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뒷면은 비밀에 부쳐 작가정신 일본소설 시리즈 32
츠지무라 미즈키 지음, 오유리 옮김 / 작가정신 / 2012년 10월
평점 :
절판


대략의 스토리에 대해서도, 드라마로 만들어진 사실에 대해서도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달의 뒷면은 비밀에 부쳐라는 묘한 제목과 그에 어울리는 표지 디자인은

비슷한 제목을 지닌 온다 리쿠의 달의 뒷면을 떠올리게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하지만 달의 뒷면처럼 현실과 비현실을 오가는 몽환적 이야기가 아닐까, 라는 어설픈 짐작은

첫 페이지를 펼치자마자 엄청난 착각이었던 걸로 드러납니다.

이 작품은 유명한 호텔 웨딩홀에서 한 날 열린 네 건의 결혼식을 소재로

결혼 당사자, 웨딩플래너, 하객 등 여러 인물의 희로애락을 그린 옴니버스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호텔 아르마이티는 화려한 웨딩홀로 유명한 곳입니다.

500만 엔이 넘는 엄청난 비용뿐 아니라 예비신랑신부가 꼽는 1순위 웨딩홀이기 때문인데,

무슨 우연인지 길일로 꼽히는 1122일에 예정된 네 건의 결혼식엔

저마다 차마 대놓고 말할 수 없는 기구한 사연들이 깃들어 있습니다.

약혼자의 어이없는 행태로 파혼을 겪은 뒤 웨딩플래너가 된 5년차 베테랑 야마이 다카코가

사상 최악의 신부를 맞아 결혼식 당일까지 온탕과 냉탕을 오가는 이야기를 포함하여,

부모조차 헷갈리는 일란성 쌍둥이 자매가 꾸민 기상천외한 신부 바꿔치기 음모,

좋아하는 이모의 결혼식을 앞두고 예비 이모부의 끔찍한 비밀을 알아채버린 소년의 혼란,

무슨 짓을 하더라도 늘 인생의 바리케이드가 자신을 지켜줬다는 행운을 믿는 한 유부남이

자의반 타의반으로 진실을 감춘 채 또 한 여자의 신랑이 되어 결혼식 당일을 맞이하게 되자

초조함과 절망에 빠진 나머지 벌이는 위험하고 무모한 행각 등이 그것입니다.

 

당사자는 물론 식장 관계자나 하객 모두 다소 들뜨기 마련인 결혼식이 이야기의 주 무대지만

그 들뜬 분위기의 이면에는 비밀과 거짓말, 분노와 공포, 자책과 혼란 등

결혼식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불행하고 불편한 감정들이 깔려있습니다.

누군가를 속이거나, 누군가 때문에 마음에 상처를 입거나 혹은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히거나,

아니면 알아선 안 될 비밀 때문에 홀로 괴로워하는 인물들이 등장하다 보니

미스터리는 물론 갈수록 증폭되는 긴장감이 시종일관 독자의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작품의 분위기 자체가 무겁거나 심각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영국식 로맨스나 블랙코미디 또는 우화 같은 느낌이 더 강하다고 할 수 있는데,

상황은 분명 심각해 보이지만 독자는 그 이상의 가벼움도 동시에 만끽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살짝 과장해서 말하면 미스터리와 긴장감이 잘 버무려진 유쾌한 시트콤에 가까운 작품인데,

비유하자면, 포장은 꽤 심각하지만 내용물은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 같다고 할까요?

 

누구나 이 작품 속 네 건의 결혼식이 비극으로 끝나지 않을 거라고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경로를 거쳐 어떤 엔딩에 이를지는 쉽게 예상하기 어렵습니다.

각 에피소드마다 츠지무라 미즈키다운 적절한 반전과 소소한 감동이 숨어 있는데

덕분에 400여 페이지의 분량임에도 지루함을 느낄 새 없이 한 번에 완주할 수 있었습니다.

 

사족으로 한 가지만 보태면...

이 작품의 원제는 本日大安なり, 직역하면 오늘은 만사 대길하게정도인데,

이 작품을 원작으로 만들어진 일본 드라마의 국내 소개명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이 직역 제목은 츠지무라 미즈키의 팬이라도 그리 끌리는 제목이 아닌 건 맞습니다.

그렇다 해도 달의 뒷면은 비밀에 부쳐라는 뜬금없는 번역 제목이 나온 이유는 뭘까요?

재미있게 읽었지만 이 뜬금없는 제목의 불편함이 목에 걸린 가시처럼 통 가시질 않았습니다.

