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체 찾는 아이들
시모무라 아쓰시 지음, 최재호 옮김 / 북플라자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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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모무라 아쓰시는 2019년 출간된 생환자’(피니스아프리카에)로 처음 만났습니다.

열려 있는 폐쇄 공간인 거대 설산을 배경으로 한 산악 미스터리라는 독특한 장르인데다

누가 범인?”이란 미스터리와 함께 살아남은 자의 슬픔 또는 죄책감도 함께 다룬 작품이라

꽤 깊은 인상을 받은 작품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시체 찾는 아이들생환자와는 결도, 느낌도 전혀 다른 작품이라 살짝 놀랐습니다.

끔찍한 연쇄살인범, 그가 어딘가 감춰놓은 시체, 시체 찾기에 나선 중고생 유튜버 등

등장인물과 사건 설정만 봐도 전작과는 서사의 무게감이나 톤 모두 너무 달랐기 때문입니다.

불면 훌훌 날아갈 것 같은 가벼운 문장들 때문에 다소 아쉬움이 느껴지긴 했지만

말초적인 재미 면에서는 강한 조미료가 뿌려진 듯 흥미진진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8명의 여성을 잔혹하게 살해한 22살 아사누마 쇼고가 법정에서 충격적인 진술을 합니다.

7명은 자신이 죽인 게 맞지만 미즈모토를 살해한 진범들은 따로 있다면서

추억의 장소에 진범 한 명의 시신을 숨겼다. , 이제 시체 찾기의 시작이다!”라고 말입니다.

미즈모토 살해범은 따로 있다고 주장하다가 강제 휴직을 당한 여형사 오리카사 노조미는

자신의 추리가 맞았다며 애초 용의자로 꼽은 3인조에 대한 독자적인 수사에 나섭니다.

한편, 등교 거부중인 중학생 유튜버 소타는 같은 또래의 인기 유튜버 니시얀으로부터

여름방학을 맞아 우는 아이의 숲으로 시체 찾기에 나서자는 제안을 받곤 흥분합니다.

또 한 명의 인기 유튜버 고교생 세이, 숲 인근에 사는 소녀 카호가 가세한 가운데

들뜬 기분으로 시체 찾기에 나섰던 소타는 얼마 안 가 끔찍한 악몽과 마주하게 됩니다.

 

이야기는 두 갈래로 전개됩니다.

경찰과 전문가들이 아사누마의 폭탄발언을 연쇄살인마의 헛소리라며 무시하는 상황에서

수사 초기부터 미즈모토만은 아사누마의 희생자가 아니라고 확신했던 노조미가

탐문과 압박을 통해 재수사를 하며 갖은 위기를 겪다가 진실을 밝히는 이야기가 한 축이고,

우는 아이의 숲으로 시체 찾기에 나선 중고생 유튜버들의 이야기가 나머지 한 축입니다.

인터넷과 유튜브에선 아사누마가 언급한 추억의 장소가 어디인지 찾아내려는 움직임과 함께

이른바 시체 찾기의 광풍이 벌어지기 시작했는데,

말하자면, 한쪽에선 진범 찾기가, 한쪽에선 시체 찾기가 벌어지는 형국인 셈입니다.

 

어디에서 접점을 이룰지 도저히 예상할 수 없던 두 축의 이야기는

(약간 짐작은 할 수 있었지만) 막판에 이르러 교묘한 트릭과 함께 하나로 합쳐집니다.

다소 가볍고 쉬워 보이는 노조미의 수사도 아쉬웠고,

시체 찾기라는 미션과 달리 10대 성장통에 주력한 듯한 유튜버들의 이야기도 아쉬웠지만

두 축의 이야기가 합쳐지는 대목에서는 제법 팽팽한 긴장감을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막판에 밝혀진 아사누마 폭탄발언의 진위와 미즈모토 사건의 진실 역시

사뭇 놀라운 전개와 엔딩으로 이어진 덕분에

일반적인 연쇄살인마 미스터리와는 차별화된 맛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가장 아쉬웠던 점을 두 가지 정도만 꼽자면,

우선은 서사와 이야기의 두께가 분량에 비해 많이 가볍게 느껴진 점입니다.

노조미의 수사는 너무 쉬워 보였고 그녀가 겪는 위기도 그리 심각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유튜버들의 시체 찾기는 캐릭터 소개를 위한 기초공사에 과도한 분량을 할애한 나머지

지루하거나 사족 같은 내용이 많아 보였던 게 사실입니다.

