딜레마
B. A. 패리스 지음, 김은경 옮김 / arte(아르테)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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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을 별러온 성대한 마흔 살 생일파티를 얼마 안 남겨놓고 리비아는 가족을 파멸에 이르게 만들 딸 마니의 충격적인 비밀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파티 당일, 리비아의 남편 애덤은 딸 마니에 관한 믿기 힘든 소식을 접합니다. 리비아와 애덤은 인생 최고의 행복한 순간을 코앞에 두고 딜레마에 빠집니다. 당장이라도 파티를 중단시키고 자신만이 알고 있는 충격적인 비밀과 믿기 힘든 소식을 상대에게 알려야 할지, 아니면 파국이 닥치기 전 다만 몇 시간만이라도 20년을 기다려온 행복한 순간을 만끽하게 배려해야 할지... 파티는 성대하게 진행되지만 정작 그 주인공인 리비아와 애덤은 바닥 모를 심연에 빠진 채 공포와 절망의 시간을 보냅니다.

 

나를 찾아줘이후 봇물 터지듯 쏟아진 가족 심리스릴러가운데 별 5개를 줄 만큼 만족스런 작품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었습니다. 오히려 피로도만 높아졌고 그래선지 의식적으로 외면해온 게 사실인데, 그런 와중에도 무슨 이유에선지 B. A. 패리스의 작품들은 빼놓지 않고 계속 읽게 됐습니다. ‘비하인드 도어’, ‘브레이크 다운’, ‘브링 미 백에 이은 그녀의 네 번째 작품 딜레마는 전작들에 비하면 외형적으론 무척 왜소한 소재와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심리스릴러로서의 무게감과 긴장감 면에서는 훨씬 더 압도적인 작품입니다.

 

10대 시절의 임신과 결혼, 결코 순탄치 않았던 결혼 초기의 상황, 겉으론 평온해보여도 미묘한 갈등이 상존해온 부모자식간의 관계 등 리비아 부부의 과거와 현재가 담담하면서도 살얼음마냥 위태롭게 묘사됩니다. 다사다난한 20년을 보낸 리비아 부부는 이제는 제법 안정된 삶을 영위할 수 있게 됐고, 덕분에 부모에게 의절당하고 제대로 된 결혼식마저 올리지 못한 것을 평생의 한으로 여긴 리비아가 20년을 별러온 성대한 마흔 살 파티도 행복한 기분으로 준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딸 마니에 관한 충격적인 비밀과 믿기 힘든 소식이 파티를 앞둔 리비아 부부를 공포와 절망에 빠뜨렸고, 두 사람은 감당하기 어려운 최악의 상황에서도 상대를 배려하는 차원에서 파티를 중지시키지 않았지만, 노래와 춤과 웃음이 사라지고 난 새벽녘, 결국 끔찍한 진실과 정면으로 마주하게 됩니다.

 

언뜻 보면 왜 두 사람은 딸에 관한 그렇게 중요한 비밀과 소식을 상대에게 빨리 알리지 않는 거지? 마흔 살 생일파티가 그보다 중요한가? 이런 상황이 가족 심리스릴러에 적합한 소재인가?”라는 의문이 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작가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부부의 내밀한 심리를 설득력있게 묘사하면서 파티 당일부터 다음날 새벽까지의 긴장과 불안으로 가득 찬 24시간을 디테일하게 그려냅니다. 덕분에 단지 몇 시간의 유예를 얻었을 뿐인 모두를 파멸로 이끌고 갈 엄청난 충격이 과연 파티가 끝난 뒤 어떤 식으로 폭발할지 독자 입장에선 초조하게 마음 졸이며 지켜볼 수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사건이라곤 리비아 부부가 알게 된 딸 마니에 관해 충격적인 비밀과 믿기 힘든 소식이 전부지만, 끔찍한 살인사건이나 정교한 미스터리보다 훨씬 더 높은 밀도와 팽팽한 긴장감을 만끽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물론 앞서 언급한 근본적인 의문 왜 서로에게 딸의 비밀과 소식을 빨리 알리지 않는 거지? - 을 수긍하지 못한 독자라면 이 이야기 자체를 납득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저 역시 중반쯤까진 이 의문에서 자유롭지 못했지만, 조금씩 작가에게 설득당하면서 리비아 부부에게 100% 감정 이입이 가능해진 게 사실입니다. “만일 내가 리비아라면? 애덤이라면?”이란 자문을 계속 던지면서 그들의 공포와 절망에 확실히 공감하게 됐다고 할까요?

