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스퍼 네트워크
챈들러 베이커 지음, 이동교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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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론, 아디, 그레이스는 대기업 법무팀에서 일하는 변호사이자 절친한 친구들입니다. 이들은 각각 10대 딸과의 갈등, 싱글맘이 된 후 겪는 크고 작은 문제들, 출산 직후 찾아온 힘겨운 산후우울증 등 내밀한 고민들을 갖고 있지만 서로에게 의지하며 힘겨운 직장생활을 이어갑니다.

그러던 어느 날, 회사 18층 발코니에서 누군가 추락사하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하필 새 CEO 후보로 거론되던 에임스 개릿이 사내 여성들에 대한 부적절한 언행과 성희롱 혐의로 슬론 일행에게 소송을 당한 상태에서 벌어진 추락사 사건은 회사 안팎으로 큰 파장을 불러일으킵니다. 언론과 인터넷에선 젠더 갈등에 관한 찬반 격론이 벌어지고 경찰은 에임스를 향한 슬론 일행의 소송이 추락사 사건과 연관 있는지 조사하기 시작합니다.

 

미투 시대의 페미니즘 스릴러는 이 작품의 성격을 잘 압축해놓은 한 매체의 추천사인데, ‘페미니즘이란 단어 자체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즉각적인 갈등과 격론을 유발하는 요즘 같은 시국에는 이런 추천사가 오히려 이 작품의 진가와 미덕을 오인하게 만들 수도 있어서 아주 조심스러워 보입니다.

출판사 소개글에 따르면 위스퍼 네트워크(Whisper Network)자신이 종사하는 산업의 남성 권력자 중 성희롱이나 성추행 혐의가 있는 이들의 명단을 공유하는 여성들 사이의 정보 네트워크.”입니다. 슬론 일행은 댈러스 일대의 나쁜 놈들의 명단인 배드맨 리스트를 입수한 뒤 거기에 새 CEO 후보인 에임스를 추가한 것은 물론 그를 상대로 소송까지 제기합니다. 오랜 시간동안 여러 피해자를 낳은 그가 새 CEO에 오른다는 건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난데없는 추락사 사건이 벌어지면서 슬론 일행은 예상치 못한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그 추락사가 배드맨 리스트와 관련 있다고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남자는 아들과 온종일 낚시했다고 말할 수 있어도 엄마는 애를 병원에 데려가느라 점심시간을 넘겼다는 말은 하지 않는 편이 대체로 더 낫다. 아이 덕에 남자는 영웅 소리를 듣지만 여자는 변변찮은 직원으로 전락한다.” (p21)

 

사람들은 은연중에 미투 사건의 피해자는 대부분 힘없고 약한 자들이라고 여기는 경향이 있는데, 그래서인지 대기업 법무팀의 변호사들이 피해자로 등장한 점은 초반부터 눈길을 끄는 설정이었습니다. , 미투 사건을 논외로 하더라도 위에서 인용한 문장은 직장 내 남녀 차별이 직업이나 직종은 물론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세계 어디서나 벌어지는 보편적인 현상이란 점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과연 이 부당한 현실이 제자리를 잡을 날이 오긴 올까요?

 

이 작품이 미스터리/스릴러로 분류되는 이유는 추락사 사건 때문입니다. 작가는 초중반까지 추락사한 인물이 누구인지 감춥니다. 그리고 그 인물이 밝혀진 뒤로는 자살이냐 타살이냐, 타살이라면 범인은 누구냐, 또 슬론 일행은 배드맨 리스트에 에임스의 이름을 올린 일과 그를 상대로 건 소송 때문에 맞이한 최악의 상황을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를 미스터리의 축으로 삼습니다. 하지만 죽은 자가 누군지는 너무 빤히 보여서 그리 궁금증을 일으키진 못합니다. 독자들의 관심은 타살 여부와 슬론 일행의 위기 탈출 과정에 쏠리게 되는데, 이야기는 추락사 사건이 벌어진 현재와 그로부터 3주 전의 과거가 교차로 전개되면서 흥미롭게 펼쳐집니다.

