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종 - 사라진 릴리를 찾아서,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3-24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3
마이클 코넬리 지음, 김승욱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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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피어스는 분자컴퓨터 전문가이자 획기적인 생명공학 프로젝트 프로테우스를 이끄는 스타트업의 리더입니다. 심각한 일 중독 때문에 연인과 헤어진 피어스는 새로 이사한 집에서 황당한 일을 겪습니다. 릴리라는 매춘부를 찾는 수십 통의 전화를 받게 된 것입니다. 성인 웹사이트에서 그녀의 프로필을 찾아낸 피어스는 자신이 부여받은 새 집의 전화번호가 그녀가 쓰던 번호와 똑같은 걸 알게 되는데, 문제는 그녀가 얼마 전부터 실종된 게 분명해 보인다는 점입니다. 그때부터 피어스는 일면식도 없는 릴리를 찾는 일에 몰두합니다. 그건 단순한 호기심 차원이 아니라 피어스의 어린 시절의 악몽이 사라진 릴리에게서 어른거렸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쓰던 전화번호를 부여받은 탓에 곤란함을 겪는 건 흔하진 않아도 실제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이지만, 그 전화번호의 전 주인이 매춘부인 탓에 느끼한 남자들의 전화를 연이어 받게 된다면 그야말로 당혹스러운 일일 것입니다. 상식대로라면 새 전화번호를 요청하는 걸로 끝날 일이지만, 피어스가 회사의 미래가 달린 투자자 미팅을 앞둔 상태에서 사라진 릴리를 찾는데 전념하기 시작한 것은 그의 누나와 관련된 참혹한 과거가 남긴 트라우마와 죄책감 때문입니다. 스스로에게 ?”라는 자문을 끊임없이 던지면서도 피어스는 사라진 릴리를 찾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말할 수 없는 중압감에 사로잡히고 만 것입니다.

 

형사와 사립탐정과 변호사가 등장하긴 하지만 실종은 아마추어 탐정 피어스의 원맨쇼나 다름없는 독특한 작품입니다. 상대는 일면식도 없는 매춘부인데다 그녀를 관리하는 업체는 위험천만한 어둠의 세력이라 주먹질 하나 제대로 못할 것 같은 피어스의 행동은 그저 무모해 보이기만 합니다. 하지만 그냥 손 떼는 게 좋을 것 같은데.”라는 조바심을 불러일으키던 그의 탐문은 의외로 생각지도 못한 단서들을 찾아내기 시작하는데, 문제는 그 덕분에 끔찍한 폭력에 휘말리는 것은 물론 오히려 릴리를 살해한 유력 용의자로 몰리게 된다는 점입니다.

 

공권력이나 사법시스템과 거리가 먼 평범한 사람이 중대 범죄를 해결하는 이야기는 자칫 현실감을 잃기 쉽지만 헨리 피어스는 조금의 위화감이나 어색함 없이 산전수전 끝에 사라진 릴리의 진실에 도달합니다. 또 주인공의 배경 정도로만 그려질 것 같았던 분자컴퓨터, 나노기술, 생명공학 프로젝트 등이 자연스럽게 사건과 연결되는 설정도 무척 매력적이었습니다. 피어스로 하여금 릴리를 찾게 만든 가장 큰 원동력인 어린 시절 누나가 얽힌 비극적인 과거사는 살짝 작위적인 느낌이 있긴 했지만 크게 거부감이 들진 않았습니다. 이처럼 실종은 서로 섞이기 힘든 다양한 설정과 코드들이 흥미롭게 조합된 이야기입니다. ‘해리 보슈 시리즈미키 할러 시리즈의 풍미가 느껴지면서도 사뭇 결이 다른 특별한 간식이라고 할까요?

 

