줌 인 케이스릴러
고도원 지음 / 고즈넉이엔티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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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 판결을 앞둔 희대의 연쇄살인범, 염석희. 그녀가 저지른 17건의 살인 자백을 유도하는 범죄심리 전문가, 심수영. 구치소 안에서 마지막 살인 계획을 세우는 석희와 그녀의 무모한 계획을 막아야 하는 수영의 숨 막히는 심리 대결. 두 여자의 목숨을 건 두뇌 싸움이 시작된다!”

 

인터넷 서점의 소개글은 대략 이 정도가 전부입니다. 굉장히 복잡한 구도와 적잖은 캐릭터가 등장하는 작품이라 제대로 소개하려면 한도 끝도 없어지긴 하겠지만, 그래도 다 읽은 뒤 다시 보니 너무 빈약한 탓에 오히려 독자들의 호기심을 끌지 못할 것처럼 보이는 것은 물론 실제 작품 내용과는 다소 거리가 먼 엉뚱한 소개글처럼 보인 게 사실입니다. 스포일러를 피하는 선에서 조금만 더 소개를 해보면...

 

체포된 이후 내내 진술을 거부하던 연쇄살인범 염석희는 심리상담사 심수영에게 기괴한 제안을 합니다. 자신이 낸 문제를 풀면 그간의 살인사건에 대해 진술하겠다는 것입니다. 애초 염석희의 상담을 맡게 된 과정도 석연치 않았지만 심수영은 사건 해결에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차원에서 그 제안을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상담은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고, 심지어 염석희 사건에 자신의 딸 영지까지 휘말리는 사태에 이르자 심수영은 패닉 상태에 빠집니다. 영지를 구하기 위해 사건의 한복판에 뛰어든 심수영은 염석희가 저지른 17건의 살인사건의 실체와 그녀의 과거, 그리고 그녀의 궁극의 목표를 깨닫곤 큰 충격을 받습니다.

 

10대 때 저지른 첫 살인부터 염석희의 단 하나의 살인 동기는 복수입니다. 평균 1년에 두 건 정도의 살인을 저지른 셈인데, 그만큼 완벽하고 정교한 계획에 의해 차근차근 복수를 진행시켜왔다는 뜻입니다. 염석희는 구치소에 갇힌 상태에서도 18번째 목표물을 향한 살인계획을 빈틈없이 진행시킵니다. 그녀의 복수심은 그만큼 강렬하고 집요하다는 뜻입니다.

 

난 첫 단추를 잘못 끼웠어. 그러다 의외로 내가 그 잘못된 일에 재능이 있다는 걸 알았지. 나 같은 사람밖에 할 수 없는 일을. 괴물사냥. 괴물은 괴물이 잡아야지.” (p233)

 

두 주인공의 캐릭터도 독특하고, 살인사건의 구도도 여러 가지 면에서 눈길을 끄는 작품입니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사적 복수 코드가 깔려 있어서 무척 흥미롭게 읽히기도 했습니다. 악의 집단은 사악함과 잔인함으로 똘똘 뭉친데다 뛰어난 지능과 폭력을 동원하여 오랜 시간동안 자신의 이익을 공고히 구축해왔습니다. 그에 맞서는 두 주인공 염석희와 심수영은 한편으론 적대적인 관계지만 한편으론 악의 집단에 맞서기 위한 위태로운 협력 관계이기도 합니다. 그녀들의 여정은 온갖 위기와 피비린내를 넘어 가까스로 결말에 다다르긴 하지만, 막판에 드러난 진실은 그저 무참할 따름입니다.

 

최대한 단순하게 정리하면 악을 향한 복수극이지만, 사건에 연루된 인물들도 워낙 많고 그들 각자의 사연도 천차만별에 모호함 투성이라 읽는 동안 이야기 구도 전체가 한 눈에 쉽게 들어오진 않습니다. 대부분 중반 이후에나 독자에게 공개되는 각 인물들의 과거와 사연들은 그 전까지는 계속 ?”라는 의문만 자아내서 몰입에 꽤나 방해가 됐다는 생각입니다.

