호한 사요를 공범으로 의심합니다. 한편 유명 여가수 사에코가 심각한 간경변으로 긴급 입원하는데, 그녀의 매니저 시로사키는 사에코 못잖은 천상의 목소리를 가진 간호사 사요에게 각별한 관심을 쏟습니다.

 

나이팅게일의 침묵은 의사 같지 않은 의사 다구치와 공무원 같지 않은 공무원 시라토리를 앞세운 가이도 다케루의 다구치-시라토리 시리즈두 번째 작품입니다. 피를 보기 싫어해서 내과를 선택한 다구치는 병원 내 권력투쟁이나 승진 경쟁이 싫어서 건물 한 구석에 자리한 부정수소외래(不定愁訴外來)에서 환자들의 하소연을 들어주는 한직 중의 한직에 근무하는 내과의사입니다. 안하무인에 지독한 독설가인 시라토리는 후생노동성의 꽉 막힌 관료 시스템에 반발하다가 한직으로 내쳐진 인물이지만 각종 의료면허는 물론이고 뛰어난 논리력과 추리력까지 갖춘 이른바 로지컬 몬스터입니다.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캐릭터대로 두 사람은 무수한 충돌을 겪으면서도 묘하게 시너지 효과를 내면서 도조대학 부속병원에서 벌어지는 특이한 사건들을 해결하곤 합니다.

 

10여 년 전 시리즈 첫 편인 바티스타 수술 팀의 영광을 무척 재미있게 읽고 푹 빠져든 게 사실이지만, 후속작인 나이팅게일의 침묵은 그 당시에도 여러 번 고개를 갸웃거리며 페이지를 넘겼던 기억이 선명하게 남아있습니다. 입원환자의 아버지가 토막 시체로 발견되고 아들은 물론 담당 간호사까지 용의선상에 오르면서 메디컬 미스터리가 아닌 살인사건 미스터리가 이야기의 중심을 차지하는 듯 보였지만, 실제로 좀더 비중 있게 그려진 건 천상의 가릉빈가라 불리는 유명 여가수 사에코와 그녀 못잖게 특별한 목소리와 가창력을 지닌 간호사 사요가 이끄는 미묘한 공감각(共感覺, synesthesia)에 관한 이야기였기 때문입니다.

공감각이란 어떤 감각에 자극이 주어졌을 때 다른 영역의 감각을 불러일으키는 감각 간의 전이 현상을 말합니다. 즉 한 감각이 다른 감각을 유발한다는 것입니다. ‘나이팅게일의 침묵에 등장하는 공감각은 노래에 의해 자극된 청각이 시각을 불러일으키는 것인데, 말하자면 노래를 듣는 순간 눈앞에 어떤 영상이 선명하게 보이는 현상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처음 읽었을 때 여러 번 고개를 갸웃거렸던 이유는 타인의 공감각을 이끌어내는 특별한 능력자들인 사에코와 사요의 이야기와 살인사건 미스터리가 머릿속에서 좀처럼 매끄럽게 연결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는데, 10여 년이 흘러 다시 읽은 이번에도 그 갸웃거림은 여전했습니다. 공감각이란 게 분명 과학적으로 입증된 현상임에도 불구하고 제겐 황당한 SF 판타지 장치처럼 보일 뿐이었고, 그 현상을 이용하여 살인사건 미스터리의 진실을 밝혀낸다는 설정 역시 마지막 장을 덮은 뒤에도 좀처럼 수긍하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공감각은 공감각대로 난해하기만 했고, 살인사건 수사는 경찰 캐릭터들이 전담하고 있다 보니 정작 주인공인 다구치와 시라토리의 존재감은 미미하기만 했습니다. 물론 막판에 히드 카드로 반전을 일으키는 건 두 사람의 몫이었지만 계속 짙은 안개 속을 헤매듯 페이지를 넘겨온 탓에 쾌감이나 짜릿함 같은 건 느낄 겨를도 없었습니다. 그밖에도 굳이 이 이야기에 등장할 필요가 있었나, 싶은 캐릭터들도 적지 않아서 전체적으로 산만하게 읽힌 점도 아쉽게 느껴졌습니다.

