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 아더 미세스 - 정유정 작가 강력 추천
메리 쿠비카 지음, 신솔잎 옮김 / 해피북스투유 / 2021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남편 윌의 외도, 아들 오토의 퇴학, 응급의학과 의사였던 자신의 의료사고 등 한꺼번에 터진 인생 최악의 사건들 때문에 궁지에 몰렸던 세이디는 남편 윌의 제안에 따라 자살한 시누이 앨리스가 남긴 메인 주의 외딴 섬의 낡은 저택으로 이사합니다. 섬 특유의 배타적 분위기에 낡은 저택이 내뿜는 불온한 기운까지 더해져 세이디의 절망감은 더욱 심해집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웃에 살던 여자가 참혹하게 살해된 채 발견되는데, 문제는 현지 경찰이 세이디를 의심하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죽은 옛 연인의 사진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는 남편, 전학 후에도 적응하지 못하는 아들, 대놓고 악의를 발산하는 시누이의 딸 등 사방에서 날을 세운 스트레스에 시달리던 세이디는 살인용의자로 몰리는 처지에 이르자 스스로 범인을 찾을 결심을 합니다.

 

이야기는 세 여자의 시점으로 전개됩니다. 외딴 섬에서 온갖 스트레스와 절망을 겪던 세이디가 살인사건 용의자로 지목된 뒤 직접 범인을 찾아나서는 이야기가 중심을 차지합니다. 이어 세이디의 남편 윌에게 집착하며 불륜 관계를 맺고 있는 카밀의 이야기가 간간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6살 소녀 마우스가 새 엄마에게 학대당하는 끔찍한 상황이 막간극처럼 소개됩니다.

 

음습한 늦가을의 외딴 섬, 남편의 외도, 스토커에 가까운 불륜녀, 잔혹하게 난자당한 피살자, 살의를 내뿜는 시누이의 딸 등 연쇄살인마가 등장하는 범죄스릴러의 요소들을 골고루 갖춘 작품이지만 디 아더 미세스는 극단적인 불안감을 불러일으키는 끈적끈적한 심리스릴러입니다. 가족이나 일터의 동료는 물론 외딴 섬의 불온한 기운과 시누이가 자살한 낡은 저택의 공포까지 감당해야 하는 세이디의 심리가 집요할 정도로 디테일하게 그려집니다. 또 언제라도 세이디를 공격할 것만 같은 불륜녀 카밀의 들끓는 욕망은 독자로 하여금 또 다른 긴장감을 맛보게 만듭니다.

이웃의 여자가 칼로 난자당한 채 살해된 사건은 흥미진진한 미스터리이자 불안정한 상황의 세이디를 막다른 벽에 몰아넣는 카운터펀치인데, 세이디의 주변 인물 중 누가 범인으로 밝혀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복잡하고 미묘하게 전개됩니다.

 

재미있게 읽었지만 개인적인 취향 때문에 두 가지 정도 아쉬움이 남은 작품입니다. (대형 스포일러라서 자세한 언급은 못 하지만) 우선 이 작품은 막판에 두 번의 반전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중 첫 반전이 저의 취향과 맞지 않았는데, 실은 스릴러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중반쯤부터 슬슬 눈치 챌 수 있을 정도로 작가가 꽤 많은 힌트를 줘서 그 반전이 폭로됐을 때 딱히 놀라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궁금했던 건 작가의 의도였습니다. 독자가 눈치 채길 바라고 일부러 그 많은 힌트들을 준 건지, 아니면 독자들이 그 힌트들을 몰라보곤 막판 반전에 놀라기를 바란 건지 확실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앞서 제공된 힌트들을 전복시키는 신선한 반전이 나오지 않을까 기대했다가 역시 그렇군...”이란 아쉬움만 남고 말았는데, 그나마 다행인 건 두 번째 반전이 있었다는 점입니다. 유사한 설정으로 실망감만 남긴 다른 작품들에 비하면 이 두 번째 반전디 아더 미세스만의 고유한 매력이라는 생각입니다.

