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팅 데이
이현진 지음 / 아프로스미디어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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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아버지의 죽음을 목격한 트라우마 때문에 지금도 상담과 함께 수면제 처방을 받는가 하면 재직 중인 초등학교에선 고참 교사들의 갑질에 순응하는 등 정희태는 외양만 놓고 보면 매가리 하나 없는 유약한 청년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실은 그는 13살 때 첫 살인을 저지른 것을 시작으로 한 달에 한 번씩 죽여 마땅한 사람들을 거리낌 없이 제거하는 사이코패스입니다. 어느 날, 살인을 목전에 둔 정희태는 뜻밖의 방해꾼 때문에 모든 일을 망치고 맙니다. 얼마 후 방해꾼의 정체를 알아낸 정희태는 그를 처리할 좋은 아이디어를 떠올리지만 예기치 못한 사태가 벌어지면서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지고 맙니다.


 

세상에 숨어 사는 괴물들을 제물로 바침으로써 나는 내가 세상에 이로운 존재라는 사실을 입증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모를 것이다. 내가 세상을 매일매일 조금씩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p82~83)

 

미드 덱스터가 사적 제재와 사적 복수 서사의 원형까지는 아니지만 매체를 불문하고 수많은 후예들을 양산한 건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법망을 빠져나간 범죄자들이나 죄를 짓고도 벌을 받지 않은 자들에 대한 주인공의 무자비한 제재와 복수는 언제나 관객과 독자의 환영을 받았고, 이루 말할 수 없는 쾌감까지 선사했기 때문입니다. 유사한 스토리가 반복적으로 재생산되면서 더는 예전과 같은 신선함이나 짜릿함을 만끽하기 어려워졌지만, 여전히 사적 제재와 사적 복수는 스릴러의 매력적인 소재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치팅 데이역시 덱스터의 후예들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는 한국형 사적 제재 스릴러입니다. 주인공 정희태는 반쯤은 타고 났고 반쯤은 후천적으로 숙성된 사이코패스입니다. 그는 자신과 세상을 속여도 되는 날’, 즉 치팅 데이라는 규칙을 세워놓곤 한 달에 한 번씩 박멸되어야 하는 벌레 같은 존재들을 눈앞에서 치워 버리곤 합니다. 굳이 치팅 데이라는 규칙을 정한 건 살인에 탐닉하는 괴물이 되지 않도록 스스로를 억제하기 위함입니다. 그런 정희태 앞에 어느 날 갑자기 방해꾼이 나타나면서 이야기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합니다. 둘 중 하나가 죽어야만 끝나는 게임이 시작되고, 그 게임의 와중에 적잖은 사람들이 끔찍한 비극을 맞이합니다.

 

한국판 덱스터의 탄생이라는 노골적인 띠지를 두르긴 했지만 치팅 데이는 결론부터 말하면 개성과 특징이 희미한 덱스터의 모방작에 가까운 작품입니다. 읽기 전부터 염두에 둔 건 기존의 유사한 작품들과 차별되는 지점은 어디인가?”였는데, 거의 유일하다고 할 수 있는 건 목적도 동기도 다른 라이벌 살인마가 등장한다는 점입니다. 정희태와 라이벌의 대결이 치팅 데이의 중심 이야기이긴 하지만 그 외엔 덱스터의 후예정희태를 기억하게 할 만한 특별한 개성이 없었다는 게 솔직한 제 생각입니다.