온다 리쿠의 달의 뒷면을 연상시키는 표지 디자인 역시 마찬가지였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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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롭 - 위기의 남자 RHK 형사 해리 보슈 시리즈 15
마이클 코넬리 지음, 한정아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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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 보슈 시리즈’ 15편인 드롭의 제목에는 세 가지 중첩된 의미가 있다고 합니다.

그 중 두 가지는 이번 작품에서 보슈가 맡은 사건과 관련 있는데,

우선 22년 전 살해당한 19세 여성의 몸에서 발견된 한 방울(a drop)의 혈흔이 하나이고,

고급호텔에서 일어난 시의원 아들의 추락(drop) 사건이 나머지 하나입니다.

세 번째 의미는 보슈의 형사로서의 삶을 연장시켜준 퇴직유예제도(DROP)가 그것인데,

세 개의 ‘drop’ 모두 보슈에게 꽤 묵직한 의미를 지니고 있어서인지

(한국판에만 있는 것 같지만) ‘위기의 남자라는 부제가 남다른 무게감으로 다가왔습니다.

 

전작 나인 드래곤이후 특수살인사건 전담반에서 다시 미제사건 전담반으로 돌아온 보슈는

LA경찰국과의 계약 만료 이후 퇴직유예제도를 통해 39개월의 형사로서의 삶을 연장받습니다.

22년 전의 19세 여성 살해사건을 맡은 보슈는 파트너인 데이비드 추와 수사준비를 하지만

갑자기 국장으로부터 시의원 아들의 추락사 사건부터 해결하라는 지시를 받곤 의아해합니다.

일명 하이징고(경찰수뇌부가 관심을 갖거나 정치적 외압이 가해지는 사건)라는 얘긴데,

더 큰 문제는 그 시의원이 보슈에게는 최악의 악연인 전 부국장 어빈 어빙이란 점입니다.

한때 자신을 파멸시키려던 어빙이 자신을 점찍어 수사를 맡겼다는 점에 보슈는 크게 놀라지만

모든 사감을 억누른 채 적극적으로 추락사의 진실을 밝히고자 노력합니다.

그 와중에 22년 전 19세 여성 살해사건까지 병행하던 보슈는

오로지 피해자의 몸에서 채취한 피 한 방울밖에 가진 게 없었지만

예기치 못한 상황을 겪은 끝에 LA 전체를 충격에 빠뜨릴 추악한 진실과 마주하게 됩니다.

 

한때 LA경찰국 부국장을 지냈던 어빙과 그 휘하에 있던 보슈의 악연은 무척이나 질깁니다.

자신의 불명예스러운 퇴진에 보슈가 적잖은 역할을 했다고 믿는 어빙은

보슈는 물론 LA경찰국을 괴롭히기 위해 시의원으로서 할 수 있는 모든 행패를 부려왔습니다.

그런 어빙이 아들의 죽음의 진실을 밝히라며 보슈를 택한 건 아이러니할 수밖에 없는 일인데

보슈는 악연과 수사는 별개라는 태도를 견지하며 어느 때보다 노력을 아끼지 않습니다.

문제는 수사를 진행할수록 정치적인 냄새가 진동하고 불편한 위화감이 든다는 점입니다.

 

지금까지 여러 작품에서 하이징고를 다루긴 했지만

드롭은 정치권과 경찰과 언론 사이에 낀 일개 형사보슈의 자존감을 무너뜨릴 정도로

압도적인 깊이와 무게를 지닌 하이징고를 전면에 내세운 셈인데,

그래선지 사건을 해결하고도 참담함을 느끼는 보슈를 지켜보는 건 꽤 씁쓸한 일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유능한 형사였다가 관료의 길을 택한 예전 파트너 키즈 라이더의 정치적 태도는

보슈에겐 연장된 39개월의 형사로서의 삶 자체를 회의적으로 여기게 만들기까지 하는데

모두가 중요하거나 모두가 중요하지 않다는 사명감만으로 버텨온 보슈가

과연 이후 어떤 행보를 걷게 될지 무척 궁금하면서도 안쓰러워지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동시에 전개되는 22년 전 19세 여성 살인사건은 전형적인 소시오패스 추격전으로 그려지지만

악은 어디에서 오는가?’라는 원초적인 문제까지 함께 다루고 있어서

하이징고와는 또 다른 긴장감과 주제의식을 전해줍니다.