또 한 가지 아쉬움은 지극히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분량에 관한 것입니다. 특히 지나치게 디테일하게 또 동어반복처럼 그려진 세이디의 공포와 절망에 대한 묘사는 심리스릴러 마니아가 아니라면 다소 지루하고 느슨하게 느낄 수밖에 없는 대목인데, 살인사건 미스터리가 병행되긴 했지만 500페이지가 넘는 심리스릴러는 아무래도 좀 무리였다는 생각입니다.

 

메리 쿠비카는 디 아더 미세스로 처음 만난 작가인데 몇몇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매력적인 필력을 확인할 수 있어서 한국에 먼저 소개된 그녀의 작품 굿 걸에 대한 궁금증과 기대감이 생겼습니다. 심리스릴러는 제 취향과는 거리가 좀 있는 장르지만 페이지터너의 힘을 갖춘 작가라면 기꺼이 도전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링컨 차를 타는 변호사 변호사 미키 할러 시리즈 Mickey Haller series
마이클 코넬리 지음, 조영학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법이란 사람과 생명과 돈을 닥치는대로 삼켜버리는 거대한 괴물이다. 법은 진실과 아무 상관이 없다. 오직 타협과 개량과 조작만이 있을 뿐이다. 사람들은 나를 나쁜 놈이라고 욕하지만 나는 다만 교활한 천사일뿐이다.” (p35~36)

 

유죄냐 무죄냐에 관계없이 오로지 의뢰인의 혐의를 벗기거나 거래를 통해 형을 감량하거나 심지어 경찰과 검찰의 약점을 물고 늘어져 사건 자체를 무너뜨리는 걸 최고의 목표로 삼는 변호사 미키 할러의 일성은 거의 궤변에 가까워 보입니다. 하지만 사법체계의 냉혹한 현실을 제대로 꼬집은 비판이기도 하고, 부끄러움 같은 건 찾아볼 수 없는 진지하고 솔직한 자기 고백이기도 합니다.

사무실도 없이 자신이 아끼는 링컨 타운 카에서 업무를 보는 미키의 주된 고객은 돈이 되는 의뢰를 들고 오는 마약상, 폭주족, 사기꾼 등 뒷골목의 사람들입니다. 동시에 미키는 언제라도 자신의 삶의 수준을 뒤바꿔놓을 대박 의뢰인을 고대하기도 합니다. 유능하지만 그야말로 속물 변호사의 모든 미덕을 다 갖춘 인물이란 뜻입니다. 그런 면에서 현직 검사로 정의와 페어플레이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매기 맥피어스(또는 마가렛 맥퍼슨)와의 결혼생활이 8년이나 이어졌던 건 어쩌면 기적에 가까운 일인지도 모릅니다.

 

변호사였던 아버지의 가르침 가운데 미키가 절대 공감하는 한 가지는 변호사에게 가장 끔직한 의뢰인은 무고한 사람!”이란 점입니다. 의뢰인의 무고함을 깨닫는 순간 무죄판결을 이끌어내는 것 외엔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기 때문이며, 만일 무죄를 입증하지 못할 경우 감당해야 할 죄책감 역시 불편하고 기분 나쁘기 때문입니다. 그런 미키 앞에 고민덩어리 의뢰인이 나타납니다. 처음엔 기다리고 기다리던 대박 의뢰인이라 반가웠지만, 알고 보니 가장 끔찍한 무고한 의뢰인이었고, 좀더 파고들어 보니 가장 악랄한 의뢰인으로 밝혀졌기 때문입니다.

