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에 귀 기울일 것
에이미 틴터라 지음, 이유림 옮김 / 북플라자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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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시 체이스가 머리에 큰 상처를 입고 피를 뒤집어쓴 채 발견되고, 인근에서 절친인 새비의 시신까지 발견되자 경찰은 누군가 두 사람을 공격한 것으로 추정합니다. 하지만 살해된 새비의 손톱에서 루시의 피부조각이 발견되고, 루시 옷에 묻은 피가 새비의 것으로 밝혀지면서 루시는 살인용의자로 몰립니다. 그러나 증거도, 목격자도, 흉기도 발견되지 않자 수사는 미궁에 빠졌고 루시는 무혐의 처분을 받은 뒤 집을 떠납니다. 5년 뒤, 미제 사건을 해결해 유명해진 한 팟캐스트가 새비 사건을 다루면서 자신을 여전히 유력한 용의자로 언급하자 루시는 큰 충격에 빠집니다. 할머니 생신을 맞아 고향을 찾은 루시는 5년 전 새비의 죽음의 진상과 정면으로 마주하기로 결심합니다.

 


초반 설정이 무척 흥미로운 작품입니다. 5년 전 살인사건에서 무혐의로 풀려난 루시 체이스가 한 팟캐스트 때문에 다시금 유력 용의자로 대두되고 인터넷은 물론 지인들에게마저 마녀사냥의 대상으로 전락하는데, 공교롭게도 그 팟캐스트를 운영하는 벤 오웬스와 함께 사건의 진상을 찾아 나선다는 이야기입니다.

 

5년 전 살인용의자로 몰렸지만 무혐의로 풀려난 루시가 지금까지 범인으로 의심받는 가장 큰 이유는 사건 당일의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루시 역시 머리에 큰 상처를 입었고 그로 인해 단기 기억상실증에 걸린 건데, 경찰은 물론 가족들조차 그 사실을 의심합니다. 문제는 루시 본인도 혹시 자신이 새비를 죽인 게 아닐까, 스스로 의심한다는 점입니다. 또한 희미하게 떠오르는 기억들 가운데 어떤 게 진짜인지 구별할 수 없었던 탓에 5년 동안 그날의 일들을 떠올리는 것을 포기해왔는데, 그런 그녀가 할머니의 생신을 계기로 5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오면서 이야기는 본론으로 진입합니다. 아직도 자신을 운 좋게 붙잡히지 않은 살인자로 여기는 인구 15,000명의 소도시 플럼튼의 불온한 공기도 불편했지만, 루시를 가장 놀라게 한 건 갑자기 자신 앞에 모습을 드러낸 팟캐스트 운영자 벤이었습니다.

 

