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모든 책 미스터리
제프리 디버 지음, 오토 펜즐러 엮음, 김원희 옮김 / 북스피어 / 2020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15년 황금가지에서 출간된 페이스 오프는 역대급 앤솔로지 스릴러 작품입니다.

마이클 코넬리, 데니스 루헤인, 리 차일드, 제프리 디버 등 22명의 스타 작가들이 짝을 이뤄

대표 캐릭터들의 콤비 플레이를 그린 11편의 중단편이 수록된 환상적인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마이클 코넬리의 해리 보슈와 데니스 루헤인의 패트릭 켄지가 한 팀이 되어 활약한다면

스릴러 독자 입장에선 생각만 해도 가슴 뛰는 설정 아닐까요?

 

이처럼 하나의 테마 아래 여러 작가의 작품을 수록한 선집(選集)을 뜻하는 앤솔로지는

좀처럼 보기 드문 희귀본 같은 느낌을 주기 때문에 언제든 관심을 끌기 마련인데,

그런 점에서 을 주제로 한 미스터리 앤솔로지 세상의 모든 책 미스터리

장르물 애독자가 아니더라도 귀가 솔깃해질 수밖에 없는 화제성 작품임에 분명합니다.

 

링컨 라임 시리즈의 제프리 디버를 필두로 ‘CSI 과학수사대로 유명한 맥스 앨런 콜린스,

20세기 중반에 활약했던 마이크 해머 시리즈의 미키 스필레인,

한국에선 오픈 시즌으로 소개된 C. J. 박스 등 아홉 작가의 여덟 작품이 수록돼있습니다.

 

을 주제로 하고 있지만 수록된 작품마다 다채롭고 독특한 이야기가 담겨있습니다.

헌책방을 무대로 한 괴짜 책 도둑의 기이한 사연,

경찰과 마피아 모두 그 행방을 찾으려 애쓰는 한 마피아 두목의 비밀장부,

책을 아끼고 사랑하지만 그 때문에 치명적 약점을 잡히고 마는 잔인한 갱단 두목,

살아남기 위해 거짓으로 꾸며낸 가공의 책 한 권 때문에 평생 발목을 잡히고 마는 유태인,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야 에 관한 아버지의 오랜 비밀을 알게 되는 아들 등

수록된 여덟 편 모두 제각각 이 주인공인 독특한 이야기들을 풀어내고 있습니다.

 

직접 작품으로 만난 적이 있는 작가는 세 명 정도밖에 안 되지만

그와 관계없이 이 주인공인 미스터리란 이유만으로 충분히 흥미로운 시간을 즐겼습니다.

물론 작품마다 만족도의 편차는 있었지만

이런 앤솔로지가 아니라면 만날 기회가 없을 것이 분명한 특별한 작품들이기에

첫 장을 열자마자 마지막 장까지 한 번도 쉬지 않고 완주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인상적이었던 건 첫 번째 수록작인 세상의 모든 책들에서 거론되는 책에 대한 화두들인데,

책장에 갇힌 책들’, ‘종이책과 전자책’, ‘헌책방의 향수등을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책이 전자기기 안에서 빛을 내며 살 수 있게 된 세상에서 절판된다는 게 무슨 의미일까?”

자조 섞인 주인공의 이 한마디 한탄은 개인적으로 무척 공감되는 대목이었는데,

어쩌면 종이책만이 적자’(嫡子)라고 여기는 낡고 고루한 생각인지도 모르겠지만

종이책과 서점이 없는 세상을 떠올리는 건 아직까진 SF영화만큼이나 비현실적이거나

절대 벌어져선 안 될 끔찍한 일처럼 여겨지는 게 사실입니다.

 

책에 관한 미스터리’, 그것도 여러 작가의 을 한꺼번에 만끽할 수 있는 진수성찬입니다.

장르물 독자가 아니더라도 한번쯤 그 맛을 음미해볼 것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순수의 영역
사쿠라기 시노 지음, 전새롬 옮김 / arte(아르테) / 2014년 6월
평점 :
절판


사쿠라기 시노의 한국 출간작 8편 중 장편은 유리갈대’, ‘둘이서 살아간다는 것’(2021),

그리고 순수의 영역까지 단 3편뿐입니다.