또 한 가지는 툭하면 등장하는 작가의 열정적인 주제 강의입니다.

연쇄살인마의 탄생과 범행심리, 살아남은 자들의 고통, 10대의 불안정한 내면 등

작가는 적잖은 분량을 통해 주제와 메시지를 설파하곤 하는데,

사실 이런 대목들은 공감보다는 강요처럼 읽힐 때가 더 많았다는 생각입니다.

 

다소 아쉽긴 했지만 그래도 꽤 독특한 재미를 지닌 작품인 건 분명합니다.

, 이야기 자체보다 설정의 힘이 더 매력적인 작품이란 생각인데,

이런 인상은 전작인 생환자에서도 비슷하게 받았던 터라

작가의 기발한 상상력이 다음에는 어디로 튈지 궁금해지는 것도 사실입니다.

아직 한국에는 생환자와 이 작품밖에 소개가 안 된 상황인데

일단은 관심을 두고 신작 소식을 기다려봐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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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 Isaka Kotaro Collection
이사카 고타로 지음, 김소영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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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오랫동안 책장에 방치해둔 이사카 고타로의 마왕을 큰맘 먹고 꺼내들었습니다.

사실 그의 작품을 큰맘 먹고읽는다는 것 자체가 뜬금없는 소리인 건 분명하지만

사신 치바그래스호퍼이후로 절망(?)하거나 중도 포기한 작품들이 적지 않았던 탓에

이 사람은 나하곤 안 맞는구나.”라는 생각에 의욕조차 생기지 않았던 게 사실입니다.

올해 출간됐지만 아직 못 읽은 작품들을 허겁지겁 읽다가 예기치 않게 잠시 짬이 난 덕분에

어찌어찌 책장을 뒤적거렸는데 하필 눈에 밟힌 게 이사카 고타로의 마왕이었습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야기가 아니라 모호한 선문답이나 화두를 읽은 느낌이었습니다.

분명히 등장인물이 있고, 줄거리도 있고, 엔딩도 있지만 무엇 하나 선명하게 남은 것 없이

내가 지금 뭘 읽은 건가?”라는, 스스로 위축감이 드는 자문만 잔뜩 남았습니다.

 

무능한 정치판에 대한 혐오, 미국으로 대표되는 강대국에 대한 비굴한 열패감,

생각이란 걸 할 줄 모르는 청춘과 비겁한 기성세대만 존재하는 암담한 현실 등

그야말로 정체된 채 미래라곤 보이지 않는 일본의 현실이 이야기의 배경으로 깔립니다.

그런 현실을 살아가는 주인공 안도와 준야, 두 형제는 각기 다른 초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형 안도는 상대방의 입에서 자신이 의도하는 말이 나오게 만드는 복화술의 능력을,

동생 준야는 가위바위보든 경마든 1/10 확률 안에선 절대 지지 않는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매사에 생각이 너무 많아 고찰마라는 별명까지 얻은 안도는

최근 정치판과 사회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파시즘 경향에 공포를 느낍니다.

특히 급진적 민족주의를 표방하며 폭발적 인기를 얻고 있는 정치인 이누카이는

안도에겐 경계해야 할 파시즘의 화신이며 어떻게 해서라도 저지해야 할 대상입니다.

 

자신의 초능력으로 이누카이의 폭주를 막아보려던 안도가 급작스럽게 사망한지 5년 후.

형 안도와 달리 생각이나 사색보다는 직감과 감성에 의존하던 준야는

어느 날 자신이 1/10 확률 안에선 절대 지지 않는 초능력을 갖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총리가 된 이누카이가 자위대의 무력 보유를 포함한 개헌을 밀어붙이고 있는 상황에서

준야는 자신의 초능력을 이용하여 자기 나름의 싸움을 준비하기로 결심합니다.

 

정리 자체가 어려운 내용이라 줄거리가 주절주절 한없이 길어지고 말았는데,

문제는 실제 내용은 (위의 줄거리와 달리) 초능력 형제의 파시즘 투쟁 이야기도 아니고

(어떤 형태가 됐든) 정치나 민족주의에 관한 이야기는 절대 아니라는 점입니다.