거짓말에 귀 기울일 것은 기본적으론 살인사건 미스터리로 분류되지만, 좀더 세밀하게 분류하면 심리 스릴러, 도메스틱 스릴러, 커뮤니티 스릴러의 서사를 골고루 갖춘 작품입니다. 살해당한 새비의 환청과 환영에 시달리는데다 자신이 범인일지도 모른다는 압박감 속에 진실 찾기에 나선 루시의 복잡한 심리묘사가 중요한 축을 차지하고 있고, 루시와 가족, 루시와 남편 사이에 상존하는 갈등과 의심과 불륜과 폭력의 문제가 이야기 저변에 깔려있는가 하면, 벤의 팟캐스트에 출연하여 5년 전 사건에 대해 언급하는 플럼튼 사람들의 악의 또는 호의는 한 다리만 건너면 모르는 사람이 없는 소도시를 배경으로 한 스릴러 특유의 불안정한 분위기를 내뿜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유력한 용의자로 여기는 걸 인정하면서도 중립적인 조사를 약속한 팟캐스터 벤과의 협업은 루시에겐 일종의 도박이나 다름없는 선택인데, 그래선지 독자 입장에선 두 사람의 심리전과 케미가 사건 못잖게 흥미진진하게 읽힙니다. 벤을 믿어도 될까? 루시는 정말 아무것도 기억 못하는 걸까? 두 사람의 협력 관계는 언젠가 깨지지 않을까? 호기심과 궁금증을 자아내는 두 사람의 관계는 뜻밖의 행보를 보여서 마지막까지 독자의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사실 루시의 기억만 돌아오면 미스터리가 종결되는 구도라서 초반 설정에 비해 긴장감은 그리 팽팽하지 않습니다. 루시와 벤이 탐정 역할을 맡았지만 소극적인 탐문 외에는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서 중반부쯤엔 살짝 지루함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5년 전의 진실이 드러나는 클라이맥스는 어김없이 반전을 품고 있긴 하지만 충격과 파괴력에 있어선 살짝 기대에 못 미친 게 사실입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별 1개를 빼긴 했지만 그래도 거짓말에 귀 기울일 것은 독특한 소재와 맛깔나는 문장이 매력적인 미스터리 스릴러입니다. 관심 있는 독자라면 다른 서평들도 참고한 뒤에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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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선 - 뱃님 오시는 날
요시무라 아키라 지음, 송영경 옮김 / 북로드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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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17가구가 모여 사는 에도 시대의 작은 어촌마을엔 독특한 풍습이 있습니다. 겨울이 되어 바다가 사나워지면 뱃님이 오시기를 기원하는 의식이 열리는 것입니다. 낮에는 바닷가에 모여 합장을 하고 제물을 바치는가 하면, 밤이면 모래사장에 소금가마를 설치하고 불을 피웁니다. 언뜻 마을 앞바다를 지나는 배들의 무사 항해를 기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이 의식은 배를 암초 지대로 유인하여 난파되게끔 만드는 기만술입니다. 척박한 환경과 지독한 가난 속에 늘 생존의 위협에 시달리던 마을사람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이런 식으로 난파된 배에 실려 있는 양식과 재물을 통해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해왔고, 이제 9살이 된 이사쿠는 말로만 듣던 뱃님이 오시는 모습을 처음으로 목격하게 됩니다.

 


에도 시대를 배경으로 한 소설이라면 장르를 불문하고 좋아하지만, ‘파선은 생존을 위해 난파를 유도하는 한 어촌마을의 기괴한 풍습이란 설정 그 자체에 눈길이 끌려 출간과 동시에 장바구니에 넣은 작품입니다. 인터넷서점에선 미스터리로 분류해놓았지만 실은 호러 또는 공포물에 더 가까우며, ‘일본 기록문학의 대가요시무라 아키라의 작품답게 절반쯤은 논픽션의 향기까지 맛볼 수 있습니다.

 

섬의 끝단에 자리한데다 이웃마을을 오가는 데만 며칠이 걸릴 정도로 고립된 이사쿠의 마을은 대대로 생존의 위협에 시달려왔습니다. 부실한 땅에서 이뤄지는 농사는 잡곡 몇 가지가 전부일 뿐이고 주된 식량인 해산물 역시 해마다 들쑥날쑥인, 그야말로 살아남기엔 최악의 환경인 것입니다. 언젠지 알 수 없지만 암초투성이인 앞바다가 최초로 뱃님을 선물한 이래로 마을은 바람과 파도가 거세지는 겨울만 되면 뱃님 오시는 날을 기원하며 배의 난파를, 누군가의 죽음을, 그래서 먹고사는 문제가 최소한 몇 년은 해결되기를 간절히 바라왔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뱃님이 마을을 찾아오는 건 무척이나 드문 일입니다. 때론 몇 년씩 건너뛸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면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가족 중 누군가를 이웃마을의 고용하인으로 보내야만 합니다. 안 그러면 굶어죽는 건 시간문제이기 때문입니다.

 

9살 이사쿠가 세 번의 겨울을 지나는 동안 두 번의 뱃님을 맞이하는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이사쿠는 첫 뱃님과의 조우에서 배의 난파에 환호하고, 파선에서 획득한 식량과 재물에 눈물 흘리며, 파선의 생존자들이 마을사람들에 의해 입막음 당하는 걸 너무나도 당연하게 받아들입니다. 죽느냐 사느냐의 경계선에 선 자들에겐 도덕이나 윤리 따윈 애당초 관심 밖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 상황은 극한상황에서 인육을 먹은 자들에 관한 논쟁보다 더 극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들은 우연히 난파된 배를 기다리는 게 아니라, 명백히 난파를 유도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사쿠와 마을사람들의 3년의 시간을 지켜보는 동안 단 한 순간도 이들을 비난하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왜 뱃님이 빨리 안 오시나, 초조하게 기다리기도 했습니다. 그만큼 작가가 그린 이사쿠 마을의 비참함과 위기감이 생생했기 때문입니다.

