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계곡 RHK 형사 해리 보슈 시리즈 10
마이클 코넬리 지음, 이창식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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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계곡은 좀 복잡한 족보(?)를 가진 작품입니다.

, 이 족보를 어느 정도 알고 읽어야 제 맛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족보 설명을 겸한 서평이라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해리 보슈 시리즈’ 10

전작인 9로스트 라이트10시인의 계곡에서 보슈의 신분은 사립탑정입니다.

이것저것 구속 받을 일도 없고 사건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로운 신분이긴 하지만,

역으로 그만큼 경찰이나 FBI 등 외부의 공격과 압력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시인의 후속작

시인은 덴버 출신 기자 잭 매커보이가 주인공인 작품으로 보슈가 등장하지 않는 작품입니다.

하지만 시인의 사건과 주요인물들이 시인의 계곡에 연결되므로 선행필수인 작품입니다.

8년 만에 다시 나타나 엽기적인 살인행각을 벌이는 연쇄살인마 시인

8년 전 그 시인을 끝까지 추격했지만 체포에는 실패했으며

오히려 그 사건의 후유증 때문에 험지로 좌천됐던 FBI요원 레이철 월링이 그들입니다.

시인의 계곡은 말하자면 보슈와 레이철이 함께 연쇄살인마 시인을 쫓는 이야기입니다.

다만, ‘시인의 주인공인 잭 매커보이는 이 작품에 등장하지 않습니다.

 

블러드 워크다크니스 모어 댄 나잇의 연장선상의 작품

블러드 워크는 심장이식수술을 받고 은퇴한 FBI요원 테리 매케일렙이 주인공인 작품이고,

보슈 시리즈’ 7편인 다크니스 모어~’는 보슈와 매케일렙이 투톱으로 활약하는 작품입니다.

시인의 계곡이 이 두 작품의 연장선상인 이유는 매케일렙이 등장하기 때문인데,

다만, 매케일렙은 보슈를 사건으로 끌어들이는 역할만 할뿐 실제로 등장하진 않습니다.

그는 이미 작품이 시작되기 전에 심장마비로 사망한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 매케일렙의 미망인이 보슈에게 남편의 죽음의 진실을 찾아달라고 요청을 했고,

보슈는 매케일렙이 남긴 시인에 관한 메모를 토대로 그의 죽음의 진실을 찾기로 결심합니다.

그렇게 수사를 시작한 보슈가 8년 만에 다시 시인을 쫓는 레이철과 마주치게 되는 것입니다.

 

보이드 문의 주인공 캐시 블랙의 카메오 출연

보이드 문역시 보슈 시리즈가 아닌 스탠드얼론입니다.

다만 보이드 문의 주인공인 캐시 블랙이 시인의 계곡에 깜짝 카메오로 등장하는데,

큰 역할이나 비중을 지닌 건 아니지만 보슈와 잠시 애틋한 인연을 나누는 그녀를

숨은 그림 찾듯 찾아보는 것도 시인의 계곡의 소소한 재미 중 하나입니다.

 

정리하면,

시인의 계곡보슈 시리즈를 포함 그동안 출간된 마이클 코넬리 작품의 인물과 스토리가

이런저런 복잡한 인연과 족보로 얽혀있는 작품이란 얘깁니다.

그렇다고 해서 위에서 언급한 모든 작품들을 반드시 먼저 읽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고,

굳이 선행필수가 필요하다면 시인한 편 정도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보슈와 매케일렙의 인연이 궁금하다면 다크니스 모어 댄 나잇도 미리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사립탐정인 보슈와 좌천된 FBI요원 레이철의 협업은 그야말로 시련의 연속입니다.

매케일렙이 남긴 시인에 관한 메모만으로 FBI보다 훨씬 더 많은 정보를 확보한 보슈지만

일개 사립탐정인 그의 활약이 못마땅한 FBI는 자신들의 명예 지키기에 더 급급할 뿐입니다.

