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죽일 수 없었다
잇폰기 도루 지음, 김은모 옮김 / 검은숲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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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와 동명인 주인공) 잇폰기 도루는 종이신문의 몰락이라는 시대의 변화를 몸소 겪고 있는 46살의 베테랑 사회부 기자입니다. 어느 날 수도권 연쇄살인사건의 진범을 자처하는 자가 편지를 보내와 또 다른 살인을 막고 싶다면 나와의 설전에서 이겨라!”라는 메시지와 함께 잇폰기 도루와의 지면을 통한 대결을 제안합니다. 이후 잇폰기 도루와 범인의 편지가 1면에 게재되기 시작하자 판매부수와 광고가 급증하며 사세가 기울던 신문사의 경영난은 눈에 띄게 개선됩니다. 하지만 잇폰기 도루의 관심은 어떻게든 추가범행을 저지하고 범인의 정체를 밝혀내는 데 있습니다. 경찰 못잖은 그의 집요한 조사와 고민은 결국 진실을 파헤치는 데 성공하지만 그의 마음에는 한없는 스산함과 회한만 남고 맙니다.

 

개인적으로 기자가 등장하는 미스터리를 무척 좋아합니다. 장르를 불문하고 최고작으로 꼽는 클라이머즈 하이’(요코야마 히데오)를 비롯 미드나잇 저널’(혼조 마사토), ‘시인’(마이클 코넬리) 등 기자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미스터리는 그 나름의 특별한 맛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죽일 수 없었다는 지금까지 읽은 기자 미스터리 가운데 언론의 속살을 가장 디테일하고 생생하게 그린 작품입니다. 취재, 회의, 편집, 인쇄 등 신문 제작의 전 과정이 세밀하게 그려진 것은 물론 특종과 인정(人情) 사이의 고뇌라든가 저널리즘과 커머셜리즘(상업주의)의 갈등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주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 길지 않은 분량이지만 연쇄살인 미스터리, 신문산업의 위기, 기자의 사명과 책임 등 다양한 소재를 다루고 있어서 빈틈없이 알맹이가 꽉 찬 작품입니다. 무엇보다 연쇄살인범이 베테랑 사회부 기자 잇폰기 도루를 콕 찝어 설전을 제안하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는데, 자칭 백신이라는 연쇄살인범은 인간은 추잡한 성 관계를 통해 재생산된 바이러스이므로 죽여 마땅하다.”는 꽤나 거창하면서도 어딘가 허황된 철학을 내세우며 잇폰기 도루를 도발합니다. 그에 대처하는 잇폰기 도루의 반론은 대체로 정직하고 도덕적인 수준에 그치고 있지만 어쨌든 그 설전이 이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이자 눈길을 끈 대목인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백신과 잇폰기 도루의 설전이 시작되면서 이야기의 속도감과 긴장감이 훅 떨어졌는데, 아무래도 오고가는 메시지들이 다소 형이상학적인데다 동어반복에 가깝다 보니 초반 한두 번을 제외하곤 지루하게 읽힐 수밖에 없었던 것 같습니다. 지나치게 디테일하게 그려진 신문사에 관한 묘사와 함께 이 작품에서 가장 아쉬웠던 점인데, ‘백신의 주장이 좀더 현실감이 있었거나 둘 사이에 주고받는 메시지의 분량이 적절히 압축됐더라면 훨씬 더 알찬 작품이 됐을 거란 생각입니다.

 

잇폰기 도루 외에 또 한 명의 주요 화자는 10대 소년인 에바라 요이치로입니다. 자신의 출생의 비밀 때문에 괴로워하는 10대 소년의 고뇌는 메인 스토리와는 전혀 별개처럼 전개되다가 후반부에 이르러 연쇄살인범 백신과 잇폰기 도루에게 연결되는데 이 대목에서 연이어 터지는 반전은 이 작품의 하이라이트이기도 합니다. 독자에 따라 다소 작위적이라고 여길 수도 있는 반전들이지만 앞서 잘 깔아놓은 포석들 덕분에 크게 억지스러워 보이진 않았습니다.

