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둥의 계절
쓰네카와 고타로 지음, 이규원 옮김 / 고요한숨 / 2021년 2월
평점 :
절판


2008년 노블마인에서 출간된 이후 절판 상태였다가 13년 만에 재출간된 작품입니다.

(그 당시 기준으로) 한국에는 야시이후 두 번째로 소개됐던 작품인데

현실과 이계(異界)를 넘나드는 기묘한 판타지를 다룬 야시의 연장선상에 있는 이야기이자

(줄거리가 이어진다는 뜻은 아닙니다.)

모두를 두렵게 만드는 천둥의 계절, 눈에 보이지 않는 불사의 새, 살인에 탐닉한 소시오패스,

그리고 누명을 쓴 채 이계를 탈출하려는 10대 소년 겐야와 그를 쫓는 귀신조의 추격전 등

판타지와 액션 스릴러의 코드들이 한데 버무려진 특이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지도에 나타나지도 않으며 바깥세계(현실세계)와는 다른 영역의 공간인 바닷가 마을 ’.

겨울과 봄 사이의 신이 오시는 심판의 계절이라 불리는 천둥의 계절에 누나를 잃은 뒤

모두가 두려워하는 바람의 정령(바람와이와이)에 씌인 채 살아가던 의 소년 겐야는

출입이 금기시되는 유령들의 처소인 무덤촌에 드나들던 중 무시무시한 비밀을 알게 됩니다.

그 비밀은 급기야 겐야에게 누명까지 쓰게 만들었고 결국 겐야는 을 떠나기로 결심합니다.

귀신조의 추격과 야수의 습격에 노출된 겐야의 여정은 그저 험난하기만 할뿐입니다.

, 바깥세계 출신인 자신이 에 살게 된 사연과 가족이 맞이했던 참극을 알게 된 겐야는

바람와이와이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삶을 파탄 낸 악령과 정면으로 마주하기로 결심합니다.

 

줄거리를 정리해놓고 보니 약간 비현실적 배경에 담긴 단순한 액션스릴러처럼 보이는데,

물론 이야기의 가장 큰 맥은 겐야의 도주극과 복수극인 게 분명하지만

실은 줄거리에 담지 못한 쓰네카와 고타로 식 판타지가 이 작품의 백미 중의 백미입니다.

바깥세계와 완전히 단절된 건 아니지만 시공간의 개념이 완전히 다른 특별한 장소 ’,

안에서도 산 자들의 공간과 완벽히 차단된 죽은 자들의 공간인 무덤촌’,

천둥의 계절마다 사람들을 잡아가는 공포의 집단 귀신조’,

그리고, 풍령조(風靈鳥), 즉 바람의 정령이자 눈에 보이지 않는 거대한 크기의 불사의 새이자

생명이 깃든 것에 내려앉아 그 생명체에게 신비한 힘과 기운을 갖게 하는 바람와이와이

쓰네카와 고타로만의 독특한 피조물과 공간들이 읽는 내내 신비감과 긴장감을 내뿜습니다.

 

덧붙여, 세컨드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10대 소녀 아카네와 바람와이와이의 특별한 인연,

무덤촌의 문지기로서 유령들을 상대하다가 겐야에게 뜻하지 않은 도움을 주게 되는 오도,

출신으로 부활을 거듭하며 100살 넘게 살아온 희대의 소시오패스 도바 무네키,

그리고 바깥세계를 향한 겐야의 여정에 함께 하게 된 또래 소녀 호다카의 기구한 사연 등

중요한 조연들의 이야기도 겐야 이야기 못잖게 시선을 잡아끄는 힘이 있습니다.

 

고백하자면 최근 읽은 멸망의 정원이 독특한 이계를 다뤘음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따라가기 힘든 판타지를 그린 탓에 아쉬움이 남았던 게 사실인데,

천둥의 계절은 그보다 더한 이계를 배경으로 삼았지만

쉽고 선명한 감정선과 공감률 100%의 캐릭터들과 액션물을 방불케 하는 스토리 덕분에

조금의 이질감도 없이 한 번에 마지막 장까지 달릴 수 있는 작품이었습니다.