미키는 법정에선 검사와 싸우며 의뢰인의 무죄를 입증해야 하지만, 법정 밖에선 의뢰인이 감추고 있는 진실을 파헤치면서 자신이 과거에 저지른 과오를 바로잡아야 하는 난감한 상황에 처합니다. 그런 와중에 소중한 동료를 잃기도 하고, 스스로 살해 위기에도 빠지는가 하면, 전처인 매기와 8살 딸 헤일리의 안위까지 걱정해야 하는 궁지에 몰립니다. 법정 스릴러와 범죄 스릴러가 절묘하게 믹스된 속물 변호사의 이야기는 막판까지 팽팽한 긴장감을 놓치지 않은 채 독자의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마이클 코넬리의 광팬이라 해리 보슈 시리즈와 스탠드얼론에 열광하는 1인이지만, ‘미키 할러 시리즈는 상대적으로 미지근한 정도의 관심에 그친 게 사실인데, 앞서 읽은 시리즈 3~5(‘파기환송’, ‘다섯번째 증인’, ‘배심원단’)과 마찬가지로 링컨 차를 타는 변호사역시 마이클 코넬리 특유의 재미와 매력이 덜 느껴진 작품이었습니다. 시리즈 첫 편이다 보니 미키 할러의 캐릭터나 배경 설명에 많은 분량이 할애되기도 했고, 사건은 다소 밋밋하게 전개된 데다 법정 공방은 느슨하거나 지루했고 막판 반전의 맛과 충격도 기대에 못 미쳤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메인 사건의 피고인이자 미키를 위기에 빠뜨리는 대박+무고+악랄 의뢰인의 캐릭터와 그가 감추고 있는 진실이 독자의 호기심을 이끌어낼 만한 파괴력을 지니지 못한 게 아쉬웠는데, 그런 탓에 클라이맥스와 엔딩의 힘이 훅 빠져버린 것으로 보입니다.

 

한국에 출간된 미키 할러 시리즈가운데 2편인 탄환의 심판만 못 읽은 셈인데, 이왕 첫 편을 읽었으니 조만간 탄환의 심판도 읽어보려고 합니다. 기회가 된다면 순서대로 다시 읽기에 도전하는 차원에서 이미 읽은 3~5편도 다시 읽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매번 이런저런 아쉬움을 겪긴 했어도 미키 할러의 새 작품이 나오면 절대 외면하진 못할 것 같은데, 그건 미키 할러에 대한 미련 때문이라기보다는 마이클 코넬리에 대한 애정 때문일 것입니다. (스스로 생각해도 조금은 억측에 가깝지만, 어쩌면 정의감과 비극성을 겸비한 해리 보슈에게 익숙해진 탓에 같은 작가의 히어로지만 정반대 성격을 가진 미키 할러에게 깊은 정(?)을 주지 못하는 것인지도 모를 일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섭주 케이 미스터리 k_mystery
박해로 지음 / 몽실북스 / 2021년 7월
평점 :
절판


안동과 영주 부근의 소도시 섭주의 초등학교 교사 강서경은 남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외톨이 성격 탓에 왕따에 가까운 처지지만 그저 순응한 채 조용히 살아가는 중입니다. 어느 날 인근 붕평마을의 정자에 가면 친엄마를 만날 수 있다.”는 꿈을 꾼 그녀는 폭우 속에서 붕평마을로 가지만 그곳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건 보자기에 싸인 특이한 방울과 거울이었습니다. 그것들을 손에 넣은 이후로 강서경은 끔찍한 악몽과 환상은 물론 병명조차 알 수 없는 지독한 몸살에 시달립니다.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모든 게 정상으로 돌아왔는데, 문제는 예전의 그녀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 점입니다. 더 기이한 것은 그녀가 가는 곳마다 뱀이 나타나는가 하면 의문의 죽음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벌어진다는 점입니다.

 

처음 읽는 박해로의 장편소설입니다. 실은 2018년에 출간된 - 피할 수 없는 상갓집의 저주를 접했지만 초반부에 책을 덮은 탓에 인연을 맺지 못했고, 그 뒤로 이어진 그의 작품 역시 계속 관심 밖에 뒀던 게 사실입니다. 미쓰다 신조의 호러를 무척 좋아함에도 불구하고 박해로의 호러는 제 스타일과는 잘 맞지 않아 보였기 때문입니다.

