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온한 잠 - 살인곰 서점의 사건파일 하무라 아키라 시리즈
와카타케 나나미 지음, 문승준 옮김 / 내친구의서재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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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력적인 폭주 여탐정하무라 아키라의 활약을 담은 네 편의 단편이 수록된 작품입니다. 2020년에 출간된 이별의 수법을 통해 하무라 아키라의 팬이 됐는데, 아직 못 읽은 작품이 대부분이지만 기다리던 신간이 308페이지에 불과한 단편집이라 아쉬움이 꽤 컸습니다. 500페이지가 넘는 이별의 수법을 순식간에 읽어냈던 걸 기억하면 300여 페이지는 그저 아쉽기만 한 분량이기 때문입니다.

 

하무라 아키라는 기치조지 주택가에 있는 미스터리 전문서점 살인곰 서점의 아르바이트 점원이자, 이 서점이 거의 장난삼아 시작한 백곰 탐정사에 소속된 유일한 탐정입니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서점 2층 한쪽에 주거 공간 겸 탐정사무실을 얻어 겨우겨우 노숙을 면한 하무라는 자신의 표현대로 불혹의 나이가 넘어 언덕길을 구르는 것처럼 나이를 먹어가고있지만 박봉과 고된 업무는 물론 사람을 험하게 부리는 서점 오너 도야마의 개인적인 심부름까지 떠맡은 탓에 늘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입에 풀칠이라도 하기 위해 대형 탐정사 도토종합리서치의 지인 사쿠라이 하지메로부터 이런저런 일거리를 제공받지만 보수도 얄팍하고 하찮아 보이는 의뢰들이 대부분인데, 문제는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탐정이란 그녀의 별명답게 처음엔 별 것 아니게 보이던 사건들이 어느 하나 쉽고 곱게 끝나는 법이 없다는 점입니다.

 

네 편의 수록작에서 하무라가 받은 의뢰들은 교도소에서 출소하는 수양딸을 집까지 데려다 달라는 것, 갑자기 소식이 끊긴 연인의 흔적을 찾아달라는 것, 세상을 떠난 지인을 소중히 여긴 그 누군가를 찾아달라는 것 등 대부분 심부름센터나 흥신소 수준에 불과하지만, 그 의뢰들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더럽고 탁한 연못에서 익사할 뻔하거나, 청소기 코드에 목이 졸리거나 식칼로 찔릴 뻔하거나 심지어 차에 탄 채 산사태에 휘말리는 등 그야말로 목숨을 건 악전고투들을 겪게 돼서 독자 입장에선 그저 한숨과 연민만 느껴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무라의 매력적인 캐릭터는 말할 것도 없고, 와카타케 나나미의 속사포 같은 문장과 전개는 이별의 수법과 마찬가지로 읽는 내내 독자의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군더더기나 사족 하나 없이 돌직구처럼 날아가는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살코기만 가득한 뻑뻑함은 전혀 느껴지지 않습니다. 적절한 완급 조절과 적재적소의 블랙 유머 덕분에 엄청난 속도감과 숨 막히는 긴장감 속에서도 피식피식 웃으며 페이지를 넘길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인지 다소 아쉬움이 느껴진 것도 사실인데, 중편이나 장편에 어울리는 방대한 설정 때문에 다소 복잡하고 이해하기 어려웠던 수록작이 많았던 게 가장 큰 이유입니다. 교도소에서 출소한 의뢰인의 수양딸을 에스코트하는 과정에서 생각지도 못한 사건에 휘말리는 이야기를 다룬 첫 수록작 거품 속의 나날을 제외하곤 대부분 사건 자체도, 해결 과정도 명료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표제작인 불온한 잠은 단편 속에 욱여넣기에는 인물관계도 많이 복잡했고 핵심인물의 과거사도 이리저리 꼬여있어서 아쉬움이 많이 남았습니다. 유령이 나타난다는 소문이 도는 해체 직전의 빌딩이 주 무대인 새해의 미궁과 사라진 희귀도서의 행방을 찾다가 그 희귀도서에 집착하는 여러 인물들의 비하인드 스토리가 드러나는 과정을 그린 도망친 철도 안내서도 소재나 사건에 비해 등장인물이 너무 많고 사건 배경은 엄청 복잡합니다. 반면, 이야기의 속도감은 숨이 가쁠 정도로 대단한데, 정작 그것들을 뒷받침해줄 친절한 설명이 부족해서 정신없이 페이지를 넘기면서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 사실입니다.

