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계 미친 반전
유키 하루오 지음, 김은모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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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주‘의 충격과 여운이 다시 생각나네요. ‘십계‘를 통해 다시 한 번 유키 하루오의 매력을 만끽할 수 있기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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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 리스트
재키 캐블러 지음, 정미정 옮김 / 그늘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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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전문 프리랜서 기자인 메리 엘리스는 자기 이름이 포함된 살인 예고장을 받습니다. 범인이 보낸 예고장에는 매월 1일 한 명씩, 넉 달에 걸쳐 네 명이 살해될 거라고 적혀있는데, 문제는 버밍엄의 제인이나 카디프의 데이비드처럼 대도시에 사는 흔한 이름이라 피해자를 특정할 수도, 미리 대처할 수도 없다는 점입니다. 살인 예고장엔 마지막 타깃으로 첼트넘의 메리를 지목했는데, 메리는 부디 자신이 아니기를 바라면서도, 범죄전문 기자 특유의 의지를 발휘하여 스스로 사건 조사에 나서기로 합니다. 한편 예고장에 적힌 대로 석 달에 걸쳐 세 명이 살해당하지만 경찰은 희생자들 간의 연관성이나 공통점도 찾아내지 못해 궁지에 몰립니다.

 

독특한 예고살인을 소재로 한 심리스릴러입니다. 넉 달에 걸쳐 매월 1일마다 한 명씩 살해하겠다고 선언한 범인은 예고장에 희생자의 이름과 주거지를 공개했지만, 말하자면 서울에 사는 김씨식이라 경찰 입장에선 무용지물이나 없는 단서일 뿐입니다. 한 가지 특이한 건 앞선 세 명의 희생자가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살해된 것과 달리 마지막 타깃인 첼트넘의 메리는 살인 예고장을 직접 전달받았다는 점입니다. 즉 메리와 경찰이 사전에 만반의 준비를 할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범인 입장에선 스스로 불리한 상황을 자초한 셈인데, 그 의도를 알 수 없어 경찰도, 메리도 대혼란에 빠집니다.

 

희생자들 간에 연관성이나 공통점도 없고, 합동수사를 한다고 해도 관할서가 전부 달라 화상회의 이상의 수사를 할 수도 없으며, 한 달 단위로 살인사건이 일어나다 보니 사건 자체가 주목받기는 어려운 구조의 작품입니다. 오히려 눈길을 끄는 건 메리가 감추고 있는 비밀스런 과거사나 그녀가 겪는 의심과 공포 그리고 그녀 주변 사람들의 수상쩍은 언행 등입니다. 살인 예고장을 소재로 했음에도 불구하고 심리스릴러로 분류되는 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18살 때 메리의 아버지와 절친을 앗아간 대형 화재의 비밀, 애인 있는 남사친피터에게서 미묘한 감정을 느끼면서 벌이는 위험한 사랑, 공유오피스의 동료지만 왠지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는 듯한 두 남자에 대한 의심 등이 살인 예고장의 공포와 함께 메리의 일상을 잠식합니다.

 

중반부와 막판에 터지는 연이은 반전도 흥미롭고, 페이지도 술술 넘어가는 편이지만 후한 평점을 주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살인 리스트가 제가 심리스릴러를 기피하는 이유를 모두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동어반복처럼 느껴지는 거듭된 심리묘사는 이야기를 한없이 늘어지게 만들고, 뭔가 있을 것처럼 그려지지만 실상 별로 영양가가 없을 게 확실한 주변사람들과의 관계도 흥미를 유발하지 못해서 450여 페이지의 분량이 과도하게 보였습니다.

초반에는 꽤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한 채 이야기가 빠른 속도로 출발하지만, 사건 자체가 임팩트가 없는 상태에서 심리스릴러 서사마저 느슨하게 전개되는 바람에 중반부쯤부터 동력을 잃은 느낌이었습니다. 그 즈음에 터진 첫 번째 반전이 새 연료 역할을 하긴 하지만 개인적으론 출판사 자체 스포일러때문에 미리 짐작하고 있던 바라 잠시 맥이 빠진 것도 사실입니다. (소개글과 띠지에 적힌 한 줄의 문장은 나름 출판사의 홍보 포인트였겠지만, 눈썰미 있는 스릴러 독자라면 아마 저처럼 스포일러로 받아들였을 거란 생각입니다.)

