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 아이드 수잔
줄리아 히벌린 지음, 유소영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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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년 전, 16세 소녀 테사는 시신과 유골들과 함께 묻혀 있다가 발견되어 목숨을 건졌습니다.

사람들은 극적으로 살아남은 테사에게 블랙 아이드 수잔이라는 별명을 붙여줬습니다.

그녀의 증언으로 체포된 테렐 굿윈이 사형선고를 받은 지 17년이 지난 현재,

테사는 무고한 테렐이 자신 때문에 사형수가 됐을지도 모른다는 죄책감에 휩싸여 있습니다.

특히 최근까지도 진짜 범인으로 보이는 자의 흔적이 끊임없이 주변에서 발견되곤 했는데

그 일들은 내내 그녀의 죄책감과 공포심을 계속 부추겨왔습니다.

결국 테사는 법과학자 조애나와 변호사 빌의 도움을 받아 진실 밝히기에 나서기로 합니다.

 

줄거리만 보면 선명하고 깔끔한 진범 찾기 스릴러처럼 보이지만

실은 이 작품은 다소 몽환적인 호러 분위기가 감도는 지독한 심리 스릴러입니다.

재판을 앞둔 시점에서 테사가 정신과 의사와 나눈 면담을 그린 17년 전의 과거 챕터와

테렐의 사형집행일을 앞두고 테사의 진실 찾기를 그린 현재 챕터가 번갈아 등장하는데,

과거와 현재 모두 간유리로 들여다보듯 모호함이 깃든 문장들로 채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 모호함과 몽환적인 분위기의 근원은 오랫동안 테사의 뇌리를 잠식하고 있는 수잔들’,

즉 구덩이 속에서 테사와 뒤엉켜있던 시신 한 구와 여러 명의 유골들입니다.

수잔들은 꿈에서건 현실에서건 수시로 테사 앞에 나타나 뭔가를 강렬하게 요구합니다.

환청이나 다름없는 수잔들의 목소리는 18년이 지났어도 너무나 생생했기에

테사는 말짱한 제정신일 때조차 뭔가에 홀려있는 듯한 모습을 보이곤 합니다.

 

, 생매장됐던 어린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정신과 의사와 면담하는 자리에서

테사가 그 또래답지 않은 영악한 태도를 보이거나 애매한 화법을 구사하는 장면이라든가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도 누군가 자기 주위를 맴돌고 있다고 확신하는 테사의 공포감,

그리고, ‘진범은 따로 있는 게 아닐까?’라는 강박감이 적잖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어서

사건 자체보다는 모호함과 몽환적 분위기가 더 도드라져 보였습니다.

 

물론 테사가 법과학자 조애나, 변호사 빌과 함께 진실과 진범을 찾는 여정도 함께 전개되지만

그런 대목을 그린 미스터리는 심리 스릴러 서사에 비하면 분량과 비중 면에서 소소할 뿐이고

막판에 드러난 진상 역시 명쾌하고 깔끔함 대신 ?”라는 의문을 더 많이 느끼게 합니다.

 

고백하자면, 이 모호함과 몽환적인 분위기 때문에 도중에 몇 번씩 책장을 덮으려 했는데,

어떻게 이야기가 마무리될지 확인하고 싶은 마음에 결국 끝까지 달리긴 달렸지만

출판사 소개글처럼 충격적이고 강렬하며 완벽하게 독창적이지도 않았고

무슨 이야기를 읽은 건지 머릿속에 명료하게 정리되지도 않았습니다.

호러 분위기가 깃든 심리 스릴러가 취향에 맞는 독자라면 꽤 열광할 수도 있는 작품이지만

개인적으론 어지간히 힘든 책읽기를 경험한 작품이었습니다.

