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분: 죽음의 시간
최들판 지음 / 엘릭시르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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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에서 차로 40분 거리인 쇠락한 항구도시 녹둥시에서 전문 시비꾼으로 많은 사람들의 골치를 아프게 했던 41똥미친개한칠규가 변사체로 발견됩니다. 성해명 계장을 비롯한 녹둥시 동부경찰서가 타살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수사에 나선 가운데, 한칠규 주변 인물들의 불온한 동태가 곳곳에서 감지됩니다. 한칠규의 자식이자 공인된 문제아인 혜성-혜리 남매, 은밀하게 지하사업을 벌이는 노회한 전직 조폭 윤중정, 한칠규에게 거듭 폭행을 당한 학교 교사들, 그리고 그 외에도 한칠규를 죽이고 싶어 한 사람들은 녹둥시에 지천으로 널려있었습니다.


 

이미 상업성을 잃은 지 오래인 고기잡이 항구 하나를 낀 시골다운 느긋함과 퇴락의 흔적이 물씬한 가운데 때로는 막장까지 치닫는 난폭성이 공존하는 곳.” (p63)

 

이 작품의 무대인 녹둥의 분위기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문장입니다. 성수기엔 외지인들이 즐겨 찾는 곳이기도 하지만 녹둥의 기본 정서는 비린내와 천박함과 난폭성입니다. 그리고 그런 녹둥에서 단순 폭행치사인지, 지병의 악화로 인한 비명횡사인지, 불법사업에 얽힌 계획된 살인인지 알 수 없는 한 남자의 변사가 발생합니다. ‘모두가 죽이고 싶었던 남자였던 한칠규의 죽음은 말 그대로 변사로 묻힐 수도 있었지만 사망 직전 그가 걸었던 마지막 전화 한 통 때문에 경찰의 수사대상으로 전환됩니다. 변사에 얽힌 사람들의 과거와 현재를 설명하는 1사건의 배경에 이어 2범죄수사에선 성해명 경감을 위시한 녹둥시 동부경찰서 형사1계의 수사 과정이 그려집니다.

 

미스터리 느와르 군상극이라는 출판사의 소개대로 ‘7: 죽음의 시간은 다채로운 장르가 믹스된 작품입니다. 한칠규의 죽음의 진상을 밝히는 미스터리가 기본 뼈대지만, 부산 구암 바닷가를 무대로 건달들의 치열한 전쟁을 그린 뜨거운 피’(김언수)를 연상시키는 느와르의 미덕도 한껏 만끽할 수 있습니다. 대부분 안 좋은 쪽으로 한칠규와 엮였던 수많은 인물들이 털어놓는 기구한 사연들을 읽다 보면 오쿠다 히데오의 군상극에서 맛볼 수 있는 씁쓸한 아이러니 혹은 웃지 못 할 희비극의 향기도 즐길 수 있습니다. 물론 2부부터는 수사의 주체인 성해명 경감과 녹둥시 동부경찰서 형사1계가 이야기를 이끌어가지만, 개인적으론 이 작품의 진짜 미덕은 미스터리 자체보다는 느와르 군상극에 있다는 생각입니다. “그냥 동네 치기배 사망 사건인데 캐릭터들이 하나같이 만만치가 않네.”라는 한 경찰의 푸념에 100% 공감할 수 있었던 건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재미있게 읽고도 별 0.5개를 뺀 건 미스터리의 아쉬움 때문입니다. 사건 자체가 소소한 건 이 작품의 서사에 걸맞은 설정이라 시비 걸 일이 없지만, 막판에 밝혀진 진범의 정체라든가 그 진범을 특정하는 과정이 지나친 비약 또는 불친절한 생략으로 이뤄져있어서 다 읽고도 찜찜함이 남고 말았습니다. 사실 누가 범인인지는 그리 중요한 관심사가 아니었지만 그래도 다소 허술하고 급한 마무리였다고 할까요? 꼰대 같기도 하고 진짜 재능을 숨긴 노회한 명탐정 같기도 한 성해명 경감이라든가 숨은 주인공처럼 강렬한 인상을 남긴 반영아 팀장 등 동부경찰서 경찰 캐릭터는 너무나도 매력적이었지만, 마지막 장을 덮을 때까지 미스터리의 아쉬움이 계속 머릿속에 남았던 게 사실입니다.

