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 고개의 목매달아 죽은 이의 집 1 긴다이치 고스케 시리즈
요코미조 세이시 지음, 정명원 옮김 / 시공사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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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흥 명문가 호겐 가()의 여주인 야요이로부터 실종된 손녀 유카리를 찾아달라는 의뢰를 받았지만 도무지 진척이 없어 고민 중이던 긴다이치 코스케는 사진사 혼조가 사건 의뢰를 위해 갖고 온 기괴한 결혼사진을 보곤 깜짝 놀랍니다. 지금은 폐허가 된 호겐 가의 옛 가옥(일명 병원 고개 저택’)에서 찍힌 그 사진의 주인공은 실종된 유카리와 낯선 남자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제대로 조사를 하기도 전에 이번엔 바로 그 가옥에서 잔인하게 잘린 남자의 목이 발견되어 긴다이치 코스케를 충격에 빠뜨립니다. 자백을 담은 유서가 현장에서 발견됐지만 결국 범인을 찾아내진 못했고 실종됐던 유카리마저 제 발로 호겐 가로 돌아오면서 두 사건 모두 미제 상태로 흐지부지 종결됩니다. 하지만 20년이 지난 어느 날, ‘병원 고개 저택의 저주는 또 다시 호겐 가를 끔찍한 살인극 속으로 몰아넣기 시작합니다.

 

길고도 독특한 제목을 가진 이 작품은 긴다이치 코스케의 마지막 인사라는 작품해설제목대로 77편에 이르는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의 마지막 작품입니다. 이후 악령도가 출간되긴 했지만 긴다이치 코스케가 과거에 맡았던 사건을 다룬 작품이라, 실질적으로는 이 작품이 시리즈의 마지막 편이 되는 것입니다.

연재 시작 전부터 작가가 이미 마지막을 결심한 탓인지 이전 작품들과는 달리 군살(?)도 꽤 많고 전개 속도도 많이 느린 것은 물론 등장인물들의 관계는 메모가 필요할 정도로 엄청나게 복잡합니다. 마치 마지막을 어떻게든 늦춰보려는 노작가의 아쉬움이 엿보인다고 할까요? 작은 비중의 조연이나 사소한 풍경들까지 과도할 정도로 상게하게 그린 걸 보면 그리 틀린 추측은 아닌 것 같습니다. 물론 덕분에 다른 작품들에 비해 살짝 지루하게 읽힌 것도 사실이긴 합니다.

 

메이지시대 이후 5대에 걸친 호겐 가의 복잡한 가계도가 이야기의 중심에 있고 그 주위에 속물적인 사업가 가문이자 호겐 가의 불행을 잉태시킨 이가라시 가, 대를 이어 기생충처럼 호겐 가에 빌붙은 탐욕스런 사진사 가문인 혼조 가까지 자리 잡고 있는데다 첩, 불륜, 근친혼 등 일그러진 혈연관계까지 뒤엉킨 실타래처럼 끼어드는 바람에 메모 없이는 좀처럼 인물들의 관계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은 작품입니다.

사건 역시 기괴하고 엽기적인 것은 물론 20년의 간극을 두고 벌어지고 있어서 이야기의 큰 그림을 이해하기가 그 어느 작품보다도 난감했는데, 동시에 이 난감함이야말로 이 작품의 가장 큰 매력인 것도 사실입니다.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대부분이 그렇듯 이 작품에서도 문란한 성()과 혈연에의 집착이 비극의 단초로 작동하는데, 그래서인지 읽는 내내 인간 본능의 저열하면서도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생생한 민낯과 마주한 느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본능을 이용한 추악한 탐욕과 그 본능 때문에 빚어진 빗나간 애증이 가세하면서 비극은 한없이 확장되고 그만큼 적잖은 인물들이 끔찍한 최후를 맞이하게 되는데, 그런 탓에 사건이 해결된 뒤에도 긴다이치 코스케는 물론 독자에게 남는 것은 참담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묵직한 회한과 여운뿐입니다.

