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거짓말쟁이 너에게 - JM북스
사토 세이난 지음, 김지윤 옮김 / 제우미디어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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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무사를 꿈꾸는 28살 이토 키미히로는 2년 전 연인과의 결별 뒤로 의식적으로 연애와 담을 쌓고 사는 인물입니다. 그런 그가 술집주인의 갑작스럽고도 우발적인 소개로 7살 연하의 여대생 나나를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날 이후로 삭막하던 키미히로의 삶에 아주 조금씩 나나가 스며들기 시작합니다. 얼마 후 나나에 대한 감정을 확신한 키미히로는 최근 자신에게 호감을 표현하고 있는 법무사무소의 동료 미네기시 유코를 정리하려고 하지만, 상황은 그를 당혹스럽게 만들 정도로 묘하게 흘러가기 시작합니다.

 

사토 세이난은 꽤 오래 전 아동학대사건을 다룬 어느 소녀에 얽힌 살인 고백’(한국 출간 2012)이란 작품으로 처음 만났습니다. 당시 메모와 서평에 이 작가의 다른 작품을 꼭 찾아서 읽어볼 것이라고 적었지만, 10년 가까이 지나도록 단 한 편도 한국에 소개되지 않은 탓에 그 다짐을 지킬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오랜만에 그의 작품이 출간된다는 소식이 너무 반가웠는데, 어딘가 연애소설을 떠올리게 만드는 표지와 그에 걸맞은 제목이 앞서 읽은 어느 소녀에 얽힌 살인 고백의 느낌과 너무 달라서 잠시 당황한 게 사실입니다.

 

미스터리로 분류된 작품이지만 대략 1/3쯤 되는 1장까지는 삼각관계 연애소설의 전형적인 이야기가 전개돼서 도대체 언제 어디에서 어떤 사건이 어떤 식으로 터질지 무척 궁금해질 수밖에 없었는데, 2장의 시작과 동시에 갑작스레 살인사건이 언급되면서 이야기는 급격하게 방향을 선회합니다. 그리고 뒷표지에 실린 카피대로 사랑, , 광기가 복잡하게 얽힌 살인 미스터리가 전개되기 시작합니다.

 

이 작품에는 세 가지 사랑이 등장합니다. 이제 막 피어오르기 시작한 여리고 설렘 가득한 감정이 하나이고, 겉으론 밝고 따뜻해 보이지만 실은 완벽하게 위장된 치명적인 덫으로서의 감정이 또 하나이고, 너무나 간절한 나머지 통제 불가능한 광기에 이르고 만 집념에 가까운 끔찍한 감정이 나머지 하나입니다. 사랑에 빠진 누군가는 오늘에 감사하고 내일을 기대하며 잠 못 이루지만, 덫을 놓은 누군가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이용하여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려 하고, 광기 어린 사랑을 요구하는 누군가는 그저 자신의 감정에만 몰입한 채 방해가 되는 타인에게 잔인한 상처까지 남겨가며 돌직구처럼 폭주합니다.

 

