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죄자
레이미 지음, 박소정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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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년 전인 1990, C시에서 끔찍하고 엽기적인 연쇄 강간 토막살인사건이 벌어졌습니다. 범인은 네 명의 피해자의 신체를 훼손한 뒤 검은 비닐에 담아 시내 곳곳에 유기했습니다. 경찰 상부는 물론 언론과 여론의 압박에 시달리던 수사팀은 악전고투 끝에 범인을 체포했지만 범인은 법정에서 내내 무죄를 주장했고 수사팀 내에서도 진범이 아니라는 의견이 나온 탓에 사형집행이 이뤄진 뒤에도 사건은 여러 사람의 뇌리 속에 불쾌한 앙금을 남겼습니다.

그리고 23년이 지난 현재, 당시 수사팀 중 진범이 따로 있다고 주장했던 인물을 비롯하여 평생을 복수심으로 살아온 피해자의 유족, 우연히 진실 찾기에 가세한 법대생 등 여러 사람이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그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기 위한 분투를 시작합니다.

 

700페이지가 훌쩍 넘는 방대한 분량에 그에 걸맞은 묵직한 서사가 담긴 레이미의 작품입니다. 레이미는 천재적 프로파일러 팡무가 활약하는 심리죄 시리즈두 편으로 만난 적 있는데, 엽기적인 범죄, 복잡다단한 구성, 매력적인 프로파일링 등 다채로운 매력을 발산한 작가라서 (‘심리죄 시리즈는 아니지만) 새로운 작품 순죄자의 출간소식이 무척 반갑게 들렸습니다.

 

요약하면, 23년 전 사건의 진실을 찾으려는 자들과 그것을 저지하려는 자들, 그리고 진범이 벌이는 ‘3각 대결이라고 할 수 있는데, 사건도 사건이지만 진실 찾기를 둘러싼 각 인물들의 인간적인 고뇌와 함께 지독하기 짝이 없는 운명의 장난 같은 게 더 짙게 느껴지는 작품입니다. 원죄(冤罪), 증오, 후회, 복수 등 23년이 지났어도 조금도 변치 않은 각 인물들의 감정은 뒤늦게 발동이 걸린 진실 찾기과정에서 걷잡을 수 없이 폭발하기 때문입니다.

 

조직의 비난을 무릅쓰고 진범이 따로 있다고 주장하다가 동료들과 등을 돌리고 만 두청, 뒤늦게 진범의 정체를 알고도 자신과 동료들의 파멸이 두려워 진실을 은폐한 뤄사오화, 압박에 시달리던 끝에 신빙성 없는 증거에 눈이 뒤집혀 억울한 자를 사형대로 보낸 마졘 등 톄둥 분국 소속인 세 명의 경찰이 (퇴직했거나 퇴직을 앞두고) 운명적으로 재회하게 됩니다.

이제 편안한 삶을 바랄 수 있는 60대에 이르러 옛 사건 때문에 다시 충돌한 이들의 애증은 조사가 진척될수록 23년 전보다 더 깊고 싸늘한 수렁 속으로 빠져들고 마는데, 어느 쪽이 정의인지는 명백해도 정의롭지 못한 자들의 딜레마도 충분히 이해되는 설정이어서 독자는 이들 사이의 무저갱 같은 운명에 긴장감과 애처로움을 동시에 느끼게 됩니다.

 

두청을 비롯한 경찰들의 진실 찾기가 한 축이라면 나머지 한 축은 아내가 무참하게 살해당한 뒤 사고까지 당해 평생 양로원에 갇혀온 지쳰쿤과 봉사활동을 통해 그와 인연을 맺은 법대생 커플 웨이중, 웨샤오후이가 이끌어갑니다. 두청과 마찬가지로 진범이 따로 있다고 확신했던 지쳰쿤은 양로원에서 무력한 삶을 살던 중 웨이중, 웨샤오후이 덕분에 삶의 의지를 되찾곤 아내를 살해한 진범을 찾기로 결심합니다.

사건 관계자들 대부분이 60대라서 독자들에게 더 주목을 받게 되는 젊은 두 주인공은 당초 관찰자 입장에서 23년 전 사건을 접하게 되지만, 점차 이야기의 중심을 차지하게 되는데 평범한 법대생 웨이중이 지쳰쿤을 돕는 과정에서 진실과 정의를 깨달으며 성장하는 이야기도, 무슨 이유에선지 웨이중 못잖게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는 웨샤오후이의 비극적인 사연도 경찰 쪽 이야기나 엽기적인 사건 못잖게 독자들의 눈길을 사로잡는 매력적인 대목입니다.