 

이사쿠와 마을사람들의 뱃님 기다리기가 결코 해피엔딩으로 끝나지 않을 거란 건 초반부터 직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낭만적이고 정감 어린 뱃님 오시는 날이라는 부제가 실은 이사쿠와 마을사람들이 겪게 될 끔찍하고 비극적인 운명에 대한 예고라는 것도 쉽게 눈치 챌 수 있습니다. 그래선지 페이지를 넘길수록 부디 이들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를, 이라는 바람을 품게 되는데, 동시에 한편에선 오래전부터 태연히 자행되어 온 이 풍습이 과연 아무런 징벌 없이 계속 이어져도 될까, 라는 착잡한 생각이 든 것도 사실입니다.

 

240페이지의 짧은 분량이지만 주제와 서사의 무게감은 수백 페이지의 장편에 버금갑니다. 극적인 반전도 없고, 소름 돋게 만드는 공포 코드도 없지만 일본 기록문학의 대가가 담담하고 객관적인 시선으로 그려낸 이사쿠와 마을사람들의 뱃님 기다리기는 독자로 하여금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들고, 오랫동안 잊히지 않을 여운을 선사하기 때문입니다. 이 특별한 매력을 많은 독자들이 공유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사족으로... 아직 이 작품을 읽지 않은 독자라면 인터넷서점의 소개글을 읽지 말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어촌 마을의 기괴한 풍습이 초래한 잔혹 재앙의 시작이라는 카피까지는 괜찮지만 줄거리를 소개한 글에는 스포일러에 가까운 내용까지 포함돼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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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정 갈릴레오 탐정 갈릴레오 시리즈 1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억관 옮김 / 재인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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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바 모태 문과인 저는 장르와 매체를 불문하고 수학이나 과학이 개입된 이야기는 (아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곤) 대체로 외면하는 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가시노 게이고의 갈릴레오 시리즈를 탐독했던 건 한국에 가장 먼저(2006) 소개됐던 용의자 X의 헌신’(시리즈 3)에 흠뻑 빠졌기 때문입니다. 실은 용의자 X의 헌신이 과학 혹은 이과 미스터리라는 사실을 모른 채 읽기 시작했고, 읽는 동안에도 전혀 거부감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에 이후 물리학 교수 유가와 마나부와 경시청 수사1과 구사나기 슌페이 콤비의 이야기가 출간되기를 간절히 바라게 됐습니다. 당시 용의자 X의 헌신은 한국에서 대박에 가까운 성적을 냈고 그 덕분에 2년 후인 2008, 시리즈 첫 편인 탐정 갈릴레오를 시작으로 순서대로 출간되기에 이르렀는데, 그때부터 새 작품이 나올 때마다 허겁지겁 읽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2024년 시리즈 8편인 금단의 마술이 출간되자 이왕이면 오랜만에 첫 편부터 순서대로 다시 읽어봐야겠다는 욕심이 들었고, 한두 편 외엔 서평도 남기지 못한 터라 2025년 독서계획에 갈릴레오 시리즈 다시 읽기를 포함시키기로 했습니다.

 


수록된 다섯 편의 단편 모두 초자연 현상이나 다름없는 기이한 사건 또는 살인인지 사고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애매한 사건을 다룹니다. 자연발화 또는 자연폭발 외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는 의문의 화재사건(‘타오르다’), 물리적으로 제작이 불가능한 금속제 마스크의 비밀(‘옮겨 붙다’), 욕조에서 발견된 사체의 가슴에 생긴 기이한 괴사 흔적(‘썩다’), 바다 밑에서 불기둥이 치솟고 수면 위로 불티가 퍼져나간 기괴한 사건(‘폭발하다’), 원래라면 볼 수 없었던 장면을 유체 이탈을 통해 본 뒤 그림으로 그려 수사진을 혼란에 빠뜨린 한 소년(‘이탈하다’) 등 하나같이 일반적인 수사와 감식으로는 해결하기 어려운 사건들이 천재 물리학자 유가와와 평범한 경시청 형사 구사나기 앞에 숙제로 등장합니다.

