겐지모노가따리 1
무라사키 시키부 지음, 이승웅 옮김 / 다산글방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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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출간된 다른 번역본과 달리 이 작품은 제목, 작가 이름, 본문에 모두 경음(,,,)을 사용하고 있는데, 서평에서는 편의상 격음(,,,)으로 표기하겠습니다.)

 

언젠가 한번쯤은 읽고 싶었던 일본의 고전 겐지모노가타리’(原氏物語)를 말 그대로 맛보기정도로 만나봤습니다. 11세기 초, 그러니까 1,000년도 전에 지어진 작품으로 현대적 의미의 소설로서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됐다는 점도 눈길을 끌었지만 작가가 여성이란 사실, , 서민들 사이에 구전되는 이야기를 모아놓은 작품집일 거라는 (아무 근거 없는) 예상과 달리, 후궁의 아들로 태어난 히카루 겐지의 일대기, 그중에서도 수많은 여성들과의 로맨스를 그렸다는 점에 꽤나 놀랐습니다.

모두 354권으로 구성돼있다는데, 제가 읽은 다산글방의 겐지모노가따리 1’1부 중 8권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겐지의 출생부터 그의 여성편력의 절정기에 이르는 시기를 그리고 있는데, 실제 문장에는 음란함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지만 가만히 행간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문란하다고 할 정도로 여러 여성들과 관계를 갖는 겐지의 행보가 그저 파격적으로 느껴질 뿐입니다.

 

태어난 후로 제(, 황제)의 사랑을 독차지했지만 후궁의 몸에서 태어난 탓에 황자(皇子)가 될 수 없었던 겐지는 궁 밖에서 신하의 신분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의 첫사랑이자 진실한 사랑은 아이러니하게도 아버지인 제()가 어머니 대신 새로 들인 후궁입니다. ()는 일찍 세상을 떠난 후궁 기리쓰보(겐지의 어머니)를 잊지 못하다가 그녀와 꼭 닮은 후지쓰보를 후궁으로 맞이했는데, 겐지는 그 후지쓰보와 금지된 사랑에 빠지고 맙니다.

하지만 결국 이뤄지지 못할 사랑이란 걸 인정한 겐지는 고위관료의 딸과 결혼한 후로도 수많은 여성들과 관계를 맺는 것은 물론, 후지쓰보를 대신할 존재로 그녀의 조카인 10살 소녀 무라사키노우에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와 키운 끝에 결혼에 이릅니다. (결혼 부분은 제가 읽은 1권에는 나오지는 않습니다.)

 

그 당시의 도덕이나 예법이 어땠는지는 잘 모르지만 어쨌든 겐지의 행보는 파격과 문란 그 자체입니다. 계층과 나이를 불문하고 겐지에게 있어 여성은 평가의 대상 또는 관계의 대상으로만 그려져서 당시(헤이안 시대)의 사회상을 엿볼 수 있는 훌륭한 사료라는 점 외에 이 작품이 문학적으로 어떤 의미를 가졌다는 건지 잘 이해하기 힘들었던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 소설이며, 겐지와 관계를 갖는 여성들의 지난한 삶에 초점을 맞춘 이야기라는 세간의 평가를 보면, 아무래도 54권 중 겨우 8권만을 읽은 제가 함부로 예단해선 안 되는 의미와 가치가 있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이 작품은 한글로 번역됐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독해의 수준이 필요합니다. 이름과 호칭이 정확히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지 헷갈릴 때도 있고, 원작에 충실하기 위해 직역에 가깝게 번역돼있어서 문장 자체가 난해한 경우가 허다합니다. 거기다가,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와카(和歌, 하이쿠와 함께 일본의 대표적인 시가)를 통해 주고받는 은유적인 대목들도 많고, 그걸 설명하기 위한 각주도 그만큼 많아서 평범한 책읽기가 쉽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다른 나라의 고전이다 보니 함부로 일반독자 눈높이에 맞춰 현대적인 문장으로 번역할 수는 없겠지만, 그런 식으로라도 먼저 내용을 이해한 뒤 원작에 가까운 번역문을 읽는다면 좀더 이 작품의 의미와 가치를 만끽할 수 있을 거란 아쉬움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제대로 이해도 못한 고전에 평점을 매긴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그래도 (인터넷 서점의 경우 서평 올리려면 평점 체크가 필수적이라) 매기긴 해야 해서 가장 무난한 별 4개를 줬는데, 큰 의미는 없다고 보시면 됩니다. 지금으로선 2권까지 읽을 자신은 없는 게 솔직한 심정인데, 저 같은 독자를 위해서라도 쉽게 읽는 겐지모노가타리같은 번역작이 출간된다면 그저 고마운 일일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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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수에 젖다 케이스릴러
이수진 지음 / 고즈넉이엔티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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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년 전, 고향 무억도를 도망치듯 떠나온 정영선은 과거를 지우고 정태희로 개명까지 한 후 강남 사모님이 되어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고 있습니다. 어느 날, 배송된 의문의 향수에 의아해하던 태희는 보낸 사람의 이름을 보곤 충격에 빠집니다. 다름 아닌 자신이 버린 이름 정영선이었기 때문입니다. 그와 동시에 잊고 살았던 무억도 시절의 절친들이 갑자기 떼를 지어 나타나선 16년 전 벌어진 한 전학생의 죽음을 거론하며 거액의 돈을 요구합니다.

