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술 피리 - 동화 속 범죄사건 추리 파일
찬호께이 지음, 문현선 옮김 / 검은숲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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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에 찬호께이를 처음 알게 된 ‘13.67’을 읽었을 때만 해도 요코야마 히데오에 필적하는 중화권 경찰소설의 대가를 발견했다는 기쁨과 그 후속작에 대한 기대감이 앞섰지만, 이후 출간된 작품들은 버라이어티 쇼를 방불케 할 정도로 다양한 소재들을 다루고 있어서 기대했던 경찰소설에 대한 아쉬움과 함께 찬호께이의 장르적 한계는 어디인가?”라는 감탄을 동시에 느끼곤 했습니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와 기억이라는 미묘한 정신의 영역을 끌어들인 기억나지 않음, 형사’, 네트워크가 지배한 세상에서 악의가 얼마나 쉽게 싹을 틔우고 사람을 망가뜨리는지를 그린 망내인’, 초능력을 지닌 청부살인업자가 주인공인 길티 플레저(Guilty Pleasure) ‘풍선인간’, 그리고 도시괴담, 환상특급, SF 등 여러 장르를 한데 맛볼 수 있는 단편집 디오게네스 변주곡등 그야말로 종횡무진 장르를 넘나드는 이야기들을 선보여온 찬호께이의 이번 작품 마술 피리는 세 편의 익숙한 서양동화를 모티브로 삼은 고전적 미스터리입니다.

 

무엇보다 찬호께이의 초창기 작품들이라 더 궁금했는데, 작가후기에 따르면, ‘잭과 콩나무 살인사건처음으로 진지하게 창작해 공모전에 응모한, 작가로서의 원점과도 같은 작품으로 20086회 대만추리작가협회 공모전 결선에 진출했으며. ‘푸른 수염의 밀실은 이듬해 같은 공모전에서 대상을 수상한 찬호께이의 공식 데뷔작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400페이지 가까운 분량의 하멜른의 마술피리 아동 유괴사건은 앞선 두 작품의 주인공들을 내세운 시리즈물로 스케일이나 미스터리 서사 등 모든 면에서 가장 눈에 띄는 작품입니다.

 

주인공은 29살의 영국 귀족이자 법학박사인 라일 호프만과 그의 하인 한스입니다. 귀족생활에 환멸을 느낀 호프만은 작가로 더 왕성히 활동하며 신화와 전설에 각별한 관심을 갖습니다. 유럽 각지를 여행하며 기담과 괴담 수집에 열을 올리는 그는 특히 사건성이 엿보일 때면 탐정 노릇도 마다하지 않는데, 재미있는 건 그에게서 셜록 홈즈의 향기가 물씬 풍긴다는 점입니다.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일을 만나면 어떻게든, 너무도 기이하고 이해할 수 없는, 혹은 엄청난 재난을 일으킬지도 모르는 수단을 동원해서까지 바로잡으려”(p31) 하는 면모라든가, “정의 구현을 위해서라면 사소한 위법 행위 정도는 우습게 저지르는 대범함과 악인을 만났을 때 보이는 시니컬한 성격과 신랄한 말솜씨는 여지없이 홈즈를 떠올리게 하기 때문입니다.

호프만의 하인인 한스 역시 홈즈의 파트너 왓슨을 연상시키는 인물인데, 나름 자신만의 추리를 발휘하기도 하지만 호프만의 비약적인 추리를 따라가지 못해 쩔쩔 맨다든가 상황을 악화시키는 말실수를 반복하는 허당 캐릭터느 왓슨과 꼭 닮은꼴이기 때문입니다. 차이점이라면 왓슨이 의술을 지닌 박사라면 한스는 뛰어난 무예실력을 갖춘 호위무사란 점입니다. (덧붙여 호프만의 런던 고향집 집사 이름이 홈즈의 하숙집 주인과 같은 허드슨 부인이란 점도 우연의 일치는 아닌 듯 합니다.)