 

등장인물도 워낙 많고 사건도 미로처럼 복잡해서 상세한 줄거리 소개 자체가 불가능한 작품이다 보니 어중간한 서평이 되고 말았는데, 그만큼 이 작품은 사전정보 없이 읽어야 제 맛을 만끽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비록 사건에 비해 과도한 분량이라든가 사족처럼 보일 정도로 온갖 것에 동원된 디테일한 묘사, 그리고 트릭보다는 비극 자체에 초점을 맞춘 서사 등 개인적으론 아쉽게 여겨진 대목들이 많아서 긴다이치 코스케의 마지막 사건만 아니라면 그동안 읽은 작품들에 비해 높은 평점을 주긴 어려운 작품이지만, 그래도 이 시리즈를 애정해온 독자 입장에서 팔팔한 20대에서 노회한 60대에 이르기까지 산전수전을 겪어온 주인공과 이별해야 한다는 남다른 마음가짐으로 읽을 수밖에 없었던 작품이기도 해서 예우(?) 차원의 평점을 준 게 사실입니다.

 

병원 고개의 목매달아 죽은 이의 집을 끝으로 현재(20214)까지 한국에 소개된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 다시 읽기를 모두 마쳤는데, 시리즈를 다시 정주행하고 보니 그동안 순서와 무관하게 띄엄띄엄 읽었던 것에 비해 훨씬 더 각 작품의 매력과 미덕을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 당장 더는 읽을 작품이 없다는 게 너무 아쉽긴 하지만, 올해 7년 만에 출간될 미로장의 참극을 시작으로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가 자주, 꾸준히 한국 독자들과 만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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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의 이동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7-2 미치 랩 시리즈 1
빈스 플린 지음, 이창식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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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 명의 아랍 테러리스트들이 백악관을 장악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대통령은 겨우 지하 벙커로 대피하지만 적잖은 인질들이 테러범들에게 억류된다. 이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한 사내가 투입되는데, 그는 바로 CIA의 대 테러센터 비밀요원 미치 랩이다. 대학 시절 테러로 여자친구를 잃은 후 복수를 위해 요원이 된 미치 랩은 10여 년간 엄청난 성과를 올려온 최고의 살상무기다. 백악관으로 침투한 미치 랩은 당초 보고와 달리 벙커 속의 대통령이 안전하지 않음을 발견한다. 뿐만 아니라 대통령 구출이 실패하기를 바라는 내부인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데...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미치 랩 시리즈는 꽤 오랫동안 관심을 갖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첩보액션=영화라는 선입견 때문에 좀처럼 책으로 읽을 생각을 안 했던 게 사실입니다. 그러다가, 모 카페의 댓글에 달린 이 시리즈에 대한 찬사를 보곤 첫 편인 권력의 이동을 인터넷 중고서점에서 구하게 됐습니다.

초반부의 군사작전을 방불케 하는 테러리스트 납치 장면까지만 해도 역시 첩보액션은 영화로 봐야 돼.”라며 한숨이 나왔지만, 이내 백악관을 점령당하고 미치 랩이 주인공으로서 활약하는 대목부터는 갑자기 몰입감이 확 높아지면서 500페이지가 훌쩍 넘는 분량을 단숨에 마무리했습니다. 개인적으로 최고로 꼽는 미드 ‘24’나 영화 제이슨 본 시리즈를 활자로 읽는 듯한 짜릿함이랄까요?

 

이야기 얼개나 인물들의 구도는 대 테러리스트 첩보액션물의 전형적인 스타일에 충실합니다. 슈퍼울트라급 주인공 미치 랩과 그를 돕는 매력적인 조연들(은퇴요원 밀트 애덤스, 여기자 애너 릴리), 냉혹하고 잔인한 테러리스트들, 진압작전을 전개하는 CIA와 특수부대, 벙커에 갇힌 정의로운대통령과 경호팀, 그리고 위기를 기회로 삼으려는 비열한 정치인들이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숨 막히는 이야기를 이어갑니다.