과거와의 단절을 결혼조건으로 내걸었던 남편이 이 사실을 알게 될 경우 풍족하고 화려한 삶이 단박에 붕괴될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 태희는 어떻게든 무억도 친구들의 협박에서 벗어나려 하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결국 살인이라는 극단적인 방법까지 고민하기에 이릅니다.

 

고즈넉이엔티의 케이 스릴러 시리즈는 기성작가보다는 대부분 신인작가의 데뷔작인 작품이 많이 포진돼있습니다. ‘케이 스릴러 시리즈가운데 여덟 번째로 만난 향수에 젖다도 그런 경우인데, 그런 점에서 이 시리즈가 한국 장르물의 든든한 토대로 기능하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만족도나 평점은 들쑥날쑥한 게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작 소식이 들리면 어떤 이야기들인지 대략의 소개글이라도 인터넷 서점에서 찾아보게 되곤 합니다.

 

향수에 젖다는 과거의 비밀을 놓고 협박, 복수, 살인이 벌어진다는, 다소 고전적인 설정이면서도 눈에 확 들어오는 선명한 구도 때문에 선택한 작품입니다. 요약한 줄거리는 초반 전개부 정도만 정리한 것인데, 이 뒤로는 스포일러가 될 내용들이 줄줄이 이어지기 때문에 더는 상세한 소개가 어렵습니다. “인연을 끊어냈던 절친들이 16년 만에 나타나 과거를 들먹이며 협박하자 주인공이 그에 대처한다.”는 이야기에 그쳤다면 뼈대도 근육도 빈약한 단순한 스릴러에 머물렀겠지만, 작가는 태희를 향한 정체불명의 또 다른 위협을 설정함으로써 이야기의 층위도 복잡하게 만들고 등장인물들이 느끼는 감정도 다양하고 깊이 있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태희는 절친들의 협박에 당근과 채찍을 번갈아 활용하는 것은 물론, 그들 사이의 미묘한 대립 관계를 역이용하며 나름 유리한 싸움을 벌이기도 하지만, 양쪽의 전세는 그야말로 역전에 역전을 거듭하며 좀처럼 승부를 가늠하기 어렵게 전개됩니다. 특히 독자 입장에선 협박에 시달리는 태희를 선한 주인공으로 볼 수 없게 만드는 여러 복잡한 상황들 때문에 딱히 누구를 응원해야 할지 알 수 없는 딜레마에 빠지기도 합니다.

, 돈을 요구하는 절친들보다 훨씬 더 위험해 보이는 누군가의 존재가 독자의 눈길을 계속 사로잡는데, 태희뿐 아니라 절친들 모두에게 의문의 선물(향수와 디퓨저)을 보낸 누군가는 초반부터 16년 전 무억도에서 벌어진 한 전학생의 죽음과 밀접하게 연관돼있는 것으로 소개된 덕분에 비밀과 거짓말, 원한과 복수 등 좀더 긴장감 넘치고 궁금증을 자아내는 스릴러를 구축합니다.