 

그와 함께 다소 불친절하고 겉멋에 치중한 듯한 작가의 멋부림은 이 작품에서 가장 아쉽게 느껴진 부분이었습니다. 뭔가 있어 보이게 하기 위한 억지스런 설정들, 리얼리티를 희생시켜가면서까지 과도하고 비현실적으로 강조된 스케일과 화려함, “?”라는 궁금함을 제 때 풀어주지 않고 혼자서만 진격하는 듯한 작가의 독주 등이 그것인데, 나름 복잡한 설정과 인물들을 큰 오차 없이 설계한 건 분명한 장점이긴 하지만, 그에 못잖게 허술하거나 이해하기 힘든 대목들이 많았던 것도 사실입니다. 다 읽은 뒤 곰곰이 생각해보면 굳이 오랜 시간이 걸릴 필요가 없어 보인 염석희의 복수극도, 본의 아니게 사건에 휘말린 심수영의 기구한 사연도 숲은 그럴듯해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정작 나무들은 엉성하기 짝이 없다.”는 식의 느낌을 받게 된 건 그런 이유들 때문으로 보입니다.

 

출판사가 줄거리 소개를 극도로 아낀 탓에 내용보다는 모호한 인상비평에 가까운 서평이 되고 말았습니다. 비록 중반까지 누린 기대감과 만족감이 끝까지 유지되지 못한 건 아쉬운 일이지만 기교나 스케일보다 디테일과 리얼리티에 좀더 주력한다면 고도원의 다음 작품은 한국 스릴러의 새로운 기대주라는 호칭이 당연하게 느껴질 정도로 매력적인 이야기를 담아낼 것이 분명하다는 생각입니다. 필력에 관한 한 그런 기대를 가져도 충분하다는 확신을 작품 곳곳에서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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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의 공놀이 노래 시공사 장르문학 시리즈
요코미조 세이시 지음, 정명원 옮김 / 시공사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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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양 차 그동안 여러 사건으로 인연을 맺었던 오카야마 현을 다시 찾은 긴다이치 코스케는 현경의 이소카와 경부로부터 23년 전 귀수촌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에 대해 듣게 됩니다. 그리고 당시 피살된 남자의 미망인이 운영 중인 한적한 온천 거북탕을 숙소로 소개받습니다. 사건에 관심이 끌린 코스케는 귀수촌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23년 전 사건에 대해 탐문하기 시작합니다. 한편, 귀수촌 출신으로 인기 연예인이 된 오조라 유카리가 명절을 맞아 귀향하자 젊은이들은 한껏 들떠 축제를 준비합니다. 그런데 그 축제의 날을 시작으로 유력가문의 딸들이 차례로 살해됩니다. 코스케는 뒤늦게야 옛날에 유행했던 공놀이 노래의 불길한 가사가 그녀들의 죽음과 연관 있음을 깨닫습니다. 23년 전 살인사건이 이번 연쇄살인과 무관치 않음을 확신하게 됩니다.

 

10여 년 전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를 처음 만났던 작품이 악마의 공놀이 노래입니다. 덕분에 긴다이치 코스케의 팬이 됐고 그 뒤로 시리즈 작품들을 한 편씩 찾아 읽게 된 건데, 그래서인지 다른 작품들보다 더 애착을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인상 깊었던 몇몇 장면을 제외하곤) 다행스럽게도(?) 기억이 거의 나지 않아 마치 처음 읽는 느낌으로 불길하기 짝이 없는 공놀이 노래 가사가 실린 프롤로그부터 찬찬히 읽기 시작했습니다.

 

한때 귀수촌의 부와 권력을 양분했지만 지금은 명암이 확실하게 갈린 두 개의 유력가문, 마을사람들로부터 존경과 두려움을 동시에 받고 있는 어딘가 수상쩍은 귀수촌의 촌장, 인적 없는 고갯길을 넘어 귀수촌에 들어온 정체불명의 노파, 그리고 뛰어난 미모를 지닌 유력가문의 딸 등 긴다이치 코스케가 마주한 귀수촌의 인물들은 하나 같이 불온한 기운을 지니고 있습니다.

