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일홍 나무 아래 긴다이치 고스케 시리즈
요코미조 세이시 지음, 정명원 옮김 / 시공사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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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품절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 다시 읽기의 두 번째 작품으로 모두 네 개의 단편이 실려 있습니다.

출간시기가 다른 단편들을 모아놓은 탓에 엄밀하게는 시리즈 두 번째 작품이라 할 순 없는데,

가령 표제작 백일홍 나무 아래는 전쟁에 징집됐다가 귀환한 긴다이치가 등장하는 작품으로

그가 탐정으로 데뷔한 중편 혼진 살인사건의 바로 뒤를 잇는 작품이며,

향수 동반자살은 시대적 배경이 이누가미 일족이후로 꽤 한참 뒷날의 이야기입니다.

그렇지만 표제작 백일홍 나무 아래를 비롯한 초기의 명품들을 한데 모아놓은 단편집이라

일단 시리즈 두 번째 작품으로 선정했습니다.

 

대부분의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가 패전 이후 봉건 색채가 남아있는 지방을 무대로

당시의 사회상을 반영하면서도 동시에 호러에 가까운 기괴한 사건들을 다루고 있는데 비해

이 작품의 수록작들은 대체로 도시를 배경으로 한 전형적인 살인사건을 소재로 삼았습니다.

하지만 패전 이후의 혼란은 물론 전쟁으로 인해 망가진 인물들을 끌어들인 것은 여전해서

의족 신세가 된 귀환병(‘살인귀’, ‘백일홍 나무 아래’)이 등장하는가 하면

백화점과 화장품 회사 등 당시의 상류층의 일탈과 혼선을 그리고 있기도 합니다.

 

전쟁 중 부상으로 의족과 의안 신세가 된 채 나타난 전 남편으로 인해 공포에 빠진 여자와

희망 없는 세상에서 가불로 겨우 먹고 사는 한 추리소설가가 얽힌 이중살인극 (‘살인귀’),

베일로 얼굴을 가린 채 백화점 귀금속 매장에 나타난 정체불명의 여성의 기이한 절도행위와

그 행위 이면에 도사린 오래된 증오심이 낳은 불행한 살인극 (‘흑난초 아가씨’),

두 구의 시신이 발견된 사건 현장을 뒤덮은 대량의 향수의 비밀과 함께

유명 화장품 회사 일족에게 닥친 얽히고설킨 비극을 그린 미스터리 (‘향수 동반자살’),

그리고, 9살 소녀를 돈으로 산 뒤 자신의 바람대로 사육한한 남자의 욕망이

끝내 소녀와 자신은 물론 주변 인물들까지 파국으로 몰고 간 이야기 (‘백일홍 나무 아래’)

수록작 네 편 모두 제각기 독특한 살인사건과 미스터리를 품고 있습니다.

 

어느 작품을 막론하고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코드는 욕망원한입니다.

두 가지 모두 지극히 개인적인 차원의 감정들이긴 하지만

거기에 패전 후의 혼란과 전쟁으로 망가진 인물들이 끼어들면서 서사는 극적으로 확장됩니다.

똑같은 욕망과 원한이라 하더라도 그 배경에 직간접적으로 시대적, 사회적 배경이 가미되면

단순한 범인 찾기 이상의 의미, 즉 사회파 미스터리의 깊이와 무게감이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그 배경이 명분 없는 미친 전쟁이 남긴 파탄과 혼란뿐이라면

개인의 욕망과 원한은 한없이 일그러지고 파괴적인 양상을 띨 수밖에 없게 됩니다.

 

그래서인지 네 편의 수록작 속의 살인범들은

하나같이 자신들의 욕망과 원한에 무기력하게 굴복한 것으로 보이기도 하는데,

진실을 밝히는 임무를 맡은 긴다이치 코스케가 취한 객관적이면서도 조용한 관찰자적 태도는

독자로 하여금 그들의 무기력함을 더욱 절절하게 느끼게 만들곤 합니다.

 

본편 뒤에 실린 작품 해설에 이런 문구가 있습니다.

이 단편집 속 긴다이치 코스케의 사건 해결은 어쩐지 평소만큼 명쾌하고 시원스럽지 않다.

