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로몬 부티크
강지영 지음 / 씨네21북스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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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천 또는 불명예라는 딱지가 붙은 멤버들이 모인 하서경찰서 표적수사대’.

유일하게 그 딱지에서 자유로운 경위 민재경은 대원들과 함께 팀장 정두현의 지휘 아래

7년에 걸쳐 여러 명의 희생자가 나온 수험생 연쇄살인사건을 수사 중입니다.

그런데 재경은 두현을 통해 이해 불가능한 괴짜 인물을 소개받습니다.

일말의 체취만으로도 그 사람의 모든 것을 포착해내는 뛰어난 후각의 남자 남타신은

두현으로부터 오래 전부터 수사에 도움을 줄 것을 요청받았지만 내내 거절해왔는데,

그런 그가 갑자기 태도를 바꿔 표적수사대에 도움을 주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그야말로 온갖 재수 없음의 총집합체인 남타신으로 인해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던 재경은

그의 뛰어난 능력을 직접 체험하곤 인내심을 발휘하여 파트너로 받아들입니다.

또 그가 갑자기 수사에 도움을 주기로 한 이유가 자신 때문임을 알곤 깜짝 놀랍니다.

 

고백하자면, ‘페로몬 부티크는 한 번 중도포기했던 작품입니다.

100페이지도 채 못 가 책장을 덮었던 가장 큰 이유는 현실감 없는 멋부림이었는데,

황당하기만 했던 재경과 타신의 첫 만남 에피소드에서 바로 질려버렸기 때문입니다.

동물을 능가하는 후각을 지닌데다 VVIP급 고객을 거느린 향수 전문가인 남타신은

비뚤어지고 뒤틀린 성격에 막말과 안하무인이 몸에 밴 인물인데,

그와 재경과의 첫 만남부터 어이없는 판타지 로맨스 같은 장면이 펼쳐진 탓에

그 뒤의 연쇄살인 이야기를 읽고 싶은 마음이 싹 가셨었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어찌어찌 다시 연이 닿아 결국 마지막 장까지 읽게 됐는데,

결론부터 말하면, 역시 제 취향과는 거리가 먼 작품이었습니다.

사건도, 캐릭터도, 범인의 정체와 동기도 무엇 하나 자연스럽게 따라가지지 않았고,

이야기는 화려하고 복잡하긴 한데 산만하기만 할 뿐 중심이 잡히지 않아 보였습니다.

 

꽤 많은 등장인물들이 죄다 어떤 식으로든 연쇄살인과 엮여 있는데

필연적인 경우도 있지만 헛웃음이 나올 정도로 우연인 경우도 있습니다.

, 소위 찌질이들을 갖다 모아놓은 표적수사대라는 곳은

고위간부 한 사람의 입김만으로도 쉽게 해체시켜버릴 만한 만만한 곳처럼 그려졌지만

정작 훨씬 더 강력한 권력을 지닌 자들조차 무슨 이유에선지 쉽게 손대지 못합니다.

7년을 끌어온 사건인데 유력한 용의자는 어느 날 갑자기 으로 수사선상에 떠올랐고,

범인은 즉시 제거했어야 할 피해자들을 별 이유도 없이 7년 동안 질질 끌며 처리해왔습니다.

재경과 타신은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주인공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끌려가는 이미지가 더 강했고

어설픈 티격태격 로코의 뒤끝은 조금도 예쁘지도, 흥분되지도 않았습니다.

 

등장인물도 많고, 사건도 복잡다단한데다 스포일러가 될 대목들이 많아서

내용 소개는 제대로 하지도 못하고 인상비평에 가까운 혹평만 하게 됐는데,

대중적이고 말초적인 재미는 분명 여러 곳에서 만끽할 수 있는 작품이지만

미스터리도, 로맨스도 여기저기 산만하게 씨앗들만 잔뜩 뿌려놓았을 뿐

무엇 하나 제대로 회수되지 못한 채 어중간한 엔딩을 맞이한 작품이란 생각입니다.