악은 태어나는가, 만들어지는가?”, “피해자지만 동시에 가해자인 사람을 동정해야 하는가?”,

악은 과연 선의로 갱생될 수 있는 것인가?” 등 정답 없는 물음들이 사건에 내재돼있어서

단순히 범인 찾기나 진실 찾기 이상의 무게감을 맛볼 수 있는 에피소드입니다.

 

분량은 그리 많지 않지만 사건 만큼이나 눈길을 끈 건 보슈의 딸 매들린의 이야기입니다.

전작인 나인 드래곤이후 보슈와 함께 살게 된 매들린은 이제 15살이 됐습니다.

그 또래 치곤 아빠와의 둘만의 생활에 잘 적응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매들린은 보슈가 놀랄 정도로 형사의 딸로서의 재능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더 놀라운 건 매들린의 꿈이 보슈를 꼭 닮은 유능한 형사라는 점입니다.

추리는 물론 사격 실력도 만만치 않은 매들린을 지켜보고 있으면

언젠가 강력계 신참 매들린 보슈를 볼 수도 있겠다는 기대감을 자연스레 갖게 됩니다.

 

하이징고와 소시오패스, 그리고 딸 매들린의 이야기까지 풍성하게 차려진 작품이라 그런지

개인적으론 시리즈 가운데 만족도가 높은 작품 중 하나로 꼽고 싶다는 생각입니다.

물론 이제 39개월밖에 남지 않은 보슈의 형사로서의 유효기간이 아쉽긴 하지만

후속작인 시리즈 16블랙 박스이후에도 (2020년 기준, 다른 주인공과의 콜라보를 포함)

무려 일곱 편의 작품에 그가 등장한 걸 보면 아쉬움 이상의 안도감도 느끼게 됩니다.

 

2021년이 막 시작된 지금까지도 해리 보슈 시리즈의 신작 소식은 들려오지 않습니다.

‘The Burning Room’이란 제목으로 레이철 월링이 함께 등장하는 걸로 아는데,

미국 출간이 2014년이었으니 한국에도 진작 소개됐어야 할 작품입니다.

부디 2021년에는 못 해도 두어 편 정도는 출간되기를 간절히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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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가지 흑역사로 읽는 세계사 : 고대~근대 편 - 마라톤전투에서 마피아의 전성시대까지 101가지 흑역사로 읽는 세계사
빌 포셋 외 지음, 김정혜 옮김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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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 관한 한 그때 그랬더라면...”이라는 가정법이 허무한 망상이란 건 당연한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나 한번쯤은 그런 망상에 빠져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물론 그 망상대로 역사가 바뀌었다 해도 긍정적이고 바람직한 결과를 가져온다는 보장은 없고

오히려 더 큰 비극이나 참사를 이끌어냈을 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래서인지 작가는 서문에서 인류 역사 전반에 일관된 현상이 하나 있다면,

아무 것도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라는 표현을 쓴 것 같습니다.

 

흥미를 돋우는 독특한 주제와 형식이라도 지루한 강의 스타일의 역사서라면 금세 질렸겠지만

재미있는 인강을 듣는 듯 재치 있고 유머 넘치는 문장들 덕분에

잘 모르거나 어렴풋이 알던 역사적 사건의 비하인드 스토리까지 쉽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여몽연합군의 일본 정벌과 임진왜란 등 조선이 등장하는 챕터도 몇몇 들어있는데

아무래도 좀더 눈길이 끌릴 수밖에 없었던 게 사실입니다.

무엇보다 각 챕터마다 역사적 팩트를 기술한 뒤에 언급된 가정법이 재미있었는데,

그때 그랬더라면 이렇게 달라지지 않았을까?”라는 작가의 바람(?)

때론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기도, 때론 갸웃거리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개인적으로 인상 깊었던 챕터는,

탈출 순간에도 화려한 마차를 고집했던 탓에 스스로 발목을 잡힌 마리 앙투아네트의 이야기,

문화적 차이를 간과한 탓에 식민지 군대의 반란을 자초한 영국 동인도회사의 어이없는 실수,

러시아가 알래스카를 미국에 팔아넘기게 된 역사적 사건의 비하인드 스토리,

애초의 목적과 달리 오히려 미국의 경제를 후퇴시킨 금주법의 아이러니,

히틀러가 나치의 괴수가 아니라 평범한 화가가 될 수도 있었던 기막힌 사연 등입니다.

 

고대~근대 편에는 모두 50개의 에피소드가 실려 있는데

기초지식 자체가 별로 없는 오랜 역사적 사건은 아무래도 100% 몰입하기 쉽지 않았지만

그래서인지 현대편에 실려 있을 에피소드들이 무척 궁금해졌습니다.