, 전에 읽은 장편(‘금색기계’, ‘멸망의 정원’)과 단편집(‘야시’, ‘가을의 감옥’) 모두

특별한 시공간과 거기에 휘말린 평범한 인물들의 괴담들을 그린 매력적인 작품들이었지만

천둥의 계절은 쓰네카와 고타로의 단편의 매력과 장편의 힘이 골고루 잘 배어든 작품입니다.

 

판타지에 그다지 우호적이지 않은 취향임에도 불구하고

쓰네카와 고타로의 작품만큼은 놓치지 않고 읽게 되는 건 스스로도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장르물 최고의 덕목을 재미여운으로 여기는 제가 그의 작품에 빠져드는 걸 보면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려운 마성과도 같은 특별함이 있는 게 분명해 보입니다.

물론 취향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 수 있고, 극단적으론 황당한 만화처럼 여길 독자도 있겠지만

단편집인 야시를 흥미롭게 읽은 독자라면 여지없이 빠져들 게 확실한 작품이란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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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문도 시공사 장르문학 시리즈
요코미조 세이시 지음 / 시공사 / 2005년 7월
평점 :
절판


뉴기니의 작은 섬에서 패전을 맞은 코스케는 귀환 도중 사망한 전우로부터

자신이 살아 돌아가지 못하면 세 여동생이 살해당할 거란 유언을 받습니다.

일본에 도착하자마자 전사한 전우의 고향인 세토 내해의 작은 섬 옥문도로 향한 코스케는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분위기에다 에도 시대 죄인들의 유형지였다는 이력을 가진 탓인지

옥문도에 발을 들이는 순간부터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힙니다.

더구나 세 여동생은 물론 전우가 후계자로 예정됐던 (섬을 지배하는) 기토 가문의 관련자들은

하나같이 뭔가를 숨기거나 상식 밖의 행동으로 코스케를 혼란에 빠뜨립니다.

섬사람들을 탐문하며 살인의 기운을 포착하려던 코스케의 의심은 점점 증폭됐지만

결국 단서 하나 못 잡은 상태에서 전우의 예언대로 악몽 같은 살인사건이 차례로 일어납니다.

 

혼진 살인사건’, ‘백일홍 나무 아래등 두 편의 중단편집에 이어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 다시 읽기의 세 번째 작품이자 첫 장편인 옥문도를 읽었습니다.

옥문도는 여러 차례 영화나 드라마로 제작될 정도로 시리즈 중에서도 돋보이는 작품인데

앞서 읽은 두 중단편집보다 깊이와 무게감이 비교할 수 없이 육중하게 느껴지는 건

장편 자체의 힘과 함께 폐쇄적 공간이자 불길함으로 휩싸인 옥문도란 섬의 마력 때문입니다.

 

오랜 시간동안 해적과 죄수들의 섬이었던 탓에 복잡한 혈연관계와 지독한 배타성을 지녔으며

최근 전쟁의 참화까지 입은 옥문도는 외지인으로선 견딜 수 없는 감옥과도 같은 곳입니다.

몇 대 전부터 유력한 선주인 기토 가문에 의해 실질적인 지배가 이뤄지면서 안정을 찾았지만

젊은 후계자 후보들이 침략 전쟁에 징집된 이후 옥문도엔 다시 위기가 찾아옵니다.

그런 와중에 전우가 예고한 참혹한 살인사건을 막고자 정체를 감추고 옥문도에 온 코스케로선

도무지 비집고 들어갈 작은 틈조차 없는 섬의 폐쇄성이 시한폭탄처럼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 섬 주민들은 모두 상식으로는 예측하기 어려운 기묘한 구석을 갖고 있어요.