 

강지영을 처음 만난 건 개들이 식사할 시간이라는 독특하고 흥미로운 단편집이었는데,

그 뒤로 만난 살인자의 쇼핑몰’, ‘심여사는 킬러는 대중적 재미와 안정적 구도는 갖췄더라도

개들이 식사할 시간의 강렬한 개성과는 거리가 먼 작품들이라 다소 아쉬웠던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페로몬 부티크는 한 가지 매력이라도 딱히 손꼽기 어려웠던 것은 물론

강지영의 장점과 필력 역시 찾아보기 힘들었던 작품이라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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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의 내일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93
하라 료 지음, 문승준 옮김 / 비채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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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과 함께 쇠락해가는 신주쿠 뒷골목의 와타나베 탐정사무소’.

어느새 오십대에 접어든 탐정 사와자키는 의뢰인을 기다리며 자리를 지키고 있다.

어느 날 중년의 은행지점장이 찾아와 한 여자의 뒷조사를 의뢰하며 이야기는 시작된다.

조사를 시작하자마자 여자가 이미 사망했음을 알게 되지만, 의뢰인과 연락이 닿지 않는다.

사와자키는 의뢰인이 근무하는 은행을 찾아갔다가 갑작스럽게 복면강도와 마주치는데...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어리석은 자는 죽어야 한다이후 2년 반 만에 하드보일드 탐정 사와자키를 다시 만났습니다.

지금부터의 내일탐정 사와자키 시리즈시즌 2의 두 번째 작품인데,

개인적으론 어떤 의미나 기준을 갖고 시즌을 구분했는지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이 작품이 사와자키의 다른 어떤 면모보다 ‘50라는 점을 강조한 걸 생각해보면

그의 인생 후반전처럼 느껴지기도 해서 시즌 2’라는 타이틀이 조금 이해가 가기도 했습니다.

 

크게 보면 두 개의 사건이 나란히 전개되는 구성입니다.

하나는 은행지점장으로부터 의뢰받은 전통 요정의 여사장에 대한 뒷조사이고,

또 하나는 그 과정에서 우연히 휘말리게 된 은행 강도사건입니다.

단순히 강도사건의 인질 중 한 명에 불과했지만 사와자키는 경찰 조사가 시작되자마자

악연 덩어리인 신주쿠 경찰 니시고리로부터 공범으로 의심받는 것은 물론

또 다른 악연 덩어리인 폭력단 세이와카이의 하시즈메로부터 위협을 받기도 합니다.

요정 여사장의 뒷조사를 의뢰한 뒤 종적을 감춘 은행지점장을 찾아내지 못하면

이 모든 상황을 타개할 수 없다는 게 확실해지자 사와자키는 그를 찾는 일에 주력합니다.

동시에 그가 뒷조사를 의뢰했던 요정 여사장에 대해서도 꼼꼼히 체크하기 시작합니다.

 

오랜만에 만난 사와자키의 매력은 여전했습니다.

50대라는 나이가 강조되긴 했지만 오히려 그 덕분에 더 노련하고 노회해진 느낌을 받았는데

그와 함께 이 시리즈의 매력적인 조연들도 함께 나이를 먹어가면서도 여전한 활약을 펼쳐서

적이든 아군이든 언제나처럼 반가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미스터리 자체만 놓고 보면 솔직히 다 읽고도 무슨 이야기였는지 감이 안 잡힐 정도로

무척 모호하고 아쉬운 점이 많았던 작품입니다.

언제나처럼 사와자키는 탐문, 단서, 추리를 펼치면서 여러 번의 위기를 겪는데

나중에 본인 스스로 촌극이라 부를 만큼 사건은 용두사미 식으로 전개됐고,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렇게 많은 분량과 인물들이 필요했는지조차 의문이 들 정도로

다소 빈약하고 허술한 이야기로 읽혔습니다.