삶과 죽음의 무게에 잔뜩 눌려서일까, 사건을 해명하는 그의 어조에 깊은 슬픔이 깃들어있다.”

개인적으로 이 작품에 아쉬움을 느낀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고,

동시에 미스터리가 풀린 걸 확인하고도 결코 개운한 기분이 들지 않았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전체의 분위기를 잘 드러낸 해설이기도 한데,

속 시원하고 명쾌한 미스터리에서는 맛볼 수 없는 이 특별하면서도 어딘가 음울한 분위기가

실은 이 시리즈를 탐독하게 만드는 가장 큰 매력일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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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어사이드 하우스
찰리 돈리 지음, 안은주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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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율과 통제가 엄격한 웨스트몬트 기숙학교의 비밀동아리 맨 인 더 미러

매년 하지와 동지에 폐 사택에서 섬뜩한 심령놀이를 통해 신입회원의 가입을 승인해왔습니다.

2019년 하지 늦은 밤, 그 심령놀이에 참가한 학생 일부가 처참한 시체로 발견됩니다.

일찌감치 밝혀진 범인은 종적을 감췄다가 기차에 몸을 던졌고 그로 인해 사건은 종결됩니다.

하지만 1년 후, 당시 심령놀이에 참가했던 생존 학생들이 하나둘 자살하기 시작했고,

한 유명 앵커는 의문투성이인 사건을 다시 파헤치는 팟캐스트로 인기를 끄는데 성공합니다.

그와 함께 자의 혹은 타의로 이 사건에 관심을 갖게 된 인물들까지 진실 찾기에 나서면서

그동안 수면 아래에 잠겨있던 사건의 이면이 한 조각씩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나는 동전 하나로 형을 죽였다. 간단하고도 가볍게, 그리고 완벽히 그럴듯하게.”

이 작품의 첫 문장으로, 누가 봐도 막판에 밝혀질 진범의 고백처럼 읽힙니다.

그리고 이야기 중간중간 짧은 챕터를 통해 이 진범의 고백들이 독자에게 소개됩니다.

말하는 이도, 듣는 이도 누구인지 불분명한 이 고백들은

한 소시오패스의 성장기이자 웨스트몬트의 참극을 벌이기까지의 과정을 담고 있는데,

작가는 이 진범의 고백들과 함께 ‘2019년 사건 당시’, 그리고 ‘2020년 현재

세 가지 시점과 관점을 한 챕터씩 번갈아 독자에게 들려주며 미스터리를 전개시킵니다.

 

2019년 웨스트몬트의 참극은 실은 각자의 사연을 갖고 각기 다른 곳에서 잉태된 비극들이

우연처럼, 또는 운명적으로 한꺼번에 조우하며 빚어낸 사건입니다.

그만큼 등장인물도 많고, 이야기도 복잡하게 구성돼있어서

독자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여러 화자의 관점을 집중력을 갖고 들여다봐야만 합니다.

 

엄격한 통제와 규율에 지친 기숙학교 10대들의 비밀동아리에 대한 환상과 열망,

서양판 분신사바라 할 수 있는 심령게임 맨 인 더 미러를 통한 은밀한 가입절차,

그리고 그 게임에 끼어든 잔인한 살인마의 숨겨진 살의 등이 미스터리의 1차 재료들이지만,

사건 종결 후 1년이 지난 시점에 연이어 자살을 택하는 당시 생존 학생들의 기이한 행태는

독자는 물론 뒤늦게 진실 찾기에 나선 주인공들에게도 혼란만 가중시키는 2차 재료들입니다.

그들은 하나 같이 심령게임이 벌어졌던 폐 사택 인근 선로에서 참혹한 죽음을 선택했지만

동기는 물론 왜 하필 이제 와서?”라는 의문에 대해 아무 단서도 남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웨스트몬트에서 벌어진 참극의 진실 찾기에 나선 인물들은 꽤 많습니다.

1년 전부터 집요하게 자료를 모으고 블로그를 운영해온 기자 라이더 힐리어,

선정적인 팟캐스트를 통해 진실을 찾아내겠다고 나선 유명 앵커 맥 카터,

범죄심리학 교수이자 유명 프로파일러 레인 필립스와 범죄 재구성 전문가 로리 무어,

그리고 1년 전 수사를 담당했던 베테랑 형사 헨리 오트와

동전 하나로 형을 죽인 소년사건을 맡았던 퇴직형사 거스 모렐리가 그들인데

비중의 차이는 있지만 각자 맡은 역할을 통해 흩어진 미스터리의 조각들을 찾아냅니다.

