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체스트넛맨
쇠렌 스바이스트루프 지음, 이은선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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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봉으로 잔혹하게 폭행당한 뒤 신체 일부가 절단된 채 살해된 여성들의 시신이 잇달아 발견됩니다. 코펜하겐 경찰 살인수사과의 나이아 툴린은 유로폴에서 징계를 받고 한시적으로 살인수사과에 복귀한 마르크 헤스와 파트너가 되어 수사에 참여합니다. 피해자들의 곁에 놓여있던 밤 인형(chestnut man)에서 1년 전 실종된 소녀 크리스티네의 지문이 발견되자 수사는 혼란에 빠집니다. 사회부 장관 로사 하르퉁의 딸인 크리스티네를 납치한 범인이 이미 1년 전 체포됐고, 그는 시신을 토막 낸 뒤 숲에 유기했다고 진술한 바 있기 때문입니다. ‘굴러온 돌헤스는 연쇄살인과 크리스티네 실종이 연관된 사건이라고 확신하지만, ‘박힌 돌툴린과 1년 전 범인 체포로 큰 공을 세웠던 살인수사과 반장은 헤스의 추측을 무시합니다. 가까스로 피해자들의 공통점이 밝혀진 가운데 추가범행까지 벌어지자 수사관계자들은 큰 충격에 빠집니다.

 

그동안 북유럽 스릴러의 대세는 각각 스티그 라르손과 요 네스뵈로 대표되는 스웨덴과 노르웨이였습니다. 그래서인지 상대적으로 약세였던 덴마크스릴러의 출간 소식은 무척 반가웠습니다. 더구나 어느 정도는 재미의 보증수표라고 할 수 있는 넷플릭스 오리지널이란 타이틀까지 갖춘 덕분에 읽기 전부터 두툼한 분량에 대한 기대감이 남달랐습니다. 끔찍한 폭행 이후 산 채로 신체를 절단하고 시신 옆에 밤 인형을 남겨놓는 연쇄살인마의 행각은 북유럽 스릴러 특유의 잔혹함을 여지없이 드러냈고, 범인을 쫓는 두 주인공 나이아 툴린과 마르크 헤스의 캐릭터 역시 여러 북유럽 스릴러 주인공들을 떠올리게 하는 독특한 매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지만 툴린과 헤스가 사건에 임하는 태도와 처지는 일반적인 주인공들과는 전혀 다릅니다. 뛰어난 재능을 지닌 살인수사과의 최연소 여성 팀장 후보지만 정작 살인사건에선 별 흥미를 못 느낀 채 컴퓨터 재능을 살릴 수 있는 사이버범죄센터로의 이적을 꿈꾸는 툴린은 부디 이 사건이 복잡하지 않기만을 바라는 귀차니즘을 애써 감추지 않습니다. 또 유로폴에서 징계를 받고 한시적으로 살인수사과에 좌천성 복귀를 지시받은 헤스는 오로지 유로폴로의 복귀만 생각하며 빈민가에 위치한 아파트를 팔아넘기는 일에 더 몰두합니다. 말도 없고 사건에는 관심도 없고 행색마저 추레한 헤스가 못마땅한 툴린은 노골적으로 적대감을 드러내지만, 헤스는 그런 적대감따윈 달관한 듯 초연한 태도만 보입니다.

이렇듯 물과 기름 같던 두 주인공은 동일범의 살인이 연이어 벌어지고 생각지도 못한 단서 1년 전 실종된 크리스티네의 지문이 묻은 밤 인형 가 나타나면서 조금씩 협력 관계를 구축해나갑니다. 두 사람의 케미는 사건 못잖게 흥미진진하게 눈길을 끄는데 만약 시리즈로 확대된다면 그 어느 콤비보다 독자들의 관심을 이끌 수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현재 벌어지고 있는 연쇄살인과 1년 전 장관의 딸 크리스티네의 실종사건이 엇비슷한 비중으로 전개되면서 독자는 두 사건의 접점이 과연 언제, 어디에서 드러날까 촉각을 곤두세우게 됩니다. 두 사건의 연관성을 주장하는 헤스와 자신의 공적이 날아갈까 봐 실종사건 재수사를 강력하게 반대하는 수뇌부가 치열하게 갈등하는 가운데, 툴린은 점점 헤스의 주장에서 설득력을 발견하고 그가 과거 살인수사과의 최고 능력자였다는 사실을 인정하기에 이릅니다.