재미있는 건 끝까지 읽은 박해로의 작품이 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는 점입니다. 2014년에 출간된 한국 공포문학 단편선 - 돼지가면 놀이에 실린 단편 무당아들이 그것인데, 메모해놓은 줄거리를 보니 꽤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덕분에 그의 신작에 관심을 갖게 됐는데, 특히 앞선 작품들의 공통된 무대였던 소도시 섭주를 제목으로 전면에 내세우고 있어서 중도 포기했던 의 아쉬움을 만회할 수 있을 거란 기대감이 들기도 했습니다.

 

오랜 세월동안 흉가에 방치돼있던 특이한 방울과 거울, 그것을 손댄 자들에게 찾아오는 끔찍한 악몽과 지독한 몸살, 사방에서 뱀이 출몰하는 가운데 의문의 죽음을 맞이하는 자들, 그리고 소도시 섭주에 전해 내려오는 기이한 괴담과 전설 등 매력적인 호러 코드들이 잔뜩 버무려진 작품입니다. 등장인물들 역시 다채로운데, 이기적인 모습을 감추지 않는 소도시 초등학교 교사들, 꽤 깊은 내공을 지닌 것으로 보이는 무당들, 무녀와의 사이에 아이를 낳은 목사, 무속과 관련된 사건을 수사하다가 30년 넘게 실종상태인 삼촌을 둔 경찰 등 설정만으로도 호기심을 일게 하는 캐릭터들로 가득합니다.

 

속도감도 빠르고 지루할 틈 없이 사건들이 연이어 벌어지는데다 섭주에 전해 내려오는 사파왕과 우녀라는 기이한 괴담까지 가미돼서 흥미롭게 읽히는 작품이긴 하지만, 역시 개인적인 호러 취향과는 다소 거리가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독자로 하여금 공포 자체를 서서히 느끼고 만끽하도록 이끄는 게 아니라 조금은 강요하듯 설명하는 점이 거슬렸는데, 그 방법 역시 대부분 이나 환각이라는 편리한 장치에 의존한 점이 안이하게 느껴졌습니다.

, 이야기를 이끌던 주인공 강서경은 어느 순간부터 존재감을 잃어버렸는데, 반면 할리우드 모험극을 떠올리게 하는 전설 속 캐릭터가 전면에 나서는 바람에 이야기의 방향 자체가 산만해진 점도 아쉬웠습니다. 긴장감 넘치고 소름 돋는 호러가 다소 생뚱맞은 액션극으로 마무리된 느낌이랄까요? 섬뜩한 죽음의 의례를 소재로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오가며 불쾌한 공포심을 안겨줬던 미쓰다 신조의 사관장’(蛇棺葬)백사당’(百蛇堂)을 닮은 호러물을 기대했던 탓에 섭주의 막판 전개가 더 아쉽게 느껴진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작품 외적으로 아쉬웠던 건 표지입니다. 보기만 해도 으스스해지는 사악함과는 거리가 한참 먼 귀여운(?) 다섯 마리의 뱀 이미지는 이 작품을 아동용 호러처럼 오해하게 만들 소지가 다분했습니다. 다 읽은 뒤에 다시 표지를 봤을 땐 그 귀여움이 더더욱 아쉽게만 여겨졌습니다.

