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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범인
쇼다 간 지음, 홍미화 옮김 / 청미래 / 2021년 6월
평점 :
2015년, 고속도로 버스정류장 부근에서 70대 남성 스도 이사오가 칼에 찔린 사체로 발견됩니다. 수사본부가 좀처럼 실마리를 찾지 못하던 중 시즈오카 경찰서의 구사카 형사는 41년 전인 1974년 여름, 스도 이사오의 어린 아들 마모루가 유괴된 뒤 살해된 사실을 알게 됩니다. 무엇보다 스도 이사오가 살해된 곳이 당시 유괴범이 몸값을 갖다 놓으라고 지시했던 장소라는 걸 깨달은 구사카는 두 사건 사이에 관련성이 있다고 확신하곤, 1988년, 즉 마모루 유괴사건의 시효가 끝나기 1년 전에 편성됐던 특별수사반 관리관 시게토 세이치로를 찾아갑니다. 불명예스럽게 해체됐지만 시게토가 들려준 특별수사반의 촘촘하고 끈질겼던 수사 과정은 구사카에게 스도 이사오 살해사건의 진실을 향한 중요한 열쇠를 제공합니다.
불필요한 사족도, 어설픈 장식도 전혀 없는 ‘거두절미 정통 경찰소설’이라고 부를 수 있는 작품입니다. 무려 41년이라는 간극을 두고 벌어진 두 개의 살인사건, 그것도 피살자가 아들과 아버지라는 비극적 설정도 눈길을 끌었지만, 세 개의 시기(1974년, 1988년, 2015년)마다 사건의 진실을 찾기 위해 전력을 다했던 각각의 경찰 주인공들의 분투는 읽는 내내 다큐멘터리 이상의 감흥을 전해줬습니다. 기름기라곤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100% 몸통 살코기’의 느낌이 너무 강렬했던 탓에 ‘거두절미’라는 표현을 쓴 건데, 이 부분은 독자마다 살짝 취향을 탈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이야기의 시작은 구사카가 수사하는 2015년 스도 이사오 피살사건이지만, 정작 분량이나 비중에서 압도적인 건 1988년 마모루 유괴사건 특별수사반의 활동입니다. 주인공인 구사카 스스로 현재의 사건을 해결하기 위한 열쇠가 41년 전 마모루 유괴사건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인데, 덕분에 유괴사건을 꼼꼼하게 파헤쳤던 1988년 특별수사반의 리더 시게토가 ‘극중극 주인공’으로 구사카 못잖게 맹활약합니다.
아무런 성과도 내지 못한 채 미제 사건으로 남았던 1974년의 마모루 유괴사건은 시효 만료 1년을 앞둔 1988년 여름, 탐욕스럽고 정치적인 성향의 경찰 고위층에 의해 다시 수면 위에 떠오릅니다. 이른바 ‘보여주기 식 쇼’를 하고 싶었던 고위층은 자타가 공인하는 밑바닥 출신 베테랑 시게토를 관리관으로 앉힌 뒤 반드시 성과를 내라고 강요합니다. 시게토는 이 무모한 쇼가 실패할 경우 자신이 희생양이 될 것임을 감지하지만 말 그대로 좌고우면하지 않고 자신이 선발한 여섯 명의 형사들과 함께 힘겹기 그지없는 수사를 전개합니다.
정리하면, 현재의 주인공 구사카와 과거의 주인공 시게토가 협력하여 41년의 간극을 두고 벌어진 두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는 흥미로운 구조의 작품입니다. 특히 1988년 특별수사반의 이야기에는 경찰 내부의 (출신 성분에 따른) 심각한 갈등, 부패하고 탐욕스런 정치적 경찰의 행태, 7인 7색을 지닌 특별수사반 구성원들의 개성 등 사건 외적인 재미거리도 다양해서 마치 경찰소설의 대가 요코야마 히데오의 ‘64’의 축소판을 읽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했습니다. (공교롭게도 ‘64’ 역시 14년 전에 발생한 여아 유괴살해사건의 진실을 찾는 이야기입니다.)
다만, 유일하게 아쉬운 점은 앞서 서두에서 ‘거두절미’라는 말로 대신했던 이 작품의 ‘기름기 하나 없는 뻑뻑함’입니다. 과거와 현재에 등장하는 경찰들은 말할 것도 없고 피해자들의 유족이나 주변 인물들에 이르기까지 정제에 정제를 거듭한 듯 꼭 필요한 ‘부분’만 남겨놓은 탓에 그들이 겪는 감정적 동요나 심리적 갈등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습니다. 인물들의 내면 묘사는 한두 줄의 간략한 ‘안내’ 외엔 거의 찾아볼 수가 없었고, 결국 (좀 심하게 말하면) 공감이 불가능한 로봇 같은 캐릭터로 읽힌 게 사실입니다. 앞서 비교한 ‘64’가 사건과 인물심리를 황금률에 가깝게 배치했다면, ‘진범인’은 꼼꼼한 수사기록에 가까울 정도로 사건 서술에만 몰두한 작품이란 뜻입니다.
검색해보니 일본에서 출간된 쇼다 간의 작품이 꽤 많은 걸 알 수 있었는데, 그중에는 ‘진범인’에 이어 구사카 형사가 활약하는 ‘人さらい’(유괴범)라는 작품도 있었습니다. 쇼다 간의 ‘기름기 하나 없는 뻑뻑함’이 한국 독자를 매료시킨다면 그의 새로운 작품들을 곧 만나볼 수 있을 것 같은데, 일단은 첫 소개작인 ‘진범인’이 좋은 성적과 호평을 얻어야 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