연쇄살인사건과 나란히 병행되는 또 하나의 시퀀스는 딸 크리스티네를 잃고 휴직했던 장관 로사가 1년 만에 복직하자마자 벌어지는 협박사건입니다. 누군가 로사를 살인범이라 지칭하며 노골적인 협박을 가해오는데 이로 인해 툴린과 헤스의 수사는 더욱 큰 혼선을 빚게 됩니다.

 

꽤 오래 전 기사지만 북유럽 스릴러 소설 왜 국내에선 안 뜰까?”(201234, 경향신문)에서는 어두운 분위기과 복잡한 플롯, 그리고 사건은 흉악한데다 등장인물의 과거 상처나 기억이 얽혀드는 탓에 북유럽 스릴러가 한국 독자들에게 안 먹힌다고 분석한 적 있습니다. 분명 그런 경향이 있긴 하지만 더 체스트넛 맨은 비교적 쉽고 명쾌하게 읽히는 작품입니다. 물론 어둡기만 한 헤스의 캐릭터와 과거사라든가 끔찍한 범행수법, 또 배경이 10월임에도 작품 내내 장마처럼 내리는 비와 우중충한 풍경 묘사 등 기사 내용과 엇비슷한 부분도 있는 게 사실인데, 그래도 다른 작품들에 비해선 영미권 스릴러처럼 친숙하게 읽히는 편입니다.

다만, 딱 한 가지 아쉬움을 꼽는다면 사건에 비해 과도한 분량입니다. 이 역시 북유럽 스릴러의 특징 중 하나인데, ‘더 체스트넛 맨의 경우 부차적인 시퀀스나 장면들이 분량을 꽤 많이 잡아먹었고, 막판에 밝혀진 진실은 앞서 읽은 분량들을 조금은 허망하게 만들 정도로 단순했습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분량이 400페이지 안팎인데, ‘더 체스트넛 맨을 읽다가 조금 지루하다 싶어서 페이지를 확인해보니 딱 그 지점을 지나는 중이었습니다. 조금만 슬림했더라면 끝까지 긴장감을 놓치지 않았을 거란 아쉬움은 책을 덮을 때까지 계속 됐습니다.

 

마지막 챕터를 보면 툴린과 헤스가 시리즈 주인공이 될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애매한 상황인데, 개인적으론 어떻게든 두 사람이 또 한 번 호흡을 맞출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북유럽 혹은 독일 스릴러에 못잖은 덴마크콤비 시리즈의 활약이 더없이 기다려지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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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역행위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7-8 미치 랩 시리즈 7
빈스 플린 지음, 이훈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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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을 코앞에 두고 끔직한 폭탄테러 사건이 벌어져 민주당 후보인 조시 알렉산더의 아내와 경호원 등 다수가 사망합니다. 3개월 후, FBI 국장 아이린 케네디의 밀명을 받고 테러범을 잡기 위해 지중해의 키프로스에 머물던 미치 랩은 새 대통령의 취임식 1주일 전 보스니아 출신 암살자를 체포합니다. 하지만 랩이 확실한 증거를 포착하기도 전에 체포 사실이 세상에 공개됐고 FBI와 법무부가 사건을 채가려 하자 랩은 테러범만 넘긴 채 종적을 감춥니다. 그리고 합법적인 수사로는 알아낼 수 없는 사건의 진상을 캐기 위해 위험천만한 행보를 시작합니다. 그러나 명확한 증거도 없는데다 랩이 용의자를 고문했다는 의심까지 제기되자 CIA와 케네디 국장은 위기에 몰립니다. 케네디와 랩을 눈엣가시로 여겨온 부통령 당선자 마크 로스는 그들을 일거에 제거할 호기로 여기고 야비한 공격을 감행합니다.

