딜리버리
안드레아스 빙켈만 지음, 나현진 옮김 / 아름다운날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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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소개된 안드레아스 빙켈만의 여섯 작품 중 다섯 번째로 만난 딜리버리입니다.

같은 작가의 작품이라도 매번 만족도나 매력이 달리 느껴지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안드레아스 빙켈만은 다섯 번을 만나는 동안 그 편차가 꽤 큰 편에 속하는 작가입니다.

아주 간략하게 이 작품까지의 한 줄 소감을 출간순서대로 요약해보면...

 

사라진 소녀들’ - 매력 없는 형사와 범인. 설정에 비해 이야기와 캐릭터 모두 무리수.

창백한 죽음아직 못 읽었음.

지옥계곡앞서 전개된 장점을 모두 덮어버린 막판의 뜬금없는 진실.

물의 감옥2016년 베스트 11으로 꼽을 만큼 매력적인 작품.

쉐어하우스읽다가 1/3도 못 가서 포기.

딜리버리’ - 앞으로 빙켈만을 계속 읽어야 할지 심각하게 고민하게 만든 작품.

 

물의 감옥을 제외하곤 대부분 실망감을 많이 느낀 셈인데

특히 전작인 쉐어하우스는 초반부터 빙켈만의 작품이 맞나?”싶을 정도로 놀란 끝에

결국 1/3도 못 읽고 중도에 포기했던 일이 있어서

신작인 딜리버리의 출간이 반갑거나 기대되기보다는 잠시 주저됐던 게 사실입니다.

그래도 일단 쉐어하우스의 실망 대신 물의 감옥의 좋은 기억을 떠올리며

다시 한 번 안드레아스 빙켈만을 만나보기로 결심했습니다.

 

빼어난 미모의 금발 여성들이 감쪽같이 실종되는 사건이 연이어 벌어집니다.

하지만 함부르크 경찰인 옌스 케르너가 이 연쇄실종사건을 처음부터 인지한 건 아닙니다.

숲에서 발견된 정체불명의 창백한 여인과 강변에서 시신으로 발견된 한 여인을 조사하던 그는

행정요원(?)인 레베카 오스발트의 꼼꼼한 자료조사 덕분에 사건의 실체를 알게 된 것입니다.

특히 최근 스토킹을 당하고 있던 한 여성이 실종되면서 결정적인 실마리를 붙잡은 옌스는

탐문과 함께 레베카가 찾아낸 단서들을 통해 최근 몇 년간 벌어진 연쇄실종사건이

지독하고 악랄한 소시오패스에 의한 계획적인 납치사건이라고 확신하게 됩니다.

 

이 작품은 쉐어하우스에 이은 옌스 케르너 & 레베카 오스발트 시리즈두 번째 작품입니다.

중도 포기했던 작품의 시리즈 후속편이란 걸 초반부에 알게 되자 살짝 맥이 빠졌지만,

(‘쉐어하우스에서 두 주인공의 캐릭터를 제대로 맛보기도 전에 책을 덮었던 탓인지)

딜리버리의 초반부에 소개된 두 사람은 흡입력과 매력을 골고루 갖춘 캐릭터로 보였습니다.

53세의 옌스는 반골 기질이 다분한 거구의 형사지만 동시에 부드러움도 함께 갖춘 인물이고

어릴 적 사고로 휠체어에 의지하게 된 레베카는 그런 옌스를 흠모하는 경찰 행정요원입니다.

경찰공무원이지만 전혀 공무원 같지 않은 옌스와 그와는 정반대의 캐릭터인 레베카는

물과 기름처럼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오히려 견원지간에 어울릴 것 같은 인물들이지만

두 사람의 일과 사랑에 걸친 미묘한 케미는 이 작품에서 가장 매력적인 대목이었습니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스릴러 자체는 진부하고 상투적인 틀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빙켈만의 작품 대부분이 그랬듯) 미모의 여성들이 참혹한 범죄의 희생자로 설정됐고

범인 역시 일반인의 기준으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심각한 소시오패스로 그려졌습니다.

