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이 코스트
테스 게리첸 지음, 박지민 옮김 / 미래지향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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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년 전 자신의 삶을 붕괴시킨 비극적인 시라노 작전이후 은퇴한 전직 CIA 요원 매기 버드는 60세가 된 현재 메인주의 소도시 퓨리티에서 블루베리와 닭을 키우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누구도 믿지 않는 그녀가 유일하게 마음을 터놓는 상대는 독서모임 마티니 클럽의 멤버들이자 이젠 60~70대가 된 전직 CIA 요원들입니다. 어느 날 낯선 방문객이 찾아오고, 다음날엔 시신 한 구가 마당에서 발견되면서 매기의 은둔자로서의 삶은 끝장납니다. 무엇보다 그 낯선 방문객이 16년 전의 시라노 작전을 언급한 탓에 매기는 공포에 휩싸입니다. 누군가 그 작전에 참여했던 요원들을 향해 복수에 나선 것이 분명했고, 은거지가 들킨 이상 언제라도 살해당할 수 있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저의 최애 시리즈 중 하나인 테스 게리첸의 리졸리&아일스 시리즈8편인 아이스 콜드’(미국 2010, 한국 2013)를 마지막으로 더는 한국에 소개되지 않았지만, 미국에선 13(‘Listen to Me’, 2022)까지 출간돼서 개인적으로 무척 아쉬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정말 오랜만에 스파이 코스트를 통해 테스 게리첸의 이름을 다시 듣게 돼서 더없이 반가웠는데 뜻밖에도 스파이 스릴러라는 장르라서 기대감과 호기심이 더욱 끓어올랐습니다.

 

이야기는 매기가 30대 중반이던 무렵부터 시라노 작전으로 은퇴한 40대 중반까지를 그린 과거와 은둔자로서의 삶이 끝장난 뒤 다시금 스파이로서의 능력을 발휘할 수밖에 없게 된 현재 등 두 갈래로 전개됩니다.

24년 전, 매기는 방콕에서 운명처럼 만난 한 남자와 사랑에 빠지지만, 그 사랑으로 인해 예기치 못한 불운 속으로 빠져듭니다. 그리고 그 불운은 시라노 작전이라는, 성공하긴 했지만 매기에게 평생 잊지 못할 상처를 남긴 마지막 임무로 그녀를 이끌었고, 매기는 그 작전으로 인해 너무나도 많은 것을 잃었습니다.

한적한 소도시에서 평범한 60세 여성으로 살아가던 매기를 뒤흔든 건 시라노 작전을 언급하며 나타난 낯선 방문객입니다. 기밀로 봉인됐던 작전 내용이 누군가에게 해킹 당했다는 말에 매기는 16년 동안 두려워했던 일이 현실이 됐음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그날부터 은퇴한 CIA 요원들의 모임인 마티니 클럽은 매기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머리를 맞대기 시작합니다.

 

지극히 평범한 은퇴자로 조용히 살아가는 스파이에 대해 쓰고 싶었습니다. 어느 날 묻어두었던 과거가 되살아나 괴롭히기 시작하고, 다시는 쓸 일이 없을 줄 알았던 옛 기술들을 불러내야만 하는 상황에 처하는 은퇴한 스파이의 이야기를.” (저자노트 )

 

전 세계를 누비며 숱한 죽음의 위기 속에서도 무력과 지략으로 임무를 완수하던 스파이는 과연 은퇴 후 어떤 삶을 살게 될까요? 아는 게 너무 많거나 사방팔방에 적을 만들어놓은 탓에 평생 주위를 경계하면서 살아야 할 것 같기도 하고, 뜻밖에도 평범한 은퇴자들과 마찬가지로 안락한 노년의 삶을 누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현역 시절에 완수했던 임무 때문에 누군가의 복수의 대상이 된다면, 그것도 너무나도 깊은 상처를 얻은 탓에 오랜 시간 잊고 살아왔던 그 끔찍한 임무를 다시금 떠올려야 한다면 그 스파이는 과연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요?