사쿠라기 시노의 매력은 주로 연작단편집과 단편집에서 만끽한 편이지만

그녀의 장편은 다소 호흡은 완만해도 이야기는 더 처연해서 색다른 힘을 갖고 있기도 합니다.

그리고, ‘순수의 영역은 어떤 작품들보다 호흡의 완만함과 처연함이 강했던 작품입니다.

 

- 서예가 류세이

화려한 학벌과 어머니의 열성에도 불구하고 애매한 재능에 가로막힌 서예가.

어느 날, 서예에 천부적인 재능을 갖췄지만 발달장애를 지닌 스무 살 준카를 만나면서

서예에 새롭게 눈 뜨는 계기를 맞지만 동시에 준카에게 미묘한 감정을 갖게 됩니다.

 

- 보건교사 레이코

무능한 남편 류세이 대신 가계를 책임지며 치매에 걸린 시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유능한 교사이자 내조와 간병을 마다않는 완벽한 모습이지만,

실은 오랫동안 감정이란 걸 잊은 채 살아온 무미건조함으로 가득 찬 인물입니다.

그런 그녀가 준카의 오빠이자 도서관장인 노부키를 만나면서 미묘한 감정에 휩싸입니다.

 

- 도서관장 노부키

할머니가 사망하자 발달장애를 지닌 준카를 돌보게 됐지만 그로 인해 생활은 엉망이 됩니다.

어머니의 재능을 물려받은 준카를 알아본 류세이가 그녀를 서예교습소에 드나들게 하는데

그로 인해 알게 된 그의 아내 레이코에게 특별한 감정을 품기 시작합니다.

 

- 발달장애인 준카

발달장애를 지녔지만 그 때문에 오히려 순수함이 빛나는 스무 살 여자.

류세이의 교습소에 드나들게 된 그녀로 인해 여러 사람의 관계가 복잡하게 얽히게 됩니다.

시기도, 질투도, 사랑도, 미움도 모르는 그녀의 순수함이

역설적이게도 다른 사람들의 마음속에 그 감정들을 뿌리내리게 만든 것입니다.

 

이토록 길게 인물소개를 한 이유는 이 작품의 핵심이 인물소개 안에 다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고백하자면, 띠지조차 안 읽는 버릇 때문에 이 작품의 테마가 질투란 걸 전혀 몰랐는데,

서평을 쓰기 전에 인물들을 하나씩 머릿속으로 정리하다 보니

사람과 사람 사이에 관계가 생겨날 때 언제나 곁에 자리하는 감정이란 작가의 설명이

새삼 확실하게 각인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다만 사쿠라기 시노가 그린 질투는 결코 통속적이지도, 경박하지도 않습니다.

 

한계에 부딪힌 서예가 류세이가 천재적인 재능을 지닌 스무살 연하 준카에게 느끼는 감정엔

서예가로서의 부러움은 물론 노골적이진 않더라도 욕망에 가까운 그 무엇이 혼재돼있습니다.

무능한 남편에 대한 한심함도, 치매 시어머니에 대한 귀찮음이나 미움도 품지 않던 레이코는

감정이란 것과 차단된 채 살아온 자신이 노부키에게 흔들리는 걸 자각하곤 무척 당황합니다.

말하자면 가족이지만 그 어떤 감정도 공유하지 않던 동거인에 불과하던 그들은

노부키와 준카 남매의 등장으로 작지만 깊은 파동을 겪게 된 것입니다.

반면, 오래된 연인 대신 레이코에게 흔들리는 노부키는 특별히 류세이를 의식하진 않습니다.

, 노골적으로 들이대진 않지만 아주 조심스럽게, 천천히 자기감정에 충실할 따름입니다.

 

그리고 이들의 한복판에 그 모든 관계를 야기한 순수함의 상징 준카가 있습니다.

류세이와 레이코와 노부키 모두 자신의 본심을 드러내지 않고 은밀하게 감정을 키우는 반면

준카는 생각이든 감정이든 거침없이 있는 그대로 말과 행동으로 표현합니다.

그리고 이런 언행은 준카 본인의 의도와 상관없이 세 사람의 감정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사랑을 키우게 만들고, 질투에 물들게 만들고, 의심과 의문을 증식시키는 형태로 말이죠.

 

사쿠라기 시노의 작품들을 만날 때마다 늘 그랬듯,

읽는 내내 좀처럼 멈추지 않는 파문과 함께 뭔가 쏟아질 듯 꽉 찌푸린 하늘이 떠올랐습니다.

