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골의 도시 RHK 형사 해리 보슈 시리즈 8
마이클 코넬리 지음, 한정아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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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 보슈 시리즈’ 8편인 유골의 도시는 제목이 상징하는 바가 많은 작품입니다.

우선, 보슈가 맡은 사건은 숲속에서 20년 전 죽은 소년의 유골이 발견되면서 시작됩니다.

모두가 피하고 싶은 어린 피해자의 사건이며 해결 가능성이 지극히 낮은 사건이기도 합니다.

, LA9천 년 전 살해당한 인류의 유골이 발견되는 우울하고 음산한 도시로 묘사됩니다.

그 유골은 동일한 수법의 연쇄살인범에게 살해된 ‘9천 년 된 영구미제 사건인 셈입니다.

그리고 죽은 자의 뼈와 영혼 곁을 맴도는 일을 천직으로 아는 보슈에게 위기가 닥칩니다.

피해자보다 조직의 안위를 앞세워 부당한 결정을 내리는 경찰에 대한 반감은 극에 달하고,

자신을 향해 끝없이 날아드는 비극과 불행에 대한 인내심은 바닥을 드러내고 맙니다.

그 모든 것들은 소년의 유골 사건을 수사하는 보슈에게 고통스럽고도 무거운 짐을 지웁니다.

 

이런 서사들 때문에 유골의 도시해리 보슈 시리즈의 커다란 분기점이 되는 작품인데,

특히 마지막 몇 페이지에 걸쳐 독자를 충격에 빠뜨리는 엄청난 반전은

25년 넘게 유골의 도시 LA에서 경찰로 살아온 보슈의 고뇌가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

또 한 손엔 열정을, 다른 한 손엔 허무주의를 든 그의 모순된 내면이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독자로 하여금 새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만드는 계기를 던져주기도 합니다.

 

보슈가 맡은 사건 자체는 난이도는 무척 높지만 그 얼개는 꽤 단순한 편입니다.

20년 만에 세상의 빛을 본 유골의 주인을 찾는 일부터 막다른 벽에 다다를 수밖에 없고

설령 유골의 주인을 찾는다고 해도 범인을 특정할 단서는 모조리 부패했거나 사라진 뒤라

보슈로서는 그저 행운이 따라주기를 바랄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몇 차례의 오류를 겪으면서 범인을 특정하긴 하지만

다 읽고 복기해보면 CSI 한 회 정도의 서사에 불과할 정도로 이야기는 단순합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보슈는 추악한 가족사와 어처구니없는 실상을 목격하게 되고,

일어나선 안 될 비극적인 죽음들을 수사 도중 눈앞에서 지켜봐야 했던 것은 물론,

거듭된 경찰 조직의 부당한 처사에 휘말려 전출 또는 퇴직의 압력을 받기에 이릅니다.

 

누구도 맡기 싫어하는, 또 해결하더라도 결코 승리감을 만끽할 수 없는 소년 유골 사건

어쩌면 보슈를 옴짝달싹할 수 없는 낭떠러지 끝에 매달기 위해,

또 그의 열정을 꺾어버리고 허무주의를 극단으로 몰기 위한 의도적인 설정인지도 모릅니다.

여느 때보다 충돌의 강도나 빈도가 심했던 경찰 조직과의 대립도,

굳이 수사 과정에서 무고한 목숨들이 어이없이 스러진 것도 모두 같은 맥락일 수 있습니다.

작가 입장에서는 여덟 번째 작품에 이른 보슈 시리즈의 국면 전환을 위한 선택이었겠지만,

활약 못잖게 보슈의 상처를 지켜봐온 독자에겐 꽤나 힘들고 벅찬 시간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항상 형사라는 직업과 경찰배지와 임무가 없으면 자신은 길을 잃을 것이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 모든 것이 있어도 마찬가지로 길을 잃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니 그 모든 것 때문에 길을 잃을 것 같았다.” (p486)

 

사건 자체도 그렇고 보슈의 심리적 변화 부분 역시 스포일러가 될 장면들이 많다 보니

정작 작품 내용에 대해서는 별로 언급하지 못한 서평이 되고 말았습니다.