호기심을 자극하는 설정이라 페이지는 잘 넘어간 게 사실이지만

트라우마에 사로잡힌 소시오패스가 미모의 여성들을 향해 증오와 복수를 내뿜는다는 설정은

뭔가 특별한 것이 곁들여지지 않으면 더 이상 독자의 눈길을 사로잡기 힘든 클리셰입니다.

그런 점에서 두 주인공의 케미 외에 어디에서도 특별한 것을 찾아볼 수 없었던 딜리버리

읽는 동안의 긴장감도, 막판 반전의 충격도, 다 읽은 뒤의 여운도 부족했던 작품입니다.

 

물론 범인의 독특한 범행수법이라든가 피해자들의 충격적인 상황들은 나름 개성이 있었지만

큰 틀에서 보면 옌스와 레베카가 어떻게 진실에 접근해갈지, 그들에게 어떤 위기가 닥칠지,

, 범인은 물론 (헛발질로 그치게 될) 주요 용의자들의 행보는 어떻게 그려질지 등

남은 이야기들의 향방이 빤히 내다보일 정도로 쉽고 평범한 스릴러에 그치고 말았습니다.

엇비슷한 재료들을 뻔한 조미료로 버무린, 전에 많이 먹어본 듯한 진부한 요리라고 할까요?

 

크게 눈에 거슬린 대목은 없었지만 수시로 책읽기를 멈칫하게 만든 번역도 다소 아쉬웠는데

편집 과정에서 충분히 걸러낼 수 있었던 매끄럽지 못한 일부 문장들은

안 그래도 긴장감 없이 읽히는 이야기를 더 밍밍하게 만들었다는 생각입니다.

출판사와 관계된 아쉬움 하나만 더 언급하자면,

인터넷 서점의 책소개를 보면 스포일러 정도가 아니라 하나부터 열까지 다 공개하고 있는데

사건의 실체와 범인의 정체 등 굳이 책을 볼 필요가 없게끔 완벽한 줄거리를 담고 있습니다.

제겐 무척 낯선 이름의 출판사지만 그래도 다양한 장르의 책을 206편이나 출간한 곳이던데

이런 어이없는 실수를 해도 되는 건지 그저 의문일 뿐입니다.

 

앞서 빙켈만 작품에 대한 한 줄 평에서도 밝혔듯

딜리버리는 앞으로 빙켈만을 계속 읽어야 할지 심각하게 고민하게 만든 작품입니다.

쉐어하우스를 중도 포기했던 게 오독의 결과가 아니라는 것도 간접적으로 입증해준 셈인데

다음 신작이 나오게 되면 일단 다른 독자들의 반응을 먼저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아직 못 읽은 채 책장에 방치해놓은 창백한 죽음은 어찌됐든 읽긴 해야겠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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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보면 무시무시한 그림동화 1 - 개정판 알고보면 무시무시한 그림동화 1
키류 미사오 지음, 이정환 옮김 / 서울문화사 / 199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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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알라딘에서 중고서적을 검색할 때마다 제목 때문에 자꾸만 눈길이 끌리던 작품이었는데

얼마 전 장바구니를 채워놓고 보니 배송비 무료 혜택까지 딱 2,000원이 남았기에

더는 고민하지 않고 얼른 픽업해버렸습니다.

 

아름답고 교훈적인 동화나 민담이 원래는 무시무시하고 끔찍한 내용을 담고 있었지만

세월을 거치면서 위험하고 음란한 부분들이 정제됐다는 건 누구나 익히 아는 사실입니다.

가령, 친숙하고 매력적인 주인공들이 실은 소시오패스나 사악한 욕망덩어리였다든지

아름답고 고귀한 주인공들이 실은 음란하기 짝이 없는 인물이었다든지

또는, “그래서 그들은 행복하게 살았답니다.”까지만 알고 있는 이야기가

실은 그 뒤에 끔찍하고 추악한 진짜 엔딩을 갖고 있다든지....