 

중반 또는 중후반까지만 해도 선명한 캐릭터, 단단한 문장들, 깔끔하고 정교한 구성이 돋보여서 작가에게 거는 기대감도 커졌고 이 이야기가 어떻게 마무리될지 너무 궁금했지만, 작가가 승부를 건 트릭이 조금씩 엿보일 때부터 불안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고, 실제로 그 트릭이 완전히 공개될 즈음에는 꽤 큰 아쉬움이 느껴졌습니다. 개인적인 취향의 문제일 수도 있지만 미스터리나 스릴러에서 좀처럼 수긍하기 어려운 막판 트릭이 몇 가지 있는데, 이 작품의 트릭이 그중 하나였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런 트릭이라도 마지막까지 예상 밖의 전개를 보였다면 얼마든지 박수를 쳐줄 수 있겠지만, 실은 이 작품의 후반부는 트릭 자체도 전형적이었던 것은 물론 주요 인물들의 감정, 목표, 태도 등도 애매모호하게 마무리돼서 책장을 덮는 순간에도 그래서, 다들 어떻게 됐다는 거지?”라는 의문만 머릿속에 남고 말았습니다.

 

막연한 추측이지만, 진부하고 타성적인 엔딩에서 벗어나려다 오히려 이야기가 길을 잃었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수진의 신작 소식이 들린다면 기꺼이 찾아 읽고 싶은 욕심이 드는 건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만큼 필력과 내공이 돋보였고, 자기 스타일에 잘 맞는 재료들을 끌어 모은다면 향수에 젖다의 아쉬움을 전부 날리고도 남을 매력적인 작품이 나오지 않을까, 꽤 높은 확률로 기대하고 싶은 작가라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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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왕벌 긴다이치 고스케 시리즈
요코미조 세이시 지음, 정명원 옮김 / 시공사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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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즈의 작은 섬 월금도에서 할머니와 함께 살아온 도모코는 18세가 되자 어머니의 유언에 따라 양아버지 다이도지 긴조가 사는 도쿄 대저택으로 갈 준비를 합니다. 자신이 태어나기 전인 19년 전 절벽에서 사고로 추락사한 친부의 죽음에 늘 의문을 품어왔던 도모코는 섬을 떠나기 직전 그 당시 어머니가 봉인했던 방에서 살인의 흔적을 발견하곤 충격에 빠집니다.

한편, 도모코의 양부인 다이도지 긴조와 그의 후원자 앞으로 기묘한 협박편지가 날아듭니다. 19년 전 도모코 친부의 죽음의 비밀에 대한 암시와 함께 도모코가 도쿄에 와선 안 된다는, 그럴 경우 그녀 주변의 남자들이 참혹한 죽음에 이를 거라는 협박이 담겨있습니다.

긴조의 변호사를 통해 도모코의 수행을 의뢰받은 긴다이치 코스케가 분투하지만 이후 한 달에 걸쳐 (협박장 내용대로) 도모코 주변에서 끔찍한 살인사건이 연이어 벌어집니다.

 

1951~52년에 연재됐으니 태어난 지 꼭 70년이 된 작품이지만 여느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와 마찬가지로 지금 읽어도 너무나 매력적인 작품입니다. 그 시대의 아날로그 정취와 함께 긴장감 넘치는 미스터리를 한껏 만끽할 수 있기 때문인데, 어수룩한 외모와 더벅머리가 트레이드마크인 명탐정 긴다이치 코스케의 캐릭터는 이 시리즈에 푹 빠지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최고의 매력이자 미덕이기도 합니다.

 

여왕벌은 이전의 작품들과는 사뭇 다른 구도를 갖고 있는데, 사건이 한 공간에서 벌어지고 그 안에서 다양한 트릭이 난무한 게 이전 작품들의 특징이라면, ‘여왕벌은 외딴 섬 월금도, 옛 화족 저택이었던 고급 호텔, 가부키 극장, 도쿄의 대저택 등 다양한 공간에서 다양한 형태의 살인사건이 벌어지는 독특한 스타일을 구사하기 때문입니다.

 

사건의 성격이나 범행 동기도 이전 작품들의 공통적인 특징, 패전 직후를 배경으로 전통과 근대성의 충돌, 그리고 인습과 미신으로 불거져 나오는 불쾌한 살의라는 점에서 벗어나 보다 원초적이고 본능적인 욕망에 충실한 편이라 이 시리즈의 팬 입장에선 색다른 맛과 함께 좀더 팽팽하고 긴장감 넘치며 농밀한 미스터리를 만끽할 수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절세미인을 둘러싼 2대에 걸친 집요한 욕망과 저주를 탐미적이고 관능적인 필체로 그린 작품이라는 출판사의 소개글은 여왕벌의 특징을 잘 압축해놓은 한 줄 카피라는 생각입니다.