 

그 가운데 프로파일러 레인 필립스의 연인인 범죄 재구성 전문가 로리 무어가 돋보이는데

자폐증과 강박증에 대인기피증까지 있는 까다로운 캐릭터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능력 덕분에 경찰을 도와 미결 또는 난제 사건을 해결해온 이력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녀의 능력 중엔 객관적인 단서와 자료에 대한 탁월한 분석력과 추리력 외에도

다소 심령적인 부분 희생자와의 교감? - 까지 언급돼서 잠시 어라?”하기도 했습니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이 작품은 로리 무어 & 레인 필립스가 등장한 두 번째 작품인데

로리 무어의 특별한 능력은 아마도 전작에 좀더 상세히 소개된 것으로 보입니다.

 

복잡하고 묵직한 이야기들이 짧게 끊어진 챕터들 덕분에 더욱 속도감 있게 전개되지만

읽는 내내 아쉬움을 느끼게 한 대목이 두 가지 정도 있었습니다.

하나는 진실 찾기에 나선 인물들, 주인공이 너무 많다는 점입니다.

각자 역할이 분담돼있긴 하지만 따라가야 할 주인공이 확실하지 않아 산만하게 읽혔고,

똑같은 단서를 놓고 번갈아가며 똑같은 고민을 하는 장면도 적지 않아서

때론 이야기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제자리를 맴도는 느낌을 받기도 했습니다.

 

또 하나는 비중 면에서 그래도 ‘1순위 주인공으로 보인 로리 무어의 역할인데,

그녀의 능력과 사연을 소개하기 위해 꽤 많은 분량이 할애된 것에 반해

정작 그녀가 얻어낸 성과들은 기대만큼 풍성하거나 특별하지 않았고,

그래서 앞서 장황하게 묘사된 그녀의 능력치가 별로 실감나게 느껴지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이런 점들 때문에 별 한 개를 빼긴 했지만 어쨌든 충분히 매력적인 작품인 건 사실입니다.

2018년에 데뷔한 뒤 3년 동안 5편의 작품을 낸 걸 보면 작가의 이력도 범상치 않아 보이는데

한국에 처음 소개된 이 작품이 선전한다면 다른 작품들도 곧 만날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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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이야기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조르주 바타유 지음, 이재형 옮김 / 비채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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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년 로드 오슈(Lord Auch)라는 필명으로 발표된 조르주 바타유의 첫 장편소설이다.

엉덩이로 달걀을 깨는 기벽이 있는 소녀 시몬과 점점 더 성()에 탐닉하는 소년 ’,

그리고 둘 사이에서 미묘한 삼각관계를 이루는 소녀 마르셀 등 세 명의 10대들이 주인공이다.

하지만 소설의 진짜 주인공은 제목 그대로 ()’이라는 사물이다.

또 눈과 형태, 색깔, 어휘의 유사성을 지닌 달걀불알이 주요 매개체로 등장한다.

눈 이야기는 과잉과 광기로 인해 비극으로 치닫는 성 입문의 이야기로 읽을 수도 있지만,

인간이 이성적 동물이라는 신화를 전복하는 데 일생을 바친 이단적 지성 바타유의

사상적 근간이 엿보이는 한 편의 철학적 우화로 읽을 수도 있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당신은 생각이 너무 많다. 인간의 범주는 영원이나 영성 혹은 지성만이 아니다.

우리는 태초부터 짐승이었다.”

 

본문을 읽기 전에 먼저 만나게 되는 작가 조르주 바타유의 일성입니다.

인간이 이성적 동물이라는 신화를 전복하는 데 일생을 바친 이단적 지성의 작품이지만

이성적인 관점에선 지극히 비이성적이고 오직 원초적 욕망에만 충실한 인물들이 벌이는

납득하기 어려운, 거기다가 끔찍하기까지 한 육체의 향연 그 자체일 뿐입니다.

점잖게 말하면 그렇고, 좀 심하게 말하면 지독하고 파괴적인 포르노그래피라고 할까요?

