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터 라이어
태넌 존스 지음, 공보경 옮김 / 황금시간 / 2020년 12월
평점 :
절판


(약간 상세한 초반부 설정 소개가 포함돼있습니다.)

 

언젠가부터 갑자기 붐을 이룬 심리스릴러, 그중에서도 가족이 이야기의 중심에 있는 작품들은

때론 연쇄살인마나 액션 히어로를 다룬 작품들보다 더 짜릿한 매력을 주기도 했지만

적잖은 비율로 지루함과 실망감만 안기기도 해서 가급적 외면하려 한 게 사실입니다.

거의 예외 없이 나를 찾아줘걸 온 더 트레인을 홍보카피에 끌어 쓰긴 했지만

완성도나 매력 면에서 과장 광고란 인상을 피하지 못한 경우가 훨씬 더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목이나 표지, 한 줄 카피에 혹해서 관심을 갖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태넌 존스라는 낯선 작가의, 그것도 데뷔작인 베터 라이어는 그런 경위로 접한 작품입니다.

 

아버지가 사망한 후 레슬리는 10년 전 집을 나가 소식을 끊은 동생 로빈을 찾아 나서지만

그녀가 발견한 것은 살아 숨 쉬는 동생이 아닌 죽어 있는 시체였다.

아버지의 유언 탓에 동생이 있어야만 유산을 상속받을 수 있었던 그녀는

길에서 우연히 만난 배우 지망생 메리에게 죽은 동생 로빈을 연기해줄 것을 제안한다.

메리는 로빈 몫의 유산을 주겠다는 레슬리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그녀의 집으로 따라간다.

겉보기엔 부유하고 평화로운 가정이지만 레슬리의 집을 떠도는 불안한 기운을 감지한 메리는

호기심을 넘어 불안한 기운의 이유와 그 안에 깃든 비밀이 뭔지 직접 알아내려 한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언뜻 보면 유산을 노리고 가짜 동생을 끌어들인 레슬리의 유산상속 스릴러인 것 같지만

예상 외로 본격적인 이야기는 로빈 역할을 맡아 거액의 사례금만 챙기면 될 메리가

주제넘게도자신에게 은혜를 베푼 레슬리의 수상쩍은 비밀에 관심을 가지면서 시작됩니다.

레슬리의 집에 머물게 된 메리는 그녀가 자신에게 털어놓은 사정들이 모두 거짓말 같았고,

무엇보다 급히 상속받아야만 한다던 유산의 사용처가 궁금해졌기 때문입니다.

메리의 진실 찾기는 단순히 레슬리의 집 곳곳을 뒤지는데서 그치지 않고

마치 사립탐정이라도 된 양 거침없이 레슬리의 현재와 과거를 탐문하는 데까지 이릅니다.

 

출판사 소개글에 따르면 이 작품에 등장하는 세 여자 레슬리, 메리, 로빈은 각각

죽어야 하는 여인죽음을 연기하는 여인’, 그리고 죽은 여인으로 지칭됩니다.

모두 죽음과 관련 있는 캐릭터란 뜻인데 이 미스터리는 막판에야 독자들에게 공개됩니다.

그리고 그 죽음은 대부분 참혹한 비극의 산물로 밝혀지는데

작가는 막판까지 거듭된 반전을 통해 그 비극의 깊이와 무게를 더욱 묵직하게 빚어냅니다.

 

레슬리가 감추는 비밀들과 그것을 파헤치는 메리의 행적이 미스터리 코드를 담당하고 있다면

두 사람이 한 집에 머물며 발산하는 팽팽한 긴장감은 심리스릴러의 본색을 잘 드러냅니다.

거기에 이미 사망한 레슬리의 부모의 결코 평온하지 못했던 말년의 삶이 끼어들고

단란해 보이는 레슬리 가족에게서 풍기는 은밀하고도 수상쩍은 분위기까지 가세하면서

독자는 이 이야기의 끝에서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사뭇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물론 눈썰미 있는 독자라면 이른 시간 안에 미스터리와 스릴러의 진실을 캐낼 수도 있지만

작가가 마련해놓은 마지막 장면까지 짐작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일 것입니다.