 

이 작품은 27회 아유카와 데쓰야 우수상 수상작인데, 그때 대상을 받은 작품이 시인장의 살인’(이마무라 마사히로)입니다. 본격 미스터리를 지향하는 공모라서 시인장의 살인에게 후한 점수를 준 것 같은데, 제가 심사위원이었다면 이 작품에 조금은 더 높은 점수를 줬을 것 같습니다. 소재도 성격도 전혀 다른 작품들이라 전적으로 취향의 문제인 건 사실이지만 적어도 그래서 죽일 수 없었다는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당황스럽진 않았기 때문입니다.

 

주인공과 동명인 작가 잇폰기 도루는 후속작으로 사회파 미스터리를 선택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죽일 수 없었다역시 넓은 범위의 사회파 미스터리에 속하는데, 과연 잇폰기 도루가 그릴 본격적인 사회파 미스터리가 어떤 소재, 어떤 사건들을 다루게 될지 사뭇 궁금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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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범인
쇼다 간 지음, 홍미화 옮김 / 청미래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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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고속도로 버스정류장 부근에서 70대 남성 스도 이사오가 칼에 찔린 사체로 발견됩니다. 수사본부가 좀처럼 실마리를 찾지 못하던 중 시즈오카 경찰서의 구사카 형사는 41년 전인 1974년 여름, 스도 이사오의 어린 아들 마모루가 유괴된 뒤 살해된 사실을 알게 됩니다. 무엇보다 스도 이사오가 살해된 곳이 당시 유괴범이 몸값을 갖다 놓으라고 지시했던 장소라는 걸 깨달은 구사카는 두 사건 사이에 관련성이 있다고 확신하곤, 1988, 즉 마모루 유괴사건의 시효가 끝나기 1년 전에 편성됐던 특별수사반 관리관 시게토 세이치로를 찾아갑니다. 불명예스럽게 해체됐지만 시게토가 들려준 특별수사반의 촘촘하고 끈질겼던 수사 과정은 구사카에게 스도 이사오 살해사건의 진실을 향한 중요한 열쇠를 제공합니다.

 

불필요한 사족도, 어설픈 장식도 전혀 없는 거두절미 정통 경찰소설이라고 부를 수 있는 작품입니다. 무려 41년이라는 간극을 두고 벌어진 두 개의 살인사건, 그것도 피살자가 아들과 아버지라는 비극적 설정도 눈길을 끌었지만, 세 개의 시기(1974, 1988, 2015)마다 사건의 진실을 찾기 위해 전력을 다했던 각각의 경찰 주인공들의 분투는 읽는 내내 다큐멘터리 이상의 감흥을 전해줬습니다. 기름기라곤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100% 몸통 살코기의 느낌이 너무 강렬했던 탓에 거두절미라는 표현을 쓴 건데, 이 부분은 독자마다 살짝 취향을 탈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이야기의 시작은 구사카가 수사하는 2015년 스도 이사오 피살사건이지만, 정작 분량이나 비중에서 압도적인 건 1988년 마모루 유괴사건 특별수사반의 활동입니다. 주인공인 구사카 스스로 현재의 사건을 해결하기 위한 열쇠가 41년 전 마모루 유괴사건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인데, 덕분에 유괴사건을 꼼꼼하게 파헤쳤던 1988년 특별수사반의 리더 시게토가 극중극 주인공으로 구사카 못잖게 맹활약합니다.

아무런 성과도 내지 못한 채 미제 사건으로 남았던 1974년의 마모루 유괴사건은 시효 만료 1년을 앞둔 1988년 여름, 탐욕스럽고 정치적인 성향의 경찰 고위층에 의해 다시 수면 위에 떠오릅니다. 이른바 보여주기 식 쇼를 하고 싶었던 고위층은 자타가 공인하는 밑바닥 출신 베테랑 시게토를 관리관으로 앉힌 뒤 반드시 성과를 내라고 강요합니다. 시게토는 이 무모한 쇼가 실패할 경우 자신이 희생양이 될 것임을 감지하지만 말 그대로 좌고우면하지 않고 자신이 선발한 여섯 명의 형사들과 함께 힘겹기 그지없는 수사를 전개합니다.

 

정리하면, 현재의 주인공 구사카와 과거의 주인공 시게토가 협력하여 41년의 간극을 두고 벌어진 두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는 흥미로운 구조의 작품입니다. 특히 1988년 특별수사반의 이야기에는 경찰 내부의 (출신 성분에 따른) 심각한 갈등, 부패하고 탐욕스런 정치적 경찰의 행태, 77색을 지닌 특별수사반 구성원들의 개성 등 사건 외적인 재미거리도 다양해서 마치 경찰소설의 대가 요코야마 히데오의 ‘64’의 축소판을 읽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했습니다. (공교롭게도 ‘64’ 역시 14년 전에 발생한 여아 유괴살해사건의 진실을 찾는 이야기입니다.)