 

10여 년 전에 느꼈던 실망감을 고스란히 다시 한 번 맛봐야 했던 책읽기였지만, 그래도 시리즈에 대한 애정이 너무 강한 탓에 나름 완곡한 악평으로 마무리하려 애써봤습니다. 기억이 틀리지 않는다면 후속작인 제너럴 루주의 개선은 무척 재미있게 읽었던 것 같은데, 부디 나이팅게일의 침묵의 아쉬움을 넉넉하게 보상해주기를 바라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바티스타 수술 팀의 영광 가이도 다케루의 메디컬 엔터테인먼트 1
가이도 다케루 지음, 권일영 옮김 / 예담 / 2007년 1월
평점 :
품절


(‘名品再讀은 오래 전에 읽었지만 서평을 남기지 않았던 작품들을 다시 읽으면서 제가 갖다 붙인 조잡한 타이틀입니다. 대부분 명작으로 기억하던 작품들이지만 다시 읽었을 때의 감흥은 조금씩 달랐습니다.)


2006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대상 수상작인 바티스타 수술 팀의 영광은 도조대학 부속병원을 무대로 한 다구치-시라토리 시리즈의 첫 작품으로 현직 의사 가이도 다케루의 데뷔작이기도 합니다. 2014년까지 여덟 편의 작품이 일본에서 출간됐지만 한국에 소개된 건 단 네 편뿐이고, 시리즈 외의 작품이 간간히 소개된 바 있습니다. (같은 출판사에서 내놓은 나전미궁은 일종의 외전으로 다구치-시라토리 시리즈에 포함되진 않습니다.)

2010년 즈음 이 시리즈를 처음 접하곤 새로운 차원의 메디컬 미스터리에 흠뻑 빠졌지만, 한국에 마지막으로 소개된 아리아드네의 탄환’(시리즈 6)을 읽고 크게 실망한 뒤로 가이도 다케루를 잊고 있었습니다. (공교롭게도 그 이후로는 다구치-시라토리 시리즈가 더는 출간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워낙 인상 깊게 읽은 시리즈인데다 초반에 읽은 작품들은 서평을 남겨놓지 않아서 오랜만에 처음 읽었을 때의 기분을 떠올리며 재독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도조대학 부속병원에는 미국에서 초빙한 외과의사 기류 교이치가 이끄는 바티스타 수술 팀이 있습니다. 바티스타 수술이란 확장형 심근증을 치료하기 위한 방식 가운데 하나로 난이도는 높고 리스크는 큰 수술입니다. 그러나 도조대학의 바티스타 수숱 팀은 성공률 100%라는 경이적인 기록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 세 차례 연속 수술 실패로 환자가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고, 위기감을 느낀 다카시나 병원장은 외래 책임자인 다구치에게 내부 조사를 의뢰합니다. (출판사 소개글을 일부 수정 후 인용했습니다.)

 

난이도 높은 심장수술 현장에서 연이어 발생한 사망사고의 진상을 같은 병원에 근무하는 내과의사 다구치 고헤이와 후생노동성 관료 시라토리 게이스케가 조사하는 이야기입니다. 우연히 연속된 불운이거나 피할 수 없었던 의료 사고이거나 최악의 경우 누군가의 악의에 의한 사태, 즉 살인일 수 있다는 가정 하에 진행되는 조사는 바티스타 수술 팀 전원에 대한 면담과 수술 현장 관찰로 이뤄집니다. 애초 내과의사 다구치 홀로 진행하던 조사가 벽에 부딪히자 병원장은 후생노동성 관료인 시라토리를 투입하고, 그때부터 견원지간마냥 사사건건 충돌하던 두 사람이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진상을 밝혀내게 됩니다.