명절 축제와 의문의 실종사건이 한꺼번에 터져 온 마을이 뒤숭숭한 가운데 공놀이 노래가사에 맞춰 벌어진 참극은 기이하다 못해 극도의 공포심을 자극하는데, 희생자들이 누군가 명백한 의도를 갖고 꾸민 엽기적인 상황 속에서 발견된 것도 문제지만, 하나같이 뛰어난 미모를 자랑하는 귀수촌의 유력가문의 딸들이라는 점이 사람들을 더욱 더 깊은 혼란에 빠뜨립니다.

 

메모가 필요할 정도로 꽤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는데다, 23년 전 사건과 현재의 사건을 동시에 수사하는 긴다이치 코스케의 행보도 바쁘고 복잡하게 오가는 탓에 어떤 작품보다도 집중력이 더 요구되는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분명 범인은 귀수촌 사람 가운데 하나지만 긴다이치 코스케도 이소카와 경부도 좀처럼 실마리를 찾지 못해 혼란에 빠지는데, 여기서 결정적인 실마리 노릇을 하는 게 바로 오래 전 유행했던 섬뜩한 공놀이 노래의 가사입니다.

어여쁘지만 술고래인 술잔 집 아가씨, 어여쁘지만 구두쇠인 저울 집 아가씨, 어여쁘지만 돌계집인 자물쇠 집 아가씨3절에 걸쳐 등장하는 어여쁜 아가씨들은 하나같이 퇴짜맞았네라는 가사로 마무리되는데, 실은 이 노래의 연원을 따져 올라가면 퇴짜맞았네.”살해당했네.”와 같은 의미로 해석됩니다. 뒤늦게 이 노래를 알게 된 긴다이치 코스케는 범행의 윤곽은 눈치 챌 수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범행 동기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라 답답할 따름입니다.

 

막판에 드러난 23년 전 사건의 진실과 현재 연쇄살인 사이의 접점은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에서 자주 만날 수 있었던 인간의 근원적인 감정들, 즉 끝없는 탐욕, 추잡한 욕망, 이루 말할 수 없는 증오와 복수심 등으로 가득 차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진실이 밝혀지는 순간에도 속이 시원하다거나 통쾌함 같은 감정은 조금도 들지 않았고 오히려 가슴 한쪽에 큰 돌덩이가 턱 얹힌 듯한 느낌이 강하게 들었는데,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대부분이 이런 식으로 엔딩을 장식하곤 있지만 악마의 공놀이 노래는 그 무게감 자체가 사뭇 달라 보인 작품이었습니다.

 

악마의 공놀이 노래1959년에 연재가 완료된 작품인데, 한국에 소개된 그 다음 작품은 1976년에 출간된 가면무도회입니다. (2021년에 출간될 미로장의 참극역시 1976년 작품입니다.) 무려 17년의 간극이 있는 셈인데, 그것은 악마의 공놀이 노래이후 눈에 띌 만한 작품이 없었던 탓도 있지만 요코미조 세이시가 1964년부터 거의 10년 간 절필한 것이 결정적인 이유입니다. ‘해설에 따르면 악마의 공놀이 노래이후 시쳇말로 고리타분한 작가가 돼 버린요코미조 세이시는 미스터리의 새로운 흐름과 영미권 작품의 신선함을 이겨내지 못했다고 하는데, 그런 그가 두 번째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기까지 무려 10년의 시간이 필요했다고 합니다.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 다시 읽기는 이제 가면무도회병원 고개의 목매달아 죽은 이의 집단 두 편만을 남겨두고 있습니다. 2014년 이후 7년 만에 한국에 새 작품(미로장의 참극)이 출간될 예정이라 더없이 반갑긴 하지만, 좀더 많은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가 추가로 소개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20세기 중반의 올드한 작품들이긴 해도 다른 데선 맛볼 수 없는 투박하면서도 특별한 맛이 잔뜩 배어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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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얼굴은 먹기 힘들다
시라이 도모유키 지음, 구수영 옮김 / 내친구의서재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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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 전 치명적인 바이러스의 공습에서 겨우 살아남은 인류는 미증유의 사태에 직면했습니다. 가까스로 개발한 치료제가 인간 외에는 효과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바이러스의 위험 때문에 육류 소비에 공포를 느낀 인류가 채식에만 의존하며 살아가던 어느 날, 일본의 유전공학자 후지야마가 식용 클론(복제인간)’ 생산을 주장합니다. 격론에도 불구하고 순식간에 일본 도처에 식용 클론을 키우고 도축하는 가공시설이 들어서기에 이릅니다. 후지야마는 일약 인기 정치인으로 발돋움하는데, 어느 날 그에게 두 개의 사건이 한꺼번에 벌어집니다. 하나는 식용 클론 반대운동의 리더를 살해한 용의자로 몰린 일이고, 또 하나는 누군가 그에게 살처분 과정에서 반드시 제거됐어야 할 식용 클론의 머리를 협박장과 함께 배달한 일입니다.