 

일본 코지 미스터리의 여왕’, ‘여성 하드보일드 소설의 진수와 함께 와카타케 나나미를 지칭하는 또 하나의 별칭은 단편의 여왕입니다. 이 작품 속의 네 편의 수록작은 사실 찬찬히 뜯어보면 그 별명이 괜한 것이 아님을 깨닫게 만들 만한 수작들인 게 분명하지만 개인적으론 와카타케 나나미의 속사포 같은 문장들 때문에 도저히 찬찬히 뜯어볼 마음의 여유를 갖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이 빠르고 복잡한 단편들을 차분하고 꼼꼼하게 다시 읽어보고 싶은데, 그때라면 단편의 여왕의 진수를 조금은 더 제대로 맛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무라 아키라가 등장하는 와카타케 나나미의 작품은 모두 여덟 편입니다. ‘나쁜 토끼를 제외하곤 한국에 모두 소개됐는데, 조만간 절판된 작품들까지 포함하여 순서대로 하무라 아키라 시리즈를 마스터하고 싶은 욕심입니다. 특히 13년의 공백(2001'나쁜 토끼' 이후 출간된 작품이 2014'이별의 수법')을 사이에 둔 20~30대와 40대의 하무라 아키라가 각각 어떤 모습들일지 비교해보는 것도 무척이나 흥미로운 일일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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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발된 여자 케이스릴러
김영주 지음 / 고즈넉이엔티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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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지도 못한 임신을 확인한 날, 수완은 무대에 오를 날만 고대하며 버텨오던 극단에서 잘린 것은 물론 남자친구에게 전셋집 보증금을 사기 당한다. 하루아침에 빈털터리가 된 수완 앞에 재벌가 며느리 경진이 나타나 놀라운 제안을 한다. “다시 행복하게 살게 해 줄게요. 대신 죽은 내 여동생 남경으로 살아줘요.” 고민 끝에 제안을 받아들인 수완은 남경으로 변신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인다. 하지만 수완은 곧 경진의 요구 이면에 감춰진 비밀이 있음을 감지한다. 그리고 계속해서 밝혀지는 충격적인 경진의 계획. 수완은 이 연극에서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을까?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자신의 삶을 버리고 다른 누군가로 살아갈 것을 결심한 주인공의 이야기는 꽤 오래 전부터 자주 이용되던 설정이긴 하지만 그래도 매번 독자(혹은 관객)의 관심을 끌어 모으는 매력적인 설정이기도 합니다. 거짓 가면을 쓴 채 유유히 타인의 인생을 살아가는 주인공의 행보도 흥미롭고, 언제 그 가면이 벗겨질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켜봐야 하는 스릴 넘치는 긴장감도 좀처럼 외면하기 힘든 관심거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기대감으로 만난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꽤 야박한 평점을 준 이유는 좀 심하게 말하면 장르를 종잡을 수 없는 갈팡질팡 캐릭터와 스토리때문입니다. (스포일러가 될 여지가 많아서 자세한 내용 언급이 어렵다 보니 이 작품을 안 읽은 독자에겐 다소 두루뭉술한 서평이 될 수 있습니다.)

