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 없는 살인자 쿠르트 발란데르 경감
헨닝 만켈 지음, 박진세 옮김 / 피니스아프리카에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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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 없는 살인자’(1991)는 헨닝 망켈의 쿠르트 발란데르 시리즈의 시작을 알린 첫 작품입니다. 이후 2009불안한 남자까지 이 시리즈는 모두 11(한국에 소개된 건 8)의 작품이 출간됐습니다. 헨닝 망켈은 마르틴 베크 시리즈를 집필한 콤비 작가 마이 셰발과 페르 발뢰의 뒤를 이은 대표적인 스웨덴 작가인데 북유럽 스릴러에 대한 한국 독자들의 관심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는 편입니다.

유일하게 읽은 작품이 시리즈 5편인 사이드트랙인데, 그 외에 그나마 최근에(2013) 출간된 작품이 하필 시리즈 마지막 편인 불안한 남자뿐이라 왠지 읽기가 꺼려졌던 게 사실입니다. (나머지 작품들은 모두 2000~2004년에 출간돼서 개정판이 나오면 읽어야지, 하며 차일피일 미뤄왔습니다.) 그러던 중 시리즈 첫 편이 출간된다는 소식이 들려 너무 반가웠는데, 앞으로 쿠르트 발란데르 시리즈가 순서대로 한국에 소개됐으면 좋겠습니다.

 

스웨덴 남부 스코네 주의 소도시 위스타드의 형사 쿠르트 발란데르는 42살의 베테랑입니다. 뛰어난 수사력을 발휘하는 능력자지만 일반적인 스릴러 주인공들과 달리 딱 배 나온 아저씨스타일의 외모에 어딘가 살짝 허술해 보이는 인물입니다. 가정사도 만만치 않은데, 이혼을 요구하던 아내는 집을 나갔고, 19살 딸 린다 역시 어디에서 어떻게 지내는지 연락조차 없으며, 발란데르가 경찰이 되겠다고 결심한 시절부터 평생 그를 못 마땅히 여겨온 아버지는 아흔 살을 넘겨 치매 증세를 보입니다. 그야말로 사방이 꽉 막힌 듯한 난감한 상황입니다. 그의 유일한 위안과 안식은 오페라입니다. 젊은 시절 오페라 기획자를 꿈꿨던 그는 지금도 여전히 카세트테이프(!)에 녹음된 오페라를 듣는 순간을 가장 행복하게 여깁니다.

 

혹독한 겨울을 앞둔 어느 날 노부부 살인사건이 벌어집니다. 온갖 흉기가 동원된 끔찍한 고문 흔적들은 복수 또는 돈이 범행동기임을 가리키지만, 고립된 농가에 살던 그들은 적()도 없고 가진 것도 없는 평범한 노인들이었습니다. 유일한 단서는 죽어가던 부인이 남긴 외국이라는 단 한마디뿐입니다. 문제는 이 사실이 언론에 폭로되자 스웨덴 도처에 머물던 난민들을 향한 테러가 시작됐으며 끝내 살인사건까지 벌어졌다는 점입니다. 발란데르는 상부의 지시로 노부부 살인사건 대신 정치적 여파가 큰 난민 살인사건 해결에 전력을 쏟습니다. 사건도 사건이지만 마치 기다렸다는 듯 동시다발적으로 문제를 일으키는 아내와 딸과 아버지 때문에 발란데르의 스트레스는 극에 달합니다. 또 새로 부임한 매력적인 여검사 아네테 브롤린과의 미묘한 관계까지 겹쳐져 발란데르는 롤러코스터 같은 날들을 보내게 됩니다.

 

경찰 초년병 시절 죽을 고비를 넘긴 뒤로 살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는 법이야.”라는 주문을 외워온 발란데르로서는 일과 가족 때문에 몸과 마음이 극도로 피폐해지자 지금이 과연 살 때인지 죽을 때인지 혼란스럽기만 합니다. 그의 머릿속엔 벗어나기, 달아나기, 사라지기, 새 삶을 시작하기.”라는 욕구만 가득합니다. 대단한 카리스마가 있는 것도 아니고 위기를 헤쳐나갈 현명한 지혜가 있는 것도 아닌 발란데르가 자기 앞에 놓인 여러 개의 폭탄들 때문에 쩔쩔 매는 모습은 분명 매력적인 주인공과는 거리가 먼 모습이지만 역설적으로 오히려 그런 면 때문에 훨씬 더 인간미가 느껴진 것 역시 사실입니다.