 

공포와 미스터리를 앞세운 B. A. 패리스의 이전 작품들과는 확실히 결이 달라서 그녀의 팬 가운데 다소 실망감을 느끼는 독자도 있겠지만, 개인적으론 재미 면에선 좀 떨어지더라도 몰입감만큼은 훨씬 더 매력적인 작품이란 생각입니다. 다만 이 작품까지 모두 별 4개에 그칠 정도로 결정적인 한 방이 없다는 건 무척 아쉬운 점인데, 언젠가는 별 5개도 모자랄 만큼 꽉 찬 매력의 작품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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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외 연애와 비슷한 것
미야기 아야코 지음, 김은모 옮김 / 토마토출판사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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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륜을 연상시키는 제목이 눈길을 끌긴 했어도 딱히 제 취향은 아니라서 패스하려다가 작가 이름을 보곤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바로 집어든 작품입니다. 에도시대 유곽에서 몸을 팔던 유녀들의 가슴 아픈 이야기를 노골적인 성애 묘사와 함께 그려낸 화소도중을 너무 인상 깊게 읽었던 탓에 미야기 아야코의 다른 작품들이 한국에 소개되기를 계속 기다려왔기 때문입니다. 2017교열걸이 출간되긴 했지만 왠지 제가 기대했던 화소도중풍의 이야기가 아닌 듯 한데다 무려 세 권으로 분권된 탓에 건너뛰었는데, ‘혼외 연애와 비슷한 것은 분량도 짧고 제목에서 풍기는 살짝 불온하면서도 매력적인 기운 탓에 주저없이 집어든 것입니다.

 

35살 동갑인 다섯 여자가 한 챕터씩 화자를 맡은 연작소설로, 이들의 공통점은 아직은 메이저급 아이돌의 백댄서에 머물고 있는 미소년 예비 아이돌 스노우화이트의 광팬이란 점입니다. 작품해설에 따르면 스노우화이트는 이들에게 있어 모든 불만을 다스려줄 치유제이자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인생의 에센스.”입니다. 단순히 열광적인 팬이나 를 넘어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존재로 여긴다는 뜻입니다.

 

다섯 여자의 핸디캡 혹은 불만은 모두 제각각입니다. 고급맨션에 사는 유복한 전업주부 사쿠라이는 평생 공부, 미모, 능력, 행복에 있어 만년 3등에 머무는 자신의 삶을 한탄합니다. 반면 스무 살에 낳은 중학생 아들에게 거지같은 아줌마!”라고 불리는가 하면 수차례 다단계 사기를 당한 무기력한 남편을 둔 마시코는 늘 끝에서 3등인 삶을 살아온 여자입니다. 또 모든 방면에서 1등의 삶을 살아온 스미타니는 누구에게도 흥미를 갖지 못하는 기벽 탓에 지금껏 미혼 상태로 살며 오로지 스노우화이트의 멤버 지카 짱에게만 몰두하는 여자입니다. 그 외에 평범함을 강요받으며 자란 탓에 이도저도 아닌 애매한 삶을 살다가 스노우화이트에 푹 빠져 BL소설까지 탐독하게 된 야마다, 지독한 가난에 얼꽝 뚱보라는 유전자까지 물려받은 BL소설가 가타오카가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미소년 아이돌에 빠진 35살 여자들의 가벼운 가십거리처럼 보이지만 실은 제각각의 상처를 지닌 채 중년을 목전에 둔 여자들의 고민과 상처가 진하게 배어있는 작품입니다. 이들은 외모, 직업, 지위, 수입은 물론 남편, 아이, 시어머니 등 가족 때문에 느끼는 불만에 이르기까지 남들에게 쉽게 털어놓기 힘든 자신만의 고민을 지니고 있습니다.

35살이란 나이는 젊다고도, 중년이라고도 할 수 없는 애매한 나이이자 뭔가를 바꾸기도, 뭔가를 새로 시작하기도 애매한 그야말로 낀 세대를 상징합니다. 딸 또는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막내 동생뻘이 대부분인 팬들 사이에 끼어 자신이 숭배하는 아이돌을 향해 꺅꺅 소리를 지르기도 민망한 나이입니다.

