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스토리 재팬 클래식 플러스 2
오쿠다 히데오 지음, 임희선 옮김 / 북스토리 / 2014년 7월
평점 :
절판


30대 초중반, 그러니까 젊음의 특권으로 가득했던 20대를 떠나보낸 뒤 중년이란 타이틀을 목전에 둔 여성들의 이야기이자 소위 O.L(Office Lady), 즉 직장여성들이 남성중심의 조직에서 겪는 다양한 애환과 고충들을 오쿠다 히데오 특유의 블랙코미디 스타일로 풀어낸 다섯 편의 단편이 실린 작품집입니다.

 

32~36살인 다섯 명의 주인공은 각각 내로라하는 기업에서 10~14년차를 맞이한 유능한 직장인들입니다. 이미 30대에 들어섰지만 이대로 시간이 멈춰주기를, 그래서 영원히 Girl로 남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싱글의 경우 비혼주의자도 있지만 때를 놓치는 게 아닐까 고민하는 불안감을 가진 경우가 더 많습니다. 10년차 이상의 유능한 직장여성이 겪어야만 하는 골치 아픈 문제들 나이가 많은, 혹은 남녀간 수평적 인간관계를 이해 못하는 남자직원을 부하로 뒀거나 충분한 커리어를 갖췄음에도 남성에 비해 불이익을 받는다거나 심지어 남편보다 수입이 더 많아진 탓에 발생하는 스트레스 등 을 공통적으로 품고 있습니다.

 

일과 자유와 연애, 그중 하나라도 잃고 싶지 않았다. 서른넷이 된 지금은 이 나이가 되어서 타협하고 싶지 않다는 것과 슬슬 결혼하지 않으면 평생 독신으로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반반이다. (중략) 진짜로 바라는 것은 시간이 멈춰주는 것이다. (p61)

 

띠동갑인 남자 신입사원에게 마음을 빼앗겼다가 결국 그 짝사랑이 34살 싱글인 자신의 현실도피였다는 걸 뒤늦게 깨닫는 요코, 이른 승진 탓에 나이 많은 남자를 부하로 두게 된 세이코의 고민과 갈등, 30대 후반에도 철없이배꼽티를 입고 클럽에서 에너지를 내뿜는 싱글 선배를 보며 더 이상 추해지기 전에 Girl을 그만둬야 하는 게 아닌가 고민하는 32살 유키코 등 현실감 100배인 주인공들의 이야기가 때론 흥미진진하게, 때론 안쓰럽게 전개됩니다.

 

사실 나이라는 건 상대적인 것이어서 49살은 39살을, 39살은 29살을 부러워하지만, 29살 역시 20대 초반을 부러워하고 질투하며 자신의 과거를 그리워하는 게 인지상정입니다. 오쿠다 히데오는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이 자괴감과 질투심을 다소 가벼워 보이지만 정곡을 찌르는 설정들을 동원하여 독자에게 소구합니다. 특히 한 인간의 황금기이자 동시에 노화가 시작되는 쇠퇴기의 초입인 ‘30대 초중반이란 나이를 직장여성이란 캐릭터와 잘 조합한 덕분에 이 작품의 매력은 훨씬 강력해졌습니다.

 