 

다만 이 작품을 제대로 된미스터리/스릴러로 기대한 독자에겐 조금은 맥 빠지는 책읽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 작품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여성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결혼, 이혼, 출산, 양육, 일과 가정, 성희롱 등 슬론 일행을 통해 그려지는 여성들의 힘들고 고된 삶이 거의 대부분의 분량을 차지하는데, 그런 탓에 팽팽한 미스터리/스릴러로서의 매력은 부차적인 수준에 그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슬론 일행이 겪는 힘들고 고된 삶이 다소 뻔하고 상투적인 이야기들로 채워져 있어서 지루하고 느슨하게 읽힌 점이 아쉬웠는데, 사실 여성들의 힘들고 고된 삶에 새삼 새로울 것이 있을 리는 없겠지만 그래도 캐릭터나 상황 묘사에서 새로운 시각을 엿볼 수 있었다면 좋았을 거란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이 작품이 미국에서 출간된 건 2019년입니다. 한국의 본격적인 미투 운동의 시작을 2018년이라고 볼 때 좀더 일찍 국내에 소개됐더라면 여러 면에서 화제가 됐을 작품임에 분명합니다. 다소 지루하고 느슨한 대목들이 단점이긴 하지만 재미와 의미를 모두 갖춘 작품이라 좀더 많은 독자들에게 읽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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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가 흐르는 곳에
스티븐 킹 지음, 이은선 옮김 / 황금가지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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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제작 피가 흐르는 곳에를 비롯 모두 4편의 중단편이 실린 작품집입니다. 마니아까지는 아니어도 스티븐 킹의 독특하고 오싹한 호러물을 즐겨 읽는 편인데, 특히 그의 중단편 작품집은 장편 못잖은 쫄깃쫄깃하고 알찬 매력을 지니고 있어서 더 흥미롭게 읽힌 경우가 많습니다. ‘악몽을 파는 가게’, ‘자정 4분 뒤’, ‘별도 없는 한밤에가 대표적인데 그중에서도 별도 없는 한밤에는 스티븐 킹을 전혀 모르는 독자조차 금세 그의 호러월드에 빠져들게 만드는 만점짜리 작품집이란 생각입니다.

 

스티븐 킹을 읽을 때면 매번 비슷한 궁금증 - “도대체 이런 아이디어를 어떻게 떠올릴 수 있을까?” - 이 생기곤 합니다. 시신과 함께 매장된 아이폰이 몇 달이 지나도록 배터리가 닳지 않는 것은 물론 소통마저 가능하게 만든다는 설정(해리건 씨의 전화기), 60년이 넘도록 늙지도 변하지도 않은 채 인간의 고통과 절망을 파먹는 존재(피가 흐르는 곳에), 오지의 통나무집에서 소설 집필에 몰두하다가 독감과 폭풍에 휘말린 주인공이 시궁쥐와의 악마적 거래를 통해 위기를 벗어나는 이야기() 등 평범한 사람이라면 쉽게 떠올리지 못할 아이디어를 무궁무진하게 퍼올리는 스티븐 킹의 상상력은 그야말로 저절로 감탄을 자아낼 뿐입니다.

 

이 작품의 표제작이자 거의 절반 가까이의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 피가 흐르는 곳에는 스티븐 킹의 빌 호지스 3부작아웃사이더 1~2’를 읽은 독자에겐 또 다른 흥분을 선사하는데, 우선 주인공이 앞선 두 작품에 등장했던 홀리 기브니라는 점 때문입니다. 스티븐 킹의 첫 탐정 미스터리인 빌 호지스 3부작에서 중요한 조연으로 등장했던 중년여성 홀리 기브니는 이후 아웃사이더 1~2’를 통해 독립했다가, ‘피가 흐르는 곳에서는 완전 1인 주인공으로 활약합니다. 개인적으론 아웃사이더 1~2’를 읽지 못해서 이 작품 속의 홀리 기브니의 공포심을 100% 이해하긴 어려웠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그녀가 맹활약했던 빌 호지스 3부작을 떠올릴 수 있어서 무척 흥미로웠습니다.