등장인물 누구도 평범하고 소소한 행복대신 잔뜩 일그러진 삶을 끌어안고 있지만,

어쩌면 그것은 속내와 사정을 감춘 채 살아가는 보통사람들의 솔직한 모습일지도 모릅니다.

누구나 감추고 싶은 상처나 은밀한 감정이 있고, 자학에 가까운 질투를 느끼기 마련이지만,

그런 것들을 다 드러내고 살기엔 자기 자신도, 세상의 눈길도 너무 가혹하기 때문입니다.

점잔을 빼면서도 실은 세속적인 욕망을 동시에 품은 내면을 치밀하게 그려낸다.”는 언급은

비단 번역가만이 느끼는 사쿠라기 시노의 장점은 아닐 것입니다.

 

다만, 그녀의 한국 출간작을 모두 읽은 입장에서 아쉬움이 많이 남은 작품이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작가 본인의 설명이나 평론가의 해설이나 역자 후기를 꼭 읽어보고 싶을 정도로

이야기의 형태나 정서가 (전작들에 비해) 손에 잡힐 것처럼 다가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초반만 해도 주요 인물들의 첫 등장과 함께 숨이 막힐 것처럼 팽팽한 긴장감을 느꼈는데

오히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긴장감은 이완됐고 모호한 느낌만 잔뜩 들러붙기 시작했습니다.

번역 역시 아쉬움의 이유 중 하나였는데 원작 자체의 문제일 수도 있지만

좀처럼 한 눈에 들어오지 않는 애매한 문장들이 곳곳에 보였던 게 사실입니다.

지금까지 그녀의 작품을 읽어오면서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의외의 상황이었습니다.

 

한때 어업과 탄광으로 부흥했으나 지금은 쇠락한 훗카이도 동부의 구시로의 사계절은

등장인물들의 처연한 심리들을 더욱 깊고 선명하게 만드는 중요한 배경입니다.

작가 스스로 나고 자란 그 공간에 대한 애착이 빚어낸 디테일한 풍경들은

인물들 사이의 애매모호한 관계와 감정들을 유추할 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힌트라고 할까요?

개인적으로 사쿠라기 시노에게 푹 빠져든 가장 큰 이유는 어쩌면 구시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언젠가 꼭 한 번 그곳의 사계절을 직접 만나보고 싶은 욕심이 간절할 정도니까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무도 없는 밤에 피는
사쿠라기 시노 지음, 박현미 옮김 / arte(아르테) / 2014년 6월
평점 :
품절


일본 미스터리 작가 중 개인적으로 다섯 손가락 안에 꼽는 사쿠라기 시노의 작품입니다.

새해(2021) 들자마자 신작 둘이서 살아간다는 것이 출간된다는 소식에

그동안 아끼고 아끼느라 안 읽고 모셔뒀던(?) 그녀의 작품 두 편을 연이어 읽기로 했습니다.

인터넷 서점의 책 정보에는 아무도 없는 밤에 피는2013년에 출간된 걸로 소개돼있지만

실은 2009년에 발표된 단편집 恋肌과 수록작이 거의 비슷합니다. (두 편 외에 동일)

책 출간을 통한 공식 데뷔가 2007년의 빙평선인 점을 감안하면

아무도 없는 밤에 피는은 사쿠라기 시노의 초기작이라고 봐도 무방한 작품입니다.

 

270여 페이지의 분량에 7편의 단편이 수록돼있는데,

대략 40페이지 안팎의 짧은 분량들이지만 그 안에 담긴 무게감은 장편에 못지않습니다.

신작 둘이서 살아간다는 것을 제외하고 한국에 출간된 그녀의 작품 7편 중 5편을 읽었으니

어느 정도 사쿠라기 월드에 익숙해졌을 만도 하지만

여전히 그녀의 작품은 가슴을 찌르는 통증과 처연한 여운을 첫 경험마냥 강렬히 각인시켰습니다.

 

그녀의 작품 대부분의 주인공은 훗카이도에 살거나 그곳과 인연을 맺은 여자들입니다.

또 대부분 잘 해야 평균, 아니면 그 이하의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중입니다.