8년 전 시인을 끝까지 추격했음에도 사건 외적인 일 때문에 험지로 쫓겨났던 레이철은

자신의 명예회복은 물론 시인을 잡기 위해 수사팀의 정식 멤버가 되려 애쓰지만

FBI는 그녀를 단지 시인을 이끌어내기 위한 미끼나 참고인으로만 대할 뿐입니다.

하지만 이런 시련 덕분에 보슈와 레이철의 콤비 플레이는 더욱 빛을 발하게 됐고,

위기감 속에 피어난 동지애(?)는 더욱 더 강한 결속력과 신속한 추격전을 이끌어내게 됩니다.

 

결국 죽은 매케일렙왕따 커플 보슈&레이철을 통해 시인을 잡는 셈이 되는 것인데,

이런 구도는 정의, 복수, 연대, 쾌감 등 다양한 감정을 자아내기에 최적의 조건은 물론

복잡한 족보의 재미까지 더해져서 무척이나 흥미로운 책읽기를 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레이먼드 챈들러의 쿨한 탐정과 토머스 해리스의 소름끼치는 살인범이 벌이는 대결.”이란

피플의 평은 이런 맥락에서 이 작품을 한 줄로 잘 압축한 표현이라는 생각입니다.

 

스릴러로서의 재미뿐 아니라 보슈 주변의 여인들 덕분에 다양한 멜로의 감성도 잘 살았는데,

전처이자 여전히 애증 관계인 엘리노어 위시와의 충돌은 내내 마음을 아프게 했고,

사연 많아 보이는 모텔 옆방의 여자 제인에 대한 보슈의 호기심과 연민도 눈길을 끌었으며,

불같은 성미의 보슈와 레이철이 온탕-냉탕을 오가며 맺는 공적-사적 관계도 흥미진진합니다.

 

다만, 벌여놓은 판에 비해 연쇄살인마 시인의 최후는 살짝 심심했던 게 사실인데

그것 때문에라도 456페이지에 불과한 짧은(?) 분량이 너무 아쉽기도 했습니다.

100페이지 정도만 더 있었다면, 그러니까 보슈와 레이철이 한번쯤 더 고비를 겪었다면

막판의 긴장과 흥분이 훨씬 더 고조됐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후속작인 클로저에서 보슈는 다시 LA경찰국 또는 할리우드 경찰서로 복귀할 듯 합니다.

클로저역시 10여 년 전에 읽긴 했어도 기억이 거의 휘발된 상태라

경찰로의 복귀가 보슈에게 행운이 될지 독이 될지 벌써부터 사뭇 궁금해집니다.

하지만 만만치 않은 사건이 보슈의 복귀 선물(?)로 기다리고 있을 것만은 분명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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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소설가의 살인사건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민경욱 옮김 / ㈜소미미디어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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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공인들은 본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일종의 이미지를 갖게 됩니다.

사람들을 웃기는 개그맨은 평상시에도 늘 밝고 낙천적이며 웃기는 캐릭터라고 여겨지고,

반듯한 얼굴로 뉴스를 진행하는 앵커나 아나운서는 성격과 인품 자체도 그렇다고 여겨집니다.

마찬가지로, 정교한 설계 속에 무자비한 살인사건과 미스터리를 직조하는 추리소설가는

꼼꼼하고 똑똑한 것은 물론 일상에서도 빈틈이라곤 찾아볼 수 없을 것 같은 이미지를 갖는데,

히가시노 게이고는 그 이미지라는 게 얼마나 허구일 수 있는지를 유쾌하게 보여줍니다.

 

이 작품은, 요약하면, 미스터리 업자들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다룬 블랙 코미디입니다.

