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천 정사 화장 시리즈 1
렌조 미키히코 지음, 정미영 옮김 / 시공사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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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회귀천 정사저녁싸리 정사와 함께 일명 화장(花葬) 시리즈로 불리는 단편집입니다. ‘꽃으로 장사 지내다라는 뜻의 화장(花葬)’은 글자에서 연상되는 애잔한 이미지와는 달리 꽃을 모티브로 삼되 참혹한 살인사건과 그 이면에 숨은 더 참혹한 진실을 상징하고 있어서 무척이나 아이러니한 시리즈 타이틀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이 작품을 읽고 사나흘 정도 무척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어지간한 이야미스(イヤミス, 불쾌한 기분이 남는 미스터리)’를 읽고도 끄떡없던 저였지만 회귀천 정사는 이야미스와는 전혀 다른 성격의 불편함과 불쾌함을 남겼기 때문입니다. 수록작마다 살인사건(또는 기이한 죽음)이 일어나고 주인공이 진실을 밝히는 형식이긴 하지만, 살인이나 죽음과는 어울리지 않는 꽃들의 향연이 주는 묘한 위화감과 끈적거림, 그리고 밝혀진 진실 속에 담긴 어이없음, 망연함, 안타까움 등 복잡한 감정들이 눈길을 사로잡을 정도로 우아하거나 애틋하거나 우수 어린 문장들로 그려진 탓에 마치 악마파가 그린 순수한 풍경화 또는 김동인의 광염소나타속의 광기를 살갗으로 직접 느낀 듯한 그런 종류의 불편함과 불쾌감을 맛봤다는 뜻입니다.

 

수록된 작품들은 모두 공통적으로 다이쇼 시대(1921~1926)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정치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꽤나 혼란스럽고 어두웠던 시대인데, 그런 시대적 배경 역시 작품의 분위기를 더욱 무겁고 미묘하게 만드는 요소입니다.

주인공들의 캐릭터는 이런 분위기를 더 강렬하게 만듭니다. 글을 모르는 기녀들을 위해 편지를 대신 써주던 대필가, 가족들에 의해 10살에 팔려와 성 노예로 전락한 16살 어린 기녀, 어긋난 남녀 사이에 끼어 정신적, 육체적 메신저가 돼야 했던 젊은 야쿠자, 어머니의 살인에 관한 유년의 모호한 기억 때문에 고통 받다가 비참한 진실을 알게 된 남자, 그리고 두 차례의 정사(情死) 미수 끝에 두 여자를 죽게 만들고 자신도 자살한 천재 가인 등 한껏 일그러지고 비틀어진 인물들이 이야기를 끌고 나갑니다.

 

한 가지 특이한 건, 각 살인사건(또는 기이한 죽음)의 범인과 피해자의 관계입니다. 살인범들은 딱히 자신이 죽인 피해자들에게 원한이나 복수심을 가졌던 게 아닙니다. 오히려 살인범들의 애증은 다른 사람을 향하고 있었고, 그 애증을 표현하기 위한 도구로 살인이라는 끔직한 행위를 동원한 것입니다. 누군가가 보고 싶어서, 누군가를 착각하게 만들기 위해, 누군가의 마음을 잡기 위해 다른 그 누군가를 죽여야만 했던 살인범들의 행각은 여느 연쇄살인범의 그것보다 더 잔혹하고 용서받지 못할 짓이지만, 독자는 그 살인범의 동기와 행위에 동조하고 공감하게 되는 이상야릇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동조와 공감이 다 읽은 뒤의 불편함과 불쾌함을 초래하는 주범인 게 사실입니다.

 

화장 시리즈라는 타이틀에 어울리게 각 작품마다 예외 없이 꽃이 등장합니다. 등나무꽃, 도라지꽃, 오동나무꽃, 연꽃, 꽃창포 등이 그것인데, 때론 주제나 상징으로, 때론 사건의 단서로 등장하는 꽃들에 대한 작가의 설명을 요약해보면,

 

어디까지나 주인공은 꽃입니다. 피기 전에 버려진 꽃, 진흙탕에 짓이겨진 꽃, 피로 그린 꽃그리고 트릭으로서의 꽃, 복선에 사용된 꽃, 죽음의 메시지를 전하는 꽃, 흉기가 된 꽃.”