(여기서 평균이란 때론 지극히 현실적인 처지를 기준으로 한 개념이기도 하고,

때론 심리적이거나 정신적인 상태를 기준으로 한 개념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사쿠라기 시노의 여자들은 무척 강합니다.

그리고 그 강함의 가장 큰 원천은 그녀 이야기의 주된 공간적 배경인 훗카이도,

그중에서도 쇠락한 항구도시이자 여름엔 안개로, 겨울엔 추위로 둘러싸인 구시로입니다.

 

바다에서 살아있는 생물처럼 다가오는 해무 때문에 도시 전체가 갯내에 휘감겨 있었다.”

그녀의 단편집 빙평선에서 숨 막힐 듯한 구시로의 여름을 압축적으로 묘사한 문장입니다.

그에 반해 겨울의 구시로는 바람과 동토가 전부인 황무지에 가까운 분위기입니다.

더는 과거의 명성을 이어가지 못하는 쇠락한 항구도시의 여름과 겨울은

설령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에 크고 작은 영향을 미칩니다.

 

사쿠라기 시노의 여자들은 이 공간과 시간 속에서 나름 잘 견뎌내고 잘 버텨냅니다.

때론 내일이란 게 없는 것처럼 자신을 놓아버린 인물들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들의 엔딩은 대체로 강하다는 인상을 깊게 심어주곤 합니다.

아무도 없는 밤에 피는에 등장하는 여주인공들 역시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중국에서 시집온 뒤로 말문을 닫아버렸지만 자신만의 심지를 놓치지 않는 호아하이,

무능한 기둥서방에게 모든 것을 빼앗기면서도 결국 사소한 호의에 무너지는 치즈루,

스트립쇼 댄서지만 자신의 춤에 긍지를 갖고 있으며 거리낌없이 새 출발을 감행하는 시오리,

실직한 남편 때문에 천직을 버렸지만 끝내 자신의 길을 되찾는 나나코 등

암담하거나 상심 가득한 상황 속에서도 끝내 자기를 잃지 않는 캐릭터들로 가득합니다.

 

강한 여자들과 달리 남자들은 이 쇠락의 부정적 기운을 고스란히 받은 것처럼 묘사되는데

무능하거나 무기력하거나 여자들에게 그 약점들을 숨기느라 포악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허울과 말빨만 좋은 기자였지만 결국 기둥서방을 자처한 야비한 남자,

기둥서방도 모자라 살인을 저지르고도 모든 것을 여자에게 의지하는 남자,

실직 후 열패감과 열등감에 몰린 나머지 생계를 맡은 아내를 증오하는 남편이 그들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사쿠라기 시노의 작품을 여성 편향적이라고 오해해선 안 되는데

나름 견고한 애정을 간직하거나 마지막 희망을 놓지 않는 건실한남자들도 있기 때문입니다.

 

때로 사쿠라기 시노의 소설을 관능적이라고 언급하는 경우가 있는데,

실제로 거의 매 작품마다 남녀가 몸을 섞는 장면이 나오는 건 사실이지만

그것은 성애(性愛)라기보다는 고통스럽거나 건조하거나 무의미한 분위기를 띠곤 합니다.

이 작품 속의 섹스 역시 몸을 섞는다기보다 사포로 문지르듯 상처만 남는 경우가 많은데,

상대를 완전히 잡아먹거나 반대로 상대에게 완전히 잡아먹혀야만

비로소 쾌감이든 자괴감이든, 만족감이든 열패감이든 느낄 수 있다는,

위태롭고 무모한 확신에 빠진 남녀들의 자학에 가까운 몸짓이 대부분입니다.

결코 관능적일 수 없는, 오히려 인물들의 심연을 민낯 그대로 드러내는 행위라고 할까요?

 

사쿠라기 시노의 작품은 딱히 출간순서대로 읽지 않아도 됩니다.

단편집이나 연작집이 많은 탓도 있지만

어느 작품을 먼저 읽든 나중에 읽든 일관성 있는 정서와 분위기를 맛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의 경우 나오키상 수상작인 호텔 로열을 통해 사쿠라기 시노를 알게 됐고

그 뒤로 정신없이 사쿠라기 월드에 빠져들었는데,

혹시 이 작품이 고개를 갸웃하게 만들었다면 호텔 로열을 꼭 읽어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곧 출간될 둘이서 살아간다는 것은 제목부터 따뜻함과 훈훈함을 담고 있는 것 같아서

왠지 사쿠라기 시노 스타일과 거리가 멀어 보이는 작품인데

아무래도 그녀 고유의 정서가 배제됐을 리는 없을 테니 오히려 더 관심을 갖게 됩니다.

