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들의 침묵 (리커버 에디션)
토머스 해리스 지음, 공보경 옮김 / 나무의철학 / 2021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젊은 여성을 살해하고 살가죽을 벗기는 끔찍한 연쇄살인마 버팔로 빌이 날뛰는 가운데 FBI 연수생 클라리스 스탈링은 어느 날 갑자기 행동과학부장 잭 크로포드에게 호출을 받습니다. 크로포드의 지시는 겉으론 강력범죄 예방을 위한 범죄자 데이터 수집이었지만 실은 스탈링으로 하여금 주립 정신병원에 수감돼있는 식인 살인마 한니발 렉터와의 면담을 통해 연쇄살인마 버팔로 빌에 대한 정보를 얻어내는 것이었습니다. 공포와 긴장 속에 렉터와의 면담이 거듭되지만 스탈링이 얻은 건 그저 모호하고 선문답 같은 진술일 뿐 좀처럼 사건의 진상에 다가가지 못합니다. 그러던 중 상원의원의 딸이 버팔로 빌에게 납치되자 사태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합니다. 하지만 스탈링과 크로포드는 예상치 못한 암초를 만나면서 수사에서 배제되고 맙니다.

 

(1988)으로나 영화(1991)로나 30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양들의 침묵은 연쇄살인마를 다룬 스릴러로서 분명 기념비적인 이정표와도 같은 작품이지만, 어떤 매체로든 깊은 인상을 한번 받고 나면 다른 매체로는 같은 작품을 잘 들여다보지 않는 성격이라 최근까지 책으로는 양들의 침묵을 만날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는데, 그냥 아무 계기도 없이 문득한니발 렉터 이야기를 순서대로 읽어보고 싶다는 욕심이 들어서 얼마 전 책장 속에 한참을 갇혀있던 레드 드래건의 먼지를 털어줬고, 이제 한니발 렉터 시리즈의 정점인 양들의 침묵을 읽게 됐습니다.

 

고백하자면, 책을 읽는 내내 오래 전 분명히 봤다고 생각했던 영화의 내용이 거의 생각이 나지 않아 당황스러웠는데, 참혹하지만 묘하게 끌리던 포스터 사진과 두 주연배우(조디 포스터, 안소니 홉킨스)의 클로즈업 장면 외에는 아무런 기억이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영화가 그만큼 각색을 많이 했기 때문이든지 제 기억력의 문제든지 둘 중 하나겠지만, 아무튼 결론부터 말하면 책으로 읽은 양들의 침묵은 기대했던 것만큼 강렬한 인상을 주지는 못했습니다.

 

이야기는 크게 세 갈래로 전개됩니다. 하나는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버팔로 빌에 의한 끔찍한 연쇄살인이고, 또 하나는 FBI 연수생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크로포드에게 발탁된 스탈링이 전대미문의 식인 살인마 한니발 렉터와 면담하며 벌이는 긴장감 넘치는 심리전입니다. 마지막으로는 각종 차별과 위기를 견뎌내며 뛰어난 FBI 요원으로 성장하는 될성부른 떡잎스탈링의 성장기가 이야기의 밑바닥에 깔려있습니다.

 

젊은 여성을 살해하고 살가죽을 벗기는 버팔로 빌사건은 워낙 엽기적이라 호기심과 공포심을 함께 자아내지만, 전작인 레드 드래건에서도 그랬듯 범인의 욕망의 출발점 자체가 워낙 불가지한 심리적 문제이다 보니 오히려 사건이 거듭될수록 긴장감을 떨어뜨렸다는 생각입니다. (워낙 유명한 작품이라 책이든 영화든 안 본 사람도 다 아는 내용이지만) 그가 희생자의 살가죽을 벗긴 이유가 좀더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욕망에서 기인했다면 독자가 느끼는 공포심은 훨씬 더 배가됐을 것 같은데, 아무래도 작가의 고유한 성향 탓으로 보였습니다.