 

주인공이 꽃이란 설명은 (작가의 의도와 무관하게) 작품에 따라 맞기도, 아니기도 합니다. , 모든 이야기의 중심에 꽃이 있다는 것도 작품에 따라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합니다. “주인공이 꽃이란 사실 때문에 이 작품에 대해 미리 거부감부터 갖는 독자도 있겠지만, 개인적으론 각 수록작의 정서를 대변하는 상징정도로만 여겨도 괜찮다는 생각입니다.

 

뒤늦게 렌조 미키히코와 처음 만났던 작품은 4살 소녀의 교살 사건을 다룬 백광이었는데 아직 렌조 미키히코를 만난 적 없는 독자라면 백광을 먼저 읽어볼 것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그 작품 역시 대담한 설정과 서정성 넘치는 문체로 굵직한 문학상을 휩쓸었던작품인데, ‘백광이 마음에 든다면 그 후에 화장 시리즈를 읽는 게 더 낫겠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회귀천 정사에 수록되지 않은 나머지 세 편의 화장 시리즈는 후속작인 저녁싸리 정사에 수록돼있습니다. 당연히 관심이 가는 작품이지만 연이어 읽기에는 좀 힘든 게 사실이라 언젠가 회귀천 정사의 불편함과 불쾌함이 다시 그리워질 때까지 기다리려고 합니다.

 

사족으로...

딱히 어디라고 흠 잡긴 어렵지만, 수시로 번역의 아쉬움이 느껴지곤 했습니다. 직역의 문제 같기도 하고, 단어 선택의 문제 같기도 하고, 왠지 부자연스럽게 읽히거나 한국어인데 이해하기 힘든 경우가 종종 있었기 때문입니다. 너무 빠른 속도로 읽느라 제가 오독하거나 잘못 이해한 것일 수도 있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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즈우노메 인형 히가 자매 시리즈
사와무라 이치 지음, 이선희 옮김 / arte(아르테)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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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러잡지사 편집부 막내인 후지마는 연락이 끊긴 작가를 찾아갔다가 그의 시신을 발견합니다.

얼마 후 사건현장에 남아있던 육필원고를 전해 받아 읽은 후지마는 큰 충격에 빠집니다.

그 원고는 리호라는 여중생의 시점으로 쓰인 즈우노메 인형에 관한 잔혹한 도시전설인데,

다 읽은 직후부터 원고 속에 등장하는 검은 예복 차림의 요괴 즈우노메 인형

실제로 후지마의 눈에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헛것이 아닌 분명 실체를 가진 듯한 그 인형에게서 명백한 생명의 위협을 느낀 후지마는

작가 역시 그 원고를 읽은 뒤 인형에게 목숨을 잃은 것이 확실하며,

그렇다면 자신도 작가처럼 그 인형에 의해 참혹하게 살해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오컬트 작가 노자키와 그의 약혼녀이자 영 능력자인 히가 마코토를 찾아가 도움을 청합니다.

노자키와 마코토는 즈우노메 인형이 원고를 읽은 자에게만 찾아오는 저주라고 판단하곤

그 저주를 풀 방법을 찾아내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들도 원고를 읽기 시작합니다.

 

2년 전(2018)에 출간된 보기왕이 온다의 사와무라 이치의 작품입니다.

히가 자매 시리즈 2!’이라는 소개글에도 불구하고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아

보기왕이 온다를 읽고 써놓은 서평을 찾아보니

정말 오컬트 작가 노자키와 영 능력자 자매인 마코토와 코토코가 등장했던 작품이었습니다.

(제 기억력의 문제인지, ‘노자키 & 히가 자매의 존재감이 약했던 탓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호러영화는 어지간해선 못 볼 정도로 소심한 성격이지만

그래도 책으로 출간된 호러물은 제법 찾아 읽는 편인데,

즈우노메 인형은 미스터리 코드가 함께 깔려있어 꽤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이었습니다.

 

저주에 걸려 목숨이 위태로워진 후지마와 그를 도우려는 노자키 & 마코토의 현재 이야기

여중생 리호가 쓴 (것으로 보이는) ‘도시전설 원고가 한 챕터씩 번갈아 등장합니다.

