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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랑의 달
나기라 유 지음, 정수윤 옮김 / 은행나무 / 2020년 10월
평점 :
주로 장르물만 편식하던 제가 이 작품에 눈길을 빼앗긴 건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하나는 ‘2020년 서점대상 수상작’이란 점인데,
그동안 읽은 수상작들을 떠올려보면 호불호가 갈리긴 했어도
나오키 상과 함께 믿음이 가는 보증수표로 여긴 덕분에 늘 관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는, 제목과 표지에서 ‘사쿠라기 시노의 향기’가 느껴졌기 때문인데,
非미스터리 일본 작가 가운데 개인적으로 무척 좋아하는 그녀 작품의 분위기가
(아무 근거도 없지만) 왠지 이 작품의 제목과 표지에서 물씬 풍겼다는 뜻입니다.
한없이 쓸쓸하고 애틋하고 어찌할 수 없는 운명을 다룬 이야기가 예지(?)됐다고 할까요?
아홉 살의 가나이 사라사는 부모와의 이별로 인해 세상의 붕괴를 맞이합니다.
이모 집에 얹혀살면서 사라사의 심신은 나날이 피폐해져만 갑니다.
그런 사라사 앞에 또래들로부터 소아성애자로 의심받는 대학생 사에키 후미가 나타납니다.
그리고 그날부터 사라사와 후미는 두 달 가까이 ‘행복한 동거’를 만끽합니다.
상식과는 거리가 먼 자유분방한 사라사와 교과서적이고 틀에 박힌 생활이 몸에 밴 후미는
물과 기름 같으면서도 묘하게 잘 섞였고, 자유와 해방감을 만끽하는 일상을 구가합니다.
그러나 기어이 그들을 찾아낸 세상은 ‘소아성애 납치범과 피해아동’이란 낙인을 찍은 뒤
각각 보육시설과 소년원으로 보냄으로써 그 행복을 산산조각 냅니다.
그리고 15년 후, 24살이 된 사라사가 극적으로 후미와 재회합니다.
하지만 세상은 여전히 그들을 ‘소아성애 납치범과 피해아동’으로만 기억할 뿐이며,
그들의 재회는 자신들의 의지와 무관하게 서로에게 또다시 날카로운 상처를 남기기 시작합니다.
이야기의 가장 큰 뼈대는 “치유 불가능한 잔인한 상처를 지닌 남녀의 사랑이야기”입니다.
출판사는 “세상의 편견 속에서 서로를 구원하고 자아를 되찾은 두 사람의 이야기.”라고
조금은 더 고상하고 차원 높은 사랑 이야기로 포장하여 소개하고 있지만,
실은 사라사와 후미의 사랑도, 그들의 자아, 구원 과정도 전혀 고상하거나 아름답지 않습니다.
오히려 각자의 상처는 세상을 등지고 싶을 만큼 고통스럽기 짝이 없으며,
서로가 만나고 헤어지고 구원을 주고받는 과정 역시 험난한 가시밭길에 다름 아닙니다.
사라사와 후미의 인생을 붕괴시켜버린 세상의 편견은 너무나도 가혹하고 잔인하지만,
실은 그 편견이란 것이 일반인이라면 누구나 ‘상식으로’ 여길 수밖에 없는 것이라서
두 사람에겐 더더욱 바닥 모를 막장처럼 절망적으로 다가왔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자신들이 아무리 아니라 한들 ‘소아성애 납치범과 피해아동’의 딱지는 지울 수 없는 일이고,
결국, 세상 어디에도 그들이 마음 편히 안식을 취할 곳은 없었다는 뜻입니다.
“나와 후미의 관계를 표현할 적당한 말, 세상이 납득할 말은 없다.
거꾸로 같이 있어서는 안 되는 이유는 산더미처럼 많다. 우리가 이상한 걸까.” (p356)
누구도 “후미는 좋은 사람이며, 난 아무 피해도 안 입었다.”는 사라사의 말을 믿지 않습니다.
늘 그녀를 배려하려 애쓰거나 아니면 그녀가 입은 피해를 상상하며 몸서리치기만 합니다.
하지만 어느 쪽도 사라사에게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고통만 가중시킬 뿐입니다.
두 사람이 함께 보낸 두 달의 진실은 오로지 두 사람만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두 사람을 지켜보는 일은 무척이나 힘들고 마음 무거운 일임에 틀림없습니다.
또, 주위에 실제로 사라사와 후미 같은 경우가 있다면
저 역시 작품 속 타인들과 마찬가지로 편견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이 분명하단 생각에
더더욱 그들을 애틋한 마음으로만 바라볼 수 없었던 게 사실입니다.
그들의 사랑은 다분히 플라토닉한 것이어서 기껏 손잡는 게 최선의 애정표현일 뿐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들만의 소박한 세상과 미래를 꿈꿉니다.
설령 그것이 도망자처럼 평생을 안주하지 못하는 불편하고 힘든 여정이라도 말입니다.
“우리가 안주할 수 있는 땅이, 과연 있을까.
설령 그런 곳이 없다 해도, 어디든 가자고 나는 생각한다. (중략)
어디로 흘러가든, 나는 이제 혼자가 아니니까.” (p366)
제목과 표지만 보고 품은 아무 근거 없는 바람과 예지였지만
기대 이상으로 사쿠라기 시노와 닮은꼴의 분위기를 맛볼 수 있어서 참 좋았습니다.
이런 사랑도 있구나, 이런 관계도 있구나, 하면서 많은 것을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데뷔 이후 꾸준히 BL소설에 주력했다는 작가의 이력이 신기하게 여겨질 정도였는데,
그쪽은 분명 제 취향이 아니지만, 사라사와 후미의 이야기를 닮은 후속작 소식이 들려온다면
언제라도 머뭇거림 없이 그녀의 작품에 흠뻑 취하고 싶은 욕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