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스트 차일드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13-1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13
존 하트 지음, 박산호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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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다운 리버’, ‘아이언 하우스’, ‘구원의 길등을 읽었지만 정작 존 하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라스트 차일드는 매번 읽어야지 하면서도 왠지 감당하기 어렵고 무거운 이야기일 것 같아 계속 뒤로 미뤄온 작품입니다. (가해자든 희생자든) 어린 소년이나 소녀의 비극이 가슴 한쪽에 무겁고 날카로운 바위를 끝없이 얹어놓는존 하트 특유의 문장들로 그려진다면 앞서 읽은 작품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씁쓸한 여운을 남길 게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예상은 조금도 빗나가지 않았습니다.

 

13살 소년 조니 메리멈의 세상은 1년 전 쌍둥이 여동생 앨리사가 유괴된 이후로 완전히 붕괴되고 말았습니다. 죄책감과 절망에 시달리던 아버지는 집을 나갔고 어머니는 사악한 부자에게 짓밟힌 끝에 약물중독자로 전락했습니다. 모든 희망이 사라져버린 조니에게 어느 날 기적 같은 일이 벌어집니다. 조니의 목전에서 끔찍한 사고를 당한 낯선 남자가 유괴된 여자아이를 찾았어.”라는 유언 같은 말을 남겼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마을에서 앨리사 또래의 소녀가 또다시 납치되는 사건이 벌어지자 조니는 그동안 자신이 주시해온 인근의 범죄자들의 동태를 직접 살펴보기로 결심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끔찍한 상황과 마주치게 됩니다.

 

사라진 여동생을 찾기 위한 조니의 여정은 성인조차 감당하기 쉽지 않은 위기와 공포로 가득합니다. 경찰마저 손을 놓은 상태에서 그동안 조니는 지도 한 장에 의지하여 인근의 주민들을 탐문해온 건 물론 위험천만한 성 범죄자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잠복까지 감행하며 조사해왔습니다. 그런 조니에게 유괴된 여자아이를 찾았어.”라는 낯선 남자의 한마디는 거대한 희망 그 자체였고 그 뒤로 조니의 행보는 경찰과 언론마저 놀라게 할 만큼 거침없이 전개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실은 조금도 가까워지지 않고 조니의 위기는 갈수록 임계점에 육박합니다. 더구나 어머니를 파멸로 몰아넣은 사악한 부자까지 상대해야 하는 상황이라 조니는 그야말로 몸과 마음 모두 만신창이가 되고 맙니다.

 

앨리사의 유괴가 붕괴시킨 또 하나의 가족은 아이러니하게도 경찰 가운데 유일하게 앨리사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고 있는 수사반장 헌트의 가족입니다. 앨리사 사건에 대한 그의 과도한 집착은 아내를 떠나게 만든데 이어 아들에겐 치유되기 어려운 증오심만 심어놓았습니다. 서장마저 노골적으로 해고를 운운하며 앨리사 사건에 대한 헌트의 집착을 저지하려 하는데, 문제는 이런 헌트의 노력이 좀처럼 조니에게 진심으로 전달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어쩌면 13살이란 나이보다는 악()에 너무 가까이 다가간 나머지 조니에겐 누군가의 진심을 알아챌 여유가 없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사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악()은 앨리사를 유괴한 범인만이 아닙니다. 조니의 발길이 닿는 곳마다 끔찍한 폭력과 살인이 펼쳐지고 과거의 참극들이 세상에 폭로됩니다. 그리고 그 배후에는 악 그 자체인 인간의 이기심과 사악함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13살 소년에겐 너무나도 가혹한 운명인 셈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작품 후반부에 거듭 등장하는 악은 인간의 마음에서 자라난 암과 같아.”라는 대사는 조니가 마주친 악의 실체를 한마디로 잘 압축한 문장이란 생각입니다. 제멋대로 자라나 사방에 죽음의 씨앗을 뿌려대지만 도무지 뿌리까지 잘라낼 수 없는 그 암적 존재 앞에서 인간이란 그저 무기력할 수밖에 없다는 비관적인 메시지라고 할까요?