60세라는, 노인이라 할 순 없지만 스파이엔 결코 어울리지 않는 나이의 매기는 한편으론 마티니 클럽의 동료들에게 시라노 작전의 전말을 알려주면서 다른 한편으론 자신에게 닥친 위기를 직접 해결할 방안을 모색합니다. 그리고 한참동안 쓰지 않았지만 마치 본능처럼 몸과 마음에 스며들어있던 스파이로서의 옛 기술들을 소환해선 16년 전의 고통스러운 상황과 다시 한 번 마주치기로 결심합니다.

 

매기뿐 아니라 마티니 클럽의 멤버들도 인맥을 통해 정보를 수집하고 회의를 통해 단서를 분석하며 오랜만에 자신들의 재능을 발휘합니다.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수십 년의 경험과 노하우가 은퇴한 스파이들을 더욱 빛나게 만듭니다. 그들은 단지 안락 은퇴 스파이에 머물지 않고 매기와 함께 실전에 나서기도 합니다. 물론 화려한 액션이나 사선을 넘나드는 총격전 같은 건 없지만 마티니 클럽의 활약은 어지간한 스파이물보다 흥미진진합니다.

 

60~70대가 된 은퇴 스파이들의 이야기라고 해서 다소 늘어지거나 밋밋하지 않을까, 우려하는 독자도 있겠지만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입체적이고도 긴장감 넘치는 서사와 매력적인 캐릭터들, 그리고 반전을 거듭하는 전개를 품은 스파이 코스트는 그 어떤 기대에도 부응할 만한 작품이란 생각입니다. 미국에서는 2025년에 시리즈 2편인 ‘The Summer Guests’가 출간될 예정이라는데, 이제 만 72세가 될 테스 게리첸이 앞으로도 오랫동안 마티니 클럽 시리즈를 이어가주기를 진심으로 응원하고 싶어집니다.

 

사족으로... 편집과 번역의 아쉬움은 이 작품의 옥의 티였습니다. 오타와 띄어쓰기 오류가 적잖았고, 종종 눈에 띈 직역 또는 매끄럽지 못한 번역도 책읽기를 방해하곤 했습니다. 후속작도 출간할 계획이라면 좀더 성의 있는 편집과 번역이 필요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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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의 끝
히가시야마 아키라 지음, 민경욱 옮김 / 해피북스투유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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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73, 소행성 파편과의 충돌로 지구는 초토화된다. 미국 정부는 피해가 미약한 동부지역을 보호하기 위해 900km에 달하는 경계선을 긋고 외부와 차단한다. 그로 인해 경계선 밖에선 동사와 아사가 속출하고, 결국 생존을 위한 식인이 횡행한다. 하지만 식인은 죄의식을 야기했고, 경계선 밖 사람들은 어떻게든 구원받길 기도했다. 그때 소년 너새니얼 헤일런이 나타나 온갖 기적을 행하며 식인의 신으로 불리게 된다. 한편 백성서파 교회는 경계선 밖의 범죄자들을 없애기 위해 킬러를 파견한다. 특히 식인을 심각한 중범죄로 여긴다. 킬러 중 한 명인 네이선 발라드는 식인 현장을 목격하곤 충격에 빠지지만 동시에 너새니얼이 왜 신으로 추앙받는지도 알게 되면서 심각한 고민에 빠지고 만다. 과연 너새니얼은 식인을 조장한 죄인일까? 아니면 진정 신 혹은 구원자일까? (출판사 소개글을 일부 수정 후 인용했습니다.)


 

대만에서 태어난 일본인 작가 히가시야마 아키라는 1970~80년대 대만을 배경 삼아 미스터리와 역사와 성장스토리를 절묘하게 배합시킨 나오키 상 수상작 를 통해 처음 알게 됐습니다. 굉장히 독특한 작품인데다 미묘한 필력이 눈길을 끌어서 후속작을 기대하고 있었는데, 고백하자면 죄의 끝은 서평을 써야 되나 말아야 되나 고민이 될 정도로 저에겐 다소 어렵고 이해하기 쉽지 않은 작품이었습니다. 파멸에 이른 지구, 생존을 위한 식인, 선악의 경계가 모호해진 황폐한 세상, 그리고 그런 상황에 내몰린 자들이 갈망한 진정한 구원 등 대재앙 이후 살아남은 자들이 겪는 지독한 비극에 신화와 종교와 도덕의 서사를 가미한 이야기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어렵고 이해하기 쉽지 않았다는 것 역시 독서의 결과 중 하나라는 생각에, 읽으면서 느꼈던 바를 몇 마디 적어보려고 합니다.