사적으로 구입한 고가품을 취재용 구매품으로 둔갑시켜 세금을 면제받으려는 작가,

자신이 쓰지도 않은 미완성 미스터리의 을 알아내기 위해 쇼를 벌이는 가짜 작가,

여러 출판사에 작품 약속을 해놓곤 무책임한 태도만 보이는 작가,

치매 증세를 보이는 고령의 작가와 편집자가 벌이는 코미디 같은 해프닝,

시류에 편승해 내용과 무관하게 분량 늘리기에만 급급한 출판사와 거기에 끌려 다니는 작가,

알아서 줄거리와 서평을 써주는 독서 기계에 의존하는 작가-출판사-서평가들의 민낯 등

그야말로 미스터리를 둘러싼 웃지 못 할 현실들이 다양하게 소개되고 있습니다.

 

전부는 아니지만 열악해진 미스터리 출판의 현실이 꽤 많은 작품 속에서 지적되기도 합니다.

판매량이 줄어들다 보니 무리한 기획과 마케팅이 난무할 수밖에 없게 되고,

책에 대한 지출을 아끼는 독자들이 신인보다는 기성 작가에만 관심을 보이는 탓에

세대교체는커녕 작가-편집자-독자 모두 고령화라는 내리막길을 걸을 수밖에 없고,

이런 열악한 상황에서 미스터리의 질은 갈수록 떨어진다는 구조적 문제를 다룬다는 뜻입니다.

그래서인지, 읽는 동안 저도 모르게 몇 번씩 웃음이 터져 나오다가도

미스터리 업자들의 안쓰러운 현실에 간혹 씁쓸한 뒷맛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수록작 가운데 미스터리의 맛이 가장 풍부한 작품은 예고소설 살인사건인데,

히트작 하나 없던 작가가 본의 아니게 살인예고소설을 쓰게 된 이후 각광을 받게 되자

넘어선 안 될 선을 넘으면서 추락하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어서

다른 작품들과는 사뭇 분위기가 다른 정통 미스터리를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장난기가 가득한 이 작품에 대해

갈릴레오 시리즈보다는 이쪽이 진짜 히가시노 게이고다!”라는 평이 달리기도 했다는데,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마다 다소 호불호를 심하게 느낀 저로서도

이 평에 대해서는 100%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미스터리의 이면에 대한 그의 블랙 유머와 독설을 만끽하고 싶은 독자라면

꼭 읽어볼 것을 추천하고 싶은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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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 박물관
오가와 요코 지음, 이윤정 옮김 / 작가정신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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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유한 노파의 의뢰로 박물관을 세우기 위해 고즈넉한 마을에 온

박물관의 용도가 사망한 마을사람들의 유품을 전시하기 위함이란 걸 알고 당황합니다.

더구나 그 유품들은 기증받거나 부탁을 통해 얻은 것이 아닌 불법적으로훔친 것들이며,

심지어 악의가 깃들었거나 고인의 비참한 삶이 녹아든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하지만 괴팍한 노파와 그녀의 양딸인 소녀, 그리고 저택을 관리하는 정원사 부부와 함께

는 이내 세상에 둘도 없을 특별한 박물관을 만드는 일에 매진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을에서 폭탄 테러와 연쇄살인사건이 벌어지기 시작합니다.

그 와중에도 유품을 수집하고 박물관을 완성시키려는 의 노력은 흔들림 없이 진행됩니다.

 

줄거리는 잊었지만 오래 전에 읽은 오가와 요코의 박사가 사랑한 수식’, ‘미나의 행진

설정 자체가 특별하긴 했어도 대체로 따뜻한 여운을 남겼던 작품들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박사가 사랑한 수식은 교통사고로 인해 기억력이 80분만 지속되는 천재 수학자로부터

수식의 아름다움을 배우면서 인생의 소중함을 깨닫는 미혼모 파출부인 '의 이야기이고,

미나의 행진은 엄마와 떨어져 이모집에 살게 된 소녀 토모코의 성장기를 그린 작품입니다.

덕분에 오가와 요코는 주로 그런 톤의 작품을 쓰는 작가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무척 오랜만에 그녀를 만나게 해준 침묵 박물관

앞선 두 작품과는 성격이 전혀 다른 것은 물론 기괴함마저 풍기고 있어서 적잖이 놀랐습니다.