다섯 명의 주인공들은 남성중심의 조직문화가 횡행하는 가운데 위아래를 막론하고 자기 할 말을 다 하는 소신 있는 인물들입니다. 또 이런저런 갈등을 겪지만 결국엔 대부분 긍정의 에너지를 얻거나 삶에 대한 자신감을 회복하는 해피엔딩을 맞이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으며, 그런 면에서 주인공들의 해피엔딩은 오쿠다 히데오가 건넨 (선한 의미의) 판타지이자 대리만족 기제에 불과합니다. 현실은 우중충한 새드 엔딩이 대부분인 게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오쿠다 히데오의 판타지와 대리만족 기제는 그다지 불편해 보이거나 손에 잡히지 않는 그림의 떡처럼 보이진 않습니다. 어설픈 교훈도, 억지스런 힐링도 강요하지 않으며 그 또래 여성들을 진심으로 응원하는 진정성이 엿보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런 느낌 역시 제가 남자라서 드는 생각이라고 비난한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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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처 죽지못한 파랑
오츠이치 지음, 김선영 옮김 / 북홀릭(bookholic)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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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교실에서 빚어진 사소한 오해와 담임선생의 악의에 찬 행동이 평범한 초등학교 5학년생 마사오의 세계를 서서히 일그러뜨리기 시작한다. 친구들은 그를 무시하고 담임선생의 노골적인 차별은 점점 더 심해져 마사오는 결국 최하층 계급으로 전락한다. 친숙했던 교실이 지옥으로 변해가던 어느 날, 마사오 앞에 괴물의 형상을 한 소년 아오’()가 나타난다. 섬뜩한 구속복을 입은 채 흉측한 흉터와 인간의 것으로 보이지 않는 새파란 피부를 지닌 아오는 그날 이후 마사오의 분노가 극에 달할 때마다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고 자책과 수치심에 사로잡힌 마사오에게 위험천만한 속삭임을 건네기 시작한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미처 죽지 못한 파랑은 여러 면에서 오츠이치가 17(1996)에 발표한 데뷔작 여름과 불꽃과 나의 사체를 떠올리게 하는 작품입니다. 치정에 얽힌 살인과 엽기적인 시체 유기가 난무하지만 이야기를 이끄는 주인공들이 9살에서 11살 사이의 소년소녀라는 점은 과연 오츠이치의 데뷔작답네!”라는 소리가 저절로 나오게 만드는 설정이었는데, ‘미처 죽지 못한 파랑역시 왕따와 폭력, 호러와 복수 등 결코 낮지 않은 수위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그 주인공은 초등학교 5학년생인 마사오이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이 작품은 (일본판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2001년에 발표된 오츠이치의 일곱 번째 작품으로, 작품연표를 살펴보면 암흑동화고스(GOTH)’ 사이쯤 위치합니다.

 

역자후기에는 그렇게 괴로운 경험을 하게 될 때 부조리하다는 것을 깨달았다면 현실을 바꾸기 위해 최대한 노력하고 힘을 내야만 한다는 것.”이 작가의 메시지라고 설명돼있는데, 큰 얼개만 보면 이런 착한 해석이 정답일 수도 있고 오츠이치의 의도 역시 그런 방향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개인적으론 좀 다른 의견, 후천적 소시오패스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를 오츠이치 식 호러풍으로 그린 작품으로 해석될 여지도 충분해 보입니다.

평범한 소년 마사오가 담임선생과 친구들에 의해 최하층 계급으로 추락하는 과정이라든가, 다른 사람들 눈에는 보이지 않는 파란 피부의 소년 아오가 마사오의 의식과 무의식에 영향을 미치며 분노와 살의를 북돋는 과정, 그리고 마사오 스스로 선택한 마지막 결심등은 말 그대로 후천적인 소시오패스의 성장기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오츠이치의 의도가 무엇인지는 작가후기를 읽어도 제대로 알 수 없었습니다. 그는 미스터리 같은 결말도, 독자들을 감동시키는 라스트도 감안하지 않고 진짜로 좋아하는 이야기를 자유롭게 썼다.”고 고백했는데, 달리 말하자면 오픈된 결말이니 어떤 해석도 가능한 자유로운 텍스트.”라는 고백으로 볼 수도 있어서 그야말로 독자마다 다양하고 색다른 평가의 여지가 많은 작품임에 분명하다는 생각입니다.

 

자칫 판에 박힌 교훈적인 이야기가 될 수도 있는 소재를 이처럼 극단적인 해석이 가능하게끔 그려낸 건 오롯이 오츠이치의 이야기꾼으로서의 재능 덕분인데, 개인적인 취향만 따지고 본다면 오츠이치가 이 작품의 엔딩을 데뷔작인 여름과 불꽃과 나의 사체처럼 충격적으로 마무리했다면 좋았을 거란 아쉬움이 든 것도 사실입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츠이치 특유의 천진난만한 문장 속에 깃든 극도의 공포와 호러풍 판타지의 매력은 충분히 만끽했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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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스퍼 네트워크
챈들러 베이커 지음, 이동교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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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론, 아디, 그레이스는 대기업 법무팀에서 일하는 변호사이자 절친한 친구들입니다. 이들은 각각 10대 딸과의 갈등, 싱글맘이 된 후 겪는 크고 작은 문제들, 출산 직후 찾아온 힘겨운 산후우울증 등 내밀한 고민들을 갖고 있지만 서로에게 의지하며 힘겨운 직장생활을 이어갑니다.

그러던 어느 날, 회사 18층 발코니에서 누군가 추락사하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하필 새 CEO 후보로 거론되던 에임스 개릿이 사내 여성들에 대한 부적절한 언행과 성희롱 혐의로 슬론 일행에게 소송을 당한 상태에서 벌어진 추락사 사건은 회사 안팎으로 큰 파장을 불러일으킵니다. 언론과 인터넷에선 젠더 갈등에 관한 찬반 격론이 벌어지고 경찰은 에임스를 향한 슬론 일행의 소송이 추락사 사건과 연관 있는지 조사하기 시작합니다.