 

흑역사라는 건 어차피 결과론일 뿐 그 당시에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렇게 지나간 역사를 되짚어보는 것 자체도 분명히 유의미한 일이라는 생각입니다.

몇몇 에피소드에서는 지금의 권력자들이 꼭 읽어봐야 할 것 같다는 인상을 받기도 했는데

흑역사라는 것 대부분이 위정자 또는 권력자들의 손에 의해 저질러진 것을 생각하면

이 책을 어떻게 해서라도 그들의 필독서로 만드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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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집에 사는 네 여자
미우라 시온 지음, 이소담 옮김 / 살림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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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를 엮다마사 & 등 단 두 작품밖에 읽지 못한 미우라 시온이지만

처음 접했던 배를 엮다의 깊은 인상 덕분에 오래 전부터 관심 작가로 분류해놓았습니다.

관심에 비해 읽은 작품이 별로 없어서 좀 머쓱한 일이긴 하지만

그래서인지 신간인 그 집에 사는 네 여자에 대해선 각별한 호기심이 생긴 것이 사실입니다.

 

이 작품을 한마디로 축약하면 혈연 아닌 사람들이 가족이 되어가는 이야기입니다.

행정구역상 도쿄에 속하지만 도심도 교외도 아닌 애매모호한 동네에 자리한 마키타 가()

규모는 호화롭지만 동네아이들이 귀신의 집이라고 부를 정도로 낡고 오래된 양옥집입니다.

고고하고 제멋대로인 70대 쓰루요와 자수 전문가인 37살의 독신 사치 모녀만이 살던 그 집에

보험회사 선후배 관계인 유키노와 다에미가 특이한 인연을 통해 들어와 살게 됩니다.

 

성격도, 인생관도, 사랑관도 전부 제각각이라 물과 기름처럼 이질적이기만 한 네 여자가

한 지붕 아래 살면서 겪는 소소한 해프닝이 거의 전부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이야기는 딱히 기승전결을 갖춘 것도 아니고 큰 갈등이나 사건이 등장하지도 않습니다.

물론 늘 삐거덕거리던 쓰루요-사치 모녀가 차츰 관계를 개선해나가는 이야기도 있고,

20~30대의 독신인 사치-유키노-다에미의 33색의 사랑이 굴곡 있게 그려지기도 하고,

심지어 난데없는 호러+판타지 코드가 끼어들어서 독자들을 잠시 멍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뼈대는 가족이었다면 충돌이 더 많았을지도 모를 네 여자가 오히려 남남으로 만나

소소한 일상을 공유하면서 함께 산다는 것의 기쁨과 위안을 발견하는 이야기라고 할까요?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여름을 또 이 녀석과 나란히, 나고 자란 동네에서 보내고 있다.

(중략) 수없이 반복된 나날 끝에 얻은 것이 이거라면, 이렇게 살다 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

 

위의 문장은 미우라 시온의 마사 & 에 나오는 구절인데,

성격도 처지도 다른 두 노인이 가족 이상의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이야기를 다룬데다

동네 구석구석을 흐르는 운하 위로 배가 떠다니는, 도쿄지만 도쿄 같지 않은 동네가 배경이라

이 작품과 여러 모로 비슷한 인상을 지닌 작품입니다.

거기다가 누군가에게서 얻는 기쁨과 위안을 담은 담백한 두 줄의 문장을 보고 있으면

마키타 가()의 네 여자 역시 비슷한 기분을 느끼면서 살아가는 게 아닐까, 추측하게 됩니다.

 

큰 사건도 없이 평평하게 흘러가는 이야기지만 뭔가 눈길을 사로잡는 힘은 분명 있습니다.

다만, 잔잔해도 확실한 기승전결을 좋아하는 취향 때문에 야박한 평점을 주고 말았는데,

혹시 비슷한 실망감을 느낀 독자라면 배를 엮다를 꼭 읽어볼 것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디지털 사전과 인터넷에게 밀려난 종이사전 편집부 멤버들의 분투를 그린 작품으로

특별히 새롭거나 신선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미우라 시온이 일본에서

인간을 잘 그리는 작가로 평가받는 이유를 확실히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족으로... 한국판 표지가 너무 장난스러워서(?) 일본 원작의 표지를 살펴봤는데,

문고판은 좀 뜬금없었지만 하드커버판의 표지는 그대로 가져왔어도 괜찮았다는 생각입니다.