안 그래도 언젠가부터 대놓고 심리 스릴러라고 홍보하는 작품은 일부러 멀리해왔는데,

명확하고 선명한 서사를 좋아하는 제겐 블랙 아이드 수잔같은 지독한 심리 스릴러는

결코 맞지 않는 옷이란 걸 새삼 확인할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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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이서 살아간다는 것
사쿠라기 시노 지음, 이정민 옮김 / 몽실북스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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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20192월 출간된 별이 총총이후 통 소식이 없어서 아쉬워하고 있던 중에

몽실북스에서 들려온 사쿠라기 시노의 새 작품 출간 소식은 반갑고 또 반가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둘이서 살아간다는 것이라는 제목에 살짝 놀랐고,

그 제목에 딱 어울리는 따뜻하고 훈훈한 표지 디자인에 또 한 번 놀랐습니다.

그리고 다 읽은 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놀랐는데,

지금까지 읽은 그녀의 작품들과는 너무나도 다른 낯선 세계가 담겨 있었기 때문입니다.

 

훗카이도의 쇠락한 항구도시 구시로를 무대로 한 스산하고 처연한 이야기라든가

그곳 사람들의 마음을 짓누르는 혹독한 계절과 거친 환경에 대한 묘사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때로 미약하나마 희망이라는 가능성을 남긴 채 이야기를 마무리 지은 적도 종종 있지만

대체로 가슴 한쪽을 무겁게 만들거나 안타까움을 자아내는 게 그녀 작품의 미덕임을 감안하면

이 작품이 내비치는 긍정적 이미지와 따뜻한 낙관론은 저에겐 상상조차 할 수 없던 일입니다.

덕분에, 당혹스러움 반, 호기심 반의 심정으로 읽은 게 사실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쿠라기 시노만의 독특한 레시피는 여전했다는 게 저의 결론입니다.

 

구시대의 전유물인 영사기사라는 직업을 갖고 있지만 변변한 수입이라곤 없는 노부요시는

간호사인 아내 사유미에게 (본인 표현대로라면) 얹혀사는 40세의 남자입니다.

아직도 영화 시나리오와 평론을 여기저기 투고하며 막연한 꿈을 안고 살아가긴 하지만

빈둥거리는 기둥서방도, 아내에게 무력감과 열패감을 내쏟는 저급한 인물도 아닙니다.

오히려 순수해서 답답함을 자아내는 쪽에 더 가깝다고 할까요?

 

친정엄마의 극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노부요시와 결혼한 사유미는 올해 35.

딱히 어느 쪽의 요구도 아니면서 여전히 피임 중인 부부관계에 대해서도,

열심히는 아니어도 나름대로 발버둥치는 노부요시에 대해서도 다소의 불안감을 갖곤 있지만

그 모든 것을 마음 한쪽에 밀어둔 채 누구에게도 내색하지 않는 꿋꿋한 인물입니다.

발포주를 즐기는 유쾌한 면도 있지만 의외로 쉽게 상처받기도 하는 평범한 여자입니다.

 

노부요시와 사유미 모두 소통이나 관계에 익숙하지 않은 인물들입니다.

둘 다 외동인데다 수입도 거의 없는 고독한영사기사 일을 하는 노부요시는 말할 것도 없고

간호사지만 의사든 환자든 보호자든 늘 일정한 거리를 두는 사유미 역시

사람들과 어울려 희로애락을 나누는 성격은 아닙니다.

그런 두 사람이 자신들 주변에 들고 나는 인물들과 이런저런 방식으로 마주치면서

자기 스스로에 대해, 또 자신들의 관계에 대해 고민하고 안쓰러워하고 자위하는 이야기가

연작 스타일의 270여 페이지 분량에 담겨 있습니다.

 

소소한 갈등 외에는 겉보기엔 평범하고 오붓한 평화를 누리는 두 사람이지만

노부요시와 사유미 사이엔 요란하진 않아도 결코 멈추지 않는 풍파가 존재하고 있습니다.

경제적인 곤란함, 처가의 냉대, 임신과 출산, 낙관적이지 않은 미래 등 외적인 문제 외에도

알 수 없는 것투성이인 상대의 속마음같은 내적인 문제도 만만치 않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가장 위태로울 수도 있는 시기를 자신들만의 현명함으로 극복합니다.