 

몇 차례의 헛발질 때문에 수사는 장기화되고 한때 발란데르는 사건에서 손을 뗄 생각을 갖기도 하지만 결국 계시와도 같은 깨달음과 뛰어난 추리력으로 범인을 특정하고 사건을 해결합니다. 그렇지만 사건이 마무리된 뒤에도 발란데르에겐 불편하고 무거운 여운만 남을 뿐입니다. 첫 번째 이유는 새로운 경찰을 요구하는 시대의 변화입니다. 대도시에나 어울리는 범죄가 소도시에 만연하기 시작한데다 컴퓨터의 등장으로 수사방식의 패러다임이 변화하면서 발란데르는 자신이 서있을 자리에 대해 회의에 빠집니다. 또 하나의 이유는 모든 살인사건의 배경에 놓인 스웨덴의 난민 문제입니다. 인종주의자는 절대 아니지만 그렇다고 무턱대고 난민을 받아들이는 정부 정책에 발란데르는 반감을 느낍니다. 어쩌면 자신이 어렵게 해결한 끔찍한 살인사건들의 근원은 정부의 무책임한 태도의 산물일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영문판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쿠르트 발란데르 시리즈“What went wrong with Swedish society?”, 즉 스웨덴의 다양한 사회적 문제에 대한 비판적 태도를 견지한다고 합니다. 유일하게 읽은 사이드트랙의 서평을 찾아보니 복지국가 스웨덴의 민낯이라든가, 까마득히 벌어진 빈부 격차, 지독한 개인주의와 이기심이 빚어낸 폭력을 묘사한다.”라고 돼있는데, 그런 면에서 이 시리즈는 사회파 미스터리로 분류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작품 외적인 얘기를 잠깐만 하자면... ‘쿠르트 발란데르 시리즈는 한국에서 다소 이해하기 힘든 방식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작품을 출간한 피니스아프리카에 앞서서 2000년부터 좋은책만들기, , 웅진지식하우스 등 세 곳의 출판사가, 그것도 (시리즈 첫 편은 외면한 채) 원작 순서와 무관하게 중구난방으로 시리즈를 출간했는데, 심지어 작가의 이름마저도 헤닝 만켈, 헨닝 만켈, 헨닝 망켈 등 제각각으로 표기해왔습니다. 그래서인지 시리즈 첫 편을 출간한 피니스아프리카에서 앞으로 순서대로, 또 일관성 있게 출간해줬으면 하는 바람인데, 북유럽 스릴러를 좋아하기도 하지만 인간미 넘치는 중년형사 발란데르의 성장과 변화를 지켜보고 싶기도 하고, 디지털 시대로 넘어가기 직전의 1990년대의 아날로그 정서도 그립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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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소년
레이먼드 조 지음 / 엘릭시르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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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죽음 이후 학교를 그만둔 17살 장민준이 몸을 의탁한 건 아이러니하게도 사채 때문에 엄마를 압박했던 조폭 보스 백기입니다. 엄마를 죽인 게 백기라고 의심했지만 뒤늦게 엄마가 자살한 걸로 밝혀지자 자신의 싸움꾼 재능을 알아본 백기의 스카웃 제의에 응한 것입니다. 백기의 카리스마에 빠진 민준은 이후 그를 추종하며 뛰어난 싸움꾼 기질을 발휘했고 2년 만에 2인자 자리에 오릅니다. 술과 담배를 안 하는 것은 물론 절대 살인은 않겠다는 신념을 지닌 민준은 죠스라 이름 붙인 공업용 줄, 일명 야스리하나만으로 그 바닥에서 화제의 인물이 됩니다. VVIP들만 드나드는 강남 클럽을 관리하던 어느 날, 민준은 그곳에서 일하는 여리고 선한 누나 영선에게 빠져듭니다. 하지만 민준은 하루아침에 가장 소중했던 두 사람을 잃습니다. 그것도 백기가 영선을 살해하고 사라졌다는 끔찍한 소식과 함께 말입니다.