 

도모코를 차지하려는 정혼자 후보들이 살해되고, 도모코 본인에게도 월금도로 돌아가라는 협박장이 날아드는 가운데 긴다이치 코스케마저 범인에게 살해당할 위협에 빠지면서 이야기는 빠른 속도로 치닫는데, 이 모든 사건의 진실이 결국 19년 전 도모코 친부의 죽음의 비밀과 연관돼있다는 설정 덕분에 이야기는 마지막까지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롤러코스터를 타듯 전개됩니다. 또 막판에 공개되는 결정적 반전은 한 인간의 욕망이 얼마나 크고 깊은 비극을 자아낼 수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어서 반전의 충격이상의 여운을 남깁니다.

 

지금까지 읽은 어느 작품보다 긴다이치 코스케의 활약도 매력적으로 그려졌는데, 단순히 명탐정의 역할을 넘어 사건 뒤에 도사린 비극성을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지켜보며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참극의 중심에 내던져진 도모코와 함께 슬퍼하고 분노하는 모습이 애잔할 정도로 공감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 세상에 공개된 사실과는 다른, 그만이 포착한 진실을 그만의 방식으로 정리하는 모습 역시 다시 한 번 그에게 푹 빠지게 만드는 계기를 만들어줬는데, 뭐랄까, 한 뼘 이상 훅 성숙한 긴다이치 코스케를 만난 듯한, 그런 훈훈한 느낌을 받기도 했습니다.

 

사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몇몇 트릭들은 다소 쉬워 보이기도 하고 그 구조 역시 특별히 정교하거나 복잡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래서 더 공감도 되고 납득하기도 쉬웠는데, 이 작품의 매력이 명탐정의 트릭 깨기가 아니라 인간의 욕망이 낳은 참혹한 비극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오히려 쉽고 단순한 트릭이 더 잘 어울려 보이기 때문입니다. ‘본격의 맛을 기대한 독자들에겐 다소 아쉬운 대목이긴 하지만, 이야기의 힘과 재미 면에선 그 어떤 작품에 못잖은 명품이니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를 만난 적 없는 독자라면 이 작품을 통해 시리즈에 입문하는 것도 괜찮은 선택이라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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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자나무
아야세 마루 지음, 최고은 옮김 / 현대문학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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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옮긴이의 말대로 이 작품은 연애소설도, 환상소설도, SF도 아닌, 그 사이의 어딘가를 부유하는 듯한일곱 편의 단편이 수록된 독특한 작품집입니다. 대부분의 작품의 모티브는 사랑입니다. 하지만 이 작품 속 일곱 개의 사랑(대부분) 너무나도 기괴한 외피를 뒤집어쓰고 있는 탓에 마치 외계나 이계의 생명체에게 어울리는 낯선 감정처럼 와 닿습니다.

 

신체를 자유자재로 떼었다 붙였다 할 수 있는 세상, 사랑이나 행복은 물론 죽음마저도 몸 안에 숨어든 날벌레의 생리에 영향을 받는다는 설정, 사랑에 상처받으면 뱀으로 변이하여 남자를 잡아먹는 여자들, 세 번의 산란을 마친 여자와 적정 수준 이상의 를 뿌린 남자는 급격한 노화 끝에 사망하는 평균 수명 20대 중반인 사회 등 이 작품 속에 그려진 시공간은 상상을 초월하는 특별함과 기괴함으로 포장돼있습니다.

 

하지만 이 특별하고도 기괴한 시공간에서 그려지는 감정은 너무나도 애틋한 사랑입니다.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기괴한 시공간은 그 사랑의 애틋함을 더욱 진하고 농밀하게 만듭니다.

표제작인 치자나무에는 10년의 불륜을 청산하는 자리에서 불륜남에게 추억의 징표로 한쪽 팔을 요구하는 여자가 등장합니다. 여자는 그 팔을 꽃병에 담아 소중히 대하는 것은 물론 외출할 때나 잠을 잘 때에도 항상 곁에 두는 등 이별 후에도 그 사랑을 기억하며 살아갑니다. 불륜남의 아내가 나타나 예상치 못한 요구를 하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두 번째 수록작인 꽃벌레는 운명 같은 사랑과 영원할 것 같은 행복이 실은 당사자들의 감정의 결과가 아니라 몸에 침투한 한낱 날벌레의 조종의 결과라는 설정이 등장합니다. 누군가는 그 사실에 절망하며 가짜 감정에 괴로워하지만 누군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날벌레의 산물인 사랑과 행복을 소중히 지키려 합니다.