오히려 그와는 무관한 소소한 일상들이나 신기한 초능력 해프닝이 더 눈에 띄고

가끔은 비현실적인 장면들이 툭툭 튀어나와 책읽기를 혼란스럽게 만듭니다.

오죽하면 조연이든, 소품이든, 단순 해프닝이든 뭐라도 사소한 게 등장하기만 하면

주제를 상징하거나 은유하는 게 아닐까 싶어 잔뜩 노려보기도 했지만

결국 뭐가 뭔지 모르는 채 책장을 넘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나마 형 안도는 엉터리라도 좋으니 자신의 생각을 믿고 대결한다면 세상은 바뀐다.”라며

자신의 소신과 함께 파시즘에 대한 공포나 반감이라도 드러내지만,

동생 준야는 도무지 현실을 살아가는 인물로 보이지도 않았고

내재된 꿈이나 희망, 목표가 뭔지도 통 알 수 없는 인물이었습니다.

 

서평을 쓰기 전에 누구라도 이 작품에 대해 친절하게 설명해주기를 바라면서

출판사의 소개글과 다른 독자들의 서평도 두루 훑어봤지만

역시 알 수 없다.”는 제 나름의 결론을 바꿀 만큼 특별한 정보를 얻진 못했습니다.

변화하는 시대 속에서 개인들이 나름의 방식으로 세상과 맞서는 이야기라는 설명도,

황야일지 푸른 하늘일지 모르는 미래를 꿈꾼다는 엔딩 부근의 묘사도,

결국 마왕은 이누카이일까, 군중일까, 아니면 안도나 준야 자신일까?”라는 소개글도

어느 하나 조금도 이해할 수 없는 언급들이었습니다.

 

지금까지 내가 읽어 본 적이 없는 이야기를 읽고 싶다는 마음으로 썼다.”는 작가의 변(),

이사카 고타로의 최고의 소설로 평가했다는 문학평론가들과 편집자들의 호평도

이해력 부족한 독자에겐 전부 궤변으로만 들린 게 사실입니다.

언젠가 기회가 돼서 다시 한 번 찬찬히 읽게 된다면

어쩌면 지금의 이 무지몽매함과 몰이해에서 조금은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최근 이사카 고타로에게 연타로 좌절당한 걸 생각하면 그럴 여지는 거의 없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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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 쇼맨과 이름 없는 마을의 살인 블랙 쇼맨 시리즈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최고은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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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마요는 황망한 마음으로 고향으로 향한다. 평범하고 조용한 마을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은 삽시간에 주민들의 일상을 잠식한다. 존경받는 교사였던 아버지의 죽음은 마요로 하여금 아버지의 제자이자 자신의 동창생인 중학교 친구들을 용의자로 주시하게끔 만든다. 게다가 마술사로 미국에서 활동하느라 10년간 연락이 끊겼던 삼촌 다케시가 갑자기 나타나 경찰과 별도로 독자적인 조사를 제안하자 마요는 당황한다. 태어난 뒤 단 두 번밖에 본 적 없는 데다 어딘가 4차원 괴짜 같은 삼촌이 영 미덥지 않지만 발군의 추리력과 능란한 화술, 그리고 마술사다운 신비한 능력을 직접 목격한 마요는 결국 그와 함께 아버지의 죽음을 조사하기로 결심한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전직 마술사이자 뛰어난 추리력과 사기꾼 같은 화술을 지닌 블랙 쇼맨다케시는 여느 괴짜 탐정을 능가하는 희한한 캐릭터입니다. 어려서부터 초능력에 관심을 가진 끝에 미국으로 가 사무라이 젠이라는 유명 마술사가 됐고, 적어도 두세 수를 내다보는 뛰어난 추리력과 상상력을 지녔으며 아무 것도 모르면서 화술 하나만으로 상대의 비밀과 이력을 캐내는 사기꾼 같은 기질도 있고, 심지어 거리낌 없이 도청, 속임수, 위증 등 불법적인 수단으로 경찰을 바보로 만들어가면서 마요의 아버지이자 자신의 형님인 에이치의 죽음을 단독 조사하는 무모함도 지닌 인물입니다. 재미있는 건 아무도 못 말리는 그의 빈대(?) 캐릭터인데, 상대가 조카든 경찰이든 안면몰수하고 밥값에 커피값까지 덤터기씌우려는 그의 뻔뻔함은 히가시노 특유의 코믹 코드를 맛볼 수 있는 독특한 설정이기도 합니다.