 

먼 친척뻘인 와 시몬은 첫 만남부터 서로의 육체와 배설물을 통해 욕망을 채웁니다.

그리고 그 욕망을 강화하기 위해 순수하기 이를 데 없는 소녀 마르셀을 끌어들이는가 하면

부모들 몰래 또래들을 불러 모아 난교 파티를 벌이기도 합니다.

그들의 극단적이고도 파괴적인 욕망 추구는 감금, 자살, 살인, 도피를 낳기에 이르고,

스페인으로 무대를 옮긴 와 시몬은 스폰서, 투우사, 신부 등을 통해

한층 더 원초적이고 강도 높은 방법으로 자신들의 짐승 같은 본능을 실현시킵니다.

 

주인공들이 10대로 설정된 탓에 철없는 아이들의 무분별한 성 입문기로 읽힐 수도 있지만

’, 시몬, 마르셀 등 세 인물에게서 10대의 향기는 거의 느껴지지 않습니다.

난 침대 속에서 이렇게 부인들처럼 하는 건 흥미가 없어!”라는 시몬의 원색적인 고백은

풍부한 경험으로 다져진 닳고 닳은(?) 불량청소년의 음란한 갈망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실은 그것은 그 어떤 이물질도 끼어들지 않은 순수한 본능일 뿐입니다.

사드의 소돔의 120이나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노골적인 성애 작품들보다 충격이 컸던 건

아마도 이런 10대 주인공들의 캐릭터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다만, “인간은 이성적 존재가 아니며 태초부터 짐승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성에 관한 한 초보자지만 아직 깨끗하고 본능에 가까운 욕망을 소유한 10대 소년소녀들을

주인공으로 삼은 게 아닌가, 추정해볼 뿐입니다.

 

본편 자체는 230여 페이지의 분량 중 절반 조금 못 미친 정도이고

그 뒤로 작가 스스로의 고백을 담은 일치들과 수전 손택의 해설’, 김태용의 해제’(解題)

이 작품을 이해하는데 꼭 필요한 부록들이 실려 있습니다.

육체와 거기에서 쏟아져 나오는 온갖 배설물에 탐닉하며 욕망을 분출하는 10대들의 이야기는

사실 읽는 내내 당혹스럽기만 했을 뿐 어떤 형태의 지적 고민도 일으키지 못한 게 사실인데

그래선지 허겁지겁 부록들을 읽기 시작했지만 결국 당혹감은 조금도 해소되지 않았습니다.

 

폭력과 공포, 배설물과 눈()에 집착하게 됐던 사연을 담은 작가의 고백 일치들

흥미롭긴 했어도 불행한 가정환경 탓에 만들어진 소시오패스처럼 상투적으로 읽혔고,

포르노그래피와 문학에 대한 수전 손택의 장황한 에세이는 그 요점을 포착하기 어려웠으며,

환각과 몽상 그 자체처럼 읽힌 김태용의 해제 역시 작품 이해에 별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행간에 숨은 이단적 지성의 심오한 생각을 읽어내지 못한 자괴감이 강해진 끝에

이 작품은 형이상학적 논리와 논쟁을 즐기는 평론가를 위한 텍스트.”라는 결론에 도달하거나

정반대로 이건 단지 자극적인 변태 포르노그래피에 불과해.”라는 반발심만 생겼다고 할까요?

 

부록들없이도 이 작품의 진가와 의미를 단박에 깨달은 누군가는

야박하기 이를 데 없는 저의 평점을 두고 무식, 저급, 몰이해라고 비난할지도 모르겠지만

탐미주의의 여운과 미덕도, 당시 사회상을 반영한 문제의식도 발견하지 못한 저로서는

고백하자면, 민망한 성적 자극을 받은 것 외엔 달리 기억에 남는 게 별로 없는 작품입니다.

부록들에서 얻은 약간의 이해력을 동원해 다시 한 번 본편을 읽어볼까, 고민도 해봤지만

당장은 그러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아 일단 책장에 꽂아놓기로 했습니다.

언젠가는 당신은 생각이 너무 많다. 우리는 태초부터 짐승이었다.”는 바타유의 말이 떠올라

다시금 이 원초적인 욕망에 관한 이야기가 궁금해질 게 분명하지만 말입니다.