 

전쟁 혹은 조난을 다룬 픽션 가운데 생존을 위한 식인을 그린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불가피한 상황이긴 해도 사람을 먹은 사람들은 구토 등 육체적인 거부감은 말할 것도 없고 끝없는 죄책감과 죄의식에 시달리게 됩니다. ‘죄의 끝에 등장하는 경계선 바깥의 사람들처럼 말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용서와 구원이 된 소년 너새니얼의 한마디는 의외로 간결하고 단순합니다. 한 사람을 먹었으면 두 사람을 구하라.” 자기합리화에 불과한 궤변처럼 들리기도 하지만, ‘죄의식에 사로잡힌 식인종들에겐 그야말로 눈물 나는 구원의 한마디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동사와 아사의 걱정이 없는 경계선 내부 사람들에게 있어 식인을 조장하고 살인을 일삼는다고 소문난 너새니얼은 반드시 제거해야 할 잔혹한 범죄자에 불과합니다. 그런 너새니얼을 제거하기 위해 파견된 네이선은, 말하자면 경계선의 중간쯤에 선 채 이 모든 혼란의 양면을 동시에 목도하는 인물입니다. 식인도, 살인도 용납할 수 없는 그였지만 생존의 한계에 몰린 인류가 어떤 식으로 새로운 가치관을 만들어내고 또 어떤 식으로 자신들의 구원자를 찾아내는지를 낱낱이 지켜보면서 고민과 갈등에 사로잡히기 때문입니다.

 

죄의 끝은 독자의 감정이입을 차단하고 객관적인 시점에 머물게 하는 구성을 취합니다. 너새니얼 제거작전은 현재가 아니라 20년 전에 벌어진 일이며, ‘죄의 끝은 실은 자료수집과 인터뷰를 거쳐 너새니얼의 일생을 조사한 네이선이 제거작전 과정의 전말까지 가미하여 펴낸 책의 내용입니다. 네이선도, 너새니얼도 주인공이라 할 수 없습니다. 감정과 시점을 이끄는 주인공이 없는 상태에서 멸망한 세계와 인류가 맞닥뜨린 참극을 중립적인 눈으로 바라보도록 만들었다는 뜻입니다. 물론 너새니얼을 추격하는 네이선의 여정을 읽으면서 독자는 어쩔 수 없이 잠시의 감정이입을 경험하게 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까지 담담한 마음을 견지하며 페이지를 넘길 수 있었던 건 이런 구성 덕분입니다.

 

식인을 소재로 한 흥미진진한 SF 스릴러도 아니고, 빠른 속도로 읽어선 안 될 쉽지 않은 작품이지만, 포스트 아포칼립스, 즉 종말 혹은 대재앙 이후의 픽션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큰 매력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제 경우 아쉽게도 그쪽 취향이 아니라서 더 어렵게 읽은 것 같은데, 그래선지 언젠가 시간이 좀 흐른 뒤에 꼭 한 번 다시 읽어보고 싶은 욕심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너새니얼과 네이선의 이야기를 이번보다는 조금은 더 깊고 진중하게 읽어낼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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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팅 데이
이현진 지음 / 아프로스미디어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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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아버지의 죽음을 목격한 트라우마 때문에 지금도 상담과 함께 수면제 처방을 받는가 하면 재직 중인 초등학교에선 고참 교사들의 갑질에 순응하는 등 정희태는 외양만 놓고 보면 매가리 하나 없는 유약한 청년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실은 그는 13살 때 첫 살인을 저지른 것을 시작으로 한 달에 한 번씩 죽여 마땅한 사람들을 거리낌 없이 제거하는 사이코패스입니다. 어느 날, 살인을 목전에 둔 정희태는 뜻밖의 방해꾼 때문에 모든 일을 망치고 맙니다. 얼마 후 방해꾼의 정체를 알아낸 정희태는 그를 처리할 좋은 아이디어를 떠올리지만 예기치 못한 사태가 벌어지면서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지고 맙니다.