연애소설의 탈을 쓴 충격적인 심리 미스터리는 이런 맥락에서 나온 홍보카피인데, 사랑과 덫과 광기로 얽힌 세 남녀가 연애소설과 심리 미스터리를 거쳐 결국엔 살인극에 얽혀 들어가는 비극적인 운명을 맞이한다는 점에서 이 작품을 한 줄로 잘 압축해놓은 문구라는 생각입니다. 만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거짓말쟁이 너에게라는 아주 길고 미묘한 제목 역시 다 읽고 나면 새삼 그 의미를 곱씹을 수 있는 적절한 제목인데, ‘만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사람들은 누구일지, ‘거짓말쟁이 너는 누구일지, 또 이 제목의 화자가 거짓말쟁이 너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일지를 염두에 두고 찬찬히 페이지를 넘긴다면 이 작품의 매력을 한층 더 진하게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재미있고 긴장감 넘치는 이야기가 그리 길지 않은 분량에 촘촘하게 담긴 건 맞지만, 다소 그 맥락과 동기가 이해되지 않는 억지스런 살인사건은 이 작품의 유일한 아쉬움이자 가장 치명적인 약점이기도 합니다. ‘사랑과 덫과 광기가 한데 섞인 탓에 벌어진 필연적인 참극으로 묘사되긴 했지만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설정 때문에 ?”라는 의문과 함께 막판 엔딩에서 잠시 몰입도가 확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출판사 소개글이 딱 1장까지만 언급하고 있어서 그 뒤의 자세한 줄거리를 서평에서 다루기 어렵다보니 아주 애매한 인상비평이 되고 말았는데, 그만큼 이 작품은 다른 독자의 서평이나 정보 없이 백지상태에서 읽어야 제 맛을 느낄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이 작품과는 전혀 결이 다르긴 하지만 사토 세이난에게 관심이 생긴 독자라면 어느 소녀에 얽힌 살인 고백도 찾아 읽어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아동학대라는 소재 때문에 호불호가 갈릴 수도 있지만 꽤 독특하고 개성 있는 미스터리를 맛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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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드헌터
요 네스뵈 지음, 구세희 옮김 / 살림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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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게르 브론은 FBI의 심리기법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꿰뚫어보는 탁월한 헤드헌터. 그러나 그는 고객의 집에 보관된 고가의 미술품을 훔치는 절도범이기도 하다. 화랑을 운영하는 아내의 추천으로 만난 GPS 전문가 클라스 그레베를 라이벌 회사 CEO로 추천하고 고액의 수수료를 받아낼 심산이던 로게르는 동시에 그가 소유한 엄청난 가치의 명화를 훔쳐 거액을 챙기고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그 마지막 한탕에서 모든 일이 어긋나버린다. 장물을 다루던 공범은 죽고 사랑하던 아내는 자신을 완벽하게 배신하고 만 것. 충격에 빠진 로게르는 클라스 그레베의 CEO 추천을 취소하는데, 그 직후 로게르는 GPS 전문가이자 전직 특수부대원이자 진짜 사람 사냥꾼인 헤드헌터클라스 그레베에게 쫓기기 시작한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요 네스뵈의 작품이란 이유만으로 구매했지만 왠지 좀처럼 손이 잘 가지 않아 꽤 오랫동안 책장에 방치해둔 헤드헌터를 읽었습니다. ‘해리 홀레 시리즈이전에 집필된 요 네스뵈의 초기작이 아닐까, 예상했는데, 검색해보니 스노우맨’(해리 홀레 7)레오파드’(해리 홀레 8) 사이인 2008년에 출간된 작품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요 네스뵈가 스릴러 작가로서 정점에 올라선 뒤에 집필했다는 뜻인데, 그래선지 이 작품이 상대적으로 덜 유명세를 탄 게 선뜻 이해가 되지 않기도 했습니다.

 

로게르 브론은 낮에는 최고의 헤드헌터로, 밤에는 미술품 절도범으로 변신하는 지극히 속물적인 인간입니다. 업계 에이스로 인정받을 만큼 뛰어난 능력 덕분에 많은 돈을 벌지만 그는 그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을 필요로 합니다. 터무니없는 고가의 저택을 유지해야 되고, 자신보다 모든 면에서 매력적인 아내에게 헌신하기 위해 고급 화랑을 열어주고 고가의 보석선물을 사들여야 하는 그에겐 헤드헌터의 월급은 간신히 적자를 면하는 수준이었기 때문입니다.

그야말로 세련된 비주얼과 뛰어난 능력을 지닌 엘리트이자 동시에 허세 충만한 탐욕덩어리 절도범이라는 이중적인 인물인데, 그런 그가 마지막 한탕으로 삼은 루벤스의 명화가 결국 그의 발목을 아주 심하게 붙잡고 마는 상황이 벌어진 것입니다.