 

이 작품의 가장 큰 매력은 두 주인공의 캐릭터입니다. 다구치는 출세 경쟁과 권력투쟁이 난무하는 대학병원에 염증을 느낀 나머지 지금은 건물 한 구석에 자리한 부정수소외래(不定愁訴外來)에서 환자들의 하소연을 들어주는 한직 중의 한직에 근무하는 내과의사입니다. 피를 보기 싫어해서 수술실과 가장 인연이 없는 신경내과를 선택한 그가 심장수술 현장에서 벌어진 사망사고를 조사한다는 건 아이러니 그 자체입니다.

그와 콤비 플레이를 펼치는 시라토리 게이스케는 거창한 명함 속 직함과는 반대로 후생노동성에서 내놓은 자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관료 시스템에 반발하다가 한직으로 내쳐진 그는 의료과실 사망 관련 중립적 제3자 기관 설립 추진 준비실장이라는 허울뿐인 직책을 갖고 있는데, 공교롭게도 이 직책 때문에 도조대학 부속병원에서 벌어진 연이은 사망사고 조사에 가담하게 된 것입니다.

자신이 속한 조직에서 바닥을 치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두 사람의 성격은 정반대입니다. 다구치가 다소 순진하고 소극적인 반면 시라토리는 안하무인에 지독한 독설로 중무장한 인물입니다. 이들은 조사 과정 내내 충돌과 반목을 거듭하면서도 서로의 장점을 인정하고 사건의 진상에 도달하는 롤러코스터 같은 여정을 겪습니다.

 

바티스타 수술 팀의 영광은 가이도 다케루의 메디컬 미스터리 가운데 유독 사회파 기질이 진하게 녹아있는 작품입니다. 대학병원의 낡고 고루한 시스템, 질 좋은 논문이나 진정한 의료행위보다는 출세와 권력투쟁에 몰두하는 노회한 의사들, 후생노동성의 관료 시스템이 일으키는 부작용, 만성적인 의료인력 부족으로 인한 과부하, 소아 장기이식을 불법으로 규정한 모순적인 일본의 의료현실 등 병원 안팎에서 벌어지는 여러 가지 문제들을 정면으로 다룹니다. 말하자면 미스터리 자체도 흥미롭지만 병원을 둘러싼 각종 사회적 문제를 돌직구처럼 비판하는 대목들 역시 독자의 눈길을 사로잡는다는 뜻입니다. 바티스타 수술 팀에서 벌어진 연이은 사망사고의 진실은 대단한 반전이나 충격적인 전개를 보이진 않지만, 두 주인공의 독특한 캐릭터와 사회파 메디컬 미스터리 서사가 매력적으로 결합돼있어서 출간 당시 일본에서도 큰 반향을 일으켰고 한국 독자들에게도 강한 인상을 남겼다는 생각입니다.

 

미스터리 서사는 처음 읽었을 때만큼 쫄깃하게 느껴지진 않았지만, 다구치와 시라토리의 캐릭터 플레이는 역시나 기억 속 그대로 흥미진진하게 읽혔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서로의 장점을 제대로 파악한 두 사람이 도조병원에서 겪게 될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는데, 소아병동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을 다룬 나이팅게일의 침묵은 본격적인 살인사건까지 등장하는 작품이라 벌써부터 기대와 호기심이 부풀어 오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문이 열리면 클래식 추리소설의 잃어버린 보석, 잊혀진 미스터리 작가 시리즈 4
헬렌 라일리 지음, 최호정 옮김 / 키멜리움 / 2024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대 초반의 나탈리 플라벨은 어머니의 유산을 상속받은 백만장자다. 가족과 일가친척들이 그녀의 부에 기생하는 반면 이복언니 이브는 나탈리의 재산으로 살아가기를 거부하고 독립함으로써 가족과 의절한다. 이브가 오랜 의절 끝에 나탈리의 저택으로 돌아왔을 때 가족들 사이에는 미묘한 긴장과 불안의 기류가 흐르고 있다. 이브는 자신을 미워하고 나탈리를 편애하던 이모 샬럿의 눈길이 무섭다. 그런데 플라벨 가족의 사유지 공원에서 샬럿이 총에 맞은 채 시신으로 발견되자 이브를 비롯한 플라벨 가족 모두가 용의선상에 오른다. (출판사 소개글을 일부 수정 후 인용했습니다.)