 

미치 랩 시리즈일곱 번째 작품인 반역행위는 한국에서 마지막으로 출간된 미치 랩 시리즈이기도 합니다. 2015년 이후 더는 소식이 없으니 후속작 출간을 기대하긴 어려울 것 같아 너무 아쉬울 뿐입니다.

시리즈 두 번째 작품인 3의 선택을 제외하고 대부분 작품에서 미치 랩의 주요 미션은 중동 테러리스트들과의 대결이었지만, ‘반역행위는 미국 대통령 선거를 배경으로 더럽고 비열한 정치적 음모와 폭탄테러 사건에 맞서는 랩의 활약을 그립니다. 초반에 독자에게 폭탄테러 사건의 범인과 배후는 물론 동기까지 다 밝혀지기 때문에 범인은 누구?”보다는 랩이 어떻게사건의 진상을 파헤치고 자신과 케네디 국장, 그리고 CIA에 몰아닥친 절체절명의 위기를 극복할 것인가가 관심을 끌게 됩니다. 물론 수많은 인명을 살상하고 자신의 탐욕을 채우려 한 테러사건의 배후를 어떤 방식으로 통쾌하게 처단할 것인가도 기대감을 갖게 만드는 대목입니다.

 

미치 랩 시리즈의 주요 모티브 중 하나가 야비한 정치인들의 공격으로 위기에 빠진 랩과 케네디 국장의 반격인데, ‘반역행위는 그동안 CIA를 비호해온 헤이즈 대통령이 재선 출마를 포기한 상태에서 새 정부가 들어서는 시점을 배경으로 하고 있어서 두 사람의 위기는 그 어느 때보다도 심각한 지경에 이릅니다. 무엇보다 새 대통령 취임을 1주일 앞둔 상태라는 시간제한 설정 때문에 긴장감과 초조함은 극도에 달합니다.

하지만 위기에 대처하는 랩의 태도는 놀라울 정도로 느긋하고 여유 있습니다. 랩의 궁극적인 목표는 당연히 테러범의 배후와 동기를 알아내는 것이지만, 그 전에 랩은 자신의 폭력적이고 불법적인수사방식을 비난하고 그걸 핑계 삼아 CIA를 공격하는 정치권과 언론을 제대로 엿 먹이기 위한 흥미진진한 계획을 세웁니다. 랩의 속내를 알 수 없는 케네디 국장은 거의 홀로 십자포화를 맞으며 큰 위기에 빠지지만 끝까지 랩을 믿고 기다립니다.

 

대선을 둘러싼 폭탄테러의 진상은 정교하고 잔혹하지만 이야기의 큰 선은 제법 단순해서 이전의 작품들에 비해 심플한 인상을 줬습니다. 또 분량도 상대적으로 짧았는데, 그래서인지 스토리와 무관한 부연 설명들이 꽤 많아서 군데군데 지루함이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야비한 적들을 무자비하게 응징하는 통쾌함은 여전해서 랩과 케네디 국장의 매력이 여느 작품 못잖게 빛을 발한 것 역시 사실입니다.

 

검색을 해보니 놀랍게도 미치 랩 시리즈는 아직까지 미국에서 계속 출간 중이었습니다. 빈스 플린은 2013년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모두 13편의 시리즈를 내놓았는데, 이후로 Kyle Mills2015년부터 매년 한 편씩 미치 랩 시리즈를 출간했고, 2021년 현재 스무 번째 작품인 ‘Enemy at the Gates’가 나와 있는 상태였습니다. 미국에서 2006년에 출간된 반역행위에서 각각 39살과 45살인 미치 랩과 케네디 국장이 최소 50대 중반~60대 초반은 됐을 것 같은데, 과연 어떤 모습들로 활약하고 있을지 너무 궁금할 따름입니다.

