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전트 러너
존 르 카레 지음, 조영학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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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에서의 오랜 현장 임무를 마치고 런던으로 돌아온 47살의 비밀정보국 요원 내트는 자신에게 주어질 두 개의 선택지 - 무료한 사무직이 되거나 해고 통보를 받아들이거나 를 놓고 고민에 빠집니다. 하지만 정보국은 내트에게 유명무실해진 분국 한 곳의 지휘를 제안합니다. 제안 자체가 의심스럽지만 내트는 베테랑 스파이로서의 관록을 발휘해보기로 결심합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악재가 터지면서 내트와 분국 요원들은 좌절하게 됩니다. 내트는 취미 이상의 애정을 쏟아온 배드민턴에 의지해 몸과 마음을 달래려 하는데 그런 그에게 20대 청년 에드가 도전장을 내밉니다. 처음엔 다혈질에 괴짜처럼 보였지만 매주 이어진 배드민턴 게임을 통해 내트는 에드에게 친밀감을 느낍니다. 그러던 중 러시아 거물급 스파이의 행적을 눈치 챈 내트는 베테랑답게 정보국 전체를 이끌며 작전 지휘를 맡습니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 내트는 갑자기 반역자로 몰리고, 함께 작전을 펼치던 동료들로부터 심문을 받는 신세가 됩니다.

 

(인터넷 서점의 소개글에는 내트가 반역자로 몰리게 된 이유까지 상세히 설명돼있는데, 읽다 보면 쉽게 짐작할 수 있는 내용이긴 하지만 그래도 나름 스포일러이기 때문에 가급적 피하시기 바랍니다.)

 

스파이 소설을 쓰는 스파이라는 별명답게 존 르 카레는 실제로 영국에서 스파이로 복무했던 경험이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임무에 관해서든 사생활에 관해서든 스파이의 내밀한 부분들을 무척 리얼하게 그려냈다는 생각입니다.

한국에 꽤 많은 작품이 소개됐음에도 불구하고 존 르 카레를 읽은 것은 모스트 원티드 맨이 유일합니다. 딱히 스파이물이 취향에 안 맞는 건 아닌데 5~6년 전쯤 한 작품을 중도에 포기한 뒤로 좀처럼 손이 나가지 않았던 게 가장 큰 이유입니다.

 

각주에 따르면 에이전트 러너는 비밀에 접근 가능한 사람들을 포섭해 관계를 유지하고 비밀 확보를 위해 지시와 지원을 하는 고급 요원을 지칭하는데, 말하자면 스파이를 발굴하고 관리하는 스파이이란 뜻입니다. 그만큼 경험도 많아야 되고 유능해야 한다는 얘긴데, 내트는 요원으로서의 능력은 물론 살짝 마초 기질도 지닌 매력적인 중년남자로 그려집니다.

 

이 작품의 중요한 배경 가운데 하나는 20166월 결정된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 즉 브렉시트(Brexit)입니다. 주인공 내트는 물론 그의 배드민턴 파트너인 에드의 입을 통해 작가는 브렉시트에 대한 반감과 미국 대통령 트럼프에 대한 증오심을 숨김없이 드러냅니다. 그리고 내트를 반역자로 몰고 간 결정적인 계기 역시 브렉시트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인지 이 작품을 읽기 전에 브렉시트가 결정된 직후 영국의 정치적, 사회적 분위기를 미리 공부한다면 훨씬 더 흥미로운 책읽기가 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유명무실해진 비밀정보국 분국을 맡았다가 좌절하는 이야기가 전반에 펼쳐지고 이어 러시아 거물급 스파이가 일으키는 긴장감 넘치는 첩보 미션이 전개됩니다. 그러다가 주인공 내트가 반역자로 몰리면서 막판 클라이맥스로 이어지는데, 보통 이런 설정은 주인공이 오해를 풀고 악당을 제거하는 이야기가 되기 마련이지만 이 작품은 전혀 뜻밖의 결말을 향해 달려갑니다. 누가 적이고 누가 아군인지조차 불분명해지는가 하면, 정의와 불의의 경계선도 모호해지면서 주인공 내트의 선택과 결정은 일반적인 스파이물에선 볼 수 없는 특별한 반전을 이끌어내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브렉시트가 야기한 영국의 암울한 미래에 관한 정치적 찬반론까지 진하게 녹아든 탓에 독자는 내트의 마지막 결정에 대해 명쾌한 판단을 내리기 어렵게 됩니다. (이런 점 때문인지 뉴욕타임스는 스파이의 환멸을 담아 영국에 보내는 일격.”이라고 소개했습니다.)