 

고백하자면, 100페이지쯤에서 한 번 포기하려 했고, 200페이지에서도 똑같은 고민을 했는데,

가장 큰 이유는 가족 중심의 심리스릴러가 대부분 그렇듯 느리고 지루한 전개였습니다.

레슬리가 메리를 동생 로빈의 대역으로 삼고 자신의 집으로 데려가는 지점까진 무척 빠르지만

그 뒤로 심리스릴러가 본격적으로 펼쳐지면서 속도감은 느려지고 호흡은 마냥 길어집니다.

물론 이 모든 것들이 막판 클라이맥스와 엔딩을 위해 필요한 포석인 건 이해하지만

느리고 지루한 심리스릴러에 대한 트라우마(?)를 일깨워 포기를 고민하게 한 것도 사실이라

어떻게든 완주해놓고도 다시는 심리스릴러는...”이란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작가에게 소중하지 않은 문장이라곤 하나도 없겠지만 야박하고 이기적인 독자 입장에선

100페이지쯤 생략됐다면 속도감과 긴장감 가득한 작품이 됐을 거란 생각을 떨칠 수 없습니다.

 

정교한 미스터리 구성, 섬세하면서도 힘 있는 문장, 매력적인 캐릭터, 거듭된 반전 등

데뷔작답지 않은 필력을 갖춘 작가라 후속작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은데,

개인적으론 후속작 역시 만연체의 심리스릴러라면 진지하게 고민할 게 분명해 보입니다.

물론 이런 스타일의 작품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몰입도 높은 작품에 만족하는 것은 물론,

후속작이 기대되는 신인작가의 탄생에 당연히 환호하고도 남겠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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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지기 쉬운 미래
우라가 카즈히로 지음, 최재호 옮김 / 북플라자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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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그 해의 베스트 11’으로 꼽았던 수면의 감옥의 우라가 카즈히로 작품입니다.

그 이후로 신간 소식이 없어서 아쉬워하던 차에 반가운 마음으로 책을 집어 들었는데

띠지 앞면에 적힌 우라가 카즈히로 유작이란 문구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알고 보니 20202월에 4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한국에는 이 작품까지 단 두 편만 소개돼서 생소하게 여길 독자들이 훨씬 많겠지만

개인적으론 너무 아쉽고 안타까울 뿐입니다.

 

유명 만화가 진나이 류지는 어느 날 갑자기 약혼녀를 교통사고로 잃은 뒤 패닉에 빠집니다.

어마어마한 팬을 보유하고 있던 연재만화의 여주인공을 허망하게 죽이는가 하면

더 이상 자신의 삶은 물론 인생의 전부였던 만화에 대해 애정 하나 안 남을 정도에 이릅니다.

그런 그에게 당신의 약혼녀는 이틀 후에 죽습니다.”라는 내용이 담긴 편지가 전달됩니다.

문제는 그 편지의 발신날짜가 약혼녀가 죽기 이틀 전이란 점입니다.

즉 누군가 약혼녀의 죽음을 예지했단 건데, 발신자를 만난 진나이는 더 큰 충격에 빠집니다.

한편, 진나이의 광팬인 한 남자는 숭배하던 여주인공을 함부로 죽인 진나이를 증오한 끝에

그를 죽이겠다는 각오와 함께 차근차근 살인계획을 세우기 시작합니다.

 

원제는 こわれもの’(, ), 즉 파손된 물건, 파손되기 쉬운 물건이란 뜻인데

깨지기 쉬운 미래는 내용과 주제를 잘 담아낸 번역 제목이란 생각입니다.

현재는 물론 모든 것이 밝고 환하던 진나이의 미래는 약혼녀의 죽음과 함께 깨지고 말았고

그녀의 죽음을 예지했던 자는 미래라는 게 얼마나 쉽게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는지를

진나이에게 재차 확인시켜 줌으로써 그에게서 미래의 의미를 모두 빼앗아가고 맙니다.

그리고 실제로 진나이의 미래를 박살내고 빼앗으려는 한 광팬의 살의가 구체화될수록

독자는 그에게 과연 미래라는 게 남아있을까, 라는 불안한 의문에 휩싸이게 됩니다.