 

이 작품보다 한국에 먼저 소개된 시라이 도모유키의 그리고 아무도 죽지 않았다이것이 일본을 휩쓴 특수설정 미스터리다!”라는 출판사의 홍보카피대로 상상을 초월하는 특수설정을 통해 엽기적인 이야기를 풀어낸 작품입니다. “기발함을 넘어 속을 불편하게 만드는 설정과 묘사를 태연히 구사하는 대목에선 작가의 뇌 구조가 궁금해질 뿐이었다.”라는 서평을 쓸 수밖에 없었던 독특한 작품이었는데, 시라이 도모유키의 데뷔작인 이 작품은 그리고 아무도 죽지 않았다를 능가하는 엽기적인 미스터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자신이 제공한 체세포로 생산된 클론만을 먹을 수 있으며(즉 타인의 클론은 먹을 수 없음), 도축된 클론은 소비자에게 배송되기 전 반드시 머리를 제거해야 한다는 나름 윤리적인 규정이 만들어지긴 했지만 어쨌든 동물성 단백질이 희귀해진 인류가 육류 소비를 위해 속성으로 키워진 자신의 클론, 즉 인육을 식탁 위에 올린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아찔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식용 클론 반대론자들이 도처에 세워진 가공시설을 동양의 아우슈비츠라고 부르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다른 서사 없이도 충분히 세기말적 호러물 한 편을 완성시킬 수 있는 소재지만 작가는 거기에다 살인, 협박, 폭력, 복수 등 다양한 미스터리 코드를 결합시켜 좀더 복잡하고 다층적인 이야기를 완성시킵니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자세히 소개할 순 없지만 흥미로운 반전을 일으키는 절묘한 트릭까지 더해져서 마지막까지 범인의 정체를 미궁에 빠뜨리는데, 눈치 빠른 독자들은 중반부쯤 느껴지는 위화감 덕분에 일찌감치 진실을 알아챌 수도 있겠지만 막판 에필로그까지 철저하게 숨겨둔 작가의 히든카드에 결국 뒤통수를 얻어맞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사실 이 작품은 미스터리의 형식을 갖추고 있지만 그보다는 윤리에 관한 제법 묵직한 주제의식을 내포한 작품입니다. 아무리 미화해도 결국 식인(食人)에 다름 아닌 식용 클론의 도덕적 문제는 말할 것도 없고, 비위생적인 시설에서 폭력적으로 사육당하는 클론의 인권문제라든가, 샐러리맨의 평균 연봉을 웃도는 식용 클론의 가격에서 비롯되는 유전육식 무전채식이라는 계급적 문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윤리적 문제를 작품 곳곳에 심어놓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이런 세상이 도래한다면 윤리고 나발이고 동물성 단백질을 더 숭배하는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겠지만 그건 정말 상상조차 하기 싫은 끔찍한 장면일 수밖에 없습니다.

 

어쨌든 미스터리 작품이니 거기에 대해서도 간략하게 언급하면... 실은 그리고 아무도 죽지 않았다에서 느꼈던 아쉬움보다는 덜 하긴 해도 여전히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고개가 갸웃해진 게 사실입니다. 두 작품 모두 트릭의 실체를 설명하기 위해 적잖은 분량과 장황하기까지 한 변()들이 동원되는데, 문제는 그 설명들이 대체로 억지스럽게 끼워 맞춘 듯한 인상이 강했다는 점입니다. “열과 성을 다해 정교한 설계를 했다고도 볼 수 있지만 읽는 독자 입장에선 결과를 위해 과정을 꾸민 것처럼 보였다고 할까요?”라는 그리고 아무도 죽지 않았다의 서평과 마찬가지로 이 작품 역시 그런 아쉬움을 피할 수는 없었습니다.