 

미치 랩은 CIA의 대 테러센터 오리온팀의 비밀요원이지만 실은 모든 것이 베일에 싸인 비공식 프리랜서입니다. 10여 년 전 비행기 테러로 여자친구를 잃은 뒤 비밀요원의 길을 걷기 시작한 미치 랩은 말 그대로 제이슨 본 못잖은 최고의 살상무기로 진화했습니다. 여느 첩보액션물 주인공과 마찬가지로 터프하고 시니컬하지만 그의 진짜 매력은 터뜨릴 때 터뜨릴 줄 아는 다혈질 성격과 비밀요원으로서의 자신의 인생에 대해 수시로 회의에 잠기곤 하는 인간적인 모습에 있습니다. 말하자면 사람 냄새가 제대로 나는 살인기계라고 할까요?

 

테러리스트들의 백악관 점령이라는 희대의 사태를 놓고 벌어지는 정치인들의 비열한 처신과 오로지 작전 성공만을 최우선 과제로 삼는 실무진들의 분투, 그리고 그들 사이의 팽팽한 갈등도 눈길을 끄는 대목인데, 다만, 의외로 배신자 캐릭터가 단순한데다 특별한 반전 같은 게 없어서 아쉽기도 했습니다. 미드 ‘24’의 경우 누가 아군이고 적군인지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었던 전개가 백미였던 점을 생각해보면 권력의 이동은 비교적 돌직구에 가까운 구도였다는 생각입니다.

 

미치 랩과 함께 백악관 내부에서 위태로운 미션을 수행하는 두 인물 - 은퇴요원 밀트 애덤스, 여기자 애너 릴리 의 캐릭터도 매력적이었는데, 이들이 다음 작품에서도 계속 미치 랩과 활약을 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카메오로라도 좋으니 두 사람이 다시 한 번 미치 랩과 호흡을 맞추는 모습을 볼 수 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미치 랩 시리즈는 이른바 미국의 패권을 미화하고 자국의 이익이 곧 선이고 정의라는 미국 제일주의의 전형적인 작품일 수도 있습니다. 다소 비판적인 책읽기가 필요한 건 사실이지만 소설은 단지 소설일 뿐이니까.”라는 옮긴이의 말대로 재미있는 첩보액션 그 자체로 만끽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입니다.

아무래도 미치 랩 시리즈를 순서대로 다 읽게 될 것 같은데, “대통령의 비밀 지령을 받아 중동 테러리스트들에게 생화학 무기 공장을 지원하는 유럽 기업가를 암살하러 나선다.”는 두 번째 작품 3의 선택은 물론 한국에 출간된 나머지 시리즈 모두 머잖아 제 손에 들어올 듯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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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 비밀
오쿠다 히데오 지음, 김난주 옮김 / 재인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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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 비밀’(원제 のヒミツ)오 해피 데이’, ‘우리 집 문제에 이은 가족 소설 시리즈’(平成家族小説シリーズ) 세 번째 작품입니다. 앞선 두 작품을 읽진 못했지만, 오쿠다 히데오의 작품이란 이유만으로, 또 짓궂은 유머와 온기 가득한 울컥함이 담겨 있을 것 같은 능청스런 제목에 눈길이 끌려 따끈따끈한 신간을 얼른 집어 들었습니다.

 

모두 여섯 편의 단편이 수록돼있는데, 재미있는 건 그 가운데 우리 집 비밀이란 수록작은 없다는 점입니다. , 여섯 편 모두 누군가의 또는 어떤 가족의 내밀한 비밀을 다룬다는 공통점 때문에 붙은 제목이란 뜻입니다.