 

이 작품 덕분에 섭주라는 공간을 무대로 이어져온 박해로의 호러물들이 무척 궁금해졌습니다. ‘섭주에서 만족하지 못했던 부분들이 이전 작품들에서 채워질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새로운 장르와 소재를 개척하고 꾸준히 이야기를 자아낸 박해로의 앞으로의 작품에 대해서는 남다른 기대감을 유지해도 괜찮겠다는 생각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실종 - 사라진 릴리를 찾아서,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3-24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3
마이클 코넬리 지음, 김승욱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5월
평점 :
품절


헨리 피어스는 분자컴퓨터 전문가이자 획기적인 생명공학 프로젝트 프로테우스를 이끄는 스타트업의 리더입니다. 심각한 일 중독 때문에 연인과 헤어진 피어스는 새로 이사한 집에서 황당한 일을 겪습니다. 릴리라는 매춘부를 찾는 수십 통의 전화를 받게 된 것입니다. 성인 웹사이트에서 그녀의 프로필을 찾아낸 피어스는 자신이 부여받은 새 집의 전화번호가 그녀가 쓰던 번호와 똑같은 걸 알게 되는데, 문제는 그녀가 얼마 전부터 실종된 게 분명해 보인다는 점입니다. 그때부터 피어스는 일면식도 없는 릴리를 찾는 일에 몰두합니다. 그건 단순한 호기심 차원이 아니라 피어스의 어린 시절의 악몽이 사라진 릴리에게서 어른거렸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쓰던 전화번호를 부여받은 탓에 곤란함을 겪는 건 흔하진 않아도 실제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이지만, 그 전화번호의 전 주인이 매춘부인 탓에 느끼한 남자들의 전화를 연이어 받게 된다면 그야말로 당혹스러운 일일 것입니다. 상식대로라면 새 전화번호를 요청하는 걸로 끝날 일이지만, 피어스가 회사의 미래가 달린 투자자 미팅을 앞둔 상태에서 사라진 릴리를 찾는데 전념하기 시작한 것은 그의 누나와 관련된 참혹한 과거가 남긴 트라우마와 죄책감 때문입니다. 스스로에게 ?”라는 자문을 끊임없이 던지면서도 피어스는 사라진 릴리를 찾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말할 수 없는 중압감에 사로잡히고 만 것입니다.

 

형사와 사립탐정과 변호사가 등장하긴 하지만 실종은 아마추어 탐정 피어스의 원맨쇼나 다름없는 독특한 작품입니다. 상대는 일면식도 없는 매춘부인데다 그녀를 관리하는 업체는 위험천만한 어둠의 세력이라 주먹질 하나 제대로 못할 것 같은 피어스의 행동은 그저 무모해 보이기만 합니다. 하지만 그냥 손 떼는 게 좋을 것 같은데.”라는 조바심을 불러일으키던 그의 탐문은 의외로 생각지도 못한 단서들을 찾아내기 시작하는데, 문제는 그 덕분에 끔찍한 폭력에 휘말리는 것은 물론 오히려 릴리를 살해한 유력 용의자로 몰리게 된다는 점입니다.

 

공권력이나 사법시스템과 거리가 먼 평범한 사람이 중대 범죄를 해결하는 이야기는 자칫 현실감을 잃기 쉽지만 헨리 피어스는 조금의 위화감이나 어색함 없이 산전수전 끝에 사라진 릴리의 진실에 도달합니다. 또 주인공의 배경 정도로만 그려질 것 같았던 분자컴퓨터, 나노기술, 생명공학 프로젝트 등이 자연스럽게 사건과 연결되는 설정도 무척 매력적이었습니다. 피어스로 하여금 릴리를 찾게 만든 가장 큰 원동력인 어린 시절 누나가 얽힌 비극적인 과거사는 살짝 작위적인 느낌이 있긴 했지만 크게 거부감이 들진 않았습니다. 이처럼 실종은 서로 섞이기 힘든 다양한 설정과 코드들이 흥미롭게 조합된 이야기입니다. ‘해리 보슈 시리즈미키 할러 시리즈의 풍미가 느껴지면서도 사뭇 결이 다른 특별한 간식이라고 할까요?