출판사의 소개글이라도 인용할까 했지만 초반부의 스포일러가 담겨 있어 그만뒀는데,

가능하면 아무 정보 없이 이 작품을 읽을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보슈의 열정과 허무주의를 이해해야 이 작품의 참맛을 만끽할 수 있을 텐데,

그러려면 이전 작품들이 선행필수가 돼야 하는 게 사실이긴 합니다.

(아닌 경우도 있긴 하지만) 따로 읽어도 무방한 다른 작품들과 달리

유골의 도시는 보슈에게 굉장히 큰 변화를 가져오는 이야기를 담고 있기 때문인데,

보슈를 처음 만나는 독자라면 라스트 코요테정도는 먼저 읽어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꽤 중요하고 의미 있는 작품이라고 동어반복처럼 서평을 썼지만

정작 보슈 시리즈가운데 처음으로 별 4개를 준 작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보슈의 허무를 그리기 위해 의도적으로 설정된 것으로 보이는) 사건 자체가 너무 단순했고,

그 탓에 보슈의 매력과 미덕이 상대적으로 미약하게 보였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막판 반전이 너무 갑작스럽고 공감하기 어렵게 그려졌기 때문인데,

극단적인 보슈의 심경의 변화는 적어도 10페이지 정도의 묘사는 더 필요했다는 생각입니다.

나라도 보슈처럼 행동했을 것이라는 공감을 얻지 못한 막판 반전은

다음 작품인 로스트 라이트에서의 보슈를 이해하는데도 꽤 큰 걸림돌이 될 것 같은데,

오래 전에 읽은 기억에 따르면 로스트 라이트역시 아쉬움이 많았던 작품이라

어쩌면 유골의 도시이 남긴 후유증 때문이 아니었을까, 조심스레 추정해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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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정 없는 검사 표정 없는 검사 시리즈
나카야마 시치리 지음, 이연승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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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작가지만 단기간에 너무 많은 작품을 읽은 탓에 조금은 피로감이 느껴진 나머지 한동안은 멀리 해야겠다고 여긴 게 나카야마 시치리였습니다. 5월 초쯤 미코시바 레이지 시리즈’ 4악덕의 윤무곡을 읽은 뒤의 결심이었는데, 그 결심은 채 두 달도 안 돼 비웃는 숙녀 시리즈덕분에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표정 없는 검사는 애초 그에 대한 피로감 같은 게 왜 들었던 건지 의심될 정도로 나카야마 시치리에게 중독될 수밖에 없는 확실한 이유를 보여주는 매력적인 작품입니다.

 

이 작품의 원제인 能面檢事能面’(노멘)은 일본 전통극 ’()에 쓰이는 가면을 뜻하지만 동시에 표정 없는 얼굴을 가리키는 비유어이기도 합니다. 일본 여행 때 박물관이나 지역 문화관에서 본 能面은 차가울 정도로 무표정해 보였는데, 이 작품의 주인공인 검사 후와 슌타로는 바로 이런 얼굴로 24시간을 살아가는 인물입니다.

 