 

스파이물의 미덕도 잘 갖췄고 영국식 유머도 간간이 맛볼 수 있는 매력적인 작품이지만, 동시에 영국식 불친절함이 남긴 모호함과 아쉬움도 그만큼 많이 남았던 작품이기도 합니다. 내트의 행적 가운데 일부는 ?”라는 의문이 들었고, 반역자로 몰린 뒤 그가 내린 마지막 결정 역시 상당 부분 생략돼있어서 어떻게?”?”라는 궁금증이 전혀 해소되지 않았습니다. 영국 미스터리와 스릴러에서 드물지 않게 겪는 이 불친절함은 도무지 적응하기가 쉽지 않은데, ‘에이전트 러너역시 비슷한 경험을 안긴 작품이었습니다.

제대로 만나보지 못한 거장이라 작고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남긴 작품들에 대해 계속 관심을 가지겠지만 매력적인 스파이 서사와 블랙유머의 미덕들이 부디 영국식 불친절함에 의해 가려지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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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터
유즈키 아사코 지음, 권남희 옮김 / 이봄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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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사이트에서 만난 세 남자에게 거액을 갈취한 뒤 의문사로 가장해 살해한 꽃뱀 살인사건의 범인 가지이 마나코는 범행 그 자체보다 뚱뚱하고 추한 외모때문에 세간에 화제를 일으킵니다. 반성은커녕 범행을 부인하며 오히려 자신은 음식과 사랑으로 그들에게 헌신했다는 가지이의 주장은 저런 여자가 꽃뱀?”이란 비아냥은 물론 극렬한 여성혐오까지 일으킵니다.

유력 주간지의 특종제조기마치다 리카는 가지이가 요리 블로그를 운영했고 고급 요리교실에 다닌 점에 착안하여 요지부동이던 그녀와의 면회를 성사시킵니다. 하지만 가지이는 사건에 관해선 함구한 채 리카에게 엉뚱한 요구를 합니다. 자신의 지시한 요리를 직접 해먹거나 지정한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그 소감을 얘기해달란 것입니다. 독점 인터뷰를 노리던 리카는 그녀의 요구대로 하나같이 버터가 들어간 고칼로리의 음식들을 먹게 되는데, 예상치 못한 버터의 향미에 빠져 급격한 체중 증가라는 부작용을 겪지만 동시에 가지이에 대한 세상의 편견이 잘못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의문과 함께 사건에 관한 새로운 가능성을 떠올리기에 이릅니다.

 

꽤 장황하게 줄거리를 정리했지만 실은 극히 초반의 내용을 정리한 것에 불과합니다. 600페이지에 담긴 이야기는 워낙 버라이어티하고 그에 걸맞게 등장인물도 꽤 많아서 일목요연한 줄거리 정리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초반 설정이나 출판사 소개글만 보면 꽃뱀 살인마가지이와 특종제조기리카의 맞대결을 다룬 미스터리 혹은 여성혐오를 다룬 페미니즘 소설처럼 보이지만 버터는 훨씬 더 많은 주제를 다룬 작품입니다. 읽으면서 끄적거린 메모 속엔 요리, 여성의 몸, 가족이란 이름의 굴레, 가부장제, 자유의지, 슬기로운 자기애, 성장소설 등이 적혀 있는데 그만큼 다양한 주제와 서사들이 두툼한 분량 안에 포진돼있다는 뜻입니다. 오히려 미스터리는 이 작품에서 하위서사 정도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지이의 과거와 현재를 집요하게 추적하며 진실을 쫓는 리카의 행적 덕분에 나름 독특한 미스터리를 맛볼 수도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위에 나열한 주제 중에 딱 한 가지만 꼽으라고 한다면 단연코 성장소설입니다. 이미 특종제조기로 인정받은 30대 초반의 마치다 리카가 희대의 살인마로 낙인찍힌 가지이와의 만남을 통해 자신의 삶 살얼음 같은 불안정한 사랑, 오랜 시간 애증의 범벅이었던 가족, 복잡다단한 관계로 엮인 주변 사람들, 막연했던 기자로서의 미래 을 찬찬히 되돌아보면서 스스로도 생각지 못한 새로운 미래와 인간관계를 설계하는 이야기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리카에게 영향을 받은 주변 인물들 역시 크고 작은 성장을 겪는데, 절친이자 세컨드 주인공인 레이코, 위기의 연인 마코토, 성실한 정보원 시노이, 느긋한 직장후배 기타무라는 리카와의 인연 덕분에 제각각 안고 있던 고민과 갈등을 조금씩 해소하며 뒤늦은 성장을 경험하게 됩니다.