후지마 일행의 챕터는 원고가 실화를 바탕으로 쓰였다는 판단 하에

원고를 쓴 인물은 물론 원고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찾아내려 애쓰는 절박한 과정이 실려 있고,

리호의 챕터는 즈우노메 인형이라는 도시전설이 어떻게 태어났는지,

그 도시전설을 듣거나 읽은 자들이 어떻게 참혹하게 죽어갔는지 등을 상세히 묘사합니다.

 

저주가 담긴 도시전설을 원고로 직접 읽거나 혹은 누군가에게 그 내용을 듣기만 해도

붉은 실로 둘러싸인 검은 예복 차림의 인형에게 무참히 살해당한다는 설정은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공포심을 자극하는 설정이지만,

리얼한 피범벅 영상이 떠오르게 만드는 사와무라 이치의 집요한 문장들까지 더해져

저 같은 호러영화 기피자에겐 꽤나 소름 돋는 책읽기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 작품 속에는 일본 호러의 대표작인 스즈키 코지의 이 자주 언급되는데,

저주의 영상이 담긴 비디오를 보고 사망한 네 남녀 사건을 취재하던 주간지 기자가

문제의 비디오를 본 뒤 자신도 죽게 될 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휩싸인다는 줄거리는

사뭇 이 작품의 큰 얼개와 유사해 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인지 에 대한 오마주가 살짝 담긴 듯이 보이기도 했는데,

을 책으로 읽거나 영화로 본 독자라면 색다른 느낌으로 이 작품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아쉬운 점이라면 막판에 작가가 ?”라는 질문에 제대로 답하지 않았거나

그 답변이 다소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억지스러웠다는 점입니다.

합리성, 현실성과는 거리가 먼 도시전설 원고 자체는 깔끔한 엔딩이란 게 없을 수도 있지만,

왜 많은 사람들이 그 원고 때문에 죽어야만 했나?”라는 미스터리에 대해

앞선 줄거리와는 다소 무관해 보이는 뜬금없는 살해동기를 답변으로 내놓았기 때문입니다.

, 도시전설 원고의 주인공인 여중생 리호의 과거사에 관한 일종의 말장난 같은 반전 역시

정정당당한 서술트릭이 아니라 작가의 반칙처럼 읽힌 게 사실입니다.

말하자면 막판에 가서 그동안 쌓아온 에너지가 다소 허무하게 소멸된 느낌이라고 할까요?

 

워낙 호흡도 빠르고, 호러의 맛이 잘 살아있어서 금세 마지막 장까지 달릴 수 있는 작품이니

전형적인 일본 호러물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꽤 만족할 수도 있는 이야기입니다.

다만 미스터리 코드에는 너무 큰 기대를 하지 말고 호러 자체를 만끽하길 권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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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트 라이트 RHK 형사 해리 보슈 시리즈 9
마이클 코넬리 지음, 이창식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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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 보슈 시리즈의 아홉 번째 작품인 로스트 라이트

이전 작품들과는 내용과 형식면에서 사뭇 다른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20년 넘게 간직해온 배지를 반납하고 LA경찰국을 떠난 보슈의 새 직업은 사립탐정입니다.

하지만 탐정 사무실을 낸 것도 아니고, 명함을 돌리며 제대로 된 영업을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는 퇴직하면서 들고 나온 미제 사건 파일을 뒤적이며 새로운 소명에 몰두합니다.

동시에 은퇴한 재즈연주자로부터 색소폰 교습을 받는 일상의 평범한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형식면에서 달라진 건 하나뿐인데 개인적으론 무척 낯선 경험이라 살짝 당황하기도 했습니다.

그건 3인칭 시점을 벗어나 처음으로 보슈의 1인칭 시점으로 전개된 문장들입니다.

라는 호칭을 보자마자 느낀 위화감 때문에 앞선 작품들은 물론 이후 작품들까지 뒤졌지만

여전히 사립탐정 신분을 유지하고 있는 후속작 시인의 계곡을 제외하곤

다른 어느 작품에서도 1인칭 시점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 경찰이 아닌 온전한 자유인 보슈를 위해 의도적으로 설정된 1인칭 시점이란 뜻인데,

그래서인지 냉정한 하드보일드 스타일과 달리 좀더 보슈에게 몰입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사립탐정 보슈가 선택한 사건은 4년 전에 벌어진 성범죄 살인사건입니다.