(중략) 본토 사람 따위는 생각도 못할 괴상한 생각을 품고 있는 거에요.

거기다 저 전쟁이 있었지요. 모두 크든 작든 미쳐 있습니다.” (p139~140)

 

섬을 지배하고 있는 기토 본가(本家)와 분가(分家)의 대립과 갈등,

전쟁에 징집된 기토 가문 후계자 후보들의 생사에 과도하게 촉각을 곤두세운 섬사람들,

살해당할 거란 예언 속에 등장하는 세 자매의 이해할 수 없는 기이하고 난잡한 언행 등

코스케에겐 모든 것이 섬의 이름만큼이나 불온하게만 보입니다.

결국 코스케가 손 쓸 틈도 없이 기이하고 잔혹한 살인사건이 연이어 벌어지지만

주요 인물들의 알리바이는 확실하고 단서들은 하나같이 모호할 뿐입니다.

누구도 진실을 말하는 것 같지 않고 누구를 믿어야 할지도 불투명한 탓에

코스케의 수사는 답보를 거듭할 뿐 아니라 섬사람들의 의심까지 받기에 이릅니다.

 

(다른 작품들도 비슷하지만) ‘옥문도는 일본색이 워낙 강한 작품입니다.

일본의 전통문화나 역사에 대한 언급이 워낙 많아서 이야기에 몰입하기가 쉽지 않고,

특히 단시(短詩)인 하이쿠를 비롯 일본어 유희자체가 사건 곳곳에 자주 또 깊이 끼어들어서

여느 작품과 달리 각주를 꼼꼼히 읽지 않으면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들이 꽤 많습니다.

, 시리즈 대부분의 작품에서 그렇듯 패전 이후 봉건 색채가 짙게 남아있는 지방을 무대로

호러에 가까운 기괴한 사건들을 다루고 있다는 점도 강한 일본색의 흔적 중 하나인데,

오래 전에 읽어서 정확하진 않지만 다음 작품인 이누가미 일족역시

사건과 배경과 작품 안에 흐르는 분위기가 옥문도와 비슷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암울한 역사와 워낙 밀접한 시대적 배경이라 무척 민감하게 읽힐 수도 있지만

요코미조 세이시는 긴다이치 코스케를 비롯 참전과 패전, 전사와 귀환을 겪은 인물들을 통해

명분 없는 전쟁과 그것이 낳은 비극에 몰두하고 있어서 크게 거부감이 느껴지진 않습니다.

또 근대와 봉건이 충돌하는 국면에서 몰락한 기층 지배계급의 비극을 주된 소재로 삼은 점은

(비록 그 시대를 살아본 건 아니더라도) 딱히 일본만의 문제라고는 할 수 없기 때문에

웬만한 독자라면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대목이라는 생각입니다.

 

아무튼...

코스케의 빛나는 추리는 옥문도의 불길한 기운 속에서도 실마리를 찾기에 이르고

모든 비극의 출발점이 그릇되고 허망한 봉건적 욕망이란 점까지 포착해냅니다.

하지만 그가 찾아낸 진실은 관련자 누구 하나 살인사건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과 함께

결국 옥문도의 비극은 지독한 운명일 수밖에 없었다는 아이러니를 내포하고 있기도 합니다.

씁쓸한 여운이 강하긴 하지만 코스케에게 딱 어울리는 엔딩이라고나 할까요?

 

독자에 따라 막판의 미스터리 해법에 대해 살짝 실망할 수도 있을 텐데,

다소 허술해 보이거나 비약이 심하다고 여겨지는 대목들이 가끔 눈에 띄긴 하지만

개인적으론 그게 그 시대를 그린 아날로그 미스터리의 매력이기도 하다는 생각입니다.