 

가장 흥미로웠던 건 역시 두 주인공 스탈링과 렉터의 맞대결입니다. 능력자이긴 해도 현장 경험이 전혀 없는 FBI 연수생 스탈링과 천재적인 정신과 전문의이자 사람의 마음을 멋대로 좌지우지하는 연쇄살인마 렉터의 대결은 처음부터 너무나도 완벽하게 기울어진 운동장처럼 보였지만, 면담이 거듭될수록 스탈링의 내공이 깊어지고 그걸 솔직하게 인정해주는 렉터의 태도가 엿보이면서 짜릿한 묘미까지 느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애초 버팔로 빌사건의 단서를 얻기 위해 시작된 면담이지만, 정작 눈길을 끈 건 정보를 얻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스탈링이 렉터에게 털어놓은 그녀의 내밀한 과거사들입니다. 특히 어릴 적 들었던 도살 직전의 양들의 울음소리는 스탈링에겐 아직도 현재진행형인 트라우마이자 악몽인데, 누구에게도 털어놓은 적 없는 그 이야기를 건네는 과정에서 스탈링은 고작연수생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희대의 식인 살인마 렉터 앞에서 점점 더 당당해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렉터는 그에 대한 보상으로 선문답 같긴 해도 나름의 단서를 슬쩍슬쩍 흘려주곤 합니다. 물론 이 대목들이 잔혹하고 스피디한 연쇄살인 스릴러를 다소 정적이고 느슨하게 만든 건 사실이지만, 두 캐릭터의 힘을 만끽하기에 더없이 매력적인 대목인 건 분명합니다.

 

약간 부차적이라고도 할 수 있고, 이야기의 저변에 깔려 있어서 눈에 잘 띄지 않았지만 스탈링이 버팔로 빌사건이나 렉터와의 면담을 통해 차근차근 성장해가는 모습도 무척 호감이 갔던 점입니다. 무엇보다 노골적인 성차별이 횡행하던 시대적 분위기에다 연수생이라는 신분의 핸디캡에도 불구하고, 자신만의 분노 조절법과 잭 크로포드에 대한 존경심을 의지 삼아 절대 좌절하거나 무너지지 않는 스탈링의 진심은 무척 진정성 있게 느껴졌습니다.

 

서평 초반에 기대에 못 미쳤음이라고 했는데, 스탈링과 렉터의 맞대결만 놓고 보면 별 5개도 모자란 작품이지만, 한껏 기대했던 버팔로 빌사건 자체가 약간은 용두사미처럼 마무리된 게 가장 큰 이유 같습니다. 이어서 한니발도 읽을 생각인데, ‘양들의 침묵으로부터 11년 후에 집필된 한니발에서 스탈링과 렉터가 어떤 모습으로 재회하게 될지 무척 궁금할 뿐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댓글저장
 
레드 드래건
토머스 해리스 지음 / 고려원(고려원미디어) / 1991년 8월
평점 :
절판


버밍햄과 애틀랜타에서 한 달 간격으로 두 가족이 몰살당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3년 전 희대의 사이코패스 한니발 렉터를 체포하는데 공을 세웠지만 지금은 은둔생활을 하고 있는 전직 FBI 아카데미 법정 진술교관 윌 그레이엄은 FBI 요원 잭 크로포드로부터 수사에 참여해줄 것을 요청받습니다. 렉터 체포 당시 치명적인 중상을 입었던 그레이엄은 고심 끝에 크로포드의 요청을 수락합니다. 범행현장과 증거들을 꼼꼼히 살피면서 새로운 단서들을 찾아내지만 그레이엄은 범인이 두 가족을 특정해서 살해한 이유를 알아낼 수 없어 답답할 뿐입니다. 막다른 벽에 막힌 그레이엄의 선택은 주립 정신병원에 갇혀있는 렉터에게서 조언을 구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선택은 예상치 못한 사태를 일으켰고 그레이엄은 큰 위험에 빠지고 맙니다.