고백하자면 이런 상상만으로도 오리지널에 대한 궁금증이 부쩍 일어날 수밖에 없는데,

아마 이 작품이 내내 제 눈길을 끌었던 건 바로 그 궁금증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저자인 기류 마사오는 두 명의 작가 - 우에다 가요코, 쓰쓰미 사치코 의 필명입니다.

프랑스 유학파인 두 작가는 특이하게도 유럽 역사의 이면에 숨겨진 에피소드에 주력했는데

악녀대전’, ‘우아하고 잔혹한 악녀들’, ‘프랑스의 잔혹한 이야기들’, ‘아름다운 고문의 책

집필한 작품 제목만 봐도 그녀들의 관심사가 무엇이었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머리말에 따르면 그림 동화초판의 잔혹하고 거친 표현 방법을 그대로 살리면서

문학, 역사학, 정신분석학 등 여러 분야의 학자들의 해석을 참고하고

거기에 자신들의 상상력을 곁들여 새롭고 생생한 그림 동화를 엮었다고 합니다.

 

시리즈 1편인 이 작품엔 백설공주’, ‘신데렐라’, ‘숲속의 잠자는 공주등 친숙한 동화는 물론

현대의 많은 작가들이 모티브로 삼은 끔찍한 이야기 파란 수염까지 여섯 편이 실려 있는데,

우리가 알고 있는 스토리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주인공들에게 배신감(?)을 느낄 정도로 파격적인 내용들이 전개됩니다.

 

백설공주의 경우 근친상간, 비속살해, 난잡하고 문란한 남녀관계, 처절한 복수가 등장해서

오리지널과 동화 사이의 간격이 (전혀 다른 작품인 것처럼) 멀게 느껴졌고,

개구리 왕자님숲속의 잠자는 공주는 일반인들이 익히 아는 엔딩 그 이후의 이야기,

즉 행복하게 잘 살 줄 알았던 주인공들의 뜻밖의 후일담이 그려져서 무척 흥미로웠습니다.

파란 수염푸른 수염의 첫 번째 아내’(하성란), ‘푸른 수염’(아멜리 노통브),

푸른 수염의 다섯 번째 아내’(제인 니커선) 등 많은 작품에 모티브를 준 오리지널인데

동화라기보다는 피비린내 나는 공포괴담에 가까운 독특한 매력을 느낄 수 있었고,

노간주나무역시 짧은 분량 안에 농도 짙은 호러 판타지가 담긴 작품입니다.

 

해설에 따르면 그림 형제가 활동하던 당시에도 이들의 작품에 대한 비난과 반발이 심했고

그런 탓에 개정판이 나올 때마다 고육지책으로 캐릭터나 사건을 꽤 순화했다고 하는데,

특이한 건 성()에 관계된 설정들은 대폭 삭제된 반면

살인, 고문, 인육 등 잔인한 폭력 장면들은 원형이 거의 그대로 남았다는 점입니다.

당시의 도덕적 잣대의 성격이 어땠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하지만 순화되고 삭제된 게 이 정도라면 오리지널에 그려졌던 성적(性的) 설정들이

얼마나 기괴하고 노골적이었는지는 도무지 상상할 수 없을 것 같기도 합니다.

 

흥미 위주의 작품인데다 기대만큼 파격적이지 않았던 탓에 아쉬움도 있었지만

그래도 나름 그림 동화의 진면목을 엿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는데

아무래도 일반독자 입장에선 싼 티 나는 듯한 장난스런 표지 때문에

이 작품을 집어 드는데 거부감을 느끼는 경우가 많을 것으로 보입니다.

(한국 번역본은 일본 원작 표지를 반전만 한 채 그대로 사용했습니다.)

