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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의 궤적 1
오쿠다 히데오 지음, 송태욱 옮김 / 은행나무 / 2021년 5월
평점 :
그 어느 작가보다도 폭넓은 스펙트럼을 지닌 오쿠다 히데오가 ‘죄의 궤적’(罪の轍)이라는 직설적인 제목의 작품을 내놓았습니다. 배경은 도쿄올림픽 1년 전인 1963년이며 실제 일본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요시노부 유괴사건’을 모티브 삼은 묵직한 미스터리입니다.
올림픽 직전이 배경이라 혹시나 하고 찾아봤더니 한국에도 이미 소개된 ‘올림픽의 몸값’(‘オリンピックの身代金’. 이후 ‘양들의 테러리스트’라는 제목으로 개정판이 나왔습니다.)과 맥이 닿아 있는 작품이었습니다. 두 작품 모두 경찰 쪽 주인공이 경시청 수사1과 5계의 오치아이 마사오라는 점, ‘죄의 궤적’의 배경이 올림픽 1년 전이라면 ‘올림픽의 몸값’은 올림픽 개막을 코앞에 둔 시점이라는 점입니다. (참고로 일본에서 ‘올림픽의 몸값’은 2008년에, ‘죄의 궤적’은 2019년에 출간됐습니다.)
훗카이도 최북단의 작은 섬에 살던 빈집털이범 우노 간지가 우여곡절 끝에 도쿄에 자리를 잡습니다. 뇌 기능 장애가 있는 간지는 툭하면 기억을 잃어버리거나 기절하는 일이 잦아서 아이들에게까지 바보 취급을 받습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죄책감이라는 게 없다는 점입니다. 돈이 없을 땐 빈집을 터는 게 당연하며 경찰을 두려워하긴 하지만 딱히 나쁜 일이라고 여기지 않습니다. 또 스스로 감정의 스위치를 조절할 수 있어서 공포심 따윈 순식간에 의식 너머로 사라지게 만들 수도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악랄한 범죄자 또는 악의로 뭉친 사이코패스라고 할 수도 없는 게, 그는 놀기 좋아하고 파친코를 좋아하는 평범한 20대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8년차 경찰 오치아이 마사오는 경시청 수사1과 소속이 된지 1년밖에 안 된 ‘신참’입니다. 올림픽을 기점으로 새로운 시대의 경찰이 등장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인물로,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수사를 당연히 여기는, 그래서 전쟁을 겪은 선배들로부터는 비아냥을, 야쿠자들로부터는 칭찬을 듣는 묘한 위치에 처해 있습니다.
그런 오치아이가 시계상 살인사건과 소년 유괴사건에 연이어 투입되면서 우노 간지를 쫓게 됩니다. 성실한 탐문과 예리한 추리로 간지를 특정한 오치아이였지만 그를 알면 알수록 도무지 살인이나 유괴와는 거리가 멀어 보여서 혼란에 빠지는데, 더 큰 문제는 간지를 체포한 이후 어딘가 진짜 ‘바보’ 같으면서도 교묘하게 심문을 빠져나가는 그의 태도에 속수무책이 된 점입니다. 심지어 “지금까지 본 적이 없는 괴물”이 아닐까, 초조해하기도 합니다.
줄거리 대신 인물 소개를 길게 늘어놓았는데, 오치아이가 살인과 유괴 용의자인 간지를 추적하고 체포하고 심문한 끝에 진실에 이르는 심플한 스토리라고 간단하게 요약할 수도 있지만, 동시에 정반대로 1~2권을 합쳐 840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이라 상세한 줄거리 정리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형사 주인공인 오치아이는 다른 경찰 미스터리에서도 많이 본 적 있는 익숙한 인물이지만 독자들의 관심을 끄는 건 어디서도 본 적 없는 용의자 우노 간지입니다. ‘미워할 수 없는 범인’ 또는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격언을 저절로 떠올리게 만드는 인물이기도 한 간지는 스스로를 바보라고 인정할 정도로 소박하기도 하고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다.”라고 자책할 정도로 스스로의 존재감을 부정하는 안타까운 면모도 갖고 있지만 동시에 죄책감이나 공포심을 전혀 못 느끼는 순도 100%의 사이코패스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이인증 혹은 다중인격으로 의심받기까지 하던 간지의 과거와 비밀이 드러나면서 이 작품은 단순히 ‘범인 찾기 미스터리’의 차원을 넘어 ‘죄와 인간’에 관한 묵직한 주제의식을 그리기 시작하는데, 이 묘한 캐릭터는 앞으로도 찾아보기 힘든 팔색조 같은 매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전화조차 중산층 이상의 전유물이었던 시대가 배경이라 ‘죄의 궤적’은 아날로그의 향수를 제대로 맛볼 수 있는 흥미로운 작품입니다. 또 패전 이후 올림픽이라는 거대한 이벤트를 앞둔 일본의 혼란한 상황 역시 미스터리만큼 눈길을 끄는 대목입니다. 현재와 별 차이가 없어 보이는 경찰조직 내부의 치열한 갈등은 여러 번 접했던 소재임에도 불구하고 팽팽한 긴장감과 재미를 선사하고 있습니다.
다소 부담스런 분량에 마치 수사일지를 읽는 듯한 디테일 때문에 성질 급한 독자라면 한숨이 여러 번 나올 수도 있겠지만 오쿠다 히데오의 간결하면서도 매력적인 문장들은 순식간에 페이지를 넘기게 만드는 힘을 지니고 있어서 지레 겁을 먹을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마지막 엔딩이 조금은 급하게 마무리됐다는 아쉬움이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개인적으론 오치아이 마사오라는 매력적인 캐릭터를 꼭 한 번은 다시 만나보고 싶은데, ‘죄의 궤적’은 경시청 신참 오치아이의 성장 스토리라는 또 다른 미덕을 지닌 작품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래 전에 읽어 서평이나 메모조차 남기지 않은 ‘올림픽의 몸값’을 다시 한 번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든 건 당연한 일입니다.) 과연 오쿠다 히데오가 ‘올림픽 3부작’ 혹은 ‘오치아이 마사오 3부작’을 완성시킬지 기대감을 갖고 두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