네 번째 수록작인 짐승들에는 뱀으로 변이하여 남자를 잡아먹는 여자가 등장하는데, 그 변이는 상대를 너무 사랑해서 견디지 못하거나 말할 수 없는 사랑의 상처를 받았을 때 작동하는 특별한 기제입니다. 여자들과 낮과 밤을 나눠 살아가는 남자들은 그 뱀이 사랑 때문에 상처받은 여자의 화신이란 건 생각도 못하고 끔찍한 괴물로 여겨 잔인하게 처치합니다.

 

수록작 중에는 지극히 일반적인사랑의 이야기도 있고, 폭압적인 현실에서 도피하여 일그러진 애정을 발산하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하지만 한 작품집 안에 들어있어서 그런지 그 이야기들 속에 등장하는 사랑과 애증도 결코 평범하게 읽히지는 않습니다. 세상엔 이렇게 사랑하는 사람도 있구나,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도 있구나, 라며, 지금껏 겪어보지 못한 특별한 감정에 푹 몰입하다 보면 문득 스스로 그 기괴한 시공간 속으로 빨려 들어간 느낌을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로테스크.

아마, 이 작품을 단어 하나로 설명해달라고 하면, 더없이 진부하고 게으른 답이지만, 이보다 더 적확한 답은 없을 거란 생각입니다. 독자에 따라 다소 불편한 책읽기가 되는 경우도 있을 것 같은데, 개인적으론 그 어떤 사랑 이야기보다 깊은 인상과 여운을 받은 작품이라 작가가 이런 스타일의 작품을 다시 내놓는다면 허겁지겁 찾아 읽을 게 분명할 것 같습니다.

 

여담 한 가지만...

아야세 마루는 2010꽃에 눈멀다’()라는 작품으로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 R-18 문학상을 수상하며 등단한 작가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구보 미스미의 한심한 나는 하늘을 보았다와 미야기 아야코의 화소도중도 이 문학상 출신이라 여느 일본의 문학상보다 더 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공교롭게도 이 두 작품 모두 19금 판정을 받았습니다.) 같은 상을 받은 아야세 마루의 이력 때문에 검색을 해보니 한국에도 이미 이 문학상 수상작품이 몇 편인가 출간된 걸 알게 됐는데, 아야세 마루 덕분에 제 취향에 잘 맞는 일본 작가와 소설들을 발굴할 수 있게 돼서 그저 반가울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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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 열쇠 열린책들 세계문학 265
대실 해밋 지음, 홍성영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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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장르를 불문하고 20세기 중반에 출간된 고전(에 가까운 작품들)을 자주 읽게 됐는데, 고백하자면, ‘유리 열쇠는 읽기 전에 꽤 주저했던 게 사실입니다.

우선, 몇 년 전에 읽은 대실 해밋의 대표작 말타의 매’(또는 몰타의 매’)가 그리 인상적이지 않았고, 당시 쓴 서평에도 “‘사건만 있고 사람은 잘 안 보이다보니 딱딱한 뒷맛만 남았다. 영미권 하드보일드는 나와는 그리 잘 안 맞는 것 같다.”고 쓸 정도로 큰 매력을 못 느꼈기 때문입니다.

, 하필 며칠 전 일본 하드보일드의 대표작가인 하라 료의 신작 지금부터의 내일을 읽곤 당분간은 국적(?)을 불문하고 하드보일드는 멀리 하려는 생각을 한 탓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고전이 풍기는 유혹과 함께, 북유럽 최고의 탐정 소설에 주어지는 문학상인 유리 열쇠상의 유래가 된 작품이란 점, 또 오래 전에 인상 깊게 본 영화 밀러스 크로싱의 모티브가 된 작품이란 점 등 여러 가지 기대감이 들기도 해서 하드보일드에 대한 씁쓸한 기억들은 싹 지워버리고 거장 대실 해밋과 다시 한 번 만나보기로 결심했습니다.