 

주인공이자 다케시의 조카인 마요 입장에선 이런 사악한 삼촌이 마음에 들 리 없지만 무능하고 열의 없어 보이는 경찰에 대한 어쩔 수 없는 차선책일 수밖에 없기도 합니다. 하지만 뜬금없고 맥락 없어 보이던 다케시의 조사가 논리정연하게 정리되는 걸 지켜보면서 마요는 점차 다케시의 괴짜 탐정 노릇에 녹아들게 되고 동시에 유력한 용의자인 자신의 동창생들을 다케시 못잖게 예의주시하기 시작합니다.

 

존경받던 교사의 의문의 죽음, 그를 만났거나 만날 계획이 있던 동창생들의 수상쩍은 행태들, 그리고 어딘가 어수룩해 보이지만 동시에 위화감으로 가득한 살인사건 현장 등 이 작품 속의 미스터리는 다소 쉬워 보이면서도 미묘하게 얽히고설킨 구도를 띠고 있습니다. 모두가 범인일 수도 있지만 동시에 모두가 범인일 리 없는 애매모호한 정황 속에서 좌충우돌 콤비 캐릭터인 삼촌 다케시와 조카 마요는 경찰을 능가하는 맹활약을 펼칩니다.

 

작품 속 배경인 마요의 고향은 코로나의 충격으로 극심한 침체를 겪는 중으로 설정됐습니다. (코로나 이후 구상된 작품인지, 구상 중인 이야기에 코로나를 끼워넣은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코로나가 창궐한지 만 1년이 안된 걸 감안하면 엄청난 순발력으로 집필된 걸 알 수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550여 페이지의 분량을 생산한 걸 보면 히가시노 게이고에게 공장장이란 별명이 괜히 붙은 게 아니란 걸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다만, 미스터리의 규모나 깊이로 볼 때 다소 과도한 분량으로 보인 게 사실이고, 다케시와 마요의 분투는 매력적이지만 막판에 밝혀진 진실은 그리 충격적이지 않아서 앞서 전개된 꽤 많은 분량의 이야기들이 조금은 허전하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사소한 점일 수도 있지만 한 가지만 더 언급하면, 살인범에게 아버지를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호텔에서 아침저녁 식사를 꼬박꼬박 챙겨 먹고 삼촌 다케시와 투닥거리는 마요의 모습은 목에 걸린 가시처럼 살짝 불편해 보인 게 사실입니다. 피살자가 아버지가 아니라 각별한 중학교 은사 정도였다면 납득할 수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어쩌면 이 작품의 진짜 매력은 블랙 쇼맨다케시의 캐릭터가 전부라고도 할 수 있는데, (출판사 소개에 따르면) 앞으로 블랙 쇼맨 시리즈가 이어질 예정이라 그런지 다케시의 모든 전사(前史)가 이 작품에서 소개되진 않아서 아직 그에 대한 궁금증과 호기심이 잔뜩 남아있는 게 사실입니다. 다케시의 조카인 마요가 앞으로도 계속 콤비 주인공으로 등장할지는 모르겠지만 독자 입장에선 괴짜 탐정 다케시를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흥미롭겠다는 생각입니다. 마치 한 편의 우당탕탕 마술쇼를 본 듯한 책읽기였는데 만일 후속작이 나온다면 다케시의 또 다른 매력을 만끽할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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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엄마 케이스릴러
이지은 지음 / 고즈넉이엔티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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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에 출간된 장르물 가운데 아직 못 읽은 작품들을 살펴보다가 발견한 비행엄마입니다.

제목은 분명 본 적 있는데 실은 뒤늦게 비행(非行) 맛에 빠져든 엄마들 이야기로 오해하곤

제 취향과는 거리가 먼 작품이라 여겼던 기억이 있습니다.

말하자면 아줌마들의 코믹한 좌충우돌 스토리가 떠오르는 제목이었다고 할까요?

하지만 케이스릴러 시리즈중 한 편인 행복배틀을 읽고 쓴 서평의 댓글을 통해

이 작품은 엄마들의 악인전이라는 걸 알게 된 뒤 불쑥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20년 만에 돌아온 엄마들의 숙명적인 대결이라는 출판사 홍보카피대로

이 작품에는 수십 년 동안 증오, 복수심, 업보를 가슴에 새겨온 엄마들이 등장합니다.