 

살인 리스트퍼펙트 커플에 이어 두 번째로 읽은 재키 캐블러의 작품인데, 아무래도 그녀의 심리스릴러는 저와는 잘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퍼펙트 커플이 그리 매력적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살인 리스트의 경우 살인사건과 범인 찾기라는 미스터리 서사가 병행돼서 딱 한 번만 더!”라며 읽어보기로 했던 건데, 실은 미스터리 요소들 대부분이 허술한 편이었고 막판에 밝혀진 범인의 정체와 범행 동기마저 너무 실망스러워서 혹시 재키 캐블러가 정통 미스터리 스릴러를 내놓는다고 해도 더는 관심을 갖게 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심리스릴러 마니아라면 재미있게 읽을 여지가 많은 작품이기도 하니 소재나 설정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다른 분들의 서평을 참고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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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쇄 - 두 남매 이야기 케이스릴러
전혜진 지음 / 고즈넉이엔티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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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살해죄로 5년 형을 복역한 서준현이 출소합니다. 이복동생 나현을 성폭행하던 아버지는 물론 의붓어머니까지 살해한 중범죄였지만, 정황 상 동정의 여지가 많았고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갖고 있어서 정상이 참작됐던 것입니다. 나현은 자신을 지키려다 살인까지 저지른 준현을 감싸며 앞으로는 자신이 그를 지키기로 결심합니다. 한편 경기도 장제시의 실질적인 지배자이자 서윤병원 원장인 서필환은 자신의 막대한 재산을 손주인 준현과 나현에게 물려주기로 결심합니다. 하지만 이 결심은 엄청난 반발과 후폭풍을 몰고 왔고 결과적으로 준현과 나현을 큰 위험에 빠뜨립니다. 그런 와중에 5년 전 사건의 진실을 폭로하려는 기자까지 나타나자 준현과 나현은 누구에게도 들켜선 안 될 그날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맞섭니다.

 

서평을 쓰기 위해 인터넷서점에 접속한 후에야 이 작품이 이미 10년 전 만화로 출간된 적이 있으며 당시 꽤 큰 파장을 일으켰다는 점을 알게 됐습니다. 마지막 장을 덮은 뒤에도 한동안 머릿속이 얼얼할 정도로 이야기의 파괴력과 무게감이 대단해서 그 여운을 한참이나 만끽했는데, 아마 10년 전 만화로 이 이야기를 접한 독자들 역시 비슷했으리라는 생각입니다.

 

수십 년에 걸쳐 서씨 일가와 그 주변 사람들에게 일어난 수많은 비극을 다루고 있어서 이야기의 얼개는 무척이나 복잡하게 짜여있습니다. 등장인물도 많지만 그 관계가 혐오스러울 정도로 이리저리 얽혀있는데다 그들 하나하나가 품고 있는 악의와 탐욕이 워낙 지독한 악취를 풍기는 탓에 이야기의 복잡함은 더욱 그로테스크한 모양새를 띄게 됩니다.

 

아버지는 천하의 망종이었다. 할아버지는 살인자였다. 살인도, 강간도, 기만도, 배신도, 혈연 간의 욕망도, 누군가를 궁지에 몰아넣기 위해 독을 마시는 것까지도, 이 집안에서는 마치 돌림노래처럼 서로서로 돌아가며 저질러온 일이었다.” (p329)

 

비극의 연원은 수십 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그것들을 오늘날 수면위로 떠올려 무수한 피비린내를 진동하게 만든 것은 첩의 자식으로 서씨 일가에 들어온 준현이 일으킨 5년 전 살인사건입니다. 아버지가 자식을 성폭행하고, 또 다른 자식이 그 아버지와 어머니까지 살해한 엽기성 때문에 그 사건은 경기도 장제시를 실질적으로 지배해온 서씨 일가를 휘청거리게 만든 것은 물론 상속 구도에도 큰 균열을 일으켰습니다. 준현이 출소하자 서씨 일가의 갈등은 격화되고 상속 재산을 놓고 끔찍한 이전투구가 벌어집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준현과 나현을 향한 폭력과 협박이 난무하면서 조금씩 오랜 과거의 비밀들이 폭로되기 시작합니다. 문제는 이 혼란 속에서 살인미수, 자살, 살인 등 일가족의 절멸을 예고하는 듯한 잔혹한 사건들이 연이어 벌어진다는 점입니다.

 

서씨 일가는 물론 그 주위에서 증오와 악의를 키워온 인물들은 길게는 반세기, 짧게는 5년 안팎에 걸쳐 그야말로 막장극 속의 악귀들처럼 탐욕과 이기심에 사로잡혀 상대방이 가진 모든 것들을 빼앗으려 추잡한 싸움을 벌여왔습니다. 그리고 그 싸움 속에서 빈번히 목격되는 건 근친상간이라는 터부(taboo)입니다. 작가는 이 금지된 사랑이 가진 음습한 폭발력을 예상치 못한 대목에서 여러 번 터뜨리는데, 그 대목들은 대부분 독자의 뒤통수를 치는 흥미로운 반전을 품고 있어서 위화감이나 거부감을 느끼진 못했습니다. 오히려 더 깊고 어두운 늪의 바닥으로 끌려들어가는 듯한 묘한 공포심과 호기심을 자극할 뿐이었습니다.