 

문이 열리면클래식 추리소설의 잃어버린 보석, 잊혀진 미스터리 작가 시리즈의 네 번째 작품입니다. 시리즈 첫 작품인 리슐리외 호텔 살인’(아니타 블랙몬)을 재미있게 읽어서 이 시리즈에 관심을 갖게 됐는데, 이 작품을 쓴 헬렌 라일리 역시 대단한 이력을 지녔지만 그 이름을 들어본 적 없는 작가라서 읽기 전부터 무척 기대가 됐습니다. 특히 맨해튼 살인 수사반의 크리스토퍼 맥키 경감을 주인공으로 한 시리즈가 무려 30여 편이나 된다고 해서 놀랐는데, ‘문이 열리면은 그 중 열다섯 번째 작품이라고 하니 말 그대로 시리즈가 제대로 무르익었을 무렵에 나온 작품으로 보입니다.

 

2차 대전이 한창 중인 1940년대 초반, 겨울 안개에 뒤덮인 을씨년스러운 뉴욕의 부촌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은 당일 오후에서 저녁까지 저택에 모였던 가족 중 한 명이 범인이 틀림없다는 사실 때문에 여러 사람을 당혹스럽게 만듭니다. 무엇보다 범행 동기를 파악할 수 없어 애를 먹던 크리스토퍼 맥키 경감은 연이은 탐문과 철저한 조사로 유력한 용의자를 특정하지만 동시에 이 사건 이면에 좀처럼 가늠할 수 없는 지독한 동기가 숨어있는 것 같아서 진범은 따로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정 하에 비공식적인 연장 수사에 돌입합니다.

 

경찰 미스터리라고 하면 간결하고 쉬운 문장과 빠른 전개가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데, ‘문이 열리면은 심리 스릴러로 분류해도 괜찮을 만큼 등장인물들의 불안한 심리를 집요하게 묘사하고 있어서 쉽게 섞이기 어려운 두 장르가 미묘하게 혼합됐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또한 전시체제 하의 뉴욕, 사방을 둘러싼 지독한 겨울 안개, 불온한 기운이 감도는 저택 등 풍경 묘사에 있어서도 작가는 다소 과도해 보일 정도로 공을 들이는데, 그 때문인지 초반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다라는 한 독자의 서평에 고개가 끄덕여지기도 했습니다.

 

크리스토퍼 맥키 경감은 딱히 특징적인 캐릭터는 없지만 성실하고 모범적인 경찰을 상징하는 인물로 보였습니다. 흠잡을 데 없는 인성, 교과서 같은 수사 기법, 진실을 가리기 위해 끝까지 매진하는 열정 등 장점밖에 없어 보이는 경찰이지만, 역설적이게도 바로 그런 점 때문에 조금은 무색무취해 보인 것도 사실입니다. 30여 편이나 되는 시리즈의 주인공이라면 뭔가 하나쯤은 모난 데도 있고 괴짜 같은 구석도 있을 만한데 너무 얌전한 범생이처럼 그려졌다고 할까요?

 

플라벨 집안을 잠식하고 있는 불안과 불온, 그리고 살인사건 배후에 도사리고 있는 추악한 비밀의 정체에 대한 궁금증이 눈길을 끄는 가운데 살인사건 외에도 연이어 플라벨 집안의 인물들을 공격하는 사건이 벌어져서 마지막까지 긴장감을 놓을 수 없고, 막판에 밝혀진 뜻밖의 범인과 범행 동기는 기대 이상의 반전을 만끽할 수 있게 해줍니다. 또한 1940년대라는 시대적 배경과 함께 고전미를 발산하는 갖가지 설정도 오감을 자극하는 흥미로운 요소들입니다.