타인의 행복과 불행, 사랑과 증오를 지켜보며 여러 가지 감정에 휩싸이기도 하지만

그것들로부터 얻은 자양분으로 둘이서 살아갈 날들의 토대를 단단하게 준비한다는 뜻입니다.

한 사람과 한 사람이 모여 둘이 되었다가, 셋을 거쳐 다시 둘이 되어 걸어가는 사람도 있고,

사별 후 혼자가 되어서도 마음만으로는 둘이 함께 하는 삶을 계속한 사람도 있고,

혼자를 강하게 의식하면서도 둘이 함께 하는 방식을 택한 사람도 있습니다.

노부요시와 사유미는 그들을 통해 둘이서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를 새기고 또 새기는 것입니다.

 

재미있는 건, 이 작품보다 5년 먼저 출간된 순수의 영역과의 묘한 공통점과 차이점입니다.

순수의 영역속 부부가 무능한 서예교습가 남편과 생계를 책임진 보건교사 아내라는 점에서

영사기사와 간호사로 설정된 노부요시-사유미 부부와 직업이나 처지 모두 비슷한 설정입니다.

하지만 순수의 영역속 부부는 위태로운 줄타기를 견디지 못하고

서로 비밀과 거짓말에 사로잡힌 채 파국을 향해 치닫습니다.

어쩌면 순수의 영역속 부부가 지극히 현실적이고 사실적인 캐릭터이며,

오히려 노부요시와 사유미는 잘 꾸며진 해피엔딩 판타지 속 부부일지도 모릅니다.

이 작품에서 적잖은 놀라움을 여러 번 느낀 건 바로 이런 차이점 때문일 것입니다.

팬 입장에서 볼 때 사쿠라기 시노의 오리지널 스타일이라 할 수 있는 순수의 영역에 비하면

둘이서 살아간다는 것은 일종의 낙관론자로의 변절(?)’처럼 읽힐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아무리 곳곳에서 그녀 특유의 날카롭고 싸하고 스산한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고 해도

시간을 들여 천천히 단단해지는 두 사람. 오늘도 부부가 되어 갑니다.”라는 뒷표지 카피대로

역시 이 작품의 분위기는 따뜻함 또는 훈훈함이 대세이기 때문입니다.

 

사쿠라기 시노의 팬이라면 급격한 변화가 낯설긴 해도 특별한 간식처럼 여길 수 있지만,

그녀를 처음 만난 독자라면 이게 원래 이 작가 스타일인가?”라고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독자라면 나오키 상 수상작인 호텔 로열이나 그녀의 데뷔작인 빙평선을 추천합니다.

그 작품들을 읽은 뒤 둘이서 살아간다는 것을 다시 펼친다면

처음 읽을 때는 보이지 않던 그녀만의 특별한 매력을 확실히 포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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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인 드래곤 RHK 형사 해리 보슈 시리즈 14
마이클 코넬리 지음, 한정아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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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수살인사건 전담반 소속이지만 지원 차 주류점 살인사건 조사에 나섰던 보슈는

사건 배후에 중국 폭력조직 삼합회가 있다고 추정하고 유력한 용의자를 쫓습니다.

하지만 얼마 후 경고 전화가 날아들고 홍콩에 사는 딸 매들린이 납치되는 사태가 벌어지자

보슈는 패닉에 빠진 상태에서 모든 일을 내팽개치고 홍콩으로 날아갑니다.

보슈를 원망하는 전처 엘리노어와 함께 매들린 찾기에 나서지만 단서는 희미할 뿐이고

겨우 찾아낸 매들린의 흔적은 절망적인 추측만 낳게 했으며

결정적인 순간에 벌어진 낯선 자들과의 총격전은 돌이킬 수 없는 참극으로 종결되고 맙니다.

삼합회의 심기를 건드린 대가로 소중한 딸을 끔찍한 위기에 몰아넣었다고 자책하는 보슈 앞에

진실은 전혀 예상 못한 형태로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해리 보슈 시리즈’ 14번째 작품 나인 드래곤은 앞선 작품들과는 사뭇 결이 달라 보입니다.

