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거명령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7-7 미치 랩 시리즈 6
빈스 플린 지음, 이훈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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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최고의 인간병기이자 전 세계 테러리스트들의 간담을 서늘케 한 무자비한 대테러 요원 미치 랩. 그의 명성이 높아질수록 그를 제거하고 싶은 적들도 많아지는 건 당연한 일. 랩에게 아들을 잃은 사우디아라비아의 재벌이 현상금을 내걸고 랩의 목숨을 거두기로 결심한다. 후폭풍을 감안했을 때 절대 실패해선 안 될 미치 랩 암살 계획이 차근차근 진행되고, 가공할 수준의 최고급 킬러 커플이 암살 실행자로 낙점된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이 작품 속 미치 랩의 나이는 37살입니다. 20대 초반부터 활약해온 그에게 목숨을 잃은 테러리스트는 그야말로 부지기수입니다. 애초 철저한 비밀요원이었던 랩은 탐욕스러운 정치인의 농간으로 인해 그 신분이 폭로됐고, 그 순간부터 전 세계 테러리스트들의 사냥감이자 반드시 제거해야 할 복수의 대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문제는 바깥의 적들 못잖게 랩을 못 마땅히 여기는 내부의 적들까지 준동하는 탓에 랩의 상황이 더할 나위 없이 최악에 이른다는 점입니다. ‘제거명령은 자신을 암살 혹은 제거하려는 안팎의 적들을 향한 랩의 투쟁이 그 어느 작품에서보다 치열하고 비장하게 그려진 작품입니다.

 

사실 제거명령은 서평을 쓰기가 참 난감한 작품입니다. 주인공인 랩이 목숨을 잃을 일은 없으며 결국 암살을 모의한 자들을 향한 랩의 복수가 주된 이야기란 점을 누구나 당연히 예상할 수 있는데, 문제는 암살 시도복수사이에 벌어진 이 작품의 가장 큰 사건이 워낙 대형 스포일러라서 서평에서 절대 언급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랩에 대한 복수심에 불타는 사우디 왕자와 재벌의 모의로 시작된 랩 암살 계획은 구 동독 스파이 출신인 정보원의 중개를 거쳐 최고의 실력을 갖춘 프랑스 킬러 커플에게 전달됩니다. 한편 모든 미국 정보기관의 옥상옥이나 마찬가지인 국가정보원이 신설되고 정치적 야욕으로 똘똘 뭉친 인물이 그 수장에 오르면서 랩과 그의 상관인 CIA국장 케네디는 불편함을 넘어 위기감까지 느낍니다. 수장이란 자의 눈에는 온통 비밀투성이인 랩과 CIA의 행태가 반드시 꺾지 않으면 안 될 위험천만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한편에선 암살 계획이 착착 진행되고, 또 다른 한편에선 랩과 CIA를 뭉개놓으려는 정치적 공격이 노골적으로 전개되다 보니 초중반까지는 랩의 존재감이 그리 강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아내 애너 릴리와 그 어느 때보다 달콤하고 평화로운 시간을 보낼 뿐입니다. 그 지점까지 독자의 눈길을 끄는 건 암살의 주체들이 주고받는 살벌한 협상과 거래 장면들입니다. 실패할 경우 랩의 처절한 복수가 자명한 터라 모의자-중개인-실행자 모두 팽팽한 긴장감 속에 자신들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것은 물론 암살계획에서 자신의 흔적을 지우려는 노력을 아끼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암살자들에 대한 랩의 복수가 시작되는 지점부터 이야기는 시리즈 그 어느 작품보다 엄청난 속도로 내달리며 피도 눈물도 없는 랩의 복수극을 그립니다. 최초로 암살을 모의한 자부터 중개인은 물론 실행자들을 쫓는 랩의 복수극엔 미국과 유럽과 중동에 자리 한 랩의 오랜 아군들이 총출동하는데, 단순한 무력만이 아니라 랩이 짠 치밀하고 정교한 계획이 곳곳에서 빛을 발하면서 수시로 독자의 감탄을 자아내곤 합니다.

정말 의외였던 것은 마지막 복수 장면에서 갑작스레 눈가가 뜨끈해진 일입니다. 스포일러 때문에 자세한 언급은 할 수 없지만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복수극이 마무리되는 시점에서 랩이 느끼는 말할 수 없는 고통과 회한은 말 그대로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미묘하고 복잡한 모양새를 띠기 때문입니다.