 

폴 매드빅은 합법과 불법, 음지와 양지를 오가며 세력을 넓혀 가는 도시의 거물이며, 네드 보몬트는 그런 매드빅의 브레인이자 형제처럼 가깝게 지내는 인물입니다. 선거를 앞두고 자신이 후원하는 상원의원의 승리를 위해 매표 행위도 서슴지 않던 매드빅은 상원의원의 딸 재닛을 좋아하며 그녀와 결혼하고 싶다는 속내를 보몬트에게 드러내기도 합니다.

그러던 중 상원의원의 아들이자 재닛의 오빠인 테일러가 거리에서 시체로 발견됩니다. 이후 사건 관련인물들에게 매드빅을 비난하는 내용이 담긴 수상한 편지가 날아들기 시작하고, 언론마저 살인사건과 관련하여 매드빅을 의심하는 기사를 내보냅니다. 도박중독자지만 냉정하고 합리적인 브레인이기도 한 보몬트는 정치적 긴장감이 도사린 이 사건의 진실을 캐내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상황은 점점 불리해지고 급기야 매드빅과의 관계도 위태로워지기 시작합니다.

 

역시 하드보일드는 저와는 궁합이 잘 안 맞는 장르라는 걸 다시 한 번 확인시켜준 작품입니다. 주인공 네드 보몬트의 매력적인 캐릭터라든가 몇 차례의 반전과 의외의 범인 등 충분히 흥미진진한 요소를 갖춘 이야기지만, ‘역자 해설에 언급된대로 등장인물의 내적인 감정과 생각을 배제한 채 그들의 행동과 주변의 정황만으로 글을 이끌어 가는방식은 무미건조함은 물론 때론 너무 불친절하다는 인상까지 남기면서 몰입하기도 어렵고 공감하기도 어려운 책읽기를 요구하고 있었습니다.

 

지나치게 세세한 내면 묘사 때문에 도무지 페이지가 안 넘어가는 일부 심리스릴러 작품도 견디기 힘들었지만, 기름기 하나 없는 퍽퍽한 살코기 같은 정통 하드보일드 역시 그에 못잖게 소화하기 어려운 장르라는 생각입니다. 더구나 원조 거장이라 할 수 있는 대실 해밋의 작품이니 그 퍽퍽함은 더 말할 나위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다른 인물은 논외로 치더라도 주인공인 네드 보몬트의 속내나 감정이라도 제대로 알고 싶다는 생각이 수시로 들었는데, 그의 말이나 행동에 궁금한 점이 너무 많았고, 특히 미스터리를 풀어가는 탐정으로서의 역할에선 앞뒤 맥락조차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들이 종종 눈에 띄었기 때문입니다.

 

금주법이 시행되고 범죄가 난무하던 시대에 태어난 작품이다 보니 어쩌면 심리나 감정 같은 기름기를 싹 걷어낸 하드보일드 스타일을 지니게 된 게 숙명처럼 여겨지기도 하지만, 그래도 독자가 이입하고 몰입할 수 있는 여지가 어느 정도만 있었다면 훨씬 더 대중적이고 매력적인 작품이 됐을 거란 아쉬움이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내내 머릿속에 남았습니다. 줄거리, 캐릭터, 사건만 보면 재미있는 스릴러를 위한 재료들은 다 모여 있는 셈인데 대실 해밋이라는 셰프의 레시피는 그 재료들의 말초적이고 끈적끈적한 부분들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사실, 제 취향 가운데 하나가 지극히 대중적인 미스터리나 스릴러에 하드보일드란 겉멋을 살짝 입힌 스타일인데, 정통 마니아 입장에선 그건 사이비!”라고 비난할지도 모르겠지만 전 딱 그 정도 수준의 하드보일드에 만족하려고 합니다.

 

하드보일드에 적응 못한 불평만 잔뜩 늘어놓은 서평이 되고 말았는데, 구체적인 내용을 예로 들 수 있다면 좋겠지만, 하드보일드라는 게 문장 하나, 문단 한 대목을 콕 찝어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보니 이런 인상비평밖에 할 수가 없었습니다. 다만, 직접 읽기 전에 하드보일드에 대한 편견을 갖는 것은 무모한 일이니 조금이라도 호기심이 생긴다면 대실 해밋이든 레이먼드 챈들러든 아니면 다른 어느 작가를 통해서라도 한두 편쯤은 직접 맛보기를 권하고 싶습니다. (이렇게 하드보일드에 부적응 증상을 보이면서도 책장에 방치된 레이먼드 챈들러의 필립 말로 시리즈는 언젠가 꼭 읽어야 할 숙제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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