하지만 그녀들은 지친 삶 가운데 유일한 빛이자 희망인 스노우화이트의 미소년들을 통해 진심 어린 위안을 받고 현실을 잠시 망각할 수 있는 기쁨을 얻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스노우화이트의 팬이라는 교집합 덕분에 알게 된 서로를 향해 시기와 질투, 연민과 동정을 발산하며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갖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스노우화이트와의 혼외 연애를 통해 35살의 고민과 불만과 절망을 조금이나마 치유받는다고 할까요? 그래서인지 만년 3사쿠라이가 내뱉은 한마디는 극단적이긴 해도 그녀들의 진심을 잘 드러내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남자에게 아이돌은 자위행위용일지도 모르지만, 여자에게 아이돌은 디톡스다.” (p33)

 

기대 이상의 재미를 느낀 작품이긴 하지만 개인적으론 화소도중의 매력과 여운을 맛볼 수 있는 미야기 아야코의 작품이 출간되기를 여전히 바라는 마음입니다. 노골적이고 지독하면서도 짙은 애수와 회한이 담긴 이야기가 분명 한 작품쯤은 있을 것 같은데,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꼭 한 번은 만날 수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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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대
모리미 토미히코 지음, 권영주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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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한 권을 집어서 펴면 그 순간 특별한 시간이 흐르기 시작한다. 그때까지 아무것도 없었던 공간을 말이 메워 그곳에 세계가 나타난다. 다른 책을 집으면 또 다른 세계가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책을 덮으면 세계는 어디에도 없다. 글자를 인쇄한 종이 묶음이 있을 뿐.” (p118 )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야행과 마찬가지로 열대는 어디에서도 만나볼 수 없는 특별한 세계를 독자 앞에 펼쳐놓습니다. 책을 읽는 동안 현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모리미 도미히코가 자아낸 이계(異界)가 독자의 몸과 마음은 물론 주위의 모든 것을 잠식해버립니다. ‘열대속 세계는 이해하기도, 납득하기도 힘든데다 상식과 논리가 통하지 않는 기이한 시공간이지만 황홀함과 두통과 착시를 동시에 불러일으키는 묘한 매력을 지닌 곳이기도 합니다.

 

소설 속 소설열대는 사야마 쇼이치라는 작가가 1982년에 출간한 소설입니다. 하지만 이 소설을 읽은 그 누구도 마지막 페이지에 도달하지 못한 것은 물론 어느 날 갑자기 책 자체가 사라져버리는 신기한 경험을 겪었습니다. 그들은 하나 같이 교토의 헌 책방이나 길거리에서 열대를 접했으며, ‘천일야화에 특별한 관심을 가졌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기도 합니다. 그들의 궁극의 의문은 일본 그 어디에도 열대라는 책이 출간된 흔적이 없다는 점입니다.

 

애초에 열대의 존재 자체가 확실하지 않다. 실물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한 명도 없으니까. 작가는 사라지고 책도 사라지고 그저 바닥이 보이지 않는 구멍만이 남아 있을 뿐.” (p113)

 

열대를 접했던 몇몇 사람이 모여 자신들의 기억을 그러모아 열대를 완성하려 시도합니다. 하지만 초반 외엔 대부분 단편적인 기억들만 남아서 좀처럼 열대의 전체 모습에 다가가지 못합니다. 그러던 중 그 모임에 한 여자가 참가하면서 상황은 급변합니다. 그녀가 기억해낸 모래사막의 궁전, 보름달의 마녀라는 단서 덕분에 지지부진하던 논의는 새 돌파구를 찾게 되고, 그때부터 멤버들은 누구보다 먼저 열대의 남은 이야기를 알아내기 위해 각자의 길을 걷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그 직후 멤버들이 차례로 실종되는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집니다.

이후 나머지 분량은 소설 열대의 내용과 그것이 집필된 계기와 과정을 그립니다. 남양의 바다에서 기억을 잃은 채 깨어난 한 남자, 섬을 창조하고 파괴하는 마술을 부리는 마왕과 그가 지배하는 바다, 그 마왕에 저항하는 세력, 그리고 이 모든 판타지 속에서 롤러코스터 같은 상황에 휩쓸리다가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로 남기기로 결심한 한 남자의 사연이 펼쳐집니다.