 

5회 엘릭시르 미스터리 대상 수상작이란 타이틀이 붙었지만 최들판은 이 작품으로 데뷔한 신인작가입니다. 하지만 페이지를 넘길수록 어떻게 이만한 내공을 지닌 작가가 이제야 데뷔를 한 건지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경찰 조직뿐 아니라 쇠락한 항구도시의 범죄 생태계에 대한 깊은 이해와 생생한 묘사에 감탄했다.”는 장강명의 추천사처럼 대단한 정보력과 자료조사도 놀라웠지만 단어와 문장을 자유자재로 갖고 노는 듯한 필력에 여러 번 눈길이 끌리곤 했습니다.

개인적으론 앞으로 녹둥시 동부경찰서 시리즈가 이어지지 않을까 기대하게 됐는데, 이야기 곳곳에 흥미로운 떡밥이 깔려있기도 하고 나름 산고를 겪으며 태어난(‘작가후기참고) 매력적인 캐릭터들을 작가가 이 한 작품만으로 은퇴시킬 것 같진 않다는 막연한 추측이 들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머잖아 녹둥시의 두 번째 이야기를 꼭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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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이정표 - 제76회 일본 추리작가 협회상 수상작
아시자와 요 지음, 김은모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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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읽은 아시자와 요의 미스터리와는 색깔 자체가 달라 보이네요. 그래도 이야미스와는 차별화된 아시자와 요만의 으스스한 느낌은 여전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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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링
T. J. 뉴먼 지음, 나현진 옮김 / 어느날갑자기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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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에서 뉴욕으로 향하는 코스탈 에어웨이 416편의 기장 빌 호프만은 이륙 직후 날아든 한 장의 사진 때문에 패닉에 빠집니다. 아내 캐리와 아들 스콧, 그리고 갓난아기인 딸 엘리스가 자살폭탄 조끼가 입혀진 채 괴한에게 인질로 붙잡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괴한은 자신이 지목한 목표물에 비행기를 충돌시킬 것을 지시하며, 만일 거부하거나 누군가에게 자신의 계획을 알리면 가족 모두가 몰살당할 것이라고 협박합니다. 덧붙여 비행기에 탑승한 공범이 모든 상황을 감시할 거라며 빌을 압박합니다. 빌은 즉각 지시를 거부하지만 괴한이 보낸 영상 속 가족을 지켜보며 결국 탑승객과 가족 가운데 어느 한 쪽을 선택할 수밖에 없음을 절감합니다.


 

비행기 테러를 소재로 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 한 편을 본 느낌입니다. 테러 액션물의 고전인 다이 하드의 비행기 버전 소설이라고 할까요? 비행승무원 출신 작가답게 T. J. 뉴먼은 비행기 안에서 벌어질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을 마치 눈으로 직접 지켜보는 듯 생생하게 그려냈습니다.

 

빌의 가족을 납치한 괴한이 지상에서 협박을 가하는 한편, 정체불명의 공범은 비행기에 탑승한 상태에서 빌이 지시대로 움직이는지 감시하는 상황이라 긴장감은 더욱 고조됩니다. 물론 이 최악의 사태를 조종실에 앉은 빌 혼자서 해결할 리는 만무합니다. 빌의 협력자들은 괴한들과 마찬가지로 지상과 비행기 안에서 어떻게든 참사를 막기 위해 분투합니다. 빌과 오랫동안 호흡을 맞춰온 베테랑 승무원 조가 비행기 안에서 승객들의 동요를 막으며 동료들과 함께 괴한들에게 맞서고, 조의 조카이자 근신중인 FBI 요원 테오가 이모 조와 연락을 주고받으며 지상에서의 활약을 담당합니다.

