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상처 스토리콜렉터 13
넬레 노이하우스 지음, 김진아 옮김 / 북로드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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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대 후반에서 90대 초반에 이르는 고령층이 연이어 잔혹한 처형 방식에 의해 살해됩니다. 부와 명예를 거머쥔 유대인, 고급 요양시설에 머물던 노파, 지하실에 나치의 기념물을 소장한 노인 등 희생자들 간에 공통점을 찾기가 어려워 수사에 난항을 겪던 피아와 보덴슈타인은 현장에 남겨진 ‘16145’라는 숫자의 의미도 알 수 없어 곤혹스러울 따름입니다. 그러던 중 프랑크푸르트의 최고 부유층이자 사회 기여도가 높아 존경을 받는 86세의 여인 베라 칼텐제가 희생자들과 밀접한 관계라는 점이 드러나면서 수사에 진척을 보입니다. 그런 와중에 칼텐제 집안과 연관된 한 남자와 그 내연녀가 살해되고 칼텐제의 장남 엘라르트가 용의자로 떠오르면서 사건은 전혀 다른 국면을 맞이합니다.

 

깊은 상처’(Tiefe Wunden)라는 제목에 걸맞게 무려 60여년에 걸친 증오와 복수, 위선과 위장을 다룬 작품입니다. 2차 대전 막바지, 나치의 추락과 러시아의 진격으로 대혼란에 빠진 동프로이센에서 벌어진 비극적인 사건 이후 60여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가해자는 철저하게 자신의 죄를 은닉한 채 거짓된 모습으로 세상을 평온하게 살아온 반면, 피해자는 그 누구에게도 자신의 상처를 드러내지 않으며 악몽과도 같은 과거를 잊기 위해 발버둥 쳐왔습니다. 하지만 우연과 필연이 엇갈린 운명 같은 만남들이 이뤄지고, 60여 년 전의 진실과 조우한 그 누군가가 깊은 상처를 되갚아 줄 기회를 맞이하면서 새로운 살육이 시작됩니다.

 

홀로코스트와 나치라는 묵직한 역사적 코드들이 동원됐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견지한 다큐 스타일의 소설은 아닙니다. 오히려 철저하게 자신의 욕망에 충실했던 개인들의 비극에 초점이 맞춰진 덕분에 역사적 코드들의 부담감을 전혀 느낄 수 없습니다.

물론 오랜 과거와 현재가 한데 얽힌 사건의 특성 상 피아와 보덴슈타인의 수사는 꽤 애를 먹습니다. 범행 동기나 피해자들의 공통점 등 사건 자체도 모호하지만, 피해자들과 접점이 있는 베라 칼텐제와 그녀의 가족들에게서 풍기는 위험한 분위기 역시 피아와 보덴슈타인을 계속 난감하게 만드는 요인입니다. 수사를 진행할수록 베라 칼텐제와 그녀의 가족들이 사건의 열쇠라는 직감이 강해지지만 그것을 입증할 수 있는 단서와 물증은 전혀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칼텐제 집안 주위를 맴도는 다분히 의심스러운 인물들 해고된 베라의 전 비서, 칼텐제 가족들에게 돈을 뜯어내는 남자, 칼텐제 저택을 수리하다가 소송전을 벌인 건축가 등 까지 가세한데다, 그들 중 일부가 범죄 피해자가 되자 수사는 말 그대로 오리무중에 빠집니다.

 

사건 못잖게 흥미를 끄는 대목은 호프하임 경찰서에 새로 부임한 수사과장 니콜라 엥겔의 존재입니다. 과거 보덴슈타인과 인연과 악연을 거듭했던 그녀의 등장은 피아와 보덴슈타인이 속한 강력11팀을 초긴장상태로 몰아갑니다. 특히 보덴슈타인을 향한 악의를 숨기지 않는 그녀의 언행은 피아에게는 궁금증을, 보덴슈타인에게는 참을 수 없는 격분을 일으킵니다. 이들의 관계는 이후 작품에서도 계속 팽팽한 긴장감을 일으키곤 하는데, 오랜만에 그들의 첫 만남을 다시 읽어 보니 예상외의 흥미진진함과 함께 이후의 전개에 대한 기대감도 맛볼 수 있었습니다.