 

미투 시대의 페미니즘 스릴러는 이 작품의 성격을 잘 압축해놓은 한 매체의 추천사인데, ‘페미니즘이란 단어 자체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즉각적인 갈등과 격론을 유발하는 요즘 같은 시국에는 이런 추천사가 오히려 이 작품의 진가와 미덕을 오인하게 만들 수도 있어서 아주 조심스러워 보입니다.

출판사 소개글에 따르면 위스퍼 네트워크(Whisper Network)자신이 종사하는 산업의 남성 권력자 중 성희롱이나 성추행 혐의가 있는 이들의 명단을 공유하는 여성들 사이의 정보 네트워크.”입니다. 슬론 일행은 댈러스 일대의 나쁜 놈들의 명단인 배드맨 리스트를 입수한 뒤 거기에 새 CEO 후보인 에임스를 추가한 것은 물론 그를 상대로 소송까지 제기합니다. 오랜 시간동안 여러 피해자를 낳은 그가 새 CEO에 오른다는 건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난데없는 추락사 사건이 벌어지면서 슬론 일행은 예상치 못한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그 추락사가 배드맨 리스트와 관련 있다고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남자는 아들과 온종일 낚시했다고 말할 수 있어도 엄마는 애를 병원에 데려가느라 점심시간을 넘겼다는 말은 하지 않는 편이 대체로 더 낫다. 아이 덕에 남자는 영웅 소리를 듣지만 여자는 변변찮은 직원으로 전락한다.” (p21)

 

사람들은 은연중에 미투 사건의 피해자는 대부분 힘없고 약한 자들이라고 여기는 경향이 있는데, 그래서인지 대기업 법무팀의 변호사들이 피해자로 등장한 점은 초반부터 눈길을 끄는 설정이었습니다. , 미투 사건을 논외로 하더라도 위에서 인용한 문장은 직장 내 남녀 차별이 직업이나 직종은 물론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세계 어디서나 벌어지는 보편적인 현상이란 점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과연 이 부당한 현실이 제자리를 잡을 날이 오긴 올까요?

 

이 작품이 미스터리/스릴러로 분류되는 이유는 추락사 사건 때문입니다. 작가는 초중반까지 추락사한 인물이 누구인지 감춥니다. 그리고 그 인물이 밝혀진 뒤로는 자살이냐 타살이냐, 타살이라면 범인은 누구냐, 또 슬론 일행은 배드맨 리스트에 에임스의 이름을 올린 일과 그를 상대로 건 소송 때문에 맞이한 최악의 상황을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를 미스터리의 축으로 삼습니다. 하지만 죽은 자가 누군지는 너무 빤히 보여서 그리 궁금증을 일으키진 못합니다. 독자들의 관심은 타살 여부와 슬론 일행의 위기 탈출 과정에 쏠리게 되는데, 이야기는 추락사 사건이 벌어진 현재와 그로부터 3주 전의 과거가 교차로 전개되면서 흥미롭게 펼쳐집니다.

 

다만 이 작품을 제대로 된미스터리/스릴러로 기대한 독자에겐 조금은 맥 빠지는 책읽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 작품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여성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결혼, 이혼, 출산, 양육, 일과 가정, 성희롱 등 슬론 일행을 통해 그려지는 여성들의 힘들고 고된 삶이 거의 대부분의 분량을 차지하는데, 그런 탓에 팽팽한 미스터리/스릴러로서의 매력은 부차적인 수준에 그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슬론 일행이 겪는 힘들고 고된 삶이 다소 뻔하고 상투적인 이야기들로 채워져 있어서 지루하고 느슨하게 읽힌 점이 아쉬웠는데, 사실 여성들의 힘들고 고된 삶에 새삼 새로울 것이 있을 리는 없겠지만 그래도 캐릭터나 상황 묘사에서 새로운 시각을 엿볼 수 있었다면 좋았을 거란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이 작품이 미국에서 출간된 건 2019년입니다. 한국의 본격적인 미투 운동의 시작을 2018년이라고 볼 때 좀더 일찍 국내에 소개됐더라면 여러 면에서 화제가 됐을 작품임에 분명합니다. 다소 지루하고 느슨한 대목들이 단점이긴 하지만 재미와 의미를 모두 갖춘 작품이라 좀더 많은 독자들에게 읽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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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가 흐르는 곳에
스티븐 킹 지음, 이은선 옮김 / 황금가지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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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제작 피가 흐르는 곳에를 비롯 모두 4편의 중단편이 실린 작품집입니다. 마니아까지는 아니어도 스티븐 킹의 독특하고 오싹한 호러물을 즐겨 읽는 편인데, 특히 그의 중단편 작품집은 장편 못잖은 쫄깃쫄깃하고 알찬 매력을 지니고 있어서 더 흥미롭게 읽힌 경우가 많습니다. ‘악몽을 파는 가게’, ‘자정 4분 뒤’, ‘별도 없는 한밤에가 대표적인데 그중에서도 별도 없는 한밤에는 스티븐 킹을 전혀 모르는 독자조차 금세 그의 호러월드에 빠져들게 만드는 만점짜리 작품집이란 생각입니다.