 

(아직 시리즈 7편인 반역행위를 못 읽었지만) ‘미치 랩 시리즈를 순서대로 읽은 독자라면 아마도 제거명령을 시리즈 최고 작품으로 꼽는데 주저하지 않을 거란 생각입니다. 암살 혹은 제거의 타깃이 된 랩이 아군들과 함께 안팎의 적을 무자비하게 응징한다는 스토리 자체도 매력적이지만, 그 어느 때보다 심신이 엉망진창이 된 채 출구 없는 무간지옥을 견뎌내야 하는 랩의 고통이 너무나도 절절하고 안타깝게 읽히기 때문입니다.

한국에서 마지막으로 출간된 시리즈 7반역행위역시 그 제목만으로도 랩이 겪을 새로운 위기의 무게감이 육중하게 느껴지는데, 과연 이 작품에서 밑바닥 없는 심연에 빠진 랩이 어떤 모습으로 다시 등장할지 궁금할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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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형사들 - 사라진 기와 케이 미스터리 k_mystery
정명섭 지음 / 몽실북스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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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의 할머니 영빈마마의 위패를 모신 의열궁의 기와 수십 장이 사라지는 변고가 일어납니다. 좌우포도대장은 평소 맹렬한 견원지간이지만 왕의 불벼락이 더 두려운 탓에 협력수사를 결심하곤 각각 군관 한 명씩을 추천하여 비밀수사를 맡깁니다. 바로 좌포청의 쇠도리깨이종원과 우포청의 육모방망이육중창이 그들입니다. 정반대의 성격과 외모를 지닌 그들은 의열궁 기와 사건은 물론 백주대낮에 발견된 20대 여성 시신 사건까지 맡게 됩니다.

 

사극 혹은 시대극 미스터리는 현대물과는 사뭇 다른 특별한 매력이 있습니다. CCTVDNA 감식기술도 없이 오로지 물증과 목격자와 탐문에 의존해야 하다 보니 눈높이가 한없이 높아진 요즘 독자들에게는 다소 유치하거나 어리숙해 보일 수밖에 없는 게 사실이지만 바로 그 점이 사극 혹은 시대극 미스터리의 매력인 것 역시 분명한 사실입니다.

조선의 형사들은 팩션, 즉 실존했던 인물들과 실제 벌어졌던 사건을 토대로 작가의 상상력이 가미된 이야기입니다. 관할권과 포상을 두고 서로 으르렁대던 좌우포청에서 차출된 명콤비 이종원과 육중창은 추안급국안(조선 후기 중죄인의 공초를 기록한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이며, 그 외에 형조참의 정약용과 정조 등도 가세하여 팩션의 맛을 더 깊게 만들어줍니다.

 

크게 두 개의 사건 의열궁의 사라진 기와, 20대 여인의 변사 사건 이 등장하는데, 전자의 경우 궁궐에서 사용하는 기와를 훔쳐간 범인의 동기를 파악하기 힘든는 난제였고, 후자는 일찌감치 범인을 특정했는데도 불구하고 이른바 권력자들의 농간이 이종원과 육중창의 앞을 가로막는 장애물로 등장합니다. ‘20대 여인 변사 사건이 물증과 단서, 탐문과 자백으로 이뤄진 전형적인 탐정 미스터리라면 사라진 기와 사건은 좀더 큰 규모의 궁중 액션사극의 풍미를 갖추고 있습니다. 특히 형조참의인 정약용과 정조가 카메오 이상의 역할로 두 사건에 모두 개입하면서 이종원과 육중창은 적잖은 부담감을 느끼기도 하지만 동시에 든든한 지원군을 등에 업고 맹활약할 수 있는 기반을 얻기도 합니다.

 

아무래도 두 주인공 이종원과 육중창의 콤비 플레이가 가장 눈길을 끄는 대목이었는데, 체구나 성격 모두 정반대인 두 사람이 티격태격하며 합을 맞춰가는 과정은 무척 흥미로웠지만 기대했던 만큼의 캐릭터 플레이를 볼 수 없었던 점은 무척 아쉬웠습니다. 상대적으로 사건이 너무 빠른 속도로 전개되다 보니 둘만의 케미라든가 각각의 개인사, 그리고 크고 작은 갈등이 언급될 틈 자체가 없었던 탓인데 어쩌면 후속편을 염두에 둔 작가의 포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특히 정약용과의 협업 과정을 보면 아무래도 이종원과 육중창의 활약이 이 한 편으로 끝날 것 같진 않아 보였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만 더 언급하면, 사극 미스터리의 어쩔 수 없는 한계들에도 불구하고 재미있게 읽힌 작품이지만 전반적으로 가볍다는 인상을 받은 점도 아쉬웠는데, 기름기 하나 없이 살코기로만 이뤄진 듯한 이야기는 긴장감과 속도감은 뛰어날지 몰라도 묵직함을 만끽하기엔 다소 부족해 보인 게 사실입니다. 말하자면 주인공도, 악당도, 조연들도 딱 자기가 할 말과 역할만 하고 있었고 사건을 둘러싼 분위기나 정황 묘사는 찾아보기 힘들었다고 할까요?