 

34회 요코미조 세이시 미스터리 대상 최종 후보작에 올랐지만 극단적인 평가와 격론 끝에 대상에서 제외됐다는 일화에서 알 수 있듯 이 작품이 독자들 사이에서도 꽤 큰 호불호를 일으킬 건 분명해 보입니다. 개인적으론 미스터리 자체보다도 식용 클론이라는 세기말적 호러 코드가 더 매력적으로 느껴졌는데 그 부분에 좀더 주목한다면 의외로 흥미롭고 의미 있는 책읽기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다만, 이 작품을 포함하여 작가가 인간 시리즈라고 부른다는 후속작들(‘도쿄 결합 인간’, ‘잘 자, 인면창’)까지 마음 편하게 읽을 자신은 없는 게 사실인데, 어떤 설정이 깔려있는지에 따라 꽤나 고심하게 될 것만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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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설헌 - 제1회 혼불문학상 수상작
최문희 지음 / 다산책방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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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의 시인 손곡 이달에게 시를 배운 난설헌은 8살에 지은 백옥루 상량문으로 놀라운 재능을 세상에 알린다. 여자에겐 암흑과도 같은 시대였지만, 아버지 초당 허엽과 오빠 허봉은 난설헌의 재능을 아끼고 존중해주었다. 그러나 15살에 김성립과 혼인하며 그녀의 삶은 삐걱대기 시작한다. 신분 차이 때문에 갈라서야 했던 사내 최순치, 똑똑하고 당찬 며느리를 지독히 혐오한 시어머니, 열등감으로 아내에게 마음을 닫은 남편, 아버지와 오빠의 잇따른 객사, 자식들을 앞세운 상실감까지. 삶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은 오로지 시를 쓰는 일, 그뿐이었다. 규범의 족쇄와 규방 속 고통을 모두 끌어안았음에도 난설헌의 영혼은 시 안에서 자유로웠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주로 추미스(추리, 미스터리, 스릴러)에 집착하는 편이지만 나름 역사소설도 좋아하는데, 우연한 기회에 다산북스를 통해 받은 난설헌1회 혼불문학상 수상작이란 타이틀까지 갖추고 있어서 큰 기대를 가졌던 작품입니다.

허난설헌에 대해 알고 있는 거라곤 학생 시절에 배운 여성이 글 자체를 금지 당하던 시대에 태어났지만 빼어난 작품들을 남긴 천재 시인”, 또는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의 누이정도가 전부였습니다. 27살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는 것도, 결혼 후 불행한 삶을 살았다는 것도 이 작품을 통해 처음 알게 된 사실들입니다. 혹시나 소설적 허구의 산물은 아닐까, 싶어 인터넷에서 지식백과들을 검색해보니 거의 엇비슷한 내용들이 실려 있었는데, 아마도 그녀가 남긴 시 속에서 그녀의 삶의 모습들을 추정한 결과 덕분이란 생각입니다.

 