 

사족으로... 출판사에서는 공감각적 언어유희와 지적 은유를 선보이는 바타유의 원문에

최대한 가깝도록 번역문을 세심히 다듬었다.”고 소개했는데,

그렇다 하더라도 몇 번을 되읽어도 그 의미도 문맥도 이해할 수 없었던 수많은 문장들은

이단적 지성의 심오한 생각만큼이나 독자를 당황스럽게 만든 게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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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버드, 블루버드
애티카 로크 지음, 박영인 옮김 / 네버모어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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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200명이 채 안 되는 텍사스의 작은 마을 라크에서 연이어 살인사건이 벌어집니다.

희생자는 시카고에서 활동하는 흑인 변호사와 라크에 살고 있던 백인 여성.

텍사스 레인저대런 매슈스는 친구이자 FBI 요원인 그렉에게서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듣곤

정직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인 차원의 조사를 시작합니다.

흑인남성과 백인여성이 연이어 희생당한 사건이라 인종 범죄로 확신했지만

조사와 탐문이 진행될수록 대런은 사건 이면에 또 다른 사연들이 숨어있음을 확신합니다.

ABT(텍사스 아리안 브라더후드)라는 백인우월주의 단체에 대한 의심 역시 접지는 않았지만

대런은 그보다는 오래 전부터 이어져온 작은 마을의 복잡하고 참혹한 악연에 더 주목합니다.

 

작품 속 설명에 따르면 텍사스 레인저스는 일반 경찰들이 해결하지 못하는,

혹은 해결하지 않는 범죄수사에 개입할 수 있는 조직입니다.

, 출판사 소개글에 따르면 텍사스의 최고 법집행기관이기도 합니다.

주인공 대런 매슈스는 그 가운데 보기 드문 흑인 레인저입니다.

인종차별이 심한 텍사스에서 백인 못잖게 부와 명예를 갖춘 유복한 가문 출신인 대런은

변호사를 꿈꾸며 로스쿨을 다니던 중 거리에서 벌어진 끔찍한 인종 혐오범죄에 충격을 받곤

아내와 가문의 반대를 무릅쓰고 안정적인 변호사 대신 레인저의 길을 택한 인물입니다.

애초 그가 정직 상태에 놓인 것도 인종범죄에 휘말렸기 때문이었고,

라크에서 벌어진 사건에 관심을 가진 것도 명백한 인종범죄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 자신이 흑인이기 때문에 인종범죄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지만

그것은 백인에 대한 편견 또는 동족에 대한 편애 때문이 아니라 순수한 정의감에 가깝습니다.

 

사건과 주인공 캐릭터에서 알 수 있다시피 이 작품의 첫 번째 코드는 인종입니다.

흑백 인종이 드나들 수 있는 술집과 식당이 당연한 듯 분리돼있고

백인이 다수를 점한 법 집행기관은 희생자의 피부 색깔에 따라 태도를 바꾸는 게 현실입니다.

얼마 전 미국을 뜨겁게 달궜던 “Black Lives Matter”를 떠올려보면

21세기에 접어든지 20년이 지나도 이 문제가 여전히 뜨거운 감자임을 알 수 있는데,

흑인남성과 백인여성이 연이어 사망한 사건을 수사하는 흑인 레인저라는 설정 때문인지

읽는 내내 어느 한 페이지에서도 팽팽한 긴장감을 내려놓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작가는 단지 흑인 레인저가 수사하는 인종범죄 스릴러에 머물지 않고

수십 년 전 잉태된 뒤 작은 마을 라크를 잠식해온 혹독한 악연과 가족사를 함께 그립니다.

그리고 그것들이 우연과 운명에 의해 거듭 증식된 뒤 임계점을 넘어선 끝에

기어이 끔찍한 살인사건들에 이르고 마는 비극적인 과정을 촘촘하고 밀도 있게 묘사합니다.

혹독한 악연과 가족사는 막장에 가까울 만큼 그 강도가 세기도 하지만

작은 마을에서 벌어진 일이라곤 믿기 힘들 정도로 복잡한 실타래처럼 뒤얽혀있기도 합니다.

덕분에 그 실타래를 하나씩 풀어가는 대런의 수사는 내내 독자의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주인공인 대런을 괴롭히는 건 단지 라크의 백인들만이 아닙니다.