 

고백하자면, 읽기 전에는 700페이지가 넘는 분량 때문에 주저했던 게 사실이고, 읽기 시작한 뒤론 다소 지루하고 동어반복적인 초반 상황들 때문에 고민하기도 했습니다. 주요 인물들이 서로 얽히면서 각자의 목표를 확실히 정립하는 대목이 꽤 늦게 등장하는데, 개인적으론 대략 100페이지 정도만 정리됐다면 긴장감과 속도감이 배가됐을 거란 생각입니다. 물론 후반부에 가면 작가가 왜 초반에 지루할 만큼 기초공사를 거듭 다졌는지 알게 되지만, 초반의 느슨함은 자칫 이 작품의 진가를 맛보기도 전에 질리게 만들 여지가 있는 게 사실입니다.

,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내용은 물론 분위기조차 공개할 수는 없지만, 조금은 과한 우연들(인물들 간의 관계라든가 사건 모두)과 막판의 억지스럽고 공감하기 어려운 마무리도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찬호께이의 ‘13.67’에 버금가는 묵직한 작품이지만 별 0.5개를 뺀 건 이런 이유들 때문입니다.

 

아쉬운 점은 있었지만 순죄자심리죄 시리즈보다 매력적으로 읽힌 작품입니다. ‘심리죄 시리즈가 사건의 엽기성과 천재 프로파일러에 초점을 맞춘 작품들이라면, ‘순죄자는 그에 덧붙여 무겁고 비극적인 감정들을 충실하게 그려냈기 때문입니다. 아직 한국에 출간되지 않은 심리죄 시리즈도 기대하고 있지만 레이미의 또 다른 작품들 역시 한국에 좀더 많이, 자주 소개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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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코맥 매카시 지음, 임재서 옮김 / 사피엔스21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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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는 인적 없는 사막에서 무자비한 총격을 받은 차량과 시체들을 우연히 발견합니다. 현장에 있던 대량의 마약은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200만 달러가 넘는 현금을 훔쳐 달아난 모스는 그 순간 이후로 도망자 신세가 되고 맙니다. 돈의 주인과 마약조직은 물론 피도 눈물도 없는 살인마 안톤 시거까지 가세하여 모스를 뒤쫓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노회한 보안관 벨은 도심에서 벌어지는 참혹한 살인극에 그저 무기력한 행보만 보일 뿐입니다.

 

워낙 여러 번 들어본 제목인데다 한때 무척 좋아했던 코엔 형제가 영화로 만들었던 작품이라 언젠가는 꼭 읽어보겠다는 생각만 하면서도 내내 책장에 방치해온 작품입니다. 하지만 그리 길게 서평을 쓰게 될 것 같진 않은데, 기대에 비해 실망감이 컸던 탓일 수도 있고 개인적인 취향과 거리가 너무 멀었던 탓일 수도 있습니다.

 

이야기는 크게 두 축으로 전개됩니다. 하나는 돈 가방을 들고 튄 모스와 그를 쫓는 지독한 살인마 안톤 시거의 추격전이고, 또 하나는 추격전 챕터 중간중간에 끼어드는 노회한 보안관 벨의 회고입니다.

모스와 시거의 추격전은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살육극을 담고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무척이나 건조하고 삭막하게 읽힙니다. 대사와 지문이 뒤섞인 채 감정 같은 건 조금도 실리지 않은 기계적인 문장들과 ?”라는 의문을 끊임없이 자아내는 이상한 상황들, 즉 한쪽은 무작정 도망치고 한쪽은 무작정 뒤쫓는, 도무지 목적을 알 수 없는 추격전이 벌어지기 때문입니다. 훔친 이유도, 그걸 갖고 뭘 하겠다는 욕망도 없는 도망자와 누구의 사주를 받은 건지, 아니면 도망자에게 무슨 악감정이 있는지도 모를 추격자의 행보는 그저 어리둥절할 따름입니다.

그에 반해 노회한 보안관 벨의 회고에는 본인 외에는 무엇을, 왜 회고하는지 알 수 없는 뜬금없는 이야기들이 전개되는데, 회고가 도대체 어느 대목에서 모스와 시거의 추격전에 맞닿아있는 건지 전혀 알 수 없어서 답답하기만 했습니다.

