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가, 나의 악마
조예 스테이지 지음, 이수영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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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신적인 엄마 수제트, 다정한 남편이자 아빠인 알렉스 그리고 사랑스러운 일곱 살 딸 해나.

완벽해 보이지만 이들 가족은 남들에게 말할 수 없는 심각한 균열을 안고 살아간다.

해나는 안 하는 건지, 못 하는 건지 일곱 살이 되도록 도무지 말을 내뱉지 않는다.

폭력적인 행동으로 해나가 연이어 퇴학을 당한 후론 수제트가 홈스쿨링을 담당하지만

해나의 행동이 점점 위험하고 잔인해지자 수제트는 심신의 쇠약함을 넘어 공포를 느낀다.

그러던 어느 날, 해나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 입에서 나온 충격적인 말은...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예전에 미운 일곱 살이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금이야 옥이야 하던 부모도 아이가 그 또래가 되면 밉다소리가 절로 나오기 마련이었는데,

그 말은 세상이 변하고 아이들이 세상에 빨리 익숙해지면서 언제부턴가 이렇게 진화했습니다.

미운 세 살, 죽이고 싶은 일곱 살.”

 

이 작품 속 일곱 살 해나는 그저 평범한 죽이고 싶은 일곱 살이 아닙니다.

끔찍한 소리지만 세상을 충격에 빠뜨릴 게 확실한 장래가 촉망되는 소시오패스라고 할까요?

모함과 속임수 등 소소한 폭력으로 시작된 엄마 수제트를 향한 해나의 공격은

수제트를 사라지게 하거나 죽이겠다는 확고한 목표의식과 함께 치명적인 수위를 넘어섭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해나는 단 한 번도 입을 열지 않습니다. 마치 말 자체를 거부하듯 말이죠.

수제트 본인은 말할 것도 없고 독자 역시 ?”라는 궁금증을 갖지 않을 수 없는데,

(수제트에 대한 증오가 싹텄던) 해나의 세 살 무렵의 기억이 아주 잠깐 묘사되긴 하지만

그것을 해나의 행동을 설명하는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원인으로 받아들일 독자는 없습니다.

작가 역시 ?”라는 궁금증에 대해 뚜렷한 인과관계로 답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위험하고도 불가지한 그 무엇이 발산하는 공포를 더욱 강렬하게 쌓아갈 뿐입니다.

 

한편, 해나의 소시오패스 행각의 대의중 하나는 엄마에게 사로잡힌 아빠 구하기입니다.

자신의 행동과 생각을 읽고 공감해주는 아빠 알렉스만이 해나에겐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자신의 언행을 일일이 일러바치는 수제트를 좀처럼 믿지 않는 알렉스의 태도 덕분에

해나는 승리감에 도취하는 것은 물론 훨씬 더 위험한 다음 계획에 몰두할 수 있게 됩니다.

 

구도만 보면 아가이자 악마인 해나와 엄마 수제트 간의 호러 서스펜스 스릴러로 보이지만

실은 이 작품은 소설 형식을 띤 논픽션 기록처럼 읽히기도 합니다.

물론 수제트와 해나 모녀의 우열 관계가 역전되거나 아빠 알렉스의 태도가 점차 변하는 등

뚜렷한 굴곡까진 아니더라도 나름 기승전결의 형태를 갖추고 있지만

분량이나 비중 면에서 훨씬 더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현실에 대한 기록이기 때문입니다.

스티븐 킹에 매료됐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글을 쓰게 됐다는 작가의 이력을 생각해 보면

훨씬 더 큰 파열음과 얼얼한 충격을 지닌 비극으로 치닫고도 남았을 것 같은데

작가는 그보다는 반사회적 인격 장애아를 둔 가족의 비극자체에 더 초점을 맞췄습니다.

 

, 작가는 수제트를 통해 여성모성에 대해 꽤 많은 이야기를 풀어놓기도 합니다.

자신을 철저히 통제하면서도 정작 필요할 땐 방치했던 무책임한 엄마를 증오했던 수제트는

그런 트라우마를 딛고 일어나 한때 전도유망한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인정받기도 했지만

지금은 딸에게 공포심을 느끼는 이상한 엄마이자 무력한 전업주부가 돼있을 뿐입니다.