 

실종은 마이클 코넬리의 작품 가운데 유일한 외톨이입니다. 마이클 코넬리의 스탠드얼론 주인공들(잭 매커보이, 테리 매케일렙, 캐시 블랙)해리 보슈 시리즈에 중요한 조연이나 카메오급으로 등장하여 이른바 범 해리 보슈 패밀리로 불릴 수 있는 반면, ‘실종의 주인공 헨리 피어스는 마이클 코넬리 작품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어딘가 등장했을지도 모릅니다. ‘해리 보슈 시리즈를 꼼꼼히 읽고 크고 작은 등장인물들을 메모해놓았지만 저도 모르게 헨리 피어스라는 이름을 놓쳤을 수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실종은 꽤 여러 곳에서 해리 보슈 시리즈와 접점을 갖고 있기도 합니다. 우선 피어스를 돕는 검사 출신 변호사 재니스 랭와이저는 해리 보슈 시리즈여러 편에서 보슈의 지원군 역할을 맡았던 인물입니다. 콘크리트 블론드의 끔찍한 매춘부 연쇄살인마 인형사가 피어스의 트라우마와 연결되기도 하는데, 재미있는 건 이 대목에서 재니스 랭와이저가 그놈을 쏘아죽인 형사를 나중에 알게 됐는데, 그분은 올해 은퇴했어요.”라며 해리 보슈에 대해 피어스에게 설명해주는 장면입니다. 그리고 피어스가 세상의 폭력과 혼란을 화가 히에로니무스 보쉬의 그림에 빗대어 언급하기도 합니다. (보슈의 어머니는 화가 히에로니무스 보쉬의 이름을 따서 보슈에게 히에로니머스 보슈라는 이름을 지어줬습니다.)

이렇게 많은 접점을 갖고 있으니 실종을 마이클 코넬리의 작품 가운데 유일한 외톨이로 부르는 건 적절치 않을 수도 있습니다. 다만, 헨리 피어스가 해리 보슈 시리즈가운데 어느 한 편에서라도 잠깐이나마 등장했다면 그 역시 범 해리 보슈 패밀리가 됐을 텐데 말입니다.

 

실종이 미국에서 출간된 게 2002년이니 이제 와서 새삼 헨리 피어스 시리즈가 나올 일은 없겠지만 마이클 코넬리의 어느 작품에서라도 장년이 된 헨리 피어스를 잠깐이라도 볼 수 있다면 무척 반가운 일일 것 같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집행권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7-5 미치 랩 시리즈 4
빈스 플린 지음, 이훈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2년 4월
평점 :
품절


이번 작품에서 미치 랩에게 주어진 임무는 두 가지. 첫째는 필리핀의 급진 이슬람단체에 납치된 미국인 가족을 구하는 것이고 둘째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의 충돌과 테러의 가능성을 막는 것이다. 납치된 미국인 가족을 구하려던 해군의 비밀작전이 적의 매복에 의해 실패하고 사전 정보유출 가능성까지 제기되자 대통령은 랩에게 후속 조치를 지시한다. 한편 팔레스타인 자유국가의 건설이 삶의 목표인 테러리스트 데이비드는 평화를 위해서는 다소의 희생이 필요하다.”는 소신을 앞세우며 미국과 이스라엘과 아랍 세계를 뒤흔들어놓을 엄청난 단독 테러 계획을 세운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전편인 권력의 분립’(‘미치 랩 시리즈’ 3)에서 야비한 정치인에 의해 암살자 신분이 폭로된 랩은 사면초가에 처했습니다. 애초 은퇴와 함께 애너와 결혼하여 평범하게 살 생각이던 랩은 하늘의 계시라고 여겼지만, 대통령으로부터 은퇴 대신 내근직을 권유받자 내가 이렇게 살 수 있을까?”라는 회의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집행권초반의 랩은 실제로 내근직인 (직함은 그럴듯한) 대테러업무 특별보좌관이 돼있었고 애너와의 신혼여행을 만끽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랩이 결코 책상머리에 앉아 지시나 내리는 역할에 만족하지 않을 것임을, 그래서 결국 현장으로 달려가 숱한 위기를 겪을 것임을 불 보듯 뻔히 짐작할 수 있었고 역시 랩은 필리핀, 미국, 프랑스를 오가며 자신에게 주어진 미션을 멋지게 클리어합니다.