 

인물도 많고 그만큼 이야기의 갈래도 사방으로 뻗쳐있는데다 크고 작은 반전들이 마지막 장까지 연이어 배치돼있다 보니 스포일러가 될 정보가 워낙 많아서 더 상세한 줄거리를 소개하긴 곤란합니다. 하지만 족쇄는 올해 읽은 가장 인상적인 작품 중 하나로 꼽을 수 있을 정도로 다양한 미덕을 갖추고 있다는 점만은 장담할 수 있습니다. 불편하고 불쾌할 정도로 피부에 와 닿는 등장인물들의 악의와 그것이 빚어낸 피비린내 진동하는 잔혹한 사건들, 서로를 지키기 위해 그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다는 다짐을 나누는 남매의 금단의 사랑, 그리고 수십 년에 걸친 악연을 정교한 설계도 위에 빈틈없이 그려냄으로써 마지막 장까지 결코 마음을 놓지 못하게 만든 작가의 필력 등 족쇄는 추천할 이유가 수두룩한 매력적인 작품입니다.

 

족쇄이전에 유일하게 읽은 전혜진의 작품은 전래동화와 고전소설을 모티브로 삼은 장르물 앤솔로지 모던 테일의 수록작 수경-나선 미궁 속의 여자들입니다. 당시 서평엔 괜찮았다.” 정도의 짧은 평만 남겼는데, ‘족쇄를 통해 관심목록에 올려놓을 또 한 명의 한국 장르물 작가를 만나게 돼서 무척 반가웠고, 앞으로 기회가 닿는 대로 전혜진의 작품을 찾아 읽을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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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축의 집 - 제3회 바라노마치 후쿠야마 미스터리 문학 신인상 수상작!
미키 아키코 지음, 문지원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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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적이 드문 항구에서 엄마 이쿠에와 아들 슈이치로가 탑승한 자동차가 바다에 빠진다. 끝내 두 사람의 시신은 발견할 수 없었고 은둔형 외톨이인 막내딸 유키나만 홀로 이 세상에 남겨지게 된다. 보험사가 엄마와 오빠의 보험금 지급을 거부하자 유키나는 사립탐정 사카키바라에게 보험사와의 협상을 부탁한다. 그러면서 우리 집 귀축은 엄마였다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다. 사카키바라는 유키나의 의뢰를 수락하고 사고와 관련된 조사를 시작한다. 조사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사건 관계자들도 인터뷰하게 된다. 그러다 점점 가족과 집이라는 폐쇄적인 울타리 안에서 벌어진 숨 막히는 참상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끔찍한 참상의 이면에는 더욱 놀랄 만한 진상이 자리 잡고 있던 것이다. (출판사 소개글을 일부 수정 후 인용했습니다.)

 

2021기만의 살의로 한국에 처음 소개된 미키 아키코의 작품이자 그녀가 63(2010)에 신인상을 받았던 데뷔작이기도 합니다. ‘기만의 살의단 한 편만으로 그녀의 팬이 됐는데, 3년 만에 새 작품을, 그것도 시마다 소지가 희귀한 완성도를 자랑하는 추리의 정밀기계가 쓴 것 같다라며 극찬했던 작품을 읽게 돼서 무척 기대가 됐습니다.

 

이야기의 큰 틀은 유키나의 의뢰를 받은 사립탐정 사카키바라가 시신이 발견되지 않은 모자의 죽음이 자살이나 보험사기가 아니라 사고임을 입증하기 위해 관련자들을 탐문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전직 형사인 사카키바라는 탐문을 거듭할수록 지난 13년 동안 유키나 일가족에게 닥쳤던 기이한 사건들에 더 주목하기 시작했고, 유키나에게 양해를 구한 뒤 일가족 주변사람들에게서 그 기이한 사건들에 대한 이야기를 청취하기로 합니다. 그런데 그에게 이야기를 들려준 사람들은 하나같이 엄마 이쿠에를 인간의 탈을 쓴 악귀”, “영락없는 야차라고 비난합니다. 의뢰인인 유키나가 우리 집 귀축은 엄마였다라고 말한 점과 일맥상통하는 것입니다.