 

각각 잭과 콩나무’, ‘푸른 수염’, ‘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라는 익숙한 서양동화를 모티브로 한 세 편의 미스터리는 원작의 내용을 최대한 살린 상태에서 찬호께이의 상상력이 절묘하게 개입된 고전 미스터리입니다. ‘잭과 콩나무 살인사건(원작에서) 사람을 죽이고 재물을 훔친 소년이 어떻게 해피엔딩을 맞이할 수 있는가, 라는 의문에서 출발했다면, ‘푸른 수염의 밀실은 남편의 말을 잘 들었다면 아내는 끔찍한 비극을 맞이하지 않았을 거란 원작 속 여성비하적 시선에 대한 반발에서, 하멜른의 마술피리 아동 유괴사건은 원작 자체의 미스터리에 찬호께이의 순수한 상상력이 가미되어 전혀 새로운 권선징악 스토리로 확장된 작품입니다.

 

주인공인 호프만의 추리는 다소 비약이 심하기도 하고 결과론적인 설명이 많아서 살짝 끼워 맞추기 식 추리라는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가끔은 시마다 소지가 창조한 지나치게 천재적인 탐정미타라이 기요시가 떠오를 정도였습니다.), “일단 우리가 아는 사실에서 증거를 찾자.”라는 그의 좌우명대로 사소하지만 확실한 단서에서 출발하여 남들은 보지 못하는, 또는 보고도 깨닫지 못하는 진실들을 집요하게 밝혀내는 미덕을 갖추고 있습니다. 익숙한 동화를 절묘하게 비틀어 미스터리로 변주시킨 방식도 흥미로웠고, 이른바 숨은 동화라고 찬호께이 스스로 명명한 서브 텍스트들(각각 욕심쟁이 거인’, ‘미녀와 야수’, ‘헨젤과 그레텔’)이 메인 동화들과 결합되어 개성 넘치는 권선징악의 엔딩을 이끌어내는 과정도 재미있었습니다.

 

홍콩 출신 작가가 서양동화를 모티브 삼아 쓴 미스터리자체보다 찬호께이의 데뷔작이나 다름없는 작품들이란 점이 그의 팬들에게 더 큰 호기심을 일으킬 것 같은데, 셜록 홈즈를 연상시키는 고전 미스터리의 매력까지 더해진 덕분에 호기심 이상의 재미를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 다만, 여전히 그의 경찰소설을 고대하는 1인이다 보니 ‘13.67’의 뒤를 잇는 대하급 경찰소설의 출간을 바라는 마음은 여전히 간절한 게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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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고 빛나는 강
리즈 무어 지음, 이나경 옮김 / 황금시간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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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라델피아의 소도시 켄징턴을 담당하고 있는 경력 13년의 순찰경찰 미케일라 피츠패트릭(이하 미키). 한때 번성했으나 지금은 밑바닥까지 쇠락한 켄징턴은 마약 굴, 미국의 쓰레기 타운이란 별명이 붙을 정도로 매춘과 마약이 공공연히 이뤄지고 그로 인한 폐해는 도시 곳곳에서 쉽게 목격되는 곳입니다. 젊은 여성들이 연이어 교살된 채 발견되자 미키는 매번 그 시신이 사라진 동생 케이시가 아니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어려서부터 밝고 활달했던 케이시는 마약에 중독된 뒤 급기야 거리의 매춘부가 되고 말았는데, 한 달 전부터 소식이 끊겨 미키의 초조함은 극에 달합니다. 순찰경찰의 신분임에도 케이시의 행방을 찾기 위해 전직 파트너와 수사를 벌이던 미키는 연이은 여성 교살사건에도 휘말리면서 큰 위기를 맞이합니다.