 

아내의 배신과 공범의 죽음에 이어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자의 추격을 뿌리쳐야 하는 상황에 놓인 로게르는 불과 만 이틀 동안 극한의 롤러코스터에 휩싸입니다. 헤드헌터로서도, 절도범으로서도 완벽하게 처신해온 그가 하루아침에 최악의 막장으로 급전직하하는 대목은 독자로 하여금 마치 그와 함께 추락하는 듯한 공포심과 무력감을 느끼게 만듭니다.

도무지 빠져나갈 길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살인범의 누명까지 뒤집어 쓴 로게르가 생사를 넘나드는 위기 끝에 진실을 알아내고 모든 것을 바로잡는 이야기는 360여 페이지에 불과한 분량에도 불구하고 단 한 순간도 마음을 놓을 수 없는 반전과 충격으로 꽉 차 있습니다.

이렇게 흘러가지 않을까, 라는 독자의 예상과 추측은 번번이 빗나가고, 이야기 자체가 무질서한 분열과 증식을 반복하는 세포처럼 제멋대로 방향을 뒤트는 느낌을 수시로 받게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르러 기막힌 반전 쇼를 지켜보며 요 네스뵈가 얼마나 정교하고 치밀하게 이야기를 구성했는지 새삼 감탄하게 됩니다.

 

맥베스’, ‘아들’, ‘오슬로 시리즈등 요 네스뵈의 스탠드얼론은 해리 홀레 시리즈와는 색다른 매력과 맛을 전해주곤 했는데, 뒤늦게 읽은 헤드헌터는 어느 작품들과도 차별화되는 엄청 빠르고 엄청 팽팽한 스릴러의 미덕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물론 요 네스뵈가 매 작품마다 유독 천착하는 아버지와의 갈등이 로게르의 히스토리에도 예외 없이 꽤 자주 등장해서 속도감과 재미를 반감시키긴 했지만 그래도 이 작품의 장점에 비하면 충분히 눈감아줄 수 있는 아쉬움이라는 생각입니다.

해리 홀레를 비롯 대체로 진지하고 무거운 요 네스뵈의 기존 주인공들과는 거의 정반대의 캐릭터를 지닌 주인공을 만나고 싶은 독자라면 특별한 간식처럼 읽힐 헤드헌터를 꼭 읽어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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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복수 발터 풀라스키 형사 시리즈 1
안드레아스 그루버 지음, 송경은 옮김 / 단숨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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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라이프치히 정신과 병원에서 19세의 나타샤 좀머가 사체로 발견됩니다. 50대 노형사 발터 풀라스키는 현장에서 타살 가능성을 발견하지만 상부에선 그의 주장을 외면합니다. 그의 업무는 현장 출동 및 확인이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연쇄살인의 여지까지 엿보이자 발터 풀라스키는 상부의 지시와 무관하게 단독 수사를 감행합니다.

한편, 오스트리아 빈의 유능한 변호사 에블린 마이어스는 우연히 상류층 남성들의 연이은 죽음에 미지의 젊은 여성이 연루됐음을 눈치 챕니다. 돈이 되는 사건만을 강요하는 로펌의 지시를 거부한 에블린은 휴가를 내고 북독일까지 달려가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려 애씁니다.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 노형사 발터 풀라스키와 조우하게 됩니다.

 