 

다만, 유일하게 아쉬운 점은 앞서 서두에서 거두절미라는 말로 대신했던 이 작품의 기름기 하나 없는 뻑뻑함입니다. 과거와 현재에 등장하는 경찰들은 말할 것도 없고 피해자들의 유족이나 주변 인물들에 이르기까지 정제에 정제를 거듭한 듯 꼭 필요한 부분만 남겨놓은 탓에 그들이 겪는 감정적 동요나 심리적 갈등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습니다. 인물들의 내면 묘사는 한두 줄의 간략한 안내외엔 거의 찾아볼 수가 없었고, 결국 (좀 심하게 말하면) 공감이 불가능한 로봇 같은 캐릭터로 읽힌 게 사실입니다. 앞서 비교한 ‘64’가 사건과 인물심리를 황금률에 가깝게 배치했다면, ‘진범인은 꼼꼼한 수사기록에 가까울 정도로 사건 서술에만 몰두한 작품이란 뜻입니다.

 

검색해보니 일본에서 출간된 쇼다 간의 작품이 꽤 많은 걸 알 수 있었는데, 그중에는 진범인에 이어 구사카 형사가 활약하는 さらい’(유괴범)라는 작품도 있었습니다. 쇼다 간의 기름기 하나 없는 뻑뻑함이 한국 독자를 매료시킨다면 그의 새로운 작품들을 곧 만나볼 수 있을 것 같은데, 일단은 첫 소개작인 진범인이 좋은 성적과 호평을 얻어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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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 아더 미세스 - 정유정 작가 강력 추천
메리 쿠비카 지음, 신솔잎 옮김 / 해피북스투유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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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 윌의 외도, 아들 오토의 퇴학, 응급의학과 의사였던 자신의 의료사고 등 한꺼번에 터진 인생 최악의 사건들 때문에 궁지에 몰렸던 세이디는 남편 윌의 제안에 따라 자살한 시누이 앨리스가 남긴 메인 주의 외딴 섬의 낡은 저택으로 이사합니다. 섬 특유의 배타적 분위기에 낡은 저택이 내뿜는 불온한 기운까지 더해져 세이디의 절망감은 더욱 심해집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웃에 살던 여자가 참혹하게 살해된 채 발견되는데, 문제는 현지 경찰이 세이디를 의심하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죽은 옛 연인의 사진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는 남편, 전학 후에도 적응하지 못하는 아들, 대놓고 악의를 발산하는 시누이의 딸 등 사방에서 날을 세운 스트레스에 시달리던 세이디는 살인용의자로 몰리는 처지에 이르자 스스로 범인을 찾을 결심을 합니다.

 

이야기는 세 여자의 시점으로 전개됩니다. 외딴 섬에서 온갖 스트레스와 절망을 겪던 세이디가 살인사건 용의자로 지목된 뒤 직접 범인을 찾아나서는 이야기가 중심을 차지합니다. 이어 세이디의 남편 윌에게 집착하며 불륜 관계를 맺고 있는 카밀의 이야기가 간간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6살 소녀 마우스가 새 엄마에게 학대당하는 끔찍한 상황이 막간극처럼 소개됩니다.

 

음습한 늦가을의 외딴 섬, 남편의 외도, 스토커에 가까운 불륜녀, 잔혹하게 난자당한 피살자, 살의를 내뿜는 시누이의 딸 등 연쇄살인마가 등장하는 범죄스릴러의 요소들을 골고루 갖춘 작품이지만 디 아더 미세스는 극단적인 불안감을 불러일으키는 끈적끈적한 심리스릴러입니다. 가족이나 일터의 동료는 물론 외딴 섬의 불온한 기운과 시누이가 자살한 낡은 저택의 공포까지 감당해야 하는 세이디의 심리가 집요할 정도로 디테일하게 그려집니다. 또 언제라도 세이디를 공격할 것만 같은 불륜녀 카밀의 들끓는 욕망은 독자로 하여금 또 다른 긴장감을 맛보게 만듭니다.