이 시리즈를 워낙 좋아하다 보니 단점조차 애써 포용하고 싶은 사심이 있는 건 맞지만

(억지이긴 해도) 시대에 어울리는 서사와 주인공, 그것이 이 시리즈의 진짜 미덕 아닐까요?

이미 한 번 읽은 작품인데도 비슷한 매력을 지니고 있는 다음 작품 이누가미 일족생각에

벌써부터 기대감에 들뜨는 것 역시 사심 팬에겐 어쩔 수 없는 일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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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흉하게 꿈꾸는 덱스터 모중석 스릴러 클럽 4
제프 린제이 지음, 최필원 옮김 / 비채 / 2006년 8월
평점 :
절판


10여 년 전쯤 미드 덱스터의 시즌1 가운데 초반 몇 편을 재미있게 본 기억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사적 복수라는 코드를 좋아하는데다 물러터진 사법체계에 환멸을 가진 탓에

흉악범들에게 끔찍한 천벌을 내리는 주인공 덱스터 모건에게 푹 빠졌던 건데

한참의 시간이 지난 뒤에야 그 원작소설을 통해 다시 덱스터를 만나게 됐습니다.

 

덱스터는 이미 소년시절부터 소시오패스의 기질이 몸에 배어있었습니다.

그런 그의 기질이 무차별 살인마로 뻗어나가지 않게 막은 건 그의 양부 해리였습니다.

하지만 양부의 충고는 그런 짓은 절대 해선 안 된다.”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죽여 마땅한 사람들이 있다.”는 말과 함께 자신의 소명을 덱스터에게 물려줬습니다.

감정을 다스리고, 보통사람처럼 스스로를 위장하는 방법부터 실질적인 기술까지 말이죠.

그리고 그가 세상을 떠난 후로 덱스터는 본격적인 흉악범 척결에 나서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무자비한 응징은 정의감이나 확고한 소신의 산물 따위는 절대 아닙니다.

물론 흉악범들을 처단하기 전에 그들이 저지른 죄를 묻고 비난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물러터진 사법체계를 대신할 정의의 사도라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그는 보편적 감정이나 평범한 일상의 희로애락에 전혀 무감한 것을 넘어

솜씨 좋은 동업자(?)가 토막 낸 희생자들의 사체에 시기와 질투와 부러움을 느끼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대상이 흉악범일 뿐 덱스터는 세상에 둘도 없는 잔혹한 소시오패스란 뜻입니다.

 

그런 덱스터가 데뷔 무대인 시리즈 첫 편에서 자신을 능가하는 강적과 맞닥뜨립니다.

마이애미 일대의 매춘부를 살해하고 토막 낸 뒤 혈흔 한 방울 없이 내다버리는 범인은

경찰이 방향성조차 잡지 못하고 헤매는 사이 사방팔방에 자신의 전리품을 뿌려놓습니다.

이미 수십 명의 흉악범들을 흔적 하나 남기지 않고 응징해온 덱스터 입장에선

혈흔 한 방울 없이 정교하고 깔끔하게(?) 희생자를 토막 낸 범인이 그저 신기할 따름입니다.

범인에 대한 분노나 복수심이 아니라 말 그대로 시기, 질투, 부러움, 호기심이라고 할까요?

여동생(양부 해리의 친딸)이자 마이애미 경찰인 데보라 때문에 사건에 말려든 덱스터는

범인이 누구인지도 의문이지만 도대체 어떻게 이런 작업이 가능했는지가 더 궁금합니다.

위장 매춘부에서 벗어나 살인계로 옮겨가고 싶은 데보라는 덱스터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덱스터는 자신의 진짜 의도를 숨긴 채 데보라를 돕기로 결심합니다.

 

설정 자체가 불편했던 독자들은 내용과 관계없이 덱스터의 캐릭터에 대한 악평만 남겼는데

정반대로 그의 기이한 면모에 환호 또는 흥미를 느낀 독자가 훨씬 많았던 것이 사실입니다.