 

리카의 성장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건 버터가 들어간 고칼로리 음식들입니다. 가지이를 만나기 전까지 요리는커녕 제대로 된 주방도구조차 없던 리카는 진하고 고소하고 부드러운 버터의 세계에 푹 빠진 뒤로 직접 요리를 하며 새로운 세상을 만나게 됩니다. 연인, 가족, 절친, 직장 등 그녀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던 고민들은 버터가 든 음식과 요리라는 행위를 통해 생각지도 못한 출구를 찾아냅니다. 그 고민들이 모두 해피엔딩을 맞이하진 않지만 적어도 막다른 벽 앞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던 절망에선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애증과 고민의 대상들이던 주위 사람들을 초대하여 칠면조 파티를 벌이는 마지막 장면은 리카가 버터와 음식과 요리를 통해 한 뼘 넘게 성장한 훈훈한 피날레를 장식하고 있습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라면 이 작품에 기대를 걸었던 미스터리 서사와 여성혐오라는 주제가 생각만큼 도드라지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 너무 많은 소()주제들이 등장하는 바람에 이 작품의 가장 큰 줄기가 무엇인지, 리카가 가지이와의 독점 인터뷰를 통해 세상에 알리고자 했던 것이 과연 무엇인지 조금은 희미해졌다는 점도 아쉬웠습니다. 물론 요리, 여성, 가부장제, 가족 등 작가가 방점을 찍었던 주제들이 한줄기로 잘 꿰여져 있긴 하지만 개인적으론 뚜렷한 연결고리가 느껴지지 않았던 게 사실입니다. 또 이 모든 걸 담기 위해 작의에 비해 다소 과하게 느껴진 분량도 종종 책읽기를 느슨하게 만든 요인이었습니다.

 

한국에 소개된 유즈키 아사코의 작품이 모두 9편인데, 제목들은 모두 낯익지만 실제 읽은 건 버터가 처음입니다. 일본소설 특유의 정취도 잘 살아있고 문장도 간결하고 선명해서 다른 작품들에도 기대와 관심을 가져볼 생각입니다. “그간 작품에서 여성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고 억압하는 사회에 대한 분노를 드러내왔다.”는 작가의 인터뷰는 그런 기대와 관심을 더 자극하는데, 어떤 작품부터 읽을지 찬찬히 검색해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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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다 추하다 당신의 친구
사와무라 이치 지음, 오민혜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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뛰어난 미모와 카리스마로 요쓰카도 고교 3학년 2반을 좌지우지하던 하무라가 갑작스레 자살하자 교사와 학생들은 충격에 빠집니다. 문제는 2반의 미모의 여학생들에게 연이어 끔찍한 변괴가 일어났다는 점. 부임한지 얼마 안 된 담임 마이카는 선배 교사로부터 2반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이 요쓰카도 고교의 오랜 괴담과 연관 있다는 얘기를 듣곤 공포에 휩싸입니다. 31년 전 극도로 추한 얼굴의 여학생 레미가 자살한 뒤로 몇 년에 한 번씩 여학생이 자살하는 사건이 벌어졌는데, 괴담에 따르면 레미는 증오하는 여학생을 추하게 바꿔 버릴 수 있는 주술이 담긴 책을 남겼으며, 30여 년간 학교에서 벌어진 연이은 자살은 레미의 책을 물려받은 추한 외모의 여학생들이 주술을 부린 결과란 것입니다. 담임 마이카를 비롯 일부 여학생들은 주술을 부리는 범인을 찾기 위해 분투하지만 그로 인해 끔찍한 위기에 빠지고 맙니다.