실종은 마이클 코넬리의 작품 가운데 유일한 외톨이입니다. 마이클 코넬리의 스탠드얼론 주인공들(잭 매커보이, 테리 매케일렙, 캐시 블랙)해리 보슈 시리즈에 중요한 조연이나 카메오급으로 등장하여 이른바 범 해리 보슈 패밀리로 불릴 수 있는 반면, ‘실종의 주인공 헨리 피어스는 마이클 코넬리 작품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어딘가 등장했을지도 모릅니다. ‘해리 보슈 시리즈를 꼼꼼히 읽고 크고 작은 등장인물들을 메모해놓았지만 저도 모르게 헨리 피어스라는 이름을 놓쳤을 수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실종은 꽤 여러 곳에서 해리 보슈 시리즈와 접점을 갖고 있기도 합니다. 우선 피어스를 돕는 검사 출신 변호사 재니스 랭와이저는 해리 보슈 시리즈여러 편에서 보슈의 지원군 역할을 맡았던 인물입니다. 콘크리트 블론드의 끔찍한 매춘부 연쇄살인마 인형사가 피어스의 트라우마와 연결되기도 하는데, 재미있는 건 이 대목에서 재니스 랭와이저가 그놈을 쏘아죽인 형사를 나중에 알게 됐는데, 그분은 올해 은퇴했어요.”라며 해리 보슈에 대해 피어스에게 설명해주는 장면입니다. 그리고 피어스가 세상의 폭력과 혼란을 화가 히에로니무스 보쉬의 그림에 빗대어 언급하기도 합니다. (보슈의 어머니는 화가 히에로니무스 보쉬의 이름을 따서 보슈에게 히에로니머스 보슈라는 이름을 지어줬습니다.)

이렇게 많은 접점을 갖고 있으니 실종을 마이클 코넬리의 작품 가운데 유일한 외톨이로 부르는 건 적절치 않을 수도 있습니다. 다만, 헨리 피어스가 해리 보슈 시리즈가운데 어느 한 편에서라도 잠깐이나마 등장했다면 그 역시 범 해리 보슈 패밀리가 됐을 텐데 말입니다.

 

실종이 미국에서 출간된 게 2002년이니 이제 와서 새삼 헨리 피어스 시리즈가 나올 일은 없겠지만 마이클 코넬리의 어느 작품에서라도 장년이 된 헨리 피어스를 잠깐이라도 볼 수 있다면 무척 반가운 일일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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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행권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7-5 미치 랩 시리즈 4
빈스 플린 지음, 이훈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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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작품에서 미치 랩에게 주어진 임무는 두 가지. 첫째는 필리핀의 급진 이슬람단체에 납치된 미국인 가족을 구하는 것이고 둘째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의 충돌과 테러의 가능성을 막는 것이다. 납치된 미국인 가족을 구하려던 해군의 비밀작전이 적의 매복에 의해 실패하고 사전 정보유출 가능성까지 제기되자 대통령은 랩에게 후속 조치를 지시한다. 한편 팔레스타인 자유국가의 건설이 삶의 목표인 테러리스트 데이비드는 평화를 위해서는 다소의 희생이 필요하다.”는 소신을 앞세우며 미국과 이스라엘과 아랍 세계를 뒤흔들어놓을 엄청난 단독 테러 계획을 세운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전편인 권력의 분립’(‘미치 랩 시리즈’ 3)에서 야비한 정치인에 의해 암살자 신분이 폭로된 랩은 사면초가에 처했습니다. 애초 은퇴와 함께 애너와 결혼하여 평범하게 살 생각이던 랩은 하늘의 계시라고 여겼지만, 대통령으로부터 은퇴 대신 내근직을 권유받자 내가 이렇게 살 수 있을까?”라는 회의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집행권초반의 랩은 실제로 내근직인 (직함은 그럴듯한) 대테러업무 특별보좌관이 돼있었고 애너와의 신혼여행을 만끽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랩이 결코 책상머리에 앉아 지시나 내리는 역할에 만족하지 않을 것임을, 그래서 결국 현장으로 달려가 숱한 위기를 겪을 것임을 불 보듯 뻔히 짐작할 수 있었고 역시 랩은 필리핀, 미국, 프랑스를 오가며 자신에게 주어진 미션을 멋지게 클리어합니다.

 

필리핀에 억류된 미국인 가족을 구출하는 작전은 꽤 긴 분량을 차지했지만 알맹이는 무척 단선적이어서 익숙한 긴장감 이상의 맛을 느낄 순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 시퀀스의 핵심은 구출 작전 자체보다 기밀정보를 둘러싼 백악관 주변의 정치적 갈등에 있습니다. 현장을 모르는 것까진 용서돼도 현장을 무시하고 책상머리의 권력을 더 중요시 여기며 기밀정보를 사리사욕을 위해 이용하거나 대수롭지 않게 전파하는 관료들의 행태는 랩과 그의 상관인 CIA 국장 아이린 케네디를 격노하게 만듭니다. 어렵사리 인질 구출작전에 성공한 랩과 케네디가 그들을 응징하는 대목은 어지간한 액션 장면보다 10배는 더 통쾌하고 짜릿합니다.