드라마로 만들어져 여러 시즌에 걸쳐 방송됐다는 건 그에 대한 확실한 반증인데,

실은 책으로 만난 덱스터는 몇 편밖에 못 봤던 드라마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긴 했습니다.

아무래도 드라마는 좀더 간결하고 쉽고 대중적인 코드에 맞춰 제작되기 마련이라

덱스터의 복잡한 내면이나 심리보다는 흥미 위주의 사건에 초점을 맞췄던 것 같은데,

결과적으론 책에서 심층적으로 다룬 이 내면과 심리때문에 아쉬움이 커진 게 사실입니다.

 

일반인과 소시오패스의 경계를 위태롭게 오가는 덱스터의 내면과 심리에 대한 묘사는

꼭 필요한 분량과 비중을 넘어 지나치게 장황하게 거듭된 나머지 오히려 부작용만 느껴졌고,

그의 내적 갈등을 묘사하기 위해 동원된 검은 승객이라는 무의식속의 존재는

갑자기 장르가 바뀌었나, 라는 의문과 함께 사실상 덱스터를 좌지우지하는 존재로 그려져서

심하게 말하면, “덱스터 스스로 결정하는 건 별로 없다.”는 식의 인상까지 남기는 바람에

오히려 주인공으로서의 덱스터의 매력과 존재감을 깎아내렸다는 생각입니다.

그 외에도 심령 호러물의 한 대목처럼 읽힌 덱스터의 예지에 가까운 꿈설정,

, 막판에 밝혀진 범인의 정체 및 덱스터의 대처 역시 아쉬웠거나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이런 아쉬움들은 아무래도 드라마를 먼저 봤기 때문에 느껴진 것 같은데,

흉악범을 응징하는 소시오패스의 통쾌하고 재미있는 액션 스릴러라는 기대와 달리

어딘가 스티븐 킹의 향기가 연상되는 호러물의 색채가 더 강했기 때문이란 생각입니다.

 

재미와 아쉬움을 동시에 느낀 탓에 이어지는 시리즈를 계속 읽어야 되나 고민하다가

두 번째 작품(‘끔찍하게 헌신적인 덱스터’)까지는 일단 도전해보기로 했습니다.

물론 또다시 내면과 심리가 강조되고 액션 스릴러보다 호러물에 가까운 서사를 읽게 된다면

이어지는 작품들을 계속 읽을 자신은 없을 것 같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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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위남
슈노 마사유키 지음, 정경진 옮김 / 스핑크스 / 2019년 7월
평점 :
절판


1999년 일본에서 출간된 뒤 한국에는 2007년에 처음 소개됐으며

이후 2019년 완전히 리모델링되어(번역 정경진, 스핑크스) 복간되기도 한 작품입니다.

일본 미스터리의 팬이라면 진작 읽었어야 할 필독서라고도 할 수 있는데

무슨 이유에선지 계속 미적거리다가 이제야 2007년 판으로 만나게 됐습니다.

 

두 여고생을 교살하고 목에 가위를 꽂은 수법 때문에 가위남이란 별명을 얻은 살인범

6개월 만에 세 번째 희생자로 여고생 다루미야 유키코를 선택하곤 집요한 관찰을 시작합니다.

하지만 자신의 수법을 그대로 모방한 누군가가 먼저 유키코를 살해하는 일이 벌어졌고

는 엉뚱하게도 시신을 제일 먼저 발견한 목격자로서 경찰의 조사를 받는 처지가 됩니다.

누가, , 그것도 자신의 수법을 모방해 유키코를 살해한 건지 전혀 알 수 없던

범인을 잡기 위해 스스로 탐정이 되어 목격자를 찾고 유키코 주변을 탐문하기 시작합니다.

한편 다시 나타난 가위남으로 인해 긴장감이 최고조에 달한 메구로니시 경찰서는

경시청 과학수사연구소의 범죄심리분석관 호리노우치의 지휘 아래 가위남찾기에 나섭니다.