작가 스스로 고백했듯 허난설헌에 대한 역사적 자료는 무척 빈약했지만 작가는 거기에 탄탄한 허구와 상상을 덧붙임으로써 불과 27년이란 허난설헌의 짧은 생을 부족하지도, 넘치지도 않게 생생히 그려냈습니다. 특히 작가가 가장 공들여 묘사한 대목, 즉 가장 봉건적이고 남성 중심적인 시대를 살아야만 했던 그녀의 안타깝고 비극적인 운명은 성별을 떠나 어느 독자에게든 강한 인상을 남길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삼종지도와 굴종만을 강요받은 것은 물론 지필묵조차 허락받지 못한 채 자신의 치마 끝자락에 시선을 고정해야 했던 조선시대 여성들의 숙명이 유독 허난설헌에게 더 깊고 아픈 상처를 남긴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녀가 지닌 천재적 재능 때문입니다. 8살에 모두를 깜짝 놀라게 하는 시를 짓지 않았다면, 또 가족들이 그녀의 능력을 아끼고 존중해주지 않았다면 어쩌면 허난설헌의 삶은 조금은 덜 고통스러웠을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작가는 수많은 족쇄와 가혹한 상황 속에서도 시를 통해 자신을 잃지 않으려 한 허난설헌의 의지를 집요하고 세밀하게 그림으로써 그녀의 아이러니함을 동정하지도 않고 가련히 여기지도 않는 일관적인 시선을 유지합니다. “(허난설헌의) 시는 그 고단한 삶으로 인하여 더욱 처절하고 처연해지며 급기야 모든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위대한 작품이 된다.”라는 혼불문학상 심사평은 작가의 그런 일관된 시선 덕분이라는 생각입니다.

 

실존인물을 다룬 소설이다 보니 소설 자체에 대한 서평을 쓰기가 쉽지 않지만 한두 마디만 덧붙이자면, 우선, 예스러운 비유와 정갈한 고어(古語)가 넘쳐나는 문장들은 독자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 여지가 있어 보입니다. 허난설헌과 그녀 주변의 분위기를 사실적인 문장보다 더 사실적으로 느끼게 만드는 이 작품만의 특별한 매력일 수도 있지만 다소 난해하고 어지럽게 읽힐 여지도 있기 때문입니다.

또 실존인물이 주인공이라고 해도 나름의 기승전결을 바라는 독자가 많겠지만 이 작품은 허난설헌의 고통스런 삶의 기록에 더 가깝기 때문에 계속 오르막이거나 반대로 계속 내리막처럼 읽힐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개인적으론 분노와 슬픔만이 엇갈리는 이야기에 가끔 숨이 막히듯 답답함을 느끼곤 했는데, 어쩌면 그것이 이 작품의 진짜 미덕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작품을 읽고 허난설헌을 모델로 삼되 조금은 통쾌하고 따뜻하고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되는 100% 허구의 이야기를 바라는 독자가 제법 있을 것 같습니다. 일단 저부터 그런 생각이 들었는데,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허난설헌의 꿈과 삶이 허구를 통해서라도 구현됐으면 하는 바람이 그만큼 간절했다는 뜻입니다. , 교과서에 실린 단편적인 정보 외에 허난설헌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는 부끄러움 역시 ‘100% 허구의 이야기에 대한 바람의 이유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그 허구의 이야기를 통해 허난설헌의 진면목이 제대로 알려질 수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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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암성 - 최신 원전 완역본 아르센 뤼팽 전집 3
모리스 르블랑 지음, 바른번역 옮김, 장경현.나혁진 감수 / 코너스톤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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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코너스톤에서 출간한 아르센 뤼팽 전집중 세 번째 작품인 기암성입니다. 1~2편인 괴도신사 아르센 뤼팽아르센 뤼팽 대 헐록 숌즈를 읽고 5년 반 만이니 좀 과한 공백이 있었던 셈인데, 달리 해석하면 그만큼 먼저 읽은 두 편에서 큰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셜록 홈즈의 경우 청소년 판으로 읽을 때부터 바로 팬이 됐지만, ‘괴도 루팡’(예전엔 이렇게 불렀습니다.)도둑이 주인공?”이라는 호기심과 기대에 비해 그리 인상적이지 못했던 탓에 이렇게 뒤늦게야 전집으로 만나게 된 건데, 아무래도 제 성향은 역시 셜록 홈즈 쪽이라는 걸 재확인한 책읽기가 되고 말았습니다.

 

제스브르 백작의 저택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을 놓고 예심판사, 검사대리, 현지 경찰은 물론 파리에서 파견된 가니마르 경감마저 우왕좌왕하고 있을 때, 혜성처럼 나타난 17살 천재소년 이지도르 보트를레가 범행의 목적과 방법을 정확하게 파악합니다. 더구나 보트를레는 범인의 우두머리가 뤼팽이란 사실까지 적시하여 모두를 깜짝 놀라게 만듭니다.