두 가지 이유 때문인데, 하나는 작품 속 메인 무대가 홍콩이라는 점이고,

또 하나는 사건의 중심에 보슈의 가족 전처 엘리노어, 딸 매들린 - 이 있다는 점입니다.

LA경찰국에서 할리우드 경찰서로, 다시 경찰국 강력계로 좌천과 복귀를 반복했지만

지금까지 보슈와 그의 적들의 행동반경은 LA나 라스베이거스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 멀리 떨어져 살면서 1년에 두 번 정도 밖에 못 보고 지내는 13살 딸 매들린이

삼합회가 연루된 납치사건의 당사자로 등장한 것은 꽤 낯설게 느껴지는 설정이었습니다.

 

살인사건, 삼합회, 딸의 납치 등 이야기의 스케일은 결코 작지 않지만

사건의 전개나 해결 등 전체적인 구도만 따지면 스릴러치곤 비교적 심플한 내용입니다.

하지만 나인 드래곤은 어떤 전작들보다 보슈의 내밀한 개인사,

특히 그의 삶과는 결코 어울리지 않는 가족의 이야기를 집중 조명한 덕분에

훨씬 더 그의 내면을 깊숙이 들여다볼 수 있는 작품입니다.

10년 전, 4살도 안 된 매들린과 처음 만났을 때 자신의 피붙이를 만난 격정보다는

당혹감과 불길한 예감을 가졌음을 회상하는 대목은 보슈의 심정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존재도 모르고 살았던 딸을 처음 만난 순간 모든 것이 달라졌다.

그 순간 그는 자신이 구원을 받은 것과 동시에 저주를 받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중략)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올 것임을, 악의 세력이 딸을 찾아내고 그를 치기 위한 방법으로

딸을 이용할 것임을 알고 있었다. 지금이 바로 그런 날이었다. (p221)

 

제프리 디버의 엣지에서도 가족은 가장 취약한 지점, 즉 모서리(edge)로 표현됩니다.

가족과 담을 쌓고 살아온 보슈가 그 어떤 스릴러 주인공보다 더 분노하고 폭발하는 모습은

어쩌면 지독하게도 역설적이라서 더 긴장감 넘치게 느껴졌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하지만 이토록 급박하고 위기일발인 상황에서 보슈는 크고 작은 실수를 저지르고 맙니다.

 

읽는 내내 유독 자주 눈에 띄는 단어가 바로 실수입니다.

만회할 수 있는 실수도 있지만 그럴 기회조차 잡을 수 없는 치명적인 실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그 치명적 실수 중 하나가 보슈에게 평생 잊히지 않을 심각한 내상을 남긴 점입니다.

그래서인지 사건은 해결됐어도 보슈가 떠안은 내상과 그걸 극복해야 할 앞날을 떠올리면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면서도 마음이 천근만근 무거워질 따름입니다.

 

나인 드래곤은 다른 작품들과 연결된 인물이나 사건들이 꽤 많이 등장하는 편입니다.

(이는 해리 보슈 시리즈대부분 작품에서 발견할 수 있는 아주 흥미로운 설정입니다.)

자신에게 딸이 있다는 사실을 전처 엘리노어에게 처음 들은 보슈가 4살 매들린과 마주하곤

엄청난 충격과 그만큼의 감동에 빠지는 모습은 로스트 라이트엔딩에 등장합니다.

, 주류점 살인사건의 피해자인 70대 중국인 사장은 앤젤스 플라이트에서

거대한 폭동의 와중에 보슈와 짧지만 인상적인 만남을 가진 적이 있는 인물입니다.

더불어, ‘링컨 차를 타는 변호사의 주인공이자 보슈의 이복형제인 변호사 미키 할러는

작품 막판에 아주 잠시 등장할 뿐이지만 그야말로 빛나는 카메오 역할을 맡았으며,

시인의 주인공 잭 매커보이는 실물대신 이름으로 특별출연을 하고 있습니다.