 

관련자들과 유키나가 들려준 귀축이쿠에의 만행은 그야말로 참혹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13년 전, 남편 기타가와가 죽은 이후 아들 슈이치로, 딸 아야나, 유키나와 함께 살아온 이쿠에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살인, 방화, 사기, 협박이라는 극단적 행동을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으며, 자동차 사고로 실종되기 전까지 오랫동안 저질러온 악행들은 지금도 관련자들을 분노하게 만들 정도로 잔인하고 가차 없었습니다.

사립탐정 사카키바라는 관련자들의 진술 속에 깃든 사소한 단서와 위화감을 토대로 일가족에게 벌어졌던 여러 사건들의 진상을 추리합니다. 때론 의뢰인인 유키나가 감추거나 속인 부분까지 포착해낼 정도로 그는 전력을 다해 조사에 나섭니다. 그리고 막판에 이르러 지난 13년 동안 여러 사람이 죽거나 실종됐던 사건들의 진실을 의뢰인인 유키나에게 보고합니다. ‘귀축으로 불렸던 엄마 이쿠에의 진면목, 언니 아야나에게 닥친 비극의 진상, 엄마와 오빠가 인적 없는 항구에서 바다에 빠져 실종된 사건의 비밀 등 사카키바라는 누구도 예상 못한 반전을 폭로하며 유키나를 충격에 빠뜨립니다.

 

인물이나 사건 모두 아날로그적이지만, 빼어난 트릭과 반전의 힘은 올드한 설정 따위는 조금도 생각나지 않게 할 만큼 매력적이고 현대적입니다. 속도감 역시 대단해서 단번에 마지막 장까지 달리게 만드는데, 문제는 이 속도감에 도취되면 작가가 숨겨놓은 힌트와 단서를 죄다 놓칠 가능성이 높다는 점입니다.”

 

기만의 살의를 읽고 썼던 서평의 일부인데, ‘귀축의 집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는 대목이라 인용해봤습니다. 현란한 기교나 특수한 설정 같은 건 조금도 없지만 깊고 그윽한 추리의 향연을 제대로 맛볼 수 있는 작품이라고 할까요? ‘옮긴이의 말에서도 이 작품의 고전적 매력과 본격 미스터리로서의 완성도, 그리고 막판 반전과 복선 회수의 쾌감을 극찬하고 있는데, 개인적으로 100%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번쩍이는 깨달음이나 비약적 추리 없이 사소한 단서와 진술을 통해 진상에 다다르는 사카키바라의 카리스마가 인상적이었고, 의뢰인 유키나가 마지막에 밝힌 사건들 이면의 진실은 반전의 미덕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줬습니다.

 

201063세에 데뷔한 이래 2023년까지 미키 아키코가 내놓은 작품은 모두 13편입니다. 한국에는 이제 겨우 두 편이 소개됐을 뿐인데, 두 작품 모두 만점 이상의 재미와 완성도를 지니고 있어서 다음엔 어떤 작품이 언제쯤 한국에 출간될지 벌써부터 기다려질 뿐입니다. 그녀의 신작 소식이 좀더 빨리, 좀더 자주 들리기를 간절히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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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자 잔혹극 복간할 결심 1
루스 렌들 지음, 이동윤 옮김 / 북스피어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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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주일 전쯤 북스피어 인스타그램에 삼송 김사장 님의 장문의 글이 올라왔습니다. 다름 아닌 활자 잔혹극의 두 번째 복간 소식이었는데(초간은 1996년 고려원의 유니스의 비밀이고, 첫 복간은 2011년 북스피어의 활자 잔혹극입니다), 어찌나 구구절절 심금을 울리는지(?) 이 작품을 읽지 않은 독자로서 미안함마저 느끼게 할 정도였습니다. 더 미안했던 건 실은 2011년에 출간된 구판을 몇 년 전쯤 중고로 구입한 뒤 책장에 아주 오랫동안 방치해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미안합니다. 얼른 읽고 서평 올리겠습니다.”라는 댓글을 달았는데, 곧바로 약속 안 지키면 압수수색 드갑니다.”라는 답글이 올라왔고, 그런 연유로 원래 읽으려던 책을 덮고 부랴부랴 활자 잔혹극을 책장에서 꺼내 읽게 됐습니다. (서평 가운데 인용문과 페이지는 모두 2011년 판 기준입니다.)