치팅 데이라는 독특한 괴물 방지 장치가 설정되긴 했지만 실은 그건 방법론의 차이일 뿐 근본적인 차별점은 아닙니다. 또한 정희태는 자신만의 도덕 기준’, 즉 죽여 마땅한 자들을 선정하는 기준을 여러 번 강조하는데, 그 기준이란 지금까지 보고 읽은 것들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정희태는 엔딩과 에필로그에서 스스로에게 도덕적 질문 - 자신의 행동이 과연 정당화될 수 있는지, 자신의 방식이 진정한 정의를 실현하는 것인지 - 을 던지는데, 이는 캐릭터를 차별화시킨다기보다는 오히려 무색무취하고 평범하게 만든 어설픈 질문이란 생각입니다(이 장면에선 개인적으로 덱스터의 후예들가운데 가장 좋아하는 피터 스완슨의 죽여 마땅한 사람들의 주인공 릴리 킨트너가 많이 생각났습니다)

 

유사 작품들과의 차별성만큼 아쉬웠던 건 스릴러 서사를 떠받치는 디테일한 장치들이 너무 쉽고 안이하게 설정됐다는 점입니다. 사이코패스의 연원을 불행한 가족사라는 편리한 장치에만 의존합니다. 두 사람이 서로의 정체를 파악하는 과정은 웃음이 나올 정도로 쉽습니다. 두 사람의 살인 행각은 CCTV와 블랙박스를 잘도 피해 다닙니다. 위기일발의 순간마다 끼어드는 제3자의 반격은 거의 닌자 혹은 투명인간 수준입니다. 사소하다면 사소한 문제일 수도 있지만 개인적으론 이런 디테일이야말로 스릴러 서사 자체를 강력하게도, 허약하게도 만들 수 있는 중요한 토대라는 생각입니다.

 

덱스터의 후예들을 자처하는 작품이라면 오히려 덱스터와 차별되는 지점을 내세울 수 있어야 합니다. 권총 한 번 쏘기도 쉽지 않은 한국 스릴러의 현실을 감안하면 디테일은 몇 번을 강조하고 신경 써도 지나치지 않다는 생각입니다. 다른 건 몰라도 두 가지 미덕에 관한 한 치팅 데이는 아쉬움이 크게 남을 수밖에 없는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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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스팅 - 그가 사라졌다
리사 엉거 지음, 이은선 옮김 / 황금시간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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렌 그린우드는 불행한 과거를 딛고 인기 있는 칼럼니스트로 살아가는 중이다. 연애에 서툰 그녀는 데이트 앱을 통해 애덤을 만나 열정적인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렌이 자신의 불행했던 과거를 털어놓은 다음날, 애덤은 갑자기 사라져 버린다. 그리고 렌은 사설탐정 베일리에게 애덤과 사귀었던 세 명의 여자들이 모두 실종됐다는 놀라운 이야기를 듣는다. 애덤의 흔적을 쫓던 렌은 그가 이미 자신의 과거를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충격에 빠진다. 애덤은 혹시 자신의 과거 때문에 일부러 접근한 걸까? 실종된 세 명의 여자들에겐 무슨 일이 생긴 걸까? 애덤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 렌은 자신의 과거로 이어지는 단서를 쫓아 애덤을 추격하기 시작한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배우자 또는 연인이 갑자기 사라지거나 알고 보니 지금까지 그()에 대해 알고 있던 모든 것이 거짓이란 설정은 도메스틱 혹은 심리 스릴러의 단골 소재입니다. 피로감이 느껴질 정도로 여러 작품에서 활용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스팅을 읽기로 한 건 리사 엉거의 전작인 ‘745분 열차에서의 고백이 인상적이었기 때문입니다. “5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을 사건보다 캐릭터의 힘으로 끌고 간 작가의 필력은 대단해 보였다.”라는 서평을 남기기도 했는데 고스팅역시 미스터리와 스릴러 서사보다는 개성 강한 인물들의 다채로운 심리가 더 눈길을 끈 작품입니다.