라스트 코요테에서 상관 폭행으로 정직을 당한 보슈의 심리상담을 맡았던 히노조스 박사는

이번에는 매들린을 보살피기 위한 역할을 맡아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LA가 내려다보이는 베란다에서 재즈와 맥주로 하루의 노고와 분노를 달래던 보슈였지만

가족이 생긴 이상 어쩌면 그의 베란다에서의 고독과 낭만은 더는 볼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건 그 나름대로 보슈의 새로운 삶에 대한 궁금증을 낳게 만들기도 합니다.

특히 이 작품의 후속작을 아직 안 읽은 독자라면 더욱 강렬한 궁금증을 갖게 될 것입니다.

2년 전, ‘나인 드래곤후속작인 드롭을 이미 읽어서 보슈의 미래를 잘 알고 있는 저조차도

나인 드래곤을 덮는 순간 새삼 보슈의 미래가 궁금해지고 기대감을 갖게 됐으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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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키지
정해연 지음 / 황금가지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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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키지여행의 관광버스 짐칸에서 한 아이의 토막 시체가 발견된다.

경찰은 휴게소에서 사라진 아버지 김석일을 용의자로 특정하고 그를 추적한다.

김석일은 예상 밖으로 빠르게 검거되는데,

검거되기 직전 어떤 빌라에 침입해 한 남자를 중태에 빠뜨릴 정도로 난도질한다.

아이의 시체에서 이전부터 지속적으로 폭력에 노출되었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사건의 잔혹성으로 전 국민이 주목하는 가운데

담당 형사 박상하는 자신의 비극적인 가정사를 어쩔 수 없이 자꾸만 떠올리게 된다.

한편 김석일과 이혼하고 떠났던 전처 정지원이 돌아오며 사건은 급물살을 타기 시작하는데...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2013년에 출간된 더블이후 네 번째로 만난 정해연의 작품 패키지입니다.

한국 장르물 작가 가운데 Top Pick까지는 아니어도 신간소식에 귀 기울여지는 작가인데

어린 아이가 토막난 사체로, 그것도 관광버스 짐칸에서 발견된다는 충격적인 설정 때문에

지금 죽으러 갑니다이후 2년여 만에 다시 한 번 그녀의 작품과 만나게 됐습니다.

 

사실, 어린 아이가 희생자인 장르물은 여러 가지로 불편한 심정을 자아내기 마련인데,

그것도 너무나 참혹한 방식으로 살해되고 유기된 탓에

도대체 무엇이 그런 범죄의 원인이 된 것인지, 누구의 소행인지 더욱 궁금해졌습니다.

하지만 줄거리 소개대로 범인은 일찌감치 아이의 아버지 김석일로 특정됩니다.

아이가 오랫동안 폭력에 노출됐던 정황들이 드러난 것은 물론

그 폭력이 막장에 가까웠던 부모의 결혼생활에 기인했다는 점도 주위의 진술로 밝혀지면서

모든 정황이 김석일이 범인임을 가리키지만 그는 자백은커녕 입을 완전히 다물어버립니다.

 

아이를 참혹하게 살해할 만한 정확한 범행 동기는 무엇인가?

왜 굳이 다른 사람들의 이목을 끌 수 있는 휴게소와 버스를 범행 공간으로 이용한 것인가?

그가 입을 꾹 다문 것은 무슨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서인가?

 

작가는 박상하의 입을 통해 아이를 죽인 건 김석일 뿐일까?”라는 의문을 자주 제기합니다.

, 김석일 외에도 적잖은 주변인물들이 공범 내지는 방치의 역할을 했다는 뜻인데

마지막에 드러난 진실과 무관하게 이 의문이야말로 작가가 말하고 싶었던 주제로 보입니다.

알면서도 외면했거나, 자신의 이익을 위해 방치했거나,

물리적인 폭력만 휘두르지 않았을 뿐 실은 공범이나 다름없는 자들에 대한 분노라고 할까요?