 

토머스 해리스의 대표작인 양들의 침묵은 영화로도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보다 7년 먼저(1981) 출간된 레드 드래건은 상대적으로 유명세를 덜 탄 작품입니다. 한국에 처음 소개된 건 1991(고려원)인데, 그해 양들의 침묵이 영화로 대박이 난 덕분에 출간된 것으로 짐작이 됩니다. 이후 출판사(창해)와 번역자(이창식)가 모두 바뀌어 1999년과 2006년에 재출간되긴 했지만 역시 양들의 침묵의 후광에서 벗어나진 못했습니다.

읽기 전에는 이 작품이 양들의 침묵’ - ‘한니발’ - ‘한니발 라이징으로 이어지는 한니발 렉터 시리즈의 기점이라고 막연히 예상하고 있었는데, 다 읽고 보니 이 작품에서 한니발 렉터는 카메오 정도의 역할에 그치고 있었습니다. 물론 강렬한 인상과 함께 두 가족 몰살사건의 범인을 추격하는데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해준데다 주인공인 윌 그레이엄과의 악연도 중요한 모티브로 설정돼있어서 단순한 카메오 이상의 비중을 차지하고 있긴 합니다.

 

뛰어난 직관력과 함께 증거물을 정확히 볼 줄 아는 능력을 지닌 그레이엄은 꼼꼼한 현장 조사를 통해 기존 수사팀이 발견하지 못한 미량의 증거와 단서를 포착하는 성과를 올릴 정도로 탁월한 능력자지만, 과거에 겪은 두 개의 치명적인 사건 때문에 은퇴를 결심하고 은둔생활에 돌입한 인물입니다. 하나는 경찰 시절 범인을 사살한 이후 얻은 트라우마이고, 또 하나는 한니발 렉터를 체포하는 과정에서 생명이 위독할 정도로 중상을 입은 사건입니다. 그는 범인의 입장이 되어 침입경로, 살인의 방법과 순서, 시신을 훼손한 이유 등 범행의 디테일을 포착하지만 내내 공포와 두려움에 사로잡힌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동시에 렉터로부터 자신과 닮은꼴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냉정한 캐릭터의 소유자이기도 합니다.

 

그레이엄이 쫓는 범인의 정체는 초반부에 독자에게 공개됩니다. 또 두 가족을 희생자로 선택한 이유도 상세히 소개됩니다. 특히 한 부인의 시신을 훼손하고 모욕한 것으로도 모자라 여러 곳에 심하게 물어뜯은 자국을 남겨놓은 범인은 이빨 요정이란 별명까지 얻으면서 언론을 통해 공포의 대상으로 각인됩니다. 그리고 그가 붉은 용, 즉 레드 드래건이라는 별명을 얻기까지의 과정과 함께 사이코패스로 진화할 수밖에 없었던 어린 시절의 비참한 성장사가 그레이엄의 수사과정에 맞먹는 비중으로 그려집니다.

 

전체적으로는 기대했던 것에 비해 아쉬움이 많이 남는 작품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사건 위주의 스릴러라기보다 그레이엄과 범인의 심리묘사가 더 비중 있게 그려져서 속도감이나 긴장감이 다소 떨어졌고, 그레이엄이 범인을 특정하는 과정은 자체 스포일러 때문에 큰 힘을 얻지 못했으며 특별히 반전이라고 할 만한 것도 없어서 그리 매력적이지 않았습니다.

또 범인이 스스로를 성경에 등장하는 거대한 붉은 용과 동일시하면서 악마적 캐릭터를 강조하는 대목은 페이지를 넘길수록 현실감이 사라져서 막판에는 심령 호러물 같은 이질감만 남고 말았습니다. 망상과 집념에 빠져 엽기적인 살인을 저지르는 사이코패스나 소시오패스 이야기를 꽤 많이 읽었지만 이 작품의 범인은 인공미가 너무 강하게 설정됐다고 할까요? 물론 클라이맥스에서의 범인의 돌출행동은 확실히 눈길을 끌었지만 전체적으론 카메오로만 등장한 한니발 렉터에 비해 한참 격이 떨어지는 살인마라는 매정한 평가를 내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내친 김에 양들의 침묵한니발까지 이어서 읽을 생각인데 레드 드래건의 아쉬움을 어느 정도는 보상받을 수 있으리라 기대해봅니다. 시리즈 마지막 편이자 프리퀄인 한니발 라이징은 그다지 좋은 평을 발견하지 못해서 구매 자체를 주저하고 있는데, ‘양들의 침묵한니발을 만족스럽게 읽는다면 밑져야 본전이란 심정으로라도 찾아 읽게 될 것 같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댓글저장
 