 

20대 후반인 렌은 어린 시절 가족의 파멸을 생생히 지켜봤던 트라우마를 가진 인물입니다. 그런 트라우마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다른 사람들의 고민을 상담해주는 디어 버디라는 블로그와 팟캐스트를 운영하며 나름 긍정과 희망의 기운 속에 살아가는 중입니다. 하지만 그런 그녀가 데이트 앱에서 만나 사랑에 빠진 상대는 다소 어둡고 불운해 보이는 남자 애덤입니다. 밝고 가볍고 유머 감각이 있는 남자보다 어딘가 자신의 과거와 닮은 애덤에게 끌린 건데, 그 때문인지 렌은 절친 한 명 외엔 누구에게도 말한 적 없는 자신의 고통스러운 과거를 아무 거리낌 없이 털어놓고 맙니다.

문제는 그 직후 애덤이 사라졌다는 점, 그의 모든 것이 거짓이었다는 점, 그리고 그와 만났던 세 명의 여자들이 실종됐으며 그녀들은 렌과 마찬가지로 불행한 과거와 평균 이상의 재산을 보유한 공통점이 발견됐다는 점입니다. 가장 당혹스러웠던 건 애덤이 오래 전부터 자신의 트라우마와 과거사를 모두 알고 있었다는 사실, 그리고 애덤이 애초 자신에게 접근한 이유가 어쩌면 과거사 속에 숨어있을지도 모른다는 근거 없는 추정인데, 이 때문에 이야기는 사라진 애덤 찾기봉인했던 과거와의 고통스런 조우라는 두 갈래로 전개됩니다.

 

실종된 여성 중 한 명의 부모에게서 의뢰를 받은 사설탐정 베일리와 렌이 함께 애덤의 흔적을 뒤쫓는 미스터리와 20여 년 전 렌과 그녀의 가족이 겪은 끔찍한 비극이 번갈아 등장하는데, 비교적 단선적인 미스터리 구도에도 불구하고 500페이지 가까운 분량의 밀도와 농도가 진하게 느껴진 건 각 인물들의 복잡하고 요동치는 심리 묘사 덕분입니다. 특히 지독한 상처와 트라우마에도 불구하고 그와 비슷한 기운을 발산하는 애덤에게 이끌렸던 렌에게선 자기 파괴적이고 집착에 가까운 사랑과 열정을 느낄 수 있는데, 그가 사라진 뒤에도, 또 그가 세 명의 여성의 실종에 혐의가 있어 보인다는 사실을 알고도 그에 대한 갈망을 포기하지 못하는 렌에게선 이성과 상식으로는 설명할 길 없는 사랑의 광기 같은 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마치 전쟁터에서 큰 트라우마를 입은 인물이 결국은 다시 전쟁터를 갈망하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랄까요?

 

애덤을 쫓는 렌과 베일리의 추적 미스터리 자체는 딱히 두드러지거나 인상적인 대목은 없습니다. 오히려 작은 단서들이 드러날수록 봉인했던 과거와 직면하게 되는 렌의 고통과 그런 렌에게 연민과 공감을 느끼는 베일리의 복잡한 심경이 더 눈길을 끕니다. 또한 애덤을 찾아내 실종 여성의 행적과 생사를 알아내려는 베일리와 달리 렌의 목적은 애덤과의 사랑을 재확인하고 다시금 행복한 나날을 되찾는 것이기에 두 사람 사이엔 협력보다는 긴장감이 상존할 수밖에 없고 이런 설정은 마지막까지 독자의 마음을 뒤흔들어놓습니다.

 