 

추안급국안에 이종원과 육중창의 활약이 더 남아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혹시 없더라도 픽션을 통해 그들의 다음 활약을 만나보고 싶습니다. 높아진 눈높이와는 별개로 사극 혹은 시대극 미스터리만의 매력은 특별한 간식 같은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두 주인공의 개인사도 무척 궁금한데 후속편이 나온다면 그 부분도 상세히 그려지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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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레이드 오늘의 일본문학 1
요시다 슈이치 지음, 권남희 옮김 / 은행나무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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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출간됐을 무렵(2005) 읽은 게 분명하지만 아무런 기억도 남은 게 없어서 마치 처음 접한 느낌으로 읽은 요시다 슈이치의 퍼레이드입니다. 최근 들어 오래 전에 읽은 요시다 슈이치의 몇몇 작품을 다시 읽을 기회가 있었는데 첫사랑 온천이 좋았던 기억 그대로였던 반면, ‘나가사키는 왜 그렇게 좋은 인상을 간직했던 건지 통 알 수 없었습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퍼레이드나가사키처럼 제 기억속의 여운과는 거리가 한참 먼 아쉬움을 남겼습니다.

 

신혼부부만 살 수 있는 2인용 아파트에 다섯 명의 10~20대 청춘들이 불법적으로(?) 모여 삽니다. 청춘을 낭비하는 듯한 대학생, 연애에만 골몰하는 무직 여성, 알코올에 심취한 채 지독한 주사(酒邪)를 하루도 거르지 않는 여자, 빈집 뒤지기가 취미이며 밤일에 종사하는 18살 소년, 그리고 겉으론 번듯해 보이지만 그래서 더욱 의뭉스러워 보이는 집주인 남자가 그들입니다. 이들은 각자 한 챕터씩을 맡아 화자로 등장합니다.

설정만 놓고 보면 한 공간에 모여 사는 청춘들의 경쾌하고 달달한 로맨스거나 미래가 불분명한 청춘들이 충돌과 갈등을 겪으며 성장하는 스토리가 가장 먼저 떠올랐는데, 그래서인지 츠지무라 미즈키의 슬로하이츠의 신의 분위기를 기대했던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각 챕터를 맡은 화자의 일상 묘사와 감정 토로가 비밀스런 일기장처럼 전개됩니다. 모두가 얽혀드는 사건도 없고, 충돌이나 갈등도 거의 없으며, 기승전결과는 무관하게 화자가 바뀔 때마다 자신만의 이야기를 늘어놓는 탓에 감정적인 공유나 교류도 눈에 띄지 않습니다. 이런 상황은 그 아파트가 애초 모여 살기 위해 지어진 셰어하우스도 아니고, 또 함께 살게 된 이유 역시 친분 같은 것과는 전혀 무관한, 각자의 특별한 사연들 탓에서 빚어진 결과입니다. 마치 일면식도 없는 등산객들이 험한 날씨를 피해 모여든 대피소 같다고 할까요?

적어도 겉으로만 보면 무질서 속에서도 아슬아슬한 질서를 유지하며 평온한 삶을 사는 듯 보입니다. 혼성 5인조가 방이라곤 두 개밖에 없는 좁은 아파트에 모여 살면서도 서로의 성()에 대해 무덤덤한 것은 물론 나름의 규칙들을 지키고 서로의 프라이버시를 존중하고 배려하며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들 사이엔 암묵적인 동의가 존재합니다.