아직 안 읽은 순수의 영역을 읽으며 그녀의 신작이 배송되기를 기다리려고 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허수아비 - 사막의 망자들 잭 매커보이 시리즈
마이클 코넬리 지음, 이창식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9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마이클 코넬리의 스탠드얼론 명품인 시인의 주인공 잭 매커보이의 12년만의 복귀작입니다.

해리 보슈가 등장하진 않지만 시인해리 보슈 시리즈’ 10편인 시인의 계곡의 전작이자

그 자체로 마이클 코넬리 월드의 대표작 중 한 편으로 꼽을 수 있는 작품이라

주인공 잭 매커보이의 귀환은 해리 보슈의 팬들에게도 반가운 소식일 수밖에 없습니다.

출판사는 이 작품을 “‘시인 3부작중 마지막 편이라고 소개하고 있는데,

실은 시인과는 전혀 무관한 내용이며, 따라서 잭 매커보이 시리즈 2이 맞는 표현입니다.

(매커보이는 해리 보슈 시리즈’ 7편인 다크니스 모어 댄 나잇에도 잠깐 등장한 적 있는데,

특종에 목을 맨 얄미운 3류 기자캐릭터로 설정돼서 다소 아쉬웠던 기억이 있습니다.)

 

허수아비시인이후 12년이 지난 시점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시인이라는 별명의 연쇄살인마 사건으로 스타덤에 오른 콜로라도의 기자 잭 맥커보이는

자신이 열망하던 LA 타임스에 스카웃되어 사건 담당기자로서 활약해왔지만,

신문 산업의 불황이 몰고 온 해고 열풍은 고액 연봉자인 그에게도 여지없이 들이닥쳤습니다.

매커보이는 자신을 엿 먹인 LA 타임스에게 더 큰 빅 엿을 선물하고 퇴사하기로 결심하는데,

마침 그 계획에 딱 맞는 원죄(冤罪) 사건이 그 앞에 툭 던져집니다.

살인 혐의로 체포된 소년을 조사하던 매커보이는 진범이 따로 존재한다는 단서를 발견하곤

그에 관한 기획기사를 통해 LA 타임스에게 한방 먹이기로 마음먹은 것입니다.

하지만 취재를 시작하자마자 목숨마저 위태로워지는 심각한 위기에 빠지게 되고

그는 12년 전 시인에서 씁쓸하게 헤어졌던 FBI요원 레이철 월링에게 도움을 청합니다.

 

기자로서 해고라는 최후의 벼랑 끝에 몰린 매커보이의 마지막 한방을 위한 분투,

12년 만에 재회한 매커보이와 함께 다시금 연쇄살인마를 쫓게 된 FBI요원 레이철의 활약,

그리고 트라우마에서 비롯된 끔찍한 변태성욕자이자 연쇄살인마인 허수아비의 반격 등

흥미롭고 긴장감 넘치는 설정 덕분에 시인못잖은 매력을 발산하는 작품입니다.

 

사실, 매커보이는 정의를 위해 펜을 치켜든 기자는 절대 아닙니다.

그는 특종에 집착하고, 그 특종을 소설로 써서 부와 명예를 거머쥐려는 통속적인 인물입니다.

자신을 내친 LA 타임스에게 복수하려 시작된 취재가 연쇄살인마 추격으로 발전된 것 역시

정의감보다는 기자로서의 본능적인 욕구와 특종에의 열망에 기인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매력이 반감되거나 얄밉게만 보이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오히려 더 현실감 있는 캐릭터, , 욕심도 많지만 겁도 많은 보통 기자로 그려진 덕분에

독자 입장에선 그의 언행 하나하나에 더 리얼하게 공감할 수 있게 됩니다.

 

매커보이가 주인공이지만 개인적으론 레이철 월링에게도 많은 관심이 갔던 게 사실인데,

시인의 계곡’, ‘에코 파크’, ‘혼돈의 도시허수아비직전의 대부분의 작품들에서

파트너인 해리 보슈와 남녀로서 깊은 관계까지 맺고 끊기를 반복했던 레이철이

12년 만에 다시 만난 매커보이와 심상치 않은 기운을 내비친 게 가장 큰 이유였습니다.