 

미국인 가족 구출작전과는 완전히 별개로 테러리스트 데이비드의 위험한 계획이 전개됩니다. 팔레스타인 자유국가를 꿈꾸는 데이비드는 진정한 평화를 위해선 피아를 막론하고 위험요소들을 제거해야 된다는 독특한 신념을 가진 자입니다. 무고한 희생을 낳는 폭력을 저주하고 여성을 혐오하는 아랍의 문화를 증오하는 그는 어찌 보면 지극히 도덕적이고 선한 캐릭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가 팔레스타인의 진정한 해방과 자유국가 건설을 위해 선택한 방법은 아이러니하게도 지독한 폭력입니다. 더구나 그는 어느 단체에도 속하지 않은 싱글 플레이어입니다. 그런 그가 전 세계를 요동치게 할 엄청난 테러 계획을 수립하고 차근차근 실행에 옮기자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에 끼인 미국은 상상치도 못한 혼란에 빠지고 맙니다.

 

여전히 짜릿한 첩보 액션스릴러의 미덕을 갖추고 있지만 집행권은 전작들에 비해선 좀 힘이 빠져 보였습니다. 랩의 활약이 교과서적인 틀 이상을 벗어나지 못했고, 테러리스트 데이비드의 비현실적인 이상주의가 큰 매력을 지니지 못한 탓도 있습니다. 사소할 수도 있지만 결혼 후 랩의 발목을 잡는 것 이상의 역할을 못하는 애너 릴리의 민폐 캐릭터도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설정이었는데, 랩의 내면적인 갈등을 부추기는 중요한 조연이지만 철없고 무모한 것은 물론 랩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 그녀의 징징거림은 더는 보고 싶지 않은 대목입니다.

작품 외적으로 아쉬운 점은 한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 불편한 번역 문장들입니다. 전작들에서도 간간이 느끼긴 했지만 집행권은 유독 심하게 보였습니다. 원작이 그런 것인지 번역 과정에서 생긴 문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거기에 자주 눈에 띈 오타들까지 더해져서 수시로 스트레스를 받았습니다.

 

현장을 몹시도 그리워하는 랩의 타고난 기질과 그를 안전한 가족의 울타리 안에 가두려는 애너의 욕심, 그리고 그를 적극 활용하고 싶으면서도 함부로 그렇게 할 수 없어 답답한 CIA 국장의 고민 등 랩의 운신을 까다롭게 만드는 미묘한 갈등이 무척 첨예한데, 과연 그는 다음 작품에서 어떤 행보를 걷고 어떤 충돌을 겪게 될까요? 기대감와 궁금증 때문에라도 다음 작품인 전몰자의 날을 빨리 읽어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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딜레마
B. A. 패리스 지음, 김은경 옮김 / arte(아르테)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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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을 별러온 성대한 마흔 살 생일파티를 얼마 안 남겨놓고 리비아는 가족을 파멸에 이르게 만들 딸 마니의 충격적인 비밀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파티 당일, 리비아의 남편 애덤은 딸 마니에 관한 믿기 힘든 소식을 접합니다. 리비아와 애덤은 인생 최고의 행복한 순간을 코앞에 두고 딜레마에 빠집니다. 당장이라도 파티를 중단시키고 자신만이 알고 있는 충격적인 비밀과 믿기 힘든 소식을 상대에게 알려야 할지, 아니면 파국이 닥치기 전 다만 몇 시간만이라도 20년을 기다려온 행복한 순간을 만끽하게 배려해야 할지... 파티는 성대하게 진행되지만 정작 그 주인공인 리비아와 애덤은 바닥 모를 심연에 빠진 채 공포와 절망의 시간을 보냅니다.

 

나를 찾아줘이후 봇물 터지듯 쏟아진 가족 심리스릴러가운데 별 5개를 줄 만큼 만족스런 작품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었습니다. 오히려 피로도만 높아졌고 그래선지 의식적으로 외면해온 게 사실인데, 그런 와중에도 무슨 이유에선지 B. A. 패리스의 작품들은 빼놓지 않고 계속 읽게 됐습니다. ‘비하인드 도어’, ‘브레이크 다운’, ‘브링 미 백에 이은 그녀의 네 번째 작품 딜레마는 전작들에 비하면 외형적으론 무척 왜소한 소재와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심리스릴러로서의 무게감과 긴장감 면에서는 훨씬 더 압도적인 작품입니다.

