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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덤
요 네스뵈 지음, 김승욱 옮김 / 비채 / 2021년 10월
평점 :
로위와 칼 형제의 아버지 오프가르는 노르웨이 소도시 오스의 아라라트 산 정상부에 자리한 “작고 한심한 농장”을 킹덤, 즉 “우리 가족의 왕국”이라고 불렀습니다. 하지만 20년 전 형제의 부모가 끔찍한 자동차 추락사고로 숨진 이후 왕국과 그 일대는 피비린내로 진동했고, 이제 30대 중반이 된 로위와 칼에게 왕국은 잊힌 지 오래된 망령 혹은 추억일 뿐입니다.
작은 주유소를 경영하며 홀로 집을 지켜온 로위는 미국에서 학위를 딴 뒤 부동산 거부가 됐다는 동생 칼의 15년 만의 갑작스런 방문에 놀랍니다. 바베이도스 출신의 아내 섀넌을 동반한 칼은 산 정상부에 호텔을 지어 몰락중인 고향 오스를 살리겠다는 꿈같은 계획을 늘어놓습니다. 오스 전체가 들썩이는 가운데 로위는 복잡한 감정에 빠집니다. 황당무계한 호텔 건설계획은 의심스럽고, 동생의 아내 섀넌이 내뿜는 묘한 매력에 혼란스러워졌으며, 특히 늘 적대적이던 경찰 올센이 칼의 귀국을 기다렸다는 듯 과거 미제사건을 들쑤시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킹덤’은 ‘해리 홀레 시리즈’는 물론 요 네스뵈의 다른 어느 스탠드얼론과도 완전히 결이 다른 작품입니다. 살인과 폭력이 난무하고 경찰이 등장하긴 하지만 낯익은 스릴러 서사에서 많이 벗어난 독특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킹덤’은 10대 시절부터 살인에 관여했고, 부적절하거나 일그러진 사랑에만 전념했으며, 상식을 벗어난 지독한 형제애를 동생에게 투사해온 로위 오프가르라는 한 남자의 비극적인 성장 스토리이자 세상의 모든 악몽을 죄다 뒤집어쓴 한 가족의 파멸기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여전히 10대 때 겪은 끔찍한 악몽에 얽매여 있긴 해도 가까스로 소박한 삶을 유지해온 로위는 동생 칼의 귀국 이후 또다시 손에 피를 묻혀야만 하는 가혹한 운명과 함께 스스로도 통제할 수 없는 ‘부도덕한 사랑’에 휘말립니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인 동생이 15년 만에 귀국하며 갖고 온 두 개의 ‘폭탄’ - 무모한 호텔 건설계획과 치명적인 매력의 섀넌 – 은 로위를 완전히 박살내고도 남을 만한 파괴력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그 두 개의 ‘폭탄’은 로위 주변뿐 아니라 오스 곳곳에서 심각한 파문을 일으켰고 그로 인해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임계점을 넘어서버린 로위는 피비린내에서 벗어날 수 없는 자신의 운명을 뼈저리게 깨닫습니다.
“나는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절대적으로 확신했다. 마땅히 자기 것이어야 하는 것을 손에 넣는 일. 설사 그것이 아주 망가진 모습이라 해도. 그리고 그 일을 방해하는 자들과 내가 반드시 보호해야 하는 사람들을 위협하는 자들을 제거하는 것.” (p704)
로위-칼-섀넌의 이야기에 못잖게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건 소도시 오스의 다양한 군상들이 로위와 칼 부부 주변을 맴돌며 벌이는 위태롭고 도발적인 행각들입니다. 이 행각들의 밑바닥에 자리 잡은 건 탐욕, 욕망, 시기, 질투, 복수 등 하나같이 비뚤어지고 뿌리 깊은 감정들인데, 이야기의 긴장감을 더욱 팽팽하게 하는 것은 물론 로위의 상황을 한층 더 복잡하고 골치 아프게 만드는 적절한 양념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뉴욕타임스는 “‘킹덤’에 비하면 ‘해리 홀레 시리즈’는 차라리 희망과 위안을 주는 이야기였다.”라는 북 리뷰를 내놓았는데, 개인적으론 반은 맞고 반은 좀 애매한 평가라는 생각입니다. 훨씬 더 독하고 센 스릴러를 기대했지만 실은 가혹한 운명에 휩싸인 한 남자의 비극에 좀더 초점을 맞춘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면에서 요 네스뵈 특유의 스릴러 서사를 기대했던 독자라면 적잖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 다소 느슨하고 장황한 (‘한 남자의 우여곡절 연대기’로 보일 수도 있는) 곁가지 이야기들이 당혹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들은 로위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한 밑받침이자 궁극적으로는 로위-칼-섀넌의 비극을 더욱 강렬하게 만드는 주춧돌이라는 생각입니다. (가령 로위와 칼의 이름에 깃든 의미라든가 로위가 즐겨듣는 음악, 모든 사람들을 새에 빗댄 묘사, 늘 돌 무너지는 소리가 농장 인근의 협곡, 로위를 도발하는 주유소 10대 소녀 등 무수한 상징과 비유들이 그런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740여 페이지의 분량은 주제나 소재에 비해 살짝 과해 보였고, 요 네스뵈가 문학적 성취(?)라는 과욕을 부린 대목도 곳곳에서 눈에 띄었으며, 없어도 무방한 사소한 해프닝들이 종종 끼어든 것도 사실이긴 합니다. (별 0.5개가 빠진 유일한 이유입니다.) 그래선지 이 작품을 통해 요 네스뵈를 처음 만난 독자라면 자칫 “이런 스타일의 작가였나?”라고 오해할 수도 있겠다는 기우가 들었는데, 만일 그렇다면 요 네스뵈의 대표작들을 한 편이라도 꼭 만나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아마도 요 네스뵈의 다음 한국 출간작은 해리 홀레의 12번째 이야기 ‘Knife’가 될 것 같은데, 요 네스뵈의 개성 강하고 매력적인 새 스탠드얼론의 소식 역시 궁금한 터라 그 반가운 소식을 듣기까지 너무 오래 걸리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