호리노우치는 경시청 수사1과 대신 아직 신참 티를 못 벗은 이소베를 비롯

‘2냄새가 폴폴 나는 메구로니시의 형사들과 함께 프로파일링과 탐문에 전력을 기울입니다.

 

일명 가위남1인칭 시점 챕터와 메구로니시 수사팀의 챕터가 번갈아 전개됩니다.

말하자면 독자는 범인의 정체와 목표와 행적을 수사팀보다 훤히 꿰뚫고 있는 상태에서

엉뚱한 곳에서 헛발질만 남발하는 수사팀의 수난을 전지적 시점에서 들여다보게 되는데,

이런 구조의 미스터리나 스릴러는 지독한 악의를 지닌 범인이 연이어 살인을 저지르거나

슈퍼히어로 주인공이 거듭되는 좌절에도 불구하고 조금씩 진상에 다가가는 게 일반적이지만

가위남은 실은 그런 일반적 구조와는 결이 아주 많이 다른 작품입니다.

사건은 단순하고, 범인은 악의라곤 전혀 없으며, 수사팀도 히어로와는 거리가 멀기 때문인데

그래선지 400페이지가 훌쩍 넘는 분량을 과연 어떤 내용으로 채울지 무척 궁금해졌습니다.

 

물론 이야기의 몸통은 가위남의 모방범 찾기와 수사팀의 가위남찾기로 전개되지만

그에 못잖게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건 다소 의외의 내용들입니다.

무엇보다 엽기적인 소시오패스로 보였던 가위남의 캐릭터가 눈길을 끄는데,

그는 성실한 아르바이트생이면서 주말마다 온갖 방법으로 자살을 시도하는 인물입니다.

해리성 인격장애로 인해 또 다른 자아인 의사와 끊임없이 대화를 주고받는데,

그 대화에 따르면 가위남은 일반적인 소시오패스와는 아주 거리가 먼 살인범입니다.

실은 그의 범행동기엔 성적 욕망도, 살인의 희열도, 희생자에 대한 지배욕도 없습니다.

말하자면 악의조차 없는 무동기 범죄의 전형으로 진정한 소시오패스라고 할 수도 있는데

이런 가위남의 독특한 캐릭터 묘사는 모방범 찾기에 못잖게 꽤 많은 분량을 차지합니다.

 

아울러 수사팀 쪽 주인공인 신참 형사 이소베의 이야기 역시 다소 장황하게 그려지는데,

뭉뚱그려 정리하면 어설픈 신참에서 진정한 형사로 성장하는 이야기라고 할까요?

범죄심리분석관 호리노우치와 노회한 능구렁이 같은 메구로니시 고참 형사들 틈바구니에서

이소베는 직감과 증거’, ‘관찰의 힘등 원론적인 것들을 차근차근 배워나갑니다.

물론 이소베가 어느 날 갑자기 진실 찾기의 주역으로 비약하는 허황된 전개는 없지만

시신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어설픈 신참의 성장 스토리는 분명 매력적인 설정이긴 한데

그걸 위해 교과서적인 형사 입문 강의가 지루함이 느껴질 만큼 과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한편에선 가위남이 살해된 유키코의 주변과 지인들을 탐문하면서 모방범을 찾아나서고

다른 한편에선 코끼리 다리 더듬듯 막연하고 무모한 수사팀의 행적이 이어지는 가운데

마지막 100여 페이지를 남기고 이 작품의 명성을 탄생시킨 엄청난 반전들이 공개됩니다.