 

읽는 동안 이병헌 주연의 영화 달콤한 인생’, 김언수의 뜨거운 피’, 그리고 청부살인을 다룬 방진호의 방의강 시리즈가 자주 떠올랐습니다. 이른바 한국형 누아르의 고전적인 문법에 충실한 작품이란 얘긴데, 하지만 미성년자인 10대 소년이 야스리를 들고 피비린내 나는 조폭 액션을 펼친다는 건 어디서도 본 적 없는 설정이라 무척 흥미롭게 읽혔습니다. 또 그 또래라면 겪을 수밖에 없는 여러 가지 통과의례와 혼란도 그려지는데, 덕분에 하드보일드 누아르 성장소설이라는 독특한 장르를 구축했다는 생각입니다.

 

민준의 주위엔 그의 성장을 부추기거나 성장 자체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인물들이 존재합니다. 고도비만으로 인해 왕따를 당하다가 민준의 도움을 받았던 같은 반 여학생 수빈, 보스이자 친형과도 같은 존재인 백기, 족히 열 살 이상은 더 많은데도 꼬박꼬박 민준을 형님으로 모시는 조직원 땅콩, 그리고 결코 잊지 못할, 비참하게 살해된 첫사랑 영선이 그들입니다. 무엇보다 교복을 입고 게임을 즐기는 제 또래들과 달리 야스리하나에 의지한 채 밤의 세계에 발을 담근 것 자체가 남들과는 전혀 다른 성장 환경이다 보니 민준의 10대 후반은 롤러코스터마냥 하루에도 몇 번씩 큰 낙차를 그리면서 위태롭게 흘러갑니다.

 

이야기의 가장 큰 줄기는 민준이 악전고투하며 영선을 살해한 범인을 찾는 과정입니다. 형사들은 양아치가 창녀를 죽였어. 세상에서 제일 흔한 살인이야.”라며 백기를 범인으로 단정하지만 민준은 그 말을 믿지 않고 영선이 살해당한 VVIP 5번방에 머물던 또 한 사람에 주목합니다. 그 과정에서 민준은 양지의 재벌과 음지의 재벌, 라이벌 폭력조직과 그들이 고용한 용병 등 숱한 위험천만한 추격자들과 목숨을 건 싸움을 벌입니다. 지난한 진범 찾기는 몇 차례의 배신과 반전을 통해 성공하고 민준을 위협하던 자들은 나름대로 응징을 받게 되지만, 멘토와 첫사랑을 잃은 민준의 상처는 영원히 회복되지 못할 깊은 내상을 입습니다.

 

(민준) “내가 알던 모든 사람들이, 이젠 내가 알던 사람들이 아닌 것 같아.”

(수빈) “당연히 세상은 그대로야. 그냥 네가 처음부터 몰랐던 것뿐이지.” (p423)

 

이전까지 자기계발 서적만 집필했다는 작가의 첫 소설이라는데 누아르는 물론이고 풍경과 심리에 대한 묘사도 매력적이어서 후속작에 대한 기대감을 가져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앞서 언급했던 달콤한 인생’, ‘뜨거운 피’, ‘방의강 시리즈에 비해 이야기가 단선적이라는 점은 아쉬웠지만(0.5개가 빠진 이유이기도 합니다.) 구조도 탄탄하고 캐릭터도 생생하게 빛나서 혹시라도 장민준 시리즈로 이어진다면 더 반가울 것 같기도 합니다. 후반에 그 가능성에 대한 약간의 떡밥이 던져지긴 했는데 이 작품이 호평을 받는다면 떡밥 이상의 결실을 맺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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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받지 못한 여자 스토리콜렉터 10
넬레 노이하우스 지음, 김진아 옮김 / 북로드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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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받지 못한 여자는 독일 호프하임 경찰서 강력반의 멋진 콤비인 피아 키르히호프와 올리버 폰 보덴슈타인이 이끄는 타우누스 시리즈의 첫 편입니다. 지금까지 출간된 모든 시리즈를 읽었는데도 무슨 이유에선지 시리즈 첫 편인 이 작품만은 꽤 오랫동안 책장에서 제 선택을 외면당하고 있었습니다. 밀린 숙제를 하듯 방치했던 작품들을 하나씩 꺼내서 읽기로 한 덕분에 겨우 빛을 본 셈인데 결과적으로는 마치 두 주인공의 프리퀄을 만끽한 듯한 의외의 즐거움을 맛볼 수 있었습니다.