 

데이도 대학 동창인 유가와와 구사나기의 콤비 플레이는 아직은 시리즈 첫 편이라 그런지 약간 서먹하고 어색하게 보일 때가 더 많습니다. 대체로 천재 유가와가 범인(凡人) 구사나기를 놀려먹거나 한 수 지도하며 사건의 진상으로 이끄는 경우가 많은데, 그래선지 간혹 구사나기가 소소한 반격을 시도하는 장면에선 통쾌함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시리즈가 거듭될수록 이들의 관계에도 약간의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오랜만의 다시 읽기를 통해 두 사람의 밀당을 지켜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 될 것 같습니다.

 

이과 미스터리답게 플라스마, 충격파, 전기에너지, 마이너스 압력, 빛의 굴절 등 이야기 곳곳에서 머리 아픈 과학 용어들이 난무합니다. 하지만 히가시노 게이고는 굳이 모든 개념을 이해할 필요가 없는 대목에선 사회학부 출신인 구사나기의 입을 빌어 무슨 소린지 전혀 모르겠다.”는 조언을 해줌으로써 모태 문과인 저의 부담감을 덜어주곤 합니다. 동시에 상식 수준의 간단한 실험들을 통해 미처 몰랐던 과학세계의 흥미로운 일면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마치 초중등 시절의 과학시간에 신기한 현상을 직접 목격하며 감탄했던 경험과 비슷하다고 할까요? 반면 때론 과학이야말로 가장 확실한 완전범죄 도구라는 깨달음까지 얻게 해서 섬뜩한 느낌을 받은 적도 여러 번 있습니다.

 

확실하진 않지만, 한국에 가장 먼저 소개된 용의자 X의 헌신의 인상이 너무 강렬해서 그 뒤에 출간된 갈릴레오 시리즈는 다소 밍밍하고 아쉬운 기분으로 읽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하지만 15년도 더 지난 시점에 다시 읽은 탐정 갈릴레오는 마치 추억이 깃든 고전과도 같아서 약점이나 아쉬운 점보다는 흐뭇한 정감 같은 게 더 강하게 느껴졌습니다. ‘용의자 X의 헌신과 아직 읽어보지 못한 최근작 금단의 마술을 제외하곤 대부분의 작품에서 비슷한 느낌을 받을 것 같은데, 그런 게 아무래도 오랜만에 다시 읽기의 매력 중 하나가 아닐까 싶습니다.

시리즈 두 번째 작품인 예지몽은 기억조차 거의 안 날 정도로 가물가물하지만, 오히려 그 덕분에 처음 읽는 듯한 기대감이 피어오릅니다. 원래는 다음 달쯤 읽을 예정이었지만 아무래도 조만간 유가와와 구사나기의 두 번째 이야기를 접하게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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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천대루
천쉐 지음, 허유영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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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 45층의 고층 아파트 마천대루에서 한 여자가 숨진 채 발견된다. 아름다운 용모와 상냥한 성격으로 주민들 사이에서 유명 인사였던 29세의 카페 매니저 메이바오의 죽음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그녀를 둘러싼 복잡한 인간관계와 비밀스러운 사연이 차츰 수면 위로 떠오르지만, 그럴수록 사건은 미궁에 빠져든다. 잔인한 운명의 손아귀에서 도망치려 발버둥치던 그녀를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은 누구인가? (출판사 소개글을 일부 수정 후 인용했습니다.)

 


이야기의 중심에 살인사건이 놓여있고, 수많은 사람들의 진술을 토대로 진범을 찾아가는 미스터리 형식을 띄고 있지만 마천대루는 누가 메이바오를 죽였는가, 보다는 군상극에 가까운 서사를 통해 그녀의 과거와 현재, 그녀와 인연을 맺었던 사람들의 기구한 사연, 그리고 그녀의 죽음이 주변사람들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를 묵직하면서도 집요한 스타일로 그려낸 작품입니다.