 

, (하라 료가 진짜 강조하고 싶었던 걸로 보이는) 다소 억지스런 휴먼 미스터리도

지나치게 작위적인 것은 물론 감동을 목적으로 한 티가 너무 역력해보였습니다.

그 휴먼 미스터리의 해결 과정 역시 뜬금없는 비약을 통해 이뤄지는 바람에

감동은 물론 이해조차 쉽지 않았던 게 사실입니다.

특히 미스터리에 관련된 꽤 많은 인물들의 개인사나 가족사가 장황하게 설명되곤 하는데

정작 그 설명들이 미스터리 자체와는 그다지 연관이 없어서 지루하고 당혹스럽기도 했습니다.

과연 하라 료가 이 작품을 통해 정말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뭘까, 궁금해질 정도로 말입니다.

(더불어, 다 읽고도 그 의미를 제대로 알 수 없었던 제목 역시 아직도 의문일 뿐입니다.)

 

이런 당혹감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읽을 수 있었던 건 순전히 사와자키의 매력 때문입니다.

상대를 당황하게 만드는 지독한 독설, 특유의 블랙 유머, 빠른 템포의 속사포 같은 대화에다

그의 매력을 한껏 고조시키는 하라 료만의 하드보일드한 문장들은

미스터리 자체와는 무관하게 마지막 장까지 눈길을 사로잡는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나는 문장을 읽고 싶어서 사와자키 시리즈를 기다린다.”라는

미야베 미유키의 말이 다른 어느 서평이나 홍보글보다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시즌 1’에 해당하는 초기 세 작품을 읽고 쓴 서평을 찾아보니

어느 정도 아쉬움이 있긴 했어도 캐릭터, 문장, 미스터리의 매력에 푹 빠졌던 게 확실했는데,

지금부터의 내일은 미스터리의 함량이 기대에 너무 못 미친 탓에

오로지 사와자키의 캐릭터와 하라 료의 문장밖에는 기억에 남지 않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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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유리코는 혼자가 되었다
기도 소타 지음, 부윤아 옮김 / 해냄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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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립명문 유리가하라 고등학교 신입생 야사카 유리코는 기이한 학교 전설을 듣는다.

대대로 유리코라는 이름을 가진 학생이 유리코 님이 되어 절대 권력을 갖게 되고,

그 권력에 거역하는 학생에겐 반드시 치명적인 불행이 찾아온다는 것.

한자 표기도 상관없고 학년의 제약도 없다. 그저 이름이 유리코라면 자격을 갖게 된다.

, ‘유리코 님이 될 수 있는 자는 한 사람뿐이다.

전교에 유리코가 여럿이라면 나머지는 전학, 퇴학, 사건, 사고 등 어떤 식으로든 도태된다.

현재 학교엔 야사카를 포함한 신입생 4명과 전임 유리코 님등 모두 5명의 유리코가 있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학교괴담, 도시전설, 연쇄살인과 미스터리 등 다양한 장르가 믹스된 독특한 작품입니다.

유리코라는 이름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학교를 지배하는 유리코 님의 후보가 되며,

마치 신탁(神託)이 작동하듯 부적절한 유리코들이 도태된 뒤 남는 마지막 한 사람이

새로운 유리코들이 들어올 때까지 유리코 님의 지위를 유지하며 학교를 지배한다는,

미스터리보다는 으스스한 괴담이나 전설에 가까운 소재를 차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인공 야사카 유리코는 전혀 유리코 님이 될 마음이 없는 고교 신입생입니다.

하지만 유리코 님에게 거역하는 학생들이 불행에 빠지거나 학교에서 퇴출된다는 전설은

지독한 따돌림의 고통에 빠져있는 야사카에게는 무시할 수 없는 유혹이기도 합니다.

유리코 님이 될 수만 있다면 현재의 고통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기대 때문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사카는 누군가의 불행을 제물삼아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는 일에 대해

생래적인 거부감을 가진 여리고 유약한 소녀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딜레마에 빠집니다.