 

10대 시절의 임신과 결혼, 결코 순탄치 않았던 결혼 초기의 상황, 겉으론 평온해보여도 미묘한 갈등이 상존해온 부모자식간의 관계 등 리비아 부부의 과거와 현재가 담담하면서도 살얼음마냥 위태롭게 묘사됩니다. 다사다난한 20년을 보낸 리비아 부부는 이제는 제법 안정된 삶을 영위할 수 있게 됐고, 덕분에 부모에게 의절당하고 제대로 된 결혼식마저 올리지 못한 것을 평생의 한으로 여긴 리비아가 20년을 별러온 성대한 마흔 살 파티도 행복한 기분으로 준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딸 마니에 관한 충격적인 비밀과 믿기 힘든 소식이 파티를 앞둔 리비아 부부를 공포와 절망에 빠뜨렸고, 두 사람은 감당하기 어려운 최악의 상황에서도 상대를 배려하는 차원에서 파티를 중지시키지 않았지만, 노래와 춤과 웃음이 사라지고 난 새벽녘, 결국 끔찍한 진실과 정면으로 마주하게 됩니다.

 

언뜻 보면 왜 두 사람은 딸에 관한 그렇게 중요한 비밀과 소식을 상대에게 빨리 알리지 않는 거지? 마흔 살 생일파티가 그보다 중요한가? 이런 상황이 가족 심리스릴러에 적합한 소재인가?”라는 의문이 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작가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부부의 내밀한 심리를 설득력있게 묘사하면서 파티 당일부터 다음날 새벽까지의 긴장과 불안으로 가득 찬 24시간을 디테일하게 그려냅니다. 덕분에 단지 몇 시간의 유예를 얻었을 뿐인 모두를 파멸로 이끌고 갈 엄청난 충격이 과연 파티가 끝난 뒤 어떤 식으로 폭발할지 독자 입장에선 초조하게 마음 졸이며 지켜볼 수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사건이라곤 리비아 부부가 알게 된 딸 마니에 관해 충격적인 비밀과 믿기 힘든 소식이 전부지만, 끔찍한 살인사건이나 정교한 미스터리보다 훨씬 더 높은 밀도와 팽팽한 긴장감을 만끽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물론 앞서 언급한 근본적인 의문 왜 서로에게 딸의 비밀과 소식을 빨리 알리지 않는 거지? - 을 수긍하지 못한 독자라면 이 이야기 자체를 납득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저 역시 중반쯤까진 이 의문에서 자유롭지 못했지만, 조금씩 작가에게 설득당하면서 리비아 부부에게 100% 감정 이입이 가능해진 게 사실입니다. “만일 내가 리비아라면? 애덤이라면?”이란 자문을 계속 던지면서 그들의 공포와 절망에 확실히 공감하게 됐다고 할까요?

 

공포와 미스터리를 앞세운 B. A. 패리스의 이전 작품들과는 확실히 결이 달라서 그녀의 팬 가운데 다소 실망감을 느끼는 독자도 있겠지만, 개인적으론 재미 면에선 좀 떨어지더라도 몰입감만큼은 훨씬 더 매력적인 작품이란 생각입니다. 다만 이 작품까지 모두 별 4개에 그칠 정도로 결정적인 한 방이 없다는 건 무척 아쉬운 점인데, 언젠가는 별 5개도 모자랄 만큼 꽉 찬 매력의 작품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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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외 연애와 비슷한 것
미야기 아야코 지음, 김은모 옮김 / 토마토출판사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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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불륜을 연상시키는 제목이 눈길을 끌긴 했어도 딱히 제 취향은 아니라서 패스하려다가 작가 이름을 보곤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바로 집어든 작품입니다. 에도시대 유곽에서 몸을 팔던 유녀들의 가슴 아픈 이야기를 노골적인 성애 묘사와 함께 그려낸 화소도중을 너무 인상 깊게 읽었던 탓에 미야기 아야코의 다른 작품들이 한국에 소개되기를 계속 기다려왔기 때문입니다. 2017교열걸이 출간되긴 했지만 왠지 제가 기대했던 화소도중풍의 이야기가 아닌 듯 한데다 무려 세 권으로 분권된 탓에 건너뛰었는데, ‘혼외 연애와 비슷한 것은 분량도 짧고 제목에서 풍기는 살짝 불온하면서도 매력적인 기운 탓에 주저없이 집어든 것입니다.