 

세계 어딘가에 구멍이 있고 그 너머에 불가사의한 세계가 펼쳐져있다는 느낌. 다른 세계로 나를 데려가려는 힘이 늘 나를 노리고 있다는 느낌. 그건 섬뜩한 동시에 감미로운 기분이었다.” (p510)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야행등 단 두 편이긴 해도 모리미 도미히코의 판타지에 제법 익숙하다고 여기고 있었지만 열대모리미 판타지의 절정을 보여주는 작품이라는 출판사 소개글답게 상상을 초월한 세계와 인물들이 등장하여 읽는 내내 몽환적인 분위기에 사로잡히게 만들었습니다. 현실과 비현실, 존재와 허구가 마구 뒤섞인 가운데 뫼비우스의 띠마냥 경계 자체를 알 수 없는 이야기가 시공간을 넘나들며 전개되는데다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 ‘소설에 대한 소설, ‘판타지에 대한 판타지라는 특이한 구조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장을 덮었을 때 기억이 날 듯 말 듯한 화려하고도 기괴하기 짝이 없는 꿈에서 깬 느낌이 드는 건 아마도 저만의 경험은 아닐 거란 생각입니다.

 

열대를 통해 모리미 도미히코와 처음 만난 독자라면 다소 당혹감을 느낄 수밖에 없을 거란 생각입니다. 상식도, 논리도, 기승전결도 보이지 않는 극강의 판타지에 일반적인 해석이나 유추조차 허용하지 않는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 서평을 쓰는 지금까지도 얼얼한 상태인데, 혹시라도 모리미 도미히코의 친절한 판타지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를 읽어볼 것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야행역시 흥미로운 작품이지만 모리미 도미히코와 첫 대면하기엔 아무래도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가 좀더 적합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RHK로부터 도서(가제본) 협찬을 받았지만, 본인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하여 작성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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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신저 23
제바스티안 피체크 지음, 염정용 옮김 / 단숨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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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최고의 잠입수사관으로 자타가 공인하는 38살의 마르틴 슈바르츠. 하지만 그의 삶은 5년 전 호화 크루즈선 술탄호에서 아내가 어린 아들을 바다에 던진 뒤 자살한 그날 이후로 모든 의미를 잃은 상태입니다. 어느 날 그에게 정체불명의 노파가 전화를 걸어 술탄호에 승선할 것을 권합니다. 아내와 아들의 죽음이 자살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또 아직 살아있을지도 모른다는 충격적인 말에 마르틴은 무단결근까지 감행하며 술탄호에 오릅니다. 그리고 예상치 못한 사건들, 의심스러운 인물들과 연이어 마주칩니다.

 

제바스티안 피체크와 여섯 번째 만난 작품입니다. 한국에 출간된 그의 작품이 모두 12편이니 딱 절반을 읽은 셈인데, ‘패신저 23’은 지금까지 읽은 그의 난해하고 기괴한 사이코스릴러에 비해 굉장히 쉽고 편하게 읽힌 정통 범죄스릴러에 가까운 작품입니다. 매번 두통과 불쾌감을 겪으면서도 제바스티안 피체크에 탐독하는 이유 자체가 미스터리지만 어쨌든 패신저 23’은 첫 페이지를 열기 전부터 가졌던 선입견과 두려움(?)을 무색하게 만들 정도로 깔끔하고 선명한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이 작품의 제목인 패신저 23’은 과거 10년 간 크루즈선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 승객이 177, 즉 해마다 평균 23명이란 사실을 가리키는 상징적인 표현입니다. “별다른 도구 없이 자살을 하기에도, 끔찍한 범죄를 자살로 은폐하기에도, 또 완전범죄에 가까운 살인을 저지르기에도 최적의 장소가 된다.”는 출판사의 소개대로 많은 사람들의 로망인 호화 크루즈선이 실은 지극히 위험천만한 공간이 될 수 있다는 점은 꽤 놀라운 사실이었습니다. 또 크루즈선을 소유한 해운회사가 막대한 손해를 야기할 수 있는 살인사건보다 애틋한 비극으로 포장할 수 있는 자살을 선호하는 탓에 종종 진실이 은폐될 수 있다는 가능성 역시 초반부터 이 작품의 매력을 한껏 고조시키는 긴장감 넘치는 설정이기도 합니다.