 

보기왕이 온다’, ‘즈우노메 인형등 독특한 호러물 히가 자매 시리즈를 내놓았던 사와무라 이치가 이번에는 호러와 미스터리가 결합된 학원물로 독자를 찾았습니다. 상대의 외모를 바꿔버릴 수 있는 주술, 그 주술을 부리는 범인을 찾는 미스터리, 그리고 외모지상주의와 교실 내 계급이라는 흥미로운 요소들이 총출동한 작품입니다.

사건의 당사자들인 2반 학생들과 담임 마이카의 상황이 메인 스토리로 그려지는 가운데 누군지 짐작하기 힘든 범인의 1인칭 챕터가 번갈아 전개됩니다. 범인의 챕터를 통해 31년 전 자살한 레미가 남긴 주술이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는지 상세히 설명되는데 그야말로 사와무라 이치다운 독특하고 기괴한 도시전설의 풍미가 가득 배어있습니다.

 

주술이 깃든 호러와 후더닛 미스터리가 독자의 관심을 끄는 대목인 건 사실이지만, 이야기의 밑바탕을 이루는 외모지상주의와 교실 내 계급의 문제가 가혹할 정도로 리얼하게 그려져 있어서 상대의 외모를 바꿀 수 있는 비현실적인 주술이 굉장히 현실적으로 느껴집니다. 외모와 부모의 재력을 기준으로 그어진 경계선은 카스트에 가까운 계급사회를 구축했고, 남학생들은 물론 교사들까지 나서서 조금의 죄책감도 없이 여학생들의 평점을 매기는 상황은 사악한 주술을 부리는 범인을 오히려 응원하게 만드는 비참한 현실입니다.

 

자칫 평면적으로 마무리될 수 있었던 이야기지만 후반부의 급반전 덕분에 진범의 정체도, 범행수법도, 그리고 결코 손가락질 할 수 없는 범행동기도 무척 깊고 묵직한 여운과 함께 독자 앞에 공개됩니다. 한 사람의 외모가 호불호라는 감정적인 반응을 일으키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그것이 그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이 돼선 안 된다는 건 너무나도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잔인하게도 현실은 그 당연함을 외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개인적으론 오래 전에 본 애니메이션 슈렉의 마지막 반전이 훅 떠올랐는데, 그 반전 때문에 무척 부끄러웠던 기억을 갖고 있습니다. 부지불식간에 외모를 평가의 잣대로 여기고 있는 제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그 기억 때문인지 호러와 미스터리의 절묘한 조합이라는 매력만큼이나 외모에 관한 작가의 주장이 설득력 있게 다가왔습니다. ‘옮긴이의 말에 실린 언뜻 보면 괴담이 공포의 실체인 것 같지만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외모지상주의와 교실 내 계급이라는) 현실이 곧 공포임을 알게 된다.”100% 공감할 수 있는 건 비단 저만의 경험은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사와무라 이치의 호러물을 아주 좋아한다고 할 순 없지만 독특한 설정과 전개 때문에 계속 관심을 갖고 읽어왔는데, ‘아름답다 추하다 당신의 친구는 그의 작품 가운데 가장 높은 점수를 주고 싶은 작품입니다. 미쓰다 신조의 도조 겐야 시리즈처럼 호러와 미스터리가 잘 배합된 이야기가 마음에 들었는데 앞으로도 이런 스타일의 작품이 나온다면 두 손 들어 환영하게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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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몸과 타인들의 파티
카먼 마리아 마차도 지음, 엄일녀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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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위에서 이 작품을 먼저 읽은 사람이 “39금 소설이라고 살짝 호들갑(?)을 떤 데다 여성의 몸과 욕망,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말해지지 않은 진실.”, “강렬한 페미니즘이 관통.”, “(금기시되었던) 레즈비언, 여성의 육체적 쾌락, 폭력, 그리고 주체성을 가진 몸에 대한 이야기.” 등 관심을 끄는 여러 매체의 호평도 있고 해서 기대 반 호기심 반으로 읽은 작품입니다.