‘19판정을 받은 것 역시 독자들의 선입견에 한몫을 한 것 같은데,

대부분 절판 상태라 중고서점에서밖엔 구할 수 없는 상태지만

관심 있는 독자라면 시리즈(모두 세 편) 중 한 편쯤은 장바구니에 넣어도 괜찮겠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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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무새 죽이기
하퍼 리 지음, 김욱동 옮김 / 열린책들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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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읽은 건 2003년 문예출판사에서 낸 판본이지만 오래전부터 절판 상태라서

부득이하게 현재 판매중인 열린책들 판본에 서평을 올립니다.

다행히 번역가가 같은 분이어서 동일한 작품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다만, 서평에 인용한 본문과 그것이 수록된 페이지는 문예출판사 판본에 따랐습니다.)

 

우선 고백할 것은 제목만큼은 여느 고전이나 명작 못잖게 자주 들어봤어도

실제로 읽기 전까지 이 작품이 무슨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지는 전혀 몰랐다는 점입니다.

언젠가 인터넷에서 이 작품을 원작으로 한 영화 포스터 속의 그레고리 펙을 봤던 기억 탓에,

또 제목이 풍기는 심상찮은 뉘앙스 탓에 고전 스파이 스릴러라고 예단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읽기 시작한지 얼마 안 돼 그 예단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것이었는지 깨달았지만 말입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읽기 전에 상세한 소개글을 찾아보지 않았다는 점인데,

만약 소개글을 봤더라면 “1930년대를 배경으로 인종차별을 고발한 법정 스릴러라는,

앞서 저지른 터무니없는 예단보다 더 잘못된 기대감을 가졌을 게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인터넷 서점의 책소개는 미국 남부 앨라바마의 메이콤이란 소도시에서

백인 변호사 애티커스 핀치가 소신껏 흑인 용의자를 변호하는 이야기라고 돼있는데,

틀린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작품을 제대로 대변한 소개글이라고 볼 수도 없습니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변호사 애티커스 핀치가 아니라 그의 딸 진 루이즈 핀치이며

일명 스카웃이라 불린 그 소녀가 7살부터 대략 3년 동안 겪은 다사다난한 사건들과 함께

몸과 마음이 소녀에서 숙녀로 도약하는 성장물로 보는 게 더 정확한 평가이기 때문입니다.

 

스카웃은 그 또래답게 천방지축이지만 뚜렷한 소신과 고집을 가진 소녀입니다.

나이답지 않은 똘똘함과 함께 영악한 악동 기질까지 지닌 그녀는

은둔생활 중인 이웃 아서 래들리를 집밖으로 끌어내기 위해 오빠 젬과 덫을 놓기도 하고

당돌한 언행으로 흑인 식모 캘퍼니아는 물론 고상한 이웃들을 곤혹스럽게 만들기도 하지만

근엄하면서도 자식과의 소통을 중요시 여기는 아버지 애티커스 덕분에 올곧게 자라납니다.

그런 그녀는 조금씩 세상의 민낯들과 마주하면서 크고 작은 혼란들을 겪게 되는데,

그때마다 아버지 애티커스는 그녀의 마음속에 깊이 남을 이야기들을 남겨주곤 합니다.

 

누군가를 정말로 이해하려고 한다면 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을 해야 하는 거야.” (p60)

 

수백 년 동안 졌다고 해서 시작도 해보지 않고 이기려는 노력조차 포기해버릴 까닭은 없어.” (p147)

 

앵무새들은 인간을 위해 노래를 불러 줄뿐이지. 사람들의 채소밭에서 무엇을 따먹지도 않고,

옥수수 창고에 둥지를 틀지도 않고, 우리를 위해 마음을 열어놓고 노래를 부르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하는 게 없지. 그래서 앵무새를 죽이는 건 죄가 되는 거야.” (p173)

 

스카웃은 아버지가 변호를 맡은 흑인 톰 로빈슨이 백인여성을 강간한 사건에 관심을 가지면서

1930년대 미국 남부에서 여전히 통용되던 백인중심의 부조리한 가치관을 직시하게 됩니다.