또 한 가지 독자를 흥분시킨 요소는 스티븐 킹만이 창조해낼 수 있는 범인의 정체입니다. ‘빌 호지스 3부작의 마지막 편인 엔드 오브 왓치가 인간을 자유자재로 조종할 수 있는 괴물을 다뤘고, ‘아웃사이더 1~2’가 같은 시간대에 서로 다른 두 장소에서 목격된 용의자라는 독특한 설정을 앞세웠다면, ‘피가 흐르는 곳에는 오랜 세월동안 조금도 늙지 않으며 인간의 고통과 절망을 자양분으로 삼아온 끔찍한 존재가 등장하는데, 이 세 캐릭터는 결국 같은 범주의 악마라고 볼 수 있습니다. 지나치게 초현실적이라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설정이긴 하지만, ‘샤이닝을 비롯하여 스티븐 킹의 호러물에 한번이라도 매료된 적이 있는 독자라면 얼마든지 흥겹게 만끽할 수 있는 설정이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론 첫 수록작인 해리건 씨의 전화기가 가장 마음에 들었는데, 단막극이나 단편영화로 만든다면 그 오싹함이 훨씬 더 배가될 것 같습니다. , 스티븐 킹이 작가의 말을 통해 아낌없이 애정을 드러낸 주인공 홀리 기브니가 등장한 표제작 피가 흐르는 곳에도 매력적이었습니다. 머잖아 그녀를 주인공으로 삼은 후속작이 출간될 것으로 보이는데 그에 앞서 (그녀가 맹활약했던) ‘아웃사이더 1~2’를 먼저 읽어봐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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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침과 기도
시자키 유 지음, 김은모 옮김 / 북홀릭(bookholic)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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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사이키는 해외 동향을 분석하는 정보지 회사 소속의 르포라이터입니다. 7개 국어에 능통한 덕분에 1년에 100일 가까이를 해외에서 보내며 독특한 문물을 소개하는 것이 그의 일입니다. 1,000년의 역사를 지닌 사하라 사막의 소금 교역로, 흑해 인근 오지에 자리 잡은 러시아 정교회 소속 여자수도원, 남미 아마존에 거주하는 50명 남짓한 소수민족, 그리고 분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인 동티모르 등 그의 취재 여정은 낭만적인 해외문물 소개와는 거리가 먼 힘들고 고통스러운 고행에 더 가깝습니다. 문제는 그 취재 여정 중에 사이키가 번번이 기이하고 끔찍한 사건들을 겪게 된다는 점입니다.

 

수록된 다섯 편의 단편에는 연쇄살인, 실종, 폭력이 등장하는데, 이 사건들은 밀실트릭, 서술트릭, 정통 미스터리 트릭 등 다양한 코드들로 버무려집니다. 사이키는 르포라이터임에도 불구하고 꼼꼼하고 세심한 탐정 역할을 맡아 평범하지 않은 상황에서 벌어진 각 사건들의 진실을 파헤칩니다. 그리고 마지막 수록작인 기도는 험난한 취재 여정 중 사이키의 무의식속에 차곡차곡 쌓여온 끔찍한 사건들의 여파가 예상치 못한 비극을 낳는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어디에서도 본 적 없고, 앞으로도 볼 일이 없을 것 같은 독특한 작품입니다. 굳이 이름 붙이자면 여행 미스터리정도인데, 사이키의 여행은 어느 모로 보나 전혀 낭만적이지 않은데다 종군기자의 그것에 가까운 고행으로 점철돼있고, 그 여정을 그린 문장들은 고급스런 순문학의 향기가 짙게 배어있어서 단순히 여행 미스터리라고 부르는 것은 대단한 결례(?)처럼 여겨집니다. 오히려 대서사시 혹은 철학적인 기행문에 미스터리가 살짝 끼어든 느낌이랄까요?

물론 정통 트릭에서부터 서술트릭, 밀실트릭, 그리고 문장 곳곳에 정교하게 배치된 작가의 등 사이키가 겪은 살인사건이나 실종사건은 미스터리의 미덕에 충실한 면모를 갖추고 있어서 독자로 하여금 누가? ?”라는 강렬한 궁금증을 갖게 만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독특함 외에는 별 매력을 못 느낀 작품이었습니다. 험지를 누비다가 끔찍한 사건들과 마주치는 주인공 사이키는 지나치게 객관적인 시선만 유지한 탓에 정작 그의 내면이나 감정을 도무지 들여다볼 수 없습니다. 르포라이터로서의 목표나 가치관도 모호하고 한 인간으로서의 개성조차 무척이나 희미합니다. 특히 사이키에게 부여된 두 개의 중요한 캐릭터(여행자이자 이야기꾼)가 선명하게 그려지지 않은 점이 너무 아쉬웠는데, 요약하면 어떤 사람인지 종잡을 수 없었다는 뜻입니다.