특히 직전 작품인 혼돈의 도시말미에서 보슈와 꽤 좋은 분위기를 남겼던 탓에

레이철이 매커보이의 12년 만의 대시를 거부하지 않는 장면은 다소 의외였던 게 사실입니다.

 

매커보이와 레이철은 연쇄살인마는 물론 FBI의 방해까지 극복해야 하는 처지에 놓이는데,

특히 초반부터 공개된 범인이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여 두 사람을 바짝 뒤쫓는 대목에선

분명히 주인공들이 다치지 않을 거란 걸 짐작하면서도 내내 위기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고,

눈엣가시 같은 레이철을 쳐내기 위한 FBI의 의도적 방해는 격분을 자아내곤 했습니다.

물론 두 사람 모두 허수아비가 쳐놓은 덫 때문에 심각한 위기를 겪게 되는데

역설적으로 그 장면들은 둘의 콤비 플레이가 가장 짜릿하게 빛나는 하이라이트이기도 합니다.

 

처음부터 범인이 공개된 탓에 딱히 큰 반전이 없어서 살짝 맥이 빠진 점과

막판에 진범을 지목하는 장면이 잘 이해되지 않은 점만 빼면 무척 재미있게 읽은 작품이지만

딱 한 가지, (크게 문제 삼을 부분이 있던 건 아니지만) 번역의 아쉬움을 얘기하고 싶습니다.

해리 보슈+@ 다시 읽기내내 특정 번역가의 작품마다 뭔가 덜컥거리는 느낌을 받곤 했는데

조직명이나 인물들의 말투가 다른 번역가의 작품들과 너무 다르게 묘사되기도 했고

두세 번 되읽어도 정확히 의미가 전달이 안 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허수아비의 경우 매커보이가 소속된 LA 타임스의 내부 상황을 디테일하게 그린 장면들이나

범인인 웨슬리 카버가 근무하는 콜로케이션 업체를 설명하는 대목에서 자주 멈칫하곤 했는데

원작 자체가 그런 탓일 수도 있지만 쉽게 이해되지 않는 문장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시리즈를 연이어 읽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여러 번역가의 문장을 비교할 수밖에 없었는데,

저만의 유별난 투정인지 다른 독자들도 비슷한 생각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2020년도 이제 며칠 안 남았는데 아직 해리 보슈 시리즈의 신간 소식은 들리지 않습니다.

해리 보슈+@ 다시 읽기도 이제 세 편(‘나인 드래곤’, ‘드롭’, ‘블랙 박스’)밖에 안 남았는데

언제쯤 보슈의 새 이야기 소식이 들려올지 그저 난망할 따름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진실에 갇힌 남자 스토리콜렉터 89
데이비드 발다치 지음, 김지선 옮김 / 북로드 / 2020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4년 전 끔찍한 살인마에게 가족을 잃은 에이머스 데커는 살아있으면 14살이 됐을 딸 몰리의 생일을 맞아 오랜만에 고향 오하이오 벌링턴을 찾습니다. 하지만 데커를 기다리고 있던 건 말기 암 탓에 최근 출소한 메릴 호킨스였습니다. 13년 전, 첫 살인사건을 맡았던 신참 형사데커가 파트너 메리 랭커스터와 함께 체포했던 인물로, 당시 네 명을 살해한 죄로 종신형을 받았던 호킨스는 벌링턴을 찾은 데커에게 자신의 무죄를 주장합니다. 얼마 안 가 데커는 자신과 메리가 13년 전 초동 수사과정에서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른 것을 깨닫곤 여러 가지 곤란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호킨스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개인적인 재수사를 결심합니다. 하지만 재수사가 시작되자마자 연이어 사건 주변의 인물들이 살해되기 시작합니다.