 

고백하자면, 이 작품에 끌린 첫 번째 이유는 뒷표지에 실린 카피 - “마약과 매춘에 물든 필라델피아의 거리. 연쇄살인을 쫓는 한 경관의 고독한 싸움.” - 때문이었습니다. 말하자면 범죄스릴러에 대한 기대감 때문이었는데, 다 읽고 보니 (좀 심하게 말하면) 이 카피는 어느 정도는 저 같은 독자를 겨냥한 미끼에 가까웠습니다. ‘어느 정도라고 단서를 단 이유는 어쨌든 연쇄살인이 벌어지고 주인공 미키가 그 범인을 쫓는 행적이 그려지고 있으며 나름의 반전을 통해 예상치 못한 범인이 밝혀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작품이 다루고 있는 주제들을 비중 순으로 정리하면 비극적인 가족사를 지닌 두 자매의 오랜 애증 마약이 망가뜨린 사람들과 도시에 대한 애가 연쇄살인을 다룬 범죄스릴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미키가 비참하게 살해된 희생자를 발견하고 충격에 빠지는 초반부는 무척 흥미롭게 페이지가 넘어갔지만 이후 미키와 케이시의 어린 시절이라든가 4살 아들을 키우는 싱글워킹맘으로서의 미키의 고된 생활, 그리고 소식이 끊긴 케이시의 행방을 찾기 위한 미키의 분투가 길고 장황하게 묘사되는 지점부터는 다소 이른 실망감을 느꼈던 게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500페이지가 훌쩍 넘는 분량을 마지막까지 소화할 수 있었던 건 범죄스릴러 이상의 페이지터너로서의 매력이 가늘지만 끈질기게 눈길을 계속 사로잡았기 때문입니다. 미키와 케이시 자매의 비극적인 가족사는 특별히 새로울 것이 없는 내용들이었지만 짧고 톡톡 튀는 문장들과 군더더기 없는 빠른 템포 때문에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았고, 적절한 타이밍마다 등장하는 스릴러 코드들 연쇄살인사건, 케이시의 실종, 경찰 내부의 문제 등 은 다소 느슨해진 독자의 긴장감을 다시금 꼿꼿하게 세워주곤 해서 좀처럼 책갈피를 끼울 틈을 주지 않았습니다. 또 마약이 어떻게 사람들과 도시를 황폐하게 망가뜨린 끝에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만드는지를 그린 디테일한 장면들 역시 내내 씁쓸함과 흥미로움을 동시에 갖게 만드는 대목들이었습니다.

 

뒷표지의 카피에 꽂혀 큰 스케일의 범죄스릴러를 기대한 독자라면 다소 지루한 책읽기를 경험할 수도 있겠지만 스릴러 이상의 매력적인 서사를 갖춘 작품이니 중간에 잠시 지치더라도 꼭 마지막 페이지까지 완주할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길고 빛나는 강은 화끈하고 빠르진 않아도 오래 묵힌 덕분에 깊은 맛을 내는 듯한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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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조와 박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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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심적이고 정의로운 변호사로 칭송받던 시라이시 겐스케가 살해당한 채 발견됩니다. 살해당할 이유 자체가 없는 희생자의 정황 때문에 수사가 난항에 빠진 상태에서 시라이시의 통화 목록에 들어있던 구라키라는 남자가 갑자기 자신이 범인이라고 자백하며 사건은 순식간에 해결됩니다. 그런데 그는 시라이시를 살해한 이유에 대해 33년 전 자신이 저지른 살인사건 때문이라고 털어놓아 모두를 놀라게 합니다. 그 당시 유력한 용의자로 체포됐던 한 남자가 결백을 주장하다가 유치장에서 자살했고 경찰은 그것으로 사건을 종료시켰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경시청 형사 고다이와 그의 파트너 나카마치는 손쉽게 큰 공을 세운 주인공이 됐는데, 문제는 고다이의 마음속에 왠지 떨쳐낼 수 없는 찜찜함이 뿌리내리기 시작한 점입니다. 무엇보다 현재 사건의 가해자 구라키의 아들 가즈마와 피해자 시라이시의 딸 미레이가 수사결과에 의문을 품은 채 각자 자신의 아버지들에 대해 조사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이게 바로 내가 기다리던 히가시노 게이고다! 왕의 귀환!”이란 일본 독자의 서평에 공감할 정도로 백조와 박쥐는 오랜만에 히가시노의 진면목을 만끽할 수 있었던 작품입니다. 33년의 시차를 두고 벌어진 두 개의 살인사건을 통해 죄와 벌이라는 정답도 없고 한없이 무겁기만 한 주제를 그린 이 작품은 히가시노 특유의 사회파 미스터리의 미덕들이 집대성된 듯한 인상까지 풍깁니다. ‘옮긴이의 말가운데 이 인상에 대해 거론한 부분을 인용하면,