 

이야기의 주 무대인 마천대루는 지은 지 20년 가까이 돼서 조금씩 쇠락의 기운을 보이고 있긴 해도 여전히 대만에서 세 번째로 높은 빌딩이자 하늘을 찌를 듯 우뚝 서서 난공불락인 듯하지만 또 모래성처럼 아스라한 자태를 지니고 있습니다. 값비싸고 평수도 넓은 앞쪽 동과 원룸 위주의 저렴한 뒤쪽 동이 혼재된 마천대루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격차가 고스란히 반영된 현대사회의 축소판입니다. 빈부, 성별, 세대 같은 현실적인 격차 외에도 욕망, 이기심, 시기와 질투, 병증, 광기 등 사람들이 모인 곳이라면 어디서든 목격되는 갖가지 감정적인 격차가 요동치는 곳이기도 합니다.

 

입주민, 경비원, 부동산중개인, 가사도우미, 카페 아르바이트생 등 마천대루에 살거나 그곳을 근거지 삼아 살아가는 수많은 인물들이 등장하고 그들은 살해당한 메이바오와 어떤 식으로든 인연을 맺은 탓에 그녀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습니다. 동시에 그들 중엔 메이바오를 살해할 만한 동기를 가진 자도 적지 않아서 용의자로 지목되기도 하는데, 독자는 경찰 심문에 응한 그들의 답변을 통해 메이바오의 기구하다고 밖에 할 수 없는 끔찍한 과거와 현재를 목도하게 됩니다. 그리고 용의선상에 오른 인물들이 하나같이 자신이 죽였다고, 자신 때문에 그녀가 죽었다고 자책하며 괴로워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모두가 범인인 동시에 누구도 범인이 아니다.”라는 출판사 소개글의 의미가 무엇인지 무거운 마음으로 깨닫게 됩니다.

 

한 사람이 죽었다. 우리가 모두 좋아했던 사람이고, 결코 그런 방식으로 죽어서는 안 되는 여자였다. 하지만 난 알고 있다. 누가 죽였든, 그녀의 죽음이 우리와 관련이 있다는 것을. 누구도 무관할 수 없다는 것을.” (p202)

 

메이바오와 주요 인물들의 과거와 현재를 소개한 1부에 이어 2~3부에서는 용의선상에 오른 인물들이 경찰 조사에 답변하는 내용이 그려지고, 마지막 4부에서는 사건 이후 1년이 지나는 동안 마천대루와 그곳 주민들이 겪은 변화와 함께 사건의 진상이라 할 수 있는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다소 파격적인 형식에다 살인사건을 수사하는 장면은 거의 없다고 할 수 있고, 오히려 메이바오의 죽음과는 무관한 조연이나 단역들의 개인사가 적잖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어서 미스터리를 기대한 독자라면 조금은 어리둥절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출구 없는 지옥을 살아온 메이바오의 삶과 죽음, 그리고 그녀를 향해 지독한 애증을 품었던 주변사람들의 심정을 생생하게 전달하기 위해선 정통 미스터리보다는 이런 군상극 스타일의 서사가 더 잘 어울린다는 생각입니다. 메이바오의 죽음과 무관한, 몰라도 될 것 같은, 그래서 눈대중으로 넘기고 싶은 대목이 나오더라도 찬찬히 읽다 보면 막판에 이르러 응축된 감정의 농도와 두께를 제대로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비록 제 취향과는 조금 거리가 있는 이야기였지만, 읽는 내내 가슴속에 누름돌이 얹힌 것처럼 무겁고 묵직한 감정에 취해있었고, 다 읽은 뒤엔 꽤 오래 갈 여운에 잠기기도 했습니다. 온통 비극으로 점철된 가운데 아주 잠깐씩 찾아든 희망에 모든 것을 걸었던 메이바오의 삶이 온갖 격차와 감정이 들끓는 마천대루라는 공간에서 마감되는 과정을 지켜보는 건 심적으로 꽤 힘들긴 해도 동시에 많은 생각을 품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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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일
오츠이치 지음, 김수현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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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일여름과 불꽃과 나의 사체17세에 데뷔한 오쓰이치가 두 번째로(문고판 기준 2001) 발표한 단편집입니다. 원제는 수록작 중 한 편인 천제요호(天帝妖狐)’인데, 한국 독자에겐 좀 어렵고 낯선 제목이라 그런지 수록작들을 관통하는 개념인 베일이라는 제목을, 그리고 저 너머, 바라보아서는 안 될 그것이라는 특이한 부제를 붙인 것 같습니다.