 

도망자 모스, 추격자 시거, 보안관 벨 등 세 주인공의 난해한 행보들은 작가의 불친절한 문장과 플롯으로 인해 더 난해해질 따름입니다. 기승전결이라곤 찾아볼 수도 없고, 딱히 고발이나 상징의 흔적들이 엿보이는 것도 아닙니다. 오죽하면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그래서 뭐?”라는 어이없는 자문밖엔 할 수 없었는데 서평을 쓰기 전에 출판사의 소개글을 보니 저의 자문이 그리 드문 반응은 아닌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작품이 끝나고도 물음은 계속된다. 그 답을 찾는 것은 독자의 몫이다. 아주 능숙하고 냉철한 독자만이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고, 작품을 읽는 진정한 재미도 오롯이 맛볼 수 있을 것이다.”

 

납득하기 힘든 출판사의 소개글도, 작가와 이 작품에 쏟아진 엄청난 찬사들도 하나같이 저에게 능숙하지도, 냉철하지도 못한 무식한 독자!”라는 비난을 보내는 것만 같았는데, 제가 미처 몰라본 이 작품의 진가라는 게 정말 있는 건가 싶어, 여기저기 찾아보니 의외로 80년대 미국의 상황이라든가 신자유주의 등 생각지도 못한 코드들에 대한 언급들이 많았습니다.

모스와 시거와 벨이 당시 특정 계층, 특정 사고방식을 대변하고 상징한다는 의견들도 있었는데, 개인적으론 이런 평가는 흥미로운 스릴러를 즐기려는 일반독자들에겐 그다지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는 생각입니다. 그야말로 서평을 위한 서평, 분석을 위한 분석으로밖엔 보이지 않는 억지 주장이라고 할까요? 이야기도, 캐릭터도, 사건도 뒤늦게나마 , 그런 의미가 있었구나.”라고 공감할만한 요소들을 갖추고 있지 못하다는 뜻입니다.

 

어쩌면 어느 독자의 서평처럼 이 작품은 오히려 코엔 형제의 영화로 만난다면 그 의미와 매력을 제대로 맛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배우들의 표정이라도 보고 있으면 적어도 ?”라는 무의미한 자문을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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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르마늄 라디오 - 제119회 아쿠타가와상 수상작
하나무라 만게츠 지음, 양억관 옮김, 장정일 해설 / 이상북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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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원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로오는 사회에 나갔다가 22살에 살인을 저지르고 수도원으로 도피합니다. 수도원장은 은닉의 대가로 은밀한 특별봉사를 요구했고, 그걸 수락한 로오는 부속 농장에서 일하게 됩니다. 수녀 지망생인 아스피란트와 부적절한 관계에 빠진 로오는 농장에서의 고된 시간을 보내면서 무자비한 폭력과 고행을 통한 카리스마 덕분에 수도원 청소년들의 우상이 됩니다. , 신부 앞에서 신과 종교에 대해 냉소적인 태도를 숨기지 않는 것은 물론 자신보다 연상인 수녀를 범할 계획을 고해성사를 통해 사전에 용서받고 실행에 옮기는 등 극단적인 행동을 서슴지 않습니다.

 

나는 소설을 통해 나의 독자를 건강하게 만들고 싶지 않다. 오히려 우울하게 만들고 싶다.”

 

다소 엽기적이기까지 한 표지를 열고 첫 장을 열자마자 눈에 훅 들어온 작가의 일성은 일종의 경고처럼 보였습니다. 독자를 우울하게 만들고 싶다? 왠지 그 정도에 그칠 것 같지 않은 예감이 들었기 때문인데, 결과적으론 크게 빗나가지 않은 예감이 되고 말았습니다. 주인공은 물론 조연들의 캐릭터도, 줄거리도 파격의 수준을 한참 넘어선 작품인데, 한국의 보수적인 심사위원들19금 판정을 내린 건 어쩌면 그들에겐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입니다. (참고로 이 작품은 일본에서도 그런 반향을 일으켰는데 동시에 119회 아쿠타가와 상을 수상한 이력을 갖고 있습니다.)

 

이야기는 살인을 저지른 로오가 수도원으로 돌아와 겪는 부적절하거나 폭력적이거나 위험천만한 관계와 사건들로 채워집니다. 덧붙여, 로오가 10대 초반 시절에 겪은 수도원에서의 악몽들이 중간중간 끼어들곤 합니다.