 

세상에 숨어 사는 괴물들을 제물로 바침으로써 나는 내가 세상에 이로운 존재라는 사실을 입증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모를 것이다. 내가 세상을 매일매일 조금씩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p82~83)

 

미드 덱스터가 사적 제재와 사적 복수 서사의 원형까지는 아니지만 매체를 불문하고 수많은 후예들을 양산한 건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법망을 빠져나간 범죄자들이나 죄를 짓고도 벌을 받지 않은 자들에 대한 주인공의 무자비한 제재와 복수는 언제나 관객과 독자의 환영을 받았고, 이루 말할 수 없는 쾌감까지 선사했기 때문입니다. 유사한 스토리가 반복적으로 재생산되면서 더는 예전과 같은 신선함이나 짜릿함을 만끽하기 어려워졌지만, 여전히 사적 제재와 사적 복수는 스릴러의 매력적인 소재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치팅 데이역시 덱스터의 후예들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는 한국형 사적 제재 스릴러입니다. 주인공 정희태는 반쯤은 타고 났고 반쯤은 후천적으로 숙성된 사이코패스입니다. 그는 자신과 세상을 속여도 되는 날’, 즉 치팅 데이라는 규칙을 세워놓곤 한 달에 한 번씩 박멸되어야 하는 벌레 같은 존재들을 눈앞에서 치워 버리곤 합니다. 굳이 치팅 데이라는 규칙을 정한 건 살인에 탐닉하는 괴물이 되지 않도록 스스로를 억제하기 위함입니다. 그런 정희태 앞에 어느 날 갑자기 방해꾼이 나타나면서 이야기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합니다. 둘 중 하나가 죽어야만 끝나는 게임이 시작되고, 그 게임의 와중에 적잖은 사람들이 끔찍한 비극을 맞이합니다.

 

한국판 덱스터의 탄생이라는 노골적인 띠지를 두르긴 했지만 치팅 데이는 결론부터 말하면 개성과 특징이 희미한 덱스터의 모방작에 가까운 작품입니다. 읽기 전부터 염두에 둔 건 기존의 유사한 작품들과 차별되는 지점은 어디인가?”였는데, 거의 유일하다고 할 수 있는 건 목적도 동기도 다른 라이벌 살인마가 등장한다는 점입니다. 정희태와 라이벌의 대결이 치팅 데이의 중심 이야기이긴 하지만 그 외엔 덱스터의 후예정희태를 기억하게 할 만한 특별한 개성이 없었다는 게 솔직한 제 생각입니다.

치팅 데이라는 독특한 괴물 방지 장치가 설정되긴 했지만 실은 그건 방법론의 차이일 뿐 근본적인 차별점은 아닙니다. 또한 정희태는 자신만의 도덕 기준’, 즉 죽여 마땅한 자들을 선정하는 기준을 여러 번 강조하는데, 그 기준이란 지금까지 보고 읽은 것들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정희태는 엔딩과 에필로그에서 스스로에게 도덕적 질문 - 자신의 행동이 과연 정당화될 수 있는지, 자신의 방식이 진정한 정의를 실현하는 것인지 - 을 던지는데, 이는 캐릭터를 차별화시킨다기보다는 오히려 무색무취하고 평범하게 만든 어설픈 질문이란 생각입니다(이 장면에선 개인적으로 덱스터의 후예들가운데 가장 좋아하는 피터 스완슨의 죽여 마땅한 사람들의 주인공 릴리 킨트너가 많이 생각났습니다)

 