 

“‘죽어 마땅한 인간이라는 사적인 판단은 어디까지 허용될 수 있는가, 정의를 위한 분노의 절차는 무엇인가, 공정한 판결을 내리기 위한 조직의 애환과 한계와 맹점, 공소시효 폐지와 소급 적용을 둘러싼 문제점, 언론의 무신경한 취재경쟁, 가해자와 피해자 가족에게 쏟아지는 인터넷상의 경박한 재단과 호기심의 배설 등 인간의 죄와 벌을 둘러싼 굵직굵직한 논의들이 한자리에 총망라된다.” (p564)

 

이 작품의 제목 백조와 박쥐는 바로 가해자의 아들 가즈마와 피해자의 딸 미레이를 가리킵니다. 생김새도, 색깔도, 분위기도 정반대인 백조와 박쥐처럼 두 사람은 법정에서 적으로 만날 수밖에 없는 악연이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진실 찾기라는 똑같은 목표를 추구하게 되는 기구한 운명에 빠지고 맙니다.

구라키의 자백으로 사건의 진상이 명명백백해졌고 이제 양형을 다투는 재판만 남기고 있는 상태지만 가즈마와 미레이 모두 자신들의 아버지의 행위를 조금도 납득하지 못합니다. 가즈마는 아버지 구라키가 살인을 저지를 사람이 아니며 자백 곳곳에 허점과 거짓말이 숨어있다고 확신했고, 미레이는 온화하고 올곧은 품성의 아버지 시라이시를 지독하고 인정사정없는 변호사로 둔갑시킨 경찰의 발표를 도무지 믿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각자의 아버지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살인과 피살의 동기를 설명해줄 단서들을 뒤쫓으며 고군분투하던 두 사람은 결국 운명적으로 한 배에 올라타게 됩니다.

누가 봐도 이상한 두 사람의 연대에 대해 관할서 젊은 형사 나카마치는 아무래도 선뜻 이해하기는 어렵죠. 빛과 그림자, 낮과 밤, 마치 백조와 박쥐가 함께 하늘을 나는 듯한 얘기잖아요.”라며 곤혹스럽게 받아들입니다. 마치 독자들의 속내를 대변하듯 말입니다.

 

고다이 형사, 가즈마, 미레이 등 세 명의 화자가 이야기를 끌고 가지만 그에 못잖게 중요한 역할을 맡은 건 33년 전 결백을 주장하다가 자살한 남자의 유족들 딸 오리에, 아내 요코 입니다. 오랫동안 살인자의 가족이라 손가락질 받으며 고통스런 시간을 보낸 그들은 뒤늦게 진범이 밝혀지면서 또다시 경찰과 만나야 하는 불편한 상황에 처하는데, 이들을 통해 새롭게 드러나는 진실은 고다이 형사는 물론 가즈마와 미레이에게도 적잖은 충격을 던집니다. 말하자면 이들로 인해 현재의 사건과 33년 전의 사건이 복잡하게 교차하면서 미스터리의 심도는 물론 주제의 무게감까지 한껏 더해지게 됩니다.

 

진실 찾기의 주된 주체는 고다이 형사보다는 가해자의 아들 가즈마와 피해자의 딸 미레이입니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절대 살인할 리 없는 아버지절대 살해당할 리 없는 아버지’, 진짜 아버지의 모습을 알아내는 게 그들의 미션이다 보니 고다이 형사가 다가갈 수 없는 내밀한 지점까지 파고들 수 있었습니다. 물론 자신들이 알아낸 진실의 충격 역시 오롯이 감당해야 하는 안타까운 역할도 도맡았어야 하지만 말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알아낸 진실은 고다이 형사가 밝혀낸 현재 사건의 진상과 합쳐지면서 강력한 반전을 만들어냅니다.