오사카 지검의 에이스이자 30대 후반의 1급 검사인 후와 슌타로는 그 상대가 피의자든 피해자든 동료 검사나 경찰이든 심지어 까마득한 상관이든 관계없이 늘 얼음장 같은 표정 없는 얼굴과 그에 딱 어울리는 차가운 목소리로 상대합니다. 생각과 감정을 드러내는 얼굴로는 결코 검사의 직무를 제대로 해낼 수 없다는 게 이유인데, 문제는 얼굴뿐 아니라 태도 자체도 피도 눈물도 없는 싸늘한 기계에 가까운 탓에 에이스 검사임에도 불구하고 검찰과 경찰 곳곳에 무수한 적들을 만들어놓았다는 점입니다. 그렇다고 그가 타고난 반골 기질이란 뜻은 아닙니다. 애초 그의 표정 없는 얼굴은 누군가를 향한 저항의 의지가 담긴 것이 아니라 한 명 한 명이 독립된 사법기관인 검사로서의 그의 업무수행방식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후와 슌타로에게 얼굴 자체가 리트머스 시험지같은 신참 여성사무관이 배속됩니다. 장래 검사를 꿈꾸는 소료 미하루는 후와와는 180도 다른 인물로,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기분은 어떤지, 좀전에 뭘 했는지, 어떤 상대를 만났는지 등 그야말로 머릿속의 모든 것이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나는 아주 인간적인(?) 인물입니다. 그런 탓에 후와에게 첫날부터 그만두라는 소리까지 들은 미하루는 이를 악물고 버텨내지만 실제로 후와와 함께 행동하면서 그녀는 하루에도 몇 번씩 큰 충격에 빠지곤 합니다. 표정 하나 없이 조금도 상대를 배려하지 않는 화법을 태연히 구사하는가 하면, 웃지도 화내지도 동요하지도 않는 일관된 리액션엔 그저 기가 찰 따름입니다.

 

완전무결체 사법기계가 오사카 경찰청을 폭격하다!”라는 홍보카피대로 시리즈 첫 편의 데뷔 무대에서 후와의 주 공격대상은 오사카 경찰청입니다. 세간의 주목을 받은 살인사건에 대한 경찰 수사가 잘못된 것을 포착한 후와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오사카 경찰청이 오랫동안 은폐해온 치명적인 비밀을 폭로함으로써 경찰은 물론 검찰 내부에서까지 지탄과 비난을 받게 됩니다. 하지만 후와는 그에 아랑곳 않고 거침없는 행보와 함께 살인사건의 진실 찾기에 몰두합니다. 그 과정을 지켜보는 미하루의 심장은 하루하루 위태롭게 쪼그라들 뿐이지만, 때론 반발하고 때론 공감하며 조금씩 후와의 진심과 검사가 가야할 길을 배우기도 합니다. 물론 사무관은 뇌(검사)의 신호에 따라 움직이는 팔다리나 그림자일 뿐이라는 후와의 차갑고 가차 없는 독설엔 여전히 격분하면서도 말입니다.

 

표정 없는 기계 같은 검사라는 캐릭터 못잖게 현장을 뛰는 검사라는 점도 무척 매력적인데 후와의 행보는 사실 검사라기보다는 경찰이나 형사에 더 가까워 보입니다. 경찰의 수사자료를 검토하여 기소 여부를 결정하거나 법정에서 변호사와 다투는 것보다는 사건 현장을 일일이 탐문하며 직접 정보를 얻고 추리를 하는 일에 전념하기 때문입니다. 그의 현장 스타일은 장르물 속 검사에게선 볼 수 없었던 신선한 캐릭터라 앞으로도 그의 위험천만한 활약을 기대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사실, 한국에서 검찰과 경찰을 둘러싼 시끄러운 말들이 많이 나오는 와중이라 이 작품 속에서 묘사되는 조직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검찰과 경찰의 태도는 한국 독자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꽤 클 것 같습니다. 동시에, 후와 슌타로라는 검사가 분명 픽션 속 판타지 캐릭터이긴 하지만 현실 속에 저런 검사가 한 명쯤 있다면 참 좋겠다는, 허황된(?) 바람을 가져보기도 했습니다.

 