 

모두 8편의 단편이 실려 있는데, 위에서 언급한 주제들이 무겁거나 가볍게, 혹은 기괴하거나 판타지처럼 그려지고 있습니다. 수록작마다 다양한 코드들이 동원돼서 그런지 옮긴이의 말에 따르면 평론가들은 사이코 리얼리즘, SF, 개그, 공포, 판타지, 우화 등 온갖 장르를 들먹이며 도대체 이 작품을 어디에 밀어 넣어야 할지 갈팡질팡했다.”고 합니다. 개인적으론 여성과 동성애 서사를 괴담 형식으로 풀어낸 작품이라고 부르고 싶은데, 이런 조합은 거의 본 적이 없어서 꽤 신선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비밀스런 녹색 리본을 평생 목에 매고 살며 성()에 관해 거침없고 주도적인 태도를 견지하는 여자, 신체접촉으로 퍼지는 바이러스가 전 인류를 궤멸시키는 가운데 피난 중에도 남녀를 불문하고 육체관계를 갖는 여자, 갑자기 몸이 투명해지다가 결국 완전히 사라져버리지만 그렇다고 죽었다고 할 수 없는 상태에 빠지는 여자들, 그리고 동성 파트너 사이에 벌어지는 학대와 폭력 등 기담 혹은 괴담의 형식에 담긴 다양한 여성-동성애 주제를 만날 수 있습니다.

 

()에 관해 자기주도적이고 욕망을 숨기지 않는 여성도 등장하지만, 반대로 억압받거나 무기력한 여성도 등장합니다. 동성애 코드 역시 당당하고 유쾌하게 묘사된 작품도 있고 여전히 핍박받는 소수의 비극으로 그려진 작품도 있습니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도 않고 뭔가를 강요하듯 주장하지도 않는 다양한 시선들은 기담 혹은 괴담이란 형식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현실감을 고조시키고 공감의 폭을 넓게 해줍니다.

 

다만, 장르물을 주로 읽는 저 같은 독자에겐 좀 어렵고 난해한 대목들이 많아서 수록작 가운데 절반쯤은 계속 고개를 갸웃거렸던 게 사실입니다. 간혹 매력적인 비유나 신선한 문장들도 눈에 띄었지만, 반대로 몇 번을 되읽어도 무슨 상황인지, 무엇에 대한 묘사인지, 작가의 의도가 뭔지 헤아릴 수 없는 경우가 더 많았기 때문입니다. 번역가가 산문이라기보다 시에 가깝고, 좀 과장하면 문장을 이용한 미술 또는 회화 작품에 가깝다.”고 설명한 걸 보면 원작 자체가 그런 특징을 갖고 있는 것 같은데, 그래선지 각각의 수록작에 대한 해설이 꼭 첨부됐어야 할 작품이란 생각입니다. 저 같은 독자라면 해설을 꼼꼼히 읽은 뒤 다시 첫 페이지로 돌아가 정독을 해야 이 작품의 진가를 조금이나마 더 깊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녀의 몸과 타인들의 파티‘39금 소설도 아니고 흥미 위주로 읽을 작품도 절대 아닙니다. 지금까지 읽은 여성과 동성애를 주제로 삼은 그 어느 작품들보다 더 깊은 인상과 여운을 느낀 건 분명하지만, 스토리에만 집중하며 빠르게 페이지를 넘긴 탓에 난해함과 아쉬움이 더 많이 남기도 했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다른 독자들의 서평이나 이른바 전문가들의 해설을 좀더 접한 뒤에 꼭 한 번 다시 읽어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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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 타임 아이스
야마다 에이미 지음, 양억관 옮김 / 민음사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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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0여 년 전 풍장의 교실로 처음 만난 이후 늘 관심만 갖고 있었을 뿐 정작 한 편도 읽지 못한 야마다 에이미의 문제적데뷔작입니다. ‘문제적인 이유는 조금 긴 단편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문예상 수상(1985)과 함께 아쿠타가와 상 후보에까지 오른데다 당시로서는 사회적 분위기에 반하는 설정 일본여성과 흑인남성의 욕망에 충실한 연애 때문에 꽤 화제가 됐다는 점 때문입니다.

