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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터
유즈키 아사코 지음, 권남희 옮김 / 이봄 / 2021년 8월
평점 :
만남사이트에서 만난 세 남자에게 거액을 갈취한 뒤 의문사로 가장해 살해한 ‘꽃뱀 살인사건’의 범인 가지이 마나코는 범행 그 자체보다 ‘뚱뚱하고 추한 외모’ 때문에 세간에 화제를 일으킵니다. 반성은커녕 범행을 부인하며 오히려 자신은 음식과 사랑으로 그들에게 헌신했다는 가지이의 주장은 “저런 여자가 꽃뱀?”이란 비아냥은 물론 극렬한 여성혐오까지 일으킵니다.
유력 주간지의 ‘특종제조기’ 마치다 리카는 가지이가 요리 블로그를 운영했고 고급 요리교실에 다닌 점에 착안하여 요지부동이던 그녀와의 면회를 성사시킵니다. 하지만 가지이는 사건에 관해선 함구한 채 리카에게 엉뚱한 요구를 합니다. 자신의 지시한 요리를 직접 해먹거나 지정한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그 소감을 얘기해달란 것입니다. 독점 인터뷰를 노리던 리카는 그녀의 요구대로 하나같이 버터가 들어간 고칼로리의 음식들을 먹게 되는데, 예상치 못한 버터의 향미에 빠져 급격한 체중 증가라는 부작용을 겪지만 동시에 가지이에 대한 세상의 편견이 잘못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의문과 함께 사건에 관한 새로운 가능성을 떠올리기에 이릅니다.
꽤 장황하게 줄거리를 정리했지만 실은 극히 초반의 내용을 정리한 것에 불과합니다. 600페이지에 담긴 이야기는 워낙 버라이어티하고 그에 걸맞게 등장인물도 꽤 많아서 일목요연한 줄거리 정리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초반 설정이나 출판사 소개글만 보면 ‘꽃뱀 살인마’ 가지이와 ‘특종제조기’ 리카의 맞대결을 다룬 미스터리 혹은 여성혐오를 다룬 페미니즘 소설처럼 보이지만 ‘버터’는 훨씬 더 많은 주제를 다룬 작품입니다. 읽으면서 끄적거린 메모 속엔 요리, 여성의 몸, 가족이란 이름의 굴레, 가부장제, 자유의지, 슬기로운 자기애, 성장소설 등이 적혀 있는데 그만큼 다양한 주제와 서사들이 두툼한 분량 안에 포진돼있다는 뜻입니다. 오히려 미스터리는 이 작품에서 하위서사 정도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지이의 과거와 현재를 집요하게 추적하며 진실을 쫓는 리카의 행적 덕분에 나름 독특한 미스터리를 맛볼 수도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위에 나열한 주제 중에 딱 한 가지만 꼽으라고 한다면 단연코 ‘성장소설’입니다. 이미 ‘특종제조기’로 인정받은 30대 초반의 마치다 리카가 희대의 살인마로 낙인찍힌 가지이와의 만남을 통해 자신의 삶 – 살얼음 같은 불안정한 사랑, 오랜 시간 애증의 범벅이었던 가족, 복잡다단한 관계로 엮인 주변 사람들, 막연했던 기자로서의 미래 – 을 찬찬히 되돌아보면서 스스로도 생각지 못한 새로운 미래와 인간관계를 설계하는 이야기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리카에게 영향을 받은 주변 인물들 역시 크고 작은 성장을 겪는데, 절친이자 세컨드 주인공인 레이코, 위기의 연인 마코토, 성실한 정보원 시노이, 느긋한 직장후배 기타무라는 리카와의 인연 덕분에 제각각 안고 있던 고민과 갈등을 조금씩 해소하며 뒤늦은 성장을 경험하게 됩니다.
리카의 성장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건 버터가 들어간 고칼로리 음식들입니다. 가지이를 만나기 전까지 요리는커녕 제대로 된 주방도구조차 없던 리카는 진하고 고소하고 부드러운 버터의 세계에 푹 빠진 뒤로 직접 요리를 하며 새로운 세상을 만나게 됩니다. 연인, 가족, 절친, 직장 등 그녀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던 고민들은 버터가 든 음식과 요리라는 행위를 통해 생각지도 못한 출구를 찾아냅니다. 그 고민들이 모두 해피엔딩을 맞이하진 않지만 적어도 막다른 벽 앞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던 절망에선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애증과 고민의 대상들이던 주위 사람들을 초대하여 칠면조 파티를 벌이는 마지막 장면은 리카가 버터와 음식과 요리를 통해 한 뼘 넘게 성장한 훈훈한 피날레를 장식하고 있습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라면 이 작품에 기대를 걸었던 미스터리 서사와 여성혐오라는 주제가 생각만큼 도드라지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또, 너무 많은 소(小)주제들이 등장하는 바람에 이 작품의 가장 큰 줄기가 무엇인지, 리카가 가지이와의 독점 인터뷰를 통해 세상에 알리고자 했던 것이 과연 무엇인지 조금은 희미해졌다는 점도 아쉬웠습니다. 물론 요리, 여성, 가부장제, 가족 등 작가가 방점을 찍었던 주제들이 한줄기로 잘 꿰여져 있긴 하지만 개인적으론 뚜렷한 연결고리가 느껴지지 않았던 게 사실입니다. 또 이 모든 걸 담기 위해 작의에 비해 다소 과하게 느껴진 분량도 종종 책읽기를 느슨하게 만든 요인이었습니다.
한국에 소개된 유즈키 아사코의 작품이 모두 9편인데, 제목들은 모두 낯익지만 실제 읽은 건 ‘버터’가 처음입니다. 일본소설 특유의 정취도 잘 살아있고 문장도 간결하고 선명해서 다른 작품들에도 기대와 관심을 가져볼 생각입니다. “그간 작품에서 여성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고 억압하는 사회에 대한 분노를 드러내왔다.”는 작가의 인터뷰는 그런 기대와 관심을 더 자극하는데, 어떤 작품부터 읽을지 찬찬히 검색해봐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