수제트는 엄마를 증오했던 것 이상의 혐오와 공포를 딸 해나에게 느끼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해나의 이상증세가 마치 (자신의 엄마처럼) 모자란 모성 탓인 양 자책하기도 합니다.

동시에 여성에게 모성이란 당연한 건지, 해나가 없어지길 바라는 자신이 이상한 건 아닌지,

여성으로서, 어머니로서 끊임없이 고뇌하고 또 고뇌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동전의 양면처럼 한 몸이지만 실은 전혀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는 여성모성

어린 소시오패스 해나가 낳은 비극 못잖게 이 작품의 중요한 화두이기도 합니다.

 

그야말로 지옥 같은 데뷔작!”이라든가 영화계를 매료시킨 서스펜스 스릴러의 절정

이 작품에 쏟아진 엄청난 찬사들이 개인적으론 조금 과하게 보이기도 했는데,

뚜렷한 기승전결을 갖춘 서스펜스 스릴러, 혹은 스티븐 킹 스타일의 서사를 기대했다가

논픽션에 가까운 이야기 전개에 다소 아쉬움을 느낀 게 가장 큰 이유 같습니다.

하지만 그만큼 리얼리티는 생생했고 긴장감 역시 픽션과는 질적으로 달랐던 게 사실입니다.

수시로 내가 수제트라면?”, “내가 알렉스라면?”이라며 스스로를 대입시켜보곤 했던 것도

어쩌면 이 작품만이 가지는 리얼리티의 산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작가 본인이 영화 프로듀서인만큼 이 작품의 영화화 소식은 진짜일 가능성이 높아 보이는데,

공포영화를 즐겨 보는 취향은 아니지만 이 작품만은 꼭 보고 싶은 욕심이 있습니다.

딸에게 살해당할지도 모른다는 수제트의 공포와 장래가 촉망되는 소시오패스해나의 폭주는

어쩌면 영상을 통해 더 강렬하고 진하게 그 맛을 음미할 수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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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석은 자의 독
우사미 마코토 지음, 이연승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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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사미 마코토는 일본에서의 명성에 비해 한국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2020년에만 두 편의 작품이 출간되어 조금씩 한국 독자들의 관심을 끌기 시작한 작가입니다.

우사미 마코토와 처음 만난 작품인 소녀들은 밤을 걷는다’(현대문학)

호러, 기담, 판타지, 미스터리 등 다양한 장르가 포진된 (연작 성격의) 단편집입니다.

끈적함과 서늘함, 안쓰러움과 공포심이 묘하게 뒤섞인 10편의 단편들은 무척 매력적이었는데

덕분에 후속작, 그것도 그녀의 장편을 꼭 읽어보고 싶은 욕심이 저절로 들었습니다.

그리고, 2020년 막바지에 드디어 어리석은 자의 독을 만나게 됐습니다.

 

1960년대 중반부터 2010년대 중반까지 50년에 걸친 시간적 배경이 시사하는 것처럼

이 작품은 세 남녀의 기구하다 못해 처절하기까지 한 인생 전반을 그리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1965~66, 1985~86, 2015~2016년 등 세 시기가 배경인데,

현재 시점엔 고급 요양원에 몸을 의탁한 한 할머니가 과거를 되짚는 이야기가 담겨있고,

80년대는 우연한 계기로 친구가 된 30대 여성 요코와 기미의 인연과 함께

그녀들 사이에 낀 한 남자 유키오까지 포함된 세 남녀의 파국과 비극을 다루고 있으며,

60년대는 빈곤하기 이를 데 없는 탄광촌을 무대로 절망에 빠진 여중생 기미가

유일하게 의지하는 친구 유키오와 함께 생의 구렁텅이로 추락하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습니다.

 

인물이나 사건 소개만으로도 스포일러가 될 여지가 많아 자세한 언급은 하기 힘들지만,

띠지에 적힌 문구인 그 순간 우리는 공범이 되었다.”에서 유추할 수 있듯

이 작품의 출발점은 시대의 어둠과 절망적인 상황에 몰려 살인을 저지른 자들,

그래서 평생 그 죄의 무게를 안고 살아가야 하는 자들의 절망입니다.

이후 50년에 걸친 공범들의 악몽 같은 삶이 그려지고

그들의 삶에 끼어든 또 다른 의미의 공범들의 어둡고 무거운 이야기가 그려진다는 게

아직 이 작품을 읽지 않은 독자들을 위해 소개할 수 있는 전부입니다.