 

이 작품에 대한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리는 지점은 논리적 설명이 불가능한 캐릭터인 탈옥수 레위 프리맨틀과 그가 조니와 맺는 다분히 신의 영역에 가까운 관계일 것입니다.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고 사악한 까마귀를 두려워하는 레위는 호러 스릴러에나 어울릴 것 같은 캐릭터지만 작가는 그를 현실의 사건 한복판에 배치시키고 조니와 거듭 만나게 만듭니다. 그저 운명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둘의 만남은 앨리사 찾기라는 메인 사건과는 무관한 별개의 에피소드처럼 시작되지만 뒤로 갈수록 진실을 향한 유일한 열쇠처럼 그려지기도 합니다. 물론 거기엔 또 다른 복선이 깔려있고 예상 못한 반전이 설치돼있긴 하지만, 취향에 따라 읽는 중에도 또 다 읽은 뒤에도 계속 고개를 갸웃거릴 독자가 적잖을 것으로 보입니다.

 

워낙 방대한 내용에 등장인물도 많아서 일일이 소개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작품이지만 두툼한 분량에도 불구하고 한 번에 마지막 장까지 달릴 수 있을 만큼 독자의 눈길을 사로잡는 이야기가 담겨있습니다. 독자마다 평가가 다소 극단적으로 갈리긴 해도 존 하트에 익숙한 독자라면 그만의 매력을 충분히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작품으로부터 10년이 흘러 23살의 청년이 된 조니의 이야기를 다룬 허쉬가 한국에도 얼마 전(20214)에 출간됐는데, 그동안 책장에 오래 방치했던 라스트 차일드를 서둘러 읽은 건 실은 허쉬에 대한 궁금증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존 하트의 작품은 연이어 읽기에는 너무나 부담스러운 게 사실이지만, 성인조차 쉽게 떨쳐내지 못할 트라우마를 겪은 13살 조니가 어떻게 성장해있을지, 또 이번에는 그에게 어떤 불행과 비극이 찾아들지 다분히 우려 섞인 기대감이 드는 것은 역시 피할 수 없는 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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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의 봄 가노 라이타 시리즈 1
후루타 덴 지음, 이연승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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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척 흥미로운 캐릭터의 주인공이 이끄는 미스터리 연작단편집입니다. 지금은 가미쿠라 역 앞 파출소의 다소 실없고 친절하고 수더분한 40대 순경 아저씨지만 실은 자백 전문 가노라는 별명으로 가나가와 현경 수사1과에서 맹활약하던 가노 라이타가 그 주인공인데, 그는 별명대로 단서나 증거보다 얼굴을 맞대고 나누는 대화를 통해 용의자 스스로 무너지게 만들거나 자백하게 하는 특별한 재주를 갖고 있습니다.

용의자 대부분은 가노의 허허실실 작전에 휘말려 자기도 모르게 진실과 거짓을 반복하다가 어느새 깊은 함정에 빠져버린 자신을 깨닫곤 크게 당황합니다. 가노는 용의자의 표정 하나, 땀방울 하나를 통해 진술의 허점을 파악하면서 조금씩 코너로 몰아가다가 결정적인 한 방으로 그()를 무너뜨립니다.

 

주인공의 캐릭터가 이렇다 보니 수록작 모두 처음부터 범인이 공개되는 것은 물론 시점 자체도 범인 입장에서 전개되고 마지막 마무리 정도만 가노가 맡는 형식을 띄고 있습니다. 이른바 도치서술 추리, 도서(倒敍)추리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런 형식은 사실 작가에겐 무척이나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는 게 주인공이 워낙 뛰어나야 하는 것은 물론 이미 독자가 범인을 알고 있는 상태에서 막판을 장식할 또 하나의 반전까지 마련해야 되기 때문입니다.

이른바 당신은 반드시 다섯 번 속게 된다!”는 홍보카피는 이 작품이 도서추리의 모든 난관을 극복한 매력적인 미스터리라는 점을 대놓고 자랑하는 셈인데, 개인적으론 다섯 편의 수록작 중 두 편만큼은 확실히 이 홍보카피에 어울리는 수작이라는 생각입니다.

 

스스로 소아성애자라는 강박에 휩싸인 청년이 실제로 소녀를 납치-감금했다가 생각지도 못한 곤란에 빠진 뒤 가노에게 진상을 들키고 마는 첫 수록작 봉인된 빨강과 젊은 날의 상처 때문에 평생 외롭게 살면서 보이스 피싱과 노인 상대 사기행각을 벌여온 60대 여성이 끝내 비극적인 엔딩을 맞이하는 표제작 거짓의 봄은 가장 눈에 띄는 작품이었는데, 우연히도 작가들스스로 꼽은 최고의 작품이기도 해서 많은 독자들 역시 비슷한 생각을 할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호평에 비해 평점이 좀 야박한 건 나머지 수록작들이 다소 아쉬웠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수록작만으로도 충분히 읽을 만한 매력이 있는 작품이란 생각입니다.)