 

이야기 자체는 단순합니다. 소심한데다 노래를 잘 부르지도 못하지만 클럽에서 재즈 가수로 살아가는 일본여성 과 기지에서 탈영한 미군 흑인병사 스푼이 짧은 시간동안 나눈 치명적인 사랑 이야기입니다.

이들의 사랑은 지고지순함과는 거리가 먼 민낯 그대로의 욕망 덩어리입니다. 첫눈에 불이 붙은 그들은 동거에 들어가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서로의 육체에 탐닉합니다. 처음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걸 정도의 남자를 만났다고 확신하는 은 소유욕에 가까운 집착을 스푼에게 쏟아냅니다. 반면 스푼은 오로지 의 육체를 탐닉하는데서 만족감을 느낍니다. 둘의 관계는 술과 마약과 폭력이 개입되면서 위기를 맞기도 하지만 은 그 모든 것을 감내하며 탈영병인 스푼이 어느 날 갑자기 자기 앞에서 사라질 수도 있다는 공포에 더 연연합니다.

 

(스푼)는 생각하지 않는다. 몸으로 반응한 것만이 그의 말이 된다. 그는 자신의 몸으로 나에게 메시지를 보낸다. 나는 잃어버리고 싶지 않다. 나를 구속하는 이 모든 것을. 나는 그를 위해서라면 알코올 중독에 빠진 매춘부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p36~39 발췌)

 

일본인은 먹지 못하는 그런 요리를 나는 그와 같이 먹었다. 그런 음식이 스푼의 몸 일부를 이룬다는 생각을 하면 그의 몸을 먹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기뻤다.” (p92~93)

 

사실 두 주인공은 어딘가 판타지 속의 인물처럼 보이는 게 사실입니다. 동양여자와 흑인남자의 사랑이라는 흔치 않은 설정이라든가 왠지 세상의 비난으로부터 보호받기 위해 부여받은 듯한 익명성이 강조된 이름들 - 일본인이지만 명백히 이국적 분위기를 띄는 과 부적처럼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은 숟가락 때문에 얻은 별명인 스푼’ - 은 작은 원룸이란 폐쇄적인 공간에서 두 사람이 구현한 사랑의 판타지를 좀더 강렬하게 고조시켜주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작가는 은연중에 독자로 하여금 내가 겪고 싶진 않지만 관음증 환자처럼 몰래 지켜보고 싶은 그들만의 기이한 사랑법을 강조하려고 이런 설정들을 동원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개인적으론 구보 미스미의 한심한 나는 하늘을 보았다’, 아야세 마루의 치자나무’,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미친 사랑등 다소 상식과 도덕에서 벗어난 사랑을 그린 일본소설을 좋아하는데, ‘베드 타임 아이스역시 그 범주에 들 만한 독특한 작품입니다. 이런 작품들은 대부분 평이 극단적으로 갈리곤 하는데, 한쪽에선 (이 작품의 옮긴이의 말에서 주장하듯) ‘순수맑음이 느껴지는 애틋한 사랑 이야기로 받아들여지는 반면, 다른 한쪽에선 파괴’, ‘부도덕’, ‘더러움으로 가득 찬 불유쾌한 변태 이야기로만 읽힐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베드 타임 아이스는 노골적이고 끈적끈적한 몸의 합체를 통해 극단적인 사랑을 그리고 있어서 더욱 더 호불호를 일으킬 수 있는 작품입니다. 또 술과 마약과 폭력을 감내하는 의 태도는 사랑이라기보다 자발적인 종속이나 예속으로 보일 수도 있어서 논란의 여지가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한국에 소개된 야마다 에이미의 작품은 모두 18편 정도입니다. 하지만 개정판까지 포함하여 마지막으로 출간된 게 사랑의 습관 A2Z’(2013)이니 8년 동안 신간 소식이 없었던 셈인데, 검색해보면 일본에서는 꾸준하게 작품을 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언젠가 야마다 에이미의 작품을 순서대로 읽고 싶다는 욕심을 갖고 있었는데, 오랜만에 읽은 베드 타임 아이스를 계기로 틈날 때마다 그녀의 작품에 도전해보려고 합니다. 그만큼 제 취향에 아주 잘 맞는 특별한 작가로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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