 

간결하면서도 속도감 높은 히가시노의 미스터리에 비해 백조와 박쥐는 다소 느리고 둔해 보이는 게 사실입니다. 묵직한 주제 때문이기도 하고, 주인공들이 평범한 일반인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560여 페이지가 금세 넘어갈 정도로 흡입력이 대단한 작품입니다. 서평 초반에 언급한 일본 독자의 극찬에 대해 이견을 가진 독자도 있겠지만 개인적으론 무게감에 있어서만큼은 히가시노 작품 중 최상위권에 속한다는 생각입니다. 엇비슷하지만 저 역시 한마디 보탠다면 그래, 히가시노는 이런 작품을 써야지!” 정도라고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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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형사들 - 사라진 기와 케이 미스터리 k_mystery
정명섭 지음 / 몽실북스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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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극 미스터리를 좋아하는데, 정명섭 작가의 작품이라 더 기대가 되네요. 사라진 기와라는 모티브도 흥미롭고 서로 다른 두 사건이 어떻게 연결될지도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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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 없는 살인자 쿠르트 발란데르 경감
헨닝 만켈 지음, 박진세 옮김 / 피니스아프리카에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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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 없는 살인자’(1991)는 헨닝 망켈의 쿠르트 발란데르 시리즈의 시작을 알린 첫 작품입니다. 이후 2009불안한 남자까지 이 시리즈는 모두 11(한국에 소개된 건 8)의 작품이 출간됐습니다. 헨닝 망켈은 마르틴 베크 시리즈를 집필한 콤비 작가 마이 셰발과 페르 발뢰의 뒤를 이은 대표적인 스웨덴 작가인데 북유럽 스릴러에 대한 한국 독자들의 관심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는 편입니다.

유일하게 읽은 작품이 시리즈 5편인 사이드트랙인데, 그 외에 그나마 최근에(2013) 출간된 작품이 하필 시리즈 마지막 편인 불안한 남자뿐이라 왠지 읽기가 꺼려졌던 게 사실입니다. (나머지 작품들은 모두 2000~2004년에 출간돼서 개정판이 나오면 읽어야지, 하며 차일피일 미뤄왔습니다.) 그러던 중 시리즈 첫 편이 출간된다는 소식이 들려 너무 반가웠는데, 앞으로 쿠르트 발란데르 시리즈가 순서대로 한국에 소개됐으면 좋겠습니다.

 

스웨덴 남부 스코네 주의 소도시 위스타드의 형사 쿠르트 발란데르는 42살의 베테랑입니다. 뛰어난 수사력을 발휘하는 능력자지만 일반적인 스릴러 주인공들과 달리 딱 배 나온 아저씨스타일의 외모에 어딘가 살짝 허술해 보이는 인물입니다. 가정사도 만만치 않은데, 이혼을 요구하던 아내는 집을 나갔고, 19살 딸 린다 역시 어디에서 어떻게 지내는지 연락조차 없으며, 발란데르가 경찰이 되겠다고 결심한 시절부터 평생 그를 못 마땅히 여겨온 아버지는 아흔 살을 넘겨 치매 증세를 보입니다. 그야말로 사방이 꽉 막힌 듯한 난감한 상황입니다. 그의 유일한 위안과 안식은 오페라입니다. 젊은 시절 오페라 기획자를 꿈꿨던 그는 지금도 여전히 카세트테이프(!)에 녹음된 오페라를 듣는 순간을 가장 행복하게 여깁니다.

 

혹독한 겨울을 앞둔 어느 날 노부부 살인사건이 벌어집니다. 온갖 흉기가 동원된 끔찍한 고문 흔적들은 복수 또는 돈이 범행동기임을 가리키지만, 고립된 농가에 살던 그들은 적()도 없고 가진 것도 없는 평범한 노인들이었습니다. 유일한 단서는 죽어가던 부인이 남긴 외국이라는 단 한마디뿐입니다. 문제는 이 사실이 언론에 폭로되자 스웨덴 도처에 머물던 난민들을 향한 테러가 시작됐으며 끝내 살인사건까지 벌어졌다는 점입니다. 발란데르는 상부의 지시로 노부부 살인사건 대신 정치적 여파가 큰 난민 살인사건 해결에 전력을 쏟습니다. 사건도 사건이지만 마치 기다렸다는 듯 동시다발적으로 문제를 일으키는 아내와 딸과 아버지 때문에 발란데르의 스트레스는 극에 달합니다. 또 새로 부임한 매력적인 여검사 아네테 브롤린과의 미묘한 관계까지 겹쳐져 발란데르는 롤러코스터 같은 날들을 보내게 됩니다.