유사 작품들과의 차별성만큼 아쉬웠던 건 스릴러 서사를 떠받치는 디테일한 장치들이 너무 쉽고 안이하게 설정됐다는 점입니다. 사이코패스의 연원을 불행한 가족사라는 편리한 장치에만 의존합니다. 두 사람이 서로의 정체를 파악하는 과정은 웃음이 나올 정도로 쉽습니다. 두 사람의 살인 행각은 CCTV와 블랙박스를 잘도 피해 다닙니다. 위기일발의 순간마다 끼어드는 제3자의 반격은 거의 닌자 혹은 투명인간 수준입니다. 사소하다면 사소한 문제일 수도 있지만 개인적으론 이런 디테일이야말로 스릴러 서사 자체를 강력하게도, 허약하게도 만들 수 있는 중요한 토대라는 생각입니다.

 

덱스터의 후예들을 자처하는 작품이라면 오히려 덱스터와 차별되는 지점을 내세울 수 있어야 합니다. 권총 한 번 쏘기도 쉽지 않은 한국 스릴러의 현실을 감안하면 디테일은 몇 번을 강조하고 신경 써도 지나치지 않다는 생각입니다. 다른 건 몰라도 두 가지 미덕에 관한 한 치팅 데이는 아쉬움이 크게 남을 수밖에 없는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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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스팅 - 그가 사라졌다
리사 엉거 지음, 이은선 옮김 / 황금시간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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렌 그린우드는 불행한 과거를 딛고 인기 있는 칼럼니스트로 살아가는 중이다. 연애에 서툰 그녀는 데이트 앱을 통해 애덤을 만나 열정적인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렌이 자신의 불행했던 과거를 털어놓은 다음날, 애덤은 갑자기 사라져 버린다. 그리고 렌은 사설탐정 베일리에게 애덤과 사귀었던 세 명의 여자들이 모두 실종됐다는 놀라운 이야기를 듣는다. 애덤의 흔적을 쫓던 렌은 그가 이미 자신의 과거를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충격에 빠진다. 애덤은 혹시 자신의 과거 때문에 일부러 접근한 걸까? 실종된 세 명의 여자들에겐 무슨 일이 생긴 걸까? 애덤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 렌은 자신의 과거로 이어지는 단서를 쫓아 애덤을 추격하기 시작한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배우자 또는 연인이 갑자기 사라지거나 알고 보니 지금까지 그()에 대해 알고 있던 모든 것이 거짓이란 설정은 도메스틱 혹은 심리 스릴러의 단골 소재입니다. 피로감이 느껴질 정도로 여러 작품에서 활용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스팅을 읽기로 한 건 리사 엉거의 전작인 ‘745분 열차에서의 고백이 인상적이었기 때문입니다. “5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을 사건보다 캐릭터의 힘으로 끌고 간 작가의 필력은 대단해 보였다.”라는 서평을 남기기도 했는데 고스팅역시 미스터리와 스릴러 서사보다는 개성 강한 인물들의 다채로운 심리가 더 눈길을 끈 작품입니다.

 

20대 후반인 렌은 어린 시절 가족의 파멸을 생생히 지켜봤던 트라우마를 가진 인물입니다. 그런 트라우마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다른 사람들의 고민을 상담해주는 디어 버디라는 블로그와 팟캐스트를 운영하며 나름 긍정과 희망의 기운 속에 살아가는 중입니다. 하지만 그런 그녀가 데이트 앱에서 만나 사랑에 빠진 상대는 다소 어둡고 불운해 보이는 남자 애덤입니다. 밝고 가볍고 유머 감각이 있는 남자보다 어딘가 자신의 과거와 닮은 애덤에게 끌린 건데, 그 때문인지 렌은 절친 한 명 외엔 누구에게도 말한 적 없는 자신의 고통스러운 과거를 아무 거리낌 없이 털어놓고 맙니다.