 

읽는 동안 여러 번 반복되어 눈길을 끄는 인상적인 문구가 하나 있습니다.

인생은 죽기 전에 다 수지타산이 맞춰지게 돼있다.”인데,

말하자면, 죄를 지었으면 언젠가는 반드시 그 죗값을 치르게 된다는 뜻입니다.

헤어지고 싶어도 헤어지지 못하고 오랜 시간 서로의 죄를 보듬으며 살아온 기미와 유키오,

죽은 언니가 남긴 정신지체아 조카 다쓰야를 키우면서도 이기적인 욕망에 몸서리치는 요코,

오랜 시간 기미와 유키오 주위를 맴돌며 악의 화신처럼 끔찍한 만행을 저질러온 남자,

그리고 그 외에도 이들 주위를 맴돌았던 꽤 많은 인물들까지

대부분 바로 이 인생의 수지타산의 법칙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거기다 시대의 풍파, 죄와 업보, 비극과 운명이라는 불길한 기운의 재료들까지 곁들여져서

읽는 내내 가슴 한쪽에 큰 돌덩어리를 얹어놓은 듯한 무거움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이런 설정 때문인지 수시로 히가시노 게이고의 백야행이 떠오르곤 했는데,

이야기의 성격은 전혀 다르지만 한순간 인생의 방향이 최악으로 틀어져버린 주인공들을

애증 섞인 고통스러운 시선으로 지켜봐야 한다는 점에서 두 작품은 일맥상통합니다.

그리고 쉽게 잊히지 않을 깊은 여운을 각인시킨다는 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 작품이 영화나 드라마로 만들어진다면 막장의 끝이란 소릴 듣기에 딱 알맞긴 하지만

활자로 만난 50년에 걸친 비극은 막장과는 거리가 먼 비애감을 깊이 심어줍니다.

, 일본추리작가협회상을 수상한 작품임에도 진범 찾기가 목적인 정통 미스터리는 아니지만

시대의 풍파에 휩쓸린 인간의 절망과 내면을 담아낸 작품이라는 비평에 관심이 끌린다면

어리석은 자의 독과 꼭 만나볼 것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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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환자
재스퍼 드윗 지음, 서은원 옮김 / 시월이일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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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대를 졸업하고 수련의 과정까지 우수한 성적으로 마친 신참 정신과 의사 파커는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인력과 재정이 열악한 코네티컷 주립 정신병원에 자원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6살에 입원한 뒤 30년 동안 수용돼있는 조라는 환자에 대해 알게 됩니다.

그의 주목을 끈 건 단순히 긴 입원 기간뿐 아니라 확실한 병명조차 없다는 점과 함께

그동안 그를 담당했던 의료진들이 미치거나 자살했다는 기이한 사실이었습니다.

병원장과 상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담당의를 자처한 파커는 치료 첫날부터 충격에 빠집니다.

조는 진료 서류상의 기록이나 떠도는 소문과는 너무나도 다른 모습이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 작품의 진짜 알맹이는 위에서 소개한 줄거리 다음 부분부터 시작됩니다.

한 달 가까이 조와 면담을 나눈 파커가 그의 처치를 놓고 병원 측과 충돌하는 이야기,

30년 전 최초로 조를 담당했던 의사와의 격론 끝에 다다른 파커 자신도 믿을 수 없는 결론,

6살의 조가 겪었던 야경증의 실체를 확인하기 위해 그의 부모를 찾아간 일,

그리고 조의 비밀을 알게 된 뒤 찾아온 끔찍한 혼란과 패닉 등이 그것입니다.

하지만 출판사조차 이 뒷이야기를 공개적으로 소개하지 않고 있어서

이렇듯 두루뭉술하고 감질날 정도로만 서평에 담을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다 읽은 뒤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아주 오래 전에 푹 빠졌던 환상특급이란 드라마였습니다.

매번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켜보면서도 나름 반전에 대비하곤 했지만

번번이 뒤통수를 강하게 얻어맞는 듯한 충격적인 엔딩에 놀라움과 소름을 피할 수 없었는데,

그 환자는 그만큼 환상특급에 잘 어울리는 요소들을 골고루 갖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호러 분위기가 살짝 가미된 메디컬 스릴러처럼 시작된 이야기는

솔직히 어디로 튈지 쉽게 가늠할 수 없었습니다.