 

타우누스 시리즈 다시 읽기를 통해 새삼 느낀 점이지만, 넬레 노이하우스는 일단 출전선수를 엄청나게 많이 등장시키고, 그만큼 어지러울 정도로 복잡한 관계를 설정하는데서 쾌감을 느끼는 게 분명해 보입니다. 특히 깊은 상처60여년의 간극을 두고 과거와 현재에 적잖은 인물들이 등장해서 100페이지도 채 되기 전에 인물관계도를 그리면서 읽어야 되는 거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그러다보니 이야기가 제자리를 맴돌거나 출구 없는 미로처럼 느껴지곤 했는데, 물론 복잡하고 어지러운 것들은 페이지를 넘길수록 조금씩 선명해지고 마지막엔 깔끔하게 정리되긴 하지만, 스타일이 안 맞는 독자라면 다소 두통을 겪거나 적응을 포기하게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깊은 상처의 뒤를 잇는 작품은 타우누스 시리즈가운데 한국에 처음으로 소개된 백설공주에게 죽음을입니다. 시리즈 네 번째 작품이지만 대중성이나 완성도 면에서 가장 두각을 나타낸 작품이라 가장 먼저 소개된 것 같은데, 개인적으로도 타우누스 시리즈에 홀딱 빠진 계기가 된 작품이라 거의 10년 만의 다시 읽기가 신간보다 더 기대되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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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인이 기도할 때
고바야시 유카 지음, 민경욱 옮김 / ㈜소미미디어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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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량배 류지 일당에게 지독한 학교폭력과 갈취에 시달리던 고교 1년생 도키타는 끝내 류지를 죽이고 스스로 목숨을 끊을 결심을 합니다. 그런 도키타 앞에 피에로 분장을 한 기이한 인물 페니가 나타납니다. 그는 도키타의 사연을 듣곤 자신이 류지를 죽여주겠다고 제안합니다. 대신 도키타에게 살인계획을 세우라는 지시를 내립니다. 일면식도 없으면서 대리 살인자가 돼주겠다는 페니로 인해 도키타는 알 수 없는 안도감과 함께 불안한 의문에 휩싸입니다.

한편, 3년 전 학교폭력에 시달리던 아들 시게아키가 자살한 뒤 그 충격으로 아내마저 자살한 가자미 가이스케는 뒤늦게 시게아키를 죽음으로 내몬 범인들을 알아내곤 자신만의 복수를 계획합니다. 경찰도, 학교도 외면한 진실은 너무나도 가혹했고,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복수 후 아들과 아내의 곁으로 가는 것뿐이었습니다.

 

피해자 또는 유족이 직접 가해자를 처벌할 수 있는 복수법이 제정된 사회를 그린 저지먼트를 통해 처음 만났던 고바야시 유카의 신작입니다. 복수라는 주제를 일관되게 그리고 있지만 이번에는 학교폭력과 그로 인해 산산조각 난 가족의 비극을 전면에 내세웠습니다.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화자는 학교폭력의 직접 피해자인 고교 1년생 도키타, 그리고 아들과 아내를 학교폭력으로 인해 잃은 45살의 가장 가자미입니다. 도키타가 정체불명의 피에로 페니와 함께 살인계획을 준비하는 이야기가 한 축이고, 아들을 죽음으로 내몬 범인의 정체와 증거를 집요하게 캐는 가자미의 이야기가 나머지 한 축입니다.