 

한편, 야사카가 유일하게 의지하는 친구는 시마쿠라 미즈키.

또래답지 않은 냉철함과 예리함을 지닌 미즈키는 유리코 님전설을 미신으로 치부합니다.

하지만 야사카가 유리코 님의 힘을 얻기 위해 분투하는 일 자체를 말리지도 않습니다.

그런 와중에 유리코 님 후보들이 차례로 살해당하는 끔찍한 사건이 벌어지자

미즈키는 그것이 미신 또는 저주가 아니라 인간에 의한 범행임을 입증하고자 앞장섭니다.

 

사실, ‘유리코 님 전설21세기에는 그 명맥을 유지하기가 힘든 괴담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학생들은 수십 년에 걸친 유리코 님의 저주를 선배들로부터 전해들은 것은 물론

그 괴담이 누군가를 위험에 빠뜨리는 상황을 두 눈으로 직접 지켜봤던 탓에

누가 됐든 유리코 님에 등극하는 순간 두려움과 경외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특히 유리코 님의 저주가 집단 따돌림, 입시 스트레스, 차별과 편견 등

고등학생이라면 누구나 마주쳐야 하는 끔찍한 현실의 도피처 역할도 종종 맡아왔기에

전설과 괴담의 힘은 학생들 사이에서 해가 거듭될수록 더 큰 위력을 갖게 됐던 것입니다.

 

하지만 야사카와 미즈키가 마주한 유리코 님의 저주는 예전의 그것과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지금까지 수십 년간의 저주는 고작해야 사고로 인한 부상이 가장 심한 경우였는데,

신입생인 그들이 목격한 유리코 님의 저주는 전례 없는 끔찍한 연쇄살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유리코 님 후보들이 차례로 살해당하자 야사카 역시 극도의 두려움에 빠지는데,

경찰 수사마저 지지부진한 가운데 미즈키는 조금의 주저도 없이 진실 찾기에 나섭니다.

 

아무래도 10대 고교생이 명탐정 역을 맡은데다 사건 무대가 학교이다 보니

특별히 새로운 트릭이나 놀라운 설정이 등장하는 작품은 아닙니다.

오히려 일부 트릭은 고전적인 본격 미스터리의 향기까지 풍기고 있어서

이 작품의 배경이 현대보다는 조금 이른 시기에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괴담 혹은 전설을 연쇄살인과 매끄럽게 결부시킨 작가의 필력은 눈에 띄었는데

그래선지 큰 위화감 없이 흥미롭게 마지막 장까지 달릴 수 있었습니다.

특히, 진실이 드러나고도 꽤 많은 분량이 남아서 얼마나 많은 반전이 숨어있을까 궁금했는데

마지막 에필로그에 이르기까지 연이어 독자의 뒤통수를 친 작가의 정교한 설계는

후속작을 기대해도 좋을 만큼 매력적이고 신선했습니다.

다만, 마지막 반전은 담은 에필로그는 다소 무리해 보였던 게 사실인데,

놀랍긴 해도 어딘가 억지스러운, 그래서 작가의 과욕으로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앞서 펼쳐놓은 흥미로운 이야기를 막판에 개운치 않게 만든 악수(惡手)라고 할까요?

 

읽는 내내 이 작품을 원작 삼아 제작된 일본 드라마가 생각나곤 했는데,

3월에 한국에서도 만나볼 수 있다고 하니 일단 1~2회 정도는 꼭 보려고 합니다.

어쩌면 소설보다는 영상이 이 작품의 매력을 잘 드러내줄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 1989년생인 기도 소타가 다음에 어떤 작품으로 독자를 찾을지도 무척 궁금해졌는데

데뷔 전에 이미 많은 이야기를 쓴 이력이 있다고 하니 기대감이 더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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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가
아사이 마카테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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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 메이지시대를 풍미한 여류 시인 나카지마 우타코가 병으로 쓰러집니다.