30년 간 갇혀있던 소시오패스의 탈출기? 또는 이후의 연쇄살인극?

그렇다면 주인공인 의사 파커의 역할은 뭘까?, 등 여러 가지 궁금증이 일었는데,

환자도 의사도 정신과 쪽 인물이라 그런지 그 분야의 모호한묘사들이 계속 이어져서

아무래도 소시오패스나 연쇄살인보다는 심리 스릴러로 흐를 것 같은 예감이 들곤 했습니다.

하지만 작가가 선사한 막판 반전은 그야말로 환상특급을 능가하는 충격적인 것이었고,

혹시 잘못 읽은 건 아닐까, 싶어 몇 번이고 반전이 등장한 대목을 되읽을 정도였습니다.

 

워낙 극단적인 반전이라 독자에 따라 극명하게 호불호가 갈릴 것이 분명하긴 하지만

어느 쪽이 됐든 깜짝 반전이 전해 준 충격의 강도는 엇비슷할 것으로 보입니다.

개인적으론 충격다음으로 받은 인상이 당황과 허탈 사이쯤 됐는데

호러와 공포 쪽 취향의 독자라면 꽤 환호할 작품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사족으로...

전반적으로 안정적이고 매끄러웠지만 결정적 대목에서 살짝 모호했던 번역이 아쉬웠고,

페이지마다 글씨 진하기가 달랐던 인쇄 부분의 오류는 계속 눈에 거슬렸습니다.

낯선 이름의 신생 출판사로 보이는데 응원과 함께 좀더 세심한 마무리를 바라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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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귀 케이스릴러
전건우 지음 / 고즈넉이엔티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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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릭터와 사건 설정에 관해 약간 상세한 소개가 포함돼있습니다.)

 

겨울이 되면 눈에 파묻혀 고립되어 버리는 강원도 산골 마을 소복리.

첫눈이 내리던 날, 소복리 언덕 위에 세워진 붉은 별장에 정체불명의 외지인들이 찾아온다.

공교롭게도 같은 시기에 마을사람들이 하나둘 실종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실종된 현장에서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문양이 반복해서 발견된다.

문제 청소년 선우와 소복리 출신 말단 형사 동수는 힘을 합쳐 실종자들의 흔적을 찾는다.

그러던 중 붉은 별장과 그곳에 온 낯선 자들이 수상하다는 걸 알게 되는데...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전건우는 단편선과 앤솔로지를 빼고 단독 작품만 마귀까지 7편을 출간한 중견작가입니다.

그동안 한국 추리스릴러 단편선 5’(황금가지)에 실린 단편 해무를 시작으로

소용돌이’(엘릭시르)고시원 기담’(캐비넷)을 읽었는데,

중도에 포기한 고시원 기담을 제외하면 단독 작품으로는 두 번째 만남입니다.

 

고립된 산골마을, 정체불명의 외지인과 그들이 머무는 별장, 연쇄실종과 특이한 문양 등

좋아하는 호러 코드들이 많이 깔려 있어서 사뭇 기대가 많은 작품이었는데,

미쓰다 신조의 호러물을 좋아하는 저의 취향과도 잘 맞아보였기 때문입니다.

특별한 능력자가 아니라 문제 청소년과 신참 형사라는 평범한 주인공 설정도 좋았고

초반부터 빠른 속도로 호러 코드들을 전개한 점도 눈길을 끌었지만

판이 깔린 뒤 시작된 본격적인 이야기는 점점 위화감과 실망을 안긴 게 사실입니다.

 

호러의 주역인 의 궁극적 목표는 부활과 영생입니다.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희생양으로 작은 산골마을 소복리를 선택했고

가공할 영적 능력으로 끔찍한 살상을 저지르며 오직 부활과 영생을 향해 진격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막기 위해 소복리의 문제 청소년과 신참 형사가 용감하게 나서는 한편

특별한 능력을 지닌 외부의 조력자들까지 그들을 도와 목숨을 걸고 과 싸웁니다.

상투적이긴 해도 친근하고 익숙한 선악의 대결 구도인 건 맞지만

문제는 부활과 영생, 루시퍼와 사타니즘(Satanism)이 지나치게 강조되면서

기대했던 한국형 호러와는 거리가 먼, 조금은 국적불명의 이야기가 되고 만다는 점입니다.