이웃의 여자가 칼로 난자당한 채 살해된 사건은 흥미진진한 미스터리이자 불안정한 상황의 세이디를 막다른 벽에 몰아넣는 카운터펀치인데, 세이디의 주변 인물 중 누가 범인으로 밝혀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복잡하고 미묘하게 전개됩니다.

 

재미있게 읽었지만 개인적인 취향 때문에 두 가지 정도 아쉬움이 남은 작품입니다. (대형 스포일러라서 자세한 언급은 못 하지만) 우선 이 작품은 막판에 두 번의 반전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중 첫 반전이 저의 취향과 맞지 않았는데, 실은 스릴러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중반쯤부터 슬슬 눈치 챌 수 있을 정도로 작가가 꽤 많은 힌트를 줘서 그 반전이 폭로됐을 때 딱히 놀라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궁금했던 건 작가의 의도였습니다. 독자가 눈치 채길 바라고 일부러 그 많은 힌트들을 준 건지, 아니면 독자들이 그 힌트들을 몰라보곤 막판 반전에 놀라기를 바란 건지 확실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앞서 제공된 힌트들을 전복시키는 신선한 반전이 나오지 않을까 기대했다가 역시 그렇군...”이란 아쉬움만 남고 말았는데, 그나마 다행인 건 두 번째 반전이 있었다는 점입니다. 유사한 설정으로 실망감만 남긴 다른 작품들에 비하면 이 두 번째 반전디 아더 미세스만의 고유한 매력이라는 생각입니다.

또 한 가지 아쉬움은 지극히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분량에 관한 것입니다. 특히 지나치게 디테일하게 또 동어반복처럼 그려진 세이디의 공포와 절망에 대한 묘사는 심리스릴러 마니아가 아니라면 다소 지루하고 느슨하게 느낄 수밖에 없는 대목인데, 살인사건 미스터리가 병행되긴 했지만 500페이지가 넘는 심리스릴러는 아무래도 좀 무리였다는 생각입니다.

 

메리 쿠비카는 디 아더 미세스로 처음 만난 작가인데 몇몇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매력적인 필력을 확인할 수 있어서 한국에 먼저 소개된 그녀의 작품 굿 걸에 대한 궁금증과 기대감이 생겼습니다. 심리스릴러는 제 취향과는 거리가 좀 있는 장르지만 페이지터너의 힘을 갖춘 작가라면 기꺼이 도전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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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컨 차를 타는 변호사 변호사 미키 할러 시리즈 Mickey Haller series
마이클 코넬리 지음, 조영학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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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이란 사람과 생명과 돈을 닥치는대로 삼켜버리는 거대한 괴물이다. 법은 진실과 아무 상관이 없다. 오직 타협과 개량과 조작만이 있을 뿐이다. 사람들은 나를 나쁜 놈이라고 욕하지만 나는 다만 교활한 천사일뿐이다.” (p35~36)

 

유죄냐 무죄냐에 관계없이 오로지 의뢰인의 혐의를 벗기거나 거래를 통해 형을 감량하거나 심지어 경찰과 검찰의 약점을 물고 늘어져 사건 자체를 무너뜨리는 걸 최고의 목표로 삼는 변호사 미키 할러의 일성은 거의 궤변에 가까워 보입니다. 하지만 사법체계의 냉혹한 현실을 제대로 꼬집은 비판이기도 하고, 부끄러움 같은 건 찾아볼 수 없는 진지하고 솔직한 자기 고백이기도 합니다.

사무실도 없이 자신이 아끼는 링컨 타운 카에서 업무를 보는 미키의 주된 고객은 돈이 되는 의뢰를 들고 오는 마약상, 폭주족, 사기꾼 등 뒷골목의 사람들입니다. 동시에 미키는 언제라도 자신의 삶의 수준을 뒤바꿔놓을 대박 의뢰인을 고대하기도 합니다. 유능하지만 그야말로 속물 변호사의 모든 미덕을 다 갖춘 인물이란 뜻입니다. 그런 면에서 현직 검사로 정의와 페어플레이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매기 맥피어스(또는 마가렛 맥퍼슨)와의 결혼생활이 8년이나 이어졌던 건 어쩌면 기적에 가까운 일인지도 모릅니다.