상속 게임
제니퍼 린 반스 지음, 공민희 옮김 / 빚은책들 / 2021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부모를 잃고 이복언니 리비와 어렵게 살던 고등학생 에이버리 그램스에게 어느 날 꿈같은 일이 벌어집니다. 일면식도 없던 토비아스 호손이란 남자가 그녀에게 무려 462억 달러의 유산을 남긴 것입니다. 호손에겐 두 딸과 네 명의 손자가 있었지만 그들의 몫은 고작 수십만 달러에 불과했고 그로 인해 대저택 호손 하우스에는 엄청난 충격이 몰아칩니다. 에이버리에게 요구된 상속 조건은 단 하나, 1년 동안 호손 하우스에서 살아야 된다는 것뿐입니다. 호손 집안사람들의 증오와 원망의 눈길 속에 기뻐하기는커녕 패닉에 빠진 채 저택에 머물게 된 에이버리는 왜 자신이 상속녀가 된 것인지 알아내기로 결심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 호손의 네 명의 손자가 끼어듭니다. 수수께끼와 퍼즐을 좋아하던 호손은 저택 곳곳에 은밀한 단서를 숨겨놓았고 에이버리는 네 형제와 묘한 관계를 유지하며 그 단서들을 찾는데 주력합니다.

 

난데없는 수백억 달러의 유산, 꽃미남 4형제와의 1년간의 기묘한 동거, 그리고 가족들을 제치고 상속녀가 된 이유를 찾는 미스터리라는 설정만 보면 달달한 로맨스와 가벼운 미스터리의 조합 정도로 예상하기 쉽지만 상속 게임달콤한 게임이라는 뒤표지 카피가 무색할 정도로 꽤나 무겁고 긴장감 넘치는 이야기가 담겨있습니다.

상속예정자에서 빈털터리로 전락한 호손의 두 딸과 네 손자들에겐 유산을 강탈해간 에이버리가 증오의 대상일 수밖에 없거니와 1년 동안 함께 살아야한다는 것 역시 고문에 가까운 일입니다. 에이버리 역시 누군가 상속을 무산시키기 위해 자신을 살해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함께 거대한 저택의 압도적인 분위기에 짓눌린 채 상속녀로서의 첫발을 떼게 됩니다.

 

하지만 호손 가의 네 형제 중 세 명이 10대이며 에이버리 역시 고등학생이란 설정 때문에 이야기의 무게감은 다소 덜어지기도 합니다. 물론 양쪽 모두 10대 치곤 말투와 생각과 행동에서 노련미와 술수가 넘치기 때문에 읽다 보면 “10대 맞아?”라는 생각이 자주 들기도 하는데, 아무래도 거대한 유산을 놓고 전쟁이나 다름없는 게임을 벌이는 당사자들이다 보니 24시간 내내 초긴장상태에서 경계심을 늦출 수 없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또 네 남자와 한 여자라는 구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에이버리가 누구와 먼저 친해질까? 누가 질투심에 빠질까? 로맨스가 게임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라는 호기심이 일게 되는데, 각각 박애주의자, 냉혹한 현실주의자, 로맨티스트, 엉뚱발랄 고교생이라는 독특한 캐릭터들을 지니고 있어서 쉽게 로맨스의 향방을 점치기는 어렵습니다. (더 흥미로운 건 네 형제의 아버지가 다 다르다는 점입니다.)