 

피아와 올리버는 각각 38, 45살의 나이로 등장합니다. (최근작인 잔혹한 어머니의 날에서 피아는 곧 만 50세를 앞두고 있습니다.) 두 사람 모두 프랑크푸르트에서 오랫동안 도시생활을 하다가 시골이라 할 수 있는 호프하임에서 반장과 신참으로 첫 만남을 갖게 됩니다. 특히 피아는 평범한 주부를 요구했던 남편 때문에 7년의 공백 끝에 복직한 상태였고, 올리버는 강력11반의 쌩쌩하고 의욕적인 반장으로 등장해서 무척 신선하게 보였습니다. 상처받고 지친 모습이었던 두 주인공의 최근작을 생각해보면 이렇게 시리즈의 첫 편을 일부러 미뤄뒀다가 프리퀄처럼 읽는 것도 괜찮다는 생각입니다.

 

두 주인공의 첫날은 분주하게 시작됩니다. 청렴결백한데다 정치적 영향력도 있는 노()검사가 자살한 채 발견돼서 충격에 빠져있는데 현장을 채 살펴보기도 전에 젊은 여성 이자벨이 추락사했다는 소식이 들려옵니다. 이후 피아와 올리버는 이자벨 사건에 전념하는데, 문제는 이자벨의 주변을 조사할수록 예상치 못한 추악한 사건들이 고구마줄기처럼 계속 딸려 나온다는 점입니다. 또한 이자벨이 남편이 근무하는 말 종합병원은 물론 그녀가 몸 담았던 유명 승마클럽 등 자취를 남긴 곳마다 온갖 추문과 오점을 뿌려온 탓에 아무도 그녀의 죽음을 애도하거나 슬퍼하지 않는다는 점도 피아와 올리버를 당황케 만듭니다.

 

시리즈 첫 작품이어서 그런지 몰라도 다른 작품들에 비해 다소 산만하고 복잡하게 보입니다. 그 누구도 용의자가 될 수 있을 만큼 이자벨 주변의 인물들의 상황을 복잡하게 꼬아놓았고, 그런 탓에 피아와 올리버의 수사는 자연히 좌충우돌 동분서주 이상의 성과를 내지 못합니다. 고구마줄기처럼 딸려 나온 사건들은 꽤 묵직하고 중요한 것들로 판명되지만 정작 이자벨 살인사건 자체와는 동떨어진 것들이라 피아와 올리버를 피곤하게만 만듭니다.

특히 시기와 질투, 탐욕과 불신으로 얽힌 이자벨 주변 인물들의 관계도가 너무 복잡해서 읽는 동안 몇 번씩이나 혼란을 겪기도 했습니다. 개인적으론 프리퀄처럼 읽는 재미에 푹 빠져서 아쉬움이 덜한 편이었지만 상대적으로 타우누스 시리즈의 다른 작품들에 비해 입소문을 덜 탔던 건 이런 이유 때문으로 보입니다.

 

물론 이만큼 복잡한 설계도를 그려내고 한 치의 오차 없이 엔딩을 끌어낸 건 대단한 일입니다. ‘사랑받지 못한 여자라는 제목보다 모두가 죽이고 싶었던 여자라는 제목이 더 어울릴 만큼 수많은 용의자가 등장하고 그에 따른 부수적 사건들이 여러 건 등장하지만 그 거미줄 같은 상황 속에서 피아와 올리버는 집요한 추리와 탐문 끝에 진실을 찾아내는데, 다 읽고 복기해보면 그 복잡한 과정의 설계와 마무리에 감탄이 나올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만한 저력이니 이후 타우누스 시리즈가 세상의 독자들과 만날 수 있었던 거겠죠.