소중한 딸을 잃은 뒤 그 복수를 위해 험난한 삶을 마다하지 않았던 엄마,

살인범 누명을 쓴 것은 물론 그로 인해 딸까지 빼앗겨야 했던 엄마,

그리고 운명처럼 자신이 품게 된 남의 딸을 20년 동안 애지중지 키워온 엄마 등이 그들인데,

현재에 이르러 이들은 서로를 향해 피비린내 나는 살육전을 벌이기 시작합니다.

 

20년 동안 등을 지고 살았던 엄마 청옥으로부터 갑작스런 호출을 받은 영도,

20년 동안 소식을 모르던 친모 준미가 옥중에서 보낸 편지를 받고 놀라는 영도의 딸 호연,

그리고 이들 사이에 공통분모처럼 존재하는 미스터리한 인물 미셸 등이 이야기를 끌고 가지만

그 외에도 적잖은 수의 인물이 등장하는 작품입니다.

 

270페이지에 불과한 내용임에도 등장인물만 보면 거의 500~600페이지 급 서사에 맞먹는데

그래서인지 어느 지점부터는 메모가 필요해 보일 정도로 무척이나 복잡한 구도를 이룹니다.

거기다가 이 모든 참극의 출발점과 그것의 증식 과정을 그린 과거 이야기들 역시

우연과 필연이 피할 수 없는 운명처럼 겹치고 또 겹쳐 뒤얽힌 실타래마냥 구성돼있는데

덕분에 짧은 분량임에도 꽤 높은 집중력을 요구하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화해는 말할 것도 없고 타협의 여지라곤 조금도 없이

상대를 죽여야만 가슴에 얹힌 무거운 돌덩이를 덜어낼 수 있다고 확신하는 엄마들의 폭주는

때론 안타까움을 자아내기도 하고, 때론 서릿발처럼 소름을 돋게 만들기도 하는데,

그들 나름대로 자신의 감정과 소명에 충실하게 살육전에 임하다 보니

누가 선이고 누가 악이라고 확실히 규정할 수 없다는 점이 무엇보다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개인적으로 아쉬운 건 제목분량이었는데,

이토록 무겁고 잔혹한 서사에 어울리는 제목이 붙었다면

좀더 스릴러 독자들의 눈길을 끌 수 있었을 것 같아 무척 아쉬웠고,

등장인물이나 스토리에 어울리는 좀더 두툼한 분량이었다면

읽는 동안 느낀 혼란을 조금은 줄일 수 있지 않았을까, 해서 역시 아쉬웠습니다.

소개글에 따르면 이 작품이 작가의 데뷔작인 걸로 보이는데,

이만큼 탄탄한 필력이라면 다음 작품을 기대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다만, 다음 이야기 역시 이만한 서사라면 좀더 분량에 욕심을 내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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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랑의 달
나기라 유 지음, 정수윤 옮김 / 은행나무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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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로 장르물만 편식하던 제가 이 작품에 눈길을 빼앗긴 건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하나는 ‘2020년 서점대상 수상작이란 점인데,

그동안 읽은 수상작들을 떠올려보면 호불호가 갈리긴 했어도

나오키 상과 함께 믿음이 가는 보증수표로 여긴 덕분에 늘 관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는, 제목과 표지에서 사쿠라기 시노의 향기가 느껴졌기 때문인데,

미스터리 일본 작가 가운데 개인적으로 무척 좋아하는 그녀 작품의 분위기가

(아무 근거도 없지만) 왠지 이 작품의 제목과 표지에서 물씬 풍겼다는 뜻입니다.

한없이 쓸쓸하고 애틋하고 어찌할 수 없는 운명을 다룬 이야기가 예지(?)됐다고 할까요?

 

아홉 살의 가나이 사라사는 부모와의 이별로 인해 세상의 붕괴를 맞이합니다.

이모 집에 얹혀살면서 사라사의 심신은 나날이 피폐해져만 갑니다.

그런 사라사 앞에 또래들로부터 소아성애자로 의심받는 대학생 사에키 후미가 나타납니다.

그리고 그날부터 사라사와 후미는 두 달 가까이 행복한 동거를 만끽합니다.