 

위에서 작가들이라는 표현을 쓴 이유는 후루타 덴80년대 생 여성 콤비 작가 하기노 에이와 아유카와 소의 공동 필명이기 때문입니다. 각각 플롯과 집필을 분담하고 있다는데 작가 소개글을 보니 이미 2014년부터 화제작을 내온 터라 2021년에 와서야 한국에 처음 소개된 사실이 의아할 정도였습니다. (사실 일본의 엘러리 퀸이라는 띠지 카피를 봤을 때는 콤비 작가라는 점보다 노회한 베테랑이 먼저 떠올라 내가 모르는 엘러리 퀸 급 작가가 있었나?”라는 의문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한때 자백 전문 가노라는 별명을 얻을 만큼 용의자 심문의 달인이었던 가노 라이타가 왜 역전 파출소의 사람 좋아 보이는 허허실실 순경 아저씨가 됐는지는 마지막 두 수록작에서 연이어 밝혀지는데, 그런 덕분에 가노의 활약을 계속 지켜볼 수 있으면 좋겠다는 기대감이 들기도 했습니다.

다행히도 일본에서 아침과 저녁의 범죄라는 후속작이 연재 중이라는데 더 기대가 되는 건 장편이란 점입니다. 이 작품의 경우 아무래도 단편집인데다 범인의 시점으로 전개되는 분량이 더 많다 보니 가노의 활약상이 덜 보인 게 아쉬웠는데, 장편이라면 그런 아쉬움을 모두 잊게 해줄 것 같기 때문입니다. 일본에서의 연재가 마무리 되는대로 한국에도 바로 후속작 소식이 들려오기를 기대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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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
소메이 다메히토 지음, 정혜원 옮김 / 몽실북스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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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부부와 두 살배기 아이까지 살해한 죄로 사형을 선고받은 가부라기 게이치가 구치소에서 탈옥한 뉴스는 일본 전역을 충격에 빠뜨립니다. 범행 당시 18세였음을 감안하더라도 잔인한 수법과 영아까지 살해한 엽기성 때문에 사형을 선고받았지만 가부라기는 최후 법정에서 무죄를 주장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얼마 안 가 매우 지능적이고 계획적인 방법으로 탈옥을 감행했습니다. 이후 1년 반 가까이 가부라기는 자신이 탈옥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외모와 이름을 바꿔가며 곳곳에 출몰합니다. 과연 그의 목적은 무엇이며, 그의 진짜 정체는 무엇일까요?

 

탈옥 후 가부라기는 공사장 인부, 미디어회사의 재택 기자, 전통여관 상주 알바, 빵 공장 파트타이머, 그리고 노인 개호시설 파트타이머로 변신하며 여러 사람들과 인연을 맺습니다. 비교적 초반부에 그가 모종의 목적을 갖고 누군가의 소재와 근황을 알아내려 한다는 게 밝혀지긴 하지만, 그렇다고 가부라기가 신분을 감춘 스파이같은 행보를 보이는 건 아닙니다. 오히려 탈옥한 도망자답게 사람들 눈에 덜 띄는 장소로 숨어들어 은둔의 시간을 보내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짧지만 강렬한 인상을 남겨놓습니다.

 

가부라기와 인연을 맺은 인물들은 하나 같이 마음에 구멍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고향에서 쫓겨나 공사장 인부가 된 청년, 오랜 불륜의 상처에 아파하는 30대 커리어 우먼, 성추행범이란 누명을 쓴 끝에 사회적으로 매장당한 변호사, 가족에게 끊임없이 상처받아온 중년의 주부, 그리고 첫 사회진출에서 쓴맛을 본 뒤 노인 요양보호사가 된 19살 여성이 그들입니다.

각 챕터마다 소()주인공 역할을 맡은 그들은 처음엔 정체가 애매한 가부라기에게 위화감을 느끼지만, 얼마 안 가 자신들의 마음에 난 구멍을 따뜻하게 감싸주고 위로해주는 그에게서 이루 말할 수 없는 편안함과 힘을 얻습니다. 그러나 짧은 만남의 끝무렵엔 감당하기 어려운 충격에 빠지고 맙니다. 어쩌면 그가 일가족을 살해한 18세 살인귀일지도 모른다는 단서들을 직간접적으로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 사실을 믿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똑같은 의문을 품습니다. 그의 정체는 무엇일까?