 

수완이 잠시의 갈등과 저항 끝에 경진의 요구를 받아들이기로 결심하는 초반부까지만 해도 과연 언제까지 수완이 거짓 가면을 쓰고 남경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가 이 작품의 기둥 이야기로 보였고, 덕분에 기대감과 함께 흥미진진하게 페이지를 넘길 수 있었습니다. 특히 남경은 이미 죽은 인물이라 어느 날 갑자기 진짜가 짠~ 하고 나타날 일도 없으니 수완의 새 인생은 그만큼 더 강렬하고 짜릿한 롤러코스터를 탈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하지만 수완이 미처 새 인생을 시작하기도 전에 이야기는 전혀 다른 톤으로 전개되기 시작합니다. 중반부터 경진과 그녀의 남편을 둘러싼 (현재와 과거에 걸친) 불륜, 욕망, 시기, 질투가 전면에 포진되더니 이내 살인과 납치 등 서스펜스 스릴러가 이야기를 지배합니다. 그 과정에서 주인공인 수완 대신 경진이 주연 자리를 차지하면서 가짜 인생을 살게 된 수완의 이야기라는 당초의 설정을 무색하게 만들었는데, 그래서인지 지금 무슨 이야기를 읽고 있는 거지?”라는 의문까지 갖게 됐습니다.

무엇보다 현실감이 결여되거나 안이하게 설정된 대목과 인물들이 너무 많았고 그저 이야기를 크고, 세고, 독하게 확대시키는 데만 열중한 듯한 작가의 과욕이 여러 차례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었습니다. 주인공에게 가짜 인생을 부여해놓곤 정작 중요한 사건은 그와는 별로 연관 없는 딴 이야기로 몰아간 느낌이랄까요? 앞서 언급한 장르를 종잡을 수 없는 갈팡질팡 캐릭터와 스토리라는 지적은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 작품의 결정적인 출발점은 왜 경진은 수완을 콕 찝어 죽은 동생 역할을 하게 만들었나?”인데, 너무 빨리 읽었거나 명백히 잘못 읽은 탓일 수도 있지만, 마지막 장을 덮을 때까지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게 사실입니다. 수완이 남경과 닮았기 때문에? 단지 비슷한 또래라서? 뭔가 풍기는 분위기가 비슷해서? 그 어느 것도 정답이 아닌 것 같지만 그렇다고 해서 달리 떠오르는 동기도 없습니다. 중반 이후 경진이 가장 집착한 부분은 수완의 임신혹은 눈엣가시 같은 자들을 제거하고 자신만의 영역을 공고히 하려는 욕망인데, 이 두 가지 모두 왜 남경의 대체인물이 필요했는가? 또 그것이 반드시 수완이어야만 했던 이유는 뭔가?”에 대한 답을 제공하지 못합니다. 작가는 여러 차례에 걸쳐 경진이 필요에 의해 수완을 이용했다.”라고 묘사하는데, 필요가 뭔지는 지금도 여전히 미지수입니다.

 

매력적인 출발을 보인 초반부 전개와 수완의 캐릭터에 비해 엉뚱한 방향으로 확장돼버린 뜬금없는 서스펜스 스릴러는 너무 아쉬운 대목이었습니다. 만만치 않아 보인 작가의 필력 때문에 아쉬움이 배가된 게 사실인데, 이야기의 볼륨감을 위해 억지로 갖다 붙인 듯한 크고, 세고, 독한 설정들대신 가짜 인생을 살게 된 수완에게 집중한 간결하고 선명한 설계에 충실했더라면 훨씬 더 완성도 높은 작품이 나올 수 있었다는, 제 나름의 확신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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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의 여백
아시자와 요 지음, 김은모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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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도는 먼저 떠난 아내의 몫까지 정성을 다해 홀로 딸 가나를 키운다. 하지만 목숨과도 같았던 딸이 교실 난간에서 추락하던 그날, 안도의 세상도 함께 무너졌다. 유서조차 남기지 않고 떠난 딸의 죽음을 믿을 수 없어 괴로워하던 안도 앞에 딸의 친구라는 소녀가 찾아오면서 상황은 급반전 된다. 과연 가나의 죽음은 자살인가 타살인가? 분노와 증오에 휩싸인 채 서서히 밝혀지는 가나의 죽음의 진실 앞에서 안도는 돌이킬 수 없는 결심을 하는데...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지독한 따돌림이나 폭력을 통한 괴롭힘, 그리고 그로 인해 벌어지는 자살 혹은 살인 등 학교폭력을 소재로 한 이야기는 좀처럼 읽을 생각이 들지 않는 장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 이유, 가령 픽션을 통해서라도 끔찍한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는 의무감, 또는 어린 나이라고 해도 함부로 용서받아선 안 될 가해자들이 제대로 벌 받고 응징되는 엔딩의 쾌감 같은 것 때문에 자꾸만 눈길이 가는 것 역시 사실입니다.