 

각각 100페이지 안팎인 두 개의 단편이 수록됐는데, ‘천제요호는 오쓰이치가 야마시로 아사코라는 필명으로 낸 이즈미 로안 시리즈에서 맛봤던 특유의 기괴하면서도 서글픔이 배어있는 호러물이고, ‘A MASKED BALL’은 고등학교 화장실에 적힌 의문의 낙서에서 시작되는 도시괴담에 가까운 미스터리입니다.

 

천제요호

친구도 형제도 없이 외롭게 지내던 11살 소년 야기는 홀로 코쿠리상(일종의 초혼술, 한국의 분신사바와 유사한 놀이)을 하던 중 사나에라는 귀신과 소통하게 됩니다. 어느 날 친구의 죽음을 목격한 야기는 말할 수 없는 공포에 휩싸이는데, 그 순간 사나에는 야기의 귀가 솔깃할 만한 달콤한 제안을 건네옵니다.

 

그럼 내 아이가 돼. 그러면 영원한 생명을 줄게. 몸을 나에게 넘겨. 대신 더 튼튼한 몸을 줄게. 그러면 너는 나이도 먹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을 거야.”

 

A MASKED BALL

교내 외딴 화장실을 흡연실로 애용하던 우에무라는 어느 날 낙서하지 말라, 정자체로 쓰인 이상한 낙서를 발견합니다. 낙서를 금지하는 그 낙서 옆에 다른 학생들이 댓글처럼 낙서를 적으면서 화장실은 서로 누군지 모르는 학생들끼리 낙서로 이야기를 주고받는 공간으로 변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정자체는 교칙을 어기거나 무례한 짓을 벌이는 자를 배제하겠다는 낙서를 남겼고, 실제로 그 배제는 무자비한 방법으로 벌어지기 시작합니다.

 

이 학교에는 깡통이 너무 많다.”

학교에는 질서를. 그것이 나의 흔들리지 않는 바람.”

새로운 죄가 발각. 나는 OOO를 학교에서 배제할 것이다.”

 


오쓰이치가 20대 초반에 발표한 초기작이지만, 두 작품 모두 이후에 출간된 그의 명품들에 깃든 매력과 미덕을 품고 있습니다. 특히 천제요호는 오쓰이치의 여러 경향 가운데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코드들(한마디로 요약하면 애틋한 호러’)로 채워져 있는데다 영상물에 더없이 잘 어울리는 이야기라 더욱 몰입해서 읽을 수 있었습니다. 또한 100여 페이지에 불과한 분량이지만 그 몇 배의 묵직함과 공포와 여운을 맛볼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도시괴담과 진범 찾기 미스터리가 뒤섞인 ‘A MASKED BALL’은 오쓰이치의 으스스한 장난끼가 잘 배어있어서, 가볍게 읽히면서도 내내 서늘함을 느낄 수 있는 작품입니다.

 

베일에 대해 더 알아보기 위해 일본 위키피디아를 검색해보니 오쓰이치는 최근까지도 활발하게 작품을 내고 있었습니다. (20249大樹館幻想출간) 하지만 그에 비해 한국 출간소식은 (여러 필명을 통틀어도) 너무 빈약하고 뜸해서 저 같은 팬들에겐 그저 아쉬울 수밖에 없습니다. 개인적인 바람이라면 오쓰이치의 작품이든 야마시로 아사코의 작품이든 2025년에 한 편쯤은 꼭 출간됐으면 하는 건데, 그리 낙관적이진 않지만 그래도 기대를 걸어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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