 

혹시라도 저처럼 이 작품을 아직 안 읽은 넬레 노이하우스의 팬이라면 피아와 올리버의 첫 만남, 그리고 두 사람과 가까운 인물들(가족과 경찰 모두)의 첫 등장을 이 작품을 통해 꼭 맛보시기 바랍니다. 피아와 올리버의 역사적인(?) 첫 만남을 묘사한 문장들로 서평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사실 이 문장을 읽기 전까지 전 피아가 꽤 단신인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줄무늬 셔츠에 밝은 색 리넨 양복을 입고 포도밭 사이로 걸어오는 그를 보며 피아는 저런 사람과 함께 일을 하는 건 과연 어떨까 생각해봤다. (중략) 그와 얘기하려면 178센티미터인 피아도 올려다봐야 한다.” (p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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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전트 러너
존 르 카레 지음, 조영학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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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에서의 오랜 현장 임무를 마치고 런던으로 돌아온 47살의 비밀정보국 요원 내트는 자신에게 주어질 두 개의 선택지 - 무료한 사무직이 되거나 해고 통보를 받아들이거나 를 놓고 고민에 빠집니다. 하지만 정보국은 내트에게 유명무실해진 분국 한 곳의 지휘를 제안합니다. 제안 자체가 의심스럽지만 내트는 베테랑 스파이로서의 관록을 발휘해보기로 결심합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악재가 터지면서 내트와 분국 요원들은 좌절하게 됩니다. 내트는 취미 이상의 애정을 쏟아온 배드민턴에 의지해 몸과 마음을 달래려 하는데 그런 그에게 20대 청년 에드가 도전장을 내밉니다. 처음엔 다혈질에 괴짜처럼 보였지만 매주 이어진 배드민턴 게임을 통해 내트는 에드에게 친밀감을 느낍니다. 그러던 중 러시아 거물급 스파이의 행적을 눈치 챈 내트는 베테랑답게 정보국 전체를 이끌며 작전 지휘를 맡습니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 내트는 갑자기 반역자로 몰리고, 함께 작전을 펼치던 동료들로부터 심문을 받는 신세가 됩니다.

 

(인터넷 서점의 소개글에는 내트가 반역자로 몰리게 된 이유까지 상세히 설명돼있는데, 읽다 보면 쉽게 짐작할 수 있는 내용이긴 하지만 그래도 나름 스포일러이기 때문에 가급적 피하시기 바랍니다.)

 

스파이 소설을 쓰는 스파이라는 별명답게 존 르 카레는 실제로 영국에서 스파이로 복무했던 경험이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임무에 관해서든 사생활에 관해서든 스파이의 내밀한 부분들을 무척 리얼하게 그려냈다는 생각입니다.

한국에 꽤 많은 작품이 소개됐음에도 불구하고 존 르 카레를 읽은 것은 모스트 원티드 맨이 유일합니다. 딱히 스파이물이 취향에 안 맞는 건 아닌데 5~6년 전쯤 한 작품을 중도에 포기한 뒤로 좀처럼 손이 나가지 않았던 게 가장 큰 이유입니다.

 

각주에 따르면 에이전트 러너는 비밀에 접근 가능한 사람들을 포섭해 관계를 유지하고 비밀 확보를 위해 지시와 지원을 하는 고급 요원을 지칭하는데, 말하자면 스파이를 발굴하고 관리하는 스파이이란 뜻입니다. 그만큼 경험도 많아야 되고 유능해야 한다는 얘긴데, 내트는 요원으로서의 능력은 물론 살짝 마초 기질도 지닌 매력적인 중년남자로 그려집니다.