 

경찰 초년병 시절 죽을 고비를 넘긴 뒤로 살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는 법이야.”라는 주문을 외워온 발란데르로서는 일과 가족 때문에 몸과 마음이 극도로 피폐해지자 지금이 과연 살 때인지 죽을 때인지 혼란스럽기만 합니다. 그의 머릿속엔 벗어나기, 달아나기, 사라지기, 새 삶을 시작하기.”라는 욕구만 가득합니다. 대단한 카리스마가 있는 것도 아니고 위기를 헤쳐나갈 현명한 지혜가 있는 것도 아닌 발란데르가 자기 앞에 놓인 여러 개의 폭탄들 때문에 쩔쩔 매는 모습은 분명 매력적인 주인공과는 거리가 먼 모습이지만 역설적으로 오히려 그런 면 때문에 훨씬 더 인간미가 느껴진 것 역시 사실입니다.

 

몇 차례의 헛발질 때문에 수사는 장기화되고 한때 발란데르는 사건에서 손을 뗄 생각을 갖기도 하지만 결국 계시와도 같은 깨달음과 뛰어난 추리력으로 범인을 특정하고 사건을 해결합니다. 그렇지만 사건이 마무리된 뒤에도 발란데르에겐 불편하고 무거운 여운만 남을 뿐입니다. 첫 번째 이유는 새로운 경찰을 요구하는 시대의 변화입니다. 대도시에나 어울리는 범죄가 소도시에 만연하기 시작한데다 컴퓨터의 등장으로 수사방식의 패러다임이 변화하면서 발란데르는 자신이 서있을 자리에 대해 회의에 빠집니다. 또 하나의 이유는 모든 살인사건의 배경에 놓인 스웨덴의 난민 문제입니다. 인종주의자는 절대 아니지만 그렇다고 무턱대고 난민을 받아들이는 정부 정책에 발란데르는 반감을 느낍니다. 어쩌면 자신이 어렵게 해결한 끔찍한 살인사건들의 근원은 정부의 무책임한 태도의 산물일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영문판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쿠르트 발란데르 시리즈“What went wrong with Swedish society?”, 즉 스웨덴의 다양한 사회적 문제에 대한 비판적 태도를 견지한다고 합니다. 유일하게 읽은 사이드트랙의 서평을 찾아보니 복지국가 스웨덴의 민낯이라든가, 까마득히 벌어진 빈부 격차, 지독한 개인주의와 이기심이 빚어낸 폭력을 묘사한다.”라고 돼있는데, 그런 면에서 이 시리즈는 사회파 미스터리로 분류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작품 외적인 얘기를 잠깐만 하자면... ‘쿠르트 발란데르 시리즈는 한국에서 다소 이해하기 힘든 방식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작품을 출간한 피니스아프리카에 앞서서 2000년부터 좋은책만들기, , 웅진지식하우스 등 세 곳의 출판사가, 그것도 (시리즈 첫 편은 외면한 채) 원작 순서와 무관하게 중구난방으로 시리즈를 출간했는데, 심지어 작가의 이름마저도 헤닝 만켈, 헨닝 만켈, 헨닝 망켈 등 제각각으로 표기해왔습니다. 그래서인지 시리즈 첫 편을 출간한 피니스아프리카에서 앞으로 순서대로, 또 일관성 있게 출간해줬으면 하는 바람인데, 북유럽 스릴러를 좋아하기도 하지만 인간미 넘치는 중년형사 발란데르의 성장과 변화를 지켜보고 싶기도 하고, 디지털 시대로 넘어가기 직전의 1990년대의 아날로그 정서도 그립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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