상식과는 거리가 먼 자유분방한 사라사와 교과서적이고 틀에 박힌 생활이 몸에 밴 후미는

물과 기름 같으면서도 묘하게 잘 섞였고, 자유와 해방감을 만끽하는 일상을 구가합니다.

그러나 기어이 그들을 찾아낸 세상은 소아성애 납치범과 피해아동이란 낙인을 찍은 뒤

각각 보육시설과 소년원으로 보냄으로써 그 행복을 산산조각 냅니다.

그리고 15년 후, 24살이 된 사라사가 극적으로 후미와 재회합니다.

하지만 세상은 여전히 그들을 소아성애 납치범과 피해아동으로만 기억할 뿐이며,

그들의 재회는 자신들의 의지와 무관하게 서로에게 또다시 날카로운 상처를 남기기 시작합니다.

 

이야기의 가장 큰 뼈대는 치유 불가능한 잔인한 상처를 지닌 남녀의 사랑이야기입니다.

출판사는 세상의 편견 속에서 서로를 구원하고 자아를 되찾은 두 사람의 이야기.”라고

조금은 더 고상하고 차원 높은 사랑 이야기로 포장하여 소개하고 있지만,

실은 사라사와 후미의 사랑도, 그들의 자아, 구원 과정도 전혀 고상하거나 아름답지 않습니다.

오히려 각자의 상처는 세상을 등지고 싶을 만큼 고통스럽기 짝이 없으며,

서로가 만나고 헤어지고 구원을 주고받는 과정 역시 험난한 가시밭길에 다름 아닙니다.

 

사라사와 후미의 인생을 붕괴시켜버린 세상의 편견은 너무나도 가혹하고 잔인하지만,

실은 그 편견이란 것이 일반인이라면 누구나 상식으로여길 수밖에 없는 것이라서

두 사람에겐 더더욱 바닥 모를 막장처럼 절망적으로 다가왔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자신들이 아무리 아니라 한들 소아성애 납치범과 피해아동의 딱지는 지울 수 없는 일이고,

결국, 세상 어디에도 그들이 마음 편히 안식을 취할 곳은 없었다는 뜻입니다.

 

나와 후미의 관계를 표현할 적당한 말, 세상이 납득할 말은 없다.

거꾸로 같이 있어서는 안 되는 이유는 산더미처럼 많다. 우리가 이상한 걸까.” (p356)

 

누구도 후미는 좋은 사람이며, 난 아무 피해도 안 입었다.”는 사라사의 말을 믿지 않습니다.

늘 그녀를 배려하려 애쓰거나 아니면 그녀가 입은 피해를 상상하며 몸서리치기만 합니다.

하지만 어느 쪽도 사라사에게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고통만 가중시킬 뿐입니다.

두 사람이 함께 보낸 두 달의 진실은 오로지 두 사람만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두 사람을 지켜보는 일은 무척이나 힘들고 마음 무거운 일임에 틀림없습니다.

, 주위에 실제로 사라사와 후미 같은 경우가 있다면

저 역시 작품 속 타인들과 마찬가지로 편견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이 분명하단 생각에

더더욱 그들을 애틋한 마음으로만 바라볼 수 없었던 게 사실입니다.

 

그들의 사랑은 다분히 플라토닉한 것이어서 기껏 손잡는 게 최선의 애정표현일 뿐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들만의 소박한 세상과 미래를 꿈꿉니다.

설령 그것이 도망자처럼 평생을 안주하지 못하는 불편하고 힘든 여정이라도 말입니다.

 

우리가 안주할 수 있는 땅이, 과연 있을까.

설령 그런 곳이 없다 해도, 어디든 가자고 나는 생각한다. (중략)

어디로 흘러가든, 나는 이제 혼자가 아니니까.” (p366)

 

제목과 표지만 보고 품은 아무 근거 없는 바람과 예지였지만

기대 이상으로 사쿠라기 시노와 닮은꼴의 분위기를 맛볼 수 있어서 참 좋았습니다.

이런 사랑도 있구나, 이런 관계도 있구나, 하면서 많은 것을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데뷔 이후 꾸준히 BL소설에 주력했다는 작가의 이력이 신기하게 여겨질 정도였는데,

그쪽은 분명 제 취향이 아니지만, 사라사와 후미의 이야기를 닮은 후속작 소식이 들려온다면

언제라도 머뭇거림 없이 그녀의 작품에 흠뻑 취하고 싶은 욕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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