 

자신을 술탄호로 불러들인 노파에게서 아들이 아끼던 곰 인형을 전해 받은 마르틴은 아내와 아들의 죽음에 확실한 의문을 갖기 시작합니다. 더구나 아내와 아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8주 전 술탄호에서 사라졌던 모녀 가운데 딸 아누크가 최근 살아서 돌아온 사실까지 알게 되자 마르틴은 자살로 위장한 연쇄살인의 가능성을 제기하게 되고 범인이 현재 술탄호에 타고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됩니다.

마르틴의 범인 찾기와 함께 어딘가에 갇힌 채 납치범에게 살면서 저지른 가장 큰 잘못을 고백하라.”는 강요를 받는 나오미라는 여자의 끔찍한 이야기가 나란히 전개됩니다. 또 엄마 율리야와 함께 술탄호에 탔던 15살 소녀 리자가 의문의 메모만 남긴 채 사라진 것 역시 마르틴의 신경을 팽팽하게 만드는 중요한 사건입니다. 더불어, 경찰이나 FBI가 개입하기 전에 살아 돌아온 소녀 아누크를 처리하려는 해운회사의 야비한 음모까지 곁들여져서 독자는 지루하거나 느슨함을 느낄 틈도 없이 대서양 한복판을 항해중인 술탄호에서 벌어지는 갖가지 사건에 흠뻑 빠져들게 됩니다.

 

지금까지 읽은 제바스티안 피체크의 작품 가운데 눈알수집가’, ‘눈알사냥꾼’, ‘영혼파괴자가 정통 사이코스릴러로 분류된다면, ‘패신저 23’을 비롯 내가 죽어야 하는 밤소포는 사이코스릴러와 범죄스릴러가 적절히 믹스된 흥미진진한 작품이란 생각입니다. 혹시 그의 정통 스릴러에 크게 데인 적이 있는 독자라면 제가 언급한 작품들을 (속는 셈 치고) 한번쯤 만나볼 것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사족으로... 제바스티안 피체크의 작품은 극단적인 사이코스릴러 설정 때문에 표지를 가리고 읽어도 금세 작가 이름을 떠올릴 수 있는 차별점을 갖고 있지만, 지금까지 읽은 6편을 떠올려보면 왠지 매번 다른 작가의 작품을 읽는 듯한 이질감을 느꼈던 것도 사실입니다. 억측이긴 하지만, 한국에 출간된 12편의 작품이 5곳의 출판사와 7명의 번역가의 손을 거친 게 가장 큰 이유라는 생각입니다. 원작자의 개성이나 문장의 맛이 일관되게 옮겨지는 게 불가능할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 그래선지 제바스티안 피체크에게 전담 출판사혹은 전담 번역가가 있었다면...”이란 아쉬움을 느끼는 건 그의 팬이라면 어느 정도는 공감할 수 있는 대목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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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부패에서 구하소서
쯔진천 지음, 박소정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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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교수이자 범죄논리학자 옌량을 앞세운 일명 추리의 왕(推理之王) 시리즈로 잘 알려진 쯔진천이 이전 작품들과는 전혀 다른 스타일의 이야기를 선보였습니다. 묵직하고 어두운 미스터리가 주 특기였던 그가 슬랩스틱 스릴러 혹은 (옮긴이의 말에 따르면) “추리소설의 탈을 쓴 코믹 활극이라는 가볍고 통통 튀는 서사를 다룰 거라곤 예상할 수 없었기에 읽기 전부터 무척이나 흥미를 끄는 작품이었습니다.