 

죄의 여백은 학교폭력을 소재로 한 전형적인 미스터리이자 복수극이지만 그에 못잖게 악의 혹은 반성의 의미를 심도 있게 그린 작품이기도 합니다. 그래서인지 분량이나 비중 면에서 미스터리와 복수극이란 서사보다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유족)의 내면과 심리가 더 무게감 있게 그려지고 있습니다. 자책과 자괴감에 휩싸인 채 절망의 밑바닥을 헤매던 아버지 안도가 복수와 용서와 반성 사이에서 고뇌하는 대목이라든가 가해자인 두 소녀가 두려움과 공포의 순간을 지나 자기합리화와 은폐를 결심하기까지 겪는 요동치는 심리를 그린 대목들이 오히려 이야기의 중심에 놓여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반성하면 용서가 될까? 반성을 면죄부로 여기는 사람들, 거기에도 악의는 존재하지 않을까? 죄와 벌, 그 사이에는 이름 붙일 수 없는 죄의 여백이 존재한다.”라는 출판사 소개글은 이 작품만의 특별함을 잘 대변하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후반부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펼쳐지는 안도의 복수극은 독자에게 기대와 우려를 동시에 갖게 만듭니다. 복수가 성공한다면 통쾌하긴 하겠지만 그것이 안도에게 과연 안식과 만족과 평화를 주게 될까, 라는 우려 섞인 의문이 들 수밖에 없기 때문인데, 작가는 몇 차례의 반전을 통해 어느 정도는 타협적인, 또 어느 정도는 예상을 뛰어넘는다고 할 수 있는 특별한 엔딩을 내놓습니다. 이 엔딩에 대해서는 다소 의견이 엇갈릴 수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좀더 폭발력 있는 엔딩을 기대했던 탓에 살짝 아쉽게 느껴진 게 사실이긴 합니다.

 

주인공들만큼 눈길을 끄는 조연은 안도의 동료인 심리학 교수 오자와 사나에입니다. 타인의 심리에 잘 공감하지 못하고 사회성이 떨어져 대인관계에 문제가 있는 사나에는 쉽게 얘기하면 진담과 농담과 돌려 말하기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상대방의 감정을 읽는데도 서투른 인물입니다. 재미있는 건 사나에는 애초 초고에는 없던 인물이란 점입니다.

하지만 작가는 사나에를 투입하면서 결말이 크게 바뀌었고 안도와 소녀들의 팽팽한 긴장감에 완급을 줄 수 있었다.”라고 언급했고, 번역자는 사나에를 쓸모 있는 곁가지라고 칭하며 공감 능력과 배려심이 뛰어난 척하지만 인간성이 최하인 가해자와 대비된다.”라고 설명합니다. 실제로 사나에 덕분에 시종 팽팽하고 숨 쉴 틈 없을 뻔한 이야기가 나름 굴곡과 완급을 지닐 수 있었는데, 이런 인물을 주인공으로 한 시리즈가 나온다면 그것도 꽤 매력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아시자와 요는 미쓰다 신조의 작가 시리즈를 떠올리게 만드는 독특한 연작 괴담집 아니 땐 굴뚝에 연기는을 통해 최근 알게 된 작가인데, 처음 만난 작품의 인상이 워낙 강렬했던 탓인지 그가 학교폭력을 다룬 작품을 집필했다는 점 자체가 놀랍기도 하고 흥미롭기도 했습니다. 소재의 스펙트럼도 넓고 이야기를 끌고 가는 힘이나 개성도 강한 작가라 앞으로 한국에 자주 소개될 것 같은데 다음엔 어떤 특별한 이야기로 만나게 될지 사뭇 기대감이 앞섭니다.

