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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트 라이트 ㅣ RHK 형사 해리 보슈 시리즈 9
마이클 코넬리 지음, 이창식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1월
평점 :
‘해리 보슈 시리즈’의 아홉 번째 작품인 ‘로스트 라이트’는
이전 작품들과는 내용과 형식면에서 사뭇 다른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20년 넘게 간직해온 배지를 반납하고 LA경찰국을 떠난 보슈의 새 ‘직업’은 사립탐정입니다.
하지만 탐정 사무실을 낸 것도 아니고, 명함을 돌리며 제대로 된 영업을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는 퇴직하면서 들고 나온 미제 사건 파일을 뒤적이며 새로운 소명에 몰두합니다.
동시에 은퇴한 재즈연주자로부터 색소폰 교습을 받는 일상의 평범한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형식면에서 달라진 건 하나뿐인데 개인적으론 무척 낯선 경험이라 살짝 당황하기도 했습니다.
그건 3인칭 시점을 벗어나 처음으로 보슈의 1인칭 시점으로 전개된 문장들입니다.
‘나’라는 호칭을 보자마자 느낀 위화감 때문에 앞선 작품들은 물론 이후 작품들까지 뒤졌지만
여전히 사립탐정 신분을 유지하고 있는 후속작 ‘시인의 계곡’을 제외하곤
다른 어느 작품에서도 1인칭 시점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즉, 경찰이 아닌 온전한 ‘자유인 보슈’를 위해 의도적으로 설정된 1인칭 시점이란 뜻인데,
그래서인지 냉정한 하드보일드 스타일과 달리 좀더 보슈에게 몰입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사립탐정 보슈’가 선택한 사건은 4년 전에 벌어진 성범죄 살인사건입니다.
영화제작사 직원이던 안젤라 벤턴의 죽음은 처음엔 단순 성범죄 사건으로만 여겨졌지만,
그녀의 회사가 제작 중이던 영화 촬영현장에서 소품으로 이용될 예정이던 현금 200만 달러가
총격전의 아수라장 속에서 강탈당하는 사건이 벌어지자 새삼 세간의 시선을 끌었던 것입니다.
당시 보슈는 안젤라 사건을 맡고 있었지만 강도 사건 이후 수사권을 빼앗겼고
이후 수사가 흐지부지 된 탓에 자책감을 느껴오던 중 새롭게 수사할 각오를 다진 것입니다.
문제는 보슈가 수사를 시작하자마자 시작된 사방의 압력입니다.
보슈의 파트너였다가 본부 강력계로 승진한 후 관료의 길을 택한 키즈 라이더는 물론
FBI와 국토안보부까지 나서서 보슈에게 공공연한 압력과 협박을 가합니다.
물론 보슈는 보기 좋게 그들을 따돌리고 자신만의 수사를 이어나가 악당들을 응징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스스로 밝혀낸 진실 때문에 보슈의 마음은 한없이 무겁게 가라앉을 뿐입니다.
애초 수사권을 빼앗기지 않았다면 4년 전 보슈가 쉽게 해결할 수도 있는 사건이었습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그 이후 사건은 더 어렵게 꼬여갔고
FBI와 경찰에서도 희생자가 속출하는 불상사까지 맞이하고 말았습니다.
그런 탓에 4년이 지나 수사를 재개한 보슈의 손엔 쓸 만한 단서들이 별로 남아있지 않았고,
예기치 않은 FBI의 개입으로 인해 일개 사립탐정인 보슈의 운신의 폭은 극도로 제한됩니다.
아무리 자책감과 부채감 때문이라고 해도 보슈가 굳이 험한 길을 택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넉넉한 연금, 대출금 없는 언덕 위의 집, 좋아하는 재즈 등 모든 게 안락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의 손에는 그가 퇴직과 함께 들고 나온 미제 사건 파일들이 있었고,
그의 마음속엔 자신의 소명을 콕 찝어 표현한 듯한 좌우명 같은 하나의 문장이 있었습니다.
“마음속에 있는 것들은 다함이 없다.”라는, 에즈라 파운드의 시 속의 한 줄은
보슈에 따르면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것(들)은 마음속에서 항상 기다리고 있다.”는 뜻인데,
“이 세상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은 죽은 자 편에 서는 것이었다.”라는 그의 소명이
얼마나 강하고 뿌리 깊게 그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문장입니다.
그 소명은 자신이 마무리 못한 미제 사건 파일들을 다시 들춰보게 만들었고
온갖 위협과 위험 속에서도 반드시 진실을 찾아내도록 채찍질한 원동력이기도 합니다.
그는 언제나 어떤 사건을 맡든 열심히, 진심을 다해 노력해왔지만
이번 작품의 경우 미약한 민간인이었기에 그의 소명이 더 강하게 작동했는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사건은 비교적 단순하지만 FBI와의 갈등과 충돌은 물론 보슈의 강력한 소명의식 덕분에
‘로스트 라이트’는 어느 작품 못잖게 서사의 두께에서 뒤지지 않는 매력적인 작품이었습니다.
액션 장면은 몇 개 없지만 꽤 치열하고 폭력적이어서 흥미로웠고,
영원한 연인 엘리노어, 관료의 길을 선택한 키즈 라이더, 보슈와 번번이 엮이는 FBI요원 린델 등
보슈 주변의 조연들의 역할도 계속 눈길을 끄는 대목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사건을 마무리한 보슈 앞에 나타난 의외의 인물이 시선을 사로잡았는데,
독자에 따라 그 인물의 등장이 반갑기도, 놀랍기도,
또는 무척 애잔하거나 마음 아프게 느껴지기도 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