여섯 편의 주인공 혹은 조연들을 전전긍긍하게 만드는 비밀들이란 남의 일로 여기고 들여다보면 실은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니고 위험한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누구나 살아가면서 가까운 지인은 물론 가족에게조차 쉽사리 털어놓을 수 없는 소소한 비밀들을 갖기 마련이며 그런 비밀들 중엔 당사자에겐 세상의 절반이 사라져버린 듯한 고통과 상처와 두려움의 근원이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오쿠다 히데오는 그런 비밀들 하나하나를 조심스럽고 진지하게 그리면서도 따뜻하고 유쾌한 문장과 주위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공감률 100%의 인물들을 앞세워 특유의 감동을 독자에게 선사합니다.

 

아이를 갖지 못해 고심 중인 31살의 치과 사무원 아쓰미가 환자로서 치과에 온 유명 피아니스트 - 심지어 아쓰미는 그의 열정적인 팬이기도 합니다. - 를 통해 삶의 지혜와 용기를 얻는 이야기(‘충치와 피아니스트’), 승진 경쟁에서 밀려난 뒤 방황하던 50대 샐러리맨 마사오가 아주 조금씩 자기 자신은 물론 세상과 화해하는 이야기(‘마사오의 가을’), 16살 안나가 친아빠와 길러준 아빠 사이에서 이기적인 욕심을 부리다가 제자리로 돌아오는 이야기(‘안나의 12’), 아내를 잃고 우울증과 무기력증에 빠진 아버지를 안쓰럽게 지켜보다가 생각지 못한 곳에서 구원의 손길을 얻는 아들의 이야기(‘편지에 실어’), 옆집에 이사 온 수상한 부부 때문에 밤잠을 못 이루는 만삭의 임산부의 이야기(‘임산부와 옆집 부부’), 작가로서도 가장으로서도 쇠퇴기를 맞이한 탓에 심란해하다가 갑자기 시의원 선거 출마를 선언한 아내 때문에 겪게 되는 좌충우돌 감동 스토리(‘아내와 선거’) 등이 실려 있습니다.

 

“2012년부터 2015년까지 문예지 소설 스바루에 연재됐던 단편 중 주옥같은 작품들을 엄선해서 엮었다.”는 출판사의 소개글이 있긴 하지만, 개인적으로 눈에 띄었던 점은 여러 작품에 등장한 50대 남성들입니다. ‘주옥같은 작품들보다는 왠지 인생의 후반전 중반쯤을 지나고 있는 ‘50대 남성들이란 공통점에 맞춰 엄선된 느낌이라고 할까요?

과열과 허무의 젊은 날들을 보낸 뒤 뒤늦게 자신만의 세계를 찾거나, 승진 경쟁에서 밀려나 자괴감에 빠지거나, 사랑하던 배우자를 잃고 무기력증에 빠지거나, 작가로서도 가장으로서도 내리막길에 선 자신을 발견하는 인물들이 바로 그들인데, 재미있는 건 이 작품이 집필된 시기가 1959년생인 오쿠다 히데오의 나이 53~56세 무렵이란 점입니다. 지극히 개인적인 억측이긴 하지만 젊은이와 나이 든 사람은 눈에 비치는 풍경이 다르다.”(p198, ‘편지에 실어’)는 문장처럼 어쩌면 오쿠다 히데오는 자신과 비슷한 풍경을 바라보게 된 50대 남성들에 대한 연민과 공감을 이 단편집 속에 녹여 넣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누군가의 혹은 어느 가족의 비밀은 작가의 의도에 따라 꽤 씁쓸한 비극의 소재가 될 수도 있지만 오쿠다 히데오는 특유의 유머와 따뜻함을 가미해 갑자기 빙긋 웃게 만들거나 갑자기 눈가를 뜨끈하게 만드는 어른들을 위한 동화를 독자들에게 선사했습니다. 세상은 냉정하고 비열하고 무자비하지만 어딘가에는 분명 사람들을 웃고 감동하게 만드는 작은 구석도 존재할 것입니다. 오쿠다 히데오가 매번 그려내는 그 작은 구석들은 설령 누군가에게는 판타지처럼 읽힌다 해도 제게는 늘 기분 좋은 위안과 안식으로 다가옵니다. 서평을 마치는대로 아직 못 읽은 이 시리즈의 전작들(‘오 해피 데이’, ‘우리 집 문제’)을 장바구니에 담아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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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알수집가
제바스티안 피체크 지음, 장수미 옮김 / 단숨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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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유능한 협상전문가였던 알렉산더 초르바흐는 7년 전 비극적인 사고 이후 범죄 전문기자로 살아가는 중입니다. 현재 그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건 이른바 눈알수집가사건. 어머니를 살해하고 아이를 납치한 뒤 아버지에게 제한시간 안에 아이를 찾아내라는 요구를 남긴 범인은 제한시간이 지나면 아이를 살해하고 한쪽 눈알을 제거하는 전대미문의 연쇄살인범입니다. 그런데 네 번째 사건 이후 초르바흐는 뜻밖에도 경찰의 의심을 사게 됩니다. 그런 그의 앞에 나타난 맹인 영매 알리나는 눈알수집가에 대한 충격적인 사실을 들려줍니다.