 

사족으로...

최근 몽실북스 포스트에서 학교가 지옥이 되어버린 소설 Best 5’라는 흥미로운 글을 발견했는데, 이 작품을 포함하여 풀꽃도 꽃이다’(조정래), ‘파멸일기’(윤자영), ‘악의 교전’(기시 유스케), ‘이웃이 같은 사람들’(김재희)이 언급됐습니다.

동의하는 작품도 있고 그렇지 않은 작품도 있는데, 덕분에 그동안 읽은 작품들 가운데 제 나름대로의 학교가 지옥이 되어버린 소설 Best 5’를 꼽아봤습니다.

 

1. ‘그리고 숙청의 문을’ (구로타케 요)

2. ‘고백’ (미나토 가나에)

3. ‘어나더’ (아야츠지 유키토)

4. ‘침묵의 교실’ (오리하라 이치)

5. ‘솔로몬의 위증’ (미야베 미유키)

 

지옥의 강도가 강렬한 순서로 꼽은 리스트인데, 사실 솔로몬의 위증지옥이 된 학교라고 하기엔 좀 애매하긴 합니다. 그렇다면 그 자리를 대신할 만한 작품으론 기시 유스케의 악의 교전이나 오쿠다 히데오의 침묵의 거리에서정도를 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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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아이들 - 인기 웹드라마 〈은비적각락〉 원작소설
쯔진천 지음, 서성애 옮김 / 리플레이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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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 천재이자 전교 수석을 달리는 닝보시 중학교 2학년 주차오양은 난데없이 자신을 찾아온 초등학교 동창 딩하오와 그의 의남매 푸푸 때문에 한순간에 인생이 뒤틀어지고 맙니다. 그들과 함께 지내는 동안 우연히 끔찍한 살인 장면을 녹화하게 된 것은 물론 직접 살인에 개입하는 참사까지 겪게 됐기 때문입니다. 주차오양은 한편으론 동영상 속 살인범과 위험천만한 거래를 벌이면서 다른 한편으론 자신이 개입한 살인사건을 은폐하기 위해 골몰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소심하고 겁 많던 14살 소년 주차오양의 눈빛은 그 어떤 살인마와도 비견될 정도로 냉혹하고 잔인하게 변해갑니다.

 

쯔진천의 작품들 가운데 무증거범죄’, ‘나쁜 아이들’, ‘동트기 힘든 긴 밤은 일명 추리의 왕(推理之王) 시리즈로 불립니다. ‘나쁜 아이들은 가장 나중에 한국에 소개된 작품인데, 시리즈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수학 교수이자 범죄논리학 전문가 옌량보다도 세 명의 10대들이 이야기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어서인지 다른 작품들과는 톤과 결이 전혀 달라 보였습니다.

그 또래에 어울리는 쉽고 간결한 문장들은 때론 유치해 보이기도 했지만, 끔찍한 살인사건에 얽혔다는 공포심과 함께 그들의 인생을 망가뜨린 비참한 가족사가 이야기 전반을 지배하고 있는 탓에 그 어느 작품보다도 무겁고 불편한 책읽기가 됐다는 뜻입니다.

 

우연한 살인 목격우발적인 살인으로 촉발된 주차오양의 비극은 마치 오래전부터 예정됐던 피할 수 없는 운명처럼 전개됩니다. 고아원을 탈출한 뒤 도망치던 딩하오와 푸푸의 느닷없고 우연한 방문, 우연히 포착한 살인 장면, 마트에서 우연히 마주친 동영상 속 살인범, 그리고 놀이공원에 갔다가 우연히 발견한 밉살스런 이복동생 등 주차오양의 비극은 대부분 우연과 우발에 의해 거침없이 폭주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인지 뛰어난 수재임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뒤 아버지의 새 여자와 딸에게 무시당하면서 비참한 10대 시절을 보낸 주차오양의 소름 돋는 변신과 성장은 그래선 안 돼!”라는 안타까움과 부디 너의 계획이 모두 성공하기를!”이란 위험한 응원을 동시에 불러일으키곤 합니다.