 

300페이지 남짓한 분량이라 금세 마지막 장까지 완주하긴 했지만,

솔직히 말하면, 정해연의 작품이라고 하기엔 어설프거나 아쉬운 대목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표지 뒷면의 카피와 초반부 감식반장의 진술 속에 분명 일곱 토막이라고 돼있던 사체가

몇 페이지 뒤에 등장하는 부검 결과지에는 여섯 덩어리로 표기된 점이라든가,

동행했던 관광객들이 못 알아볼 정도로 얼굴이 참혹하게 짓이겨진 아이의 시신을

굳이 어머니 정지원에게 확인하라고 권하는 이해 못할 박상하의 태도는 애교(?)라고 쳐도

미스터리 서사 전반에서 다소 어이없는 아마추어 식 오류가 종종 눈에 띄었기 때문입니다.

 

그중에서도 살인사건을 맡은 형사라면 당연히 해야 될 일 - 범행과 유기 수법 조사,

시신의 정체 확인, 혐의점이 있는 자의 범행당일 행적 조사 등 - 을 방기한 것은 물론

미스터리 독자 수준만 돼도 금세 눈치 챌 일을 마치 대단한 발견인 양 깨우치는 등

박상하의 행적은 담당형사라기보다는 범인 프로필 분석가수준에 머물고 있습니다.


, 본인 역시 가족폭력의 상처를 지닌 것으로 설정된 탓에

박상하는 수사 내내 객관적인 태도 대신 김석일 가족에게 자신의 가족을 투영하곤 하는데

이 역시 형사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들을 망각하게 만들었을 뿐 아니라

어떻게 봐도 주제를 도드라지게 하기 위한 작위적인 설정이란 생각입니다.

가장 궁금했던 범행 이면의 진실에 대한 막판 설명은 너무 비현실적이라 웃음이 나왔고

범행 수법과 과정 역시 그런 게 가능한가?”라는 반발심만 일으키는 변명처럼 느껴졌습니다.

몇몇 결정적 장치들은 끝까지 회수되지 못한 채 의문으로 남아버려서 허탈하기까지 했습니다.

 

나름 기대가 많았던 작가의 작품이라 어쩌면 실망감이 더 크게 느껴졌을지도 모르지만

패키지는 설정만 강렬했을 뿐 정작 미스터리는 수준 이하라는 생각입니다.

물론 취향에 따라 의견이 다를 수도 있으니 다른 독자들의 서평도 참고해보시기 바랍니다.

(제 평점은 악평에 가깝지만 인터넷 서점엔 별 5개를 준 서평이 훨씬 더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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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너를 다시 만난다
나카타 에이이치 지음, 주자덕 옮김 / 아프로스미디어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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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 야구 시합 도중 머리에 공을 맞고 정신을 잃은 11살 가바타 렌지.

하지만 그가 병원에서 깨어난 건 무려 20년의 시간이 흐른 뒤인 2019년이며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31살 어른의 몸이란 걸 확인하곤 충격에 빠집니다.

더구나 약혼자라 자칭하며 그 앞에 나타난 니시조노 코하루는 더더욱 놀라운 말을 합니다.

11살의 가바타 렌지의 의식이 20년이 지난 31살 가바타 렌지의 몸에 들어왔듯

31살 가바타 렌지의 의식은 20년 전인 11살 가바타 렌지의 몸에 들어가 있는 상태라는 것.

충격적인 건, 과거로 간 31살 가바타 렌지는 그 당시 발생한 일가족 살인사건을 저지하거나

저지하진 못하더라도 진범의 정체를 알아내려 한다는 점입니다.

 

제목, 표지, 북트레일러 모두 다분히 라노벨 느낌이라 관심 밖의 작품으로 제쳐놓았지만

분명 낯익은 작가의 이름 때문에 출판사 소개글을 살피다가 그 낯익음의 이유를 알게 되곤

두 번 고민할 것도 없이 독서목록에 포함시킨 작품입니다.

 

그의 이름이 낯익었던 건 메리 수를 죽이고의 네 명의 필진 중 하나였기 때문인데,

나머지 세 명의 필진은 오츠이치, 야마시로 아사코, 에치젠 마타로입니다.

그리고 이 네 명은 실은 모두 같은 인물, 즉 오츠이치의 분신들입니다.