가장 궁금했던 건 당연히 가위남모방범의 정체이니 반전 역시 이들에 관한 것인데

대부분의 서평에서 뭐가 뭔지 몰라 다시 앞의 내용을 봐야만 했다.”란 언급이 있을 정도로

독자의 예상과 추정을 뛰어넘는 짜릿한 반전인 건 분명합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작가가 설치했던 반전의 재료들이 너무도 일상적이고 태연스러운 것들이라

오히려 미리 알아차리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는 걸 깨닫게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론 작품의 명성에 비해 이 반전의 매력이 훅 느껴지지 않았는데,

정교하게 설계된 트릭 자체는 훌륭하고 빈틈없었던 게 사실이지만

앞서 전개된 장황하고 상세한, 그래서 지루함마저 느끼게 한 미스터리 외적인 이야기들 탓에

정작 클라이맥스가 오기도 전에 미리 지쳐버렸기 때문이란 생각입니다.

, 반전의 순간에 ? 이게 뭐지?”라는 모호함과 반감이 먼저 느껴진 것도 그렇고,

마지막까지 개운하게 정리되지 않은 몇몇 설정들(주로 가위남의 인격장애 관련) 역시

시원하게 뒤통수를 맞은 짜릿함보다는 뭔가 찜찜한 느낌을 남기게 한 주범들이었는데,

그런 불편함 때문인지 굳이 앞의 내용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수고를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이 작품은 두 번째 읽기에서 참맛을 맛볼 수 있는 작품인지도 모릅니다.

작가의 트릭에 하나하나 감탄하거나 놀라면서 행간의 매력까지 새롭게 볼 수 있기 때문인데

언제쯤이 될지는 모르지만 다시 호기심이 생긴다면 꼭 한번은 다시 읽고 싶은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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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심판한다 - 마이크 해머 시리즈 1 밀리언셀러 클럽 30
미키 스필레인 지음, 박선주 옮김 / 황금가지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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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하면, 2020년에 출간된 세상의 모든 책 미스터리’(북스피어)가 아니었다면

미키 스필레인과 그가 창조한 사립탐정 마이크 해머를 영원히 모른 채 살아갔을지도 모릅니다.

제프리 디버를 비롯 여러 작가가 을 주제로 쓴 미스터리 앤솔로지인 그 작품의 수록작 중

미키 스필레인과 맥스 앨런 콜린스가 함께 쓴 모든 것은 책 속에라는 단편이 있는데,

(실은 미키 스필레인의 미완성 원고를 ‘CSI 시리즈의 맥스 앨런 콜린스가 완성한 것으로)

탐정 마이크 해머가 마피아 두목이 남긴 중요한 ’, 즉 비밀장부를 찾는 이야기입니다.

단편이지만 시한폭탄 같은 탐정 마이크 해머의 캐릭터와 냉소 가득한 서사에 반하게 됐고,

인터넷 서점을 통해 2005년 한 해에 세 편의 작품이 동시에 출간된 걸 알게 됐습니다.

내가 심판한다마이크 해머 시리즈의 첫 편으로 원작 출간년도가 무려 1947년입니다.

 

이 작품의 원제는 ‘I, The Jury’입니다. 내가 심판이고 배심원이고 판사.”란 뜻인데,

주인공 마이크 해머는 말 그대로 법보다 주먹이 가깝다.”는 소신과 함께

살인범에겐 재판 따위 필요 없고 내가 직접 응징하고 처단한다.”는 행동원칙이 있습니다.

경찰이 아니라 사립탐정이기에 규정이나 규율에 구애받지 않는 그는

속 시원한 사이다 같은 파격적 행보와 수사를 감행합니다.

 

이 작품에서 그가 마주한 사건은 절친이자 전직 경찰인 잭 윌리암스의 참혹한 죽음입니다.

전쟁(2차 대전) 중 위기에 빠진 해머를 구하느라 팔을 잃은 뒤 경찰을 그만둬야 했던 그는

주위에서 정의감 넘치는 호인으로 평가받던 인물이라 살해될 만한 이유를 찾기 어려웠고,

그런 이유로 해머의 분노와 범인에 대한 증오심은 거의 하늘을 찌를 지경에 이릅니다.