 

굳이 분류한다면 죄인이 기도할 때는 르포르타주 미스터리로 볼 수 있는 작품입니다. 소소한 반전이 쉴 새 없이 거듭되고, 도키타를 돕는 피에로 페니의 정체가 독자의 궁금증을 고조시키긴 하지만 대체로 정공법에 가까운 기록물의 인상이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 작가는 학교폭력의 잔혹성과 나만 아니면 돼.”라는 주위의 무관심, 그리고 소극적이거나 책임을 방기하는 경찰과 학교의 태도를 꽤 직설적으로 고발합니다. 그리고 전작인 저지먼트와 마찬가지로 복수는 과연 피해자와 유족을 치유할 수 있는가?”라는 해답 없는 묵직한 질문을 던집니다. 복수를 실행한 건 누구?’라는 미스터리보다는 두 주인공 도키타와 가자미의 고통스러운 심정을 더 두드러지게 묘사한 것 역시 르포르타주라는 인상을 더 강하게 만든 요인입니다.

 

이런 설정들 때문에 독자는 극적인 재미나 팽팽한 긴장감을 맛보기보다는 무겁고 어두운 심정 혹은 출구 없는 분노에 휩싸인 채 페이지를 넘길 수밖에 없게 되는데, “(피해자가) 고통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서는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상대처럼 범죄를 저지를 수밖에 없다는 선택을 강요받게 되는 것이다. 죄를 저지른 사람은 웃고 피해자는 평생 참고 숨어 사는 사회가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다.”는 출판사의 소개글은 읽는 내내 독자가 느끼게 되는 복잡한 감정을 잘 압축해놓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전작인 저지먼트의 서평에서 주제의식과 감정을 과하게 강요한 아쉬움을 언급한 적 있는데, ‘죄인이 기도할 때역시 다소 그런 점이 없지 않아 있긴 하지만, 장편이라 그런지(‘저지먼트는 연작단편집) 스토리텔링에 좀더 공을 들인 점이 확실히 눈에 띄었고 이야기의 확장성도 훨씬 매력적으로 느껴졌습니다. 복수가 합법화된 가상 사회를 배경으로 한 저지먼트와 달리 명백히 현실적인 학교폭력을 소재로 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캐릭터나 사건 모두 독자의 공감을 이끌어낼 만큼 생생하고 디테일하게 그려졌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고바야시 유카가 이후로도 계속 복수라는 주제에 천착할지는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소재 중 하나가 사적 복수라는 점을 감안하면 그의 신작에 계속 관심을 갖게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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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커 플레이어 그녀
브누아 필리퐁 지음, 장소미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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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성과 선정성의 적절한 조합, 엄청난 속도감, 개성 강하고 매력적인 캐릭터들, 그리고 프랑스 특유의 절묘하게 비틀린 문장과 블랙 유머 등 온갖 재미 요소들이 골고루 잘 배합된 작품입니다. ‘포커 판을 무대로 한 스릴러라는 설정이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들 수도 있지만, 이제껏 본 적 없는 독특한 세 주인공이 총과 폭력과 기막힌 카드 속임수를 앞세워 악당들을 제압하거나 가차 없이 복수하는 장면들은 프랑스 작품 맞아?”라는 의문이 들 정도로 오락성과 재미와 긴장감을 동시에 선사합니다.

 

하지만 작가는 세 주인공에게 각각 끔찍하거나 비극적인 과거사와 트라우마를 부여함으로써 화려하고 통쾌한 액션 스릴러에 적절한 균형추를 매달아놓습니다. 30대 초반인 주인공 막신은 권위적이고 탐욕스런 아버지로 인해 10대 시절 평생 지워지지 않을 상처를 입었고, 그 트라우마는 고통스런 자해 없이는 견딜 수 없을 만큼 그녀의 심신을 망쳐놓았습니다. 아버지에게서 도망친 이후 16년 동안 막신은 복수를 위해 자신이 연마해야 할 모든 것들을 철저히 몸과 마음에 익혔고, 이제 인생을 건 복수를 도와줄 협력자를 찾아 나섭니다.