무엇보다 가장 두드러진 화두는 신과 종교입니다. 로오는 때론 극단적인 무신론자처럼 보이기도 하고, 때론 누구보다 신과 소통하고 싶어 하는 인물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신의 구원을 바랐던 순간에 그 어떤 손길도 얻지 못한 그는 현재는 명백한 의도를 갖고 신과 종교를 비아냥댑니다. 특히 종교를 성()과 결부시키는, 일종의 금기를 도발에 가깝게 토로하곤 합니다.

 

모든 쾌감의 본질은 반복이다. 기도와 성행위가 바로 그런 점에서 하나로 결합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종교의 진정한 쾌락을 이해해 가고 있었다. 자아 없는 반복, 그것이 최고다.” (p55)

 

사실, 다 읽고도 작가의 의도가 무엇인지 헷갈릴 수밖에 없었던 건, 신과 종교, 성과 폭력을 이런 식으로 노골적이고 디테일하게 그리고 있으면서도 딱히 집중해야 할 게 뭔지 모호했기 때문입니다. 출판사 소개글에 따르면 아름다운 것과 추한 것, 성스러운 것과 속된 것을 통해 종교의 본질과 인간의 이중성을 날카롭게 파헤치는작품이라고 하지만, 그렇게 깊은 뜻은 활자는 물론 행간에서도 명확히 읽히지 않았습니다.

돌아온 탕아가 회개하는 이야기는 절대 아니고, 그렇다고 신과 종교의 허구를 정면으로 고발하는 이야기도 아니고, 성과 폭력에 빠진 채 금기를 밥 먹듯 저지르는 자를 탐미적으로 팔로우한 이야기도 아닙니다. 작가의 첫 일성대로 우울하고 불편한 책읽기가 된 건 사실인데, 작가와 주인공이 지향하는 바조차 알 수 없으니 그저 우울함불편함만 남았다고 할까요?

 

인터넷 서점의 작가 소개를 보면 기승전결이나 등장인물의 행동 이유를 무시해버리는 서사성이 희박한 작품을 연속으로 발표했다.”라고 돼있는데, 그렇다면 저의 몰이해가 오히려 당연한 일일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마지막에 실린 장정일의 해설을 통해 미처 알아보지 못한 이 작품의 진가를 조금이나마 건질 수 있을까, 기대했는데, 표피적인 해석 또는 본문만큼이나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만 담겨 있어서 솔직히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게르마늄 라디오는 하나무라 만게츠가 종교를 주제로 기획한 대하소설 왕국기의 도입부 격인 작품이라고 합니다. 그런 걸 보면 분명 종교가 첫 번째 화두인 건 맞는 것 같은데, 어쩌면 수도원에서 금기와 파격을 자행하던 로오가 자신만의 왕국을 건설하는 과정이 이후 작품에서 그려졌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으로선 그 뒷이야기가 딱히 궁금하진 않지만 말입니다.

사족으로, “독자들의 말초감각을 건드리려는 목적으로 금기에 도전한 책은 아니다.”라는 인터넷 서점의 소개글대로 엉뚱한 호기심으로 읽을 책은 아니란 점을 꼭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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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거기 있어 줄래요?
기욤 뮈소 지음, 전미연 옮김 / 밝은세상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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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세인 엘리엇은 샌프란시스코에서 명망 있는 외과의사로 성공적인 삶을 살아왔지만 떨쳐버릴 수 없는 회한이 있다. 그것은 30년 전, 사랑하는 연인 일리나를 사고로부터 구해내지 못한 것. 일리나를 단 한 번만이라도 다시 만나보는 것이 평생의 소원이던 엘리엇은 캄보디아에서 만난 신비한 노인으로부터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10개의 알약을 얻은 덕분에 그 소원을 풀 기회를 잡게 된다. 30년 전인 1976년으로 돌아간 엘리엇은 우여곡절 끝에 일리나를 살려내지만, 과거의 한 조각이 뒤바뀌면서 벌어진 나비효과는 그의 삶 전체를 엉망진창의 혼란 속으로 밀어 넣는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기욤 뮈소, 파울로 코엘료, 베르나르 베르베르, 무라카미 하루키...

신간이 나올 때마다 한국에서 유난히 인기를 끄는 외국 작가들입니다. 동시에 저와는 별로 궁합이 맞지 않는 작가들이기도 합니다. 그나마 무라카미 하루키는 살짝 예외라고 할 수 있지만 기욤 뮈소는 초창기에 한두 작품을 초반만 읽곤 그 뒤로 관심 밖으로 밀어냈던 작가입니다. (그에 대해 잠시 관심을 가졌던 건 2018년에 출간된 아가씨와 밤을 읽었을 때인데, 스토리와 미스터리 모두 기대 이상이라 의아하게(?) 여겼던 게 사실입니다.)