똑같은 이야기를 일본 미스터리 스타일로 풀었다면 무척 단선적인 이야기가 됐겠지만, 리사 엉거는 특유의 집요하고 섬세한 묘사를 앞세워 말 그대로 쫄깃한 심리 스릴러를 완성시켰습니다. 물론 상식과 이성으론 이해하기 힘든 렌과 애덤의 심리가 간혹 위화감을 자아낸 건 사실이지만, 렌의 끔찍한 과거사와 막판에 밝혀진 진실 덕분에 어느 정도는 눈감아 줄 수 있었습니다. 도메스틱 혹은 심리 스릴러에 거부감이 있는 독자라도 충분히 그 재미를 만끽할 수 있는 작품이니 관심 있는 독자라면 한번쯤 만나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사족이지만, ‘고스팅을 끝까지 몰입해서 읽을 수 있었던 건 번역이란 이런 것!”이란 걸 여러 번 실감하게 해준 이은선의 매끄럽고 완벽한 번역 덕분입니다. 심리 묘사에 치중한 작품이라 번역가에겐 쉽지 않은 작업이었을 텐데 주로 스티븐 킹의 작품에서 선보였던 이은선의 저력이 고스팅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됐다는 생각입니다. 책을 고르는 데 있어 누가 번역했는지도 꽤 중요하게 여기는 제겐 이은선은 모든 애서가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번역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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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가와 란포 기담집
에도가와 란포 지음, 김은희 옮김 / 부커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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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미스터리 마니아라면 언젠가 에도가와 란포의 작품을 출간 순서대로 읽어보고 싶은 욕심이 들 것입니다. 알라딘에서 검색하면 모두 56편의 작품이 한국에 출간된 걸로 나오지만 아케치 고고로 시리즈를 제외하면 약간은 중구난방의 느낌이 드는 게 사실이고, 체계적으로 그의 작품세계를 정리했다기보다는 독자의 관심을 살 만한 중단편들이 중복 출간된 경우가 더 많아서 마니아의 욕심을 충족시키기 어려워 보이곤 합니다. 2016년에 검은숲에서 에도가와 란포 결정판을 내놓긴 했지만 2편까지만 나오곤 소식이 끊겨서 무척 아쉬웠는데, 오랜만에 다수의 수록작을 품은 에도가와 란포 기담집이 출간돼서 반가운 마음으로 읽게 됐습니다.


 

모두 16편이 수록됐지만 거의 절반 가까이는 이미 다른 중단편집을 통해 소개된 작품들입니다. 특히 애벌레’, ‘인간 의자’, ‘거울 지옥등은 두세 편 이상의 중단편집에 중복 수록됐던 인기작들인데, 오랜만에 다시 읽어도 여전히 에도가와 란포 특유의 기괴함과 그로테스크한 마력을 만끽할 수 있어서 그의 대표작으로 손꼽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란성 쌍둥이 형을 죽이고 형 행세를 하며 살인을 저지른 남자의 참회록(쌍생아), 법을 어기지 않고도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낸 뒤 99명의 목숨을 빼앗은 남자(붉은 방), 아내를 살해하고 토막 내어 시랍으로 만든 약사(백일몽), 자신이 만든 의자 속에 숨어들어가 가죽 한 장 사이로 타인의 몸과 접촉하는 것에 도취든 장인(인간 의자), 사람들의 무시와 핍박 속에 살인귀로 전락해버린 난쟁이 광대(춤추는 난쟁이), 결혼 6개월 만에 차갑게 변한 남편의 비밀을 캐다가 참혹한 비극과 마주하고 만 여자(사람이 아닌 슬픔), 전쟁 중에 팔과 다리를 잃고 오직 시각과 촉각만 남은 전직 군인 남편을 추악한 욕정의 도구이자 가학적 학대의 대상으로 이용하는 여자(애벌레) 등 상상을 초월하는 인물과 이야기가 기담과 괴담 혹은 호러와 미스터리 서사에 실린 채 예측 불가능한 엔딩을 향해 폭주하면서 독자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듭니다.