 

변호사였던 아버지의 가르침 가운데 미키가 절대 공감하는 한 가지는 변호사에게 가장 끔직한 의뢰인은 무고한 사람!”이란 점입니다. 의뢰인의 무고함을 깨닫는 순간 무죄판결을 이끌어내는 것 외엔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기 때문이며, 만일 무죄를 입증하지 못할 경우 감당해야 할 죄책감 역시 불편하고 기분 나쁘기 때문입니다. 그런 미키 앞에 고민덩어리 의뢰인이 나타납니다. 처음엔 기다리고 기다리던 대박 의뢰인이라 반가웠지만, 알고 보니 가장 끔찍한 무고한 의뢰인이었고, 좀더 파고들어 보니 가장 악랄한 의뢰인으로 밝혀졌기 때문입니다.

미키는 법정에선 검사와 싸우며 의뢰인의 무죄를 입증해야 하지만, 법정 밖에선 의뢰인이 감추고 있는 진실을 파헤치면서 자신이 과거에 저지른 과오를 바로잡아야 하는 난감한 상황에 처합니다. 그런 와중에 소중한 동료를 잃기도 하고, 스스로 살해 위기에도 빠지는가 하면, 전처인 매기와 8살 딸 헤일리의 안위까지 걱정해야 하는 궁지에 몰립니다. 법정 스릴러와 범죄 스릴러가 절묘하게 믹스된 속물 변호사의 이야기는 막판까지 팽팽한 긴장감을 놓치지 않은 채 독자의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마이클 코넬리의 광팬이라 해리 보슈 시리즈와 스탠드얼론에 열광하는 1인이지만, ‘미키 할러 시리즈는 상대적으로 미지근한 정도의 관심에 그친 게 사실인데, 앞서 읽은 시리즈 3~5(‘파기환송’, ‘다섯번째 증인’, ‘배심원단’)과 마찬가지로 링컨 차를 타는 변호사역시 마이클 코넬리 특유의 재미와 매력이 덜 느껴진 작품이었습니다. 시리즈 첫 편이다 보니 미키 할러의 캐릭터나 배경 설명에 많은 분량이 할애되기도 했고, 사건은 다소 밋밋하게 전개된 데다 법정 공방은 느슨하거나 지루했고 막판 반전의 맛과 충격도 기대에 못 미쳤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메인 사건의 피고인이자 미키를 위기에 빠뜨리는 대박+무고+악랄 의뢰인의 캐릭터와 그가 감추고 있는 진실이 독자의 호기심을 이끌어낼 만한 파괴력을 지니지 못한 게 아쉬웠는데, 그런 탓에 클라이맥스와 엔딩의 힘이 훅 빠져버린 것으로 보입니다.

 

한국에 출간된 미키 할러 시리즈가운데 2편인 탄환의 심판만 못 읽은 셈인데, 이왕 첫 편을 읽었으니 조만간 탄환의 심판도 읽어보려고 합니다. 기회가 된다면 순서대로 다시 읽기에 도전하는 차원에서 이미 읽은 3~5편도 다시 읽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매번 이런저런 아쉬움을 겪긴 했어도 미키 할러의 새 작품이 나오면 절대 외면하진 못할 것 같은데, 그건 미키 할러에 대한 미련 때문이라기보다는 마이클 코넬리에 대한 애정 때문일 것입니다. (스스로 생각해도 조금은 억측에 가깝지만, 어쩌면 정의감과 비극성을 겸비한 해리 보슈에게 익숙해진 탓에 같은 작가의 히어로지만 정반대 성격을 가진 미키 할러에게 깊은 정(?)을 주지 못하는 것인지도 모를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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섭주 케이 미스터리 k_mystery
박해로 지음 / 몽실북스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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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안동과 영주 부근의 소도시 섭주의 초등학교 교사 강서경은 남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외톨이 성격 탓에 왕따에 가까운 처지지만 그저 순응한 채 조용히 살아가는 중입니다. 어느 날 인근 붕평마을의 정자에 가면 친엄마를 만날 수 있다.”는 꿈을 꾼 그녀는 폭우 속에서 붕평마을로 가지만 그곳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건 보자기에 싸인 특이한 방울과 거울이었습니다. 그것들을 손에 넣은 이후로 강서경은 끔찍한 악몽과 환상은 물론 병명조차 알 수 없는 지독한 몸살에 시달립니다.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모든 게 정상으로 돌아왔는데, 문제는 예전의 그녀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 점입니다. 더 기이한 것은 그녀가 가는 곳마다 뱀이 나타나는가 하면 의문의 죽음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벌어진다는 점입니다.