문제는 그 직후 애덤이 사라졌다는 점, 그의 모든 것이 거짓이었다는 점, 그리고 그와 만났던 세 명의 여자들이 실종됐으며 그녀들은 렌과 마찬가지로 불행한 과거와 평균 이상의 재산을 보유한 공통점이 발견됐다는 점입니다. 가장 당혹스러웠던 건 애덤이 오래 전부터 자신의 트라우마와 과거사를 모두 알고 있었다는 사실, 그리고 애덤이 애초 자신에게 접근한 이유가 어쩌면 과거사 속에 숨어있을지도 모른다는 근거 없는 추정인데, 이 때문에 이야기는 사라진 애덤 찾기봉인했던 과거와의 고통스런 조우라는 두 갈래로 전개됩니다.

 

실종된 여성 중 한 명의 부모에게서 의뢰를 받은 사설탐정 베일리와 렌이 함께 애덤의 흔적을 뒤쫓는 미스터리와 20여 년 전 렌과 그녀의 가족이 겪은 끔찍한 비극이 번갈아 등장하는데, 비교적 단선적인 미스터리 구도에도 불구하고 500페이지 가까운 분량의 밀도와 농도가 진하게 느껴진 건 각 인물들의 복잡하고 요동치는 심리 묘사 덕분입니다. 특히 지독한 상처와 트라우마에도 불구하고 그와 비슷한 기운을 발산하는 애덤에게 이끌렸던 렌에게선 자기 파괴적이고 집착에 가까운 사랑과 열정을 느낄 수 있는데, 그가 사라진 뒤에도, 또 그가 세 명의 여성의 실종에 혐의가 있어 보인다는 사실을 알고도 그에 대한 갈망을 포기하지 못하는 렌에게선 이성과 상식으로는 설명할 길 없는 사랑의 광기 같은 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마치 전쟁터에서 큰 트라우마를 입은 인물이 결국은 다시 전쟁터를 갈망하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랄까요?

 

애덤을 쫓는 렌과 베일리의 추적 미스터리 자체는 딱히 두드러지거나 인상적인 대목은 없습니다. 오히려 작은 단서들이 드러날수록 봉인했던 과거와 직면하게 되는 렌의 고통과 그런 렌에게 연민과 공감을 느끼는 베일리의 복잡한 심경이 더 눈길을 끕니다. 또한 애덤을 찾아내 실종 여성의 행적과 생사를 알아내려는 베일리와 달리 렌의 목적은 애덤과의 사랑을 재확인하고 다시금 행복한 나날을 되찾는 것이기에 두 사람 사이엔 협력보다는 긴장감이 상존할 수밖에 없고 이런 설정은 마지막까지 독자의 마음을 뒤흔들어놓습니다.

 

똑같은 이야기를 일본 미스터리 스타일로 풀었다면 무척 단선적인 이야기가 됐겠지만, 리사 엉거는 특유의 집요하고 섬세한 묘사를 앞세워 말 그대로 쫄깃한 심리 스릴러를 완성시켰습니다. 물론 상식과 이성으론 이해하기 힘든 렌과 애덤의 심리가 간혹 위화감을 자아낸 건 사실이지만, 렌의 끔찍한 과거사와 막판에 밝혀진 진실 덕분에 어느 정도는 눈감아 줄 수 있었습니다. 도메스틱 혹은 심리 스릴러에 거부감이 있는 독자라도 충분히 그 재미를 만끽할 수 있는 작품이니 관심 있는 독자라면 한번쯤 만나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사족이지만, ‘고스팅을 끝까지 몰입해서 읽을 수 있었던 건 번역이란 이런 것!”이란 걸 여러 번 실감하게 해준 이은선의 매끄럽고 완벽한 번역 덕분입니다. 심리 묘사에 치중한 작품이라 번역가에겐 쉽지 않은 작업이었을 텐데 주로 스티븐 킹의 작품에서 선보였던 이은선의 저력이 고스팅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됐다는 생각입니다. 책을 고르는 데 있어 누가 번역했는지도 꽤 중요하게 여기는 제겐 이은선은 모든 애서가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번역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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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가와 란포 기담집
에도가와 란포 지음, 김은희 옮김 / 부커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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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미스터리 마니아라면 언젠가 에도가와 란포의 작품을 출간 순서대로 읽어보고 싶은 욕심이 들 것입니다. 알라딘에서 검색하면 모두 56편의 작품이 한국에 출간된 걸로 나오지만 아케치 고고로 시리즈를 제외하면 약간은 중구난방의 느낌이 드는 게 사실이고, 체계적으로 그의 작품세계를 정리했다기보다는 독자의 관심을 살 만한 중단편들이 중복 출간된 경우가 더 많아서 마니아의 욕심을 충족시키기 어려워 보이곤 합니다. 2016년에 검은숲에서 에도가와 란포 결정판을 내놓긴 했지만 2편까지만 나오곤 소식이 끊겨서 무척 아쉬웠는데, 오랜만에 다수의 수록작을 품은 에도가와 란포 기담집이 출간돼서 반가운 마음으로 읽게 됐습니다.