안드레아스 그루버의 대표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천재 프로파일러 마르틴 S. 슈나이더와 비교하면 50대 노형사 발터 풀라스키는 나이든 스펙이든 별로 내세울 게 없는 인물입니다. 5년 전 아내와 사별한 뒤 어린 딸 야스민을 키우기 위해 일부러 한직이나 다름없는 라이프치히 경찰서의 현장출동팀에 자원한 그는 과거엔 주립 범죄수사국의 유능한 형사였지만 지금은 그저 범죄현장에 가장 먼저 출동해서 보고서를 쓰는 것 외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천식에 시달리는 50대의 무력한 형사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추진력과 추리력에 관한 한 풀라스키는 조금도 마르틴 S. 슈나이더에 뒤지지 않습니다. 열악한 처지에도 불구하고 저돌적으로 수사를 감행하는 것을 보면 오히려 마르틴 S. 슈나이더가 안락탐정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한편 풀라스키와 거의 절반에 가까운 분량과 비중을 나눠가진 에블린 마이어스는 오스트리아의 거대 로펌의 변호사로 그 유능함을 공인받고 있는 30대 여성입니다. 하지만 형사사건 전문변호사를 꿈꾸는 그녀에겐 돈이 되는 대형 고객만을 상대해야 하는 일이 고달플 따름입니다. 어느 날 자신이 맡았던 전형적인 사고사를 조사하던 중 뜻하지 않게 동일범에 의한 연쇄살인의 가능성을 발견한 그녀는 남친이자 사립탐정인 파트릭의 도움을 받아가며 독일까지 달려가 수사에 임합니다. 그야말로 변호사인지 형사인지 알 수 없을 정도의 맹활약을 펼치는데, 마르틴 S. 슈나이더의 파트너이자 정의감과 에너지가 넘치는 신참 형사 자비네 네메즈를 떠올리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독일의 풀라스키와 오스트리아의 에블린은 한 몸통이나 다름없는 사건을 서로 다른 방향에서 캐나가다가 극적으로 조우합니다. 그들이 마주한 사건은 소아성애, 마약, 살인 등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범죄로 뒤범벅돼있어서 수사 과정 자체를 고통스럽게 만들기도 하지만, 두 사람 모두 각자 다른 이유로 유달리 사건에 감정을 이입하곤 합니다. 풀라스키의 경우 12살인 딸 야스민 때문이고, 에블린의 경우 과거 자신과 가족을 파멸시킨 참혹한 사건 때문인데, 자신들이 쫓는 범인이 10년 전 10대 소년소녀들을 잔인하게 유린한 사건과 밀접하게 연관돼있다 보니 그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돌직구처럼 진실 찾기에 나서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사건의 윤곽이라든가 풀라스키와 에블린의 수사가 접점을 이룰 지점, 그리고 범인의 살해동기 등 전반적으로 예측 가능한 이야기가 전개돼서 슈나이더 시리즈만큼 손에 땀을 쥐게 만드는 힘은 부족해 보입니다. 하지만 성실하고 진지한데다 자신들의 처지 때문에 사건에 감정이입을 주저하지 않는 두 주인공의 행보는 충분히 매력적이고 흥미롭습니다. 스릴러의 하이라이트인 막판 클라이맥스의 액션 장면은 노형사와 젊은 변호사라는 조합에도 불구하고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처럼 적절한 폭력성과 긴장감을 갖췄고, 베일 속의 진범이 드러나는 반전 역시 나름의 힘과 충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여름의 복수발터 풀라스키 시리즈의 첫 편인데, 이 작품만 놓고 보면 발터 풀라스키 & 에블린 마이어스 시리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두 주인공의 분량과 비중은 막상막하입니다. 후속작인 가을의 복수는 꽤 오래 전에 읽어서 사건도 줄거리도 가물가물하지만 언뜻 에블린이 이 작품만큼 큰 비중은 아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조만간 다시 한 번 읽으면서 확인해보려고 합니다.

 

아쉬운 건 여름의 복수가을의 복수’(2017) 이후 한국에는 더는 발터 풀라스키 시리즈가 소개되지 않은 점인데(‘슈나이더 시리즈역시 201812죽음의 론도이후 소식이 없습니다.), 가까운 시일 안에 노형사 발터 풀라스키의 매력적인 이야기를 다시 한 번 만나볼 수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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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불의 딸들
야 지야시 지음, 민승남 옮김 / 열린책들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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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의 운명이란 거짓말 같은 우연과 필연으로 인해 희비극이 엇갈리기도 하고, 사소한 계기 하나 때문에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그 방향이 정반대로 뒤바뀌기도 합니다. 때로는 그 엇갈림뒤바뀜이란 게 그저 한 개인의 희로애락만 쥐락펴락하다가 소멸되기도 하지만, 때로는(특히 시대가 사람을 뒤흔드는 혼란기에는) 다음 세대의 행과 불행에까지 큰 영향을 미치기도 합니다.