 

하지만 에도가와 란포의 진짜 매력은 전대미문의 기괴함이나 무한대로 일그러진 그로테스크 그 자체에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독자는 각 수록작의 마지막 장을 덮을 때마다 서로 다른 색깔의 특별한 여운을 맛보게 되는데, 제 경우 앞서 읽은 끔찍한 이야기에서 어떻게 이런 여운이 파생될 수 있을까, 라는 혼란과 이질감을 느끼다가 금세 이것이 에도가와 란포만의 매력이라는 결론에 이르곤 했습니다. 실제로 수록작 중 상당수는 단순히 무섭고 끔찍한 이야기에 그치지 않고 곳곳에 말로 다 표현 못할 처연함과 애틋함을 품고 있습니다. 심지어 요즘의 시선으론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범죄와 악의를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주인공에게 이입된 나머지 용서하거나 응원하거나 모르는 척 해주고 싶은 마음이 저절로 드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물론 악마 그 자체를 적나라하게 그려내서 다 읽은 뒤 지독한 혐오감에 빠지게 만드는 작품도 있습니다)

 

요즘 독자의 트렌드로 볼 때 에도가와 란포의 작품은 출판사에겐 바람직한 비즈니스 대상이 아닐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지만 언젠가 그의 작품들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결정판이 시리즈로 출간되기를 복권을 사는 마음으로 기대해보고 싶습니다. 특히 정치적 상황 때문에 다소 말랑말랑한 작품(‘아케치 고고로 시리즈)을 쓸 수밖에 없게 된 1936년 이전의 작품들이라면 언제라도 두 손 들어 환영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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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오 나비클럽 소설선
김세화 지음 / 나비클럽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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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우가 내리는 가운데 K대 교수가 피습당하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단순 퍽치기로 여겨졌지만 한 달 후 K대 운동장에서 한 변호사가 살해당하면서 상황은 급변합니다. 두 사람 모두 다문화교류연구원과 관련 있으며 인근의 이슬람사원 건립 당시 반대여론에 맞섰다는 공통점이 발견됐기 때문입니다. 언론이 종교 갈등에 초점을 맞춰 사태를 악화시키는 가운데 형사과장 오지영은 두 피해자 사이의 연관성을 찾기 위해 분투합니다. 하지만 수사는 답보 상태에 빠지고 비가 오는 날마다 동일범의 소행으로 보이는 살인사건이 벌어집니다. 언론과 여론의 비난이 폭주하고 경찰 내부의 압력까지 거세지지만 오지영은 자신이 믿는 방향으로 수사를 이어갑니다. 그리고 아주 작은 단서를 통해 일련의 사건의 중심에 있는 인물을 찾아냅니다.


 

김세화의 첫 장편 기억의 저편은 기대에 비해 아쉬움이 컸던 작품이라 이후 관심작가 목록에서 그의 이름을 지웠던 게 사실입니다. ‘타오를 읽기로 한 건 ‘2024 한국추리문학상 대상이라는 수상 이력과 독자들의 호평 때문이기도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제가 좋아하는 사회파 미스터리였기 때문입니다. 최근 한국 미스터리가 급격한 성장을 이뤄내고 있지만 사회파 미스터리에 관한 한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아직은 청소년기정도에 그치고 있어서 타오처럼 한국형 사회파 미스터리의 새로운 작법을 제시했다.”라는 띠지를 두른 작품이라면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는 뜻입니다.

 

주인공인 형사과장 오지영은 계간 미스터리 2021 겨울호에 수록된 단편 두껍아 두껍아 헌 집 줄게 새 집 다오를 통해 만난 적 있습니다. 여전히 남성중심사회인 경찰 조직에서 뛰어난 수사 능력을 인정받아 형사과장에 오른 40대 여성으로 막내형사보다 더 열심히 현장을 누비고 다니는가 하면 경찰서장에게도 당당히 맞서는 매력적인 인물입니다. ‘타오에선 언론과 여론에게 무능한 경찰로 낙인찍혀 십자포화를 맞기도 하고 보신과 회피에 급급한 상부에 의해 문책 위기에 빠지기도 하지만 오지영은 그 모든 난관을 홀로 견뎌내며 사건의 진상을 파악해냅니다.