 

필리핀에 억류된 미국인 가족을 구출하는 작전은 꽤 긴 분량을 차지했지만 알맹이는 무척 단선적이어서 익숙한 긴장감 이상의 맛을 느낄 순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 시퀀스의 핵심은 구출 작전 자체보다 기밀정보를 둘러싼 백악관 주변의 정치적 갈등에 있습니다. 현장을 모르는 것까진 용서돼도 현장을 무시하고 책상머리의 권력을 더 중요시 여기며 기밀정보를 사리사욕을 위해 이용하거나 대수롭지 않게 전파하는 관료들의 행태는 랩과 그의 상관인 CIA 국장 아이린 케네디를 격노하게 만듭니다. 어렵사리 인질 구출작전에 성공한 랩과 케네디가 그들을 응징하는 대목은 어지간한 액션 장면보다 10배는 더 통쾌하고 짜릿합니다.

 

미국인 가족 구출작전과는 완전히 별개로 테러리스트 데이비드의 위험한 계획이 전개됩니다. 팔레스타인 자유국가를 꿈꾸는 데이비드는 진정한 평화를 위해선 피아를 막론하고 위험요소들을 제거해야 된다는 독특한 신념을 가진 자입니다. 무고한 희생을 낳는 폭력을 저주하고 여성을 혐오하는 아랍의 문화를 증오하는 그는 어찌 보면 지극히 도덕적이고 선한 캐릭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가 팔레스타인의 진정한 해방과 자유국가 건설을 위해 선택한 방법은 아이러니하게도 지독한 폭력입니다. 더구나 그는 어느 단체에도 속하지 않은 싱글 플레이어입니다. 그런 그가 전 세계를 요동치게 할 엄청난 테러 계획을 수립하고 차근차근 실행에 옮기자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에 끼인 미국은 상상치도 못한 혼란에 빠지고 맙니다.

 

여전히 짜릿한 첩보 액션스릴러의 미덕을 갖추고 있지만 집행권은 전작들에 비해선 좀 힘이 빠져 보였습니다. 랩의 활약이 교과서적인 틀 이상을 벗어나지 못했고, 테러리스트 데이비드의 비현실적인 이상주의가 큰 매력을 지니지 못한 탓도 있습니다. 사소할 수도 있지만 결혼 후 랩의 발목을 잡는 것 이상의 역할을 못하는 애너 릴리의 민폐 캐릭터도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설정이었는데, 랩의 내면적인 갈등을 부추기는 중요한 조연이지만 철없고 무모한 것은 물론 랩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 그녀의 징징거림은 더는 보고 싶지 않은 대목입니다.

작품 외적으로 아쉬운 점은 한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 불편한 번역 문장들입니다. 전작들에서도 간간이 느끼긴 했지만 집행권은 유독 심하게 보였습니다. 원작이 그런 것인지 번역 과정에서 생긴 문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거기에 자주 눈에 띈 오타들까지 더해져서 수시로 스트레스를 받았습니다.

 

현장을 몹시도 그리워하는 랩의 타고난 기질과 그를 안전한 가족의 울타리 안에 가두려는 애너의 욕심, 그리고 그를 적극 활용하고 싶으면서도 함부로 그렇게 할 수 없어 답답한 CIA 국장의 고민 등 랩의 운신을 까다롭게 만드는 미묘한 갈등이 무척 첨예한데, 과연 그는 다음 작품에서 어떤 행보를 걷고 어떤 충돌을 겪게 될까요? 기대감와 궁금증 때문에라도 다음 작품인 전몰자의 날을 빨리 읽어보려고 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