 

그런 면에서 박경리의 토지나 조정래의 아리랑’, 그리고 이 작품의 조상(?) 격인 알렉스 헤일리의 뿌리(Roots)’처럼 장구한 시간과 여러 세대에 걸친 비극적인 대서사를 담은 작품들은 남다른 여운을 남길 수밖에 없는데, 특히 밤불의 딸들은 서아프리카에서 노예 포획과 매매가 자행되던 1760년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300년에 가까운 시간에 걸쳐 무려 일곱 세대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첫 페이지를 열기 전부터 묵직한 비극의 예감을 갖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서아프리카 황금해안(지금의 가나)에서 태어난 에피아와 에시는 아버지가 다른 자매지만 살아있는 동안 한 번도 얼굴을 맞댄 적이 없습니다. 다만, 우여곡절 끝에 영국 총독의 아내가 되어 성의 위층에 살았던 에피아와 그 성의 지하에 있는 여자포로 감옥에 갇힌 채 노예로 팔려나갈 날만을 기다리던 에시가 아주 잠시나마 지척의 거리에 머물렀던 순간이 있었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긴 세월동안 두 여성의 후손들은 각각 미국과 가나에서 생과 사를 거듭하며 고통과 상처로 점철된 지난한 인생을 겪게 됩니다.

 

가나에 남은 에피아의 후손들은 같은 인종을 백인에게 노예로 팔아넘기는 잔인한 가업을 물려받거나 그 가업에서 벗어나더라도 불의 저주라는 끔찍한 덫을 피하지 못한 채 대를 이어 현재에 이릅니다. 그들은 가난과 흉작, 기아와 질병, 백인 제국주의의 침략이라는 결코 멈추지 않는 참극들을 거치면서 유럽과 미국으로 팔려간 노예 못잖은 고통스런 시간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한편, 에시의 후예들은 미국 남부의 목화밭, 탄광, 항구 등에서 짐승만도 못한 노예로 전락했고, 남북전쟁 전후로 자유의 몸이 된 후에도 도망노예 송환법’, ‘죄수 대여제도등 갖가지 악법과 악습으로 인해 진정한 자유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살게 됩니다. 에시가 미국에 팔려온 지 200년이 훌쩍 지난 오늘날에도 그녀의 후손들의 질곡은 현재진행형입니다.

 

에피아와 에시를 포함하여 각각 일곱 세대, 14명의 인물이 번갈아 화자로 등장하는데, 본 내용이 444페이지에서 마무리됐으니 한 인물당 평균 30여 페이지가 할당됐다는 뜻입니다. 이야기의 규모나 서사의 두께에 비하면 한 인물의 삶을 그리기엔 너무나 부족해 보이는 분량이지만, 작가는 각 인물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지점과 사건에 집중함으로써 오히려 그 비극성을 돋보이게 만들었습니다. 누군가는 10대에 자식을 낳고 세상을 떠났고, 누군가는 목전의 죽음을 극복하긴 했지만 결국 고통스런 장수를 누려야 했습니다. 그들의 삶 가운데 비극적인 정점을 응축한 30여 페이지의 챕터들은 분량과 무관하게 매번 독자의 가슴에 무거운 돌 하나를 얹어놓곤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조상들의 고통스런 시간과 삶이 축적된 결과물, 즉 현재를 살아가는 후손들의 이야기를 통해 독자들에게 소소한 안도감과 미래에 대한 희망을 전해주기도 합니다. 마지막 챕터의 주인공인 마조리(에피아의 후손)와 마커스(에시의 후손)가 우연이지만 실은 운명처럼 만나게 된 것도, 또 그들의 조상인 에피아와 에시의 흔적을 찾아 서아프리카 황금해안을 함께 찾은 일도 다분히 허구적인 판타지이긴 하지만 300년 가까운 시간이 지나 마치 에피아-에시 자매가 다시 만난 것처럼 울컥한 느낌을 맛보게 되는 것은 비단 저만의 경험은 아닐 것입니다.