한국판 표지는 미우라 시온 작품임을 몰랐다면 눈길조차 주지 않았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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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실이, 혼자가 될 때까지
아사쿠라 아키나리 지음, 문지원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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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네자와 호노부의 고전부 시리즈나 미야베 미유키의 솔로몬의 위증’,

츠지무라 미즈키의 오더 메이드 살인 클럽등 재미있게 읽은 작품들이 꽤 있긴 해도

역시 10대 중고생들이 주조연을 도맡은 미스터리는 선뜻 손이 나가지 않는 게 사실입니다.

더구나 이 작품은 제 취향과 거리가 먼 초능력을 전면에 내세운 탓에 그냥 지나치려 했지만

본격미스터리대상일본추리작가협회상후보작이라는 카피에 이끌려 읽게 된 작품입니다.

고백하자면, 100페이지 정도만 읽고 중간에 포기해도 괜찮다는 생각으로 첫 장을 열었는데,

의외로 눈길을 끄는 이야기에 금세 마지막 장까지 한 번에 완주했습니다.

 

한 고등학교에서 3명의 학생이 연이어 자살하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충격에 빠져 등교 거부 중인 미즈키를 찾아갔던 가키우치는 놀란 만한 이야기를 듣습니다.

미즈키에 따르면 3명의 죽음은 자살이 아니라 타살이며 범인은 정체불명의 사신(死神)으로,

그가 3명의 정신을 조종하여 자살하게끔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믿을 수도, 안 믿을 수도 없는 미즈키의 말에 혼란을 겪던 가키우치는

누군가가 보내온 황당무계한 편지를 받곤 더 큰 충격에 빠집니다.

이 학교에는 대대로 4명의 초능력자, 일명 수취인이 존재하는데,

선대 수취인이 죽은 탓에 무작위로 뽑힌 가키우치가 그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자신에게 생긴 초능력을 확인한 가키우치는 미즈키의 말에 다시 귀 기울이는 한편

3명의 친구들을 살해한 사신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다른 수취인들과 연대하기로 결심합니다.

 

어느 날 갑자기 초능력을 얻은 주인공이 살인사건의 진상을 밝히는 이야기이긴 하지만

학교 문제를 내포한 듯한 제목과 청춘물 느낌의 표지에서 추정할 수 있듯

이 작품은 미스터리뿐 아니라 성장, 청춘, 학교, 사회 등 다양한 코드를 품고 있기도 합니다.

사신의 정체를 찾아내기까지의 과정이 초능력+본격 미스터리의 콜라보라면

사건의 이면이 드러나는 후반부에는 비단 10대에만 국한되지 않는 꽤 거대한 담론,

즉 개인과 사회,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 학교와 사회에 만연한 계급론 등을 다루고 있습니다.

 

초능력과 본격 미스터리가 잘 조합된 중후반부까지는 꽤 흥미진진하게 읽히는데다

일찌감치 정체가 드러난 사신과 초능력자들의 두뇌싸움 역시 뒷이야기를 궁금하게 만들어서

저처럼 의구심을 갖고 첫 장을 연 독자라도 끝까지 달리게 만드는 힘을 가진 작품입니다.

초반에 떨쳐내기 힘들었던 초능력에 대한 위화감도 금세 옅어지는 걸 느꼈는데

아무래도 능수능란하게 캐릭터와 스토리를 설계한 작가의 힘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다만, 작가의 의도, 즉 주제에 대해 강의에 가깝게 설파되는 막판 엔딩에 대해서는

독자마다 호불호가 꽤 갈릴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이 대목에서 작가는 사신이 참극을 일으킨 계기와 동기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하는데,

그것이 이 작품의 주제라는 건 충분히 알겠지만 다소 추상적이고 모호한 것은 물론

조금은 납득하기 어려운 억지 또는 지나치게 교훈적으로 보인 것도 사실입니다.

심지어 과연 살인을 야기할 만한 문제였던가, 라는 의문이 들기도 했습니다.

 

아사쿠라 아키나리는 한국에는 처음 소개된 작가인데

일본 출간작들의 제목만 봐도 무척 독특한 스타일을 추구하는 작가라는 인상입니다.

(‘느와르 레버넌트’, ‘실연을 각오한 라운드어바웃’, ‘아홉 번째 열여덟 살을 맞이한 너와)

이 작품에서 큰 복선이나 충격적인 반전을 맛보진 못했지만

복선의 마술사라는 별명을 얻은 걸 보면 다음 작품을 기대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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