 

제목만 보면 고요한 침묵과 정갈한 박물관이라는 정적인 분위기가 지배할 것 같지만,

띠지에 적힌 그로테스크 미학의 정점이란 표현대로

실은 이 작품의 밑바탕엔 다소 비현실적인 시공간과 심하게 뒤틀린 심리가 깔려있습니다.

 

애초 유족 몰래 훔친 유품을 전시할 박물관을 세우려는 괴짜 노파의 의지부터 서늘합니다.

노파는 결코 고인의 삶을 추모하려는 것도 아니고 존경심을 보존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노파에겐 고인이 소중히 여긴 물건이나 그를 유명하게 만든 물건 따윈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오히려, 돈을 벌기 위해 비밀리에 불법시술을 저질렀던 의사의 메스라든가,

위작 사기를 벌였던 무명화가가 죽기 직전 배고픔을 모면하려 먹었던 ‘36색 물감같은 것이

노파에게는 박물관에 보존할 가치가 있는 유품으로 여겨지는 것입니다.

 

이런 수상쩍은(?) 박물관 건립을 위해 박물관 기사인 와 노파의 양녀인 소녀가 앞장서고

증조부 시절부터 노파의 저택을 관리해온 정원사 부부가 힘을 보탭니다.

그런데, 이들의 이야기는 따뜻하고 감동적인 박물관 세우기와는 전혀 무관하게 흘러갑니다.

폭탄테러는 물론 사체를 끔찍한 방법으로 훼손하는 연쇄살인범이 등장하고,

는 불법적인 방법으로 유품을 탈취하기 위해 고인의 집에 침입하기도 합니다.

또 깊은 숲속의 수도원에 머물며 오로지 침묵으로 세상을 대하는 전도사들이 등장하여

노파가 세우려는 박물관이라는 이미지와 묘하게 병치 또는 대립하기도 합니다.

 

사실, 이 작품에는 인물명은 물론 지역에 관한 고유명사가 전혀 등장하지 않습니다.

아무런 정보도 없이 본문만 봤다면 일본 작품이라고 할 만한 특징도 찾아보기 힘듭니다.

인물들 역시 ’, 소녀, 노파, 정원사, 가정부, 형 등으로만 지칭됩니다.

, 노파의 저택, 수도원, 마을중심가 등 주요 공간은 유럽의 소박한 소도시를 연상시키는데,

이런 설정들 덕분에 현실 속 이야기임에도 오히려 비현실성이 강하게 느껴졌습니다.

 

주요 인물들의 목표라든가 가치관이 모호하거나 난해했던 점 역시

이 시공간의 비현실성과 함께 책읽기를 무척 곤혹스럽게 만들었던 요소인데,

상식적이지 않은 박물관 건립에 (무슨 이유에서인지) 기꺼이 동참한 의 목표도 그렇고,

이런 박물관을 큰돈을 들여 굳이 지으려는 노파의 가치관도 그렇고,

노파의 양녀이자 에게 각별한 의미로 다가오는 듯한 소녀의 정체성에 이르기까지

누구 하나 선명하지도 않고 이입하기도 쉽지 않았던 인물들이었습니다.

결국 이 인물들이 전력을 다해 건립하려는 박물관의 가치와 목적이

분명하게 또는 에둘러서라도 독자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못했다는 생각입니다.

 

내내 짙은 안개 속을 헤매는 기분으로 페이지를 넘겼지만,

특히 몇 번을 되읽어도 공감과 이해가 불가능했던 클라이맥스부터 엔딩까지의 전개 때문에

고백하자면, 다 읽고도 무슨 이야기를 읽은 거지?”라는 의문에 둘러싸인 게 사실입니다.