일본에서는 이미 후속작인 표정 없는 검사의 분투가 연재를 마쳤다고 합니다. 빠르면 2021년엔 만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데, 벌써부터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 지 기다려집니다. , ‘옮긴이의 말에 따르면 생각만 해도 기대감에 들뜨게 만드는 뉴스가 있는데, 그건 바로 표정 없는 검사후와 슌타로와 악덕 변호사미코시바 레이지가 언젠가 한 번 제대로 맞붙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사실입니다. 서평엔 언급 안 했지만 후와 슌타로에겐 표정을 없애야만 했던 비극적인 과거가 있습니다. 어릴 적 참혹한 토막 살인을 저질렀던 악덕 변호사미코시바 레이지와 마찬가지로 후와에게도 속죄라는 큰 화두가 인생을 가로지르고 있다는 뜻입니다. ‘속죄라는 접점을 가진 두 괴물이 만난다면 그야말로 불꽃 정도가 폭발이 일어날 것 같은데 나카야마 시치리가 과연 어떤 사건으로 그들을 만나게 할지, 또 그들의 진검승부가 어떤 결과를 낳을지도 엄청 기대되는 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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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초
T. M. 로건 지음, 천화영 옮김 / arte(아르테)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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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시간강사인 세라는 상사이자 명성이 대단한 교수 러브록에게 매일 성희롱을 당하고 있다. 러브록은 전임강사 자리를 얻고 싶다면 자신과 자야 한다고 노골적으로 압박을 가한다. 세라는 평생의 커리어가 달린 자리를 포기할 수도, 러브록을 더 이상 참아낼 수도 없다. 그러던 어느 날, 세라는 우연히 한 아이를 구하게 되는데 그 아이의 아버지에게서 “(보상으로) 누구든 사람 한 명을 없애주겠다.”는 제안을 받는다. 위험천만한 악마와의 거래. 세라는 그 손을 잡을 것인가? 말 것인가?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요약하면, 성희롱에 시달리던 세라가 누군가의 도움으로 사적 복수를 벌이는 이야기입니다. 판타지처럼 나타난 어딘가 위험해 보이는 한 남자의 제안으로 인해 세라는 갈등에 빠집니다. 전화 한 통이면 자신의 삶을 진창으로 만들어버린 쓰레기 같은 러브록을 제거할 수 있지만, 그 후폭풍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탓입니다. 갈등 끝에 그녀는 ‘29초의 통화를 통해 일을 저지르고 말지만 사태는 그녀의 예상과 달리 엉뚱한 방향으로 치달으면서 더 큰 혼란을 일으킵니다.

 

작가의 전작인 리얼 라이즈를 읽고 다양한 코드가 뒤섞인 엔터테인먼트 스릴러라며 나름 우호적인 서평을 쓴 기억도 있어서 신작 소식이 무척 반가웠지만,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너무 실망스러운 작품이라 중도에 포기할 생각이 든 게 사실입니다. 뼈대만 추려서 보면 나름 흥미로운 설정과 소재이긴 하지만, 정작 스토리는 지극히 단선적인 장면들의 무한반복에 가까울 정도로 빈약했기 때문입니다.

 

다른 여자와 동거 중인 남편이나 세라를 정신없게 만드는 어린 남매에 대한 반복적 묘사는 이야기의 핵심과 무관한데도 불구하고 단지 세라의 혼란을 강조하기 위해 수시로 등장했고, 러브록 교수의 집요한 성희롱 장면은 세라의 분노의 게이지를 끌어올리려는 의도와 달리 살짝 수위만 높아질 뿐 유사한 장면들이 장황하게 반복된 탓에 가해자에 대한 분노보다는 무력한 피해자에 대한 짜증이 더 강해지는 부작용을 낳았습니다. 좀 과장하면, 무미건조할 정도로 요점만 짚고 최대한의 속도로 이야기를 전개시키는 작가라면 이 작품의 첫 200페이지를 (최대한 양보해도) 그 절반도 안 돼 마무리했을 거란 생각입니다.