 

이야기의 가장 큰 줄기는 왜 에이버리가 상속녀가 된 것인가?”라는 미스터리를 풀기 위해 에이버리와 네 형제가 저택 여기저기에 호손이 숨겨놓은 단서들을 찾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단서 찾기에 임하는 각자의 속내는 모두 제각각입니다. 에이버리의 목적은 자신이 상속녀가 된 이유를 찾는 것뿐이지만 형제들 중엔 그 단서들이 에이버리의 상속을 무산시킬 수 있다는 기대감을 가진 경우도 있고, 유산 따위엔 아예 관심 없거나 혹은 에이버리에게 감정적으로 쏠리거나 아예 에이버리를 게임의 당사자가 아니라 단서 찾기의 도구로 비하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당연히 여러 갈래의 갈등과 충돌이 벌어질 수밖에 없는데, 단서를 찾는 중에 에이버리가 치명적인 사고를 당하면서 갈등과 충돌은 최고조에 달합니다.

 

여러 가지 흥미요소를 골고루 갖춘 엔터테인먼트 스릴러지만 개인적으론 아쉬운 대목들이 몇몇 있었는데 그중 가장 큰 것은 내용보다도 편집과 번역에 관한 것입니다. 원작 자체가 그리 어렵고 난해한 문장들을 필요로 하지 않는 작품인데 가끔 두어 번 되읽어도 그 뜻을 알기 쉽지 않은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특히 과거 호손 집안과 관련 있던 한 소녀의 죽음의 진실이 풀리는 클라이맥스에서 이런 난감한 상황을 마주했던 건 조금은 불쾌하기도 했습니다. 분명 오역이나 비문은 아니지만 좀더 이해하기 쉬운 번역이 아쉬웠고, 자주는 아니더라도 간혹 눈에 띈 오타도 거슬렸던 부분들입니다. 더불어 (원작 탓이겠지만) 너무 잦았던 이탤릭체 표기와 헷갈릴 정도로 인색했던 줄바꿈 역시 꼭 지적하고 싶은 점들입니다.

 

상속 게임은 미국에서 3부작으로 발표됐다고 합니다. 이 작품의 엔딩에서 에이버리가 상속녀가 된 사연이 밝혀지긴 하지만, 작가는 에이버리와 네 형제에게 새 미션을 부여하면서 다음 이야기를 위한 떡밥을 투척한 채 이야기를 마무리합니다. 조만간 드라마로 제작돼 아마존 프라임 비디오를 통해 공개된다는데, 아마도 캐릭터는 물론 공간미를 만끽할 수 있는 작품이 될 것 같습니다. 수수께끼와 퍼즐을 좋아하던 호손이 완성한 대저택은 오랜 세월동안 증축과 수리를 통해 미로 같은 구조와 무수한 비밀통로를 갖게 됐는데, 주인공들의 단서 찾기를 흥미진진하게 만드는 1등 공신이 바로 이 복잡미묘하고 위험천만한 공간이기 때문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댓글저장
 
일몰의 저편 이판사판
기리노 나쓰오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21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작가 마쓰 유메이는 어느 날 총무성 문화국 문화예술윤리향상위원회라는 수상쩍은 곳으로부터 소환장을 받은 뒤 과거 요양소로 쓰였던 외딴 건물에 감금됩니다. 위원회는 마쓰 유메이는 강간이나 폭력, 범죄를 긍정하는 것처럼 쓰고 있다.”는 독자들의 고발에 근거하여 그녀를 소환했다면서, “자기 작품의 문제점을 확실히 직시해서 인식하고, 훈련을 통해 교정된다면 귀가할 수 있다.”라고 통보합니다. 즉 갱생을 통해 아름답고 착한 이야기만을 쓸 마음의 준비가 된다면 풀어주겠다는 뜻입니다. 말도 안 되는 위원회의 만행에 마쓰는 격렬히 저항하지만 그녀에게 돌아오는 것은 감점과 함께 무한정 늘어나는 감금 기간 통보뿐입니다.