영화제작사 직원이던 안젤라 벤턴의 죽음은 처음엔 단순 성범죄 사건으로만 여겨졌지만,

그녀의 회사가 제작 중이던 영화 촬영현장에서 소품으로 이용될 예정이던 현금 200만 달러가

총격전의 아수라장 속에서 강탈당하는 사건이 벌어지자 새삼 세간의 시선을 끌었던 것입니다.

당시 보슈는 안젤라 사건을 맡고 있었지만 강도 사건 이후 수사권을 빼앗겼고

이후 수사가 흐지부지 된 탓에 자책감을 느껴오던 중 새롭게 수사할 각오를 다진 것입니다.

문제는 보슈가 수사를 시작하자마자 시작된 사방의 압력입니다.

보슈의 파트너였다가 본부 강력계로 승진한 후 관료의 길을 택한 키즈 라이더는 물론

FBI와 국토안보부까지 나서서 보슈에게 공공연한 압력과 협박을 가합니다.

물론 보슈는 보기 좋게 그들을 따돌리고 자신만의 수사를 이어나가 악당들을 응징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스스로 밝혀낸 진실 때문에 보슈의 마음은 한없이 무겁게 가라앉을 뿐입니다.

 

애초 수사권을 빼앗기지 않았다면 4년 전 보슈가 쉽게 해결할 수도 있는 사건이었습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그 이후 사건은 더 어렵게 꼬여갔고

FBI와 경찰에서도 희생자가 속출하는 불상사까지 맞이하고 말았습니다.

그런 탓에 4년이 지나 수사를 재개한 보슈의 손엔 쓸 만한 단서들이 별로 남아있지 않았고,

예기치 않은 FBI의 개입으로 인해 일개 사립탐정인 보슈의 운신의 폭은 극도로 제한됩니다.

 

아무리 자책감과 부채감 때문이라고 해도 보슈가 굳이 험한 길을 택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넉넉한 연금, 대출금 없는 언덕 위의 집, 좋아하는 재즈 등 모든 게 안락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의 손에는 그가 퇴직과 함께 들고 나온 미제 사건 파일들이 있었고,

그의 마음속엔 자신의 소명을 콕 찝어 표현한 듯한 좌우명 같은 하나의 문장이 있었습니다.

마음속에 있는 것들은 다함이 없다.”라는, 에즈라 파운드의 시 속의 한 줄은

보슈에 따르면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것()은 마음속에서 항상 기다리고 있다.”는 뜻인데,

이 세상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은 죽은 자 편에 서는 것이었다.”라는 그의 소명이

얼마나 강하고 뿌리 깊게 그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문장입니다.

 

그 소명은 자신이 마무리 못한 미제 사건 파일들을 다시 들춰보게 만들었고

온갖 위협과 위험 속에서도 반드시 진실을 찾아내도록 채찍질한 원동력이기도 합니다.

그는 언제나 어떤 사건을 맡든 열심히, 진심을 다해 노력해왔지만

이번 작품의 경우 미약한 민간인이었기에 그의 소명이 더 강하게 작동했는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사건은 비교적 단순하지만 FBI와의 갈등과 충돌은 물론 보슈의 강력한 소명의식 덕분에

로스트 라이트는 어느 작품 못잖게 서사의 두께에서 뒤지지 않는 매력적인 작품이었습니다.

액션 장면은 몇 개 없지만 꽤 치열하고 폭력적이어서 흥미로웠고,

영원한 연인 엘리노어, 관료의 길을 선택한 키즈 라이더, 보슈와 번번이 엮이는 FBI요원 린델 등

보슈 주변의 조연들의 역할도 계속 눈길을 끄는 대목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사건을 마무리한 보슈 앞에 나타난 의외의 인물이 시선을 사로잡았는데,

독자에 따라 그 인물의 등장이 반갑기도, 놀랍기도,

또는 무척 애잔하거나 마음 아프게 느껴지기도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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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자의 쇼핑몰 - 디즈니플러스 오리지널 시리즈 <킬러들의 쇼핑몰> 원작 소설 새소설 5
강지영 지음 / 자음과모음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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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집 개들이 식사할 시간으로 처음 만난 강지영의 첫 인상은 무척 매력적이었습니다.