개인적인 바람이라면 적어도 빈스 플린이 집필한 나머지 6편이라도 한국에 소개되는 것인데, 요원하다는 건 잘 알지만 그래도 언젠가 다시 한 번 미치 랩을 만날 수 있을 거란 기대감을 쉽게 포기하진 못할 것 같습니다. 그 아쉬움을 조금이라도 채우고 싶은 마음에 미치 랩 시리즈는 아니지만 빈스 플린의 데뷔작인 임기종료를 조만간 읽을 생각인데, 희미하게나마 미치 랩의 그림자를 맛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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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총이 빠르다 - 마이크 해머 시리즈 2 밀리언셀러 클럽 31
미키 스필레인 지음, 박선주 옮김 / 황금가지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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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정 일을 마치고 심야식당에서 빨간 머리의 매춘부를 만난 마이크 해머는 잠깐의 대화를 통해 그녀에게 연민을 느끼곤 진심을 담아 새 삶을 권유합니다. 그런데 다음 날 그녀가 교통사고로 사망하자 해머는 이름이라도 알고 싶은 마음에 그녀 주변을 조사합니다. 그 과정에서 그녀의 죽음이 사고가 아니며, 그녀가 지닌 뭔가를 쫓는 자들이 있음을 눈치 챕니다. 작은 단서에서부터 출발하여 차근차근 그녀의 과거를 훑어가던 해머는 숱한 위기를 넘긴 끝에 그녀의 죽음의 배후에 매춘조직과 권력층 간의 부패한 커넥션이 있다는 걸 확신합니다. 절친인 뉴욕 강력계 반장 팻 체임버스와 공조 수사를 벌이긴 하지만 해머는 주체할 수 없는 분노에 사로잡힌 채 의도적으로 경찰을 배제하곤 악당들을 향해 거침없이 45구경 권총을 발사합니다.

 

내 총이 빠르다법보다 주먹을! 재판보다 직접 처단!”을 온몸으로 실천하는 난폭한 정의의 탐정 마이크 해머의 두 번째 활약을 그린 작품입니다. 뒤표지 카피에 의하면 하드보일드의 살아있는 신화로 이 시리즈를 소개하고 있는데, 일반적인 하드보일드 스타일에 대한 정의가 감정을 극도로 절제하고 차갑고 건조한 문체로 사실만을 기술하는 것임을 감안하면 실은 이 시리즈의 주인공 마이크 해머는 오히려 하드보일드의 전설인 필립 말로와는 상당히 대척점에 서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합니다. 미키 스플레인의 문장 역시 대체로 차갑고 건조하긴 해도 결정적인 순간, 즉 해머가 폭발하는 대목에서는 그야말로 온갖 분노의 감정을 총동원하여 격하기 이를 데 없는 폭주를 감행하는데, 그러고 보면 작가나 주인공 모두 필립 말로 스타일과는 사뭇 다른 차원의 하드보일드를 구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시리즈 첫 편인 내가 심판한다의 원제가 ‘I, The Jury’, 내가 심판이고 배심원이고 판사.”라는 노골적인 선언을 담고 있듯 해머는 자신이 한 번 꽂힌 사건에 관한 한 일부러 경찰을 따돌려가면서까지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결과를 이끌어내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이번 작품에서도 겉모습은 매춘부였지만 숙녀의 우아함을 지녔던 빨간 머리 여자의 죽음에 분노한 해머는 상대해야 할 적이 거대하고 부패한 권력층과 매춘조직의 커넥션이란 걸 깨달은 뒤로 필요에 따라 뉴욕 경찰의 강력계 반장인 팻 체임버스에게 도움을 요청하긴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난폭한 영웅이라는 별명에 걸맞게 340여 페이지 내내 그만의 심판을 거침없이 휘두릅니다.