 

마쓰가 감금된 요양소는 말하자면 범죄와 폭력 또는 변태적 성()을 다루거나 차별 조장, 윤리성 결여, 국가에 대한 반역, 반사회적 사상을 구사하는 모든 창작자들을 섬멸하는 곳입니다. 마쓰의 구체적인 혐의는 그녀가 쓴 소설들이 강간, 폭력, 페도필리아(아동성애증), 관음증, 페티시를 장려하듯 그렸다는 점입니다. 수용된 다른 작가들 역시 세상에 악영향을 미치거나 불안하게 만드는 창작물을 만든 혐의로 감금돼있습니다.

배경이 현대 일본이란 점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전체주의 국가에서나 벌어질 수 있는 가상현실과도 같은 설정 때문에 초반부터 놀라움과 호기심을 발동시키는 작품입니다. 더구나 다른 작가도 아니고 기리노 나쓰오의 작품이니 해피엔딩 같은 건 기대하기 어렵겠다는 이른 예감에 마쓰의 처지와 미래는 그저 암울하게만 보일 뿐입니다. 기리노 나쓰오의 대표작인 그로테스크아웃은 말할 것도 없고 탐정이 주인공인 무라노 미로 시리즈조차 무겁고 암담한 여운을 남겼던 걸 떠올리면 이런 극적인 설정 속에서 마쓰가 다시 자신의 삶으로 돌아가 환하게 웃을 일은 절대 없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다만, 이 이야기의 진짜 결말은 마지막 페이지에 이르러서야 밝혀지기 때문에 함부로 예단해선 안 되는 것 역시 사실입니다.

 

주인공 마쓰는 성()과 폭력을 그린 죄로 감금됐지만, 읽다 보면 왠지 기리노 나쓰오 자신을 투영한 듯한 인상을 자주 받게 되는데, 만일 작가를 갱생시키고 교정하는 위원회란 곳이 실재한다면 아마도 일본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들 우선 소환대상에 기리노 나쓰오가 포함될 게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내놓는 작품마다 중독성 강한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를 발산했다는 뜼인데, 아마도 그녀에겐 세상을 어둡고 부정적으로 보게 만드는 불온한 시선을 전파한다!”라는 혐의를 씌울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역자 후기편집자 후기를 보면 기리노 나쓰오가 이 작품을 쓰게 된 일본의 사회적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는데, 두 후기 모두 두 가지 사실 군국주의 시대로 회귀하는 듯한 일본의 각종 악법과 인터넷의 익명성에 숨어 창작물에 대해 억지에 가까운 비난을 쏟아내는 대중들 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일본의 사회적, 문화적 분위기가 어떤지 잘 알지는 못해도 다소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어쩌면 기리노 나쓰오 본인의 경향이 워낙 반사회적이라 다른 작가들에 비해 더 예민하게 받아들인 결과일 수도 있고, 또 어쩌면 일본의 창작자들 사이에 알게 모르게 이런 인식이 확산돼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최근 읽은 아야츠지 유키토의 살인귀가 문득 떠올랐는데, 90년대 초 연쇄살인범의 집에서 발견된 다수의 호러물로 인해 언론을 통한 대대적인 호러 사냥이 자행됐고, 그에 격분한 아야츠지 유키토가 반발심에 연재한 작품이 극도의 연쇄살인 호러물 살인귀이기 때문입니다. 또 한국에서 필화사건으로 작가가 구속되기까지 했던 즐거운 사라논란도 생각났는데, 아마도 일몰의 저편속 위원회에겐 아야츠지 유키토나 마광수 교수는 주인공 마쓰보다도 훨씬 더 시급하게 섬멸해야 할 창작자로 여겨질 게 분명해 보입니다.