전형적인 서양식 루시퍼 전승 스토리와 크게 다를 바 없는 진부한 형태라고 할까요?

 

때로 지적 과잉으로 보인 루시퍼와 사타니즘에 대한 장황한 설명은 거리감만 준 것은 물론

의 능력과 스케일을 불필요할 정도로 무적에 가깝게 키우면서 되려 역효과만 일으킵니다.

, 능력으로 따지면 은 세계 정복(?)도 그리 어렵지 않을 정도로 대단해 보이는데

(막판에 그 이유가 설명되긴 하지만) 강원도의 작은 마을을 무대로 한 그들의 작전과 계획은

보유한 능력에 비하면 허술하거나 허접하기 그지없습니다.

오지나 다름없는 곳에 만인의 호기심을 자극할 만한 유럽 고성 스타일의 별장을 지은 일도,

얼마든지 편하게 의식을 치르고 부활과 영생을 얻을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굳이 남들 눈에 띄는 방식으로 요란하게, 그것도 서둘러가며 치른 이유도 납득하기 어려웠고

자초한 거나 다름없는 방해꾼들때문에 목표를 이루지 못하고 무너지는 과정은

솔직히 애초부터 부활이나 영생을 꿈꿀 만한 깜냥들이 못됐다는 허망함마저 들게 했습니다.

 

사족이지만, 주인공들을 돕기 위해 등장한 소위 유해종교 와해단은 희극적이기만 했습니다.

신부, 수녀, 스님, 무당으로 구성된 이들은 루시퍼에 맞서는 독수리오형제같아 보이지만

실제로 해내는 일은 별로 없는, 다분히 연극적이고 현실성도 없는 설정에 불과합니다.

물론 문제 청소년과 막내 형사만으로 막강한 을 물리치는 것도 비현실적이긴 하지만,

그렇다면 이들에게 단지 이야기의 볼륨감을 키우는 것 이상의 특별한 역할을 부여해야 했고

그래야 이야기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들 수 있었다는 생각입니다.

 

저수지, 태풍, 익사 등 물의 공포를 배경으로 삼은 작가의 전작 소용돌이

인간으로서 어찌해볼 수 없는 자연의 힘 또는 초자연적인 존재를 등장시키고 있지만

오히려 현실감도 있고, 연쇄살인 코드까지 잘 버무려진 한국형 호러였는데,

그래선지 비슷한 인상을 기대했던 마귀에 대한 아쉬움이 더 커진 것 같습니다.

민속학을 기반으로 일본 고유의 호러 작품들을 창조한 미쓰다 신조처럼

한국의 전통적인 정서가 잘 녹아있는 전건우의 호러 작품을 꼭 만나보고 싶은 건

아마 저만의 욕심은 아닐 거란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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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심장을 쏴라 (리커버 특별판) - 2009년 제5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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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의 밤으로 처음 만났을 때는 서사와 캐릭터 등 모든 것에 압도당하는 기분이었고,

‘28’을 읽곤 악의 순수한 단면과 정면으로 마주친 끔찍함에 꽤 긴 후유증을 겪었습니다.

종의 기원은 전작들보다 더 독하고 센 것을 찾다가 길을 잃은 듯한 아쉬움을 느꼈는데,

그래서 오히려 초기작인 내 심장을 쏴라는 남다른 기대감이 있었던 게 사실입니다.

 

정신병동에는 두 부류의 인간이 있어요. 미쳐서 갇힌 자와 갇혀서 미쳐가는 자.” (p213)

 

이 작품은 어머니의 죽음 이후 그 트라우마로 인해 미쳐서 갇힌정신분열증 환자 이수명과

타고난 운명 때문에 타인에 의해 갇혀서 미쳐가는류승민의 정신병원 탈출기를 그립니다.

이수명이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수차례 정신병원을 드나들던 베테랑(?)이라면,

류승민은 재벌가의 유산싸움에 휘말린 끝에 납치되다시피 정신병원에 갇힌 인물입니다.

물론 류승민도 어린 시절부터 방화를 즐겼으니 딱히 평범한 일반인은 아니었습니다.

 

이들이 갇힌 수리 희망병원은 뉴스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사악하고 악질적인 정신병원입니다.