오츠이치가 호러 미스터리에 주력한 필명이라면,

야마시로 아사코는 괴담소설을, 나카타 에이이치는 연애소설을 위한 필명입니다.

취향과 거리가 좀 먼 SF 타임리프물이지만 미스터리 구도도 흥미로워 보이고

오츠이치의 또 다른 매력을 맛볼 수 있다는 기대감에 첫 장을 펼쳤고

단숨에 마지막 장까지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고백하자면, 초반에는 살짝 고전했던 게 사실입니다.

우선, 의식이 바뀐 두 명의 가바타 렌지 중 한 명이 너무 어린 11살로 설정된 탓인지

예상했던 것보다 이야기가 (청소년소설처럼) 가볍게 읽힌 점이 가장 큰 이유였고,

타임리프의 작동 원리가 다소 어렵고 복잡하게 느껴진 게 두 번째 이유였습니다.

작가는 여러 번에 걸쳐 어린 렌지어른 렌지의 의식 교환 전반에 대해 설명하지만

그걸 제대로 이해하기까진 꽤 오랜 시간이 걸린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조금씩 이해하는 과정 역시 이 작품의 매력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어른의 몸에 들어온 어린 렌지는 만 하루 동안 많은 일을 겪습니다.

약혼녀 코하루로부터 자신이 어떤 과정을 거쳐 31살에 이르렀는지 알게 된 렌지는

다시 11살로 돌아가더라도 이미 정해진 운명대로 살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실망하지만

동시에 11살로 돌아가 자신이 해야 할 일때문에 어깨가 무거워지기도 합니다.

특히 일가족 살인사건의 진실을 알아내야 하고

삶의 밑바닥까지 추락한 코하루를 구제하여 그녀의 연인이 돼야 한다는 사실은

그에겐 두려움이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는 운명처럼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한편 11살의 어린 렌지몸에 들어가 일가족 살인사건 당일을 맞이한 어른 렌지

어떻게든 살인사건을 저지하거나 진범의 정체라도 파악하려 분투합니다.

그 진실을 기억한 채 31살 몸으로 돌아가면 사건의 진상을 세상에 알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그는 어린 렌지가 겪을 시련과 혼란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기 위해

11살의 자기 자신에게 보내는 메모와 녹음을 준비하기도 합니다.

 

이 작품에서 가장 인상적인 점은 이미 일어난 과거는 바꿀 수 없는가?’라는 화두였는데,

이미 정해진 자신의 운명을 바꾸고 싶다는 욕망과 함께

그럴 경우 현재의 상황들이 모두 소멸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을 느낀 어린 렌지의 처지는

타임리프 스토리의 전형적인 상황이긴 해도 마지막까지 팽팽한 긴장감을 느끼게 만듭니다.

 

미스터리 자체는 어지간한 독자라면 그 진상을 일찌감치 파악할 수 있지만

그보다는 사방에 뿌려진 크고 작은 단서들이 막판에 이르러 깔끔하게 회수되는 걸 보면서

오츠이치의 정교한 설계에 여러 번 놀라곤 했습니다.

또 역자 겸 편집자가 언급했듯 렌지와 코하루의 잔잔한 멜로 감성도 재미있게 읽혔는데,

아마 이런 설정 때문에 이 작품이 나카타 에이이치의 필명으로 발표된 것으로 보입니다.

 

초반의 가벼움만 잘 극복한다면, 그리고 다소 복잡한 타임리프의 원리만 이해한다면

뒤로 갈수록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이 작품의 매력을 한껏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애초 영화 시나리오로 시작됐다가 제작이 무산되면서 소설로 전환됐다고 하는데,

개인적으론 영화로 만들어진다면 무척 흥미진진한 작품이 될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이 작품 덕분에 나카타 에이이치 필명으로 나는 존재가 공기’(2019)가 출간된 걸 알게 됐는데

오츠이치의 팬인 이상 그 작품도 놓치지 못할 것 같습니다.

물론 가벼운 연애소설이라면 좀 고민이 되겠지만 일단 기대해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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