태어난 이후 흑백의 구분이라는 사회현상을 당연한 일로 받아들여 온 스카웃이지만

메이콤 사람들이 흑인 용의자 톰 로빈슨을 변호하는 아버지에게 노골적인 반감을 드러내고

심지어 떼를 지어 위험천만하고 폭력적인 위협까지 가해오자

적잖은 충격과 함께 자신이 속한 사회를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1930년대 미국 남부 소도시의 갈등과 혼란, 그리고 첨예한 인종차별 문제는

어린 소녀 스카웃의 눈을 통해 그려진 덕분에 더더욱 현실적이고 사실적으로 다가옵니다.

하지만 작가가 스카웃에게 전해주고 싶었던 교훈은 어쩌면 거대하고 심오한 것이라기보다는

앞으로 펼쳐질 인생에서 내내 그녀의 좌표가 돼줄 소박하고 진정성 어린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중에서도 아버지 애티커스가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변호하려 했던 흑인 톰 로빈슨이나

스카웃이 집밖으로 끌어내기 위해 괴롭혔던 이웃의 은둔남 아서 래들리 같은 인물들을

아무 해도 끼치지 않는, 그래서 함부로 죽여선 안 되는 앵무새에 비유하여 지은 제목을 보면

작가는 스카웃에게 타인과의 관계속에서 스스로를 다지고 굳건하게 만들기를,

그래서 올곧고 정의롭고 강한 숙녀로 성장하기를 바랐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한국 독자에겐 낯선 인종차별이라는 소재가 전면에 포진한 탓에

미국 (또는 흑백 갈등이 작동하고 있는 나라)의 독자만큼 푹 빠져들 수 없었던 것도 사실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 다음으로 가장 영향력 있는 책 1로 꼽힌 일이나

첫 출간 후 60년이 지났어도 여전히 엄청난 판매부수를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면

적어도 영미권에서 이 작품이 갖는 절대적인 가치는 분명히 인정해야 될 거란 생각입니다.

 

호밀밭의 파수꾼이나 위대한 개츠비등 최근 읽은 영미권의 고전급 명작들과 마찬가지로

기대했던 만큼의 만족감이나 여운을 맛보지 못하긴 했지만

나름 충분히 의미 있는 책읽기 시간이 됐던 건 분명한 사실입니다.

장르물에 익숙해진 나머지 너무 빨리 책장을 넘긴 게 살짝 후회됐는데,

그래선지 하퍼 리가 이 작품 이후 55년 만에 출간한 후속편 격인 파수꾼을 읽을 때는

20대가 된 스카웃의 이야기를 조금은 더 꼼꼼히 읽어보려고 합니다.

성인이 된 그녀가 자신의 양심의 파수꾼이던 아버지 충돌하며 갈등하는 내용이라고 하니

어쩌면 좀더 공감하기 쉬울 수도, 또 훨씬 더 무겁고 깊은 여운을 맛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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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산책 긴다이치 고스케 시리즈
요코미조 세이시 지음, 정명원 옮김 / 시공사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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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 다시 읽기의 네 번째 작품인 밤 산책입니다.

여느 작품과 마찬가지로 클래식의 품격과 시대극의 매력을 한껏 만끽할 수 있는 작품이지만,

특이한 건 사건의 한복판에 내던져진 3류 추리소설가 야시로 도라타라는 인물이

1인칭 화자로 등장하여 이야기를 이끌어간다는 점입니다.

과거 부귀영화와 권력을 누렸던 후루가미 를 방문한 야시로는

그곳에서 직접 겪은 참극의 전모를 1인칭 시점 소설 형식으로 기록합니다.