 

처음 읽는 박해로의 장편소설입니다. 실은 2018년에 출간된 - 피할 수 없는 상갓집의 저주를 접했지만 초반부에 책을 덮은 탓에 인연을 맺지 못했고, 그 뒤로 이어진 그의 작품 역시 계속 관심 밖에 뒀던 게 사실입니다. 미쓰다 신조의 호러를 무척 좋아함에도 불구하고 박해로의 호러는 제 스타일과는 잘 맞지 않아 보였기 때문입니다.

재미있는 건 끝까지 읽은 박해로의 작품이 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는 점입니다. 2014년에 출간된 한국 공포문학 단편선 - 돼지가면 놀이에 실린 단편 무당아들이 그것인데, 메모해놓은 줄거리를 보니 꽤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덕분에 그의 신작에 관심을 갖게 됐는데, 특히 앞선 작품들의 공통된 무대였던 소도시 섭주를 제목으로 전면에 내세우고 있어서 중도 포기했던 의 아쉬움을 만회할 수 있을 거란 기대감이 들기도 했습니다.

 

오랜 세월동안 흉가에 방치돼있던 특이한 방울과 거울, 그것을 손댄 자들에게 찾아오는 끔찍한 악몽과 지독한 몸살, 사방에서 뱀이 출몰하는 가운데 의문의 죽음을 맞이하는 자들, 그리고 소도시 섭주에 전해 내려오는 기이한 괴담과 전설 등 매력적인 호러 코드들이 잔뜩 버무려진 작품입니다. 등장인물들 역시 다채로운데, 이기적인 모습을 감추지 않는 소도시 초등학교 교사들, 꽤 깊은 내공을 지닌 것으로 보이는 무당들, 무녀와의 사이에 아이를 낳은 목사, 무속과 관련된 사건을 수사하다가 30년 넘게 실종상태인 삼촌을 둔 경찰 등 설정만으로도 호기심을 일게 하는 캐릭터들로 가득합니다.

 

속도감도 빠르고 지루할 틈 없이 사건들이 연이어 벌어지는데다 섭주에 전해 내려오는 사파왕과 우녀라는 기이한 괴담까지 가미돼서 흥미롭게 읽히는 작품이긴 하지만, 역시 개인적인 호러 취향과는 다소 거리가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독자로 하여금 공포 자체를 서서히 느끼고 만끽하도록 이끄는 게 아니라 조금은 강요하듯 설명하는 점이 거슬렸는데, 그 방법 역시 대부분 이나 환각이라는 편리한 장치에 의존한 점이 안이하게 느껴졌습니다.

, 이야기를 이끌던 주인공 강서경은 어느 순간부터 존재감을 잃어버렸는데, 반면 할리우드 모험극을 떠올리게 하는 전설 속 캐릭터가 전면에 나서는 바람에 이야기의 방향 자체가 산만해진 점도 아쉬웠습니다. 긴장감 넘치고 소름 돋는 호러가 다소 생뚱맞은 액션극으로 마무리된 느낌이랄까요? 섬뜩한 죽음의 의례를 소재로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오가며 불쾌한 공포심을 안겨줬던 미쓰다 신조의 사관장’(蛇棺葬)백사당’(百蛇堂)을 닮은 호러물을 기대했던 탓에 섭주의 막판 전개가 더 아쉽게 느껴진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작품 외적으로 아쉬웠던 건 표지입니다. 보기만 해도 으스스해지는 사악함과는 거리가 한참 먼 귀여운(?) 다섯 마리의 뱀 이미지는 이 작품을 아동용 호러처럼 오해하게 만들 소지가 다분했습니다. 다 읽은 뒤에 다시 표지를 봤을 땐 그 귀여움이 더더욱 아쉽게만 여겨졌습니다.

 

이 작품 덕분에 섭주라는 공간을 무대로 이어져온 박해로의 호러물들이 무척 궁금해졌습니다. ‘섭주에서 만족하지 못했던 부분들이 이전 작품들에서 채워질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새로운 장르와 소재를 개척하고 꾸준히 이야기를 자아낸 박해로의 앞으로의 작품에 대해서는 남다른 기대감을 유지해도 괜찮겠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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