폭력이 난무하고 강제적인 약물과 전기치료로 환자들을 길들이는 게 일상적인 곳입니다.

덕분에 이야기의 상당 부분은 수명과 승민의 고통스런 시간들을 그리고 있습니다.

더 이상 바깥에서의 삶을 포기한 채 체념의 길을 선택한 수명과 달리

승민은 혹독한 폭력에도 불구하고 바깥으로의 탈출을 끊임없이 시도합니다.

 

승민이 정신병원에 갇힌 사연을 알게 된 수명은 그의 희망과 의지를 조금씩 이해하게 되고

승민의 탈출을 돕는 과정에서 진작 포기했던 바깥세상의 삶에 애착을 갖기 시작합니다.

더불어, 스스로 굳게 봉인했던 과거의 트라우마와 정면으로 마주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주인공들의 미션이 정신병원 탈출이니 당연히 마지막에 성공하긴 합니다. 일단....

(수명과 승민의 운명이 탈출 후 어떻게 전개되는지는 직접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2009년 세계문학상 심사위원들은 처음 60쪽의 지루함만 참아내면...”이라고 지적했지만

개인적으론 승민의 정체가 제대로 드러나는 1/3지점까지 꽤 지루한 동어반복으로 읽혔습니다.

, 그 뒤로도 대부분의 이야기는 반복되는 승민의 탈출 시도와 실패,

그리고 뒤로 물러날 줄만 알았던 수명이 조금씩 분노를 느끼게 되는 과정에 할애됐고,

둘의 대척점에 서있는 정신병원의 관계자들의 폭력과 동정이 그 사이사이를 채우고 있어서

기승전결 식 이야기 전개라기보다는 심리 스릴러에 더 가깝다는 생각이 자주 들었습니다.

 

전혀 다른 이유로 정신병원에 갇힌 두 사람이 끝내 자신이 꿈꾸던 세계로 돌아간다는 점에서

뜨거운 감동과 생에 대한 각성이 꿈틀대며, 희망에 대한 끈을 다시 움켜잡게 만드는

마력이 깃든 작품이라는 심사위원들의 평가는 어느 정도는 공감할 수 있었지만,

그들의 목표자체가 미약하게 느껴진 탓인지 탈출이 성공하길 바라는 절실함이 들지 않았고

승민의 캐릭터가 주제를 강조하기 위해 다소 비현실적이고 작위적으로 설정된 듯 한데다

무엇보다 감동, 각성, 희망이라는 걸 어디서 찾고 느껴야 할지 알 수 없었던 탓에

어느 정도이상은 심사위원들의 평에 공감할 수 없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자신을 옥죄는 현실에서 탈출하는 이야기를 다룬 소설과 영화가 팽팽한 긴장감을 갖는 이유는

갇힌 이유, 갇힌 상태의 절망감, 탈출 후 누리고자 하는 바나 목표가 설득력을 갖기 때문인데

수명과 승민의 경우 가장 중요한 목표가 모호하거나 미약해 보이기만 했습니다.

수명에겐 자신을 파멸시킨 트라우마를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는 게 전부이고,

승민의 경우 복수도 도주도 아닌 판타지 같은 낭만적 자기애의 실현을 목표로 할 뿐입니다.

독자에 따라 이들의 목표를 감동, 각성, 희망의 구현으로 여길 수도 있겠지만

정유정 스타일의 독하고 구체적인 기승전결을 기대한 저에겐

밋밋하고 어정쩡한 해피엔딩 이상으로 다가오지는 못했습니다.

 

인터넷 서점의 서평들을 찾아보니 대부분 호평 일색이라 조금 당황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별 두 개나 세 개에 머문 서평들도 간혹 보여서 다행스럽게(?) 여기기도 했습니다.

독특한 서사와 캐릭터, 성실한 취재에 기반한 디테일한 묘사는 충분히 매력적이었지만

아무래도 감동, 각성, 희망에 방점을 찍은 엔딩에는 제 취향이 적응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7년의 밤‘28’로 눈이 번쩍 뜨였지만 종의 기원에서 실망한 탓인지

이후 출간된 따스하고 다정하고 뭉클하다진이, 지니는 아예 읽을 생각도 안 했는데

아무래도 제겐 독하고 센 정유정 이야기만이 어울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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