 

결국 속독하듯 눈에 확 들어오는 중요한 지문과 대사에만 집중하기로 했는데, 절반이 채 되기 직전 그마저도 피곤해져서 접으려고 생각할 즈음 진짜 이야기가 시작되는 듯한 문장이 눈에 띄는 바람에 마지막까지 달리게 됐습니다. 하지만 당한 것 이상으로 갚아주는 통쾌한 리벤지 스릴러라는 카피에 비해 세라가 거둔 승리의 과정과 결과는 다소 어이없거나 허무할 정도로 쉬워 보였습니다. 기승전결 어느 부분도 현실감이 없었지만 억지스런 반전과 허망한 엔딩이 가장 아쉬웠는데, 따지고 보면 성희롱과 육아와 부부 문제 때문에 힘들어 죽겠다!”는 세라의 하소연 외에 정작 스릴러 코드가 제대로 발동된 대목은 찾아보기 힘든 작품이었습니다. 취향의 문제일 수도 있지만 전작에 비해 너무 큰 실망감을 느낀 탓에 작가의 다음 작품을 읽게 될지 지금으로선 확신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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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감옥
쓰네카와 고타로 지음, 이규원 옮김 / 고요한숨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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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금색기계’, ‘야시’, ‘멸망의 정원에 이어 네 번째로 만난 쓰네카와 고타로입니다.

각각 에도시대, 현대, 미래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기이하고 오묘한 판타지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기도 합니다.

온 몸이 금색으로 뒤덮인 신비한 존재(‘금색기계’),

내밀한 연결통로로 드나들 수 있는, 요괴와 죽은 자들이 활개 치는 이계(‘야시’),

지구를 감싼 해파리 모양의 공포의 미지의 존재속에 자리한 평온한 마을(‘멸망의 정원’)

쓰네카와 고타로가 창조한 시공간과 캐릭터는

단순한 판타지 이상의 특별하고 고혹적인 마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가을의 감옥은 쓰네카와 고타로의 이런 마력을 담은 세 편의 단편으로 구성돼있습니다.

무한 반복되는 117일이란 날짜에 갇혀버린 여대생 아이짱(‘117’),

오래전부터 신역(神域)으로 불리며 스스로 일본 전역을 옮겨다니는 기괴한 초가집(‘신의 집’),

환술(마법) 능력을 타고난 소녀가 스스로 그 능력에서 도망치는 이야기(‘환술을 쓰는 소녀’)

역시 쓰네카와 고타로다운 독특하고 신비한 판타지가 펼쳐집니다.

 

출판사 소개글에 따르면 수록된 세 편의 일관된 주제는 감옥’, 갇힘이라고 합니다.

실제로 세 주인공들은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각각 시간, 공간, 환상에 갇히게 됩니다.

어느 날 갑자기 무한 반복되는 117일에 갇힌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을 만난 뒤 어떻게든 자신에게 걸린 저주를 풀기 위해 발버둥칩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마치 마술에라도 걸린 듯 기괴한 초가집에 갇힌

다른 희생양을 끌어들여서라도 초가집에서 탈출하여 현실로 돌아가려 애씁니다.

한때 자신이 지닌 엄청난 환술 능력에 집착했던 소녀는 스스로 그 능력을 버리려 하지만

예기치 못한 사태를 맞이하며 감금당한 채 억지로 그 능력을 발휘해야 하는 처지에 놓입니다.

 

세 편에 대한 느낌은 조금씩 달랐는데,

‘117은 타임루프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사건을 맛볼 수 있었지만

깜짝 스토리나 반전보다는 존재론적 메시지가 강조돼서 조금은 심심하게 읽힌 게 사실입니다.

마지막 수록작 환술을 쓰는 소녀는 읽는 내내 환상 속에 빠진 듯 묘한 분위기를 느꼈지만

단편보다는 중편 정도로 확장됐다면 좀더 친절한이야기가 됐을 것 같아 아쉬웠습니다.

너무 많은 생략과 비약 때문에 줄거리, 캐릭터, 메시지를 이해하기가 난감했다는 뜻입니다.

 

그에 비해 신의 집은 쓰네카와 고타로 특유의 호러판타지 서사가 반짝반짝 빛난 작품인데,

3일마다 스스로 일본 전역을 떠돌아다니는 신비한 초가집 설정도 매력적이고,

그 안에 갇힌 뒤 분노-체념-순응으로 이어지는 의 변화 과정이라든가

초가집과 연관된 실종과 살인 등 강력사건의 발생이란 설정도 흥미롭게 읽혔기 때문입니다.