 

가까이 있는 자의 죽음을 예지하는 능력자가 등장하지만 SF나 판타지물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 예지력 자체가 거듭되는 반전의 결정적 재료로 이용되는 미스터리 작품입니다.

수면의 감옥이 이중 구조, 클로즈드 서클, 교환살인 등 다양한 미스터리 코드가 뒤섞였다면

깨지기 쉬운 미래는 예지력과 미스터리가 정교하게 믹스돼 반전의 맛을 잘 살린 작품입니다.

실은 작가는 초중반까지 비교적 쉬운 힌트를 교묘하게 잘 위장해놓았는데

다소 위화감이 느껴지는 대목에 주목하다 보면 의외로 빠른 해답을 얻을 수도 있지만,

수면의 감옥에서도 그랬듯이 결국 독자는 마지막 한 방을 맞고 나서야

그 힌트들의 의미를 제대로 깨닫게 되는 미스터리의 쾌감을 만끽할 가능성이 훨씬 높습니다.

 

약혼녀가 갑자기 죽었다고 그녀를 투영했던 인기 여주인공을 갑자기 죽인 진나이도,

숭배하던 여주인공을 죽인 만화가를 직접 살해하겠다고 나선 오타쿠 기질의 광팬도

실은 다소 작위적이고 비현실적인 면이 있어서 100% 공감하긴 어려웠지만

그 점 외에는 그다지 길지 않은 분량을 순식간에 완주할 수 있는 재미있는 작품입니다.

 

이제 더 이상 그의 신작을 만나볼 수 없게 됐지만

한국에 아직 소개되지 않은 그의 대표작 안도 나오키 시리즈를 통해서라도

우라가 카즈히로의 작품들을 접할 기회가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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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벰버 로드
루 버니 지음, 박영인 옮김 / 네버모어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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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1122,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당한다.

뉴올리언스 마피아 보스 카를로스의 심복인 프랭크 기드리는 등골이 서늘해진다.

자신이 맡았던 작은 심부름이 그 거대한 암살 음모의 일부였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사건 관련 인물들이 차례차례 제거되자 살아남기 위해 라스베이거스로 도망치던 기드리는

두 딸과 함께 무책임한 알코올 중독자인 남편에게서 도망쳐 LA로 향하던 샬럿과 마주친다.

기드리는 조직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단란한 가족으로의 위장이 필요했고

차 고장으로 곤경에 처한 샬럿은 하루 빨리 LA에 도착하기 위해 기드리의 도움이 필요했다.

조직 최고의 암살자 폴 바로네가 무자비한 살인극을 벌이며 기드리를 바짝 추격해오는 가운데

우연과 운명 덕분에 함께 하게 된 여정의 끝에서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2019년에 읽은 오래전 멀리 사라져버린에 이어 두 번째로 만난 루 버니의 작품입니다.

오래전 멀리 사라져버린은 오클라호마시티를 무대로

26년 전에 벌어진 의문의 사건의 진실을 쫓는 두 남녀의 이야기를 다룬 미스터리였는데

각각 참혹한 기억과 깊은 상심을 지닌 주인공들이 집요하게 진실 찾기에 나선 이야기라

무척 인상적으로 읽은 작품이었습니다.

그에 반해 노벰버 로드196311월을 배경으로 한 로드 스릴러입니다.

목숨을 걸고, 또는 인생을 걸고 도망치면서도 애정, 온기, 추억들을 쌓아가는 주인공들과

그들을 쫓는 피도 눈물도 없는 추격자라는 설정 때문에

읽는 내내 영화 델마와 루이스가 떠오르곤 했습니다.

 

몸담았던 조직에게 뒤통수를 맞은 뒤 살아남기 위해 과거와 단절하려는 기드리에게도,

꿈도 희망도 없는 소도시와 무책임한 남편이 지배하던 과거와 단절하려는 샬롯에게도

이 무모한 여정 끝에 딱히 믿고 의지할 사람이나 약속의 땅같은 게 있는 건 아닙니다.