 

제가 기억하는 오가와 요코만을 떠올리며 다소 뻔하고 상투적이더라도

삶과 죽음에 관한 따뜻하고 깊은 여운의 이야기였기를 바랐는데,

설령 독특하고 그로테스크하더라도 납득 가능하고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였다면 좋았겠지만

아쉽게도 서평 쓰는 것 자체가 주저될 정도로 저와는 맞지 않는 작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지독히도 이질적이면서 쉽게 섞이기 어려운 난해한 요소들을 잔뜩 버무려놓긴 했지만

그것들을 관통하는 특별한 이야기의 정체는 제겐 너무 불분명하고 모호할 따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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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천 정사 화장 시리즈 1
렌조 미키히코 지음, 정미영 옮김 / 시공사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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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천 정사저녁싸리 정사와 함께 일명 화장(花葬) 시리즈로 불리는 단편집입니다. ‘꽃으로 장사 지내다라는 뜻의 화장(花葬)’은 글자에서 연상되는 애잔한 이미지와는 달리 꽃을 모티브로 삼되 참혹한 살인사건과 그 이면에 숨은 더 참혹한 진실을 상징하고 있어서 무척이나 아이러니한 시리즈 타이틀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이 작품을 읽고 사나흘 정도 무척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어지간한 이야미스(イヤミス, 불쾌한 기분이 남는 미스터리)’를 읽고도 끄떡없던 저였지만 회귀천 정사는 이야미스와는 전혀 다른 성격의 불편함과 불쾌함을 남겼기 때문입니다. 수록작마다 살인사건(또는 기이한 죽음)이 일어나고 주인공이 진실을 밝히는 형식이긴 하지만, 살인이나 죽음과는 어울리지 않는 꽃들의 향연이 주는 묘한 위화감과 끈적거림, 그리고 밝혀진 진실 속에 담긴 어이없음, 망연함, 안타까움 등 복잡한 감정들이 눈길을 사로잡을 정도로 우아하거나 애틋하거나 우수 어린 문장들로 그려진 탓에 마치 악마파가 그린 순수한 풍경화 또는 김동인의 광염소나타속의 광기를 살갗으로 직접 느낀 듯한 그런 종류의 불편함과 불쾌감을 맛봤다는 뜻입니다.

 

수록된 작품들은 모두 공통적으로 다이쇼 시대(1921~1926)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정치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꽤나 혼란스럽고 어두웠던 시대인데, 그런 시대적 배경 역시 작품의 분위기를 더욱 무겁고 미묘하게 만드는 요소입니다.

주인공들의 캐릭터는 이런 분위기를 더 강렬하게 만듭니다. 글을 모르는 기녀들을 위해 편지를 대신 써주던 대필가, 가족들에 의해 10살에 팔려와 성 노예로 전락한 16살 어린 기녀, 어긋난 남녀 사이에 끼어 정신적, 육체적 메신저가 돼야 했던 젊은 야쿠자, 어머니의 살인에 관한 유년의 모호한 기억 때문에 고통 받다가 비참한 진실을 알게 된 남자, 그리고 두 차례의 정사(情死) 미수 끝에 두 여자를 죽게 만들고 자신도 자살한 천재 가인 등 한껏 일그러지고 비틀어진 인물들이 이야기를 끌고 나갑니다.

 

한 가지 특이한 건, 각 살인사건(또는 기이한 죽음)의 범인과 피해자의 관계입니다. 살인범들은 딱히 자신이 죽인 피해자들에게 원한이나 복수심을 가졌던 게 아닙니다. 오히려 살인범들의 애증은 다른 사람을 향하고 있었고, 그 애증을 표현하기 위한 도구로 살인이라는 끔직한 행위를 동원한 것입니다. 누군가가 보고 싶어서, 누군가를 착각하게 만들기 위해, 누군가의 마음을 잡기 위해 다른 그 누군가를 죽여야만 했던 살인범들의 행각은 여느 연쇄살인범의 그것보다 더 잔혹하고 용서받지 못할 짓이지만, 독자는 그 살인범의 동기와 행위에 동조하고 공감하게 되는 이상야릇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동조와 공감이 다 읽은 뒤의 불편함과 불쾌함을 초래하는 주범인 게 사실입니다.