 

다만, 인물 심리와 풍경에 대한 과도할 정도의 세밀한 묘사가 개인적인 취향과 잘 맞지 않았고, 유능하지만 특징이나 매력을 찾아보기 힘든 주인공 역시 다소 아쉽게 느껴진 게 사실입니다. 그리 길지 않은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쉽게 페이지를 넘기지 못한 건 바로 이런 이유들 때문인데, 저와 반대로 헬렌 라일리의 스타일이 잘 맞는 독자라면 무척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이니 다른 독자들의 서평도 참고해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뒤틀린 시간의 법정
이가라시 리쓰토 지음, 천감재 옮김 / 시옷북스 / 2023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제목에서 연상되듯 뒤틀린 시간의 법정은 법정 미스터리에 타임 슬립을 가미한 독특한 작품입니다. 5년 전 의붓딸 성추행 사건으로 유죄 판결을 받은 아버지의 무고함을 연이은 타임 슬립을 통해 밝히는 것이 법원서기관인 주인공 우구이 스구루의 미션인데, 문제는 그가 미션에 성공하여 과거를 바꿔버린 탓에 현재가 심각하게 뒤틀어지는 것은 물론 아버지마저 치명적인 위기에 봉착하고 만다는 점입니다. 과거를 그대로 두면 아버지는 억울한 옥살이를 해야 되고, 과거를 바꾸면 아버지를 영원히 잃게 된다는 딜레마 속에서 우구이 스구루는 제대로 된 탈출구를 찾기 위해 거듭 타임 슬립을 감행합니다.

 

원래 타임 슬립 이야기에서 과거를 바꾸는 것은 금기나 다름없는 규칙이었습니다. 현재가 뒤틀어지기도 하거니와 평행세계 같은 애매한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고, 무엇보다 작가나 독자 모두 대혼란에 빠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이 금기를 깬 작품들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뒤틀린 시간의 법정의 경우 아예 돌직구처럼 정면으로 과거를 바꾸는 타임 슬립을 표방하고 있는 작품입니다.

 

중반부까지만 해도 과거를 바꾸는 타임 슬립은 나름 호기심을 자극하며 흥미롭게 전개됩니다. 과거를 바꿀 수도, 안 바꿀 수도 없는 딜레마에 빠진 주인공 우구이 스구루가 어떤 선택을 하게 될지, 그 선택의 결과가 어떻게 그려질지 무척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별 3개의 평점에 그친 이유는 중반 이후 새로운 설정이 추가되는 대목에서부터 도저히 이야기를 따라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따라가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복잡하고 난해한 작가의 설계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독자의 나쁜 머리에 있습니다. 하지만 그 지점부터 이야기는 속도감도, 긴장감도 현저히 떨어지기 시작했고, 우구이 스구루가 딱히 어떤 엔딩을 맞이하게 될지도 궁금해지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그 시점에서 마지막 장까지 여전히 많은 페이지가 남아있다 보니 솔직히 후반부는 거의 스킵하듯 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가라시 리쓰토는 법정유희를 통해 처음 만났는데, 그보다 한국에 9개월 정도 앞서 출간된 이 작품을 먼저 읽었더라면 별 4.5개를 준 법정유희는 읽을 생각도 못했을 것 같습니다. 거꾸로 말하면 저처럼 뒤틀린 시간의 법정에 적응하지 못한 독자라도 법정유희는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거란 뜻입니다.

천재의 작품을 이해하지 못한 우매한 독자라고 욕먹을 가능성이 높지만 제겐 뒤틀린 시간의 법정은 너무도 어려운 작품이었습니다. 이 서평을 쓰기 전에 일부러 다른 독자들의 서평을 읽지 않았는데, 인터넷서점과 블로그에 서평을 올리고 나면 다른 독자들의 생각을 꼭 확인해볼 생각입니다. 혹시나 제가 성급하게 오판을 저지른 게 확실하다면 (고통스런 책읽기가 되겠지만) 다시 한 번 도전해볼 생각도 조금은 있기 때문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