막연한 기대와 바람만 갖고 각각 라스베이거스와 LA로 달려가긴 해도

그곳에는 비참한 죽음 또는 냉랭한 문전박대가 기다릴 가능성이 훨씬 높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직 노벰버 로드를 달리는 것 외엔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오직 그것만이 지우고 싶은 과거와 단절할 수 있는 유일한 해법이기 때문입니다.

 

둘이 함께 보낸 1주일의 시간은 어쩌면 그들에겐 평생 가장한 행복시간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뉴올리언스의 환락과 폭력 속에서 살아온 기드리가 누군가를 간절히 지키고 싶어진 것도,

어느 날 갑자기 집을 뛰쳐나온 샬롯이 처음으로 제대로 된 온기를 느끼며 희망을 가진 것도

이전의 과거 속에선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선지 그렇게 끝나지 않을 거란 걸 잘 알면서도

기드리와 샬롯이 달콤한 해피엔딩을 맞이하기를 바란 건 아마 저만의 경험은 아닐 것입니다.

 

케네디 대통령의 죽음을 소재로 한 스릴러 중 기억나는 건 스티븐 킹의 ‘11/22/63’인데

시간여행을 동원한 기발한 발상은 놀라웠어도 이야기 자체는 다소 밋밋했던 반면,

노벰버 로드는 팩트에 기반한 픽션이지만 좀더 현실적이고 입체적인 설정을 지녔습니다.

대통령 암살을 도모한 마피아가 그 흔적을 지우기 위해 연루된 측근들을 제거한다는 구상은

케네디 암살을 소재로 활용한 그 어떤 작품들보다 신선한 아이디어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다 꿈과 희망을 위해 무모한 가출을 감행한 샬롯과 그녀의 딸들이 가세하면서

이야기는 단순한 액션 로드 스릴러를 넘어 휴먼드라마의 향기까지 풍기고 있습니다.

 

뉴올리언스 마피아 중간보스 기드리의 캐릭터 때문인지

작가가 문장에 멋도 많이 부리고 기교도 많이 부린 느낌이었는데

영화 대부를 보듯 매력적으로 느껴질 때도 있었지만 다소 어렵게 읽힐 때도 있었습니다.

뭐랄까, 과도한 생략과 멋부림이 물 흐르듯 이어져야 할 책읽기를 살짝 방해한 느낌이랄까요?

, 기드리와 샬롯이 감정을 쌓아가는 시퀀스가 생각보다 좀 길게 묘사된 점이라든가

그들을 추격하는 암살자의 행보가 예상보다 처져 보인 점 등이 아쉬웠는데,

이런 점들 때문에 별 하나를 빼긴 했지만 전체적으로는 만족스러운 작품이었습니다.

 

당초 초고가 전작의 성공을 의식한 듯 너무나 대중적인 공식을 따르는 스릴러가 된 탓에

작가가 기본 설정만 남겨두고 1년에 걸쳐 거의 새로 썼다는 출판사의 소개글을 봤는데,

그 초고가 무척 궁금하기도 하고 제 취향에 더 맞았을지도 모른다는 망상을 해봤습니다.

오래전 멀리 사라져버린이나 노벰버 로드모두 2%가 조금 넘는 아쉬움을 남기긴 했지만

앞으로도 루 버니의 신작 소식에는 계속 귀를 기울이게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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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마에게 바치는 청소지침서 쿤룬 삼부곡 1
쿤룬 지음, 진실희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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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허한 분위기를 풍기는 미소년 스녠은 살인마다. 희대의 연쇄살인범 잭 더 리퍼를 숭배하는 살인집단 ‘JACK’의 조직원만 골라 살해한다. 심한 결벽증 때문에 살인 현장을 항상 강박적으로 청소하며, 죽어 가는 자에게 청소의 요령을 한마디씩 알려 주는 기이한 버릇이 있다. 스녠은 어린 시절 소중한 사람이 눈앞에서 ‘JACK’의 조직원에게 살해당한 그날 이후로 조직원 전부를 죽여 없애는 것을 생의 목표로 삼았다. 하지만 엄청난 충격 때문에 일부 소실된 그날의 기억은 늘 스녠을 고통스럽게 만들었고, 소중한 사람의 죽음의 진실이 뒤늦게 드러나면서 스녠은 그날 이상의 충격을 받는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제목과 표지만큼이나 독특한 캐릭터와 이야기가 담긴 작품입니다. 무엇보다 강박에 가까운 결벽증과 결코 마르지 않을 복수심으로 중무장한 주인공 스녠은 피도 눈물도 없이 조직원을 살해하는 와중에도 청결에 집착하는 특이한 캐릭터인데, 이 어울리지 않는 감정의 조합은 실은 스녠의 참혹했던 어린 시절이 남긴 트라우마라서 처음엔 블랙 코미디의 한 장면처럼 읽히다가 나중엔 꽤 착잡한 기분에 사로잡히게 만듭니다.