 

지상과 비행기 안에서 벌어지는 사건들 가운데 딱히 새롭다고 할 만한 설정도 별로 없고 나름 반전이라 할 수 있는 대목들 역시 쉽게 예측 가능한 게 사실이지만,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한시도 쉴 틈 없이 독자를 숨 가쁘게 만들면서 갈수록 페이지 넘기는 속도에 가속을 붙이곤 합니다. 빌과 그의 협력자들, 그리고 인질로 붙잡힌 빌의 가족에 이르기까지 매력적인 캐릭터를 발산하며 적절한 역할을 소화해내는 주조연들의 활약도 시종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또한 99.99%의 확률로 주인공 빌이 협력자들의 도움을 통해 무사히 비행기를 착륙시키고 가족도 구해낼 거란 걸 알면서도 어떤 대목에선 페이지를 넘기는 손이 바들바들 떨리는 걸 경험할 수도 있습니다. 말하자면 다소 뻔한 전개와 스토리에도 불구하고 정말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이란 뜻입니다.

 

아무리 픽션이긴 해도 제주항공 참사 때문에 읽는 내내 마음이 편치 않았던 게 사실인데, 그 점 때문에 이 작품을 읽기가 주저되는 독자라면 조금은 시간이 흐른 뒤에라도 꼭 한 번 읽어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460여 페이지의 분량이지만 반나절 만에 독파할 수 있을 정도로 속도감이 대단한 데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팽팽한 긴장감과 짜릿함을 좋아하는 액션 스릴러 애독자에겐 더없이 구미가 당길 작품임에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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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이 코스트
테스 게리첸 지음, 박지민 옮김 / 미래지향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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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년 전 자신의 삶을 붕괴시킨 비극적인 시라노 작전이후 은퇴한 전직 CIA 요원 매기 버드는 60세가 된 현재 메인주의 소도시 퓨리티에서 블루베리와 닭을 키우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누구도 믿지 않는 그녀가 유일하게 마음을 터놓는 상대는 독서모임 마티니 클럽의 멤버들이자 이젠 60~70대가 된 전직 CIA 요원들입니다. 어느 날 낯선 방문객이 찾아오고, 다음날엔 시신 한 구가 마당에서 발견되면서 매기의 은둔자로서의 삶은 끝장납니다. 무엇보다 그 낯선 방문객이 16년 전의 시라노 작전을 언급한 탓에 매기는 공포에 휩싸입니다. 누군가 그 작전에 참여했던 요원들을 향해 복수에 나선 것이 분명했고, 은거지가 들킨 이상 언제라도 살해당할 수 있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저의 최애 시리즈 중 하나인 테스 게리첸의 리졸리&아일스 시리즈8편인 아이스 콜드’(미국 2010, 한국 2013)를 마지막으로 더는 한국에 소개되지 않았지만, 미국에선 13(‘Listen to Me’, 2022)까지 출간돼서 개인적으로 무척 아쉬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정말 오랜만에 스파이 코스트를 통해 테스 게리첸의 이름을 다시 듣게 돼서 더없이 반가웠는데 뜻밖에도 스파이 스릴러라는 장르라서 기대감과 호기심이 더욱 끓어올랐습니다.

 

이야기는 매기가 30대 중반이던 무렵부터 시라노 작전으로 은퇴한 40대 중반까지를 그린 과거와 은둔자로서의 삶이 끝장난 뒤 다시금 스파이로서의 능력을 발휘할 수밖에 없게 된 현재 등 두 갈래로 전개됩니다.

24년 전, 매기는 방콕에서 운명처럼 만난 한 남자와 사랑에 빠지지만, 그 사랑으로 인해 예기치 못한 불운 속으로 빠져듭니다. 그리고 그 불운은 시라노 작전이라는, 성공하긴 했지만 매기에게 평생 잊지 못할 상처를 남긴 마지막 임무로 그녀를 이끌었고, 매기는 그 작전으로 인해 너무나도 많은 것을 잃었습니다.

한적한 소도시에서 평범한 60세 여성으로 살아가던 매기를 뒤흔든 건 시라노 작전을 언급하며 나타난 낯선 방문객입니다. 기밀로 봉인됐던 작전 내용이 누군가에게 해킹 당했다는 말에 매기는 16년 동안 두려워했던 일이 현실이 됐음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그날부터 은퇴한 CIA 요원들의 모임인 마티니 클럽은 매기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머리를 맞대기 시작합니다.