 

도피 중인 그를 만난 사람들은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온화한 인간성에 매료된다. 마음의 상처가 가벼워지고 어떻게든 살아갈 이유를 얻는다. 왜일까? 이 모든 게 가면의 괴물일까? 그는 왜 탈옥했을까? 아니 애초에 왜 사람을 죽였을까? 그의 정체는 무엇일까?”

 

출판사 소개글에 실린 위의 카피를 보면 가부라기의 캐릭터는 물론 그의 탈옥의 목적이 무엇인지 대략 짐작할 수 있습니다. 특히 (역시 출판사 소개글대로) 사건 당시 일가족 가운데 유일하게 살아남은 한 인물이 현재 노인 개호시설에 머무르고 있으며 가부라기가 사쿠라이라는 이름으로 그곳의 파트타이머가 됐다는 점은 이 작품의 주제가 원죄(冤罪)’임을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게 해줍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가부라기가 어떻게 자신의 원죄를 입증하는가?”라는 미스터리 자체보다는 1년 반에 걸친 지난하고 고통스런 도주극 속에 그려진 휴먼드라마에 더 방점을 찍고 있습니다. 탈옥의 목적을 이룰 때까지 신분을 숨기고 경찰의 추적을 피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어쩔 수 없는 만남이긴 했지만 가부라기는 그와 인연을 맺은 사람들에게 진심을 다한 태도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뒤늦게 그의 정체를 알게 된 사람들은 그의 진심을 다한 태도때문에 이루 말할 수 없는 슬픔과 함께 풀리지 않는 의문에 휩싸이게 되는데, 이 작품은 바로 그 지점을 집요할 정도로 디테일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잔혹무도한 18세 사형수의 탈옥 미스터리를 기대한 독자에겐 다소 심심하게 읽힐 수도 있는 작품이지만, 개인적으론 정갈하고 정성이 깃든 문장들과 인물 하나하나에 공을 들인 작가의 진심, 그리고 결코 요란하지 않게, 오히려 담담하면서도 진정성 있게 가부라기의 정체와 목적을 그려낸 점이 인상 깊게 남은 작품입니다.

유일하게 아쉬운 점은 가부라기가 만난 다섯 명의 소()주인공들의 개인사가 너무 장황하고 세밀하게 그려지다 보니 이야기의 규모에 비해 분량(632p)이 과도했다는 점인데, 가부라기와의 인연을 강조하기 위한 작가 나름의 설계라고는 해도 조금만 슬림하게 정리됐다면 모든 면에서 알찬 작품이 되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소메이 다메히토는 한국에 처음 소개된 작가인데다 문장과 구성이 너무 마음에 들어서 궁금증이 더 일었는데, 기회가 된다면 그의 데뷔작이자 요코미조 세이시 미스터리 대상우수상 작품인 나쁜 여름을 꼭 한 번 만나보고 싶어졌습니다. , 이 작품을 계기로 그의 다른 작품들이 한국 독자들에게 더 소개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반가운 일일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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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리 들판에서
리스 보엔 지음, 정서진 옮김 / 피니스아프리카에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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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공습에 이어 독일군의 본토 공격이 임박했다는 소식에 영국 전역이 공포에 사로잡혀 있던 1941. 런던 근교 켄트의 대저택 팔리 플레이스의 웨스트햄 백작 가문은 하늘에서 떨어진 난데없는 의문의 시체 때문에 혼란에 빠집니다. 일련의 조사 끝에 모종의 목적을 갖고 침투하려던 독일 스파이라는 의혹이 제기됐기 때문입니다.

어릴 때부터 웨스트햄 백작의 3녀인 패멀라를 흠모해온 MI5(영국 정보국) 요원 벤 크로스웰은 상부로부터 이 수상한 시체가 접선하려던 자가 누군지 비밀리에 조사하라는 지시를 받습니다. 한편 암호해독 기관에서 근무하는 패멀라는 우여곡절 끝에 고향에 내려와 벤 크로스웰의 조사에 동참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스파이의 정체와 목적을 알아내곤 큰 충격에 빠집니다.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영국을 배경으로 한 독특한 역사 미스터리 첩보물입니다. 간단하게 요약하면 팔리 저택과 인근에 거주하는 인물들 가운데 스파이와 접선하려던 자, 즉 나치 독일에 협조하는 배신자를 찾아내는 이야기인데, 재미있는 건 딱딱하고 무거운 첩보물이 아니라 종합선물세트같은 다양한 장르의 재미를 만끽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전쟁과 스파이가 전면에 포진돼있지만 달달한 로맨스와 함께 전쟁으로 인해 억압받은 청춘들의 들끓는 욕망도 적잖은 분량과 비중으로 그려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백작의 3녀 패멀라를 오래 전부터 흠모해온 벤은 그녀의 마음이 온통 자신의 절친인 제레미에게만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합니다. 전쟁은 세 남녀를 각각 정보국(), 암호해독 기관(패멀라), 전쟁터(제레미)로 흩어놓았는데, 공교롭게도 같은 시기에 팔리 플레이스로 돌아오는 운명을 맞이합니다. 벤은 독일 스파이와 접선하려던 배신자를 찾기 위해, 패멀라는 연이은 야근에 시달린 뒤 반강제로 받은 휴가 때문에, 그리고 제레미는 독일군 포로가 됐다가 기적적으로 탈출에 성공하면서 다시금 한 자리에 모이게 된 것입니다.