 

35살 동갑인 다섯 여자가 한 챕터씩 화자를 맡은 연작소설로, 이들의 공통점은 아직은 메이저급 아이돌의 백댄서에 머물고 있는 미소년 예비 아이돌 스노우화이트의 광팬이란 점입니다. 작품해설에 따르면 스노우화이트는 이들에게 있어 모든 불만을 다스려줄 치유제이자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인생의 에센스.”입니다. 단순히 열광적인 팬이나 를 넘어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존재로 여긴다는 뜻입니다.

 

다섯 여자의 핸디캡 혹은 불만은 모두 제각각입니다. 고급맨션에 사는 유복한 전업주부 사쿠라이는 평생 공부, 미모, 능력, 행복에 있어 만년 3등에 머무는 자신의 삶을 한탄합니다. 반면 스무 살에 낳은 중학생 아들에게 거지같은 아줌마!”라고 불리는가 하면 수차례 다단계 사기를 당한 무기력한 남편을 둔 마시코는 늘 끝에서 3등인 삶을 살아온 여자입니다. 또 모든 방면에서 1등의 삶을 살아온 스미타니는 누구에게도 흥미를 갖지 못하는 기벽 탓에 지금껏 미혼 상태로 살며 오로지 스노우화이트의 멤버 지카 짱에게만 몰두하는 여자입니다. 그 외에 평범함을 강요받으며 자란 탓에 이도저도 아닌 애매한 삶을 살다가 스노우화이트에 푹 빠져 BL소설까지 탐독하게 된 야마다, 지독한 가난에 얼꽝 뚱보라는 유전자까지 물려받은 BL소설가 가타오카가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미소년 아이돌에 빠진 35살 여자들의 가벼운 가십거리처럼 보이지만 실은 제각각의 상처를 지닌 채 중년을 목전에 둔 여자들의 고민과 상처가 진하게 배어있는 작품입니다. 이들은 외모, 직업, 지위, 수입은 물론 남편, 아이, 시어머니 등 가족 때문에 느끼는 불만에 이르기까지 남들에게 쉽게 털어놓기 힘든 자신만의 고민을 지니고 있습니다.

35살이란 나이는 젊다고도, 중년이라고도 할 수 없는 애매한 나이이자 뭔가를 바꾸기도, 뭔가를 새로 시작하기도 애매한 그야말로 낀 세대를 상징합니다. 딸 또는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막내 동생뻘이 대부분인 팬들 사이에 끼어 자신이 숭배하는 아이돌을 향해 꺅꺅 소리를 지르기도 민망한 나이입니다.

하지만 그녀들은 지친 삶 가운데 유일한 빛이자 희망인 스노우화이트의 미소년들을 통해 진심 어린 위안을 받고 현실을 잠시 망각할 수 있는 기쁨을 얻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스노우화이트의 팬이라는 교집합 덕분에 알게 된 서로를 향해 시기와 질투, 연민과 동정을 발산하며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갖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스노우화이트와의 혼외 연애를 통해 35살의 고민과 불만과 절망을 조금이나마 치유받는다고 할까요? 그래서인지 만년 3사쿠라이가 내뱉은 한마디는 극단적이긴 해도 그녀들의 진심을 잘 드러내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남자에게 아이돌은 자위행위용일지도 모르지만, 여자에게 아이돌은 디톡스다.” (p33)

 

기대 이상의 재미를 느낀 작품이긴 하지만 개인적으론 화소도중의 매력과 여운을 맛볼 수 있는 미야기 아야코의 작품이 출간되기를 여전히 바라는 마음입니다. 노골적이고 지독하면서도 짙은 애수와 회한이 담긴 이야기가 분명 한 작품쯤은 있을 것 같은데,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꼭 한 번은 만날 수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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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대
모리미 토미히코 지음, 권영주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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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한 권을 집어서 펴면 그 순간 특별한 시간이 흐르기 시작한다. 그때까지 아무것도 없었던 공간을 말이 메워 그곳에 세계가 나타난다. 다른 책을 집으면 또 다른 세계가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책을 덮으면 세계는 어디에도 없다. 글자를 인쇄한 종이 묶음이 있을 뿐.” (p118 )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야행과 마찬가지로 열대는 어디에서도 만나볼 수 없는 특별한 세계를 독자 앞에 펼쳐놓습니다. 책을 읽는 동안 현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모리미 도미히코가 자아낸 이계(異界)가 독자의 몸과 마음은 물론 주위의 모든 것을 잠식해버립니다. ‘열대속 세계는 이해하기도, 납득하기도 힘든데다 상식과 논리가 통하지 않는 기이한 시공간이지만 황홀함과 두통과 착시를 동시에 불러일으키는 묘한 매력을 지닌 곳이기도 합니다.