 

해머의 첫 번째 미덕은 45구경 권총으로 대변되는 그의 감정적이고 폭력적인 대응이지만, 그는 유능한 사립탐정답게 미스터리를 풀어가는 상당한 추리력도 지니고 있습니다. 사소한 단서조차 절대 그냥 흘려보내지 않는 집중력도 대단합니다. 동시에 한 작품 안에서 숱한 여성들과 농도 짙은 로맨스를 펼치는 마초적인 기질도 어김없이 발산하는데, 이 시리즈가 1947년에 시작되어 1950년대에 전성기를 맞은 점을 감안하면 충분히 수긍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전작인 내가 심판이다와 마찬가지로 개인적인 복수심과 함께 부패를 향한 공적인 분노와 정의감이 뒤섞여 있는 내 총이 빠르다(로맨스 장면을 제외하곤) 거의 쉴 틈 없이 달려가는 폭주기관차처럼 전개되는 전형적인 액션 스릴러입니다. 한순간도 눈을 떼기 힘든 매력적인 이야기이긴 하지만 간혹 중요한 대목에서 애매모호한 문장들이 등장하는 바람에 뭐가 어떻게 됐다는 거지?”라는 의아함을 자아낼 때가 있습니다. 원작의 문제인지 번역의 문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 점을 제외하곤 흥분지수를 고도로 유지할 수 있는 오락물의 힘을 골고루 갖추고 있습니다.

20세기 중반을 무대로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인공 마이크 해머는 지금 당장 드라마로 만들어도 똘끼 충만한 매력적인 탐정으로 각광받을 수 있는 인물입니다. 모두 13편의 작품이 출간됐지만 한국에는 초기 세 편만 소개되고 말았는데, 언젠가 레트로 열풍이 분다면 다시 한 번 재조명될 수 있는 명품 캐릭터가 돼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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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사의 약속 나츠메 형사 시리즈
야쿠마루 가쿠 지음, 남소현 옮김 / 북플라자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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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사의 약속형사의 눈빛’, ‘그 거울은 거짓말을 한다에 이은 나츠메 노부히토 시리즈의 세 번째 작품입니다. 2편인 그 거울은 거짓말을 한다를 읽을 때도 느낀 점이지만, 같은 출판사에서 출간됐는데도 나츠메 노부히토 시리즈라는 타이틀을 표지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었던 점은 참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그나마 형사의 약속은 인터넷 서점 소개글에 시리즈 세 번째 작품이라는 아주 짤막한 언급이라도 있었지만 그 거울은 거짓말을 한다는 직접 읽기 전엔 어디에서도 시리즈물이라는 사실을 알아낼 수 없었습니다. 일부러 감춘 것 같진 않고, 그저 출판사의 무성의함 또는 소홀함 탓이란 생각입니다.

 

히가시이케부쿠로 경찰서 소속인 마흔 살의 형사 나츠메 노부히토는 독특한 이력을 가진 인물입니다. 노부히토(信人)라는 이름대로 사람을 믿고 아이들을 좋아해서 교사가 되고 싶었지만, 어떤 사건을 계기로 진로를 바꿔 법무부 소년분류심사원에서 죄를 저지른 청소년을 상대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어린 딸 에미가 묻지마 테러로 식물인간이 된 뒤 범죄자에 대한 분노를 참을 수 없어 30세라는 늦은 나이에 경찰에 투신했습니다. 그를 아는 사람들은 도무지 의심이란 걸 할 줄 모르는 나츠메가 형사가 된 걸 이해 못했지만, 그런 그의 독특한 이력과 성격은 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오히려 빛을 발하기 시작했고, 타고난 유능함 덕분에 경시청이나 검찰청에서도 입소문을 타기에 이르렀습니다.

 

형사의 약속에는 모두 다섯 편의 단편이 실려 있습니다. 어린이 실종사건, 13년을 다짐해온 복수, 도주하던 피의자의 사망, 치매노인이 일으킨 상해사건, 그리고 수차례 칼에 찔린 사체 등 다양하고 끔찍한 사건들이 등장하지만, 대부분 일반적인 형사물과는 사뭇 다른 엔딩들을 맞이합니다. 진상을 알아냈지만 모르는 척 하는 게 모두에게 바람직하다고 판단된 사건, 진심어린 충고와 조언으로 범행을 사전에 방지할 수 있었던 사건, 피의자의 말 못할 속내를 알아내곤 오히려 그()를 위로하는 사건 등 대부분 나츠메가 아니면 맞이하기 힘들었을 특별한 엔딩들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물론 나츠메에게 회한과 자책감을 불러일으킨 끝에 다소 우울하게 마무리되는 사건도 있어서 그의 다정다감하고 온기 넘치는 치유 능력이 언제나 긍정적인 결과를 이끌어내는 것만은 아니라는 메시지도 함께 전달됩니다.