 

독일의 스릴러를 꽤 좋아하는 편이긴 하지만 제바스티안 피체크는 그 가운데 유독 독특한 인상을 받은 작가입니다. 대다수의 대중적인 독일 스릴러와는 달리 사이코스릴러로 분류될 만큼 등장인물들의 이상심리를 강렬하고 집요하게 그리는 것은 물론 사건 자체도 엽기적이거나 기괴한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인지 그의 작품을 읽을 때면 첫 페이지를 펼치기 전부터 나름 마음의 준비(?)를 단단하게 할 수밖에 없는데, 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눈알수집가는 초반부터 인물과 사건 모두 그 어느 작품보다 세고 독한 설정으로 포장돼있어서 마음의 준비라는 게 아무 소용없었음을 일찌감치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협상전문가 시절의 사고로 인해 7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심리치료를 받으며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초르바흐는 아직도 자신이 환각, 환청, 환영을 겪는다는 두려움에 빠져있습니다. 직장을 잃고 가정마저 해체되기 직전의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알수집가 사건에 유달리 집착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사건은 그의 트라우마와 두려움을 더욱 증폭시키는 계기가 되고 맙니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자신을 눈알수집가와 엮으려 하거나 심지어 눈알수집가로 오인 받게 만드는가 하면, 난데없이 나타난 맹인 영매 알리나는 눈알수집가와의 접촉을 통해 목격한 살인-납치 장면을 들려주며 초르바흐의 정신을 뒤흔들어놓기 때문입니다.

사이코스릴러의 팽팽한 긴장감으로 가득 찬 설정이긴 하지만 안팎으로 사면초가에 빠진 초르바흐를 지켜보는 것은 꽤나 불편하고 힘든 일입니다. 물론 그것이 이 작품의 진짜 매력이자 소구력이기도 하지만 말입니다.

 

초르바흐만큼이나 시선을 끄는 인물은 맹인 영매 알리나인데, 그녀는 시종일관 눈알수집가와 대결을 벌이는 초르바흐를 곁에서 지원하는 것은 물론 접촉을 통해 목격했으나 완벽하게 기억하지 못한 눈알수집가에 대한 정보를 떠올리기 위해 분투합니다. 다만, 영매라는 캐릭터가 등장하는 순간 잠시 얼떨떨했던 게 사실인데, 이 대목에서 독자들의 호불호가 갈릴 수 있긴 하지만, 결론적으로는 알리나의 특별한 능력에 대한 이질감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고 금세 제바스티안 피체크 표 사이코스릴러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어머니를 살해하고 아이를 납치한 뒤 아버지에게 그 아이를 45시간 7분이라는 제한시간 안에 찾아내라는 메시지를 남기는 눈알수집가의 범행 동기는 후반부에 가서야 밝혀지는데, 이 부분은 개인적으론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들 정도로 다소 작위적으로 읽힌 게 사실입니다. 독일과 북유럽 스릴러에서 자주 발견할 수 있는 트라우마라는 자양분을 먹고 자란 소시오패스설정은 때론 공감이 갈 때도 있지만 대부분 설정을 위한 설정처럼 느껴지곤 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작품이 같은 해(2010) 출간된 넬레 노이하우스의 백설공주에게 죽음을을 제치고 독일 독자들이 뽑은 최고의 크라임&스릴러로 뽑힌 걸 보면 적어도 독일에서는 이런 스타일의 범인과 범행 동기가 전혀 이질감 없이 받아들여지는 것 같긴 합니다.