특히 현실과 연결돼있는 이계를 다룬 (제가 너무 좋아하는) ‘야시와도 일맥상통하는 설정이라

개인적으로 다른 수록작들에 비해 좀더 끌렸습니다.

 

솔직하게 총평을 하면, 기대했던 것만큼의 만족을 느끼지 못한 게 사실인데,

아무래도 판타지의 농도나 깊이가 금색기계야시에 비해 얕아 보였기 때문입니다.

, 세 편 모두 공통적으로 단편보다는 좀더 긴 분량의 중편에 어울리는 소재들인데

실제로는 요약된 이야기처럼 생략과 비약이 많았다는 점도 아쉬움을 느끼게 한 대목입니다.

어쩌면 분량 자체가 판타지의 농도와 깊이를 얕게 만든 가장 큰 이유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금색기계야시를 읽지 않은 독자라면

이 작품을 읽고 쓰네카와 고타로에 대해 살짝 고개를 갸웃할 수도 있을 텐데,

부디 두 작품을 통해 쓰네카와 고타로의 진면목을 만끽해볼 것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이 작품이 좋은 성과를 얻어서 절판된 초제천둥의 계절도 재출간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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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니스 모어 댄 나잇 RHK 형사 해리 보슈 시리즈 7
마이클 코넬리 지음, 김승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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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요한 설정 가운데 출판사 소개글에는 없는 한 가지가 포함돼있는 서평입니다.

스포일러는 아니지만, 그 설정 없이는 서평이 불가능해서 포함시킨 것이니 양해 바랍니다.

 

이 작품은 공식적으로는 해리 보슈 시리즈’ 7편이지만,

실은 테리 매케일렙 시리즈’ 2편이라고 해도 될 만큼 투톱 주인공이 이야기를 끌고 갑니다.

6년 전 보슈가 담당한 매춘부 살인사건의 용의자였지만 유유히 법망을 빠져나간 한 남자가

기이하고 끔찍하게 살해된 채 발견되면서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이 사건을 맡은 LA보안관서의 제이 윈스턴은 수사가 벽에 부딪히자

전직 FBI요원이지만 지금은 새로 꾸민 가족과 섬에서 지내고 있는 매케일렙을 찾아갑니다.

블러드 워크이후 3년 동안 평범한 시민이 되어 낚싯배를 운영해온 매케일렙은

오랜만에 접한 살인사건에 흥분하면서 그동안 억눌러온 본능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블러드 워크의 비극이 맺어준 아내 그래시엘라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매케일렙은 적극적으로 수사에 뛰어들지만 이내 큰 충격에 휩싸이고 맙니다.

자신이 쫓은 단서대로라면 이 사건의 범인은 다름 아닌 해리 보슈이기 때문입니다.

 

한편, 보슈는 여배우 교살 혐의로 체포된 영화감독의 재판에 검사팀 일원으로 참여중입니다.

세간의 이목이 집중된데다 피고인인 영화감독의 또 다른 살인혐의까지 밝혀내려는 상황이라

보슈는 재판에만 몰두해도 모자란 형국이지만,

매케일렙과의 만남으로 인해 자신이 심각할 만큼 곤란한 상황에 처했음을 깨닫습니다.

 

일일이 따져보진 않았지만 엄밀히 말하면 매케일렙의 수사가 더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고,

보슈는 오히려 ‘Also featuring’에 가까운 역할로 등장합니다.

물론 중반부를 넘어서면서 보슈와 매케일렙의 사건은 접점을 갖게 되고

두 사람의 수사는 짜릿한 반전과 함께 일심동체 같은 활약상을 펼치긴 하지만,

아무래도 법정에 매어있는 보슈가 동분서주하며 활약하기에 어려운 상황인 건 분명합니다.

 

사실, 다 읽고 복기해보면 이 작품은 사건만 놓고 보면 전작들에 비해 꽤 단순한 편입니다.