 

마지막 수록작이자 표제작인 형사의 약속에서 작가는 사람이 곧 희망.”이라는 주제의식을 드러내는데, 다섯 편의 수록작에 등장하는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 주위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 하나만 있었더라도 비극적인 상황을 어느 정도는 피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이 주제의식은 작품 전체를 관통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계몽적인 느낌도 살짝 있긴 하지만 나츠메의 캐릭터 덕분에 큰 위화감이나 거부감 없이 수긍하게 됩니다. 요약하자면 사건은 끔찍해도 그 해법은 온기로 가득한 따뜻한 미스터리라고 할까요? 물론 이런 이유 때문에 자극적이고 독한 미스터리를 좋아하는 독자에겐 조금은 밋밋하고 싱겁게 느껴질 수도 있는 게 사실입니다.

 

일본에서 나츠메 노부히토 시리즈는 네 번째 작품인 刑事’(2018, 단편집)까지 출간된 걸로 알고 있습니다. ‘분노라는 표현이 들어간 걸로 보아 앞선 작품들과는 조금은 결이 다른 이야기가 예상되는데, 이 작품 역시 곧 한국에 소개되기를 기대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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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니발 1
토머스 해리스 지음, 이창식 옮김 / 창해 / 199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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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7년 전 양들의 침묵에서 FBI 연수생이었던 클라리스 스탈링은 그사이 유능한 특별수사관으로 성장했습니다. 하지만 그녀를 훼방하고 질투하는 자들의 모함과 그녀 자신의 고집 센 태도 때문에 FBI에서의 앞날은 오히려 꽉 막힌 상태입니다. 마약밀매단 급습 중 부적절한 용의자 사살문제가 불거지면서 스탈링은 큰 위기를 맞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문제가 대대적으로 보도된 덕분에 7년 만에 한니발 렉터로부터 연락을 받게 됩니다. 한편, 과거 렉터에게 공격을 당해 만신창이가 된 채 첨단 의료시설에 의존하고 있는 메이슨 버저는 엄청난 유산과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하여 렉터에 대한 정보를 끌어 모읍니다. 이탈리아에서 렉터의 흔적을 보고받은 그는 자신이 당한 것 이상의 참혹한 방법으로 렉터에게 복수할 계획을 세웁니다.

 

레드 드래건양들의 침묵에 이은 한니발 렉터 시리즈세 번째 작품입니다. 사실 렉터는 앞선 두 작품에서 주인공이라기보다는 특별한 카메오로 보는 게 적절할 정도로 사건 자체와는 거리가 있던 인물입니다. ‘레드 드래건에서는 짧지만 강렬한 존재감만 드러냈을 뿐 특별한 역할이 없었고, ‘양들의 침묵에서는 스탈링과의 만남을 통해 팽팽한 심리전을 벌이며 비교적 사건에 깊숙이 개입하긴 했지만 어쨌든 연쇄살인범은 따로 존재했기에 (책을 기준으로 했을 때는) 세 번째 주인공 정도로 보는 게 타당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렉터가 자신의 이름을 딴 한니발이라는 작품으로 돌아왔으니 이번 작품은 스탈링과 함께 메인 주인공으로 맹활약할 렉터에 대한 기대감이 커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니발을 이끄는 주요 인물은 모두 네 명입니다. 7년 만에 렉터의 추적을 재개한 스탈링은 끈질긴 조사를 펼치면서도 오래 전 그와 나눴던 대화들과 그가 종적을 감추면서 남긴 위로와 격려의 편지를 떠올리며 묘한 감회에 사로잡힙니다. 이탈리아에서 펠 박사라는 신분으로 안락한 생활을 영위하던 렉터는 자신에게 사적인 복수를 가하려는 메이슨의 계획을 감지한 뒤 오랜만에 피비린내를 진동할 태세를 갖춥니다. 메이슨은 렉터를 납치한 뒤 산 채로 갈가리 찢어 죽이기 위해 돈과 권력을 있는대로 휘두르는 사이코패스입니다. 또 그에게 돈으로 매수된 법무부 관료 폴 렌들러는 양들의 침묵에서 이미 스탈링과 악연을 맺었던 인물로 이번에도 스탈링과 렉터를 파멸시키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악당으로 등장합니다.

