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권력의 분립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7-4 ㅣ 미치 랩 시리즈 3
빈스 플린 지음, 이영래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1년 11월
평점 :
절판
‘미치 랩 시리즈’ 세 번째 작품인 ‘권력의 분립’은 실은 두 번째 작품인 ‘제3의 선택’과 한 편이나 마찬가지인 작품입니다. 상하권이라고 불러도 괜찮을 만큼 이야기가 연결돼있어서 아직 이 작품을 읽지 않은 독자라면 ‘제3의 선택’을 먼저 읽을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CIA 대테러센터의 비공식 비밀조직인 오리온 팀의 수석요원이자 최고의 능력을 지닌 암살자 미치 랩은 미드 ‘24’의 잭 바우어와 영화 ‘본 시리즈’의 제이슨 본을 합쳐놓은 듯한 그야말로 완전무결한 캐릭터입니다. 시리즈 첫 편인 ‘권력의 이동’에서 백악관을 습격한 테러리스트를 제압하며 대통령을 구해낸 그였지만 그의 정체를 아는 사람은 대통령과 직속상관인 CIA 대테러센터 수장 아이린 케네디 등 몇몇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런 랩이 작전 수행 중 동료요원에 의해 살해될 뻔한 사건이 전편에서 펼쳐졌고 이 작품에선 랩이 자신을 죽이고 CIA를 파멸로 이끌려 한 배후인물을 찾아나서는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하지만 ‘권력의 분립’은 꽤 많은 사건이 동시에 전개되는 복잡한 구도를 지니고 있습니다. 대통령에 의해 최초로 여성 CIA 수장으로 지명된 케네디를 낙마시키고 그 여세를 몰아 CIA를 수중에 넣은 뒤 궁극적으로는 대권을 거머쥐려는 유력 정치인의 음모가 벌어지는가 하면, 사담 후세인이 곧 핵무기를 손에 넣을 거라는 정보를 접한 헤이즈 대통령이 대규모 공습과 함께 핵무기를 무력화하려는 위험천만한 작전을 전개하는 이야기도 적잖은 분량을 차지합니다. 거기다가 암살자로서의 삶을 마감하고 연인인 애너 릴리와의 평범한 삶을 꿈꾸던 랩이 자신을 살해하려던 배후인물의 단서를 쥔 옛 연인이자 모델 출신 청부업자와 맞닥뜨리는 과정에서 애너의 격한 오해를 사는 것은 물론 둘 사이의 관계마저 위태로워지는 안타까운 멜로 에피소드까지 곁들여져서 그야말로 철철 넘칠 정도의 다양한 서사를 맛볼 수 있는 작품입니다.
겨우 시리즈 세 번째 작품까지만 읽은 상태지만 ‘권력의 분립’은 앞선 두 작품에 비해 거의 모든 면에서 빈틈을 찾아보기 힘든 완벽에 가까운 스릴러라는 생각입니다. 첩보, 전쟁, 액션, 멜로, 정치, 음모 등 적잖은 코드가 뒤섞였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하나 밀도나 퀄리티 면에서 처지지 않는 힘을 발휘하는데, 이는 전적으로 각각의 코드를 잘 살려낸 빈스 플린의 팔색조와 같은 문장들 덕분이라는 생각입니다. 파국을 맞이한 랩과 애너의 절절한 멜로부터 마치 전장 한복판에 서있는 듯한 느낌을 준 생생한 군사작전 장면이라든가 비정한 권모술수가 판치는 워싱턴 정가의 긴장감은 어느 챕터를 막론하고 한시도 눈길을 떼지 못하게 하는 힘과 매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다양하고 복잡한 모든 사건들에 어떤 식으로든 연루돼버린 랩의 사정은 말 그대로 안쓰러울 정도입니다. 자신을 살해하고 CIA를 무력화시키려는 배후인물을 찾는 와중에 랩은 말할 수 없는 비밀 탓에 연인에게 비난받고, 낙마 위기에 처한 직속상관을 염려해야 하고, 급작스런 대규모 공습에 랩이 참전하기를 원하는 대통령의 부탁까지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랩은 때론 현명하게, 때론 냉철하게 이 숱한 위기 상황들을 헤쳐 나가는데, 이 작품을 읽는 동안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라는 소설 제목이 떠오를 정도로 점점 더 강하고 단단해지는 랩을 수시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애정할 수밖에 주인공이라고 할까요?
‘거만한 세계의 경찰’인 미국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갖고 있진 않은데다 이 시리즈의 큰 서사 중 하나가 미국의 그런 면을 부각시킨다는 점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미치 랩이 대책 없는 애국주의자 ‘람보’가 아닌 다음에야 픽션으로 충분히 즐겨도 괜찮다는 생각입니다. 간혹 눈에 거슬리는 대목이 있긴 해도 독자가 비판적인 시각을 유지할 수만 있다면 이만큼 흥미로운 스릴러를 굳이 외면할 이유는 없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악당들이 응징되고 진실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긴 했지만 막판에 다소 급하게 막을 내린 엔딩은 너무 아쉬웠습니다. 100페이지 정도 남았을 때만 해도 “랩이 맡은 미션들 대부분이 다음 작품으로 넘어가나보다.”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이야기가 폭주하더니 그 미션들 대부분이 신속-간략-깔끔하게 마무리됐기 때문입니다. 하다못해 50페이지 정도라도 더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은 아마 저만의 느낌은 아닐 거란 생각입니다.
이제 전혀 새로운 환경에서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하게 된 랩이 다음 작품인 ‘집행권’에서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너무 궁금하고 기대가 됩니다. 더불어 랩 주변의 매력적인 조연들도 각각의 스탠스에 크고 작은 변화가 있을 것 같은데 그 역시 어떻게 그려질지 무척 관심이 가는 부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