, 사건들 가운데 일부는 억지스러운 해법을 통해 마무리되거나 설명이 부족한 상태에서 엔딩을 맞이하기도 합니다. 좀 과하게 해석하자면 사건 자체도, 사건을 해결하는 주인공도 우아하고 고급스런 순문학 스타일의 문장의 힘에 기대어 스리슬쩍 얼버무려진 느낌이었습니다.

 

외침과 기도는 일본에서 출간된(2010) 직후 대형 신인의 탄생!”이라는 격찬과 함께 꽤 이름 있는 미스터리 상들을 휩쓴 작품입니다. 그래서 더 호기심을 가졌던 건데, 깊이 있는 문장과 묵직한 서사는 분명 작가의 엄청난 강점이지만 그것들이 미스터리와 결합되는 과정은 기대 이하의 실망감만 남겼습니다. 검색해보니 이 대형 신인2010년 데뷔 이후 단 한 편의 단행본(‘リバーサイド・チルドレン’, 리버사이드 칠드런, 2013)과 두 편의 단편, 그리고 다섯 편의 앤솔로지에 참여한 것이 전부였습니다. 결국 순문학으로도, 미스터리로도 만족스런 결과를 못낸 셈입니다. 자신의 강점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 점이 너무 아쉬운 작가인데, 1983년생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언젠가는 데뷔작을 능가하는 작품으로 독자를 찾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사족이지만... 어쩌면 제가 진정한 보석을 알아보지 못하는 함량 미달의 독자라서 이런 서평을 쓴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 작품에 관심이 가는 독자라면 다른 분들의 서평도 꼭 참고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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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죽일 수 없었다
잇폰기 도루 지음, 김은모 옮김 / 검은숲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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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와 동명인 주인공) 잇폰기 도루는 종이신문의 몰락이라는 시대의 변화를 몸소 겪고 있는 46살의 베테랑 사회부 기자입니다. 어느 날 수도권 연쇄살인사건의 진범을 자처하는 자가 편지를 보내와 또 다른 살인을 막고 싶다면 나와의 설전에서 이겨라!”라는 메시지와 함께 잇폰기 도루와의 지면을 통한 대결을 제안합니다. 이후 잇폰기 도루와 범인의 편지가 1면에 게재되기 시작하자 판매부수와 광고가 급증하며 사세가 기울던 신문사의 경영난은 눈에 띄게 개선됩니다. 하지만 잇폰기 도루의 관심은 어떻게든 추가범행을 저지하고 범인의 정체를 밝혀내는 데 있습니다. 경찰 못잖은 그의 집요한 조사와 고민은 결국 진실을 파헤치는 데 성공하지만 그의 마음에는 한없는 스산함과 회한만 남고 맙니다.

 