 

소설 속 소설열대는 사야마 쇼이치라는 작가가 1982년에 출간한 소설입니다. 하지만 이 소설을 읽은 그 누구도 마지막 페이지에 도달하지 못한 것은 물론 어느 날 갑자기 책 자체가 사라져버리는 신기한 경험을 겪었습니다. 그들은 하나 같이 교토의 헌 책방이나 길거리에서 열대를 접했으며, ‘천일야화에 특별한 관심을 가졌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기도 합니다. 그들의 궁극의 의문은 일본 그 어디에도 열대라는 책이 출간된 흔적이 없다는 점입니다.

 

애초에 열대의 존재 자체가 확실하지 않다. 실물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한 명도 없으니까. 작가는 사라지고 책도 사라지고 그저 바닥이 보이지 않는 구멍만이 남아 있을 뿐.” (p113)

 

열대를 접했던 몇몇 사람이 모여 자신들의 기억을 그러모아 열대를 완성하려 시도합니다. 하지만 초반 외엔 대부분 단편적인 기억들만 남아서 좀처럼 열대의 전체 모습에 다가가지 못합니다. 그러던 중 그 모임에 한 여자가 참가하면서 상황은 급변합니다. 그녀가 기억해낸 모래사막의 궁전, 보름달의 마녀라는 단서 덕분에 지지부진하던 논의는 새 돌파구를 찾게 되고, 그때부터 멤버들은 누구보다 먼저 열대의 남은 이야기를 알아내기 위해 각자의 길을 걷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그 직후 멤버들이 차례로 실종되는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집니다.

이후 나머지 분량은 소설 열대의 내용과 그것이 집필된 계기와 과정을 그립니다. 남양의 바다에서 기억을 잃은 채 깨어난 한 남자, 섬을 창조하고 파괴하는 마술을 부리는 마왕과 그가 지배하는 바다, 그 마왕에 저항하는 세력, 그리고 이 모든 판타지 속에서 롤러코스터 같은 상황에 휩쓸리다가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로 남기기로 결심한 한 남자의 사연이 펼쳐집니다.

 

세계 어딘가에 구멍이 있고 그 너머에 불가사의한 세계가 펼쳐져있다는 느낌. 다른 세계로 나를 데려가려는 힘이 늘 나를 노리고 있다는 느낌. 그건 섬뜩한 동시에 감미로운 기분이었다.” (p510)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야행등 단 두 편이긴 해도 모리미 도미히코의 판타지에 제법 익숙하다고 여기고 있었지만 열대모리미 판타지의 절정을 보여주는 작품이라는 출판사 소개글답게 상상을 초월한 세계와 인물들이 등장하여 읽는 내내 몽환적인 분위기에 사로잡히게 만들었습니다. 현실과 비현실, 존재와 허구가 마구 뒤섞인 가운데 뫼비우스의 띠마냥 경계 자체를 알 수 없는 이야기가 시공간을 넘나들며 전개되는데다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 ‘소설에 대한 소설, ‘판타지에 대한 판타지라는 특이한 구조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장을 덮었을 때 기억이 날 듯 말 듯한 화려하고도 기괴하기 짝이 없는 꿈에서 깬 느낌이 드는 건 아마도 저만의 경험은 아닐 거란 생각입니다.

 

열대를 통해 모리미 도미히코와 처음 만난 독자라면 다소 당혹감을 느낄 수밖에 없을 거란 생각입니다. 상식도, 논리도, 기승전결도 보이지 않는 극강의 판타지에 일반적인 해석이나 유추조차 허용하지 않는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 서평을 쓰는 지금까지도 얼얼한 상태인데, 혹시라도 모리미 도미히코의 친절한 판타지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를 읽어볼 것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야행역시 흥미로운 작품이지만 모리미 도미히코와 첫 대면하기엔 아무래도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가 좀더 적합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RHK로부터 도서(가제본) 협찬을 받았지만, 본인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하여 작성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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