 

주요 인물들의 설정을 보면 스탈링과 렉터의 맞대결이라기보다는 메이슨의 복수극으로 인해 위기에 빠진 렉터를 스탈링이 구하는 이야기라는 예상을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습니다. FBI 요원 스탈링과 식인 살인마 렉터는 적대적 관계일 뿐 아니라 서로에게 적잖은 영향을 미치며 묘하게 교감하는 관계라서 이른바 공동의 적인 메이슨 & 렌들러를 향해 협력할 수 있다는 추측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건 1/3 지점 정도까지 누구나 할 수 있는 예상이고 추측일 뿐 이야기가 실제로 그렇게 흘러가는 것만은 아닙니다.

 

앞선 두 작품이 분명 연쇄살인마 스릴러이긴 해도 심리전의 성격이 강했다면 한니발은 사건성이 명확한 작품입니다. 심리전과는 확연히 다른 현실적인 긴장감이 팽팽하고, 과거가 아닌 현재 시점에 벌어지는 사건들이 줄줄이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인지 훨씬 더 많은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페이지가 넘어가는 속도는 전작들에 비해 거의 2배속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한니발의 미덕은 딱 여기까지입니다.

스포일러를 피해 아쉬움을 느낀 대목을 정리하면, 우선 황당한 느낌까지 받은 막판 엔딩입니다. 많은 독자들이 원했을 수도, 반대로 그만큼 많은 독자가 절대 바라지 않았을 수도 있는 엔딩인데, 개인적으론 알고 보니 모두 꿈이었다.”에 버금갈 만큼 납득하기 힘든 대단원에 솔직히 화가 나기도 했습니다. 두 번째로는 갑자기 유년기의 트라우마를 꺼내든 렉터의 뜬금없는 캐릭터입니다. 2차 대전 말기 여동생 미샤를 비참하게 잃은 렉터의 상처가 마치 그의 핵심 캐릭터인 양 그려진 것도, 또 그 상처를 스탈링에게 투사하는 설정도 모두 개연성 부족한 억지에 가까웠습니다. 마지막으로 허술하게 묘사된 클라이맥스(렉터를 향한 메이슨의 복수)의 문제인데, 어설픈 액션과 함께 뭐가 이렇게 쉬워?”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전작들 모두 비슷한 허술함을 지닌 걸 떠올려보면 작가의 고유한 성향으로 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대략 절반 정도까지는 스릴러와 심리전의 미덕을 고루 갖춰서 재미있게 읽었지만 그 이후로는 계속 위화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이야기들이 전개돼서 오히려 몰입감이 훅 떨어졌습니다. 물론 독자에 따라 180도 다른 생각을 가질 수도 있지만 애초 왜 이 작품이 양들의 침묵이후 11년 만에 출간됐을까?”라는 의구심을 가진 저로서는, 무리한 추측이긴 해도, 전작들의 영광에 편승한 작가의 사심(?)이 발동했거나 주변에서 등을 떠민 탓에 마지못해 후속작을 내게 된 작가의 어정쩡함이 빚어낸 산물로 여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원래는 렉터의 프리퀄을 다룬 한니발 라이징까지 읽을 생각이었지만 지금으로선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입니다. 아무래도 한니발보다 더한 작가의 사심과 어정쩡함을 마주하게 될 것 같기 때문입니다. 또 지금까지 읽어온 렉터와는 전혀 달라 보이는 과거의 렉터를 읽고 싶은 생각도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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