 

공포정치 시대를 저절로 떠오르게 하는 오싹한 상상이지만 현실의 독자 중엔 이 작품 속 위원회의 결정과 행동에 공감하는 경우도 꽤 있을지도 모릅니다. 창작과 표현의 자유가 사회를 불안하게 만들고 사람들의 정서를 오염시킨다는 확신을 가진 도덕적인 독자도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기리노 나쓰오는 해답 없는 이 논쟁을 촉발시키기 위해 가상현실 같지만 결코 비현실적이진 않은 일몰의 저편을 집필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댓글저장
 
살인귀 2 - 역습편
아야츠지 유키토 지음, 김진환 옮김 / 홍익출판미디어그룹 / 2021년 7월
평점 :
절판


살인귀 1’(각성편)이 희생자들의 몸이 끔찍하게 훼손된 채 발견된 후타바산(双葉山)을 무대로 정체불명의 살인귀가 벌이는 엽기적인 행각을 그렸다면, 후속편인 살인귀 2’(역습편)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도시로 내려온 살인귀가 전편보다 훨씬 더 참혹한 방식으로 연쇄살인을 저지르는 이야기를 그립니다. 그리고 살인귀의 습격으로 식물인간이 된 아빠를 둔 15살 아이카와 9살 마미야 남매가 살인귀와 맞닥뜨리는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1편에서의 살인귀의 행각은 19금이 아니라 거의 39금에 가까운 수위였지만, ‘역습편의 경우 인용조차 하기 어려울 정도로 참혹하게 인체를 훼손하는 장면들이 연이어 튀어나와서 1편은 오히려 애교 수준으로 보일 정도였습니다. 1편이 과연 이토록 끔찍하게 연쇄살인을 저지르는 살인귀의 정체는 무엇인가, 주인공은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 등에 초점이 맞춰져서 호러 미스터리의 성격이 강했다면, ‘역습편은 초자연적인 능력과 현상을 앞세워 단순한 슬래셔 호러 이상의 심령물의 인상까지 풍겼습니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서 초자연적인 능력과 현상에 대해서는 언급하기 어렵지만, 그런 탓에 이 작품의 내용을 설명하는 것 자체가 곤란해진 것도 사실이긴 합니다. 짧고 애매한 인상비평이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 워낙 살인 장면 묘사가 높은 수위라 직접 읽어보세요.”라는 말도 쉽게 꺼내기가 난감합니다.

 

작가 스스로 단순히 살인귀가 마구 날뛰며 사람들을 죽이고 다니는 내용이라면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이 작품에도 스토리에 약간의 복선이 포함되어 있다.”라고 밝혔고, 해설 역시 슬래셔 호러로 규정했다간 큰코다친다. 호러와 미스터리가 훌륭히 융합된 작품이기 때문이다.”라고 칭찬했지만, 개인적으론 1편에선 이런 미덕들을 어느 정도 발견할 수 있었던 반면 역습편은 말 그대로 엽기적인 살육극 외에 딱히 추켜세울 만한 점이 없었다는 생각입니다.

작가가 내세운 약간의 복선은 반전의 감흥을 전혀 끌어내지 못한 채 억지스럽게 보였고, 이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인 초자연적인 능력과 현상은 어떻게 해도 이입하기가 어려워서 속편을 위한 속편이란 반발심이 수시로 일어났습니다. 이른바 호러 영화의 속편들이 맞이했던 비참한(?) 운명과 별 다를 바 없다고 할까요? ‘어나더’, ‘프릭스’, ‘안구기담등 아야츠지 유키토의 호러물을 재미있게 읽은 기억을 갖고 있지만, 이 작품에서 그려진 슬래셔+초자연 호러는 억지를 덮기 위해 더 큰 억지를 부리는 듯한 인상만 받았습니다. 또 잔혹한 살인 장면들의 반복은 초반 한두 사건을 제외하곤 (갈수록 더 엽기성이 심해지는데도 불구하고) 지루하게 느껴질 뿐이었습니다.

 

아야츠지 유키토가 살인귀를 집필하게 된 사회적 배경 90년대 초 연쇄살인범의 집에서 다수의 호러물이 발견되면서 언론에 의해 마녀사냥 당하듯 호러물이 비난받았던 일 자체는 무척 흥미로웠고, 1편은 그 대의에 어느 정도 동감할 수 있게끔 잘 짜인 호러 미스터리를 선보였지만, ‘역습편, 좀 심하게 말하면, 안 나오는 게 더 나았을 거란 게 솔직한 제 한 줄 평가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댓글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