 

이곳 생활이 마음에 든다. 여기 있으면 즐겁다. 적당한 긴장감은 있지만, 상황이 바뀌면 언제든지 마음이 내키는대로 떠날 수 있다는 점도 매력이다. 아마 내가 내일 여기 나갈 거야.”라고 말해도 불평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p95)

 

이 모호한 거리감이 어렵다. 우린 버럭 화를 낼 수 있을 만큼 가깝지도 않고, 눈앞에서만 짐짓 걱정해주는 척하며 끝낼 만큼 멀지도 않은 사이였다.” (p258)

 

누군가는 이 아파트를 꽉 찬 만실(滿室)이면서도 텅빈 공실(空室)”이라고 여기고, 또 누군가는 난 여기 생활이 인터넷에서 채팅하는 것처럼 느껴져.”라고 말합니다. 이 작품의 주제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문장들로 보이는데, 작가 스스로도 주인공들은 한결같이 커뮤니케이션이 그리 원활하지 못한 인물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최소한의 유대를 갖고자 애쓰며, 그런 젊은이들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싶었다.”라고 작의를 설명한 바 있습니다.

하지만 다 읽은 뒤에도 이 낙관론적이고 건강해 보이는 설명이 좀처럼 피부에 와 닿지 않았습니다. 사실적인 묘사는 넘쳐났지만 유대를 갖고자 애쓴 인물은 없었고, 그렇다고 소통의 부재와 그로 인한 파국을 그린 것도 아니었고, 대부분은 무의미해 보이는 자신만의 일상에 침잠을 반복하다가 다소 허망한 엔딩을 맞이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작가가 숨겨놓은 보물은 무엇인가, 또 행간에서 무엇을 캐치해야 되나, 라는 강박은 더 강해졌지만 아무리 돌이켜봐도 눈에 들어왔던 건 결국 파편적인 일상이 전부였다는 생각입니다.

 

다만, ‘퍼레이드는 다섯 명의 화자 중 누구에게 감정적으로 이입하느냐에 따라, 또 같은 독자라도 몇 살 때쯤읽느냐에 따라 느낌이 전혀 다르게 다가올 작품으로 보입니다. 실제로 인터넷 서점에는 극과 극의 서평이 올라와있고, 개인적으로도 15~6년 전에 받은 좋은 인상과 지금의 정반대의 인상의 차이가 어쩌면 다른 나이에 읽은 탓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인생작처럼 기억하고 있던 애틋한 로맨스 스토리가 나이를 먹은 뒤에 다시 읽었을 때 그저 유치하고 얄팍하게 읽히는 씁쓸함과 비슷하다고 할까요?

한국에 출간된 작품은 굉장히 많지만 그에 비해 읽은 작품은 몇 안 되는 요시다 슈이치입니다. 더구나 써놓은 서평들을 찾아보니 작품마다 호불호가 꽤 크게 갈린다는 걸 새삼 깨달았는데, 언젠가 다시 그를 만날 기회가 온다면 호평으로 도배질 할 수 있는 작품이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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낫씽맨
캐서린 라이언 하워드 지음, 안현주 옮김 / 네버모어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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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 퇴직 후 현재 쇼핑센터 보안요원으로 근무 중인 63살의 짐 도일은 어느 날 한 고객이 들고 있는 책 낫씽맨 : 살아남은 자의 진실 탐구를 보곤 충격에 빠집니다. 20여 년 전 아일랜드 코크 시티에서 연쇄강간살인을 저지른 뒤 유유히 사라져버린 미제 사건의 범인 낫씽맨이 바로 짐 본인이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그 책을 쓴 사람이 그의 마지막 범행인 일가족 살인사건의 유일한 생존자인 당시 12살 소녀 이브 블랙이란 점 때문에, 또 그녀가 책을 통해 선언한 나는 낫씽맨에게서 살아남은 그 여자애였다. 이제 나는 낫씽맨을 잡을 그 여자다.”라는 일성 때문에 짐은 걷잡을 수 없는 공포와 혼란에 빠집니다.

 

이 작품에 대한 여러 매체의 리뷰 가운데 영리한 스릴러라는 문구가 여러 번 눈에 뜨입니다. 낫씽맨에게 가족을 잃고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온 이브가 쓴 책 내용이 책속의 책으로 전개되고, 그 책을 읽으며 충격과 공포에 휩싸이는 완전범죄 연쇄살인마 짐 도일의 심리적 동요가 교차로 전개되는데, 사실 과거의 사건들은 거의 기록수준으로 묘사돼서 큰 긴장감을 발산하지 못하고 있고, 심신이 노쇠한 초라한 60대 짐 도일은 중후반부까지 자신의 과거가 드러날까봐 전전긍긍하는 모습만 보여주고 있어서 전반적으로 독자를 들었다 놓았다 할 만한 사건들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이야기의 완급을 영리하게조절함으로써 심리스릴러와 연쇄살인스릴러의 미덕을 잘 살려놓았습니다.