제자 미야케 가호와 하녀 스미는 그녀의 서재를 정리하다가 낯선 원고뭉치를 발견합니다.

그것은 소설을 혐오하던 나카지마 우타코가 언문일체 풍으로 쓴 뜻밖의 수기였는데,

두 사람은 그 수기가 막부 말기에서 메이지 유신까지의 동란의 시기를 헤쳐 나온

나카지마 우타코의 애절하면서도 비극적인 삶의 기록임을 알곤 깜짝 놀랍니다.

 

1860년 막부 말기, 에도 여관 이케다야의 딸로 남부러울 것 없던 17살 소녀 나카지마 도세는

가난하지만 형형한 눈빛의 사무라이 하야시 모치노리와 운명적으로 만납니다.

그 운명을 귀히 여기며 하야시와 부부의 연을 맺은 도세는 가난한 미토 번의 여자가 됩니다.

하지만 막부 말기 혼란의 와중에 내전에 휩싸인 미토 번은 두 사람을 비극으로 몰아넣습니다.

 

개인적으로 인생작 가운데 한 편으로 꼽는 작품이 아사다 지로의 칼에 지다입니다.

막부 말기의 혼란기에 오로지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칼 한 자루에 의지해 전쟁터에 뛰어든

난부 번의 사무라이 요시무라 간이치로의 일대기를 그린 칼에 지다

한국 독자에겐 마음 편히 읽힐 리 없는 일본 근대사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할복을 명예처럼 여기는 무사도에 대한 찬양도 아니고, 영웅적인 주인공의 활극도 아니며,

평화로운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좋은 아버지, 좋은 스승이 될 수 있었던 한 평범한 가장

죽음이 지천에 널린 격변기에 태어난 탓에 겪어내야만 했던 지난한 일대기를 그리고 있어서

일본 근대사라는 배경과 무관하게 수시로 눈가를 뜨겁게 만들었던 명품 시대소설입니다.

 

연가칼에 지다와 거의 같은 시대를 배경으로 한 시대소설입니다.

하지만 연가는 막부 말기의 피비린내 나는 무사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하필 그 난세에 태어나 지고지순한 사랑에 빠진 것 외엔 아무 것도 지은 죄가 없는

도세라는 한 여자의 절절한 연애담이자 참혹한 내전의 지옥도를 생생하게 그린 시대소설이자

그 지옥을 딛고 한 시대를 풍미한 여류 시인으로 다시 태어나기까지의 회고록이기도 합니다.

 

사무라이만은 안 된다.”는 어머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하야시의 아내가 된 도세는

에도를 떠나 미토 번에 삶의 터전을 잡은 지 얼마 안 돼 위험한 현실들과 마주합니다.

외세에 의한 개국을 놓고 막부파와 천황파로 갈린 채 요동치는 일본의 정국,

천구당과 제생당으로 갈린 채 행동노선과 헤게모니를 놓고 내전에 휩싸인 미토 번의 위기,

그리고 그 와중에 충직한 무사들의 리더로 추앙받는 남편 하야시의 위태로운 처지 등

남편과의 소박한 행복만을 바라던 도세에겐 너무나도 낯설고 두려운 상황들이 펼쳐집니다.

결국 명분 없는 내전은 수많은 목숨들을 허망하게 사라지게 만들었고,

도세는 그 지옥 같은 시간들을 오로지 하야시를 향한 사랑의 힘으로 간신히 버텨냅니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흘러 우타코라는 이름으로 메이지 시대를 풍미한 여류 시인이 된 도세는

말년에 이르러 어떤 특별한 목적을 갖고 참혹했던 미토 번의 시간들을 기록하기로 결심하는데

그녀가 병으로 쓰러진 뒤 그 기록들을 읽게 된 제자와 하녀는 충격적인 사실에 직면합니다.

 

나카지마 우타코는 일본 근대소설의 개척자 히구치 이치요의 스승으로 실존했던 인물입니다.