 


모든 것을 기억하는 남자에이머스 데커의 다섯 번째 작품입니다. 자신의 가족을 살해한 범인을 응징하고 무고한 사형수를 구해냈던 데커가 이번에는 13년 전 첫 살인사건 수사에서 자신이 저지른 엄청난 오류를 바로잡는 일에 나섭니다. 오랜 시간이 지난데다 현재 FBI 소속인 탓에 데커의 수사는 안팎으로 어려움을 겪습니다. FBI는 개인적인 수사를 중단하고 팀에 합류할 것을 강요하고, 관할서인 벌링턴 경찰서의 관료들은 소송까지 감행하며 데커의 수사를 막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사건과 함께 데커를 괴롭히는 것은 자꾸 삑사리가 나는 기억력의 문제입니다. 전작인 폴른에서부터 시작된 그의 뇌와 기억력의 이상 징후는 오랜만에 돌아온 고향에서 느낀 처연한 슬픔과 뒤섞이면서 불길한 징후를 발산합니다. 아내와 딸의 시신을 발견했던 영상이 끝없이 머릿속에서 재생되는가 하면, 수시로 예전에 살았던 집을 찾아가선 스스로 상처를 헤집곤 하는 것입니다. “과거에 살든가 현재에 살든가 둘 중 하나야. 양쪽을 동시에 살 수는 없어.”라는 독백은 여전히 가족의 죽음에 죄책감을 느끼는 그의 안쓰러운 내면이 잘 드러난 대목입니다.

 

13년 전 파트너 메리와 현재 FBI 파트너 알렉스 재미슨이 본의 아니게 수사에서 빠지면서 데커는 홀로 사건을 떠맡을 위기에 처하지만, 생각지도 못한 지원군의 도움을 받게 됩니다. 그 지원군은 시리즈 2괴물이라 불린 남자에서 사형수 신분이었다가 데커 덕분에 무죄를 입증 받아 자유의 몸이 된 전직 미식축구 선수 멜빈 마스입니다. 시리즈 3편인 죽음을 선택한 남자에서도 데커를 도운 경력이 있는 멜빈은 이번에는 단순한 엄호를 넘어 거의 파트너 수준의 맹활약을 펼쳐서 눈길을 끕니다.

 

이렇듯 흥미진진한 스토리와 캐릭터들이 총출동한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꽤 야박한 평점을 준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뭉뚱그려 이야기하면 납득하기 어려운 억지스런 설정들입니다.

 

(여기부터는 스포일러까진 아니지만 약간 상세한 내용들이 소개됩니다)

 

우선, 데커와 메리가 데뷔전에서 저지른 실수들은 아무리 그들이 신참이고 13년 전의 일이라 해도 납득하기 힘든 것들입니다. ‘실수를 위한 실수로 보일 정도로 억지스러운 것도 문제지만, 더 황당한 건 당시 검사, 변호사, 과학수사팀까지 모두 그 실수를 놓쳤다는 점입니다.

또 현재 시점의 연쇄살인은 13년 전 진범의 소행이 분명한데, 문제는 진범이 자신에게 불리한 단서를 쥔 인물들은 죄다 죽이면서도 정작 가장 위험한 인물인 데커는 제대로제거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사건 종료 후 불필요하게 경찰과 FBI의 관심을 끌지 않기 위해서였을 것이라는 데커의 아전인수식 해석은 진범의 행동을 설명하기엔 너무 부족해보였던 게 사실입니다.

마지막으로, 무리하게 사건의 외연을 확장한 점입니다. 호킨스의 무고함을 밝히고 데커의 잘못된 수사를 바로잡는 것이 목표였던 이야기지만, 막판에 이르러서는 FBI 본팀이 출동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사건으로 그 외연이 확장되는데, 문제는 그 확장이 전혀 그럴듯해 보이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이런 불만은 죽음을 선택한 남자에서도 똑같이 느꼈는데, 그의 캐릭터와 안 맞는 뜬금없는 이야기의 확장은 오히려 거부감을 느끼게 했습니다.

 

좋아하는 시리즈인 건 분명하지만 작품마다 호불호가 갈린 것도 사실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살인사건이나 무고사건 등 일반적인 사건을 다룬 작품들은 마음에 들었지만, 국가기관이 개입할 만큼 스케일이 큰 작품들은 모두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다음 작품에서는 부디 데커에게 어울릴 만한 일반적인 사건이 다뤄지길 바랄 뿐입니다.

 

사족으로... 캣 콜링(111p), 홀마크 영화(176p), 맥스교도소(323p) 등 각주가 필요한 단어가 종종 있었는데, 맥락 상 무슨 뜻인지 눈치 챌 순 있었지만 그래도 설명 한마디 없던 건 이해가 안 됐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