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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대
모리미 토미히코 지음, 권영주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1년 7월
평점 :
“책 한 권을 집어서 펴면 그 순간 특별한 시간이 흐르기 시작한다. 그때까지 아무것도 없었던 공간을 말이 메워 그곳에 세계가 나타난다. 다른 책을 집으면 또 다른 세계가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책을 덮으면 세계는 어디에도 없다. 글자를 인쇄한 종이 묶음이 있을 뿐.” (p118 中)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나 ‘야행’과 마찬가지로 ‘열대’는 어디에서도 만나볼 수 없는 특별한 세계를 독자 앞에 펼쳐놓습니다. 책을 읽는 동안 현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모리미 도미히코가 자아낸 이계(異界)가 독자의 몸과 마음은 물론 주위의 모든 것을 잠식해버립니다. ‘열대’ 속 세계는 이해하기도, 납득하기도 힘든데다 상식과 논리가 통하지 않는 기이한 시공간이지만 황홀함과 두통과 착시를 동시에 불러일으키는 묘한 매력을 지닌 곳이기도 합니다.
‘소설 속 소설’인 ‘열대’는 사야마 쇼이치라는 작가가 1982년에 출간한 소설입니다. 하지만 이 소설을 읽은 그 누구도 마지막 페이지에 도달하지 못한 것은 물론 어느 날 갑자기 책 자체가 사라져버리는 신기한 경험을 겪었습니다. 그들은 하나 같이 교토의 헌 책방이나 길거리에서 ‘열대’를 접했으며, ‘천일야화’에 특별한 관심을 가졌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기도 합니다. 그들의 궁극의 의문은 일본 그 어디에도 ‘열대’라는 책이 출간된 흔적이 없다는 점입니다.
“애초에 ‘열대’의 존재 자체가 확실하지 않다. 실물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한 명도 없으니까. 작가는 사라지고 책도 사라지고 그저 바닥이 보이지 않는 구멍만이 남아 있을 뿐.” (p113)
‘열대’를 접했던 몇몇 사람이 모여 자신들의 기억을 그러모아 ‘열대’를 완성하려 시도합니다. 하지만 초반 외엔 대부분 단편적인 기억들만 남아서 좀처럼 ‘열대’의 전체 모습에 다가가지 못합니다. 그러던 중 그 모임에 한 여자가 참가하면서 상황은 급변합니다. 그녀가 기억해낸 “모래사막의 궁전, 보름달의 마녀”라는 단서 덕분에 지지부진하던 논의는 새 돌파구를 찾게 되고, 그때부터 멤버들은 누구보다 먼저 ‘열대’의 남은 이야기를 알아내기 위해 각자의 길을 걷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그 직후 멤버들이 차례로 실종되는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집니다.
이후 나머지 분량은 소설 ‘열대’의 내용과 그것이 집필된 계기와 과정을 그립니다. 남양의 바다에서 기억을 잃은 채 깨어난 한 남자, 섬을 창조하고 파괴하는 마술을 부리는 마왕과 그가 지배하는 바다, 그 마왕에 저항하는 세력, 그리고 이 모든 판타지 속에서 롤러코스터 같은 상황에 휩쓸리다가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로 남기기로 결심한 한 남자의 사연이 펼쳐집니다.
“세계 어딘가에 구멍이 있고 그 너머에 불가사의한 세계가 펼쳐져있다는 느낌. 다른 세계로 나를 데려가려는 힘이 늘 나를 노리고 있다는 느낌. 그건 섬뜩한 동시에 감미로운 기분이었다.” (p510)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와 ‘야행’ 등 단 두 편이긴 해도 모리미 도미히코의 판타지에 제법 익숙하다고 여기고 있었지만 ‘열대’는 “모리미 판타지의 절정을 보여주는 작품”이라는 출판사 소개글답게 상상을 초월한 세계와 인물들이 등장하여 읽는 내내 몽환적인 분위기에 사로잡히게 만들었습니다. 현실과 비현실, 존재와 허구가 마구 뒤섞인 가운데 ‘뫼비우스의 띠’마냥 경계 자체를 알 수 없는 이야기가 시공간을 넘나들며 전개되는데다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 ‘소설’에 대한 소설, ‘판타지’에 대한 판타지라는 특이한 구조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장을 덮었을 때 기억이 날 듯 말 듯한 화려하고도 기괴하기 짝이 없는 꿈에서 깬 느낌이 드는 건 아마도 저만의 경험은 아닐 거란 생각입니다.
‘열대’를 통해 모리미 도미히코와 처음 만난 독자라면 다소 당혹감을 느낄 수밖에 없을 거란 생각입니다. 상식도, 논리도, 기승전결도 보이지 않는 극강의 판타지에 일반적인 해석이나 유추조차 허용하지 않는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 서평을 쓰는 지금까지도 얼얼한 상태인데, 혹시라도 모리미 도미히코의 ‘친절한 판타지’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를 읽어볼 것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야행’ 역시 흥미로운 작품이지만 모리미 도미히코와 첫 대면하기엔 아무래도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가 좀더 적합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RHK로부터 도서(가제본) 협찬을 받았지만, 본인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하여 작성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