 

제바스티안 피체크의 눈알사냥꾼이라는 작품 제목을 들어본 적 있는 독자라면 눈알수집가가 그 자체로 완결된 이야기가 아니라 꽤 큰 떡밥과 함께 다음 이야기를 위한 숙제를 남겨놓았음을 쉽게 눈치 챌 수 있는데, 맺음말과 서문에 등장하는 고통의 최정점에 서서 죽음이 이제야 비로소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남자, 그 남자가 나다.”라는 초르바흐의 절규는 눈알사냥꾼이라는 후속작에 대한 두려움 섞인 기대를 갖게 만듭니다.

 

결코 쉽고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찾아 읽게 되는 제바스티안 피체크의 매력의 실체가 뭔지 여전히 잘 모르겠지만, 그의 홈페이지까지 찾아가 출간목록을 만들고 아직 읽지 못한 작품들을 중고로라도 사들이는 걸 보면 그에게는 제 스스로도 잘 이해하지 못하는 특별하고도 불온한 인력(引力)이 존재하는 것 같기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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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봐
세라 슈밋 지음, 이경아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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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284, 미국 매사추세츠주 폴리버의 한 저택에서 앤드루 보든과 애비 보든 부부가 도끼로 무참히 살해당했다. 범행 자체의 잔혹성에 더해 부부의 둘째 딸인 리지 보든이 가장 유력한 용의자로 떠오르면서 이 사건은 전 국민적인 관심사가 되었다. 결국 리지는 여성이 이렇게 잔혹한 범죄를 저지를 수는 없다는 이유로 무죄판결을 받았으나, 범인은 끝까지 밝혀지지 않았다.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봐는 그로부터 백 년이 훌쩍 넘는 세월 동안 무성한 소문과 추측을 낳은 이 미제 사건을 문학적으로 재해석한 소설이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인용했습니다.)

 

잔혹하고 어처구니없는 사건들을 현실에서 너무 자주 접하다 보니 요즘 사람들은 사실 어지간히 엽기적인 사건이 아닌 다음에는 거의 불감증에 가까운 무덤덤한 반응밖에 보이지 않는 게 사실입니다. 특히 미스터리나 스릴러를 좋아하는 저 같은 사람은 더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래서인지 129년 전에 벌어진 사건이라는 점을 감안해도 딸이 부모를 잔인하게 살해한 사건은 헤드라인 자체만 놓고 보면 요즘 사람들, 그것도 미스터리와 스릴러 마니아에게 크게 어필할 만한 사건은 아니라고 생각됐습니다.

 

하지만 이 사건이 논픽션은 물론 영화, 드라마, 뮤지컬로도 제작된 적 있고, ‘87분서 시리즈를 집필한 경찰소설의 대가 에드 맥베인도 이 사건을 소재로 한 소설 리지를 출간한 적 있다는 출판사의 소개글을 보곤 이 사건엔 뭔가 특별한 게 있구나, 라는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가장 충격적인 팩트는 살해된 부부의 몸에 남은 여든한 번의 도끼질 자국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이 사건이 주목을 받는 건 어쩌면 딸이 범인?”이란 의혹보다 끔찍한 범행의 흔적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물론 결과적으론 이 두 가지 놀라운 사실이 엄청난 시너지 효과를 낸 셈이지만 말입니다.