마이클 코넬리의 해리 보슈 시리즈가운데 앤젤스 플라이트에도 비슷한 상황이 등장하는데

(가해자로든 피해자로든) 흑인이 개입된 사건의 경우 차라리 진실을 외면할지언정

결코 인종범죄로 비화되는 걸 원치 않는 법 집행기관의 상층부의 정치적 판단은

이 작품에서도 대런의 수사를 가로막는 큰 걸림돌로 작용합니다.

더구나 수사담당자가 정직 상태인 흑인 레인저라 문제는 더 심각해질 수밖에 없었는데

대런이 이 걸림돌을 어떻게 극복하는지는 막판까지 초미의 관심사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한국에는 처음 소개되는 작가지만 이 작품은 애티카 로크의 네 번째 작품이라고 합니다.

특히 에드거 상과 CWA 스틸대거, 앤서니 상을 동시 수상했다고 하는데,

개인적으론 충분히 그럴 만한 가치와 힘과 매력을 지닌 작품이란 생각입니다.

안 그래도 대런 매슈스를 주인공으로 한 시리즈가 출간된다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졌는데

다 읽은 뒤 작가 소개를 보니 2019년에 후속작인 ‘Heaven, My Home’이 출간됐다고 합니다.

 

재미있는 건 대런 매슈스 시리즈가 아니라 ‘Highway 59 시리즈라고 이름 붙여진 점인데,

텍사스 외곽의 59번 고속도로 변의 작은 마을들을 배경으로 삼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작품 속에선 이 59번 고속도로가 북쪽으로 가려는 흑인들의 희망을 담고 있다고 묘사됐는데

과연 다음 작품에선 정의감으로 똘똘 뭉친 흑인 레인저 대런 매슈스

59번 고속도로 변의 어떤 마을에서 어떤 사연들과 마주치게 될지 벌써부터 궁금해집니다.

, 새해 초부터 만만치 않은 내공의 작가와 첫 만남을 갖게 돼서 너무 반가웠는데

‘Highway 59 시리즈외에 그녀의 전작들도 빨리 만나볼 수 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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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진 살인사건 긴다이치 고스케 시리즈
요코미조 세이시 지음, 정명원 옮김 / 시공사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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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욕심만 부려왔던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 다시 읽기를 시작했습니다.

가능하면 출간순서대로 읽고 싶지만 연재물인 경우가 많은데다 개정된 작품도 많았고

여기저기 찾아보는 자료마다 출간연도가 제각각이거나 아예 표기 안 된 경우도 적잖은 탓에

일단 임의로 제가 정한 순서대로 읽어나갈 생각입니다.

 

이 작품은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의 첫 작품인 1946년 작 혼진 살인사건을 표제작으로

모두 두 편의 중편과 한 편의 단편이 수록된 작품집입니다.

고백하자면 표제작 혼진 살인사건을 제외하고 나머지 두 편은 읽는 내내

십여 년 전에 읽었다고 하지만 이렇게 전혀 기억이 안 나나?” 의아했는데

알고 보니 예전에 읽은 건 2003년 동서문화사에서 펴낸 혼징 살인사건이었고,

그 작품에 실린 건 표제작 혼징 살인사건나비부인 살인사건으로

수록작 자체가 이번에 읽은 시공사의 혼진 살인사건과는 많이 달랐던 것입니다.

(참고로 나비부인 살인사건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가 아닌 작품입니다.)

 

표제작인 혼진 살인사건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의 첫 작품이란 기념비적인 위상과 함께

이후 이어지는 시리즈의 전반적인 특징들이 골고루 녹아있는 작품입니다.

근대화의 물결과 봉건시대 잔재의 충돌이 몰고 온 비극적인 사건 설정,

어수룩해 보이지만 뛰어난 추리력으로 모두를 깜짝 놀라게 만드는 긴다이치의 매력,

그리고 그 시대의 미스터리를 풍미했던 각종 고전 트릭의 향연 등이 그것입니다.

오랜 역사와 명망을 지닌 여관 혼진을 지켜온 이치야나기 가문을 몰아친 참혹한 살인사건은

기괴함과 함께 이해 불가능한 밀실트릭으로 인해 혼란에 빠지지만

피해자 유족과의 인연으로 사건에 뛰어든 긴다이치 덕분에 그 전말이 드러납니다.