 

비이성적인 혐오 프레임과 저열한 선동에 휘둘리며 문제의 본질을 진지하게 성찰하지 않는 사회에서 사회적 약자들은 어떤 폭력에 노출되는가?” (출판사 소개글 )

 

종교 갈등 또는 다문화 혐오로 몰아가는 언론과 달리 오지영은 범인의 행태에 주목하며 숨겨진 범행동기를 찾는 데 주력합니다. 그리고 연이은 피해자가 발생하는 가운데 집요한 단서 추적을 통해 모든 사건에 연관돼있는 한 인물을 찾아냄으로써 자신의 추리가 옳았음을 입증합니다. 하지만 진상을 파악하면 할수록 오지영의 마음은 참담해집니다. 사회적 약자라 할 수 있는 그 인물에게 가해진 온갖 유무형의 폭력들이 낱낱이 밝혀지기 때문입니다. 부와 명예와 권력을 가진 자들의 폭력은 때론 노골적으로 때론 은근한 방법으로 자행됐고 결국 어디에도 기댈 곳 없던 약자는 참혹한 비극을 맞이한 것입니다. 사회파 미스터리에서 경찰 혹은 탐정 역할을 맡은 주인공들이 늘 그렇듯 오지영 역시 범인을 밝혀내기 위해 분투하면서도 씁쓸함과 안타까움이란 마음속 누름돌에 고통스러워합니다.

 

주제와 서사 모두 사회파 미스터리에 잘 어울리게 구축됐고, 한국의 사회적 문제들을 연쇄살인 미스터리 속에 잘 녹여내서 마지막 장까지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다만 이야기의 전개 방식이 너무 정직해서 긴장감이 떨어진 점, 몇몇 대목(초반부 오지영이 사방에서 십자포화를 맞는 장면들, 심각한 왜곡까지 저질러가며 선정적인 뉴스를 양산하는 언론의 폐해, 이미 알고 있는 내용들이 반복될 뿐인 관련자 탐문 등)에 필요 이상의 분량을 할애해서 중반부쯤 지루함을 느끼게 한 점, 그리고 경찰 쪽 인물이 너무 많다 보니 주인공 오지영의 캐릭터가 역할에 비해 덜 빛났던 점 등은 무척 아쉬웠습니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앞으로 오지영 시리즈가 계속 이어질 것 같은데, ‘경찰‘40대 여성이란 두 캐릭터 모두 매력이 충분해서 미스터리 서사가 잘 받쳐준다면 앞으로 기대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아직 김세화를 관심작가 목록에 넣을지 여부는 결정하지 못했지만 적어도 오지영 시리즈를 한두 편 정도는 더 지켜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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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이 뜨는 숲
아오야마 미치코 지음, 승미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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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 소설은 제 관심 장르가 아닙니다. 최애 작가의 작품이 아니라면 제목이나 표지에서 힐링 비슷한 분위기만 풍겨도 외면하곤 합니다. 하지만 이름조차 생소한 아오야마 미치코의 달이 뜨는 숲에 눈길이 간 첫 번째 이유는 ‘4년 연속 일본서점대상 수상 작가라는 소개글 때문입니다. 일본의 여러 문학상 가운데 가장 신뢰하는 게 일본서점대상인데, 순문학에서 장르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작품들이 라인업 돼있어서 매년 수상작이 발표될 때면 관심 있게 지켜보곤 합니다. 4년 연속 수상에도 불구하고 아오야마 미치코의 이름이 제게 각인되지 않은 건 아마도 난 힐링 소설이야!”라고 대놓고 선언하는 듯한 표지와 제목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달이 뜨는 숲은 소개글 몇 줄만으로도 제 관심을 이끌어냈고, 결과부터 말하면 흔한 힐링 소설들과는 약간은 결이 다른 매력을 품고 있어서 꽤 진하고 깊은 여운을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


 

모두 다섯 편의 단편이 실려 있는데, 각 주인공들은 다른 수록작에도 의미 있는 조연으로 등장하곤 해서 이 작품의 메시지 중 하나인 모습이 보이지 않아도 사람과 사람은 틀림없이 이어져 있다를 여러 번 실감하게 만듭니다. 또한 모두들 다케토리 오키나라는 사람이 운영하는 팟캐스트 달도 끝도 없는 이야기의 애청자이기도 한데, 주인공들은 매일 10분씩 달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그 팟캐스트를 통해 자신이 처한 여러 가지 고민과 문제들의 탈출구를 찾아내곤 합니다.

