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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
소메이 다메히토 지음, 정혜원 옮김 / 몽실북스 / 2021년 5월
평점 :
20대 부부와 두 살배기 아이까지 살해한 죄로 사형을 선고받은 가부라기 게이치가 구치소에서 탈옥한 뉴스는 일본 전역을 충격에 빠뜨립니다. 범행 당시 18세였음을 감안하더라도 잔인한 수법과 영아까지 살해한 엽기성 때문에 사형을 선고받았지만 가부라기는 최후 법정에서 무죄를 주장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얼마 안 가 매우 지능적이고 계획적인 방법으로 탈옥을 감행했습니다. 이후 1년 반 가까이 가부라기는 자신이 탈옥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외모와 이름을 바꿔가며 곳곳에 출몰합니다. 과연 그의 목적은 무엇이며, 그의 진짜 정체는 무엇일까요?
탈옥 후 가부라기는 공사장 인부, 미디어회사의 재택 기자, 전통여관 상주 알바, 빵 공장 파트타이머, 그리고 노인 개호시설 파트타이머로 변신하며 여러 사람들과 인연을 맺습니다. 비교적 초반부에 그가 모종의 목적을 갖고 누군가의 소재와 근황을 알아내려 한다는 게 밝혀지긴 하지만, 그렇다고 가부라기가 ‘신분을 감춘 스파이’ 같은 행보를 보이는 건 아닙니다. 오히려 탈옥한 도망자답게 사람들 눈에 덜 띄는 장소로 숨어들어 은둔의 시간을 보내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짧지만 강렬한 인상을 남겨놓습니다.
가부라기와 인연을 맺은 인물들은 하나 같이 “마음에 구멍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고향에서 쫓겨나 공사장 인부가 된 청년, 오랜 불륜의 상처에 아파하는 30대 커리어 우먼, 성추행범이란 누명을 쓴 끝에 사회적으로 매장당한 변호사, 가족에게 끊임없이 상처받아온 중년의 주부, 그리고 첫 사회진출에서 쓴맛을 본 뒤 노인 요양보호사가 된 19살 여성이 그들입니다.
각 챕터마다 소(小)주인공 역할을 맡은 그들은 처음엔 정체가 애매한 가부라기에게 위화감을 느끼지만, 얼마 안 가 자신들의 마음에 난 구멍을 따뜻하게 감싸주고 위로해주는 그에게서 이루 말할 수 없는 편안함과 힘을 얻습니다. 그러나 짧은 만남의 끝무렵엔 감당하기 어려운 충격에 빠지고 맙니다. 어쩌면 그가 ‘일가족을 살해한 18세 살인귀’일지도 모른다는 단서들을 직간접적으로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 사실을 믿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똑같은 의문을 품습니다. 그의 정체는 무엇일까?
“도피 중인 그를 만난 사람들은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온화한 인간성에 매료된다. 마음의 상처가 가벼워지고 어떻게든 살아갈 이유를 얻는다. 왜일까? 이 모든 게 가면의 괴물일까? 그는 왜 탈옥했을까? 아니 애초에 왜 사람을 죽였을까? 그의 정체는 무엇일까?”
출판사 소개글에 실린 위의 카피를 보면 가부라기의 캐릭터는 물론 그의 탈옥의 목적이 무엇인지 대략 짐작할 수 있습니다. 특히 (역시 출판사 소개글대로) 사건 당시 일가족 가운데 유일하게 살아남은 한 인물이 현재 노인 개호시설에 머무르고 있으며 가부라기가 ‘사쿠라이’라는 이름으로 그곳의 파트타이머가 됐다는 점은 이 작품의 주제가 ‘원죄(冤罪)’임을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게 해줍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가부라기가 어떻게 자신의 원죄를 입증하는가?”라는 미스터리 자체보다는 1년 반에 걸친 지난하고 고통스런 도주극 속에 그려진 휴먼드라마에 더 방점을 찍고 있습니다. 탈옥의 목적을 이룰 때까지 신분을 숨기고 경찰의 추적을 피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어쩔 수 없는 만남이긴 했지만 가부라기는 그와 인연을 맺은 사람들에게 진심을 다한 태도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뒤늦게 그의 정체를 알게 된 사람들은 그의 ‘진심을 다한 태도’ 때문에 이루 말할 수 없는 슬픔과 함께 풀리지 않는 의문에 휩싸이게 되는데, 이 작품은 바로 그 지점을 집요할 정도로 디테일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잔혹무도한 18세 사형수의 탈옥 미스터리’를 기대한 독자에겐 다소 심심하게 읽힐 수도 있는 작품이지만, 개인적으론 정갈하고 정성이 깃든 문장들과 인물 하나하나에 공을 들인 작가의 진심, 그리고 결코 요란하지 않게, 오히려 담담하면서도 진정성 있게 가부라기의 ‘정체와 목적’을 그려낸 점이 인상 깊게 남은 작품입니다.
유일하게 아쉬운 점은 가부라기가 만난 다섯 명의 소(小)주인공들의 개인사가 너무 장황하고 세밀하게 그려지다 보니 이야기의 규모에 비해 분량(632p)이 과도했다는 점인데, 가부라기와의 인연을 강조하기 위한 작가 나름의 설계라고는 해도 조금만 슬림하게 정리됐다면 모든 면에서 알찬 작품이 되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소메이 다메히토는 한국에 처음 소개된 작가인데다 문장과 구성이 너무 마음에 들어서 궁금증이 더 일었는데, 기회가 된다면 그의 데뷔작이자 ‘요코미조 세이시 미스터리 대상’ 우수상 작품인 ‘나쁜 여름’을 꼭 한 번 만나보고 싶어졌습니다. 또, 이 작품을 계기로 그의 다른 작품들이 한국 독자들에게 더 소개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반가운 일일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