 

이야기는 현재에서 과거로 조금씩 그 무대를 옮겨갔다가 다시 현재로 돌아오는 구조인데, 가장 큰 이유는 그날에 관한 스녠의 소실된 기억때문입니다. , 스녠은 소중한 사람을 조직원에게 잃은 뒤로 그들에게 복수하기로 결심하긴 했지만 정작 그날의 가장 결정적인 장면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 탓에 때론 소중한 사람의 죽음이 자기 때문인지도 모른다며 심한 자책에 빠지기도 합니다. , 그 자책은 자신이 벌이는 복수극 자체에 대한 회의로까지 번지기도 합니다. 그러다 보니 스녠의 과거와 그날의 진실이 가장 중요한 미스터리가 될 수밖에 없고, 이야기는 아주 조금씩 과거 속으로 무대를 옮겨가게 되는 것입니다. 요약하면, 조직원에 대한 복수극과 함께 스녠의 소실된 기억 찾기가 핵심인 작품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 스녠 못잖게 비밀투성이인 인물들이 개입합니다. 하나는 스녠에게 ‘JACK’ 조직원의 정보를 제공하는 정보판매상 다비도프이고, 또 하나는 부와 명예와 미모까지 갖춘 심리치료사 닥터 야오입니다. 이들은 스녠의 복수극을 지지하고 지원하는 듯 하면서도 언제라도 스녠의 뒤통수를 칠 것만 같은 수상쩍은 분위기를 내뿜는 인물들입니다. 한 조직원을 살해하는 과정에서 예기치 못한 상황에 충격을 받은 스녠이 소실된 그날의 기억 일부를 떠올리자 두 사람은 서서히 본색을 드러냅니다.

 

미스터리든 스릴러든 어지간히 잔혹한 장면들을 꽤 많이 읽은 편이지만 잭 더 리퍼를 숭배하는 조직원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살상 장면은 꽤 충격적이었습니다. 희생자의 배를 갈랐던 잭 더 리퍼의 행위를 모방한 살인수법은 무척 디테일하게 묘사되는데 그 장면들의 잔혹함은 개인적으로도 거의 역대급 인상으로 남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간혹 터지는 블랙 코미디 코드 덕분에 몸서리쳐지는 잔혹함이 중화되기도 합니다.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로 인해 결벽증을 갖게 된 스녠은 자연스레 소통에도 익숙지 않은데 그런 스녠 앞에 수시로 나타나 허무 개그를 자아내는 건 일명 사축’(社畜) 샤오쥔입니다. 위아래 할 것 없이 자신을 무시하고 괴롭히는 회사 사람들 탓에 삶에 환멸을 느끼면서도 샤오쥔은 특유의 낙천적 성격 덕분에 스녠과 가까워집니다. 본편 뒤에 수록된 번외편은 샤오쥔 덕분에 조금씩 평범한 세상에 적응하는 스녠이 그려지는데 그래서인지 후속작에 대한 기대감을 낳기도 합니다.