 

번 아웃과 자기혐오에 빠져 오랫동안 근무한 병원을 그만둔 간호사 레이카, 개그맨이 되고 싶었지만 꿈을 이루지 못한 채 자괴감에 빠져 사는 택배기사 시게타로, 딸의 갑작스런 임신과 결혼 때문에 착잡함을 털어내지 못하는 중년남자 다카바, 엄마에게서 독립하기 위해 몰래 배달 라이더로 일하는 여고생 나치, 그리고 취미로 시작한 액세서리 제작이 번창하면서 일과 가정 사이에서 고민하는 20대 여성 무쓰코 등 다섯 명의 주인공은 하나 같이 자기 자신 때문에, 혹은 애증을 품은 그 누군가 때문에 고민과 갈등에 빠져있습니다. 갈수록 깊어지는 자기혐오, 가까우면서도 멀게만 느껴지는 상대와의 거리감, 벗어나고 싶지만 동시에 곁에 있어주기를 바라는 이율배반 등 쉽사리 치유되기 힘든 문제들을 안고 있는 것입니다.

 

지구 자전속도에 맞춰서 달은 조금씩 조금씩 멀어져 가고 있지요. 달과의 거리가 처음과 똑같았다면 지구는 지금쯤 어떤 별이 됐을까요? 달과 지구는 조금씩 멀어지면서도 그때그때 가장 좋은 상태로 관계를 이어왔구나, 하는 생각을 저는 하곤 합니다.” (p24)

 

다섯 명의 주인공에게 변화와 희망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건 팟캐스트 달도 끝도 없는 이야기입니다. 실제로 이런 팟캐스트가 있다면 애독하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달도 끝도 없는 이야기는 지금껏 몰랐던 달에 관한 특별한 이야기들을 들려주는데, 단순히 달에 대한 상식만이 아니라 희로애락을 겪는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달과 결부시켜 설명함으로써 큰 공감대를 얻어내는 것입니다. 사람들 사이의 관계는 달처럼 변할 수밖에 없다고, 지구와 달이 조금씩 멀어지면서도 좋은 상태를 유지하는 것처럼 사람들 사이의 거리가 반드시 가까워야 행복한 것은 아니라고, 또 음력 초하룻날이면 눈에 보이지 않게 되는 달이 다음날이면 새로운 모습으로 밤하늘에 뜨듯이 사람들에게도 언제나 새로운 시작이 가능하다고 말해주는 다케토리 오키나의 다정다감한 목소리에 주인공들은 새삼 자신의 처지를 돌아보며 변화와 희망의 가능성을 떠올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달이 뜨는 숲을 다른 힐링 소설들과 차별화시키는 가장 큰 특징이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론 아오야마 미치코가 팟캐스트 내용만 모아 한 편의 소설로 내줬으면 하는 바람도 갖게 됐습니다.)

 

몇몇 대목에서 힐링 소설의 작위성과 한계가 엿보이기도 하지만 달이 뜨는 숲은 그동안 읽은 몇 안 되는 힐링 소설 중에서도 꽤 오래 기억에 남을 작품입니다. 무엇보다 그동안 무심히 바라보곤 했던 달을 앞으론 각별한 마음으로 지켜볼 수 있게 해준 점이 고마웠습니다.

역자 후기를 보니 아오야마 미치코의 작품 가운데 도서실에 있어요달이 뜨는 숲과 비슷한 정서를 품은 것으로 보이는데, 언젠가 장르물 편식이 참을 수 없이 지겨워지는 순간이 찾아오면 꼭 한 번 읽어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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