 

모두 16편이 수록됐지만 거의 절반 가까이는 이미 다른 중단편집을 통해 소개된 작품들입니다. 특히 애벌레’, ‘인간 의자’, ‘거울 지옥등은 두세 편 이상의 중단편집에 중복 수록됐던 인기작들인데, 오랜만에 다시 읽어도 여전히 에도가와 란포 특유의 기괴함과 그로테스크한 마력을 만끽할 수 있어서 그의 대표작으로 손꼽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란성 쌍둥이 형을 죽이고 형 행세를 하며 살인을 저지른 남자의 참회록(쌍생아), 법을 어기지 않고도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낸 뒤 99명의 목숨을 빼앗은 남자(붉은 방), 아내를 살해하고 토막 내어 시랍으로 만든 약사(백일몽), 자신이 만든 의자 속에 숨어들어가 가죽 한 장 사이로 타인의 몸과 접촉하는 것에 도취든 장인(인간 의자), 사람들의 무시와 핍박 속에 살인귀로 전락해버린 난쟁이 광대(춤추는 난쟁이), 결혼 6개월 만에 차갑게 변한 남편의 비밀을 캐다가 참혹한 비극과 마주하고 만 여자(사람이 아닌 슬픔), 전쟁 중에 팔과 다리를 잃고 오직 시각과 촉각만 남은 전직 군인 남편을 추악한 욕정의 도구이자 가학적 학대의 대상으로 이용하는 여자(애벌레) 등 상상을 초월하는 인물과 이야기가 기담과 괴담 혹은 호러와 미스터리 서사에 실린 채 예측 불가능한 엔딩을 향해 폭주하면서 독자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듭니다.

 

하지만 에도가와 란포의 진짜 매력은 전대미문의 기괴함이나 무한대로 일그러진 그로테스크 그 자체에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독자는 각 수록작의 마지막 장을 덮을 때마다 서로 다른 색깔의 특별한 여운을 맛보게 되는데, 제 경우 앞서 읽은 끔찍한 이야기에서 어떻게 이런 여운이 파생될 수 있을까, 라는 혼란과 이질감을 느끼다가 금세 이것이 에도가와 란포만의 매력이라는 결론에 이르곤 했습니다. 실제로 수록작 중 상당수는 단순히 무섭고 끔찍한 이야기에 그치지 않고 곳곳에 말로 다 표현 못할 처연함과 애틋함을 품고 있습니다. 심지어 요즘의 시선으론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범죄와 악의를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주인공에게 이입된 나머지 용서하거나 응원하거나 모르는 척 해주고 싶은 마음이 저절로 드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물론 악마 그 자체를 적나라하게 그려내서 다 읽은 뒤 지독한 혐오감에 빠지게 만드는 작품도 있습니다)

 

요즘 독자의 트렌드로 볼 때 에도가와 란포의 작품은 출판사에겐 바람직한 비즈니스 대상이 아닐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지만 언젠가 그의 작품들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결정판이 시리즈로 출간되기를 복권을 사는 마음으로 기대해보고 싶습니다. 특히 정치적 상황 때문에 다소 말랑말랑한 작품(‘아케치 고고로 시리즈)을 쓸 수밖에 없게 된 1936년 이전의 작품들이라면 언제라도 두 손 들어 환영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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