 

흑인, 노예, 아프리카, 미국 등 말 그대로 남의 나라 이야기일 뿐이지만, 시대를 거스를 수 없었던 개인의 비극이 대를 이어가며 이리저리 변주되는 과정들은 충분히 보편적인 공감과 공분을 자아내고 있습니다. “딱 이만큼의 분량이 더 있었더라면...”이란 유일한 아쉬움을 제외하곤 깊은 인상과 여운을 맛볼 수 있는 작품이라 한국에서도 꽤 호응을 받을 것으로 보입니다.

새삼 앞서 언급한 박경리의 토지와 조정래의 아리랑을 다시 읽고 싶은 마음이 들었는데, 비극적인 대서사들만이 발휘할 수 있는 압도적인 힘과 매력에 대한 갈증이 밤불의 딸들로 인해 갑작스레 도졌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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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비밀에는 이름이 있다 하영 연대기 2
서미애 지음 / 엘릭시르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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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비밀에는 이름이 있다는 이른바 하영 연대기 3부작의 두 번째 작품입니다. 1부인 잘 자요, 엄마2010년에 출간됐으니 무려 11년 만인 셈인데, 원래 잘 자요, 엄마는 완결된 이야기였지만 개정판(2018) 준비 과정에서 시리즈 구상이 이뤄졌고, 그로부터 거의 3년 만인 2021년 봄에 하영의 두 번째 이야기가 독자들 앞에 선을 보인 것입니다.

 

이 작품의 내용이라든가 주인공 하영과 의붓엄마 선경에 대해 이야기를 하려면 잘 자요, 엄마의 내용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데, 그건 또 그것대로 스포일러가 될 여지가 너무 많아서 서평을 어떻게 풀어내야 할지 참 난감한 게 사실입니다. 다만, 출판사가 공개한 선에서 잘 자요, 엄마의 내용을 포함하여 간략하게만 정리해보면...

 

희대의 연쇄살인범 이병도의 면담을 맡게 된 덕분에 신경이 예민해져있던 범죄심리학자 선경은 어느 날 갑자기 남편이 데려온 전처의 11살 딸 하영을 맡게 되면서 안팎으로 큰 혼란을 겪게 됩니다. 평범한 소녀가 아닌 하영의 존재는 선경에게 공포심마저 갖게 만듭니다. 결국 하영-선경-이병도가 극적으로 갈등하고 충돌한 끝에 사건은 끔찍하게 마무리됩니다. 이 사건을 통해 작가는 소시오패스는 태어나는가, 만들어지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는데, 이번에는 5년이 지난, 즉 극도로 예민한 나이에 이른 16살의 하영을 통해 완성 직전의 소시오패스가 겪게 되는 내적 갈등과 딜레마를 그리고 있습니다.

 

선경은 5년이 지났어도 여전히 자신을 아줌마라고 부르는 하영과 아슬아슬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와중에 남편이 갑작스레 꺼내든 강릉으로의 이사와 전학 문제로 신경이 곤두섭니다. 안 그래도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자신의 정체성 때문에 날이 서있던 하영은 거세게 반발했지만 정작 강릉으로 이사한 뒤엔 새로운 환경에 대한 호기심과 다시금 피어오르는 소시오패스의 본능으로 인해 누구보다 잘 적응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이 전학한 학교에서 벌어진 집단 괴롭힘과 실종사건에 촉각을 곤두세우기 시작합니다.