작품 소개글에 따르면 작가가 역사책에 기록된 몇 줄의 문장으로부터 거슬러 올라가

면밀한 조사를 통해 역사의 숨겨진 한 뼘을 복원해 냈다.”고 하는데

정확히 어디까지가 팩트이고 어디서부터 픽션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150회 나오키 상과 전국 서점 직원이 뽑은 시대소설 대상의 영예를 차지할 만큼

시대소설로서의 매력과 품격을 골고루 지닌 작품임에는 분명하다는 생각입니다.

 

사실, 이 작품은 북스피어를 통해 제공받았는데, 마포 김사장님(북스피어 편집자)의 메모에는

이 작품은 약간의 진입장벽이 있는데 잘 극복하시리라 믿습니다.”라는 문구가 있습니다.

진입장벽은 다름 아닌 작품 안에 무수하게 등장하는 막부 말기의 역사적 사료들입니다.

인명, 지명, 직책, 역사적 사건 등 한국 독자에겐 다소 어려운 대목들이 많은 편인데

그래선지 각주의 양도 많고 그 내용도 꼼꼼하게 읽어야 하는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초반만 잘 넘기면 그 뒤로는 큰 무리 없이 읽을 수 있으니

사소하다고 할 수도 있는 진입장벽때문에 이 작품의 미덕을 놓치는 일은 없기를 바랍니다.

 

, “두 번째 읽을 때 작품의 참맛을 만끽할 수 있었다.”는 마포 김사장님의 조언도 있었지만

이 작품은 누구나 마지막 장을 덮은 뒤 재독(再讀)의 욕구가 생기지 않을 수 없는 작품입니다.

저 역시 잠시의 틈을 둔 뒤 찬찬히 첫 페이지부터 다시 읽을 생각을 갖고 있는데

나카지마 도세가 겪은 운명 같은 사랑과 지옥 같은 시간들의 의미를

진입장벽의 방해 없이 좀 더 진하고 생생하게 맛볼 수 있다는 기대감 때문입니다.

 

끝으로, 내전의 혼란 중에 도세가 남편 하야시를 향해 읊조린 애절한 시 한 편을 소개합니다.

이 와카(和歌, 하이쿠와 함께 일본의 대표적인 시가)는 앞뒤 표지에도 인쇄돼있는데

마지막 장을 덮을 즈음에는 그 애절함의 깊이가 얼마나 무한한지 새삼 절감할 수 있었습니다.

 

님에게 사랑을 배웠네

그러니 잊는 길도 가르쳐 주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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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누가미 일족 긴다이치 고스케 시리즈
요코미조 세이시 지음, 정명원 옮김 / 시공사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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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오래 전의 일이지만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를 처음 접한 건

악마의 공놀이 노래이누가미 일족을 통해서였습니다.

비듬 날리는 더벅머리에 어수룩한 외모의 긴다이치 코스케에게 반하기도 했고

시대물의 매력과 아날로그 냄새가 폴폴 나는 각별한 미스터리의 맛에 홀딱 빠졌던 건데

한참 만에 시리즈 다시 읽기를 통해 재회한 이누가미 일족

여전히 강한 흡입력과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통해 명품 고전의 진가를 발휘하고 있었습니다.

 

신슈 지역의 나스를 기반으로 한 기업가 이누가미 사헤가 불길한 유언장을 남긴 채 숨집니다.

본처 없이 세 명의 첩만 뒀던 사헤는 그녀들과의 사이에서 낳은 자식과 손자-손녀들보다는

어린 시절 자신의 은인이었던 자의 손녀인 다마요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유언장을 남겼는데

본문 속 표현대로 유족들을 피로 피를 씻는 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던져 넣은그 유언은

실제로 끔찍한 참극과 함께 이누가미 일족을 충격과 분노에 빠뜨리는 결과를 낳고 맙니다.