 

시리즈 주인공인 옌량은 과거 뛰어난 경찰이자 범죄논리학 전문가였지만 불미스러운 일로 인해 지금은 저장대학에서 수학을 가르치는 교수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번 작품에선 거의 카메오에 가까운 역할만 맡고 있지만, 막판에 사건의 진실을 파악한 그가 주차오양에게 품은 양립 불가능한 감정으로 인해 괴로워하는 장면은 이 작품이 단순히 진실 혹은 진범 찾기가 아닌 그 이상의 무겁기 그지없는 의미를 갖게 만듭니다. 출판사가 소개한 중국판 백야행이라는 독자 리뷰는 아마도 그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출판사가 극도로 내용 소개를 아끼고 있어서 서평에서 자세한 줄거리나 캐릭터 소개를 하기가 어려운데, 개인적으론 재미나 여운 등 모든 면에서 동트기 힘든 긴 밤에 못잖은 작품이라 쯔진천의 팬이라면 대부분 만족할 것이 분명하고 그를 처음 접하는 독자라도 충분히 깊은 인상을 받을 수 있다는 점만 중언부언해야 될 것 같습니다.

 

사족으로, 앞선 시리즈 두 작품이 모두 한스미디어에서 나왔지만 이 작품만은 다소 생소한 이름의 출판사에서 출간돼서 의아했습니다. 일부이긴 해도 편집에서 아쉬운 대목들이 보인 게 사실이고, 무엇보다 (스포일러가 될 부분들이 많다는 점을 감안해도) 인터넷 서점에 실린 출판사 소개글은 쯔진천의 팬이 아닌 일반독자의 관심을 끌기에는 턱없이 부족한데다 떡밥으로서의 역할도 제대로 못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었습니다. 또 엄밀히 따지면 이 작품의 번역제목은 복수형이 아니라 단수형인 나쁜 아이가 맞다는 생각인데, 특히 다 읽은 후에는 복수형 제목 자체가 작품의 의미를 오도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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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카의 여행
헤더 모리스 지음, 김은영 옮김 / 북로드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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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1, 18살의 체코슬로바키아 출신 유대인 소녀 실카는 3년째 갇혀 있던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에서 마침내 풀려난다. 하지만 그녀가 전쟁 포로로서 상습적으로 강간당한 것을 적군에게 몸을 팔아 살아남은 것이라고 여긴 소련군 내무인민위원회는 실카에게 매춘, 스파이, 나치와의 결탁 혐의를 씌우며 노역 15년형을 선고한다. 그녀가 끌려간 곳은 시베리아의 북극권 내 보르쿠타에 자리한 강제노동수용소. 아우슈비츠에서 겪은 악몽이 여전히 생생한 가운데 실카는 하얀 지옥으로 불리는 보르쿠타에서의 끔찍한 15년의 첫날을 맞이하게 된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이 작품의 주인공 세실리아 실카클라인은 헤더 모리스의 전작인 아우슈비츠의 문신가에도 등장했던 인물이라고 합니다. ‘아우슈비츠의 문신가를 직접 읽진 못했지만 이 작품에도 실카가 아우슈비츠에 갇혀있던 시기의 이야기가 플래시백처럼 소개되곤 해서 당시 실카의 상황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16살에 아우슈비츠로 끌려와 폭력과 강간에 시달리며 숱한 죽음의 고비를 넘긴 실카가 자유의 순간을 얻자마자 억울한 누명과 함께 또 다른 지옥으로 끌려가게 되는 장면은 초반부터 독자의 속을 울렁거리게 만듭니다. 그리고 세상의 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시베리아 북극권의 강제노동수용소에서 또 다시 아우슈비츠의 악몽을 원점부터 겪게 된 실카를 지켜보고 있으면 죽음이 곧 희망이란 말이 저절로 떠오르기도 합니다.