 

스티븐 킹을 읽을 때면 매번 비슷한 궁금증 - “도대체 이런 아이디어를 어떻게 떠올릴 수 있을까?” - 이 생기곤 합니다. 시신과 함께 매장된 아이폰이 몇 달이 지나도록 배터리가 닳지 않는 것은 물론 소통마저 가능하게 만든다는 설정(해리건 씨의 전화기), 60년이 넘도록 늙지도 변하지도 않은 채 인간의 고통과 절망을 파먹는 존재(피가 흐르는 곳에), 오지의 통나무집에서 소설 집필에 몰두하다가 독감과 폭풍에 휘말린 주인공이 시궁쥐와의 악마적 거래를 통해 위기를 벗어나는 이야기() 등 평범한 사람이라면 쉽게 떠올리지 못할 아이디어를 무궁무진하게 퍼올리는 스티븐 킹의 상상력은 그야말로 저절로 감탄을 자아낼 뿐입니다.

 

이 작품의 표제작이자 거의 절반 가까이의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 피가 흐르는 곳에는 스티븐 킹의 빌 호지스 3부작아웃사이더 1~2’를 읽은 독자에겐 또 다른 흥분을 선사하는데, 우선 주인공이 앞선 두 작품에 등장했던 홀리 기브니라는 점 때문입니다. 스티븐 킹의 첫 탐정 미스터리인 빌 호지스 3부작에서 중요한 조연으로 등장했던 중년여성 홀리 기브니는 이후 아웃사이더 1~2’를 통해 독립했다가, ‘피가 흐르는 곳에서는 완전 1인 주인공으로 활약합니다. 개인적으론 아웃사이더 1~2’를 읽지 못해서 이 작품 속의 홀리 기브니의 공포심을 100% 이해하긴 어려웠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그녀가 맹활약했던 빌 호지스 3부작을 떠올릴 수 있어서 무척 흥미로웠습니다.

또 한 가지 독자를 흥분시킨 요소는 스티븐 킹만이 창조해낼 수 있는 범인의 정체입니다. ‘빌 호지스 3부작의 마지막 편인 엔드 오브 왓치가 인간을 자유자재로 조종할 수 있는 괴물을 다뤘고, ‘아웃사이더 1~2’가 같은 시간대에 서로 다른 두 장소에서 목격된 용의자라는 독특한 설정을 앞세웠다면, ‘피가 흐르는 곳에는 오랜 세월동안 조금도 늙지 않으며 인간의 고통과 절망을 자양분으로 삼아온 끔찍한 존재가 등장하는데, 이 세 캐릭터는 결국 같은 범주의 악마라고 볼 수 있습니다. 지나치게 초현실적이라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설정이긴 하지만, ‘샤이닝을 비롯하여 스티븐 킹의 호러물에 한번이라도 매료된 적이 있는 독자라면 얼마든지 흥겹게 만끽할 수 있는 설정이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론 첫 수록작인 해리건 씨의 전화기가 가장 마음에 들었는데, 단막극이나 단편영화로 만든다면 그 오싹함이 훨씬 더 배가될 것 같습니다. , 스티븐 킹이 작가의 말을 통해 아낌없이 애정을 드러낸 주인공 홀리 기브니가 등장한 표제작 피가 흐르는 곳에도 매력적이었습니다. 머잖아 그녀를 주인공으로 삼은 후속작이 출간될 것으로 보이는데 그에 앞서 (그녀가 맹활약했던) ‘아웃사이더 1~2’를 먼저 읽어봐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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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침과 기도
시자키 유 지음, 김은모 옮김 / 북홀릭(bookholic)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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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사이키는 해외 동향을 분석하는 정보지 회사 소속의 르포라이터입니다. 7개 국어에 능통한 덕분에 1년에 100일 가까이를 해외에서 보내며 독특한 문물을 소개하는 것이 그의 일입니다. 1,000년의 역사를 지닌 사하라 사막의 소금 교역로, 흑해 인근 오지에 자리 잡은 러시아 정교회 소속 여자수도원, 남미 아마존에 거주하는 50명 남짓한 소수민족, 그리고 분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인 동티모르 등 그의 취재 여정은 낭만적인 해외문물 소개와는 거리가 먼 힘들고 고통스러운 고행에 더 가깝습니다. 문제는 그 취재 여정 중에 사이키가 번번이 기이하고 끔찍한 사건들을 겪게 된다는 점입니다.