 

지극히 평범한 은퇴자로 조용히 살아가는 스파이에 대해 쓰고 싶었습니다. 어느 날 묻어두었던 과거가 되살아나 괴롭히기 시작하고, 다시는 쓸 일이 없을 줄 알았던 옛 기술들을 불러내야만 하는 상황에 처하는 은퇴한 스파이의 이야기를.” (저자노트 )

 

전 세계를 누비며 숱한 죽음의 위기 속에서도 무력과 지략으로 임무를 완수하던 스파이는 과연 은퇴 후 어떤 삶을 살게 될까요? 아는 게 너무 많거나 사방팔방에 적을 만들어놓은 탓에 평생 주위를 경계하면서 살아야 할 것 같기도 하고, 뜻밖에도 평범한 은퇴자들과 마찬가지로 안락한 노년의 삶을 누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현역 시절에 완수했던 임무 때문에 누군가의 복수의 대상이 된다면, 그것도 너무나도 깊은 상처를 얻은 탓에 오랜 시간 잊고 살아왔던 그 끔찍한 임무를 다시금 떠올려야 한다면 그 스파이는 과연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요?

60세라는, 노인이라 할 순 없지만 스파이엔 결코 어울리지 않는 나이의 매기는 한편으론 마티니 클럽의 동료들에게 시라노 작전의 전말을 알려주면서 다른 한편으론 자신에게 닥친 위기를 직접 해결할 방안을 모색합니다. 그리고 한참동안 쓰지 않았지만 마치 본능처럼 몸과 마음에 스며들어있던 스파이로서의 옛 기술들을 소환해선 16년 전의 고통스러운 상황과 다시 한 번 마주치기로 결심합니다.

 

매기뿐 아니라 마티니 클럽의 멤버들도 인맥을 통해 정보를 수집하고 회의를 통해 단서를 분석하며 오랜만에 자신들의 재능을 발휘합니다.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수십 년의 경험과 노하우가 은퇴한 스파이들을 더욱 빛나게 만듭니다. 그들은 단지 안락 은퇴 스파이에 머물지 않고 매기와 함께 실전에 나서기도 합니다. 물론 화려한 액션이나 사선을 넘나드는 총격전 같은 건 없지만 마티니 클럽의 활약은 어지간한 스파이물보다 흥미진진합니다.

 

60~70대가 된 은퇴 스파이들의 이야기라고 해서 다소 늘어지거나 밋밋하지 않을까, 우려하는 독자도 있겠지만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입체적이고도 긴장감 넘치는 서사와 매력적인 캐릭터들, 그리고 반전을 거듭하는 전개를 품은 스파이 코스트는 그 어떤 기대에도 부응할 만한 작품이란 생각입니다. 미국에서는 2025년에 시리즈 2편인 ‘The Summer Guests’가 출간될 예정이라는데, 이제 만 72세가 될 테스 게리첸이 앞으로도 오랫동안 마티니 클럽 시리즈를 이어가주기를 진심으로 응원하고 싶어집니다.

 

사족으로... 편집과 번역의 아쉬움은 이 작품의 옥의 티였습니다. 오타와 띄어쓰기 오류가 적잖았고, 종종 눈에 띈 직역 또는 매끄럽지 못한 번역도 책읽기를 방해하곤 했습니다. 후속작도 출간할 계획이라면 좀더 성의 있는 편집과 번역이 필요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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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의 끝
히가시야마 아키라 지음, 민경욱 옮김 / 해피북스투유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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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73, 소행성 파편과의 충돌로 지구는 초토화된다. 미국 정부는 피해가 미약한 동부지역을 보호하기 위해 900km에 달하는 경계선을 긋고 외부와 차단한다. 그로 인해 경계선 밖에선 동사와 아사가 속출하고, 결국 생존을 위한 식인이 횡행한다. 하지만 식인은 죄의식을 야기했고, 경계선 밖 사람들은 어떻게든 구원받길 기도했다. 그때 소년 너새니얼 헤일런이 나타나 온갖 기적을 행하며 식인의 신으로 불리게 된다. 한편 백성서파 교회는 경계선 밖의 범죄자들을 없애기 위해 킬러를 파견한다. 특히 식인을 심각한 중범죄로 여긴다. 킬러 중 한 명인 네이선 발라드는 식인 현장을 목격하곤 충격에 빠지지만 동시에 너새니얼이 왜 신으로 추앙받는지도 알게 되면서 심각한 고민에 빠지고 만다. 과연 너새니얼은 식인을 조장한 죄인일까? 아니면 진정 신 혹은 구원자일까? (출판사 소개글을 일부 수정 후 인용했습니다.)