물론 범죄 자체는 심상치 않습니다. 폭탄까지 동원하는 2인조 강도, 부와 권력을 지닌 부패한 기업가와 정치인, 그리고 적잖이 벌어지는 살인사건 등 범죄의 무게감이나 잔혹함은 여느 장르물 못잖게 심각하게 설정돼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심각한 재료들을 지지고 볶기 위한 레시피는 슬랩스틱과 코믹이라는 정반대의 코드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무엇보다 이 레시피가 가장 빛나는 지점은 좌충우돌 경찰 캐릭터입니다. 주인공 장이앙은 무능한 것인지 관운이 따르지 않았던 것인지 알 수 없는 인물로 어느 날 갑자기 낙하산을 타고 싼장커우 공안국 부국장에 취임한 뒤 잇달아 강력범죄를 해결하면서 주목을 받습니다. 하지만 그의 업적은 어찌 보면 100% 행운에 의한 걸식같기도 하고, 어찌 보면 정말 뛰어난 직감과 추리력에 의한 것 같기도 해서, 마지막까지도 그의 진면목이 어떤 것인지 그저 애매모호할 따름입니다. (물론 이 애매모호함은 작가가 의도적으로 설정한 것입니다.)

장이앙 주위의 경찰들 역시 코믹 경찰물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캐릭터들인데, 늘 실수만 저지르는 머저리’, 모범경찰 같지만 속물적인 근성을 지닌 자, 고위직의 조카로 현장 형사를 꿈꾸는 사고뭉치, 그리고 장이앙의 성공을 시기하고 질투하는 고위관료들이 그들입니다.

 

슬랩스틱 코믹 레시피의 또 다른 핵심요소는 우연과 필연을 통해 거미줄처럼 연결되는 사건들입니다. 애초 아무 상관도 없는 인물과 사건들이 예기치 못한 우연을 통해 연결이 되고, 그 결과는 또 다른 인물과 사건에 영향을 미칩니다. 가령, 형사 장이앙과 2인조 무장강도는 이 연결고리 중 하나만 빠졌어도 절대로 만날 일이 없는 관계였지만 몇 번의 우연과 필연이 거듭된 끝에 그야말로 어이없는 상황에서 대치하게 됩니다. 그 외에도 대부분의 인물들이 이런 식의 예상치 못한 악연을 맺게 되는데 이 복잡하고 정교한 장면들은 동시에 쉴 새 없이 실소를 자아내는 코믹 요소까지 품고 있어서 이 작품이 슬랩스틱 스릴러혹은 추리소설의 탈을 쓴 코믹 활극으로 불리는 이유를 쉽게 납득할 수 있습니다.

 

등장인물도 워낙 많고 사건도 그만큼 많아서 줄거리 정리가 쉽지 않아 대략적인 인상비평이 되고 말았는데, 아주 간략하게 요약하자면, 천재인지 운빨이 좋은 건지 알 수 없는 형사 장이앙이 동시다발적으로 여러 사건에 관여하던 중 싼장커우의 부패한 기업가, 흉포한 2인조 무장강도, 경찰과 민간인을 살해한 연쇄살인범을 잇달아 제압하는 이야기입니다. (사건의 진상은 장이앙의 노력과는 거의 무관하게 범죄자들간의 우연한 악연 덕분에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되고, 좀 노골적으로 말하면 장이앙은 차려진 밥상에 숟가락만 들고 나타난 명탐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바로 이 대목이 이 작품의 가장 매력적인 설정이기도 합니다.)

 

한국에선 다만 부패에서 구하소서라는 흥미진진한 제목으로 출간됐지만 사실 이 작품의 원제는 低智商犯罪’, 즉 한국식으로 직역하면 저지능범죄입니다. 아예 제목부터 작정하고 코믹을 강조한 셈인데, 실제로 경찰과 범죄자를 막론하고 이 작품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인물은 어딘가 나사가 하나 풀린 듯한 저지능캐릭터에 가깝습니다. 또 쯔진천 스스로 그냥 재미있는 작품을 쓰고 싶었다. 즐겁게 읽으면 그만이다.”라고 밝힌 걸 보면 이 작품의 성격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이 작품이 쯔진천의 작품 세계 제2막을 여는 신호탄 격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옮긴이의 말은 조금은 우려되는(?) 대목이기도 한데, 개인적으론 이 작품이 맛깔난 간식으로는 괜찮았지만 쯔진천이 계속 이런 스타일을 고집하는 건 그다지 바라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음 작품이 SF를 기반으로 한 범죄추리소설이라고 하는데, 그 역시 코믹을 바탕에 둔 작품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보다는 추리의 왕 시리즈가 한 편이라도 더 나오기를 기대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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