보슈를 범인으로 여겼던 매케일렙이 다시 제대로 된 수사를 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보슈 역시 매케일렙을 도와 자신의 혐의를 푸는 것은 물론

진범과 진실 찾기에 성공한다는 이야기가 거의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제목이 암시하는대로 어둠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풀어 놓습니다.

보슈에 대한 프로파일링 서류에 매케일렙은 밤보다 짙은 어둠 = 보슈라고 적습니다.

함께 비극적인 살인사건을 수사했던 적이 있는데다

보슈의 겉으로 드러난 스타일안으로 감춘 내면을 파악한 매케일렙은

보슈를 둘러싸고 있는 어둠에 대해 좀더 진지하게 고민합니다.

어쩌면 그의 어둠이 법망을 빠져나간 용의자를 직접 응징하는 데까지 영향을 미쳤을 거라는,

그리고 그 어둠의 근원 중 하나는 매춘부였던 어머니가 살해당한 과거일지도 모른다는,

그러니 그의 어둠이 더 짙고 깊어지기 전에 자신이 그를 체포해야 되는 것 아닐까, 라는,

한편으론 확신하면서도 한편으론 믿고 싶지 않은 복잡한 심경으로 말입니다.

 

덕분에 이 작품엔 유독 어둠이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합니다.

마치 모든 악이 집결해있는 듯한 LA어둠과 함께

보슈의 이름의 기원인 15세기 화가 히에로니무스 보슈의 그림 속 어둠도 자주 언급되고,

보슈의 어둠을 뒤쫓는 매케일렙 본인 마음속의 어둠도 수시로 눈에 띕니다.

그래서인지, 속도감과 긴장감으로 충만한 스릴러라기보다는

오히려 심리와 내면 묘사에 충실한 느리고 어두운 스릴러에 더 가깝게 보입니다.

우리가 어둠 속으로 들어가면 어둠도 우리 속으로 들어온다.”는 매케일렙의 고뇌는

니체의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스스로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와 같은 맥락인데

이 두 문장은 이번 작품 속 보슈와 매케일렙의 내면을 잘 함축하고 있는 셈입니다.

 

매케일렙이 보슈를 용의자로 꼽는 과정에서 흥미로운 대목이 등장하는데,

그건 바로 15세기 네덜란드 화가 히에로니무스 보슈의 작품에 관한 묘사들입니다.

이미 그의 그림들을 인터넷에서 찾아본 적이 있는데,

문외한인 탓에 그저 잔혹, 엽기, 흉포함이라는 속된 느낌밖엔 못 받았지만,

지상 세계의 방탕함과 폭력을 끔찍한 디테일로 표현한 그의 그림에 대해

한번쯤은 책으로든 강의로든 자세한 설명을 듣고 싶은 욕심이 들기도 했습니다.

 

또 한 가지 재미있는 건, ‘시인의 주인공 잭 매커보이가 몇몇 장면에 등장하는 점인데,

그는 보슈가 참여한 여배우 교살사건 재판을 취재하면서

보슈는 물론 과거 시인에서 잠깐 만난(것으로 설정된) 매케일렙과도 재회하게 됩니다.

아쉬운 건, 매커보이의 캐릭터가 특종에 목을 맨 삼류 잡지 기자처럼 설정된 탓에

읽는 내내 깐족대고 얄미운, 그래서 한 대 패주고 싶은 나쁜 기자처럼 보인 점입니다.

 

재미 면에서만 보면 전작들에 비해 다소 떨어지는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시리즈를 순서대로 읽어오다 보니

보슈의 내면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던 작가의 의도가 충분히 이해되기도 했습니다.

혼란과 갈등을 겪으며 좌충우돌하던 보슈의 고뇌가 라스트 코요테로 일단락된 뒤

이어진 트렁크 뮤직앤젤스 플라이트가 사건에 집중한 하드보일드 스타일이었기에,

그 다음 작품인 다크니스 모어 댄 나잇에서 이런 이야기를 다루고 싶었던 것 같은데,

모든 건 제 멋대로 추정일 뿐이지만 그런 면에서 제겐 흥미롭게 읽힌 작품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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