 

막신이 선택한 협력자는 작크.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잃은 뒤 아버지의 혹독한 훈련에 의해 포커의 고수가 된 그는 기술적으로 뛰어난 속임수 솜씨를 갖고 있지만 상대를 스스로 무너지게 만드는 심리적 속임수에 더 능합니다. 거하게 한 판을 치르고 나면 그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여자를 찾곤 하지만 그는 절대로 돈을 주고 여자를 사지 않습니다. 클럽이나 길거리에서 자신과 뜻이 맞는(?) 여자와 합의 하에 관계를 맺습니다. 그 관계엔 감정 따윈 끼어들 틈이 없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가혹한 훈련으로 인해 감정 자체를 거세당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가 평생 처음으로 불꽃 튀는 감정의 폭발을 경험하게 된 상대가 바로 막신입니다.

세 번째 주인공인 발루는 작크와 콤비로 포커 판을 누비는 거구의 흑인입니다. 어려서 교통사고로 가족을 잃은 뒤 수시로 자살충동에 시달리지만 작크와의 만남 이후 포커를 통해 그 충동을 억누를 수 있게 됩니다. 포커 외에 그에게 정신적 안정을 제공하는 것은 이른바 원정 처벌, 일부러 늦은 밤 유흥가를 찾아가선 여자에게 성폭력을 가하는 남자들을 무자비하게 제압하는 일입니다. 그만의 독특한 정의 구현 방식이라고 할까요?

 

이야기의 골자는 포커 판을 전전하며 젊음을 탕진하던 작크가 막신의 복수극에 끼어든 뒤 롤러코스터 같은 소용돌이에 휘말린다.”는 것입니다. 단순한 액션 스릴러 설정이지만, 세 주인공의 트라우마와 심리묘사가 절묘하게 곁들여지면서 이야기는 역동성과 묵직함을 오가는 흥미로운 양상을 띱니다. 무의미한 성욕 발산 외엔 어디에서도 만족감을 느끼지 못하는 포커의 고수작크, 자살충동과 원정처벌이라는 극단적인 심리적 동요를 겪는 발루, 그리고 악몽을 잊기 위해 끊임없이 자해를 저지르면서도 복수의 의지를 굽히지 않는 막신은 작가의 리얼하고 디테일한 심리묘사를 통해 생생하고 뜨거운 캐릭터로 발전합니다. ‘포커 플레이어 그녀가 언뜻 가벼워 보이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오락물의 미덕을 갖춘 건 바로 이런 점 때문입니다.

 

복수극 못잖게 눈길을 끈 건 무례한 마초들을 향한 사이다 같은 응징인데, 포커 판 자체가 남자들의 세계이자 술집이나 지하실 등 음습한 공간에서 벌어지다 보니 그곳에 홀연히 나타난 막신의 존재는 호기심 이상의 관심을 자아낼 수밖에 없습니다. 문제는, 자신의 주머니를 탈탈 털어가는 그녀의 환상적인 기술에 대해 존경심과 부끄러움을 갖는 대신 마초들 대부분 예외 없이야비하고 음란한 공격을 가한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16년 동안 복수를 위한 모든 기술을 연마한 막신에게 그따위 무례한 수컷들은 한 주먹거리도 되지 않습니다. 막신과 원 팀이 된 작크와 발루 역시 사이다 같은 응징에 기꺼이 참여하여 쾌감을 더욱 고조시킵니다.