문제는 어려서부터 다마요와 가까이 지낸 덕에 가장 유력한 상속 후보였던 맏손자 스케키요가

때마침 패전 귀환병으로 돌아왔지만 그는 부상으로 얼굴을 다쳐 고무가면 신세가 됐다는 점.

그가 진짜 스케키요냐 여부를 놓고 격한 논쟁이 벌어지면서 점차 유산상속전이 가열되는데

거기에 찬물을 끼얹듯 끔찍한 살인극이 시작되고 맙니다.

 

다소 추상적인 일본 문고판 표지에 비해 메시지가 확실해 보이는 한국판 표지를 보면

줄거리에서 언급한 맏손자 스케키요의 고무가면이 이 작품의 중요한 설정임을 알 수 있는데,

핵심인물이 가면을 쓰고 등장할 경우 미스터리의 전개 방향을 대략 가늠할 수 있긴 하지만

복잡다단한 캐릭터와 사건들, 그리고 그것들을 정교하고 꼼꼼하게 직조한 설계 덕분에

꽤 쉬워 보일 것 같았던 미스터리는 페이지를 넘길수록 수렁에 빠지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물론 탁월한(?) 독자 가운데에는 범인이 빤히 보였다.”는 서평을 남긴 경우도 있는데,

사실 이누가미 일족은 범인 찾기 자체보다 훨씬 더 흥미로운 대목들이 많아서

미스터리 이상의 다양한 감정들을 맛볼 수 있는 작품이라는 생각입니다.

, 탐욕, 복수, 증오 등 인간이 서로에게 겨눌 수 있는 극단적인 감정들이 난무하는 가운데

그 감정들이 너무나도 어처구니없는 우연들과 뒤섞이면서 만들어낸 끔찍한 비극의 여운이

오히려 (미스터리보다 더 압도적인) 이 작품의 진짜 미덕이라는 뜻입니다.

 

젊은 시절의 이누가미 사헤가 겪었던 구원과 은혜, 배신과 죄책감의 흔적들은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 수많은 사람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습니다.

그 상처들이 대를 이어 거듭 덧나면서 끝내 피비린내 나는 비극으로 발전하는 과정은

독자에 따라 막장의 끝이라고 부를 수도 있는 설정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범인이 누구냐를 떠나 인간 감정의 민낯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어서

마지막 장까지 미스터리 못잖은 서사의 힘을 발휘한다는 생각입니다.

 

전작인 밤 산책팔묘촌에서 다소 소극적이거나 비중이 적었던 긴다이치 코스케는

이번 작품에서는 초반부터 이누가미 가문 가까이에 머물며 적극적으로 수사를 펼치는데

덕분에 옥문도이후 오랜만에 그의 진가를 맛볼 수 있는 흥미로운 시간이었습니다.

사소한 단서도 놓치지 않고 머릿속에 저장해두는가 하면,

작은 깨달음에도 쉽게 흥분하며 비듬이 휘날리도록 머리를 벅벅 긁어대는 그의 모습은

언제 봐도 정감 가는 명탐정으로서의 매력을 한껏 발산하고 있었습니다.

 

등장인물도 많고, 이야기도 복잡해서 내용 소개를 하려면 한도 끝도 없는 작품이다 보니

대략적인 인상비평에 가까운 서평이 되고 말았는데,

한 가지 당부하고 싶은 점은 다른 독자들의 서평이나 인터넷 서점의 소개글은

가급적 읽지 않은 상태에서 이 작품을 읽었으면, 하는 점입니다.

누가 살해되는지 자체도 호기심을 일으키는 대목인데

서평이나 소개글에는 그런 내용들까지 제법 상세하게 노출돼있기 때문입니다.

사심 가득한 긴다이치 코스케의 팬이라 저의 추천도 객관적일 수는 없는 일이지만,

이누가미 일족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중에서도 손에 꼽을 수 있는 명품이라

아직 이 시리즈를 접하지 못한 독자라면 첫 만남으로 삼아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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