 

실카는 사람들 틈바구니에 숨어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으려고 애써도 결국 어떻게든 도드라지고 마는, 그래서 적에게든 동료에게든 금세 눈에 띄고 마는 자신의 운명을 저주합니다. 그 결과 아우슈비츠에서는 나치의 노예가 되어 동족을 다그치고 그들의 죽음을 코앞에서 지켜봐야 하는 처지가 됐고, 또 그로 인해 나치 부역자로 낙인 찍혀 보르쿠타의 강제수용소에서의 15년의 지옥을 겪게 된 것입니다.

이미 한 번 지옥을 경험한 실카에게 보르쿠타에서의 폭력과 강간과 추위와 배고픔은 더 이상 큰 자극을 주지 못합니다. 같은 막사의 수용자 중 누군가는 그런 실카에게 몸과 마음을 의지하지만 다른 누군가는 똑같은 이유로 실카에게 의심과 공격을 퍼붓습니다. 실카의 유일한 두려움이라면 아우슈비츠에서의 자신의 행적이 알려지는 것인데, 그건 동시에 실카 스스로 절대 잊지 못할 혐오스런 화인(火印)이자 평생 안고 가야 할 죄책감의 근원이기도 합니다.

 

타고난 재능과 성실함 덕분에 험한 강제노역 대신 의료병동 간호사로 발탁되면서 실카는 다른 수용자들에 비해 덜 고통스러운 수용소 생활을 보장받습니다. 하지만 마치 거대한 인력(引力)이라도 지닌 듯 실카는 타인의 행복과 불행, 삶과 죽음, 탄생과 파괴를 끊임없이 자기 주위로 끌어당겼고, 그것은 때론 찰나의 안도감을 주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그녀 자신을 무기력과 자책과 암담함으로 이끌 뿐이었습니다.

 

아우슈비츠에서 강제수용소로 이어지는 그녀의 비극적인 삶을 여행이라는 역설적인 제목으로 그린 점이 다소 의아하긴 했지만, 다 읽은 뒤에는 실은 이 작품이 실카가 강제수용소에서 겪은 폭력적이고 비인간적인 경험에 대한 고발이 아니라, 극한의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래서 미래를 꿈꾸고 사랑할 수 있기 위해, 그리고 스스로를 단죄하고 용서하고 치유하기 위해 발버둥친 그녀만의 지난한 여정을 그렸다는 점을 새삼 깨닫게 됐습니다. 출판사가 소개글을 통해 실카의 여행을 읽는 5가지 키워드로 여행’, ‘죽음’, ‘모성애’, ‘사랑’, ‘희망을 언급한 것 역시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인지, 이 작품이 강제수용소의 실상을 고발하는 다큐멘터리였다면 오히려 감흥도 여운도 강렬하지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들기도 했는데, 그런 면에서 충실한 자료조사에 기반한 팩트와 적절한 수준의 허구를 잘 배합한 작가의 노력에 새삼 박수를 보내고 싶어지기도 했습니다.

 

한국 독자에게 실카의 여행이 남다르게 읽히는 이유는 일제강점기라는 고통과 분노의 역사 때문일 것입니다. 이 작품을 읽는 동안 성 노예로 고통 받은 할머니들과 강제징용의 참극이 벌어진 군함도가 자주 떠올랐는데, 이미 오랜 시간이 흘러 세상을 떠난 희생자들이 대부분이지만 우리에게도 여전히 헤더 모리스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느낀 건 아마 저만의 경험은 아닐 것 같습니다. 잊히거나 아예 흔적조차 사라진 한국의 실카를 찾아내 그 혹은 그녀의 여정을 알리는 것은 아무리 시간이 흐르더라도 멈춰선 안 될 후대의 소중한 책무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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