 

작가의 전작인 루거 총을 든 할머니를 읽지 않은 건 (미스 마플이나 폴리팩스 부인과 마찬가지로) ‘할머니 주인공이 취향에 잘 안 맞기도 했고, 표지 역시 조금은 비호감에 가까운 선입견을 갖게 했기 때문인데, ‘포커 플레이어 그녀의 마지막 장을 덮자마자 바로 찾아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작가 브누아 필리퐁에 대한 관심이 커졌습니다. 매력덩어리 캐릭터들과 오락 이상의 재미와 통렬한 카타르시스를 겸비한 그의 신작 소식은 언제라도 환영하게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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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리 스티븐 킹 걸작선 1
스티븐 킹 지음, 한기찬 옮김 / 황금가지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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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살 캐리 화이트는 학교 샤워실에서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뒤늦은 초경을 겪습니다. 벌거벗은 채 자신의 다리 사이로 흘러내리는 피의 의미조차 알 수 없어 충격에 빠진 캐리를 향해 친구들은 생리대와 탐폰을 던지며 야비하고 잔인한 공격을 퍼붓습니다. 그리고 그 일로 인해 3살 이후 잠복해있던 캐리의 염력이 발현됩니다. 광기에 가까운 기독교 원리주의자로서 딸의 모든 것을 통제해온 어머니 마거릿은 여자가 된 캐리가 육체에 관심을 갖지 못하도록 더욱 거세게 몰아붙이고 이 역시 캐리의 가공할 염력을 일깨우는 촉매제가 됩니다. 그리고 그 염력은 졸업예정자들의 꿈의 무대인 무도회에서 피비린내 진동하는 대참극을 일으킵니다.

 

이 작품 전까지 읽은 스티븐 킹의 작품은 모두 14편입니다. 그가 발표한 소설과 중단편집이 모두 74편이니 겨우 1/5 정도 읽은 셈이지만, 어쨌든 나름 스티븐 킹을 꽤 좋아한다고 자부할 정도는 되는 실적입니다. 하지만 그의 공식적인 첫 작품 캐리를 읽지 못한 탓에 늘 숙제 하나를 빼먹은 듯한 아쉬움을 느껴왔는데, 드디어 그 숙제를 마무리하게 됐습니다.

 

영화로도 만들어진 캐리는 스티븐 킹의 첫 공식작품인데도 불구하고 호러 킹으로서의 그의 매력과 미덕이 고스란히 배어있는 문제작입니다. 호러 코드는 염력’, 즉 정신력으로 물체를 이동하거나 물체의 상태를 변화시키는 능력인데, 유전되긴 했어도 잠재적 능력에 불과했던 캐리의 염력을 세상 밖으로 끌어낸 것은 극도의 스트레스와 분노입니다. 염력 유전자는 캐리의 인생에서 모두 세 번에 걸쳐 폭발합니다. 이웃집과의 갈등이 극단에 이르렀던 3살 때 우박과 돌덩이를 불러들였고, 16살에 겪은 끔찍한 초경과 그것이 초래한 주위의 잔인한 공격은 잠복해있던 염력을 부활시켰으며, 잠시나마 세상과 화해하려던 순간 마지막 폭발을 일으킵니다.

 

이야기는 독특한 방식으로 전개됩니다. 500명 가까운 사상자가 발생한 19795월을 전후로 한 이야기가 메인으로 전개되는 가운데, 사건 발생 1~2년 후 캐리의 염력에 대한 학자들의 논쟁과 대참사에서 살아남은 자들의 인터뷰 등 참고자료들이 간간이 끼어드는 형식입니다.

재미있는 건 극과 극을 달리는 학자들의 논쟁입니다. 누군가는 학문적 관점에서 염력의 유전을 연구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누군가는 2의 캐리는 시간문제라며 조기 유전자 검사를 통해 위험한 아이들을 완전히 격리시켜야 된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두 주장 모두 염력이란 실제 존재하는 힘이며 특히 유전되는 현상임을 전제로 깔고 있습니다. 이런 설정은 캐리의 염력과 그것이 일으킨 대참사를 명백한 현실의 사건으로 포장함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픽션이란 점을 잊게 만듭니다. 더불어, ‘또 한 명의 캐리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에필로그는 책을 덮는 순간까지 서늘함을 고스란히 간직하게 만듭니다.