 

범죄로 가족을 잃은 이브의 이루 말할 수 없는 상처가 피부에 와 닿게 그려지고, 범인을 잡겠다는 의지 하나로 고통스런 글쓰기를 감행한 그녀의 절실함도 생생하게 느껴집니다. 떠올리고 싶지도 않지만 툭툭 끊겨 불완전할 뿐인 본인의 기억과 함께 당시 피해자나 관련자들과의 만남, 그리고 방대한 수사자료에 의지하여 완성한 이브의 책은 대체로 기록 수준에 머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피해자 입장에서 쓰인 범죄 다큐멘터리로서의 탄탄함과 진정성이 잘 녹아있어서 흥미로우면서도 아프고 간절하게 읽힙니다.

 

그에 못잖게 독자의 눈길을 끄는 것은 소시오패스 연쇄살인마에 대한 작가의 독특한 시각인데, 그걸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는 재미있게도 이 작품의 제목인 낫씽맨입니다. 애초 짐은 물적 증거는 물론 지문이나 모발 등 어떠한 흔적도 남기지 않아서 낫씽맨이란 별명을 얻었던 건데, 작가는 이브와 그녀의 파트너인 형사 에드의 입을 통해 오히려 잡고 보면 아무 것도 아닌(Nothing) 남자일 것이라는, 즉 연쇄살인마란 인간의 영역을 초월한 악마적 존재 같은 게 아니라 주차 딱지 때문에 체포된 희대의 살인마 샘의 아들처럼 실은 별 것 아닌 초라한 인간에 불과하다는 주장을 피력합니다. 그리고 그에 동조하듯 진짜 아무 것도 아닌 남자짐 도일의 과거와 현재, 또 이브의 책을 읽으면서 겪는 그의 공포가 디테일하게 그려집니다. 피해자인 이브는 물론 연쇄살인마 짐 도일에게까지 감정이입이 가능했던 건 아마도 이런 흥미로운 설정 덕분이었을 것입니다.

 

이브가 쓴 책속의 책은 긴장감 넘치는 범죄기록이긴 하지만 너무 정직하고 디테일한데다 속도감도 조금 떨어졌고, 그걸 읽는 짐 도일의 심리묘사도 다소 장황하거나 간혹 동어반복처럼 읽힌 경우가 있어서 그리 길지 않은 분량임에도 읽는 도중 살짝 느슨함이 느껴진 건 사실이지만 밀도나 긴장감 등 전체적인 완성도는 무척 높은 작품입니다. 특히 막판에 연이어 터지는 중형급 반전들은 이 작품의 영리함을 다시 한 번 만끽할 수 있는 매력적인 대목들이라 그 앞까지의 느슨함을 충분히 상쇄하고도 남는다는 생각입니다.

올해 읽은 스릴러 가운데 꽤 기억에 남을 작품일 것 같은데, 캐서린 라이언 하워드가 낫씽맨이전에 발표한 세 작품 모두 나름 성공을 거뒀다는 출판사의 소개글을 보면 조만간 그녀의 새 작품을 만날 수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난해하지도, 가볍지도 않은 문장들 속에 촘촘하게 설계된 그녀의 스릴러를 꼭 한 번은 다시 만나보고 싶은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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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는 소녀들
C. J. 튜더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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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년차 신부인 재클린 브룩스(이하 잭)는 노팅엄의 담당 교구에서 일어난 불미스러운 사건에 휘말린 탓에 징계성 발령을 받곤 15살 딸 플로와 함께 채플 크로프트라는 작은 마을로 이사합니다. 교회와 사택은 모두 심하게 낡았고 마을 사람들은 여성 신부라는 낯선 존재에 호기심과 경계심을 함께 드러냅니다. 하지만 잭과 플로 모녀를 당황스럽게 만든 것은 이사 첫날부터 연이어 들이닥친 기묘한 사건들입니다. 온몸이 피범벅이 된 소녀가 나타나고, 500년 전 화형당한 어린 소녀들을 본 따 만든 나무인형이 교회 앞에 놓여있는가 하면 익명의 인물이 보낸 피 묻은 구마(驅魔)의식 세트에는 잭의 이름이 선명하게 새겨져있습니다. 더구나 30년 전 이 마을에서 두 소녀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사건과 전임 신부가 자살했다는 것까지 알게 되자 잭은 혼란을 넘어 두려움까지 느끼게 됩니다.