 

잘 자요, 엄마11살 하영이 본능에 따라 행동하는 맹아기의 소시오패스였다면, 16살의 하영은 또 다른 자신의 자아와 끊임없이 대화하고 충돌하며 갈등하는 성장기 소시오패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완전히 죽이지 않으면 계속 자신을 괴롭힐 것 같아서 뱀의 머리를 짓이기고 칼로 잘라내는 섬뜩한 면모를 갖고 있지만, 스스로의 폭발을 가까스로 제어할 수 있는 합리적인 이성 역시 동시에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 ‘아줌마선경에 대한 양가적 감정, 텅 빈 채 남아있는 유년의 기억들은 하영을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처럼 만듭니다. 거기에 전학한 학교에서 마주한 실종사건까지 끼어들면서 하영의 몸과 마음은 지켜보는 독자마저 불안해질 정도로 지독한 혼란에 빠져들고 맙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하영은 미스터리 해결사로서의 매력적인 모습을 특별한 간식처럼 내놓기도 합니다.

 

제목대로 이 작품에는 여러 사람들의 비밀이 등장합니다. 전작에서 하영과 선경만이 공유하게 된 이병도 사건의 비밀, 누구에게도 말한 적 없거나 스스로 기억하지 못하는 하영의 유년기의 비밀, 강릉으로의 이사를 강행한 남편의 비밀, 그리고 하영이 전학한 학교에서 벌어진 실종사건의 비밀이 그것들입니다. 각각의 비밀은 서로 독립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하영을 중심으로 내밀하게 연결돼있어서 어느 하나라도 폭발하는 순간 하영의 의지와 감정에 따라 도미노처럼 연이어 폭발하게 되는 파괴적인 구조를 지니고 있습니다. 어느 비밀이 먼저 터질까, 그것의 후폭풍은 어디에 먼저 불똥을 떨어뜨릴까, 독자들은 팽팽한 긴장감 속에 페이지를 넘길 수밖에 없게 됩니다.

 

중반까지만 해도 가족에게 닥친 불온한 기운을 그린 심리스릴러에 가까워서 전작인 잘 자요, 엄마를 안 읽은 독자라면 다소 모호하게 읽힐 여지가 있는 게 사실입니다. 물론 작가가 이런저런 부연설명들을 달아놓긴 했지만 잘 자요, 엄마의 스포일러를 피하기 위해 최소한의 정보만 제공되기 때문에 전작을 안 읽은 독자에겐 그야말로 감질날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더구나 이 작품에는 잘 자요, 엄마의 엔딩을 능가하는 어마어마한 대반전이 숨어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이 작품의 진가를 맛보려면 어쩔 수 없이 잘 자요, 엄마가 선행필수라는 뜻입니다.

 

본 내용이 373페이지에서 끝나는데, 개인적으로 이 작품에 대한 가장 큰 불만은 너무나도 짧은 분량입니다. 기초공사나 다름없는 초반부 심리스릴러 서사가 마무리되고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되는 지점에서 남은 페이지를 확인하곤 때 이른 아쉬움부터 든 게 사실인데, 다 읽은 뒤에 다시 생각해봐도 적어도 100페이지 정도는 더 있었어야 16살 소시오패스 하영의 비밀과 갈등과 폭발이 제대로 그려졌을 거란 판단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373페이지에 실린 이야기들이 조금도 빈틈없고 정교하게 직조된 건 맞지만, 읽고 싶은 내용들이 한참 많이 남은 상태에서 마지막 장을 향해 속절없이 줄어드는 페이지는 말 그대로 아쉬움 그 자체였습니다.

 

하영 연대기 3부작의 마지막 작품에서 하영이 얼마만큼 성장한 상태에서 어떤 모습으로 등장할지는 전혀 예측할 수 없지만, ‘완성된 소시오패스의 진면목을 보여주지 않을까, 조심스레 기대하게 됩니다. 충격적인 떡밥까지 제공되진 않았지만 충분히 다음 이야기를 궁금하게 만들 만한 엔딩이 그려졌는데, 그저 바람이라면 하영과 선경의 마지막 이야기를 만나기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으면 하는 점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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