 

화장 시리즈라는 타이틀에 어울리게 각 작품마다 예외 없이 꽃이 등장합니다. 등나무꽃, 도라지꽃, 오동나무꽃, 연꽃, 꽃창포 등이 그것인데, 때론 주제나 상징으로, 때론 사건의 단서로 등장하는 꽃들에 대한 작가의 설명을 요약해보면,

 

어디까지나 주인공은 꽃입니다. 피기 전에 버려진 꽃, 진흙탕에 짓이겨진 꽃, 피로 그린 꽃그리고 트릭으로서의 꽃, 복선에 사용된 꽃, 죽음의 메시지를 전하는 꽃, 흉기가 된 꽃.”

 

주인공이 꽃이란 설명은 (작가의 의도와 무관하게) 작품에 따라 맞기도, 아니기도 합니다. , 모든 이야기의 중심에 꽃이 있다는 것도 작품에 따라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합니다. “주인공이 꽃이란 사실 때문에 이 작품에 대해 미리 거부감부터 갖는 독자도 있겠지만, 개인적으론 각 수록작의 정서를 대변하는 상징정도로만 여겨도 괜찮다는 생각입니다.

 

뒤늦게 렌조 미키히코와 처음 만났던 작품은 4살 소녀의 교살 사건을 다룬 백광이었는데 아직 렌조 미키히코를 만난 적 없는 독자라면 백광을 먼저 읽어볼 것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그 작품 역시 대담한 설정과 서정성 넘치는 문체로 굵직한 문학상을 휩쓸었던작품인데, ‘백광이 마음에 든다면 그 후에 화장 시리즈를 읽는 게 더 낫겠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회귀천 정사에 수록되지 않은 나머지 세 편의 화장 시리즈는 후속작인 저녁싸리 정사에 수록돼있습니다. 당연히 관심이 가는 작품이지만 연이어 읽기에는 좀 힘든 게 사실이라 언젠가 회귀천 정사의 불편함과 불쾌함이 다시 그리워질 때까지 기다리려고 합니다.

 

사족으로...

딱히 어디라고 흠 잡긴 어렵지만, 수시로 번역의 아쉬움이 느껴지곤 했습니다. 직역의 문제 같기도 하고, 단어 선택의 문제 같기도 하고, 왠지 부자연스럽게 읽히거나 한국어인데 이해하기 힘든 경우가 종종 있었기 때문입니다. 너무 빠른 속도로 읽느라 제가 오독하거나 잘못 이해한 것일 수도 있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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즈우노메 인형 히가 자매 시리즈
사와무라 이치 지음, 이선희 옮김 / arte(아르테)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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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러잡지사 편집부 막내인 후지마는 연락이 끊긴 작가를 찾아갔다가 그의 시신을 발견합니다.

얼마 후 사건현장에 남아있던 육필원고를 전해 받아 읽은 후지마는 큰 충격에 빠집니다.

그 원고는 리호라는 여중생의 시점으로 쓰인 즈우노메 인형에 관한 잔혹한 도시전설인데,

다 읽은 직후부터 원고 속에 등장하는 검은 예복 차림의 요괴 즈우노메 인형

실제로 후지마의 눈에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헛것이 아닌 분명 실체를 가진 듯한 그 인형에게서 명백한 생명의 위협을 느낀 후지마는

작가 역시 그 원고를 읽은 뒤 인형에게 목숨을 잃은 것이 확실하며,

그렇다면 자신도 작가처럼 그 인형에 의해 참혹하게 살해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오컬트 작가 노자키와 그의 약혼녀이자 영 능력자인 히가 마코토를 찾아가 도움을 청합니다.