 

대만에서 태어난 일본인 작가 히가시야마 아키라는 1970~80년대 대만을 배경 삼아 미스터리와 역사와 성장스토리를 절묘하게 배합시킨 나오키 상 수상작 를 통해 처음 알게 됐습니다. 굉장히 독특한 작품인데다 미묘한 필력이 눈길을 끌어서 후속작을 기대하고 있었는데, 고백하자면 죄의 끝은 서평을 써야 되나 말아야 되나 고민이 될 정도로 저에겐 다소 어렵고 이해하기 쉽지 않은 작품이었습니다. 파멸에 이른 지구, 생존을 위한 식인, 선악의 경계가 모호해진 황폐한 세상, 그리고 그런 상황에 내몰린 자들이 갈망한 진정한 구원 등 대재앙 이후 살아남은 자들이 겪는 지독한 비극에 신화와 종교와 도덕의 서사를 가미한 이야기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어렵고 이해하기 쉽지 않았다는 것 역시 독서의 결과 중 하나라는 생각에, 읽으면서 느꼈던 바를 몇 마디 적어보려고 합니다.

 

전쟁 혹은 조난을 다룬 픽션 가운데 생존을 위한 식인을 그린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불가피한 상황이긴 해도 사람을 먹은 사람들은 구토 등 육체적인 거부감은 말할 것도 없고 끝없는 죄책감과 죄의식에 시달리게 됩니다. ‘죄의 끝에 등장하는 경계선 바깥의 사람들처럼 말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용서와 구원이 된 소년 너새니얼의 한마디는 의외로 간결하고 단순합니다. 한 사람을 먹었으면 두 사람을 구하라.” 자기합리화에 불과한 궤변처럼 들리기도 하지만, ‘죄의식에 사로잡힌 식인종들에겐 그야말로 눈물 나는 구원의 한마디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동사와 아사의 걱정이 없는 경계선 내부 사람들에게 있어 식인을 조장하고 살인을 일삼는다고 소문난 너새니얼은 반드시 제거해야 할 잔혹한 범죄자에 불과합니다. 그런 너새니얼을 제거하기 위해 파견된 네이선은, 말하자면 경계선의 중간쯤에 선 채 이 모든 혼란의 양면을 동시에 목도하는 인물입니다. 식인도, 살인도 용납할 수 없는 그였지만 생존의 한계에 몰린 인류가 어떤 식으로 새로운 가치관을 만들어내고 또 어떤 식으로 자신들의 구원자를 찾아내는지를 낱낱이 지켜보면서 고민과 갈등에 사로잡히기 때문입니다.

 

죄의 끝은 독자의 감정이입을 차단하고 객관적인 시점에 머물게 하는 구성을 취합니다. 너새니얼 제거작전은 현재가 아니라 20년 전에 벌어진 일이며, ‘죄의 끝은 실은 자료수집과 인터뷰를 거쳐 너새니얼의 일생을 조사한 네이선이 제거작전 과정의 전말까지 가미하여 펴낸 책의 내용입니다. 네이선도, 너새니얼도 주인공이라 할 수 없습니다. 감정과 시점을 이끄는 주인공이 없는 상태에서 멸망한 세계와 인류가 맞닥뜨린 참극을 중립적인 눈으로 바라보도록 만들었다는 뜻입니다. 물론 너새니얼을 추격하는 네이선의 여정을 읽으면서 독자는 어쩔 수 없이 잠시의 감정이입을 경험하게 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까지 담담한 마음을 견지하며 페이지를 넘길 수 있었던 건 이런 구성 덕분입니다.

 

식인을 소재로 한 흥미진진한 SF 스릴러도 아니고, 빠른 속도로 읽어선 안 될 쉽지 않은 작품이지만, 포스트 아포칼립스, 즉 종말 혹은 대재앙 이후의 픽션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큰 매력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제 경우 아쉽게도 그쪽 취향이 아니라서 더 어렵게 읽은 것 같은데, 그래선지 언젠가 시간이 좀 흐른 뒤에 꼭 한 번 다시 읽어보고 싶은 욕심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너새니얼과 네이선의 이야기를 이번보다는 조금은 더 깊고 진중하게 읽어낼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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