역시 절친인 뉴욕 경찰의 강력계 반장 팻 체임버스는 해머를 진정시키려 하지만

해머는 어떻게든 팻과 뉴욕 경찰보다 먼저 범인을 색출하여 반드시 자기 손으로,

그것도 잭이 당한 것과 똑같이 고통스럽고 참혹한 방식으로 죽이겠다고 다짐합니다.

 

앞서 언급한대로 마이크 해머는 몸과 마음이 시한폭탄 같은 캐릭터입니다.

1940년대라는 시대적 배경 덕분에 요즘엔 상상도 할 수 없는 행보를 보이는데,

폭력적이고 위협적인 수사방식은 물론 통제 불능의 바람둥이 기질까지 함께 갖고 있어서

읽는 내내 뜨거운 감자를 물고 있는 듯 좌불안석에 팽팽한 긴장감을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

잭이 살해당하던 날 벌어진 파티에 참석했던 자들은 해머의 서슬 퍼런 탐문을 피할 수 없었고

범죄현장에서 해머의 눈에 먼저 띈 중요한 단서들은 경찰에겐 그림의 떡이 되고 맙니다.

늘 경찰보다 한걸음 앞서 가는 그의 광폭 수사는 때론 위험천만한 상황을 자초하기도 하는데

그때마다 그의 45구경 권총은 조금도 주저 없이 불을 내뿜곤 합니다.

, 마치 본드걸들에게 둘러싸인 007을 연상시키는 그의 열광적인 리비도(?)도 눈길을 끄는데,

폭주하는 수사의 와중에도 자신을 흠모하는 매력적인 비서 벨다와 밀당을 벌이는가 하면

입이 떡 벌어지는 미녀 의사 샬럿에게 정신없이 빠져들기도 하고,

성욕을 주체 못하는 쌍둥이 자매의 육탄 공격에 비실비실 허물어지기도 합니다.

한마디로 마초 중에도 극상의 마초라고 할까요?

 

잭의 죽음 이후 연이어 주변인물들이 동일범에 의해 살해되면서 미스터리는 점점 고조되고

해머는 한 손엔 직감을, 다른 한 손엔 단서를 틀어쥔 채 명탐정으로서의 기질을 발휘한 끝에

쉽게 예상할 수 없었던 진범의 정체를 밝혀냅니다.

, 해머는 그저 저돌적이기만 한 단순한 탱크가 아니라

비상한 추리력을 가진 명탐정의 미덕도 함께 갖추고 있다는 뜻인데,

시리즈 첫 편이라 그런지 그의 추리는 다소 산만하게 보인 것도 사실이긴 합니다.

, 결정적인 순간마다 갑작스런 깨달음에 의존하는 장면도 살짝 아쉽게 느껴졌는데

그런 이유들 때문에 평점에서 별 0.5개를 빼긴 했지만

이후 작품들에서 그런 아쉬움들이 어떻게 커버될지 사뭇 궁금해지기도 했습니다.

 

1918년생인 미키 스필레인(2006년 사망)은 모두 13편의 마이크 해머 시리즈를 발표했는데

1996년에 발표된 블랙 앨리’(Black Alley)가 마지막 작품입니다.

그 외에도 많은 작품을 집필했지만 그의 진가는 탐정 마이크 해머를 통해 빛났다는 평가이고

그런 면에서 한국에 시리즈 첫 세 편만 소개되고 만 건 너무나도 아쉬운 일입니다.

그나마도 2005년에 한꺼번에 세 작품이 출간된 뒤 아무 소식이 없으니

원작을 읽을 게 아니라면 나머지 마이크 해머 시리즈를 만날 일은 거의 불가능해 보입니다.

한국에 출간된 시리즈 2~3편은 각각 내 총이 빠르다복수는 나의 것인데

아쉬운대로 이 두 작품을 통해서라도 마이크 해머의 매력을 한껏 음미해야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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