편혜영의 아오이 가든’, 히라야마 유메아키의 남의 일’, 오츠이치의 ‘ZOO’가 떠오를 정도로

수록된 단편 모두 호러와 판타지의 기운이 강한 작품들이었는데,

의도된 불쾌감이 끈적끈적 묻어나면서도 재미나 주제 면에서도 흥미로웠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다음에 만난 페로몬 부티크는 중간도 못 가서 포기했는데,

정확한 기억은 아니지만 너무 가벼워보였던 이야기와 문장들에 실망했던 것 같습니다.

혹시 개들이 식사할 시간의 강지영과 동명이인인가,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죠.

 

그런 탓에 강지영의 작품을 멀리 했던 게 사실인데,

2020년에 출간된 장르물 중 못 읽은 작품들을 찾다가 눈에 띈 게 살인자의 쇼핑몰입니다.

일단 제목은 눈길을 확 끌었지만 페로몬 부티크의 전철을 밟을까봐 주저했던 작품인데,

분량도 짧고 해서 일단 시도는 해봐야겠다는 생각에 큰 부담 없이 읽기 시작했습니다.

 

은밀하고 조직된 무자비한 킬러들, 또 그들에게 일감과 무기를 제공하는 베일에 싸인 배후,

그리고 탐욕에 찌든 사악한 인물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거침없이 살인을 저지른다는 설정은

권총 한 자루만 나와도 비현실적인 한국에선 어쩌면 판타지에 가까운 허무맹랑한 구도지만,

작가는 정교한 사건 설계와 생생한 캐릭터의 힘으로 꽤 그럴듯한 리얼리티를 구축합니다.

최대한 단순하게 요약하면 킬러들의 밥그릇 싸움같아 보이기도 하지만

실은 헤게모니와 이익 독식을 위한 킬러 조직 간의 잔혹한 전쟁 속에서

삼촌의 죽음의 진실을 찾아내고 복수하려는 여대생 정지안의 활약이 주된 이야기입니다.

 

킬러 조직과 연관됐던 삼촌과 그가 운영했던 비밀투성이 쇼핑몰의 정체,

그리고 늘 의문이었던 부모의 죽음의 진실에 대해 뒤늦게 알게 된 지안은

한편으론 놀랍고 기가 막혀 말이 안 나올 지경이지만

한편으론 그제야 부모의 죽음 이후 자신을 키운 삼촌의 일거수일투족이 이해되기도 합니다.

삼촌은 안 보이는 곳에서도 늘 자신을 지켰던 수호천사였고,

허허실실 그저 좋아 보이기만 하던 겉모습 역시 자신을 위한 튼튼한 방패였음을 깨닫습니다.

잘 들어, 정지안.”이란 말로 시작하곤 했던 시시콜콜한 잔소리와 가르침들은

지안이 험한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있도록 철저히 계산된 매뉴얼이었다는 것도 알게 됩니다.

그런 삼촌의 죽음이 무자비한 범죄조직에 의한 것임을 알게 된 지안은

삼촌에 의해 몸과 마음에 깊게 새겨진 본능을 일깨워 목숨을 건 전쟁에 나섭니다.

 

짧은 분량이지만 속도감, 재미, 반전 등 킬러 액션 스릴러의 미덕을 고루 갖춘 작품입니다.

비록 한국에 어울리는 현실적인 설정은 아니지만

영화로도 보고 싶을 만큼 서사와 비주얼 모두 매력적으로 그려졌습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라면 50~100페이지 정도 더 있었으면 좋았겠다, 는 점인데,

캐릭터나 사건 모두 정신없이 빠르게 묘사된 탓에 마치 요약본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킬러 액션 스릴러인 방진호의 방의강 시리즈이후

모처럼 짜릿한 이야기를 만날 수 있어 반가운 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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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의 파수꾼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7
J.D. 샐린저 지음, 공경희 옮김 / 민음사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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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하면, 이 작품을 읽겠다고 처음 마음먹은 건 치기로 가득했던 까마득한 옛날의 일입니다.