 

읽는 내내 마치 직접 눈으로 보듯 사방에 난무하는 피의 향연을 느낄 수 있는데, 캐리의 염력의 부활을 알린 생리혈, 온갖 상처에서 흘러나오는 피, 대참사의 도화선이 된 엄청난 양의 돼지피 등 시각적인 공포를 고조시키는 온갖 종류의 피가 수시로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브라이언 드 팔마 감독이 연출한 동명의 영화를 보고 싶어진 여러 이유 중 하나는 이 피의 향연이 책 이상의 공포심을 자극할 것 같기 때문입니다.

, 이 작품의 시간적 배경이 1979년으로 설정된 점도 흥미로웠는데, 출간 시점인 1974년을 기준으로 보면 일종의 미래 소설인 셈이기 때문입니다. 첫 출간작을 내놓게 된 스티븐 킹에게 유전되는 염력이란 설정은 현재 시점을 배경으로 삼기엔 다소 부담스러웠기 때문일까요?

 

스티븐 킹에게 홀딱 빠져들 정도의 광팬은 아니지만 그의 작품이 별난 간식처럼 구미를 당기는 묘한 매력이 있다는 건 확실히 인정합니다. ‘캐리는 그의 공식 첫 작품이란 점 때문에 더욱 더 별난 간식처럼 느껴졌는데, 막판의 불가지론같은 일부 대목만 제외한다면 다른 어느 작품보다도 팽팽한 긴장감과 호러의 진수를 맛볼 수 있는 작품입니다. 캐리의 염력 자체도 흥미롭지만 자신의 삶을 파탄에 이르게 만든 어머니와 친구들과 마을을 통렬하게 날려버리는 복수 코드는 호러와는 별개의 쾌감을 자아내기 때문입니다.

 

(혹시라도 스티븐 킹의 수많은 작품 가운데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될지 난감한 독자라면 중단편집인 별도 없는 한밤에를 강력히 추천합니다. 다분히 개인적인 취향에 의한 추천이지만 재미와 호러를 겸비한 최고의 작품이란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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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니미니 - 전면개정판 헬렌 그레이스 시리즈
M. J. 알리지 지음, 전행선 옮김 / 북플라자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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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햄프셔 주의 남부에 위치한 사우샘프턴 중앙경찰서 강력범죄수사팀 수사반장 헬렌 그레이스는 기괴하기 짝이 없는 살인사건에 큰 충격을 받습니다. 범인은 연인 혹은 직장동료 등 두 사람을 납치하여 인적 없는 곳에 감금한 뒤 총알 한 개가 든 총과 함께 한 사람을 죽여야 나머지 한 사람이 살 수 있다.”라는 메시지를 남깁니다. 자신들의 배설물과 분비물에 포위당한 채 공포와 배고픔에 시달리던 그들은 결국 살인이 벌어진 뒤에야 범인의 끔찍한 쇼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죽은 자의 억울함은 말할 것도 없지만 살아남은 자 역시 죄책감과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삶 자체가 완전히 망가지고 맙니다. 납치범의 범행 동기는 물론 어떤 식으로 희생자를 선택했는지조차 짐작할 수 없는 헬렌과 수사팀은 큰 혼란에 빠집니다.

 

영국에서 2014년에 발표된 이니 미니는 한국에 2015년에 출간됐다가 2021년에 개정판으로 다시 나온 작품입니다. ‘헬렌 그레이스 시리즈의 첫 편인데, 실은 작가인 M. J. 알리지의 이름은 물론 시리즈 이름조차 생소해서 읽을까 말까 꽤 주저했던 작품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이렇게 흥미진진한 작품이 왜 스릴러 독자들의 입소문을 타지 못했는지(제가 그 소문을 못 들었을 수도 있지만) 궁금해진 게 사실입니다.