개인적으로 기자가 등장하는 미스터리를 무척 좋아합니다. 장르를 불문하고 최고작으로 꼽는 클라이머즈 하이’(요코야마 히데오)를 비롯 미드나잇 저널’(혼조 마사토), ‘시인’(마이클 코넬리) 등 기자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미스터리는 그 나름의 특별한 맛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죽일 수 없었다는 지금까지 읽은 기자 미스터리 가운데 언론의 속살을 가장 디테일하고 생생하게 그린 작품입니다. 취재, 회의, 편집, 인쇄 등 신문 제작의 전 과정이 세밀하게 그려진 것은 물론 특종과 인정(人情) 사이의 고뇌라든가 저널리즘과 커머셜리즘(상업주의)의 갈등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주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 길지 않은 분량이지만 연쇄살인 미스터리, 신문산업의 위기, 기자의 사명과 책임 등 다양한 소재를 다루고 있어서 빈틈없이 알맹이가 꽉 찬 작품입니다. 무엇보다 연쇄살인범이 베테랑 사회부 기자 잇폰기 도루를 콕 찝어 설전을 제안하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는데, 자칭 백신이라는 연쇄살인범은 인간은 추잡한 성 관계를 통해 재생산된 바이러스이므로 죽여 마땅하다.”는 꽤나 거창하면서도 어딘가 허황된 철학을 내세우며 잇폰기 도루를 도발합니다. 그에 대처하는 잇폰기 도루의 반론은 대체로 정직하고 도덕적인 수준에 그치고 있지만 어쨌든 그 설전이 이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이자 눈길을 끈 대목인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백신과 잇폰기 도루의 설전이 시작되면서 이야기의 속도감과 긴장감이 훅 떨어졌는데, 아무래도 오고가는 메시지들이 다소 형이상학적인데다 동어반복에 가깝다 보니 초반 한두 번을 제외하곤 지루하게 읽힐 수밖에 없었던 것 같습니다. 지나치게 디테일하게 그려진 신문사에 관한 묘사와 함께 이 작품에서 가장 아쉬웠던 점인데, ‘백신의 주장이 좀더 현실감이 있었거나 둘 사이에 주고받는 메시지의 분량이 적절히 압축됐더라면 훨씬 더 알찬 작품이 됐을 거란 생각입니다.

 

잇폰기 도루 외에 또 한 명의 주요 화자는 10대 소년인 에바라 요이치로입니다. 자신의 출생의 비밀 때문에 괴로워하는 10대 소년의 고뇌는 메인 스토리와는 전혀 별개처럼 전개되다가 후반부에 이르러 연쇄살인범 백신과 잇폰기 도루에게 연결되는데 이 대목에서 연이어 터지는 반전은 이 작품의 하이라이트이기도 합니다. 독자에 따라 다소 작위적이라고 여길 수도 있는 반전들이지만 앞서 잘 깔아놓은 포석들 덕분에 크게 억지스러워 보이진 않았습니다.

 

이 작품은 27회 아유카와 데쓰야 우수상 수상작인데, 그때 대상을 받은 작품이 시인장의 살인’(이마무라 마사히로)입니다. 본격 미스터리를 지향하는 공모라서 시인장의 살인에게 후한 점수를 준 것 같은데, 제가 심사위원이었다면 이 작품에 조금은 더 높은 점수를 줬을 것 같습니다. 소재도 성격도 전혀 다른 작품들이라 전적으로 취향의 문제인 건 사실이지만 적어도 그래서 죽일 수 없었다는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당황스럽진 않았기 때문입니다.

 

주인공과 동명인 작가 잇폰기 도루는 후속작으로 사회파 미스터리를 선택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죽일 수 없었다역시 넓은 범위의 사회파 미스터리에 속하는데, 과연 잇폰기 도루가 그릴 본격적인 사회파 미스터리가 어떤 소재, 어떤 사건들을 다루게 될지 사뭇 궁금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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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범인
쇼다 간 지음, 홍미화 옮김 / 청미래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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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고속도로 버스정류장 부근에서 70대 남성 스도 이사오가 칼에 찔린 사체로 발견됩니다. 수사본부가 좀처럼 실마리를 찾지 못하던 중 시즈오카 경찰서의 구사카 형사는 41년 전인 1974년 여름, 스도 이사오의 어린 아들 마모루가 유괴된 뒤 살해된 사실을 알게 됩니다. 무엇보다 스도 이사오가 살해된 곳이 당시 유괴범이 몸값을 갖다 놓으라고 지시했던 장소라는 걸 깨달은 구사카는 두 사건 사이에 관련성이 있다고 확신하곤, 1988, 즉 마모루 유괴사건의 시효가 끝나기 1년 전에 편성됐던 특별수사반 관리관 시게토 세이치로를 찾아갑니다. 불명예스럽게 해체됐지만 시게토가 들려준 특별수사반의 촘촘하고 끈질겼던 수사 과정은 구사카에게 스도 이사오 살해사건의 진실을 향한 중요한 열쇠를 제공합니다.