그 무렵엔 존 레논 암살범인 채프먼이 이 작품에 탐닉했다는 사실도 몰랐고,

미국 대통령 암살 또는 저격사건에 이 작품에 대한 소문이 떠돌았다는 사실조차 몰랐습니다.

다만, 어디서 주워들은 건 있어서 꼭 읽어야 할 필독서처럼 여겼던 것 같은데,

이런저런 게으름 탓에 한참의 세월이 지나 이른바 꼰대가 돼서야

더는 미룰 수 없는 숙제처럼 책장 속에 파묻혀 있던 호밀밭의 파수꾼을 꺼내 읽게 됐습니다.

 

출판사의 줄거리 소개를 살짝 요약해보면,

사립학교 펜시의 재학생인 16살 홀든 콜필드는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퇴학을 통보받습니다.

표면적인 이유는 낙제였지만, 그 이면엔 소년의 성장기의 혼란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부유한 환경에서 자랐지만 홀든은 기성세대의 속물근성과 위선에 염증을 느낍니다.

그런 그에게 사립학교 펜시는 외부의 평가와 달리 치기 어린 동급생들이 분위기를 주도하고

학부모의 지위에 따라 학생들을 차별하는 견딜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홀든은 퇴학을 통고하는 편지가 집에 도착할 때까지 뉴욕 거리를 헤매기로 마음먹습니다.

 

딱히 기승전결이라고 할 것도 없는 홀든의 며칠간의 방황이 이야기의 전부입니다.

16살이지만 이미 술과 담배에 익숙해진 홀든은 방황의 와중에 꽤 많은 사람들을 만납니다.

친구, 선배, 선생 등 알고 지냈던 사람들은 물론

클럽에서 만난 천박한 여자들, 다혈질의 택시기사, 폭력적인 포주와 창녀, 겸손한 수녀 등

극과 극의 사람들과 만나거나 충돌하면서 그만큼의 다채로운 감정에 사로잡히곤 합니다.

풀어버릴 데 없는 격정은 그의 몸과 마음 안에서 제멋대로 날뛰었고,

그를 상대한 사람들 대부분은 그의 격정이 지닌 위험한 분위기에 이내 뒤로 물러서곤 합니다.

 

다 읽은 후에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홀든이 참 많은 것(사람)을 싫어했고 끔찍하게 여겼고 역겨워했구나, 라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의 부조리함과 위선자의 거들먹거림을 증오했고 자기혐오 역시 임계점을 들락거립니다.

그런 와중에도 그는 한겨울 얼어붙은 공원 호수의 오리들의 안위를 궁금해 하고,

꼭 한 번 만나고 싶은 옛 연인에게 전화를 걸기 위해 공중전화 앞에서 전전긍긍하기도 하고,

사랑하는 동생 피비에 대한 한없는 애정을 감추지 않기도 합니다.

그 무엇도 홀든의 삐딱함을 달랠 수 없을 것 같아 보이지만,

동시에 장래에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어 아이들을 지키고 싶다.”

다소 황당하지만 순수한 미래를 꿈꾸는 그의 태도는 딱 16살에 어울리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야말로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 같은 질풍노도의 상징인 셈입니다.

 

다만, 어울리지 않는 나이에 이 작품을 만난 저로서는 쉽게 홀든에게 이입하기 어려웠습니다.

나이뿐 아니라 한국과 미국의 문화적 차이 때문일 수도 있고,

홀든의 일상을 나열했을 뿐인 서사 자체에 몰입하기 힘들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이유든 너무 기대가 컸던 탓에 아쉬움이나 실망감이 더 컸던 것 같은데,

만일 제가 10~20대에 이 작품을 읽었다면 어떤 느낌을 받았을지도 궁금하고,

지금의 10~20대가 이 작품을 읽는다면 어떤 느낌을 받게 될지도 무척 궁금합니다.

가장 궁금한 건, 왜 현실의 암살범들이나 영미권 스릴러 속 연쇄살인마들이

호밀밭의 파수꾼에 큰 영향을 받았거나 영감을 얻었을까, 라는 의문인데,

그에 대한 답변을 찾기 위해서라도 다른 독자들의 서평을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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