 

수록된 다섯 편의 단편에는 연쇄살인, 실종, 폭력이 등장하는데, 이 사건들은 밀실트릭, 서술트릭, 정통 미스터리 트릭 등 다양한 코드들로 버무려집니다. 사이키는 르포라이터임에도 불구하고 꼼꼼하고 세심한 탐정 역할을 맡아 평범하지 않은 상황에서 벌어진 각 사건들의 진실을 파헤칩니다. 그리고 마지막 수록작인 기도는 험난한 취재 여정 중 사이키의 무의식속에 차곡차곡 쌓여온 끔찍한 사건들의 여파가 예상치 못한 비극을 낳는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어디에서도 본 적 없고, 앞으로도 볼 일이 없을 것 같은 독특한 작품입니다. 굳이 이름 붙이자면 여행 미스터리정도인데, 사이키의 여행은 어느 모로 보나 전혀 낭만적이지 않은데다 종군기자의 그것에 가까운 고행으로 점철돼있고, 그 여정을 그린 문장들은 고급스런 순문학의 향기가 짙게 배어있어서 단순히 여행 미스터리라고 부르는 것은 대단한 결례(?)처럼 여겨집니다. 오히려 대서사시 혹은 철학적인 기행문에 미스터리가 살짝 끼어든 느낌이랄까요?

물론 정통 트릭에서부터 서술트릭, 밀실트릭, 그리고 문장 곳곳에 정교하게 배치된 작가의 등 사이키가 겪은 살인사건이나 실종사건은 미스터리의 미덕에 충실한 면모를 갖추고 있어서 독자로 하여금 누가? ?”라는 강렬한 궁금증을 갖게 만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독특함 외에는 별 매력을 못 느낀 작품이었습니다. 험지를 누비다가 끔찍한 사건들과 마주치는 주인공 사이키는 지나치게 객관적인 시선만 유지한 탓에 정작 그의 내면이나 감정을 도무지 들여다볼 수 없습니다. 르포라이터로서의 목표나 가치관도 모호하고 한 인간으로서의 개성조차 무척이나 희미합니다. 특히 사이키에게 부여된 두 개의 중요한 캐릭터(여행자이자 이야기꾼)가 선명하게 그려지지 않은 점이 너무 아쉬웠는데, 요약하면 어떤 사람인지 종잡을 수 없었다는 뜻입니다.

, 사건들 가운데 일부는 억지스러운 해법을 통해 마무리되거나 설명이 부족한 상태에서 엔딩을 맞이하기도 합니다. 좀 과하게 해석하자면 사건 자체도, 사건을 해결하는 주인공도 우아하고 고급스런 순문학 스타일의 문장의 힘에 기대어 스리슬쩍 얼버무려진 느낌이었습니다.

 

외침과 기도는 일본에서 출간된(2010) 직후 대형 신인의 탄생!”이라는 격찬과 함께 꽤 이름 있는 미스터리 상들을 휩쓴 작품입니다. 그래서 더 호기심을 가졌던 건데, 깊이 있는 문장과 묵직한 서사는 분명 작가의 엄청난 강점이지만 그것들이 미스터리와 결합되는 과정은 기대 이하의 실망감만 남겼습니다. 검색해보니 이 대형 신인2010년 데뷔 이후 단 한 편의 단행본(‘リバーサイド・チルドレン’, 리버사이드 칠드런, 2013)과 두 편의 단편, 그리고 다섯 편의 앤솔로지에 참여한 것이 전부였습니다. 결국 순문학으로도, 미스터리로도 만족스런 결과를 못낸 셈입니다. 자신의 강점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 점이 너무 아쉬운 작가인데, 1983년생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언젠가는 데뷔작을 능가하는 작품으로 독자를 찾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사족이지만... 어쩌면 제가 진정한 보석을 알아보지 못하는 함량 미달의 독자라서 이런 서평을 쓴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 작품에 관심이 가는 독자라면 다른 분들의 서평도 꼭 참고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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