 

최근 중화권 장르물에서 좋은 인상을 받은 경우가 그리 많지 않았는데 살인마에게 바치는 청소지침서는 독특한 캐릭터와 설정 덕분에 꽤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간혹 명쾌하게 설명되지 않는 부분도 있고 다소 억지스런 부분도 있는데다 중화권 장르물 특유의 가볍고 요란하고 날것 같은 분위기도 작품 전반에 깔려 있지만 스녠의 캐릭터와 주변 인물들이 빚어내는 블랙 코미디가 곁들여진 잔혹무도한 서사는 그런 아쉬움들을 모두 상쇄하고도 남을 만큼 흥미롭게 읽힙니다. 다만, 예전에 아비코 다케마루의 살육에 이르는 병이 그랬듯이 재미있지만 너무 잔인해서 함부로 추천하기 어려운 작품인 것 역시 분명한 사실입니다. 물론 제 주위에선 이 코멘트 때문에 살육에 이르는 병을 찾아 읽은 사람들이 더 많았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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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박스 RHK 형사 해리 보슈 시리즈 16
마이클 코넬리 지음, 한정아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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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 보슈 시리즈’ 16편인 이 작품에서 보슈는 딸 매들린이 챙겨준 60세 생일을 맞이합니다.

시리즈 첫 편인 블랙 에코에서 보슈가 40세였으니 어느 새 20년이란 시간이 흐른 셈입니다.

전작인 드롭에서 퇴직유예제도(DROP)를 통해 형사로서의 삶을 5년 더 연장 받은 보슈는

그 가운데 1년이란 시간을 보낸 가운데 그에겐 너무나도 특별한 사건과 마주하게 됩니다.

 

1992년은 시리즈 첫 편인 블랙 에코의 배경, 즉 보슈가 처음 독자들과 만난 해입니다.

그 특별한 해의 5월 첫날 새벽, LA를 악몽으로 몰아넣은 대폭동의 한 복판에서

보슈는 덴마크 여기자 안네케 예스페르센이 처형당하듯 살해당한 사건을 맡은 바 있는데,

폭동의 와중에 벌어진 무수한 사건으로 인해 당시 보슈는 단 15분밖에 조사할 시간이 없었고

탄피 하나 외엔 아무 성과도 없이 시신에게 미안하다.”는 말만 남기고 돌아서야 했습니다.

결국 예스페르센 사건은 그 후로도 20년 동안 미제 사건으로 남아있었는데,

운명 같은 우연들이 겹치면서 보슈는 20년 전의 미안함을 갚을 기회를 잡게 됩니다.

우선 경찰국장이 폭동 20주년을 맞아 당시 미제 사건을 조사하겠다는 정치 쇼를 펼쳤고

이어 보슈가 20년 전 예스페르센 피살 현장에서 유일하게 수거했던 탄피를 배출한 총기가

최근 다른 사건에서 쓰인 사실이 과학수사를 통해 밝혀진 것입니다.

 

이쯤 되면 정말 운명 같은 사건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데,

그만큼 다른 때보다 더 절실할 수밖에 없는 보슈의 수사는 크게 두 갈래로 전개됩니다.

하나는 일명 건 워크(Gun Walk), 즉 여러 사건에 걸쳐있는 탄도학적 증거를 기반으로

20년 전 예스페르센을 살해한 총기의 행방을 찾는 것이 하나이고,

또 하나는 왜 덴마크 여기자가 LA폭동 한복판에 있었는지를 밝히는 일입니다.

 

보슈는 이번 수사에서 파트너 데이비드 추 없이 거의 단독수사를 감행합니다.

시간만 잡아먹을 뿐 무의미해 보이는 갱단 사건의 기초자료 조사부터 시작해서

불법과 합법 사이의 경계를 아슬아슬 줄타기하며 관련자들을 샅샅이 탐문합니다.

더불어, 예스페르센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유족은 물론 덴마크 신문사까지 수소문하여

그녀가 LA에 온 이유와 그 전후의 동선을 이 잡듯이 포착하려 애씁니다.

신속한 조사를 위해 악연밖에 남지 않은 전 연인인 FBI요원 레이철 월링의 힘까지 빌리는데

복잡한 감정을 무릅써가면서 분투하는 보슈의 모습이 애처로워 보이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보슈에겐 내부의 적들의 방해가 뒤따릅니다.