그리고 그 참극의 공포가 절정에 이를 때쯤 긴다이치 코스케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옥문도처럼 긴다이치 코스케가 처음부터 수사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은 점은 아쉽지만

다 읽고 나면 왜 이런 설정과 형식이 필요했는지 충분히 납득할 수 있게 됩니다.

 

오랫동안 영주의 지위에 있었으나 이제는 거의 몰락한 지경의 후루가미

한때 충성스런 가신이었으나 지금은 오히려 후루가미 를 장악한 센고쿠 사람들이 뒤얽힌

복잡하고 비극적인 가족사 및 그로 인해 벌어지는 연이은 참극을 다루고 있습니다.

불륜과 근친상간, 역전된 주종 관계, 꼽추병과 몽유병이라는 불행한 유전병 등

두 가문의 이면에는 불온한 기운을 내뿜는 악연의 요소들이 잔뜩 숨어있습니다.

그리고, 후루가미 의 외동딸 야치요의 결혼상대자를 결정하는 시점에 이르러

그 악연의 요소들이 한꺼번에 폭발하면서 목이 잘린 시체가 줄줄이 발견되고 맙니다.

후루가미 에 초대받은 3류 추리소설가 야시로 도라타는 이 참극을 낱낱이 목격하는데,

그는 끔찍한 사건의 전말을 소설로 기록하면서 동시에 범인의 정체를 직접 찾아 나섭니다.

 

야시로에겐 두 가문의 일족들을 지켜보는 것 자체가 견딜 수 없이 소름 돋는 일입니다.

늦은 밤의 숲을 산책하는 몽유병 여인, 그 여인의 결혼상대인 무례하고 오만한 화가,

술만 마시면 자기도 모르게 칼을 휘두르는 노인, 요염함을 전신으로 내뿜는 옛 영주의 부인,

그리고 선대로부터 이어받은 꼽추의 유전자로 인해 괴로워하는 청년 등

누구 하나 평범하다고 할 수 없는 기괴한 인물들을 보고 있노라면

이 음침한 저택에서 목 잘린 시체 사건 같은 건 진작 여러 차례 일어났다고 해도

조금도 이상하게 여겨지지 않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첫 살인이 미궁으로 빠진 뒤 경찰마저 손을 놓은 상태에서

이번에는 후루가미 의 옛 영지인 오카야마 현 귀수촌(鬼首村)에서 똑같은 참극이 벌어지고,

그제야 우리의 주인공 긴다이치 코스케가 사건에 뛰어들게 됩니다.

(귀수촌은 악마의 공놀이 노래의 주 무대이기도 한데 두 작품의 내용이 연결되진 않습니다.)

 

긴다이치 코스케의 등장은 제법 늦는 편입니다.

거의 중반 이후 쯤에나 모습을 드러내는데, 그래서인지 그의 활약상이 많이 보이진 않습니다.

독자적으로 사건을 조사하고 기록해온 추리소설가 야시로의 도움을 받은 것 외엔

그가 별도로 꼼꼼한 조사를 벌이는 장면도 그리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범인이 남긴 결정적 오류를 누구보다 먼저 눈치 챈 긴다이치 코스케는

떠들썩하게 범인을 지목하는 대신 조용히 범인의 뒤통수를 후려칩니다.

 

서평들을 살펴보면 독자마다 이 작품의 막판 반전에 대한 호불호가 갈리는 걸 알 수 있는데

야박한 평점을 준 독자들은 반전 자체가 매끄럽지 않고 억지스럽다고 평하는 경우가 많았고

심지어 작가가 공정한 게임을 펼치지 않고 변명하는 것 같았다고 평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저의 경우 흐릿한 기억이긴 해도 이 작품을 처음 읽었을 때도 큰 거부감이 없었고

오랜만에 다시 읽은 이번에도 막판 반전이 꽤 짜릿하게 느껴졌는데

이런 호불호의 차이를 다른 독자들의 서평들을 통해 발견하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었습니다.