노자키와 마코토는 즈우노메 인형이 원고를 읽은 자에게만 찾아오는 저주라고 판단하곤

그 저주를 풀 방법을 찾아내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들도 원고를 읽기 시작합니다.

 

2년 전(2018)에 출간된 보기왕이 온다의 사와무라 이치의 작품입니다.

히가 자매 시리즈 2!’이라는 소개글에도 불구하고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아

보기왕이 온다를 읽고 써놓은 서평을 찾아보니

정말 오컬트 작가 노자키와 영 능력자 자매인 마코토와 코토코가 등장했던 작품이었습니다.

(제 기억력의 문제인지, ‘노자키 & 히가 자매의 존재감이 약했던 탓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호러영화는 어지간해선 못 볼 정도로 소심한 성격이지만

그래도 책으로 출간된 호러물은 제법 찾아 읽는 편인데,

즈우노메 인형은 미스터리 코드가 함께 깔려있어 꽤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이었습니다.

 

저주에 걸려 목숨이 위태로워진 후지마와 그를 도우려는 노자키 & 마코토의 현재 이야기

여중생 리호가 쓴 (것으로 보이는) ‘도시전설 원고가 한 챕터씩 번갈아 등장합니다.

후지마 일행의 챕터는 원고가 실화를 바탕으로 쓰였다는 판단 하에

원고를 쓴 인물은 물론 원고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찾아내려 애쓰는 절박한 과정이 실려 있고,

리호의 챕터는 즈우노메 인형이라는 도시전설이 어떻게 태어났는지,

그 도시전설을 듣거나 읽은 자들이 어떻게 참혹하게 죽어갔는지 등을 상세히 묘사합니다.

 

저주가 담긴 도시전설을 원고로 직접 읽거나 혹은 누군가에게 그 내용을 듣기만 해도

붉은 실로 둘러싸인 검은 예복 차림의 인형에게 무참히 살해당한다는 설정은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공포심을 자극하는 설정이지만,

리얼한 피범벅 영상이 떠오르게 만드는 사와무라 이치의 집요한 문장들까지 더해져

저 같은 호러영화 기피자에겐 꽤나 소름 돋는 책읽기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 작품 속에는 일본 호러의 대표작인 스즈키 코지의 이 자주 언급되는데,

저주의 영상이 담긴 비디오를 보고 사망한 네 남녀 사건을 취재하던 주간지 기자가

문제의 비디오를 본 뒤 자신도 죽게 될 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휩싸인다는 줄거리는

사뭇 이 작품의 큰 얼개와 유사해 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인지 에 대한 오마주가 살짝 담긴 듯이 보이기도 했는데,

을 책으로 읽거나 영화로 본 독자라면 색다른 느낌으로 이 작품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아쉬운 점이라면 막판에 작가가 ?”라는 질문에 제대로 답하지 않았거나

그 답변이 다소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억지스러웠다는 점입니다.

합리성, 현실성과는 거리가 먼 도시전설 원고 자체는 깔끔한 엔딩이란 게 없을 수도 있지만,

왜 많은 사람들이 그 원고 때문에 죽어야만 했나?”라는 미스터리에 대해

앞선 줄거리와는 다소 무관해 보이는 뜬금없는 살해동기를 답변으로 내놓았기 때문입니다.

, 도시전설 원고의 주인공인 여중생 리호의 과거사에 관한 일종의 말장난 같은 반전 역시

정정당당한 서술트릭이 아니라 작가의 반칙처럼 읽힌 게 사실입니다.

말하자면 막판에 가서 그동안 쌓아온 에너지가 다소 허무하게 소멸된 느낌이라고 할까요?

 

워낙 호흡도 빠르고, 호러의 맛이 잘 살아있어서 금세 마지막 장까지 달릴 수 있는 작품이니

전형적인 일본 호러물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꽤 만족할 수도 있는 이야기입니다.

다만 미스터리 코드에는 너무 큰 기대를 하지 말고 호러 자체를 만끽하길 권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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