 

유니스 파치먼은 읽을 줄도 쓸 줄도 몰랐기 때문에 커버데일 일가를 죽였다.” (p5)

 

활자 잔혹극추리소설 역사상 가장 도발적인 첫 문장으로 시작한다.”는 평을 들은 작품입니다. (출판사가 제공한 카드뉴스에 그 유명한 첫 문장이 공개돼있기에 저도 서평 첫머리에 그 문장을 인용했습니다) 범인의 정체와 범행동기를 곧장 독자에게 알린 셈인데, “읽을 줄도 쓸 줄도 몰랐기 때문에라는 다소 황당한 범행동기가 첫 페이지부터 독자의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문맹이란 게 부끄럽고 수치스러울 수는 있어도 일가족을 몰살하게 만들 정도로 지독한 범행동기가 될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을 품은 채 페이지를 넘기기 시작했는데, 그리 오래지 않아 문맹이란 단지 읽고 쓰는 것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한 사람의 정체성을 완전히 뒤바꿔놓을 수도 있는 엄청난 시한폭탄임을 깨달았습니다.

 

커버데일 일가는 대저택을 관리하고 집안일을 돌볼 가정부로 40대 중반의 유니스 파치먼을 고용합니다. 잘 웃지도 않는데다 차갑고 섬뜩하기만 한 외양과 달리 유니스는 가정부로서 최고의 능력을 보여줍니다. 가족 중 일부는 유니스에게서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하기도 하지만 그녀의 대저택 생활은 큰 탈 없이 이어집니다. 유니스가 유일하게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건 활자의 문제. 대저택 곳곳에 꽂혀있는 엄청난 양의 책은 그 자체로 공포입니다. 메모나 편지를 통해 일을 지시받는 것도 극도로 당혹스러운 일입니다. 가까스로 위기의 순간들을 모면하며 9개월을 보낸 어느 날, 유니스는 더 이상 문맹을 감출 수 없는 상황에 처하고 맙니다.



 

그녀는 활자로 도배된 세상이 끔찍했다. 활자를 자신에게 닥친 위험이라고 생각했다. 활자는 거리를 두고 피해야 할 대상이었으며, 그녀에게 활자를 보여주려는 사람 또한 마찬가지였다. (중략) 그녀가 문맹이라는 사실은 그녀의 동정심을 앗아갔고 상상력을 위축시켰다.” (p61)

 

유니스는 명백한 사이코패스입니다. 어려서부터 아무 죄책감 없이 협박과 공갈을 일삼아왔고, 타인의 목숨을 빼앗은 적도 있으며, 공감 능력은 물론 감정이나 상상력 자체가 결여된 인물입니다. 그런데 그녀의 사이코패스 기질은 타고난 것도 아니고 트라우마에서 비롯된 것도 아니며, 오로지 단 하나의 이유, 즉 문맹으로 인해 촉발되고 강화된 것입니다. 문맹임을 들킬지 모른다는 공포와 수치심은 타인과의 소통과 관계를 완전히 단절시켜버렸고, 단지 읽을 줄도 쓸 줄도 모르는 차원을 넘어 도덕적 문맹상태로 만들었습니다. 활자뿐만 아니라 타인의 감정이나 보편적 도덕마저 읽어내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 유니스가 유일하게 따뜻한 감정을 느끼는 대상은 가구나 장식품 등의 사물뿐입니다. 청소를 하고 설거지를 할 때가 유니스에겐 가장 안온하고 행복한 상태입니다. 유니스가 아무도 상대해주지 않는 살짝 맛이 간 여성 조앤 스미스에게 유일하게 마음을 연 이유는 그녀가 활자와 관련된 이야기를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유니스에게 누군가 책이나 메모를 들이대며 너 문맹이지?”라고 지적한다면 바로 그 순간 그녀의 세계는 완전히 붕괴될 수밖에 없고, 그 어떤 폭주라도 가능한 상황이 펼쳐지게 되는 것입니다.

 

분량도 짧고 이야기 구조도 단선적이지만 거의 500페이지 이상의 분량을 읽은 듯한 느낌입니다. 영국 작가 특유의 냉소적이면서도 정곡을 찌르는 문장들의 참맛을 만끽하느라 한 줄 한 줄 공들여 읽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유니스 파치먼은 읽을 줄도 쓸 줄도 몰랐기 때문에 커버데일 일가를 죽였다.”는 첫 문장이 수시로 떠오르며 소름을 돋게 만들곤 해서 좀처럼 페이지를 빠르게 넘기지 못한 탓도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유니스 파치먼의 이야기는 요즘처럼 연일 뜨거운 날이 계속 될 때 의외의 서늘함을 제공할 수 있는 흥미로운 작품이라는 생각입니다. ‘활자 잔혹극이라는 잘 만들어진 번역 제목에 눈길이 끌린 독자라면 한번쯤 도전해볼 것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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