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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천대루
천쉐 지음, 허유영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5년 1월
평점 :
지상 45층의 고층 아파트 마천대루에서 한 여자가 숨진 채 발견된다. 아름다운 용모와 상냥한 성격으로 주민들 사이에서 유명 인사였던 29세의 카페 매니저 메이바오의 죽음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그녀를 둘러싼 복잡한 인간관계와 비밀스러운 사연이 차츰 수면 위로 떠오르지만, 그럴수록 사건은 미궁에 빠져든다. 잔인한 운명의 손아귀에서 도망치려 발버둥치던 그녀를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은 누구인가? (출판사 소개글을 일부 수정 후 인용했습니다.)

이야기의 중심에 살인사건이 놓여있고, 수많은 사람들의 진술을 토대로 진범을 찾아가는 미스터리 형식을 띄고 있지만 ‘마천대루’는 누가 메이바오를 죽였는가, 보다는 군상극에 가까운 서사를 통해 그녀의 과거와 현재, 그녀와 인연을 맺었던 사람들의 기구한 사연, 그리고 그녀의 죽음이 주변사람들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를 묵직하면서도 집요한 스타일로 그려낸 작품입니다.
이야기의 주 무대인 마천대루는 지은 지 20년 가까이 돼서 조금씩 쇠락의 기운을 보이고 있긴 해도 여전히 대만에서 세 번째로 높은 빌딩이자 “하늘을 찌를 듯 우뚝 서서 난공불락인 듯하지만 또 모래성처럼 아스라한 자태”를 지니고 있습니다. 값비싸고 평수도 넓은 앞쪽 동과 원룸 위주의 저렴한 뒤쪽 동이 혼재된 마천대루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격차’가 고스란히 반영된 현대사회의 축소판입니다. 빈부, 성별, 세대 같은 현실적인 격차 외에도 욕망, 이기심, 시기와 질투, 병증, 광기 등 사람들이 모인 곳이라면 어디서든 목격되는 갖가지 감정적인 격차가 요동치는 곳이기도 합니다.
입주민, 경비원, 부동산중개인, 가사도우미, 카페 아르바이트생 등 마천대루에 살거나 그곳을 근거지 삼아 살아가는 수많은 인물들이 등장하고 그들은 살해당한 메이바오와 어떤 식으로든 인연을 맺은 탓에 그녀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습니다. 동시에 그들 중엔 메이바오를 살해할 만한 동기를 가진 자도 적지 않아서 용의자로 지목되기도 하는데, 독자는 경찰 심문에 응한 그들의 답변을 통해 메이바오의 기구하다고 밖에 할 수 없는 끔찍한 과거와 현재를 목도하게 됩니다. 그리고 용의선상에 오른 인물들이 하나같이 자신이 죽였다고, 자신 때문에 그녀가 죽었다고 자책하며 괴로워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모두가 범인인 동시에 누구도 범인이 아니다.”라는 출판사 소개글의 의미가 무엇인지 무거운 마음으로 깨닫게 됩니다.
“한 사람이 죽었다. 우리가 모두 좋아했던 사람이고, 결코 그런 방식으로 죽어서는 안 되는 여자였다. 하지만 난 알고 있다. 누가 죽였든, 그녀의 죽음이 우리와 관련이 있다는 것을. 누구도 무관할 수 없다는 것을.” (p202)
메이바오와 주요 인물들의 과거와 현재를 소개한 1부에 이어 2~3부에서는 용의선상에 오른 인물들이 경찰 조사에 답변하는 내용이 그려지고, 마지막 4부에서는 사건 이후 1년이 지나는 동안 마천대루와 그곳 주민들이 겪은 변화와 함께 사건의 진상이라 할 수 있는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다소 파격적인 형식에다 살인사건을 수사하는 장면은 거의 없다고 할 수 있고, 오히려 메이바오의 죽음과는 무관한 조연이나 단역들의 개인사가 적잖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어서 미스터리를 기대한 독자라면 조금은 어리둥절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출구 없는 지옥을 살아온 메이바오의 삶과 죽음, 그리고 그녀를 향해 지독한 애증을 품었던 주변사람들의 심정을 생생하게 전달하기 위해선 정통 미스터리보다는 이런 군상극 스타일의 서사가 더 잘 어울린다는 생각입니다. 메이바오의 죽음과 무관한, 몰라도 될 것 같은, 그래서 눈대중으로 넘기고 싶은 대목이 나오더라도 찬찬히 읽다 보면 막판에 이르러 응축된 감정의 농도와 두께를 제대로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비록 제 취향과는 조금 거리가 있는 이야기였지만, 읽는 내내 가슴속에 누름돌이 얹힌 것처럼 무겁고 묵직한 감정에 취해있었고, 다 읽은 뒤엔 꽤 오래 갈 여운에 잠기기도 했습니다. 온통 비극으로 점철된 가운데 아주 잠깐씩 찾아든 희망에 모든 것을 걸었던 메이바오의 삶이 온갖 격차와 감정이 들끓는 마천대루라는 공간에서 마감되는 과정을 지켜보는 건 심적으로 꽤 힘들긴 해도 동시에 많은 생각을 품게 만들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