 

불필요한 사족도, 어설픈 장식도 전혀 없는 거두절미 정통 경찰소설이라고 부를 수 있는 작품입니다. 무려 41년이라는 간극을 두고 벌어진 두 개의 살인사건, 그것도 피살자가 아들과 아버지라는 비극적 설정도 눈길을 끌었지만, 세 개의 시기(1974, 1988, 2015)마다 사건의 진실을 찾기 위해 전력을 다했던 각각의 경찰 주인공들의 분투는 읽는 내내 다큐멘터리 이상의 감흥을 전해줬습니다. 기름기라곤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100% 몸통 살코기의 느낌이 너무 강렬했던 탓에 거두절미라는 표현을 쓴 건데, 이 부분은 독자마다 살짝 취향을 탈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이야기의 시작은 구사카가 수사하는 2015년 스도 이사오 피살사건이지만, 정작 분량이나 비중에서 압도적인 건 1988년 마모루 유괴사건 특별수사반의 활동입니다. 주인공인 구사카 스스로 현재의 사건을 해결하기 위한 열쇠가 41년 전 마모루 유괴사건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인데, 덕분에 유괴사건을 꼼꼼하게 파헤쳤던 1988년 특별수사반의 리더 시게토가 극중극 주인공으로 구사카 못잖게 맹활약합니다.

아무런 성과도 내지 못한 채 미제 사건으로 남았던 1974년의 마모루 유괴사건은 시효 만료 1년을 앞둔 1988년 여름, 탐욕스럽고 정치적인 성향의 경찰 고위층에 의해 다시 수면 위에 떠오릅니다. 이른바 보여주기 식 쇼를 하고 싶었던 고위층은 자타가 공인하는 밑바닥 출신 베테랑 시게토를 관리관으로 앉힌 뒤 반드시 성과를 내라고 강요합니다. 시게토는 이 무모한 쇼가 실패할 경우 자신이 희생양이 될 것임을 감지하지만 말 그대로 좌고우면하지 않고 자신이 선발한 여섯 명의 형사들과 함께 힘겹기 그지없는 수사를 전개합니다.

 

정리하면, 현재의 주인공 구사카와 과거의 주인공 시게토가 협력하여 41년의 간극을 두고 벌어진 두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는 흥미로운 구조의 작품입니다. 특히 1988년 특별수사반의 이야기에는 경찰 내부의 (출신 성분에 따른) 심각한 갈등, 부패하고 탐욕스런 정치적 경찰의 행태, 77색을 지닌 특별수사반 구성원들의 개성 등 사건 외적인 재미거리도 다양해서 마치 경찰소설의 대가 요코야마 히데오의 ‘64’의 축소판을 읽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했습니다. (공교롭게도 ‘64’ 역시 14년 전에 발생한 여아 유괴살해사건의 진실을 찾는 이야기입니다.)

 

다만, 유일하게 아쉬운 점은 앞서 서두에서 거두절미라는 말로 대신했던 이 작품의 기름기 하나 없는 뻑뻑함입니다. 과거와 현재에 등장하는 경찰들은 말할 것도 없고 피해자들의 유족이나 주변 인물들에 이르기까지 정제에 정제를 거듭한 듯 꼭 필요한 부분만 남겨놓은 탓에 그들이 겪는 감정적 동요나 심리적 갈등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습니다. 인물들의 내면 묘사는 한두 줄의 간략한 안내외엔 거의 찾아볼 수가 없었고, 결국 (좀 심하게 말하면) 공감이 불가능한 로봇 같은 캐릭터로 읽힌 게 사실입니다. 앞서 비교한 ‘64’가 사건과 인물심리를 황금률에 가깝게 배치했다면, ‘진범인은 꼼꼼한 수사기록에 가까울 정도로 사건 서술에만 몰두한 작품이란 뜻입니다.

 

검색해보니 일본에서 출간된 쇼다 간의 작품이 꽤 많은 걸 알 수 있었는데, 그중에는 진범인에 이어 구사카 형사가 활약하는 さらい’(유괴범)라는 작품도 있었습니다. 쇼다 간의 기름기 하나 없는 뻑뻑함이 한국 독자를 매료시킨다면 그의 새로운 작품들을 곧 만나볼 수 있을 것 같은데, 일단은 첫 소개작인 진범인이 좋은 성적과 호평을 얻어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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