다만, 어쩌면 제가 긴다이치 코스케의 팬이라서 무조건 좋게만 평가한 건 아닌가 싶었지만,

작가의 팬 사이트인 요코미조 월드에서 옥문도에 이어 두 번째로 인기 있는 작품이라는

출판사의 소개글을 보니 제가 잘못 읽은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본편 뒤에 실린 작품해설의 제목이 탐미적이고 기괴한 논리의 향연인데

머리 잘린 시체들이 등장하는 끔찍한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퇴폐미가 물씬 풍기는 것은 물론

막판에 드러난 기괴하지만 애처로운 한 인간의 사연과 욕망을 떠올려보면

더없이 적절한 작품해설의 제목이라는 생각입니다.

사실, 바로 이 점이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의 참된 매력인데

디지털 시대의 미스터리나 스릴러에서는 절대 맛볼 수 없는 이 끝내주는 매력을

오랫동안 꾸준히 만끽하고 싶은 건 아마 저만의 바람은 아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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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쇠 없는 꿈을 꾸다
츠지무라 미즈키 지음, 김선영 옮김 / 문학사상사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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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2012147회 나오키 상을 수상한 츠지무라 미즈키의 단편집입니다.

모두 다섯 편의 단편이 실려 있는데 그 가운데 열쇠 없는 꿈을 꾸다란 작품은 없습니다.

즉 수록작 중 한 편을 표제작으로 삼은 게 아니라

열쇠 없는 꿈을 꾸다라는 주제를 담은 다섯 편의 작품이 실려 있다는 뜻입니다.

 

열쇠 없는 꿈이란 말은 다소 모호하기도 하고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한 말이기도 합니다.

이룰 수 없는 꿈? 허망한 꿈? 코앞에 두고도 놓치는 꿈?

뭐가 됐든 다소 부정적이거나 불가능한 뉘앙스가 풍기는 제목에다

꿈꾸는 것도 죄가 되나요?”라는 심플한 띠지의 카피 덕분에

꿈 때문에 상처 받거나 좌절하거나 불행해진 사람들의 이야기란 걸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다섯 편 모두 주인공은 여자입니다.

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첫 번째 수록작 니시노 마을의 도둑을 제외하곤

나머지 네 편의 주인공들은 소박하든 속물적이든 애절하든 절실하든

각자 이루고 싶은 행복이 있고 그 행복을 위해 열쇠 없는 꿈을 꾸는 인물들입니다.

 

어머니로부터 결혼 압력을 받는 36세의 요코의 꿈은 그럴듯한 남자입니다.

딱히 결혼에 목 맨 건 아니지만 근거 없는 자존감 하나로 센 척 버티는 여자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너무나도 속물적인 요코의 행보는 번번이 스스로를 비참하게만 만들뿐입니다.

을 위한 열쇠를 스스로 걷어차는 인물이라고 할까요? (‘쓰와부키 미나미 지구의 방화’)

 

달콤한 말로 자신을 유혹했던 남자가 돈을 갈취하고 폭력을 휘두르는 학대남으로 변했지만

미에는 어떻게든 자신의 처지를 합리화하고 남자의 태도를 이해하려고 애써봅니다.

그 남자는 한때 자신의 꿈이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녀의 뒤늦은 후회는 끔찍한 비극을 일으키고 맙니다. (‘미야다니 단지의 도망자’)

 

미쿠의 꿈은 일러스트레이터지만 재능도, 행운도 없던 그녀는 교사라는 현실과 타협합니다.

그녀의 또 하나의 꿈은 대학에서 만난 연인 유다이입니다.

하지만 유다이는 누구도 납득 못할 황당한 꿈을 꾸는 남자입니다.

미쿠는 그 꿈을 깨부수고 싶습니다. 그리고 유다이가 자신에게 안주하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미쿠의 꿈과 바람에 맞는 열쇠는 없습니다. (‘세리바 대학의 꿈과 살인’)

 

임신과 출산과 육아는 요시에의 간절하고 소박한 꿈이었습니다.