 

주인공이지만 슈퍼 히어로가 아닌 탓에 벤의 미션은 다소 지루하고 답답한 행보를 보이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짝사랑하는 패멀러의 도움으로 결정적인 단서를 포착해냅니다. 그 와중에도 벤은 눈앞에서 제레미와 패멀러의 다정한 모습을 지켜봐야 하는 고통을 겪는데 이 대목은 전쟁과 스파이의 공포를 잊게 만들 정도로 달달하게 전개됩니다. 특히 귀환한 제레미가 사랑보다 자신의 육체에만 관심을 갖자 실망과 회의를 느끼는 패멀라의 불안한 심리라든가 파티와 여자만 즐기려는 타고난 금수저 한량인 제레미의 폭주는 배신자 찾기못잖게 삼각 로맨스가 어떤 엔딩을 맞이하게 될지 궁금하게 만드는 매력적인 대목입니다.

 

배신자 찾기삼각 로맨스만큼이나 눈길을 끌었던 건 욕구를 배출하지 못해 폭발 직전에 이른 당시 청춘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사교계에 진출해 멋진 남자를 만나려던 명문가의 딸들은 모든 걸 금지시킨 전쟁을 원망했고, 자유연애와 방종한 성()에 눈이 벌개졌던 남자들은 언제 죽을지 모를 전쟁터로 끌려 나가야만 했습니다. 억압된 욕구는 때론 독일군의 공습이 이뤄지는 한밤중에 옥상에서 위험천만한 샴페인 파티를 벌이게끔 만들기도 합니다. 왜 하필 이런 세상에 태어났을까, 라는 한숨과 자조가 생생하게 귀에 들리는 듯한 당시 청춘들에 대한 묘사는 이 작품의 또 다른 매력이라는 생각입니다.

 

스릴 넘치는 전쟁첩보물을 기대한 독자라면 다소 밋밋하게 읽힐 수도 있겠지만, 개인적으론 여러 장르가 재치 있게 믹스된 특별한 맛을 느낄 수 있어서 무척 인상적인 작품이었습니다. 리스 보엔은 다수의 미스터리 시리즈를 집필한 작가라고 하는데, 검색해보니 한국에는 1930년대 영국을 배경으로 한 탐정 레이디 조지애나’(2012, 문학동네) 단 한 편만 출간된 상태입니다. “정의감으로 똘똘 뭉친 조지애나가 왕족 신분을 벗어던지고 탐정으로 거듭나는 코지 미스터리라는데, 딱히 제 취향은 아니지만 시대 배경도 호기심을 끌고 왠지 팔리 들판에서처럼 매력적인 캐릭터와 이야기가 펼쳐질 것 같아 기회가 된다면 읽어보고 싶은 생각입니다.

 

사족으로... 다른 독자의 서평에서도 언급된 내용인데, 꽤 자주 등장하는 이크!”라는 감탄사가 눈에 거슬린 게 사실입니다. 때론 분위기를 확 깨뜨리기도 했는데 다른 적절한 표현이 없었을지 궁금합니다. ‘MI5’‘MI파이브가 혼재된 건 교정의 오류로 보였고, ‘5로 표기됐더라면 좀더 이해하기 쉬웠을 제오열내부의 적을 상징한다.”는 간단한 각주나 설명조차 없어서 처음 이 단어를 접하는 독자는 다소 어리둥절했을 거란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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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방에 킬러가 산다
나카야마 시치리 지음, 최재호 옮김 / 북플라자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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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장 기숙사에 사는 코타리 토모야는 새벽마다 옆방에서 들려오는 기괴한 소리에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더구나 그 소리가 마치 칼이나 톱 따위로 시체를 자르는 것처럼 들리자 공포에 휩싸입니다. 때마침 인근에서 토막 난 여성들의 사체가 연이어 발견되자 코타리는 옆방에 사는 기분 나쁜 인상의 중국인 노동자에 대한 의심을 굳히게 되고, 급기야 새벽녘 그를 미행하기에 이릅니다. 실제로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한 코타리는 그대로 얼어붙지만 자신의 과거가 드러날까 두려워 경찰에 신고도 못한 채 전전긍긍할 따름입니다.