 

이 작품의 중요한 배경 가운데 하나는 20166월 결정된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 즉 브렉시트(Brexit)입니다. 주인공 내트는 물론 그의 배드민턴 파트너인 에드의 입을 통해 작가는 브렉시트에 대한 반감과 미국 대통령 트럼프에 대한 증오심을 숨김없이 드러냅니다. 그리고 내트를 반역자로 몰고 간 결정적인 계기 역시 브렉시트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인지 이 작품을 읽기 전에 브렉시트가 결정된 직후 영국의 정치적, 사회적 분위기를 미리 공부한다면 훨씬 더 흥미로운 책읽기가 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유명무실해진 비밀정보국 분국을 맡았다가 좌절하는 이야기가 전반에 펼쳐지고 이어 러시아 거물급 스파이가 일으키는 긴장감 넘치는 첩보 미션이 전개됩니다. 그러다가 주인공 내트가 반역자로 몰리면서 막판 클라이맥스로 이어지는데, 보통 이런 설정은 주인공이 오해를 풀고 악당을 제거하는 이야기가 되기 마련이지만 이 작품은 전혀 뜻밖의 결말을 향해 달려갑니다. 누가 적이고 누가 아군인지조차 불분명해지는가 하면, 정의와 불의의 경계선도 모호해지면서 주인공 내트의 선택과 결정은 일반적인 스파이물에선 볼 수 없는 특별한 반전을 이끌어내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브렉시트가 야기한 영국의 암울한 미래에 관한 정치적 찬반론까지 진하게 녹아든 탓에 독자는 내트의 마지막 결정에 대해 명쾌한 판단을 내리기 어렵게 됩니다. (이런 점 때문인지 뉴욕타임스는 스파이의 환멸을 담아 영국에 보내는 일격.”이라고 소개했습니다.)

 

스파이물의 미덕도 잘 갖췄고 영국식 유머도 간간이 맛볼 수 있는 매력적인 작품이지만, 동시에 영국식 불친절함이 남긴 모호함과 아쉬움도 그만큼 많이 남았던 작품이기도 합니다. 내트의 행적 가운데 일부는 ?”라는 의문이 들었고, 반역자로 몰린 뒤 그가 내린 마지막 결정 역시 상당 부분 생략돼있어서 어떻게?”?”라는 궁금증이 전혀 해소되지 않았습니다. 영국 미스터리와 스릴러에서 드물지 않게 겪는 이 불친절함은 도무지 적응하기가 쉽지 않은데, ‘에이전트 러너역시 비슷한 경험을 안긴 작품이었습니다.

제대로 만나보지 못한 거장이라 작고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남긴 작품들에 대해 계속 관심을 가지겠지만 매력적인 스파이 서사와 블랙유머의 미덕들이 부디 영국식 불친절함에 의해 가려지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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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터
유즈키 아사코 지음, 권남희 옮김 / 이봄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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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사이트에서 만난 세 남자에게 거액을 갈취한 뒤 의문사로 가장해 살해한 꽃뱀 살인사건의 범인 가지이 마나코는 범행 그 자체보다 뚱뚱하고 추한 외모때문에 세간에 화제를 일으킵니다. 반성은커녕 범행을 부인하며 오히려 자신은 음식과 사랑으로 그들에게 헌신했다는 가지이의 주장은 저런 여자가 꽃뱀?”이란 비아냥은 물론 극렬한 여성혐오까지 일으킵니다.

유력 주간지의 특종제조기마치다 리카는 가지이가 요리 블로그를 운영했고 고급 요리교실에 다닌 점에 착안하여 요지부동이던 그녀와의 면회를 성사시킵니다. 하지만 가지이는 사건에 관해선 함구한 채 리카에게 엉뚱한 요구를 합니다. 자신의 지시한 요리를 직접 해먹거나 지정한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그 소감을 얘기해달란 것입니다. 독점 인터뷰를 노리던 리카는 그녀의 요구대로 하나같이 버터가 들어간 고칼로리의 음식들을 먹게 되는데, 예상치 못한 버터의 향미에 빠져 급격한 체중 증가라는 부작용을 겪지만 동시에 가지이에 대한 세상의 편견이 잘못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의문과 함께 사건에 관한 새로운 가능성을 떠올리기에 이릅니다.