어렵사리 그 꿈을 이루고 잠시 기뻐했지만 실제 육아의 현실은 지옥과도 같았고

이제 갓 10달이 된 딸 사쿠라는 어느새 요시에의 악몽이 됐습니다.

그런 사쿠라가 유모차에 탄 채 백화점에서 사라지고 맙니다. (‘기미모토 가의 유괴’)

 

이렇게 단편집에 수록된 작품들의 줄거리를 일일이 서평에서 소개해본 적이 거의 없는데,

열쇠 없는 꿈에 대한 두루뭉술하고 형이상학적이고 재미없는 담론을 늘어놓는 것보다는

어떤 이야기들이 담겼는지를 간략하게나마 소개하는 게 더 낫겠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입니다.

 

보기에 따라 주인공들은 아주 평범한 것 같기도, 또는 반대로 아주 특이한 것 같기도 합니다.

어쩌면 작가는 평범함과 특이함은 그녀들이 꾸는 꿈에 달렸다고 주장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신의 그릇에 어울리지 않는 꿈, 스스로를 망가뜨리고 왜곡시킬 정도로 집착에 가까운 꿈,

이뤄지지 않을 걸 알면서도 가느다란 희망 하나로 연명시키는 꿈 등은

평범한 사람조차 아주 쉽게 특이하고 별난 사람으로 변질시킬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알고 보면 크든 작든 이란 걸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누구나 다 조금씩은 이런 특질들을 갖고 있지 않을까요?

다들 말려도 자청해서 열쇠 없는 꿈을 선택하든, 한참 꿈을 꾸다가 열쇠를 잃어버리든,

벼랑 끝에 다다른 뒤에야 손에 쥐고 있는 게 틀린 열쇠임을 깨닫든 말이죠.

츠지무라 미즈키가 직조한 이야기는 그래서 더 씁쓸하게 읽힌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미스터리 작가답게 츠지무라 미즈키는 에 대한 이야기 속에 범죄를 잘 심어놓았습니다.

도둑, 방화, 폭력, 살인, 유괴 등 주인공들이 휘말리는 사건들은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앞서 언급한대로 열쇠 없는 꿈을 꾸다라는 제목이 풍기는 부정적이고 불가능한 뉘앙스는

주인공들이 휘말리는 끔찍한 사건들 덕분에 더더욱 그 농도와 밀도가 짙어집니다.

물론 희망적인 엔딩을 다룬 작품도 있긴 하지만

대부분 열쇠 없는 꿈 앞에서 허우적대거나 붕괴되거나 초라해지는 주인공들을 그리고 있어서

수시로 이야미스’(イヤミス, 불쾌한 기분이 남는 미스터리)를 읽는 느낌을 받기도 했습니다.

 

다만, 솔직히 말하면, 이 작품이 나오키 상을 받았다는 건 다소 의외의 일로 여겨졌습니다.

츠지무라 미즈키와 아홉 번째로 만난 작품인데도 그만한 포스는 못 느꼈기 때문입니다.

열쇠 없는 꿈이라는 주제도 모호했고 이야기의 깊이나 무게감은 얕고 가벼워 보였는데

술술 잘 읽히는 건 분명하지만 나오키 상에 걸맞은 인상과 여운까지 받진 못했다는 뜻입니다.

(물론 나오키 상 수상작 가운데 이런 느낌을 받은 작품이 전혀 없었던 건 아닙니다.)

자주 찾아 읽는 작가이긴 해도 매력 넘쳤던 몇몇 작품을 제외하곤

2% 혹은 그보다 조금 더 부족하고 아쉽다는 느낌을 받곤 했는데

열쇠 없는 꿈을 꾸다는 확실히 2%보다는 좀더 많이 아쉬웠던 작품인 게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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