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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레이드 ㅣ 오늘의 일본문학 1
요시다 슈이치 지음, 권남희 옮김 / 은행나무 / 2005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한국에 출간됐을 무렵(2005년) 읽은 게 분명하지만 아무런 기억도 남은 게 없어서 마치 처음 접한 느낌으로 읽은 요시다 슈이치의 ‘퍼레이드’입니다. 최근 들어 오래 전에 읽은 요시다 슈이치의 몇몇 작품을 다시 읽을 기회가 있었는데 ‘첫사랑 온천’이 좋았던 기억 그대로였던 반면, ‘나가사키’는 왜 그렇게 좋은 인상을 간직했던 건지 통 알 수 없었습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퍼레이드’는 ‘나가사키’처럼 제 기억속의 여운과는 거리가 한참 먼 아쉬움을 남겼습니다.
신혼부부만 살 수 있는 2인용 아파트에 다섯 명의 10~20대 청춘들이 불법적으로(?) 모여 삽니다. 청춘을 낭비하는 듯한 대학생, 연애에만 골몰하는 무직 여성, 알코올에 심취한 채 지독한 주사(酒邪)를 하루도 거르지 않는 여자, 빈집 뒤지기가 취미이며 ‘밤일’에 종사하는 18살 소년, 그리고 겉으론 번듯해 보이지만 그래서 더욱 의뭉스러워 보이는 집주인 남자가 그들입니다. 이들은 각자 한 챕터씩을 맡아 화자로 등장합니다.
설정만 놓고 보면 한 공간에 모여 사는 청춘들의 경쾌하고 달달한 로맨스거나 미래가 불분명한 청춘들이 충돌과 갈등을 겪으며 성장하는 스토리가 가장 먼저 떠올랐는데, 그래서인지 츠지무라 미즈키의 ‘슬로하이츠의 신’의 분위기를 기대했던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각 챕터를 맡은 화자의 일상 묘사와 감정 토로가 비밀스런 일기장처럼 전개됩니다. 모두가 얽혀드는 사건도 없고, 충돌이나 갈등도 거의 없으며, 기승전결과는 무관하게 화자가 바뀔 때마다 ‘자신만의 이야기’를 늘어놓는 탓에 감정적인 공유나 교류도 눈에 띄지 않습니다. 이런 상황은 그 아파트가 애초 모여 살기 위해 지어진 셰어하우스도 아니고, 또 함께 살게 된 이유 역시 친분 같은 것과는 전혀 무관한, 각자의 특별한 사연들 탓에서 빚어진 결과입니다. 마치 일면식도 없는 등산객들이 험한 날씨를 피해 모여든 대피소 같다고 할까요?
적어도 겉으로만 보면 무질서 속에서도 아슬아슬한 질서를 유지하며 평온한 삶을 사는 듯 보입니다. 혼성 5인조가 방이라곤 두 개밖에 없는 좁은 아파트에 모여 살면서도 서로의 성(性)에 대해 무덤덤한 것은 물론 나름의 규칙들을 지키고 서로의 프라이버시를 존중하고 배려하며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들 사이엔 암묵적인 동의가 존재합니다.
“이곳 생활이 마음에 든다. 여기 있으면 즐겁다. 적당한 긴장감은 있지만, 상황이 바뀌면 언제든지 마음이 내키는대로 떠날 수 있다는 점도 매력이다. 아마 내가 “내일 여기 나갈 거야.”라고 말해도 불평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p95)
“이 모호한 거리감이 어렵다. 우린 버럭 화를 낼 수 있을 만큼 가깝지도 않고, 눈앞에서만 짐짓 걱정해주는 척하며 끝낼 만큼 멀지도 않은 사이였다.” (p258)
누군가는 이 아파트를 “꽉 찬 만실(滿室)이면서도 텅빈 공실(空室)”이라고 여기고, 또 누군가는 “난 여기 생활이 인터넷에서 채팅하는 것처럼 느껴져.”라고 말합니다. 이 작품의 주제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문장들로 보이는데, 작가 스스로도 “주인공들은 한결같이 커뮤니케이션이 그리 원활하지 못한 인물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최소한의 유대를 갖고자 애쓰며, 그런 젊은이들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싶었다.”라고 작의를 설명한 바 있습니다.
하지만 다 읽은 뒤에도 이 낙관론적이고 건강해 보이는 설명이 좀처럼 피부에 와 닿지 않았습니다. 사실적인 묘사는 넘쳐났지만 유대를 갖고자 애쓴 인물은 없었고, 그렇다고 소통의 부재와 그로 인한 파국을 그린 것도 아니었고, 대부분은 무의미해 보이는 자신만의 일상에 침잠을 반복하다가 다소 허망한 엔딩을 맞이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작가가 숨겨놓은 보물은 무엇인가, 또 행간에서 무엇을 캐치해야 되나, 라는 강박은 더 강해졌지만 아무리 돌이켜봐도 눈에 들어왔던 건 결국 ‘파편적인 일상’이 전부였다는 생각입니다.
다만, ‘퍼레이드’는 다섯 명의 화자 중 누구에게 감정적으로 이입하느냐에 따라, 또 같은 독자라도 ‘몇 살 때쯤’ 읽느냐에 따라 느낌이 전혀 다르게 다가올 작품으로 보입니다. 실제로 인터넷 서점에는 극과 극의 서평이 올라와있고, 개인적으로도 15~6년 전에 받은 좋은 인상과 지금의 정반대의 인상의 차이가 어쩌면 다른 나이에 읽은 탓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인생작처럼 기억하고 있던 애틋한 로맨스 스토리가 나이를 먹은 뒤에 다시 읽었을 때 그저 유치하고 얄팍하게 읽히는 씁쓸함과 비슷하다고 할까요?
한국에 출간된 작품은 굉장히 많지만 그에 비해 읽은 작품은 몇 안 되는 요시다 슈이치입니다. 더구나 써놓은 서평들을 찾아보니 작품마다 호불호가 꽤 크게 갈린다는 걸 새삼 깨달았는데, 언젠가 다시 그를 만날 기회가 온다면 호평으로 도배질 할 수 있는 작품이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