 

C. J. 튜더는 영국의 여자 스티븐 킹이란 별명을 얻을 만큼 독특한 호러 미스터리로 독자들을 사로잡은 작가입니다. 스티븐 킹이 내 글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분명 C. J. 튜더의 글도 좋아할 것이다.”라고 칭찬했다고 하니 그녀의 스타일을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불타는 소녀들은 그녀의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복잡하기 그지없는 사건들을 찬찬히 풀어가는 현실적인 미스터리와 명백히 호러의 영역에 속하는 소재들을 매끄럽게 결합시킨 작품입니다.

 

잭의 새 둥지인 채플 크로프트는 작은 마을임에도 불구하고 과거와 현재에 걸쳐 끔찍한 사건들을 겪었습니다. 500년 전인 16세기 중반엔 신교도 박해로 인해 두 명의 어린 소녀를 포함 여덟 명의 순교자가 화형을 당한 바 있고 지금까지도 그들을 추모하는 행사가 열립니다. 30년 전엔 두 명의 15살 소녀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결국 미제 사건으로 남고 말았으며, 두 달 전 자살한 전임 신부의 죽음은 몇몇 사람에 의해 타살가능성이 제기되는 중입니다.

 

이렇듯 불온한 분위기로 가득 찬 채플 크로프트에서 잭과 플로는 평생 잊지 못할 며칠을 보내게 됩니다. 잭은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전임 신부의 자살에 의문을 품고 나름 조사를 진행하고, 그 과정에서 마을과 교회를 지배하는 하퍼 가문과 끊임없는 충돌을 겪습니다. 또 교회 지하실에서 발견된 의문의 유골들 때문에 30년 전 두 소녀의 실종사건에도 휘말리는데, 그런 와중에 딸 플로는 묘지에서 500년 전 화형당한 소녀들의 유령을 봤다며 잭을 혼란스럽게 만들기도 하고 근육긴장이상증을 겪는 수상쩍은 남자친구를 사귀면서 크고 작은 충돌을 유발합니다. 안 그래도 궁지에 몰린 잭은 과거 자신과 끔찍한 악연을 맺었던 남자가 14년 만에 교도소에서 조기 출소했다는 소식을 듣곤 겁에 질리는데, 그야말로 사방에서 날아드는 공격에 제정신을 차리기가 어려운 지경에 처한 셈입니다.

 

이 작품의 특징을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요소는 종교작은 마을입니다. 동기도 방법도 제각각이긴 하지만 대부분의 비극은 종교적 요소들에 의해 잉태됐고, 작은 마을의 폐쇄성은 그 비극들을 더 끔찍하게 만들거나 완벽하게 은폐하기에 더없이 좋은 환경을 만들어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탐욕, 욕망, 이기심들이 가세하면서 조용하고 고즈넉한 풍경과는 어울리지 않는 피비린내를 마을 전체에 진동하게 만든 것입니다. 채플 크로프트에서 벌어진 사건들이 소시오패스 연쇄살인마의 잔혹한 범행보다 더 짙고 무거운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건 아마도 이런 조합들의 위력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꽤 많은 사건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다소 복잡해 보이기도 하지만 그다지 어렵게 읽히는 작품은 아닙니다. 지금까지 읽은 C. J. 튜더의 작품들(‘초크맨’, ‘디 아더 피플’)이 대체로 그런 스타일이었는데 독자로서 거기에 익숙해진 탓인지 아니면 작가가 워낙 이야기를 매끄럽게 잘 풀어낸 덕분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스티븐 킹을 떠올리게 하는 독특한 호러 미스터리의 매력이 잘 살아있는 작품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다만, C. J. 튜더의 호러는 작품 전반을 지배한다기보다는 카메오처럼 짧고 굵게 활용되는 방식이라 스티븐 킹의 작품들과는 확연히 차이가 나긴 합니다.)

막판 반전 역시 예상을 뛰어넘는 설정이라 마지막 페이지까지 긴장감을 놓을 수 없었는데, 앞서 뿌려놓은 숱한 단서들을 완벽하게 회수하면서 독자의 뒤통수를 제대로 친 흥미진진한 대목이었습니다.

 

2018초크맨이후 1년에 한 편씩 꼬박꼬박 신작을 내온 C. J. 튜더는 후기를 통해 내년 이맘때 다시 만날까요?”라는 인사를 남겼는데, 덕분에 벌써부터 무슨 이야기를 내놓을지 사뭇 기대가 됩니다. 그 전에 아직 유일하게 읽지 못한 애니가 돌아왔다를 먼저 읽어야 되겠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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