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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축의 집 - 제3회 바라노마치 후쿠야마 미스터리 문학 신인상 수상작!
미키 아키코 지음, 문지원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4년 5월
평점 :
인적이 드문 항구에서 엄마 이쿠에와 아들 슈이치로가 탑승한 자동차가 바다에 빠진다. 끝내 두 사람의 시신은 발견할 수 없었고 은둔형 외톨이인 막내딸 유키나만 홀로 이 세상에 남겨지게 된다. 보험사가 엄마와 오빠의 보험금 지급을 거부하자 유키나는 사립탐정 사카키바라에게 보험사와의 협상을 부탁한다. 그러면서 “우리 집 귀축은 엄마였다”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다. 사카키바라는 유키나의 의뢰를 수락하고 사고와 관련된 조사를 시작한다. 조사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사건 관계자들도 인터뷰하게 된다. 그러다 점점 가족과 집이라는 폐쇄적인 울타리 안에서 벌어진 숨 막히는 참상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끔찍한 참상의 이면에는 더욱 놀랄 만한 진상이 자리 잡고 있던 것이다. (출판사 소개글을 일부 수정 후 인용했습니다.)
2021년 ‘기만의 살의’로 한국에 처음 소개된 미키 아키코의 작품이자 그녀가 63세(2010년)에 신인상을 받았던 데뷔작이기도 합니다. ‘기만의 살의’ 단 한 편만으로 그녀의 팬이 됐는데, 3년 만에 새 작품을, 그것도 시마다 소지가 “희귀한 완성도를 자랑하는 추리의 정밀기계가 쓴 것 같다”라며 극찬했던 작품을 읽게 돼서 무척 기대가 됐습니다.
이야기의 큰 틀은 유키나의 의뢰를 받은 사립탐정 사카키바라가 시신이 발견되지 않은 모자의 죽음이 자살이나 보험사기가 아니라 사고임을 입증하기 위해 관련자들을 탐문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전직 형사인 사카키바라는 탐문을 거듭할수록 지난 13년 동안 유키나 일가족에게 닥쳤던 기이한 사건들에 더 주목하기 시작했고, 유키나에게 양해를 구한 뒤 일가족 주변사람들에게서 그 기이한 사건들에 대한 이야기를 청취하기로 합니다. 그런데 그에게 이야기를 들려준 사람들은 하나같이 엄마 이쿠에를 “인간의 탈을 쓴 악귀”, “영락없는 야차”라고 비난합니다. 의뢰인인 유키나가 “우리 집 귀축은 엄마였다”라고 말한 점과 일맥상통하는 것입니다.
관련자들과 유키나가 들려준 ‘귀축’ 이쿠에의 만행은 그야말로 참혹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13년 전, 남편 기타가와가 죽은 이후 아들 슈이치로, 딸 아야나, 유키나와 함께 살아온 이쿠에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살인, 방화, 사기, 협박이라는 극단적 행동을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으며, 자동차 사고로 실종되기 전까지 오랫동안 저질러온 악행들은 지금도 관련자들을 분노하게 만들 정도로 잔인하고 가차 없었습니다.
사립탐정 사카키바라는 관련자들의 진술 속에 깃든 사소한 단서와 위화감을 토대로 일가족에게 벌어졌던 여러 사건들의 진상을 추리합니다. 때론 의뢰인인 유키나가 감추거나 속인 부분까지 포착해낼 정도로 그는 전력을 다해 조사에 나섭니다. 그리고 막판에 이르러 지난 13년 동안 여러 사람이 죽거나 실종됐던 사건들의 진실을 의뢰인인 유키나에게 보고합니다. ‘귀축’으로 불렸던 엄마 이쿠에의 진면목, 언니 아야나에게 닥친 비극의 진상, 엄마와 오빠가 인적 없는 항구에서 바다에 빠져 실종된 사건의 비밀 등 사카키바라는 누구도 예상 못한 반전을 폭로하며 유키나를 충격에 빠뜨립니다.
“인물이나 사건 모두 아날로그적이지만, 빼어난 트릭과 반전의 힘은 올드한 설정 따위는 조금도 생각나지 않게 할 만큼 매력적이고 현대적입니다. 속도감 역시 대단해서 단번에 마지막 장까지 달리게 만드는데, 문제는 이 속도감에 도취되면 작가가 숨겨놓은 힌트와 단서를 죄다 놓칠 가능성이 높다는 점입니다.”
‘기만의 살의’를 읽고 썼던 서평의 일부인데, ‘귀축의 집’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는 대목이라 인용해봤습니다. 현란한 기교나 특수한 설정 같은 건 조금도 없지만 깊고 그윽한 추리의 향연을 제대로 맛볼 수 있는 작품이라고 할까요? ‘옮긴이의 말’에서도 이 작품의 고전적 매력과 본격 미스터리로서의 완성도, 그리고 막판 반전과 복선 회수의 쾌감을 극찬하고 있는데, 개인적으로 100%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번쩍이는 깨달음이나 비약적 추리 없이 사소한 단서와 진술을 통해 진상에 다다르는 사카키바라의 카리스마가 인상적이었고, 의뢰인 유키나가 마지막에 밝힌 사건들 이면의 진실은 반전의 미덕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줬습니다.
2010년 63세에 데뷔한 이래 2023년까지 미키 아키코가 내놓은 작품은 모두 13편입니다. 한국에는 이제 겨우 두 편이 소개됐을 뿐인데, 두 작품 모두 만점 이상의 재미와 완성도를 지니고 있어서 다음엔 어떤 작품이 언제쯤 한국에 출간될지 벌써부터 기다려질 뿐입니다. 그녀의 신작 소식이 좀더 빨리, 좀더 자주 들리기를 간절히 기대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