 

세라 슈밋은 네 명의 1인칭 화자를 등장시킵니다. 용의자로 지목받은 리지, 그녀의 언니 에마, 아일랜드 출신 가정부 브리짓, 그리고 리지와 에마의 외삼촌이 고용한 해결사 벤저민(유일한 가공의 인물)이 그들입니다. 재미있는 건 어려서부터 소시오패스 기질을 타고난 듯한 리지 외에 나머지 인물들도 보든 부부에 대한 살의를 리지 못잖게 충분히 지니고 있다는 점입니다.

마흔이 되도록 혼자 몸인 에마는 평생 동생 리지에 비해 차별받고 무시당해온 트라우마를 갖고 있고, 돈을 벌기 위해 다정한 가족들을 떠나 미국까지 온 가정부 브리짓은 부부로부터 부당하고 억압적인 처우에 시달려왔으며, 가정폭력을 휘두르다 끝내 가족을 버린 아버지를 증오해온 해결사 벤자민은 자신의 아버지와 비슷한 남자인 자매의 아버지를 손 봐주라는 의뢰를 흔쾌히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사건보다 그 가족에 대해, 그런 집에서 사는 일은 어땠을지에 대해 쓰고 싶었다. 왜 사람이 잔혹한 폭력행위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내몰리는지 탐구해보고 싶었다.” (p414, ‘작가 노트)

 

작가 스스로 밝혔듯, 이 작품의 중심은 사건자체가 아니라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의 심리입니다. 가정부 브리짓의 이 빌어먹을 가족은 모두 미쳤다.”라는 일성은 보든 가문 사람들의 한껏 일그러지고 비틀린 인격을 한마디로 잘 대변하고 있는데, 작가는 그 인격들이 어떻게 싹을 틔웠고, 어떻게 무자비하게 자라났는지를 집요할 정도로 꼼꼼하게 그려냅니다.

또 그 인격들의 민낯을 더욱 극대화하기 위해 집안 곳곳에서 풍기는 온갖 악취, 등장인물들의 기분 나쁜 구취와 체취,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쏟아내는 오줌과 토사물,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을 더욱 고약하게 만드는 8월의 폭염 등 꽤 불편하고 불쾌한 장치들을 동원합니다.

여러 매체의 평가에 범죄 현장에 스민 여름의 열기처럼 불안감을 자극”, “밀실공포증을 일으키는 악몽 같은 이야기”, “긴장감 넘치는 심리학적 탐구라는 문구가 담긴 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다만, 이런 심리스릴러의 요소들이 다소 모호하거나 몽환적으로 그려진 대목들이 많아서 쉽고 편한 책읽기가 되지 못한 것이 사실입니다. 특히 용의자로 몰렸다가 무죄 판결을 받은 리지에게 주목했던 독자들은 옮긴이의 말대로 리지의 심술과 변덕에 이리저리 끌려 다니는 듯한 찝찝한 기분을 느낄 수밖에 없는데, 부모는 물론 언니 에마와도 극심한 갈등을 벌이는 리지의 행보는 소시오패스와 정신분열이 뒤섞인 듯 도무지 종잡을 수 없어 보일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론 이 대목에서 독자들의 호불호가 갈릴 수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저 역시 그런 이유로 별 한 개를 뺐는데, 다른 독자들은 어떻게 느꼈을지 사뭇 궁금해지기도 합니다.

 

사족이지만, 리지의 무죄판결문에는 여자가 그런 잔혹한 범행을 저질렀을 리 없다.”, “자신보다 거구인 아버지와 새어머니를 살해하기 어렵다.”란 내용이 들어있었다고 하는데, 1892년이란 점을 감안해도 납득하기 어려운 판결이지만, 드물긴 해도 요즘에도 비슷한 수준의 판결을 지켜본 것 같은 기시감은 아마 저만의 경험은 아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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