새롭게 미제사건 전담반장으로 부임한 오툴은 유치한 논리만 내세우는 전형적인 관료인데

20년 선배인 보슈가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자 극단적인 방법을 동원하기도 합니다.

, 한때 평직원들의 환호를 받았던 경찰국장은 3년 차에 접어들면서 정치꾼으로 변질되더니

급기야 말도 안 되는 논리로 보슈의 수사를 방해하고 나섭니다.

폭동 20주년에 맞춰 기획된 미제사건 수사에서 백인여자 피살 사건이 제일 먼저 해결될 경우

정치적, 인종적 문제 때문에 괜한 역풍과 함께 혼란을 야기할 수 있다는 게 그의 논리인데,

피해자와 유족만 생각하는 보슈 입장에선 그야말로 본말이 전도된 헛소리일 수밖에 없습니다.

작은 사고 하나만으로도 바로 해고될 수 있는 계약직 형사 보슈에겐 큰 위협이 분명하지만

그는 이제는 더는 놀랍지도 않은 내부 감찰을 받으면서도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습니다.

 

400여 페이지 내내 군살 하나 없이 알맹이로만 채워진 듯해서 다소 뻑뻑하게 읽히긴 했지만

그 가운데 쉬어갈 수 있게끔 안배한 이야기는 이제 16살이 된 딸 매들린에 관한 것입니다.

보슈는 사건 때문에 딸을 방치한다는 자책감에 미안해하지만 정작 매들린 본인은 꿋꿋합니다.

여전히 경찰의 꿈을 놓지 않은 채 보슈의 경찰 DNA’를 차곡차곡 물려받기도 합니다.

아직 한국에 소개 안 된 후속작들에서 매들린이 어떻게 성장할지 궁금해질 수밖에 없는데

언젠가는 보슈 부녀의 콤비 플레이를 기대해도 괜찮겠다는 생각입니다.

 

다만, 다른 조연들은 딱 자기가 할 역할만 하고 빠진 듯 해서 다소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파트너인 데이비드 추는 앞서 언급한대로 보슈의 원맨쇼덕분에 설 자리를 잃었고,

전작인 드롭에서 인연을 맺은 보슈의 연인 해나 스톤 역시 존재감이 미미했습니다.

예전 파트너 제리 에드거는 회상 장면에만 등장했고,

전 연인인 레이철 월링 역시 카메오처럼 잠깐만 등장해서 아쉬움을 남겼는데,

그나마 그녀는 후속작인 ‘The Burning Room’(미출간)에서 주요 조연으로 등장한다고 해서

이번 작품에서의 아쉬움을 달랠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오히려 보슈의 감찰을 맡은 3급 형사 낸시 맨덴홀이 내내 주목을 끌었는데,

감찰계 형사답지 않은 그녀의 태도는 다음 작품에서의 역할을 기대하게 만들었습니다.

어쩌면 보슈의 다음 연인이 되지 않을까, 싶은 설렘 섞인 궁금함이라고 할까요?

 

20209월에 시작한 해리보슈+@ 다시 읽기블랙 박스를 마지막으로 마무리됐습니다.

그동안 해리 보슈 시리즈’ 16편과 보슈가 등장하진 않지만 밀접한 관련이 있는 4편을 포함

모두 20편의 작품을 순서대로 다시 읽으면서 이 시리즈의 매력을 새롭게 느낄 수 있었는데,

무엇보다 보슈와 주변 인물들의 20년간의 성장과 변화를 연대기처럼 읽은 것이 흥미로웠고

한 작품 속에 전작들의 설정들(인물과 사건)이 살짝 끼어든 대목들 역시

순서대로 읽지 않으면 맛볼 수 없는 특별한 경험이었다는 생각입니다.

 

시리즈 16편인 이 작품이 한국에서 20197월에 출간됐으니 대략 1년 반 전의 일입니다.

미국에서는 2020년에 해리 보슈 시리즈’ 23(미키 할러 시리즈’ 6)이 출간됐는데

최소한 7편의 작품에서 보슈의 활약을 더 볼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그저 무소식일 뿐인 한국 출간소식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2020년을 건너뛴 만큼 부디 2021년에는 꼭 보슈의 새 작품을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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