 

꽤 장황하게 줄거리를 정리했지만 실은 극히 초반의 내용을 정리한 것에 불과합니다. 600페이지에 담긴 이야기는 워낙 버라이어티하고 그에 걸맞게 등장인물도 꽤 많아서 일목요연한 줄거리 정리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초반 설정이나 출판사 소개글만 보면 꽃뱀 살인마가지이와 특종제조기리카의 맞대결을 다룬 미스터리 혹은 여성혐오를 다룬 페미니즘 소설처럼 보이지만 버터는 훨씬 더 많은 주제를 다룬 작품입니다. 읽으면서 끄적거린 메모 속엔 요리, 여성의 몸, 가족이란 이름의 굴레, 가부장제, 자유의지, 슬기로운 자기애, 성장소설 등이 적혀 있는데 그만큼 다양한 주제와 서사들이 두툼한 분량 안에 포진돼있다는 뜻입니다. 오히려 미스터리는 이 작품에서 하위서사 정도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지이의 과거와 현재를 집요하게 추적하며 진실을 쫓는 리카의 행적 덕분에 나름 독특한 미스터리를 맛볼 수도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위에 나열한 주제 중에 딱 한 가지만 꼽으라고 한다면 단연코 성장소설입니다. 이미 특종제조기로 인정받은 30대 초반의 마치다 리카가 희대의 살인마로 낙인찍힌 가지이와의 만남을 통해 자신의 삶 살얼음 같은 불안정한 사랑, 오랜 시간 애증의 범벅이었던 가족, 복잡다단한 관계로 엮인 주변 사람들, 막연했던 기자로서의 미래 을 찬찬히 되돌아보면서 스스로도 생각지 못한 새로운 미래와 인간관계를 설계하는 이야기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리카에게 영향을 받은 주변 인물들 역시 크고 작은 성장을 겪는데, 절친이자 세컨드 주인공인 레이코, 위기의 연인 마코토, 성실한 정보원 시노이, 느긋한 직장후배 기타무라는 리카와의 인연 덕분에 제각각 안고 있던 고민과 갈등을 조금씩 해소하며 뒤늦은 성장을 경험하게 됩니다.

 

리카의 성장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건 버터가 들어간 고칼로리 음식들입니다. 가지이를 만나기 전까지 요리는커녕 제대로 된 주방도구조차 없던 리카는 진하고 고소하고 부드러운 버터의 세계에 푹 빠진 뒤로 직접 요리를 하며 새로운 세상을 만나게 됩니다. 연인, 가족, 절친, 직장 등 그녀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던 고민들은 버터가 든 음식과 요리라는 행위를 통해 생각지도 못한 출구를 찾아냅니다. 그 고민들이 모두 해피엔딩을 맞이하진 않지만 적어도 막다른 벽 앞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던 절망에선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애증과 고민의 대상들이던 주위 사람들을 초대하여 칠면조 파티를 벌이는 마지막 장면은 리카가 버터와 음식과 요리를 통해 한 뼘 넘게 성장한 훈훈한 피날레를 장식하고 있습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라면 이 작품에 기대를 걸었던 미스터리 서사와 여성혐오라는 주제가 생각만큼 도드라지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 너무 많은 소()주제들이 등장하는 바람에 이 작품의 가장 큰 줄기가 무엇인지, 리카가 가지이와의 독점 인터뷰를 통해 세상에 알리고자 했던 것이 과연 무엇인지 조금은 희미해졌다는 점도 아쉬웠습니다. 물론 요리, 여성, 가부장제, 가족 등 작가가 방점을 찍었던 주제들이 한줄기로 잘 꿰여져 있긴 하지만 개인적으론 뚜렷한 연결고리가 느껴지지 않았던 게 사실입니다. 또 이 모든 걸 담기 위해 작의에 비해 다소 과하게 느껴진 분량도 종종 책읽기를 느슨하게 만든 요인이었습니다.

 

한국에 소개된 유즈키 아사코의 작품이 모두 9편인데, 제목들은 모두 낯익지만 실제 읽은 건 버터가 처음입니다. 일본소설 특유의 정취도 잘 살아있고 문장도 간결하고 선명해서 다른 작품들에도 기대와 관심을 가져볼 생각입니다. “그간 작품에서 여성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고 억압하는 사회에 대한 분노를 드러내왔다.”는 작가의 인터뷰는 그런 기대와 관심을 더 자극하는데, 어떤 작품부터 읽을지 찬찬히 검색해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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