 

이 작품의 제목 이니 미니는 미국의 동요 “eeny, meeny, miny, moe!”에서 따온 것인데 우리 식으로 번역하면 어느 것을 고를까요? 알아맞혀 보세요!” 정도입니다. 두 사람을 납치한 뒤 선택을 강요하는 범인의 기괴한 행각을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제목인데, 납치된 사람들은 연인, 직장동료, 가족들이라 자신이 살기 위해 상대방을 죽여야 하는 상황을 절대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하지만 길게는 2주일 넘게 공포와 배고픔에 사로잡히면서 그들은 결국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막다른 벽에 몰리고 맙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살아남은 자들이 발견되면서 헬렌 그레이스와 그녀의 동료들이 수사에 나서게 됩니다.

납치, 감금, 살인 강요로 이어지는 범죄 패턴은 동일하지만 피해자들의 마지막 선택(정말 상대를 죽일까? 누가 누구를 죽일까? 어떻게 죽일까?)은 모두 제각각이라 연이어 비슷한 사건들이 벌어져도 그들의 최후가 어떻게 그려질지 쉽게 짐작하기 어렵습니다. 또 경찰 역시 아무런 단서도 없는 가운데 다만 피해자들이 결코 무작위로 선택된 게 아니라고 여기는 헬렌의 추측 외에는 딱히 정해진 수사방향이라고 할 만한 것도 없어서 독자로선 초반 내내 헬렌과 수사팀이 느끼는 혼란과 무기력함에 고스란히 이입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사건 못잖게 눈길을 끄는 건 주인공 헬렌 그레이스의 캐릭터입니다. “술은 입에도 대지 않으며 일 중독자에 아이 갖는 일에는 관심조차도 없었다. 발전기처럼 일했고, 거의 혼자서 부서 내의 사건 해결률을 높여놓았다.”는 표현대로 헬렌은 최연소 여성 수사반장이란 타이틀에 어울리는 최고의 형사입니다. 하지만 그런 그녀에겐 누구에게도 내보인 적 없는 내밀한 비밀이 있습니다. 어린 시절의 악몽과 비극으로 인해 진짜 자기 모습을 꽁꽁 감춘 채 완벽한 형사라는 갑옷으로 중무장한 그녀가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건 오직 한 순간, SM클럽에서 채찍에 몸을 내맡긴 채 무자비한 상처를 낼 때뿐입니다. 변태적 성욕을 채우려는 다른 손님들과 달리 헬렌은 오직 자신을 자책하고 죄책감을 잊지 않기 위해, 또 아무런 가치도 없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키기 위해 더욱 거센 채찍질을 요구합니다. 그저 궁금할 뿐이던 그녀의 오랜 악몽과 비극은 막판에야 비로소 독자들에게 소개됩니다.

 

조연들 역시 특별한 사연들을 갖고 있어서 적잖은 분량이 그들의 심리를 묘사하는데 할애됩니다. 유능한 형사지만 이혼 후 알코올 중독에 빠진 마크, 헬렌을 자신의 롤 모델로 삼아 맹렬히 노력하면서도 임신을 갈망하는 찰리, 어릴 적 황산테러로 얼굴 반쪽이 망가진 타블로이드 기자 에밀리아 등이 그들입니다. 긴장감을 놓을 수 없는 사건들이 연이어 벌어지는 가운데 난해한 표현 대신 쉽지만 절절한 문장들로 그려진 등장인물들의 심리는 이 작품의 또 다른 매력 포인트입니다. 클라이맥스로 치달을수록 적잖은 사람들이 다치거나 죽거나 큰 마음의 상처를 입는 비극적인 상황들이 더욱 강렬하게 읽히는 건 이런 디테일한 심리 묘사 덕분입니다.

 

한국에는 헬렌 그레이스 시리즈가 단 세 편만 소개됐지만(‘죽음을 보는 재능은 스탠드얼론입니다.), 영국에선 모두 10편의 장편과 2편의 단편이 출간됐습니다. 올해 북플라자에서 이니 미니의 개정판을 낸 걸 보면 나머지 작품들의 출간도 기대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이 매력 넘치는 시리즈가 빠짐없이 한국 독자들에게 소개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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