하지만 보트를레가 사건현장에서 우연히 발견한 낡은 암호 쪽지는 이후 사건의 양상을 전혀 다른 방향으로 끌고 갑니다. 뤼팽을 꺾은 천재소년으로 칭송받게 된 보트를레는 뤼팽과의 끝장대결을 위해 암호 쪽지를 단서로 그의 행적을 추적하기 시작하고, 끝내 노르망디 해안에 자리한 기암성, 즉 뤼팽의 요새에 다다르게 됩니다.

 

기암성은 아르센 뤼팽을 안 읽은 독자라도 그 이름은 여러 차례 들어봤을 만큼 시리즈 가운데 가장 유명한 작품입니다. 그래서인지 이 작품을 계기로 뤼팽의 매력에 한껏 빠져들 수 있겠다는 기대감을 가진 게 사실인데, 마지막 장을 덮을 무렵엔 여러 가지 면에서 기대에 못 미친 아쉬움만 잔뜩 남고 말았습니다.

 

무엇보다, 호흡만 빠르지 상황이나 감정을 전혀 이해시키지 못한 하이라이트 요약본같은 문장들이 내내 거슬렸습니다. 어떤 인물도 자신의 감정을 독자에게 전달하지 못하고 있고, 중요한 상황 대부분은 앞뒤 맥락을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과하게 압축, 요약돼있습니다.

당연히 사건에 연루된 주요 인물들의 행보도 정신없이 오락가락할 수밖에 없는데, 고교생인 보트를레가 애초 어떻게 사건현장에 나타날 수 있었던 건지도 잘 모르겠고, 그가 굳이 뤼팽과의 전면전에 목숨을 건 이유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공감하기 어려웠습니다.

주인공인 뤼팽은 이 작품에서 신출귀몰한 도둑으로서의 면모는 물론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라도 사랑을 쟁취하려는 순정남으로 그려지지만, 작품 내내 통 잘 보이지도 않고, 그나마 나타났다 하면 말도 안 되는 변장술만 부리고, 감정은 전부 제 입으로만 설명하고 있으니 도둑이든 순정남이든 어느 하나 매력적인 면모가 없었습니다.

 

기암성서평 대부분에서 지적되는 조연들의 문제도 굉장히 실망스러웠는데, 뤼팽의 숙적인 헐록 숌즈(코난도일의 동의를 못 얻은 탓에 셜록 홈즈가 이런 식으로 표기됩니다.)는 멍청한 헛발질만 하다가 말도 안 되는 악행까지 저질러서 이럴 거면 왜 나온 거야?”소리를 저절로 나오게 만들었고, 역시 뤼팽을 쫓는 단골 추격자 가니마르 경감은 늘 뒷북만 치거나 그 뒷북마저 아무 결과를 만들어내지 못해서 위기감은커녕 헛웃음만 나오게 만들고 있습니다.

 

뤼팽의 요새이자 은신처인 노르망디 해안의 기암성은 터무니없는 역사와 그 용도 때문에 오히려 현실감이라곤 조금도 없는 억지 그 자체로만 보였습니다. 그저 뤼팽을 신격화하기 위한 황당무계한 공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서 클라이맥스와 엔딩을 읽으면서도 조금도 긴장감을 느낄 수 없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애초 제스브르 백작의 저택에서 벌어진 사건이 어떤 과정을 겪어서 기암성에서의 마지막 대결까지 연결됐는지조차 애매모호할 따름이었는데,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에 그 중요한 대목들이 제대로 생각나지 않는 걸 보면 제 기억력과 이해력이 부족한 탓이거나 아니면 이해도 공감도 얻지 못한 채 억지에 억지를 거듭하며 그저 빨리 달리기만 한 이야기탓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시리즈 다음 작품은 기암성못잖게 유명한 ‘813’인데, 솔직히 그 작품을 언제쯤 읽게 될지는 자신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분명 매력적인 괴도 뤼팽의 매력이 철철 넘치는 작품이 있을 텐데, 한 편이라도 그런 작품을 만난다면 스스로를 달래서라도 이 시리즈를 마스터하고 싶은 욕심이 있긴 하지만 지금으로선 그리 쉽지 않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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