 

이보다 뒤늦게 집필된 또 다른 수록작 도르래 우물은 왜 삐걱거리나흑묘정 사건

패전 이후 충격과 혼란에 빠진 일본 사회의 단면과 함께

스스로도 어찌할 수 없는 욕망과 의심과 증오에 빠진 개인의 비극을 다룬 작품들입니다.

20여 년 전 시작된 두 가문의 갈등과 대립이 낳은 참극을 그린 도르래 우물은 왜~’

긴다이치가 직접 등장하진 않지만 시리즈의 개성과 매력이 여전히 잘 살아있는 작품이고,

패전 후 중국에서 일본으로 돌아온 악연 관계인 남녀의 비극을 다룬 흑묘정 사건

언제나처럼 뒤늦게 나타나고도 특유의 관찰력과 추리력을 발휘하는 긴다이치가

범인이 정교하게 설계한 복잡한 트릭을 보기 좋게 해결하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사실, 모든 작품에서 긴다이치의 추리는 독자로선 도저히 따라갈 수 없을 만큼 비약적입니다.

긴다이치가 무심코 지나쳤거나 바라봤던 사소한 것들이 정교한 추리의 재료가 되기도 하고

때론 결과론이라고 할 수밖에 없을 만큼 과정 자체가 실종된 깜짝 결론에 이르기도 해서

독자를 당황하게 만드는 것이 사실입니다.

가물가물한 기억으로는 이런 특징은 시리즈의 대부분 작품에서 목격했던 것 같은데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설정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리즈를 애정할 수 있었던 건

아무래도 긴다이치의 매력적인 캐릭터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더벅머리에 초라하고 시대에 뒤떨어진 듯한 옷차림과 흥분하면 말까지 더듬는 그는

언제나 뒤늦게 현장에 투입되고도 사건이나 수사 관련자들에게 친밀감을 느끼게 만드는데,

그 친밀감은 독자에게도 여지없이 적용되는 듯 해보이기 때문입니다.

덕분에 그가 내놓는 결과물은 유능하긴 해도 거만하고 재수 없는 명탐정의 성과라기보다는

겸손한 노력형 탐정이 근면하게 일궈낸 가치 있는 결론처럼 보이곤 합니다.

비약적 추리의 대명사인 시마다 소지의 미타라이 기요시와는 사뭇 대조적이라고 할까요?

 

다만, 긴다이치의 비범한 능력과 비약적 추리는 독자에 따라 거부감을 느낄 여지가 많고

‘20세기 중반에 태어난 올드하고 아날로그적인 이야기의 한계와 함께

독자의 흥미를 반감시킬 치명적인 요소가 될 수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애정하는 시리즈의 첫 편임에도 무난함을 뜻하는 별 4개에 그친 건 이런 이유 때문인데

아마도 앞으로 다시 읽을 작품 가운데 적잖이 비슷한 상황이 벌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분명 읽은 적이 있었음에도 마치 이번에 처음 알게 된 것처럼 놀라웠던 사실은

미국 유학, 경미한 마약중독, 귀국 후 갑작스런 탐정으로의 변신 등 긴다이치의 이력이었는데

과거가 불분명한 모호한 인물이거나 혹은 평범한 소시민 출신 탐정이라고만 여겼던 탓인지

새삼 긴다이치를 새롭게 바라보게 만든 흥미로운 사실들이었습니다.

또 긴다이치와의 교류를 통해 그가 다룬 사건을 소설로 옮기는 역할을 맡은 추리소설가 Y’

실은 작가 요코미조 세이시 본인을 투영한 점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역시 재미있게 읽혔고

두 사람이 처음 맞대면 하는 장면은 마치 프리퀄을 읽는 듯한 신기함을 전해주기도 했습니다.

 

앞으로 다시 읽기를 이어가는 동안 이런 소소한 재미들을 재발견하게 될 것 같은데,

짧게는 7, 길게는 13~14년 만에 다시 만난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의 참맛을 만끽하려면

어쩌면 모든 게 다 새롭게 보이기만 하는 부족한 기억력이 큰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읽었지만 기억 안 남순서대로 시리즈 다시 읽기의 가장 큰 동력이자 매력이라면 너무 억지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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