 

2014년 봄에 10권으로 구성된 기욤 뮈소 양장본 전집 세트를 지인으로부터 선물 받은 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7년을 책장에 방치해놓았으니 아무리 기욤 뮈소와 궁합이 안 맞는 독자이긴 해도 책에게 오랫동안 참 못할 짓을 한 셈입니다.

그래도 무슨 인연인지 전집 세트 10권 중 한 권을 읽어보기로 큰 결심을 하게 됐는데, 내용도 모르고 독자들의 평가도 무시한 채 가장 분량이 짧아 보인다는 이유만으로 당신, 거기 있어줄래요?’를 집어 들었습니다. 그리고 한나절도 채 안 돼 마지막 장까지 단번에 읽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시작과 동시에 시간여행을 다룬 작품이란 걸 눈치 채곤 순전히 짧다는 이유로 이 작품을 선택한 걸 후회했는데, 딱히 시간여행이란 소재를 싫어해서라기보다 여러 장르에서 너무 자주 활용된 탓에 지레 피로감이 몰려왔기 때문입니다. , 페이지는 술술 넘어가는데도 어딘가 느슨하고 가볍고 밋밋함이 느껴지는 이야기와 캐릭터 탓에 초중반쯤엔 역시 나와는 인연이 아닌가보네.”라는 후회가 들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중반을 살짝 넘어선 부분부터 이 작품의 매력과 미덕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모두의 행복을 위해 과거를 수정했지만 그것이 더 끔찍한 비극을 몰고 온 것은 물론 현재마저 엉망으로 뒤엉키게 만든 것을 깨달은 엘리엇이 과거와 현재를 부지런히 오가며 어떻게든 자신의 실수를 바로잡으려 애쓰는 이야기는 분명 어딘가에서 본 듯한 기시감이 드는데도 불구하고 마지막 장까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며 시선을 끄는 힘이 있었습니다. 과거를 살리자니 현재가 붕괴되고, 현재를 살리자니 과거의 실수를 바로 잡을 길이 없는 엘리엇의 딜레마는 그야말로 재미와 초조함을 동시에 만끽하게 만드는 양날의 검이란 뜻입니다.

, 시간여행 트릭은 겉으론 다소 허술해보였지만 실은 꽤 꼼꼼하고 정교하게 설계돼있었고, 엘리엇의 연인 일리나, 절친인 매트 등 주요 조연들의 캐릭터와 역할도 뒤로 갈수록 점점 더 그 매력을 발산하고 있어서 엘리엇 못잖게 궁금증과 기대감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느슨하고, 가볍고, 밋밋하던 초반에 비해 속도감과 긴장감을 장착한 문장들은 중반부를 넘어서면서 엄청난 기세로 페이지를 넘기게 만들었는데, 다만 복잡한 감정들이 휘몰아치는 스토리에 비해 문장 하나하나가 지나치게 무미건조하게 느껴진 건 끝까지 아쉬운 부분이었습니다. 이만한 클라이맥스와 엔딩이라면 한두 번쯤은 눈가가 뜨끈해지거나 울컥해질 만도 한데 기욤 뮈소는 도무지 그럴 기회를 한 번도 주지 않은 채 막을 내리고 말았습니다.

 

고백하자면, 기대라곤 거의 없이 약간의 의무감으로 시작한 책읽기였는데, 어쩌면 그 덕분에 무척 흥미로운 시간이 된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직 책장에 방치된 전집 세트의 나머지 9권이 슬그머니 신경 쓰이게 된 것도 사실인데, 누군가에게 선물로 주려던 생각은 잠시 접게 될 것 같지만 그렇다고 성급하게 달려들 일은 없을 것 같긴 합니다. 그래도 가끔 특별한 간식이 생각날 때 이번처럼 별 기대 없이 한 권씩 읽는다면 언젠가는 기욤 뮈소를 마스터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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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가 와서 피리를 분다 긴다이치 고스케 시리즈
요코미조 세이시 지음, 정명원 옮김 / 시공사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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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한 귀족 츠바키 히데스케가 의문투성이의 기괴한 유서를 남기고 자살합니다. 그는 전대미문의 강도살인범으로 몰렸다가 수상쩍은 알리바이를 대고 겨우 혐의를 벗어난 직후 자살한 터라 의혹은 더욱 커지기만 합니다. 츠바키의 딸 미네코의 의뢰로 저택을 방문한 긴다이치 코스케는 주인의 몰락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황량한 저택의 분위기는 물론, 현재 그곳에 머물고 있는 츠바키의 친인척들의 음험한 태도에 한기를 느낍니다. 더구나 여기저기서 죽은 츠바키를 목격했다는 사람들이 등장하고, 그가 죽기 전 작곡한 플루트 곡 악마가 와서 피리를 분다가 녹음된 레코드가 누군가에 의해 수시로 저택에 울려 퍼지면서 귀기 어린 공포가 모두를 사로잡기에 이릅니다. 그리고, 불길한 예상대로 피비린내 진동하는 참극이 벌어지기 시작합니다.