 

17번째로 만난 나카야마 시치리의 작품입니다. 한국 출간작이 26편인데 미사키 요스케 시리즈’, ‘시즈카 할머니 시리즈’, ‘법의학교실 시리즈를 제외하곤 스탠드얼론까지 모두 읽은 셈입니다. 같은 작가의 작품을 과하게 읽다 보면 피로도가 높아지기 마련이라 그의 작품을 좀 쉬엄쉬엄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매번 신간이 나오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게 사실인데, 분량(348p)도 얼마 안 되고 제목이나 표지로 보아 가볍게 읽을 수 있을 것 같아 이번에도 결국 그의 마력에 굴복하고 말았습니다.

 

나카야마 시치리의 작품은 (매번 만점을 줄 수는 없었지만) 나름 신선하고 충격적인 막판 반전이 매력적이었던 탓에 주인공이 일찌감치 이웃의 연쇄살인마를 인지해버린 이 작품의 경우 남은 분량을 어떤 이야기들로 채워갈지 무척 궁금해졌습니다. 직접 범죄현장을 목격한 코타리가 공포에 휩싸이는 것 말곤 딱히 할 일이 없어 보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작가는 코타리를 위해 두 가지 큰 설정을 준비합니다. 하나는 그 누구에게도 밝힐 수 없는 코타리의 비밀스런 과거이고, 또 하나는 연애라고까진 할 수 없어도 코타리가 소중히 여기며 만남을 이어가고 있는 사내 동료 베츠미야 사호리입니다.

감춰야만 하는 과거 때문에 경찰과의 만남을 두려워한 코타리는 익명의 신고 외엔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지만 경찰의 심문까지 피하진 못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오히려 경찰의 의심을 사게 되면서 코타리의 공포는 점점 더 극심해지고 맙니다. 더구나 자신의 의심을 눈치 챈 듯한 이웃남자가 어쩌면 자신이 아끼는 사호리를 노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빠진 코타리는 단독으로 사호리를 경호하기로 결심하지만 일은 그의 뜻대로 풀리지 않습니다.

 

이웃의 연쇄살인마에 대한 공포 외에 코타리에게 부여된 감춰야 할 과거지켜야 할 연인이란 두 가지 설정 덕분에 이야기는 꽤 촘촘하고 찰지게 전개됩니다. 또 나카야마 시치리의 트레이드마크인 막판 반전을 감안하면 이웃의 연쇄살인마 외에 분명 누군가 독자의 뒤통수를 칠 의외의 인물이 있을 게 분명하기에 그 인물을 찾으며 페이지를 넘기는 재미도 꽤 흥미로웠습니다.

다만, 나카야마 시치리의 작품답지 않게 중후반부쯤 진범의 정체와 범행동기를 어렴풋이 예상할 수 있었고, 그 예상대로 흘러간 엔딩은 다소 작위적인 느낌을 준 건 사실이지만 작품 자체가 가벼워 보여서 그랬는지 크게 위화감이 들거나 불만족스럽진 않았습니다.

하지만, 미스터리 자체만 보면 중편이면 충분했을 이야기를 장편으로 늘린 부작용이 곳곳에서 보여서 살짝 지루해지기도 했는데, 과도하게 부풀려진 사족들(코타리의 과거, 경찰을 비롯한 조연들의 역할 등)이라든가 비슷한 상황의 동어반복이 가장 큰 이유였습니다.

 

출판사에 대한 불만을 한두 가지만 언급하고 싶은데, 최소한의 교정조차 안 한 것 같은 숱한 줄 바꾸기 오류는 한숨이 나올 지경이었고, 인터넷 서점에 원작 제목(はシリアルキラー)과 일본 출간시점(2020)을 소개하지 않은 건 무성의해 보였습니다. , 오프라인 서점에서라면 집어 드는 것 자체가 주저될 것 같은 유치한 표지는 차라리 원작 표지를 그대로 갖고 오는 게 나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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