 

분신사바를 연상시키는 모래점, 불길한 모양의 피부 반점, 죽은 귀족이 여기저기서 목격되는 정황, 그리고 소름 끼치는 멜로디의 플루트 곡 악마가 와서 피리를 분다등 호러 코드가 다분한 작품입니다. 거기에다 메이지 유신 이후 부귀영화를 누리던 귀족들이 패전의 그늘 속에서 하루아침에 몰락을 맞이한 시대적 배경까지 덧붙여져서 작품을 지배하는 분위기는 더욱 서늘하고 기괴해질 뿐입니다.

 

나는 이 이상의 굴욕, 불명예를 참을 수가 없다. 유서 있는 츠바키 가문의 이름도 이것이 폭로되면 수렁에 빠지고 만다. 아아, 악마가 와서 피리를 분다. 나는 아무래도 그날까지 살아 있을 수가 없구나.” (p33)

 

츠바키 히데스케가 남긴 이 유서는 온통 수수께끼 같은 말만 가득하지만, 마지막 장을 덮은 뒤에 다시 떠올려보면 행간에 숨은 비통한 사연들이 절절이 느껴지는 탓에 자살을 결심한 그의 심정이 얼마나 비참하고 참담했을지 어렵지 않게 수긍하게 됩니다.

애초 희대의 강도살인범으로 몰린 것이 그를 자살에 이르게 한 굴욕의 원인으로 추정됐지만 긴다이치 코스케는 그가 혐의를 벗기 위해 마지못해 진술했던 미묘한 알리바이에 더욱 주목합니다. 강도살인사건 발생일을 전후하여 그가 머물렀다는 고즈넉한 여관을 찾아간 코스케는 여러 사람의 진술을 통해 츠바키와 그의 아내, 그리고 아내의 친인척들이 연루된 끔찍한 과거사를 눈치 채는데, 문제는 단서가 잡힐 만하면 누군가에 의해 그 단서가 차단되거나 사라진다는 점입니다.

 

사실, 이 작품에서 다루는 살인의 동기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막장 그 자체입니다. 인간의 탐욕이 어디까지 추악해질 수 있는지, 또 그 탐욕이 낳은 비극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바닥없는 구렁텅이에 빠뜨릴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인지 죽어 마땅한 인물들이 자신들의 죗값을 치렀다는 개운함보다는 끔찍한 살인극을 저지른 범인의 심정과 기괴한 제목의 플루트 곡을 작곡한 뒤 자살을 선택한 귀족 츠바키의 고뇌가 남긴 씁쓸한 여운이 더 인상 깊게 남았습니다.

 

본편 뒤에 실린 작품해설에서도 지적됐지만 다 읽은 뒤에 곰곰이 생각해보면 다소 어수룩하거나 허점이 엿보이는 설정들이 떠오르는 게 사실입니다. 호러 코드는 다소 억지스러웠고, 범인의 계획이나 살인행위도, 또 긴다이치 코스케의 추리도 우연 또는 비약에 의지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 전반에 흐르는 귀기 어린 분위기에 휩쓸리다 보면 이런저런 단점이나 아쉬움을 떠올릴 틈도 없이 계속 페이지를 넘기게 되는 것 역시 사실입니다. 아마도 이런 게 거장의 마력이 아닐까, 생각되는데, 물론 취향이 안 맞는 독자에겐 장점보다는 단점이 더 눈에 띄겠지만 사심(?) 가득한 긴다이치 코스케의 팬에겐 또 한 번 이 시리즈의 매력을 진하게 맛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돼줄 것이 분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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